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총회-사도행전 연구15
행 15:1-41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23]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25]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26] (25절에 포함됨)
[27]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30]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31]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내용 요약
- 문제의 발단 (1-5)
- 예루살렘 총회 (6-29)
- 총회 결정사항의 전달 (30-41)
배 경
바울과 바나바의 제1차 전도여행이 성공을 거두고 이방의 지역에 여기저기 교회가 세워지자 필연적으로 문제가 발생했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이 강했으며 구원받기 위해서는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무수하게 개종해 들어온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 준수와 할례를 요구했다. 그것은 바울의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일대 위기에 직면했다.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총회가 열렸는데 총회는 오직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공식 확정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통해 이 교리는 확고한 체계를 이루게 되었다. 이 15장의 회의야말로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의 회의이며 가장 중요한 회의였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10:15) 이 기별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모두 받아들이시고 인정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었다.(행적 186 p)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 우리사회에 편견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 우리 대학선교센터교회만의 문화가 있다면? 그 문화는 새로운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 무거운 짐(육체적, 정신적)을 다른 사람에게 넘긴 적이 있나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 발전하는 안디옥 교회에 무슨 문제가 일어났습니까? (15:1,2)
- 어떤 사람들은 누구겠습니까? (행 6:7 참고)
-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누가 예루살렘으로 파송되었습니까? 왜 그들이 적격자입니까? (15:2)
- 베드로의 발언 내용을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15:7-11)
- 야고보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15:19-21)
- 마가(Mark)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봅시다.
① 가족관계 (행 12:12)
② 원래이름 (행 12:12)
③ 바나바와의 관계 (골 4:10)
④ 바울과의 관계 (행 15:38, 골4:10, 딤후 4:11)
⑤ 베드로와의 관계 (벧전 5:13)
⑥ 마가복음에 나온 마가 (막 14:51)
생각해봅시다.
- 우리는 교회가 내린 결정에 대하여 잘 따릅니까? 그것은 교회의 화평과 발전에 도움이 되나요?
- 우리에게도 마가와 닮은 꼴이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 마가에 대한 바울과 바나바의 입장 차이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사명중심vs관계중심)
바울은 직접적인 지도를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향하는 반면, 항상 교회의 교제를 통해 연합을 이룬 신도들의 몸, 즉 교회에 부여된 권위를 인정하였다. 그는 자문이 필요함을 느꼈고, 중대한 문제가 일어났을 때에는 이것들을 교회 앞에 제출하여 형제들과 연합하여 하나님께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지혜를 간구하기를 기뻐하였다.(행적200p)
1. 어떤 사람들. 이곳에 와서 분쟁을 일으킨 이들의 이름은 명시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된 바리새인들로 보인다(참조 5절).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참조 7:8 주석. 이 요구는, 성경 다른 곳에 분명하게 진술되지 않은 사실 즉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의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요구하지 않았음을 입증한다. 그리스도 교회에서 일어난 최초의 중대한 논쟁에 관한 이야기가 여기서 시작된다. 이것은 그리스도 교회가 팔레스타인 지경을 넘어 확산되자마자 야기된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도 교회로 처음 개종한 이들은 유대인이었으나, 그들은 자신이 지켜온 대부분의 종교적인 관례와 편견을 여전히 간직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먼저 유대교로 확실히 개종하지 않은 채 그리스도 교회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충격을 받았다. 고넬료의 회심이나 심지어 에디오피아인과 사마리아인들의 회심 사건으로 이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지금 반대를 제기한 그들도 고넬료와 그의 가속(家屬)이 입교하는 것을 기꺼이 수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마도 고넬료의 경우에는 성령의 지시로 인해 예외가 발생했기 때문에 이것으로 할례의 규정을 무효화할 수는 없다고 논박했을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분명한 인도로 침례을 받고 입교한 자들이라 해도 이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이 선동자들은 안디옥에 와서 자신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의장인 야고보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들에게 그런 일을 위임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혔다(24절). 