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회심 - 사도행전 연구9
행 9:1-31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침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내용 요약
- 박해자-다소 사람 사울, 9:1, 2
- 사울이 환상 중에 그리스도를 만남과 그에 따른 회심, 9:3~17
- 그의 침례와 첫 전도, 9:18~22
- 그를 죽이려는 유대인의 음모, 9:23, 24
배경
8장에서 복음이 사마리아로 전파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9장에서는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데 쓰임을 받을 사도바울을 준비하신다. 바울의 회개는 개인의 구원차원을 넘어 교회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9장의 내용은 바울의 회심과 중풍병자를 고치고 도르가를 살려 내는 베드로의 활동이다.
하늘의 빛이 비추이고 있는 그 시간, 사울의 마음은 놀랍도록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는 성경의 예언을 깨달았다. 그는 유대인들에 의한 예수의 거절, 그의 십자가의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선지자들이 이미 예언하였고, 그분이 약속된 메시야임을 증명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울의 마음에는 순교할 때의 스데반의 설교가 힘있게 떠올랐으며, 순교자가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말하였을 때, 순교자는 실제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음을 깨달았다(행 7:56, 55).(행적, 113p)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 있다면?(물건, 색깔, 캐릭터등)
- 그릇된 열성으로 일을 망친 것을 본 적이나 경험한 적이 있나요?
- 부모님을 가장 고통스럽게 한 일이 있다면 어떤 일인가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 바울이란 인물에 대해 알아봅시다.
- 그는 철저하게 유대인이었다.
(빌 3:4-6, 개정)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 그는 철저하게 이방적 (헬라적)인 배경에서 살았다.
(행 22:27,28, 개정)
[27]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28]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 바울의 가정 - 아마도 부유하고 경건한 가정이었을 것이다.
(행 24:26, 개정)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 바울의 교육
(행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 그는 철저하게 유대인이었다.
- 정당화시키려는 공적인 힘(공문)과 그릇된 열성의 위험에 대하여 이야기해봅시다.(9:2)
- 자신의 삶에 바울처럼 주님을 만난 영적인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9:3-10)
어둠 속에 있던 그에게 한 빛이 비칠 때는 정오(22:6)였다.
그 빛은 태양 빛보다 더 밝은 빛(26:13)이어서 그는 눈이 멀었다.
그 빛은 참빛이신 그리스도이셨다. (요1:9) 이때 눈이 상한 것이 일생동안의 지병이 되었으며 (갈 4:13-15, 6:11) 또 육체의 가시(고후 12:7)가 되었다고 한다. - 주께서 말씀하신 바울의 사명은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졌습니까?(9:15)
그릇은 인상적인 표현이다. 주인이 쓸 수 있는 그릇은 비어 있어야 한다. 비어있지 않은 그릇은 쓸모가 없다.
생각해봅시다.
- 주님의 그릇이 되기 위해 내가 비워야 할 것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 나에게 주어진 복음 사명이 있다면?
공포에 사로잡히고 강렬한 빛으로 거의 눈이 먼 사울의 동료들은 어떤 음성은 들었으나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울은 들은 말을 깨달았으며, 그에게 말씀하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이 그에게 분명하게 나타났다. 사울은 그의 앞에 서신 영광스러운 분에게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분을 보았다. 그 상처받은 유대인의 영혼 위에 구주의 얼굴 모습이 영원히 인각되었다. 그분의 말씀은 놀라운 힘으로 그의 마음을 찔렀다. 그의 어두운 마음 구석에 큰 빛이 비쳐 들어와 과거 생애의 무지와 과오, 그리고 현재 성령의 교화하심의 필요를 깨닫게 하였다.(행적 113p)
1. 등등하여. 헬라어 엠프네오(empneo-). “숨을 들이쉬다” 또는 “입김을 내뿜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고 학살하는 것은 사울이 호흡하는 공기나 다름없었다. 셈족은 종종 분노의 감정을 호흡과 결부시켰다.
대제사장. 안나스 혹은 가야바(참조 4:6 주석). 두 사람 다 사두개인이었지만, 사울은 엄격한 바리새인인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26:5). 하지만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자연스럽지 못한 동맹(참조 제10권, 56~58)도 이 단호한 박해자를 단념시키지는 못하였다. 전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항하여 형성되었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간의 제휴는 그분의 추종자들에 대항하여 다시 이루어졌다.
