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사도행전 연구4
행 4:5-22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 내용 요약
1. 제자들의 체포와 석방
1) 체포 (1-4)
2) 베드로의 답변 (5-12)
3) 산헤드린의 고민 (13-21)
사랑받은 제자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요일 1:1-3)하노라고 기록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우리가 아는바와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전하여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한 계단 한 계단씩 예수를 따른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 길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어떤 요점을 갖게 할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허락을 어떻게 시험하여 보았고 그 허락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하여 아는 바를 증거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 주께서 요구하시는 증거인데, 이런 증거의 부족으로 세상은 멸망해 가고 있다. ─ 시대의 소망, 340(영문).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 사람이 두려워서 바르지 않은 길을 간 적이 있나요?
- 자신이 만나본 사람 중 최고의 권력자는 누구였습니까?
- 좋은 것을 나누어주고 싶어 견디지 못한 적이 있나요?
- 예수님을 담대히 전한 적이 있나요? 왜 그렇게 하였나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 다음의 사람들이 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가르치는 것을 싫어했는지 의논해볼까요?
- 제사장들
- 사두개인들
- 성전 맡은 자(레위인, 성전 경호대장)
※ 산헤드린은 71명으로 구성된 그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 권력 기관이었다. 그해의 대제사장이 의장이 되고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제사장들 (사두개인들), 원로 장로들 (귀족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 71명
- 5~6절의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마26:57, 뒷장 8절 “베드로” 주석참조)
- 베드로의 당당하고 신앙 깊은 모습을 찾아보고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8절)
-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13절)
-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14절)
생각해봅시다.
-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18)는 산헤드린의 요구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19-21)을 깊이 생각하면서 참된 증인의 태도에 대해 말해 봅시다.
장로. 여기에 언급된 무리는 히브리어 즈케님(zeqenim)으로 알려진 자들이 확실하다. 그들은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에 대조되는 평신도 산헤드린 회원을 대표했다.
서기관들. 산헤드린의 세 번째 구성원은 직업적인 법률가요 공인된 율법 해석자인 서기관들로 이뤄졌다(참조 제10권, 62). 자격을 갖추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제시한 새로운 가르침에 분노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참조 마 7:29).
6. 안나스. 셋(Seth)의 아들인 이 사람(요세푸스는 아나누스[Ananus]라고 칭함)은 AD 6년경 로마 총독 구레뇨(Quirinius 또는 Cyrenius)의 임명으로 대제사장이 되었으며, AD 14년경에 퇴진했다(Josephus Antiquities xviii. 2. 1, 2). 그리스도는 처음에 안나스 앞으로 보내졌고(요 18:13), 그 후에 안나스가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냈다. 이는 안나스가 당시 실제로는 대제사장이 아니었지만 유대인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가야바가 안나스의 사위였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특히 이해할 만하다. 두 사람 안나스와 가야바의 직능을 정확히 확인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일단 대제사장직을 맡았던 사람들은 직무를 중단한 후에도 그 직함을 계속 지니는 것이 관례였다. 안나스가 죽을 때까지 그의 아들 중 다섯이 대제사장직을 거쳤다(위의 책 xx. 9. 1). 그러나 AD 66~73년의 전쟁 기간에 폭도들이 성전 안에서 저지른 잔혹한 행위로 인해 그의 노년에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참조 Josephus War iv. 3. 78 [151~157]).
가야바. 가야바는 AD 18년이나 19년경에 임명되어 AD 36년경에 물러났다. 그는 복음서에 정략적이며 편의주의적인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참조 요 18:14; “안나스”에 관한 주석).
요한. AD 70년 성전이 파멸되기까지 40년 동안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전해지는 유대 지도자 요하난(요한) 벤 작카이일 수도 있다. 그는 유대-로마 전쟁 후에 얌니아 회의(참조 제10권, 90)의 발기인 겸 의장이 된 사람이다. 하지만 이렇게 보는 것은 매우 불확실하다. “요나단”이라고 되어 있는 고대의 한 필사본이 시사하는 대로, 이 사람은 가야바 후에 잠깐 대제사장이 되었다가 벨릭스 때(AD 52~60년경) 다시 대제사장이 된 안나스의 아들 요나단일 가능성도 있다.