하지만 야고보가 그의 개인의 삶에서 유대의 의식과 관습에 집착하는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에(참조 갈 2:12), 그들은 야고보의 가르침과 자신들의 가르침을 동일시해도 괜찮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할례가 율법의 일부이기 때문에 소홀히 여겨지거나 거부된다면 이는 모든 율법이 파기된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율법의 올바른 관계를 인정할 준비도, 또 그렇게 할 마음도 없었다. 유대화주의자들이 안디옥에서 한 문제를 부각시켰는데, 이 문제가 바울의 사역 기간 내내 계속적인 불화의 원인이었고, 신약의 대부분과 심지어 사도시대 이후의 그리스도교 문학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주께서 왜 지상 봉사 기간에 이와 같은 문제들을 예견하지 못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분이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으나, 진정한 종교는 외적인 준수가 아닌 마음의 종교이어야 한다는 사실에 전반적인 강조점을 두었다. 그리스도는 광범위한 기초를 놓았고 세부적인 교리보다는 오히려 원칙들을 밝혔다. 교회가 성령에 의해 한 걸음씩 온전한 진리로 인도받아야 했다(요 16:13). 이것은 교회가 권위적인 전통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새로운 빛을 발견하여 경험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 교회는 새로운 발전에 직면하여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했지만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사례들을 변경함으로써 이루어질 것은 아니었다(롬 15:4). 새로운 빛은 예상치 못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성경 진리에 대한 더 많은 연구와 성경적 원칙들을 교회 사업에 적용함으로써 이르러 온다.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었다. 오래된 관례라는 근거로 또는 교인이 되는 조건으로 할례를 이방인들에게 요구할 수는 없었다. 유대화주의자들은 할례를 구원의 필수적인 단계로 제시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셨는데(14:27), 그것은 의문(儀文)에 속한 규례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음을 입증해 주는 진전이었다.
2. 바울과 바나바. 유대화주의자들이 이 요구를 통해, 이 두 선교사가 길리기아와 이곳 안디옥에서 그리고 그들의 첫 번째 선교여행에서 이룬 일 즉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승리로 밖에 해석할 수 없었던 그런 사업에 대해 노골적인 비난을 나타낸 점에 비춰볼 때, 바울과 바나바가 이 논쟁의 중심 표적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선포하였다. 이제 그들은 개심자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외적인 의식들을 행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을 잠잠히 방관할 수 없었다.
다툼. 헬라어 스타시스(stasis). “지위”, “당파” 또는 “파벌”을 뜻한다. 막 15:7과 눅 23:19에서, 바라바가 주모자가 되었던 민란을 가리키는 데 이 말이 사용되었다. 본 절에서 이 단어는 격렬한 변론을 묘사한다.
변론. 헬라어 제테시스(ze-te-sis). “찾는 것”, 따라서 “질문”, “토론”을 의미한다.
바울과 바나바. 복음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주장하는 대표자로, 이방인들 사이에서 벌써부터 성공적으로 일해 온 이 두 사람보다 더 나은 대표자는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몇 사람을. 이들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들은 안디옥에 있는 선지자들 중의 몇이거나(13:1), 이방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진, 구브로와 구레네에서 온 자들(11:20)일 수 있다. 아마도 성령이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하신 일에 대한 하나의 주목할 만한 본보기가 되었을 디도가 동행했다(갈 2:1).
사도와 장로들. 베드로와 요한과 주의 형제 야고보가 예루살렘에 있었다(참조 갈 2:9; 1:19). 이들은 장로들(참조 행 11:30 주석), 구체적으로 이름이 명시되지 않은 다른 사도들과 함께 이 젊은 교회의 지도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교회가 할례와 같은 어려운 문제를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의 총회에 위임한 사실은 교회 조직을 지지하는 매우 의미 있는 선례이다. 이것은 교회의 제반 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을 전제 군주 같은 역할을 하는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론과 반대된다. 또한 거론된 문제가 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칠 때는, 해당 지역 교회보다 더 넓은 차원의 조언과 권위의 필요성을 예시한다. 신약 시대의 교회에서는 예루살렘의 초기 회중에 속한 사도들과 직원들이 자연스럽게 상소 위원단을 구성하였다. 동시에 본 장의 후반부(15:22, 25)에 명시된 것처럼, 이 사건의 최종 결정은 단지 예루살렘에 있는 지도자들의 결정에 의거해서가 아니라, 이 사건을 호소하러 안디옥에서 올라온 대표자들을 포함한 참석자 전원의 합의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그들의 문제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감으로써,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안디옥 교회 전체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통한 성령의 인도에 대해 확신을 나타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계시를 인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고 선언한다(갈 2:2). 참조 사도행적, 96.
