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의 시험, 누가복음 연구 7
눅 4:1-13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10]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사단은 자기가 정복하지 못하면 정복당할 것을 알았다. 이 투쟁의 결과는 너무나 중대해서 그와 동맹한 천사들에게 위임할 수 없었다. 그가 직접 싸움을 싸워야 했다. . . .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이 투쟁이 그들 자신의 생애와 특별한 관계가 없는 것처럼 바라본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에 거의 관심이 없다. 그러나 모든 인류의 마음 가운데서 이 투쟁이 되풀이 된다. 그 누구도 사단의 공격을 받음 없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악의 대열을 떠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대항하신 유혹들은 우리가 막아 내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이 시험들은 그의 품성이 우리의 성품보다 뛰어나신 것만큼 더 극심하게 임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심히 무거운 죄 짐을 지시고 식욕과 세상에 대한 사랑과 참람으로 인도하는 과시를 사랑하는 시험에 대항하셨다. 이 시험들은 아담과 하와를 정복하였고, 우리들을 쉽게 정복하는 것들이다.”(소망, 116-117)
예수님은 시험은 어떤 것이었으며,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본문연구 (참고: 시대의 소망 제 12-13장)
- 예수님이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은 무엇인가? 괄호 안에 성결절을 기입하여 보라.
첫 번째 시험( ) 두 번째 시험( ) 세 번째 시험( )
마귀의 유혹( ) 마귀의 유혹( ) 마귀의 유혹( )
주님의 대응( ) 주님의 대응( ) 주님의 대응( )
요약: _______________________ 요약: _______________________ 요약: 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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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시험(temptation)”은 “유혹”의 의미이다.
cf. 마귀의 유혹의 말의 길이에 비해 예수님의 대답은 언제나 단순하였다. - 마귀가 침례직후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1절) 광야로 가신 예수님을 시험한 까닭은 무엇 인가? 왜, 이 때를 선택하였는가?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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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금식과 기도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신 9:9을 읽어보라. 모세의 금식과 예수님 의 금식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cf. 40일을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않은’ 예수님의 상태는 어떠했을까? (시 109:24) - 시험(유혹)에 대한 예수님의 대처는 어떠했으며, 그분이 사용한 말씀은 어디로부터 인용 한 것인가?
1) 4절(신 8: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8절(신 6: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12절(신 6: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흥미롭게도 모두 신명기의 말씀을 암기해 내셨다. 신명기의 기록 목적과 주요 내용은 무엇이며(신1:5), 말씀을 어떻게 간직할 것을 명령하였는가?(신 6:6-9)
cf. 마귀도 말씀을 사용하였으나(신 6:13, 시 91:11-12) 왜곡된 문맥으로 사용하였다. - 13절에서 마귀가 “얼마 동안 떠나니라”는 말은 어떤 것을 암시하는가?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우리가 당하는 시험과 유혹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승리는 모본이 되는가? (약 4:7)
토의사항
-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시험은 결국 승리가 예정된 것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전 10:13을 참고하여 설명해 보라.
- 오늘날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장 큰 시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예수님이 당하신 세가지 시험이 지금 우리가 격는 시험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얘기해 봅시다.
누가는 예수님의 시험을 가장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분의 승리는 “말씀”이었다.
성령에게. 탄생할 때부터 예수는 성령의 인도와 지도 아래 있었으나(참조 마 3:16; 눅 2:52 주석), 침례받을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풍성하게 임하여 위탁된 사명을 이룰 수 있도록 지혜와 기능을 부어 주셨다(행 10:38; 참조 행 1:8). 예수는 “지상에 오시기 전에” “그 앞에 제시”된 “완전한 계획”에 맞추어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한 걸음씩 인도받았다”(참조 시대의 소망, 147; 눅 2:49 주석).
마귀. 헬라어 디아볼로스(diabolos)는 “~을 통하여”란 뜻의 디아(dia)와 “밀치다”란 의미의 발로(ballo-)에서 왔으며, 이 단어의 형용사는 “비방하는”을 뜻하며, 명사는 “비방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 단어에서 영어의 “devil”(마귀)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70인역」에는 “대적자”란 뜻을 가진 히브리어 사탄(sat.an)이 디아볼로스로 번역돼 있다(참조 슥 3:1 주석). 디아볼로스가 사탄을 지칭할 때는 일반적으로 관사와 함께 나타난다(벧전 5:8은 예외임). 관사가 없는 경우에 그것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요 6:70; 딤전 3:11; 딤후 3:3; 딛 2:3).
