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의 순교-사도행전 연구 7
행 7:51-60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내용 요약
- 아브라함과의 언약해설 (1-16)
- 모세의 율법 해설 (17-44)
- 형식에 빠져 성령을 거스리지 말라 (44-53)
- 스데반의 죽음 (54-60)
스데반의 순교를 목도한 모든 사람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의 얼굴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인에 대한 기억, 그것을 들었던 그 영혼들을 감명시켰던 그의 말 등은 보는 이들의 마음 속에 간직되어 그가 선포했던 그 진리를 증거하였다. 그의 죽음은 교회에게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으나, 그것은 그의 기억에서 순교자의 신앙과 지조, 그리고 그 용모에 머물러 있었던 영광을 지울 수 없었던 사울의 양심을 일깨우는 결과를 가져왔다.(행적 101p)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 일이 있나요?
- 이가는 버릇이 있나요? 언제 이를 가나요?
- 자신에게 불이익이 있을 것 같더라도 자신의 신앙을 말해야 할 때가 있다면 언제 일까요? (혹은 불이익의 상황에서 자신의 신앙을 밝힌 적이 있나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 스데반의 말을 듣고 공의회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마음의 찔림을 받고 나타난 두 가지 반응에 대해 비교해 봅시다.
① 행 2 :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② 행 7 : 54 (왜 이런 반응이 일어났을까요?) - 대적자들과 대조되는 스데반의 성령 충만한 모습을 살펴봅시다.
①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55절)
※자기를 보는 사람은 자아 충만 때문에 자기문제에 집착합니다. 그는 땅을 보지 않고 하늘을 보았습니다.
②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55절)
※그의 앞에 하늘의 문이 조금 열렸으며, 안을 들여다 보았을 때, 그는 하나님의 궁전의 영광과 그리고 마치 당신의 종을 붙드시고자 방금 그의 보좌에서 일어나 서 계신 듯한 그리스도를 보았다.(행적100p) ③ 성령의 음성을 듣고 대적하는 자들의 모습도 살펴봅시다.(57~58) - 스데반의 기도(59~60)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기도(눅23:34,46)를 비교해 보고, 이 기도의 핵심을 서로 나누어봅시다.
(눅 23:34,46)
34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46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생각해봅시다.
- 순교의 자리에 설 때 나는 스데반처럼 당당하고, 용서하면서 죽을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 지금 나의 삶 속에서 순교자의 삶을 사는 것이란 어떠한 생각과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사는 것일까요?
- 나의 삶이 다른 사람의 양심을 일깨우는 삶이 되고 있나요?
51. 목이 곧고. 스데반의 연설 기조가 갑작스럽게 바뀐 이유는 산헤드린 회원들이 점점 흥분했고 그의 말로 인해 적개심이 치솟았기 때문이다(참조 사도행적, 100; 마 26:65).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다는 것과 더 이상 논한다 해도 그 문제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은 스데반은 엄한 견책의 말을 쏟아냈다. 그가 사용한 형용사들은 옛 이스라엘의 죄들에 대해 사용된 것들이었다. 출 33:3, 5; 34:9의 “목이 곧은”과 레 26:41의 “할례받지 아니한” 등등. “목이 곧은”은 고집 센 황소에 대하여 사용되었다(참조 출 32:8 주석). “마음에…할례받지 아니한”이란 구절은 실제로 에스겔이 “이방인”에게 사용했다(44:7). 스데반이 그들의 성전 숭배가 너무 극단적이고 또 무익하다고 말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그는 그들을 이방인의 부류에 넣었다. 이 격노한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큰 모욕적인 언사는 없었을 것이다.
항상 성령을 거스려. 정확한 역사적 요약인데, 이는 그들의 조상들이 순종하지 않았던 모세의 시대로부터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았던 예수 그리스도 때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령을 거스렸기 때문이다. “거스려”에 해당하는 헬라어(안티핍토[antipipto-〕)는 적극적이고 줄기찬 반대를 의미한다.
52. 선지자 중에 누구를. 여기에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이 다시 메아리되어 울려 퍼지고 있다(마 5:12; 눅 11:47; 13:34). 선지자에 대한 이러한 핍박의 역사는 마 5:12; 23:37 주석을 참조하라(참조 대하 36:16 주석; 살전 2:15).