3.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 이것은 바울이 중시여기는 주제가 될 수밖에 없다. 틀림없이 그는 많은 사례를 상세하게 말했으며, 베드로가 고넬료의 경우에서 한 것처럼, 할례받지 않은 자를 수용한 것에 대해 성령이 승인의 표를 날인했음을 강조했다.
형제들을 다. 11:2~4, 18과 비교하라.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가 가져온 좋은 소식에 기뻐했다. 이방인에게도 할례를 강요한 자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 가운데 한 무리에 불과했고,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라고 기술된다(15:5). 바리새인들은 의식법(儀式法)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여기서 사용된 동사의 형태로 볼 때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동안 이방인의 회심 소식이 연거푸 기쁨으로 환영받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베니게와 사마리아 교회의 이러한 태도는, 예루살렘 교회의 편협하고 신랄한 바리새인(5절)과 그것을 위해 대변하려 했던 유대화주의 당파와는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4.말하매. 6절과 비교해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 활동에 대해 보고했던 예비 모임이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듯하다. 이것이 아마도 바울이 나중에 언급한 “유명한 자들”과 “사사로이” 만난 그 모임이다(갈 2:2). 이방인 개종자들의 순결과 사랑뿐 아니라 그들의 행위와 고난, 표적과 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시간이 다소 소비되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는 후에 회의에서 토의되고 결정된 문제에 대한 최선의 서론이었다고 볼 수 있다.
5. (바리새)파. 헬라어로 하이레시스(hairesis). 참조 5:17 주석. 바리새인 중 어떤 이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이 보낸 선생으로 받아들였는데(참조 요 3:2),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으로써 이 사실이 입증되었다. 따라서 예수가 왕국의 머리가 되어 율법과 성전이 제 위치를 찾고, 이방인은 할례를 조건으로 입교가 허락되는, 회복된 영광스런 유대교를 인류에게 전수할 것이라고 그들은 기대하였다. 바로 이들이 일어나 바울과 바나바가 지금까지 해온 일에 항의한 것이다. 전반적인 문제가 아마도 일개인의 사례 즉 개종의 순차적 단계를 밟지 않은 이방인 디도의 사례(참조 갈 2:3)를 들어 논의되었다. 이 논쟁에 연루됨으로써 디도는 후에 낡은 종교형식에 대한 유대화주의자들의 끈질긴 요구에 대항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참조 딛 1:10, 14, 15).
일어나. 유대화주의자들이 이렇게 들고 일어났기 때문에 한층 공식적인 회의의 소집이 불가피하게 되었을 것이다.
모세의 율법. 참조 6:13 주석. 유대화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인에게 시행하라고 제안한 요구 사항은 할례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쐐기를 박는 것에 불과했다.
7. 오래 전부터. 문자적으로 “초창기부터.” 베드로는 아마도 십수 년 전에 있었던 고넬료의 회심(10장)을 암시했다. 현재의 문제와 관련된 많은 일들이 그때 이후에 발생했다.
9. 마음을 깨끗이 하사. 믿음이 고넬료와 그의 집안 사람들의 마음을 깨끗케 했다. 오직 깨끗함을 판단할 수 있는 하나님이 보기에 마음이 깨끗하다면, 의문의 법을 지키는 것은 불필요하고 무의미했다. 율법의 의식들은 정결을 위한 것이지만, 바리새인들이 주장한 것보다 더 높은 표준의 정결이 여기 있었다. 의문의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바리새인들은 이방인들을 부정함이라는 총괄적인 죄목의 범주 아래 두었다. 베드로는 아무도 속되거나 부정하다고 칭해서는 안 되며(10:28), 정결은 육체보다는 마음에 관한 것임을 배웠다(참조 딛 1:15).