2. 다메섹.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 전승에 따르면 이곳은 아벨이 살해된 현장이다. 요세푸스(Antiquities ⅰ. 6. 4 [145])는 셈의 손자인 우스가 이 성읍을 건설했다고 여긴다(참조 제1권, 248). 아브라함의 역사에서는 그의 청지기 엘리에셀의 출생지로 나타난다(창 15:2). 다윗은 이곳에 수비대를 두었으나(삼하 8:6), 르손의 지배 아래 솔로몬 반대 세력의 중심지가 되었다(왕상 11:23~25).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문둥병자 아람(수리아)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눈에 이스라엘의 어느 강보다 좋아 보였다(왕하 5:12). 이곳은 아람 왕국과 이스라엘 및 유대와의 동맹과 전쟁의 중심지였고(왕하 14:28; 16:9, 10; 암 1:3, 5), 에스겔의 기록에 따르면, 두로와 물품, 포도주, 흰 양털을 무역하였다(겔 27:16, 18). BC 333년에 마게도냐 장군 파르메니온(Parmenion)이 알렉산더 대왕을 위해 이 도성을 점령했으며, BC 64년에는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Pompey)가 점령했다. 사울의 회심 당시 이곳은 로마의 수리아(Syria) 총독 비텔리우스(Vitellius)의 관할 아래 있었다. AD 37년 디베료(Tiberius)가 죽었을 때, 비텔리우스는 서둘러 로마로 갔고, 나바태아인(Nabataeans)의 왕 아레타 Ⅳ세(Aretas Ⅳ)가 다메섹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그곳을 다스렸다. 이로 인해 사울은 이 도성에서 빠져나갈 당시 문제에 봉착하였다(고후 11:32).
(1)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유대 지방에서 상당한 거리에 있는 이곳으로 피난했다.
(2) 다메섹의 시민 가운데 그리스도인 회심자들이 있었다.
(3) 다메섹이 확장 일로에 있는 교회의 외곽 중심지가 되었을 수도 있다.
(4) 사울이 유대 당국자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리스도인을 대항하는 데 그들의 협력에 의존할 수 있었다.
회당. 이곳은 국제적인 도성이었고, 따라서 각 나라에서 온 유대인들이 살았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처럼(참조 6:9 주석) 유대 동족들은 자신들의 회당을 세웠을 것이다. 당시 다메섹에는 30개 내지 40개의 회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은 회당에 신실하게 참석하고 있었고, 따라서 사울이 바로 그들을 잡으러 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공문. 사울의 “권세와 위임”(26:12)을 정한 문서들. 이는 로마가 도주한 유대인들을 송환하는 권력을 대제사장에게 부여함으로써 유대 당국자들과 협력했음을 드러낸다. 이 권세는 아마도 BC 56년경부터 주어졌을 것이다(Josephus Antiquities xiv. 8. 5 [146~ 148]; 참조 마카베오1서 15:15~24).
3. 비추는지라. 더 정확히 말해 “번쩍였다.”22:6과 26:13은 이 시각이 정오라고 밝히고 있다. 동방의 한낮의 태양 광선도 눈부셨지만, 후에 바울은 하늘로부터 온 그 빛을 “해보다 더 밝은 빛”(참조 26:13 주석)이었다고 말한다. 이 광채 가운데서 바울은 영광스럽게 된 그리스도를 너무도 선명하게 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 후 주님을 바라보는 특권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자신을 포함시킨다(행 9:17; 고전 9:1; 15:8; 사도행적, 115). 출현한 모양에 대해 말하자면, 스데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참조 7:55, 56 주석).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라고 한 순교자 스데반의 말은 불 같은 열성을 지닌 바리새인인 사울에게는 신성모독처럼 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 사울이 성부의 영광 중에 있는 인자를 본 것이다. 사울의 동행자들은 음성을 들었으나 말소리를 분별하지는 못했다(참조 22:9; 참조 9:7 주석). 그들은 빛을 보았으나(22:9), 말하는 그분의 형상을 감지하지는 못했다(참조 12:29 주석). 이런 세부 사항들은 사건의 실재성을 증명한다.
4. 엎드러져. 하늘에서 비친 빛에 압도되어 여행자들은 모두 땅에 엎드러졌지만(26:14), 누가는 여기서 사울만 언급한다. 여행자들 중 그 누구도 말 위에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들으매. 9:7과 22:9의 비교는 사울이 그에게 말한 목소리를 듣고 이해한 반면, 그의 일행은 무슨 말이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소리만 들었음을 시사한다(참조 9:7 주석).