인격을 가진 마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비방하는 자”란 뜻의 디아볼로스와 “대적하는 자”란 의미의 사탄이라는 단어 자체가 마귀가 인격적인 존재라는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는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눅 10:18). 오직 인격적인 존재만이 예수의 시험받는 이야기에 나타난 마귀의 역할을 해낼 수가 있었으며(4:1, 5, 8, 11), 신약의 여러 기자들의 마귀에 관한 진술들을 해명할 수 있다(요 13:2; 히 2:14; 약 4:7; 요일 3:8; 유 9절; 계 2:10; 20:2, 7~10).
시험을 받으러. 헬라어로 페이라조(peirazo-). “~하게 하다”(행 9:26; 16:7; 24:6 등), 선한 동기(요 6:6; 고후 13:5)에서 “시험하다”, 악한 동기(마 19:3; 눅 11:16), 특히 죄를 범하게 하려고 어떤 사람을 유혹한다는 의미에서 “시험하다”(고전 7:5; 살전 3:5; 약 1:13)를 뜻한다. 여기서 페이라조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는 시험을 자초하거나 의식적으로 마귀의 시험의 땅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와 홀로 있기 위해, 자신 앞에 놓인 사업에 대해 명상하기 위해 광야로 물러났다.
예수는 인성을 취했으며, 그것과 함께 죄에 굴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함께 취했다(시대의 소망, 117). 그는 “인간이면 누구나 당하는 인생의 위험을 겪고 또한 인간이면 누구나 해야 할 싸움을 실패와 영원한 손실의 위험을 무릅쓰고” 받아들여야 했다(시대의 소망, 49). 오직 그렇게 해야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는 말씀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가 신성을 가졌기 때문에 시험받을 수 없다면 이것은 연극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가 시험을 경험한 것은 인성을 통해서였다(참조 시대의 소망, 686). 만일 그가 당한 시험이 우리가 당하는 시험보다 조금이라도 약한 것이었다면 “그는 우리를 도울 수 없을 것이다”(시대의 소망, 117). 요 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을 참조하라. 또한 /2/40e, 52; 요 1:14; 히 4:15 주석을 참조하라.
우리에게는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할” 수 있는 한 대표자가 아버지 앞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도록 명령받고 있다(히 4:15, 16). 예수는 인간이 무엇을 견딜 수 있는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으며, 각 개인이 견딜 수 있는 힘에 따라 시험하는 자의 세력을 조절하시며 “피할 길을 주신다”(고전 10:13)고 약속했다. 그리스도가 시험의 광야에서 겪은 큰 싸움은 각 사람의 마음의 영토에서 반복되고 있다. 시험 곧 선이나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면 어떠한 성품의 발전도 없다. 우리가 유혹에 설 수 있는 능력은 유혹을 저항함으로써 생긴다.
네가 만일. 사단은 예수의 침례를 목격했으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하늘의 선포를 들었다(3:17; 참조 시대의 소망, 116, 119,). 적어도 예수의 겉모습은 그 선포의 진실성에 의문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는 너무도 창백하고 여위었으며, 지치고 굶주렸기 때문에(참조 시대의 소망, 137) 외모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네가 만일”이라고 한 사단의 말은 예수에게 “너는 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라고 질문하는 격이다. 에덴동산에 있던 하와로 하여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 명백하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 유혹자의 목적이었다. 그와 동일한 방법으로 사단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하게 드러난 진리들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남녀들에게 접근한다. 오직 그들의 믿음이 예수처럼 “기록되었으되”와 “주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말씀에 굳게 선 자들만이 마귀의 계교에 대항하여 설 수 있을 것이다. 유혹은 항상 명백하게 알려진 진리에 도전한다. 또한 상황에 따라서는 원칙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제안한다.
하나님의 아들. 40일 전에 요단강에서 있었던 아버지의 말씀의 분명한 메아리(참조 3:17 주석). 사단은 자신이 하늘에서 쫓겨나기 전에 그렇게도 통렬히 비난했던 그분에게 거만하게 업신여기는 태도로 말했다. 사실상 당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보다는 마치 금방 죽음을 맞이할 인간처럼 보였다(시대의 소망, 118, 137,). 이때 사단이 했던 말은 조롱하던 유대 지도자들의 입을 통해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 다시 한 번 발해졌다(27:40). 참조 마 23장; /1/35e; 요 1:1~3, 14 주석.
명하여. 예수는 공생애 기간 중에도 기적적인 능력을 보여 메시야임을 입증하라는 요구를 수시로 받았다(마 12:38; 16:1; 막 8:11, 12; 요 2:18; 6:30). 그러나 그는 그러한 도전이 있을 때 이적 행하기를 거절했다. 오히려 모든 이적들은 그가 돕기를 원하는 백성들의 특별한 필요를 채우기 위해 베풀어졌다. 사실, 천연계의 힘과 원소들은 그들의 창조주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다(마 8:26; 요 2:6~11 등). 그러나 예수는 우리에게는 소용도 없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해 하늘의 능력을 요청하지 않았다.