10.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다시 말해,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미 분명히 나타냈는데도, 이방인의 입교와 관련하여 그분의 뜻을 알기 위해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느냐.”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의 거부 의사가 더 강해야 하는가? 광야에서 유대인들은 그들을 위해 베푼 여러 기사(奇事)가 있었는데 하나님이 주신 지도자에 대해 불평함으로 하나님을 시험했다(히 3:9). 또한 그리스도를 시험했으며(고전 10:9), 그들의 불복종이 불뱀의 형벌을 초래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들의 헌금에 관해 교회를 속이고자 함으로써 하나님의 성령을 시험했다(행 5:9). 베드로는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일에 다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청중들에게 경고하였다.
11.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 율법과 일치된 삶이 아니라 주의 은혜라고 베드로는 주장했다. 이 진술이 그의 논증의 끝맺음이었다.
구원받는 줄을. 하나님이 약속하는 구원은 은혜에 의한 것이다(참조 롬 3:21~26; 5:1, 2; 11:5, 6; 엡 2:5, 8). 행위는 은혜로 구원의 선물을 받을 때 따라 온다(롬 8:4; 엡 2:9, 10; 빌 2:12, 13).
12. 가만히 있어. 베드로의 확신있는 증언에 대해 다른 의견이 없었다. 비록 모든 사람의 마음이 다 바뀌지는 않았을지라도 반대의 소리는 더 이상 없어졌다. 고넬료 사건을 통해 자신의 편견을 극복한 베드로가 이제 다른 사람들의 편견을 극복한 것이다.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즉 베드로가 진술한 말은 교회가 이방인을 최초로 수용한 것을 나타낸다.
백성을. 그들만이 “백성” 곧 하나님의 백성이고 다른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울타리 밖에 있다고 유대인들은 믿었다. 그러나 야고보는 하나님이 또한 이 이방 나라들에서도 한 백성을 당신 자신에게로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선언했다. 바울도 이와 같은 변화를 인식했다(롬 9:26). 그리스도인의 안목에는 “택한 백성”은 더 이상 유대인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해 주었던 의식적 규율들은 이제 불필요했다.
시므온 (Simeon). 헬라어 쉬메온(Sumeo-n). 영어식 표기 “Simeon”은 “Simon”(시몬)보다 히브리어 쉬므온(S∨im‘on)에 더 가까운 형태다. 이 형태는 베드로에 대해 단지 이곳과 아마도 벧후 1:1에서 사용된 것 같으며, 갈릴리 출신인 야고보가 이 형태를 사용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20. 우상의 더러운 것. 예루살렘 총회의 공식 결의문이 “우상의 제물”(헬라어 에이돌로쒸타[eido-lothuta]. “우상에게 바쳤던 [것들]”, 29절)에 반대하여 말한 것에 비춰볼 때, 여기서 “우상의 더러운 것”은 이방 신들에게 바친 음식(그리고 음료)이라는 특정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헬라와 로마 종교에서는 음식이 신전에 있는 신들에게 매일 판에 박힌 듯이 드려졌다. 그러나 단지 제물의 일부만 제단에 올려놓았고, 나머지는 신전과 관련된 일을 하며 생활하는 이들이 소모하거나 시장으로 보내 팔았다. 엄격한 유대인이 보기에 이런 음식은 더러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랍비 아키바(AD 100년경)가 내린 것으로 생각되는 한 판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상이 있는 장소로 [그곳에서 어떤 유익을 얻기 위해] 가지고 들어가는 고기는 허용되지만 밖으로 가지고 나오는 고기는 죽은 자의 제물로 [간주되므로] 금지된다”(Mishina ‘Abodah Zarah 2. 3, Soncino ed. of the Talmud, 145). (AD 200년경 성문화된) 미쉬나의 또 다른 규정은 우상에게 바친 술에 대하여 이와 유사하게 천명한다. “옌 네세크(Yen nesek, 헌주[獻酒])는 금지된 것이며 또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 [다른 술]을 금지하도록 만든다. 술을 [섞은] 술과 물을 [섞은] 물은 미량이라도 [부적합하다]. 물을 [섞은] 술과 술을 [섞은] 물은 [금지된 요소가] 향을 낼 때는 [부적합하다]. 일반적인 규정은 이렇다. 같은 종류로 [섞은 것은] 미량이라도 [부적합하다]. 그러나 다른 종류로 섞은 것은 [금지된 물질이] 향을 낼 때 [부적합하다]”(ibid. 5. 8, Soncino ed. of the Talmud, 349). 결과적으로 철저한 유대인들은 결코 일반 시장에서는 고기를 사지 않고, 유대인 푸줏간에서만 샀다. 여행할 때는 코피노스(kophinos) 즉 바구니를 등에 메고, 먹을 것을 가지고 다녔다(참조 막 6:43 주석). 유베날리스(Juvenal)는 “자신들의 모든 비품으로 바구니 하나와 한 다발의 건초를 소유한 유대인들”을 언급한다(Satires ⅲ. 13, 14; Loeb ed., 33).