사울. 지금까지 기사에서는 사울의 이름이 헬라어 형태인 사울로스(Saulos)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곳과 9:17; 22:7, 13; 26:14에서는 히브리어 형태인 사울(Saoul)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1) 26:14에 나타난 대로 히브리(아람) 방언으로 말했던 예수(참조 제1권, 30)와 (2) 유대인이기 때문에 히브리어(아람어)로 말했을 아나니아가 실제로 사용한 단어가 무엇인지를 반영할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전달할 때 이름을 반복하여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창 22:11; 삼상 3:10; 마 23:37; 눅 10:41; 22:31을 참조하라.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리스도가 박해자에게 던진 통렬한 질문이다. 이것은 그의 행동의 기초에 도전하는 질문이며, 따라서 그가 그렇게도 잔혹하게 핍박했던 분을 알지 못했음을 드러냈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제자들과 너무나 동일시한 나머지 그들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이 된다고 한 사실을 주목하라(사도행적, 117).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사 63:9)하며,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슥 2:8)으로 여겨졌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행한 것을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여겼다(마 10:40).
5. 주여 뉘시오니이까. 아직 사울은 “주”라는 단어를 신약에 나타난 온전한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경외심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발언이었다(참조 요 1:38 주석). 하지만 사울은 신적 존재를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하고 “주”라는 말을 사용하여 경외심을 표했다.
네가 핍박하는. 앞에 나온 “나”라는 대명사와 마찬가지로 “네”도 헬라어 구문상 강조하는 표현이다. 사랑과 능력과 영광으로 옷 입혀진 그리스도와, 핍박하는 자였으나 이제는 엎드려 두려워하는 사울이 극명하게 대조되어 있다.
7. 소리만 듣고. 헬라어 아쿠온테스…테스 포네스(akouontes…te-s pho-ne-s). 얼른 보기에 이 진술은 동행자들이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텐…포넨 우크 에쿠산[te-n…pho-ne-n ouk e-kousan])라고 바울이 말한 22:9의 기록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기록을 주의깊이 연구해 보면 이런 외관상의 모순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듣다”라는 뜻의 동사 아쿠오(akouo-)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의 능력(참조 마 11:15; 13:15)이나, 들은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참조 막 4:33; 고전 14:2)을 가리킨다. 본 구절에서 “소리”(포네스[pho-ne-s])라고 번역된 단어는 소유격이다. 헬라어에서 이것은 사울의 동행자들이 목소리만 듣고, 말해진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음을 가리킨다. 22:9에서 “소리”(포넨[pho-ne-n])로 번역된 단어는 대격이며, 따라서 이것은 부정어 “못하다”와 함께 사용되어 그들이 소리를 듣고도 말은 뚜렷하게 이해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참조 9:4. 여기서 누가는 알아들은 사울에 대해 말하면서 대격을 사용하여, “[소리를]…들으매”[에쿠센 포넨]라고 말한다). 이 설명은, 22:9에도 사람들이 “빛은 보”았다고 되어 있는 반면, 본 구절에는 그들이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라고 되어 있는 사실로 더욱 뒷받침된다. 그들은 눈부신 빛을 보았지만, 그들의 시력은 빛 가운데서 사울에게 나타난 그분을 식별할 정도로 명확하지 못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목소리는 들었지만, 알아들을 정도로 명확히 듣지 못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10. 아나니아. 아나니아는 유대인들에게 흔한 이름이었다. 바울이 그를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다메섹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이”라고 묘사한 22:12을 제외하고는, 성경에서 이 특정 제자를 언급한 곳은 아무데도 없다. 이런 자질로 인해 그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지도자와 사울을 향한 주님의 사자가 되는 일이 가능하였다.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그리스도의 지상 봉사 기간에 구세주를 따랐거나, 오순절이나 그 이후 유대인 회심자들 중에 속해 있었을 것이다. 그런 뒤 스데반의 죽음 후에 이어졌던 박해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도망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단지 추측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나니아가 사울을 방문하기를 꺼려하는 심정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 표현으로 보아(9:13, 14), 여전히 예루살렘과 신뢰할 만한 교신을 왕래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박해자 사울이 일으켰던 만행과 다메섹에 온 그의 목적을 아나니아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1. 직가. 오늘날 술타니예(Sultaniyeh)라고 알려진 긴 직선 도로가 여전히 고도(古都) 다메섹을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고 있는데, 아나니아가 유다의 집에서 사울을 만나기 위해 걸었던 바로 그 길일 것이다. 현재 거리의 고도(高度)가 사울 당시보다 약 30보 이상 높으므로, 사울이 머물렀던 집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소 사람 사울. 이 구절은 성경에서 사도 바울의 출생지를 처음 언급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다소는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중요한 곳으로 여겨졌다. 이곳은 16킬로미터가량 내륙에 위치했지만, 도성과 바다 사이에 안전한 항구가 있었기 때문에 작은 배가 이 성읍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도성의 경계 너머로 타우루스(Taurus) 산지가 솟아 있었는데, 길리기아 문(Cilician Gates)으로 알려진 협곡을 통해 소아시아 내륙으로 통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고대 도성은 전략적 요충지 말고 다른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곳은 대학가로 이름이 나있었고, 소아시아의 아덴(Athens of Asia Minor)으로도 알려졌다. 이곳의 학자들은 과학 기술로 인해 존경받았고, 이곳의 철학자들 중에는 사울의 견해에 일부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는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들도 있었다. 상업 영역에서 볼 때, 사울의 생업이었던 장막 제조업(18:3)이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15.이방인. 목록 가운데 이방인이 첫 번째에 놓인 이유는 사울이 노고를 쏟을 분야가 특별히 그들 가운데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참조 롬 1:13, 14; 11:13 주석). 이것은 독실한 유대인으로서 온 세상이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야만 한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 아나니아에게는 깜짝 놀랄 계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대단한 박해자로만 알았던 사람 안에서, 선택받고 훈련받아 세상 도처에 복음을 퍼뜨리는 사역에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적합해진 사람을 보고 있다.