7. 가운데. 산헤드린은 반원(半圓) 형태로 자리에 앉았다(참조 Mishnah Sanhedrin 4. 3, Soncino ed. of the Talmud, 230). 베드로와 요한은 분명히 중앙에 자리했을 것이다.
8. 베드로. 이 일이 있기 몇 주 전 베드로는 대제사장 관저의 뜰에서 하속과 군인들 앞에서 떨면서 주님을 부인했다. 그러나 그 후 성령이 임하여 그를 “새 사람”으로 변화시켰다(참조 삼상 10:6 주석; 마 10:19, 20). 이제 그는 유대인의 최고 법정에 서서 예의를 갖추되 위축되지 않고 담대하게 말한다. 베드로는 쓰라린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부인한 것을 회개했다(눅 22:54~62). 참된 회개를 나타내는 증거 중 하나는 뉘우친 잘못으로 인해 초래된 악한 결과를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유대인들 앞에서 주님과 그의 사업에 불명예를 가져왔다. 그러나 지금, 바로 그 도성에서, 예수를 정죄하는 일에 관여했던 바로 그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는 한때 자신이 부인했던 구주의 거룩한 사명을 기쁘게 증거했다. 여기서 베드로는 후에 자신이 준 권면 곧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라는 말씀의 효력을 보여 주었다.
11. 돌. 이 성경 구절은 시 118:22을 문자에 매이지 않고 인용한 것이다. 베드로가 말을 건네고 있는 산헤드린 회원들 중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이 말을 인용하여 회의적인 유대인들에게 적용하는 것을 들었다(마 21:42~44). 그들은 영적인 눈이 멀어, 그 당시 예수의 도전과 경고를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 교회를 세우는 자로 부름을 받았으나(참조 행 7:38 주석) 하나님이 모퉁잇돌로 선택한 돌을 거절하였다(참조 엡 2:20). 교회가 “모퉁이의 머릿돌”(벧전 2:6~8)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초석 위에 산 돌들로 지어졌다는 이 동일한 사상은 베드로전서에 지배적으로 나타난 주제 중 하나이다.
12.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육체적 치료는 영혼을 구원하는 예수의 능력에 대한 외적 표시이며, 앉은뱅이도 그 능력을 받았다고 암시했다. 목격자들은 “일어나 걸으라”는 명령으로 이루어진 결과를 보고, 그 동일한 능력으로 영적 구원의 더 큰 축복이 확실히 이르러 올 수 있다고 결론지었을 것이다(참조 마 9:5).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구원은 관원들이 찾고 있다고 고백한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주라는 베드로의 주장은 예수가 친히 자신의 독특성에 대해 주장한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참조 요 3:16; 14:6).
구원을 얻을 만한. 그리스도는,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 한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유일한 길이다(참조 요 14:6; 17:3).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공된 구원의 계획은 (1) 하나님을 도덕적 통치자로 드높이며, (2) 하나님의 율법을 통치 규칙으로 견지하고, (3) 그 계획의 근원의 특징이 하나님의 계시 가운데 나타나 있음을 보여 주며, (4)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인 인간의 필요를 대속(代贖)을 통해 채워준다. 그리스도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다(딤전 2:5).
기탄없이 말함. 헬라어 파레시아(parre-sia). “모든”이라는 의미의 판(pan)과 “말”을 뜻하는 레시스(rhe-sis)에서 유래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말의 거침없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담대함”이라는 뜻이 된다. 이 단어는 교육으로 훈련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거침없고 재치있는 언어 구사를 의미한다. 파레시아는 “드러내 놓고”(막 8:32) 행해진 주님의 가르침의 특징이었다. 이후로 “기탄없음”은, 여기서 베드로와 후에 바울이 보여 준 것처럼 사도들의 사역에 나타난 특징이 되었다(참조 행 28:31; 고후 7:4). 파레시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 대하여 요한이 보여준 확신을 나타낼 때 그가 사용한 특징적인 단어이다(요일 4:17; 5:14).
학문 없는. 헬라어 아그람마토스(agrammatos). “문맹의.” 즉 유대인들의 학문과 전승의 견지에서 “교육받지 못한.” 반면 서기관들은 그람마테이스(grammateis) 즉 “학문 있는 자들”로 알려졌다. 유대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서기관들처럼 교육받지 못한 것을 주목하여 자연스럽게 그처럼 무식한 사람들은 종교 교사가 될 자격이 없다고 결론지었을 것이다.