이런 강한 유대인의 정서를 고려하여, 총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삼가도록 요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결코 작은 자기 부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개종자들은 많은 축제 초대를 거절해야 했고, 참석하더라도 먹는 것은 거절해야 했다. 예민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자기 앞에 차려진 음식이 신전에 바쳐진 것이 아니라는 의심이 풀리지 않는 한 개인의 집에서도 먹기를 거절해야 했다. 동시에 이 규제는 제물로 바쳐진 음식과 술을 맛보는 것이 예배의 중요한 부분이었던 이교 의식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참예하는 유혹에서 보호해 주는 실제적 가치가 있었다. 만약 우상에게 바쳐진 것은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면, 심지어 황제의 제단에 드려진 음식과 술을 맛보는 형식적인 의식도 금지되었다는 것을 양심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명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특별히 이 문제가 논란거리였던 것 같다(참조 계 2:14 주석).
예루살렘 총회 몇 년 후에 이 규제가 어떤 저항에 부딪혔다. 고린도에서 어떤 이들이 자신들은 원하는 것을 먹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고, 이에 대해 바울은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므로” 신전에 바쳐진 것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시장에서 음식을 살 수 있다는 범위까지 이론적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그가 그 규제를 지지한 것은 형제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의 양심을 존중하는 차원에서였다(고전 8~10; 롬 14 주석 참조).
음행. 도덕적인 문제에 대한 규제가 순전히 의식적인 것으로 보이는 규제들과 나란히 언급된 것을 보고 언뜻 의외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결의 내용의 첫 항목도 십계명의 둘째 계명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도덕적인 문제였다. 음행과 관련하여, 모든 형태의 부정(不貞)을 금하는 레위기 법이 엄격한 것은 적절하다(레 18장; 20:10~21).
여성의 순결에 대한 참된 존중의 결핍과 결부된 음행의 죄는 고대 사회에 널리 퍼진 죄여서 헬라 - 로마인의 삶의 특성 가운데 하나로 여겨질 정도였다. 이방 종교에서는 우상숭배와 음행이 때때로 얽혀 있었다. 고린도와 바보에 있는 아프로디테의 창기 여사제들에게 나타나는 것처럼, 음행은 종종 우상숭배의 일부였다. 그렇게 하여 신전 예배에 빠진 남자들은 그런 식으로 숭배되는 여신에 대해 소위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하였다. 이교도들에게 음행의 죄는 묵인되었고 심지어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 그리스도인은 이방인 회심자들이 순결한 생애를 영위하는지 알고자 했을 것이다(참조 고전 6:15; 계 2:14). 그러므로 예루살렘 총회에서 그리스도 교회는 교회의 일반적 가르침뿐 아니라 교인들이 따라야 할 구체적인 규칙을 세움으로써 높은 도덕적 수준을 세우는 데 공적인 첫 단계를 취한 셈이다.