임금들. 이 구절은 바울이 아그립바 앞(26:1, 2)과 아마도 네로 앞에서 연설한 것(참조 딤후 4:16 주석)에서 충분히 성취되었지만, 꼭 그 일들만 가리키지는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 사도는 이방인들에게 가지만, 바울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유대인들에게도 설교하였다(참조 13:5; 14:1; 17:1, 10; 18:4, 19; 19:8).
그릇. 헬라어 스큐오스(skeuos). “그릇”, “기구.” 이 단어는 신약에서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참조 13:48; 눅 8:16; 요 19:29; 행 10:11; 롬 9:21; 고후 4:7; 살전 4:4). 고전 작가들은 이 단어를 쓸모 있고 신뢰할 만한 노예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 주님이 이방인을 위한 당신의 은혜로운 뜻을 실현할 도구로서 사울에게 스큐오스라는 단어를 적용한 것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택한”(chosen)에 해당하는 에클로게(ekloge-)라는 단어가 신약에서 처음으로 여기에 나타나는데, 다른 경우에는 모두 “택하심”(election)으로 번역되었다.
18. 비늘. 헬라어 레피데스(lepides). 히포크라테스는 안질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로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사울의 눈멂은 초자연적 현시의 결과로 생겼으므로, 그의 병을 현대 의학 용어로 정확하게 밝히려고 시도하는 일은 무익하다. 그러나 누가가 사울의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의학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이해할 만하다.
침례를 받고. 22:16에 있는 자세한 설명은 아나니아가 이 예식에 임하도록 사울에게 권고했음을 보여 준다. 침례가 입교 조건으로 여겨졌음이 분명하다(참조 마 3:6; 행 22:16 주석). 주님의 환상과 계시도, 개인적인 확신의 강렬함도 사울에게서 침례를 면제시켜 주지는 않았다. 침례는 아마도 나아만의 이야기(왕하 5:8~14)에서 언급된 아마나 또는 바르발강 중 한 곳에서 행해졌을 것이다. 이 예식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사도행적, 122) 아나니아가 거행하였다.
20. 즉시로. 그리스도는 사울을 “즉시” 낫게 했고(18절), 사울은 “즉시로” 증거하기 시작했다. 두 경우에 사용된 부사는 동일한 헬라어 단어에서 나왔다.
예수…전파하니. 나사렛 예수가 오랫동안 고대하던 메시야인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것이 유대인들을 향해 사도들이 전한 기별의 요지였다. 베드로의 설교(참조 2:16 주석)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설교에도 강력한 예언적 배경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사도행적, 123, 125,).
22. 힘. 후년에 이 단어는 바울의 사상에서 현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그는 “약한 데서 온전하”게 했던 “능력”이 그리스도였음을(고후 12:9), 그를 “능하게 하신” 또는 사역을 위해 그를 강하게 하신 이가 그리스도였음을(딤전 1:12) 그리고 그의 삶의 마지막 시련들 속에서 “강건케 하신” 이가 그리스도였음을(딤후 4:17) 깨달았다.
증명하여. 헬라어 쉼비바조(sumbibazo-). “결합하다”, “결론적으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연합하도록 하다”라는 뜻이 있으며, 따라서 여기서는 “논증하다”, “증명하다”를 뜻한다. 사울은 메시야의 예언들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능수능란하게 설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