범인. 헬라어 이디오테스(idio-te-s). “자신의 것”이라는 뜻의 이디오스(idios)에서 파생했다. 여기서 이 단어는 공직에 있는 사람과 대조되는 평민 곧 사인(私人)을 지칭한다. 제자들은 종교 교사로서 인정된 지위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특별한 직위나 직업 혹은 그러한 직업에 요구되는 교양이 없었다. 이디오테스라는 단어는 후에 흥미로운 역사를 갖게 된다. 라틴 사람들은 철자를 거의 바꾸지 않고 이디오테스를 이디오타(idiota)로 재생시켰다. 그것은 이 형태에서 그것에 부여된 무지와 무능을 묘사하는 용어로 현대 유럽 언어에 유입되었다. 이렇게 하여 현재의 영어인 “idiot”(백치)가 되었다. 누가가 이 단어를 사용할 당시 이것은 베드로나 요한이 지능이 결여된 사람들이라는 의미보다는 공적인 사람들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이것이 바로 사도들이 종교 교사의 일을 하려고 했을 때 산헤드린 회원들이 분노한 이유였다.
알고. 즉 “알아보기 시작하고.” 베드로는 이미 산헤드린 앞에서 그의 능력이 나사렛 예수에게서 나왔음을 분명히 했다. 이제 유대 지도자들은 사도들이 정식 훈련을 받지 못했는데도 담대하게 가르치는 원인을 찾다가, 베드로가 말하는 방법이 또한 예수의 방법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병 고치는 그의 능력뿐 아니라, 그의 기별과 그것을 제시하는 방식 모두가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다. 산헤드린 회원들에게는 마치 예수가 두 제자의 모습으로 그들 눈앞에 다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따르는 모든 자는 항상 그래야 한다. 오늘날 주님을 대변하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분명한 확신과 능력은 기도와 명상 그리고 생애의 모든 활동에서 이룬 협력을 통하여 예수와 동행해 왔던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거룩한 주님과 더불어 누린 이런 교제는 측량할 수 없는 특권과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져다 주며, 그리스도의 일을 위한 중대한 책임감을 불러일으킨다.
14.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문자적으로 “반박할 말이 없는지라.” 그 증거를 반박할 수 없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바로 그 당사자가 나음을 입고 그들 앞에 서 있었으므로(참조 16절), 그들이 주님의 부활 사건에서 그랬던 것처럼 속임수라고 비난할 수 없었다. 이어지는 사건들로 판단해 볼 때, 신분이 높은 무리들 가운데는 하나님이 사도들을 통하여 일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 사건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가말리엘이 그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비쳤다(참조 5:34~39).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두려워한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다(39절; 참조 40절).
16. 어떻게 할꼬. 현안은 심의되지 않았다. 산헤드린은 개정 중에 있었고, 따라서 증거에 의해 피고에게 평결을 내려야 했다. 앉은뱅이는 나았고, 산헤드린은 그를 보았다. 치유 사건에서 매개가 되었던 두 사람이 그들 앞에서 판결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산헤드린 회원들은 사법적 직무를 유기하고는, 편의에 따라 어떤 노선을 따라야 할지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절차는 가야바의 특유의 방법이다(참조 요 11:49, 50).
판단하라. 이렇듯 자신들이 무죄하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었지만, 사도들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그 사실을 인정하라고 담대하게 요구했다. 산헤드린이 베드로와 요한을 벌하지 않고 놓아주는 것은 그들이 무죄함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20. 우리는…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헬라어 본문은 대명사 “우리”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들은 예수의 사도로서 그에 대하여 증언하도록 특별히 위임받았다(마 28:19, 20; 행 1:8).
보고 들은 것을. 사도들의 증언은 예수와 함께했던 개인적인 경험에 기초하였다. 여러 해 후에,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이 보낸 편지서들 가운데서 그들이 가르친 진리에 대해 자신들이 목격자라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벧후 1:16~18; 요일 1:1~3).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의 생애에서 그리스도가 함께한 개인적인 경험은 그리스도교 진리의 실재를 보여 주는 가장 설득력있는 증거 중 하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