목매어 죽인 것. “목매어 죽인 것”을 먹는 것에 대해 구약에 명확한 금지 조항이 없다. 그러나 적용되는 원칙은 피를 먹지 말라는 바로 다음의 금지 사항의 경우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목매어 죽인 동물은 정상적으로 피를 빼내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그런 동물의 고기는 음식으로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참조 레 17:13, 14). 야고보의 선언은 또한 스스로 죽은 동물이나 다른 동물에 의해 죽임당한 동물의 고기와 관련된 모세의 규제에 기초했을 것이다(레 17:15; 신 12:21). 테르툴리아누스(AD 230년경 사망)가 증언한 바와 같이 초기교회는 이러한 규제들을 지켰다. 그는 이교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그리스도인들 앞에서 그대들의 악한 행위를 부끄러워하라. 그들은 단순하고 자연적인 음식물로 된 식사에서 동물의 피조차도 먹지 않으며, 내장에서 분비된 피에도 오염되지 않으려는 이유로 목매어 죽인 것과 자연사로 죽은 것도 멀리 한다”(Apology 9; ANF, vol. 3, 25). 이와 유사하게, 동방교회의 한 오래된 규율은 명한다. “만일 어떤 감독이나 장로나 집사 혹은 성직에 있는 어떤 사람이라도 고기를 생명이 담긴 피와 함께 먹거나, 짐승에게 찢긴 것이나, 스스로 죽은 것을 먹는 자는 해임시켜라. 율법이 이것을 금하기 때문이다”(Apostolic Canon 63; ANF, vol. 7, 504). 유대인의 고대 전승은 동물의 목이 부러지면 피가 사지로 흘러 들어가 소금을 사용해도 피를 빼낼 수 없다고 말한다(Talmud Hullin 113a, Soncino ed., 621, 622).
피. 피를 음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인류에게 육식이 허용되자마자 금해졌고(창 9:4), 모세의 법에서 자주 반복되었다(레 3:17; 7:26; 17:10; 19:26). 사울 시대에는 피를 먹는 것을 여호와께 범죄하는 것으로 간주했다(삼상 14:33). 피를 가지고 만든 음식이 헬라인과 로마인들의 식탁에서는 흔했다. 일례로 이런 사실이 호메로스(Homer)의 글에 나타난다.
“여기 불 위에 염소의 위가 여러 개 놓여 있는데, 우리가 그것들을 기름과 피로 가득 채운 후에 저녁식사로 거기에 놓아두었네. 이제 둘 중 어느 한쪽이 이겨서 더 나은 사람으로 판명되면, 그에게 이것들 중 자신이 원하는 하나를 선택하게 하라”(Odyssey xvii. 44~49; Loeb ed., vol. 2, 199, 201).
이교도들은 제사를 드리면서 술을 섞은 피를 마시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AD 1세기 유대인의 입장에서 말하는 요세푸스는 “그[모세]는 피를 영혼과 정신으로 여겨 어떤 종류의 피도 음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금했다”고 기록했다(Antiquities iii. 11. 2[260]; Loeb ed., vol. 4, 443). 이런 금지에 대한 유대인의 태도는 랍비 시므온 벤 앗자이(Rabbi Shim‘on ben ‘Azzai, AD 110년경)의 진술로 추정되는 것에서도 볼 수 있다. “토라에는 365개의 금지 조항이 있는데, 모든 법 가운데 이와 같은 것은 없다.…성경이 피의 금지에 관하여 그대에게 그렇게 권고할진대[신 12:23], 이것과 비교하여 모든 계명 중에 이보다 더 쉬운 것이 없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것이 나머지 모든 계명에 얼마나 더 많이 적용되겠는가!”(Sifre Deuteronomy 12:23 ; quoted in Strack and Billerbeck, Kommentar zum Neuen Testament aus Talmud und Midrasch, vol. 2, 734). 피를 먹지 말라는 금령이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쉽게 지킬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은 이방인 개종자들이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여기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정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적어도 몇몇 지역에서는 초기 그리스도인 교회가 이 규칙을 수 세기 동안 고수해 온 것으로 보인다(“목매어 죽인 것”에 관한 주석을 참조하라). 같은 시기에, 특히 서방에서, 예루살렘 총회의 규제를 단지 도덕적인 금지 사항으로 제시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이레내우스(AD 185년경)는 본 절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그들에게 요구된 것 곧 헛된 우상과 음행과 피를 멀리하고 또한 무엇이든지 자기가 받기를 원치 않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Against Heresies iii. 12. 14; ANF, vol. 1, 435, 436). 그런 관점에서 “피”를 인간의 피를 흘리는 것 즉 살인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피를 먹지 말라는 금령을 인간의 피를 흘리지 말라는 (금령)으로 이해해야 한다”(On Modesty 12; ANF, vol. 4, 86)라고 설명한 테르툴리아누스(AD 230년경 사망)의 말에 비춰보면 분명해진다. 참조 창 9:4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