의인. “의로운 사람.” 이 존귀한 칭호는 3:14과 22:14에도 사용되었다. 이미 이 이름은 유대 문헌에서 고대하던 메시야에게 적용되어 왔으며(에녹서 38:2), 사 11:4, 5에 암시되어 있을 수 있다. 빌라도의 아내가 예수를 지칭하면서 이렇게 묘사하였다(마 27:19). 초기교회는 그 이름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며, 그렇게 사용한 예는 요일 2:1에서 볼 수 있다. “의로우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여기 “의인”에 대해서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이다. 악인으로 정죄를 당하였던 그리스도는 “의인”으로서 모든 사람들과 구분되었다. 이 동일한 의를 나누어 줌으로써, 스데반은 사악한 분노 가운데서 그를 처형하려는 사람들과 크게 대조된다.
예고한. 정확히 말해서 “…가 된.”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 주는 자들의 얼굴에서 곧 닥칠 운명을 읽은 스데반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에게 행한 그들의 이전 행동을 상기시켜 준다.
53. 천사의 전한. 문자적으로 “천사의 포고로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분은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었다(참조 출 20:2 주석). 그분은 언약의 천사였다(참조 출 23:20 주석). 그러나 천사의 무리가 시내산에서 여호와와 함께 있었다(참조 신 33:2; 시 68:17; 갈 3:19; 히 2:2 주석). 신 33:2이 「70인역」에는 “그의 오른쪽에 천사들이 있고”라고 되어 있으며, 요세푸스(Antiquities xv. 5. 3)도 동일하게 생각한다.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이 말씀은 앞의 구절, “너희가…율법을 받고도”와 극적인 대조를 이루며, 그 말을 들은 자들에게 호된 일격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율법의 자구(字句)도, 그 취지도 지키지 않았다. 천사에게 받은 율법은 그들의 영광이 될 수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율법에 대한 곡해와 악용은 수치와 멸망을 재촉하였다.
54. 저희가…듣고. 정확히 말해서 “이제 그들이 듣고 있을 때에.”
마음에 찔려. 참조 5:33 주석. 이 말은 2:37의 “마음에 찔려”보다 더 에는 고통을 기술하고 있으며, 이제 그것은 회개가 아니라 맹렬한 분노를 낳았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이 비유적 표현은 드물지 않다(마 8:12; 13:42). 그러나 그것은 외적으로 표현된 사실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유대인들은 분노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화가 나서 말문이 막힌 그들은 마치 짐승이 먹이를 이빨로 물어뜯듯이 그를 갈기갈기 찢기를 원했다.
55. 스데반이. 미쳐 날뛰는 그의 적대자들과 완전히 대조적임을 가리킴.
충만하여. 갑작스런 영감이 아니라 계속된 경험을 암시함. 시작 때에 그러했던 것처럼(6:5) 끝에도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였다.
하늘. 스데반은 “하늘이 열리”(참조 행 7:56; 사 6:1 주석)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열린 하늘의 영광을 본 구경꾼들은 아무도 없었으며, 이 영광을 보았다는 스데반의 진술은 그의 죄책을 더욱 무겁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이 영적 눈으로 본 것인지, 아니면 육체적 감각의 확장을 통해서인지는 오로지 선지자들만이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참조 마 3:16; 고후 12:1~6).
하나님의 영광…보고. 창 3:24; 출 13:21; 요 1:14; 행 7:2 주석과 비교하라. 스데반의 설교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여 그의 마음을 비추는 거룩한 영광에 대한 계시를 보고함으로써 끝마친다. 그는 매우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저 영광을 응시했다. 그는 그 순간의 치명적 위험도 잊고 하늘의 장면에 온전히 정신을 집중했다.
예수께서…서신. 그리스도는 통상적으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으로 묘사되었다.
하나님 우편. 참조 마 26:64 주석.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을 보고 나서 이 신실한,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이 힘을 얻었다.
56. 인자. 복음서를 제외하고 신약에서 이 낱말은 여기와 계 1:13; 14:14에만 나온다. 스데반은 주님의 입술로부터 이 칭호를 직접 들었든지 아니면 초기교회에서 배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설교는 어떤 복음서도 쓰여지기 이전에 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산헤드린 회원들은 그리스도가 친히 그들 앞에서 심문당할 때에 사용한 이 구절을 기억했을 것이다(마 26:64). 그들은 그때 주님의 주장이 신성모독이라며 정죄하였다. 이 칭호에 대한 언급은 막 2:10 주석을 참조하라.
57. 저희가…지르며. 정확히 말해서 “그러나 그들이 소리지르며.” 즉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가운데서 그의 말을 듣고 죄를 깨닫는 대신 스데반을 침묵시키려고 시도하면서.
(귀를) 막고. 헬라어 쉬네코(sunecho-). “누르다”, “감싸 잡다.” 그들은 스데반의 말을 신성모독으로 여기고 더 이상 듣기를 원치 않았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51절에 주어진 자신들이 묘사를 받아 마땅함을 입증하였다. 스데반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신성모독자였다.
그에게 달려들어. 정확히 말해서 “그에게 일제히 달려들어.” 사단은 사람에게 사형 선고를 내릴 때 율법이 요구하는 그런 종류의 일치(신 13:9, 10)를 산헤드린에서 이루어냈다. 그들은 공식적 판결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와 결정에서 만장일치를 보였다. 이처럼 약식 재판 절차의 사법적인 측면들을 보려면 마 26:59 주석을 참조하라.
58. 성 밖에 내치고. 레 24:14에 따르면, 돌에 맞을 사람은 반드시 진영 바깥으로 데려가야 했는데, 스데반 당시에는 예루살렘 성 바깥을 의미했다.
돌로 칠새. 문자적으로 “그에게 돌을 던지고 있을 때.” 마치 처형의 행위가 마치 그 순교자가 기도하는 중에 진행된 것처럼 보인다(59, 60절). 돌로 치는 것은 모세의 율법 아래서는 신성모독죄에 대한 처형 방법이었다(참조 레 24:14~16; 요 8:7 주석). 하지만 산헤드린이 아무리 이 법을 면밀하게 따른다하더라도, 로마의 지배 아래서 그들은 특별히 스데반이 로마 시민권자라면(참조 행 6:5 주석) 그를 사형에 처할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그러나 그저 침묵을 지키도록 로마의 관리들을 뇌물로 매수할 수 있었다(사도행적, 98, 101,). 여전히 총독이었던 빌라도(참조 제10권, 74~77)가 당시 도성 밖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심문하면서 굴욕적인 경험을 한 후에는 스데반에 대한 공격에 개입하려 하지 않았을 개연성이 높다.
옷을 벗어. 율법은 고발자가 먼저 사형의 돌을 던지도록 요구하였다(참조 신 17:7; 요 8:7 주석). 겉옷으로 입은 헐겁게 늘어진 옷은 사형 집행자들이 팔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을 방해했을 것이기 때문에 벗어서 옆에 두었다(참조 행 22:20).
59. 저희가 돌로…치니. 정확히 말해서 “저희가 돌로 치고 있을 때에.” 스데반은 돌에 맞는 동안 기도하였다.
스데반이 부르짖어. 스데반이 방금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본 주 예수께 요청했다는 것을 이 기도 자체가 보여 준다(56절).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참조 마 27:50; 눅 8:55; 행 7:60 주석. 예수께서 돌아가시면서 드린 이와 유사한 기도를 누가가 어떻게 기록하는지 주목하라(눅 23:46).
60. 무릎을 꿇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본 적 있는 그분에게 기도하면서 그리고 그분을 숭경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다. 물론 그가 돌에 맞아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는 데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긴 하지만.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은 그를 핍박하는 자들의 과거의 죄에 관해서는 어떻게 해볼 일이 없었지만, 그들의 현재의 죄에 대한 용서를 요청할 개인적 권리가 있었다. 그들을 위해 간청하는 태도를 통해서 그는 그의 주님을 특징지었던 저 용서의 정신을 얼마나 온전히 습득했는지 드러내 보였다(참조 눅 23:34).
자니라. 참조 막 5:39; 요 11:11 주석. 자신을 변호하는 전체 시간 동안 스데반이 보인 행동은 그를 고발한 자들의 행동과 현저하게 대조된다. 그들은 복수에 목말라 격분으로 충만했지만, 그는 그리스도께서 재판정에서 나타내셨던 것과 같은 침착함과 평온함을 유지한다. 이제 누가는 순교자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면서 “(그가) 자니라”고 하는 마지막 구절로 거룩한 분위기를 보존한다. 이제 투쟁은 끝났고, 그는 승리를 얻었다. 하나님의 신실한 용사는 그 소동을 떠나 부활의 날까지 조용히 잠들어 있다. 이어지는 장들은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