이 돌들. 아마도 사단은 예수의 발 밑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둥글넓적하게 생긴 동양 지역의 떡과 비슷한 돌들을 가리켰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단은 금단의 열매를 따서 하와의 손에 넣어 주었던 것처럼(부조와 선지자, 55), 돌 가운데 하나를 집어(참조 눅 4:3) 예수에게 주었을지도 모른다.
떡. 여기서 떡은 인간의 육체적 본성이 가진 물질적 필요를 대표한다. 떡은 생명에 대한 물질주의적 철학, 곧 인간의 생명은 자신의 소유가 된 풍부한 물질에 달려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오직 떡으로만 산다고 가정하는 철학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식욕에 호소하는 것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하는 토대가 되었던 것처럼, 사단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공격을 여는 토대가 되었다. 인간에게 닥쳐오는 많은 시험들이 이 부류에 해당한다. 첫 번째로, 사단은 인간의 육체적 본성에 대한 시험이 더 손쉽게 즉각적인 성공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두 번째로, 그는 육체적으로 쇠퇴하고 약한 곳에 유혹을 집중하는데, 육체적 본성과 감각을 통해서 전 존재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파멸을 피하기 위해서, 육체적 본성은 끊임없이 마음과 의지와 이성이라는 더 높은 힘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 육체는, 마음과 영혼이 계발되고 성품이 형성되는 매개체이다(치료봉사, 130). 이 시험을 더욱 사실적으로 만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음식을 만들어 배고픔을 채울 능력을 지녔다는 것에 있다.
이 시험은 그리스도에게 아버지의 뜻을 무시한 채 잘못된 방법으로 배고픔을 채우라는 사단의 제안에 있었다. 사단의 제안은, 전혀 배고픔으로 고통받을 필요가 없는데도 하나님이 그의 아들이 이것을 겪도록 내버려 두실 만큼 몰인정한 분이라고 암암리에 인식시키는 데 있었다.
사람이…살 것이 아니요. 신 8:3에서 인용함.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1,500년 전에 모세에게 계시했던 진리이다. 시험이 지나갔을 때, 예수는 거의 죽음에 이른 것처럼 보였다(시대의 소망, 131). 사단은, 그리스도가 자신이 가려고 하는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예수는 대답을 통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죽는 것이 그것을 떠난 상태로 사는 것보다 더 낫다고 단언했다. 이런 형태의 시험을 통해 사단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순종하기를 갈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압력을 행사한다. “떡”만을 의지하며 그것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결단코 진정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마침내는 죽을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 없는 “떡”은 죽음을 가져올 뿐 생명을 가져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첫 번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그리고 의심없이 굴복해야 함을 천명한다. 예수는 말씀이 지닌 구속력(拘束力)을 받아들이고, 물질적인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기를 거부한다. 영적인 것들은 초월적인 가치와 중요성을 가진다. 참조 마 6:24~34; 요 6:27 주석.
떡으로만. 인간은 동물 이상이다. 그의 가장 긴급한 필요는 육체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예수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고 확언한다. 그런데 예수는 모든 가능한 방법을 다 동원하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일의 중요성을 지지하면서도(25:31~46), 이것이 메시야인 그분에게 드리는 충성과 헌신을 대신할 수는 없음을 분명히 말했다(26:11). 사람이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미 6:8)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22:39). 그러나 그는 또한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미 6:8). 마귀에게 준 그리스도의 대답은 어떤 형태를 막론하고 생명에 관한 물질주의적 철학을 정죄한 것이다. 물질을 소유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며, 바람직한 인생의 목표는 더더욱 아니다
5. 순식간에. 헬라어 스티그메(stigme-). 문자적으로는 “똑똑 두드리다”, 따라서 “따끔하게 찌르다” 혹은 “구멍을 내다”를 뜻하는 스티조(stizo-)에서 파생했다. 스티그메는 “어떤 시점”을 의미한다. 아마도 “잠깐 사이” 혹은 “시계가 똑딱하는 순간”일 것이다. 「틴덜역」에는 “눈 깜짝할 사이”로 되어 있다.
6.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이 일은 아담의 범죄로 이루어졌다. 타락 후에, 사단은 아담이 창조주에게 충성할 때는 이 세상에 대한 권한이 그에게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는 자신을 “이 세상 임금”으로 칭했다(시대의 소망, 114). 사단은 자신을 아담이 하늘에 있는 주권자요 대표로 선택했었다고 암시했다. 헬라어 본문에서 여기에 주어진 대명사들의 위치는 강조를 나타낸다. “네게 내가 줄 것이다…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네가, 만일 네가 내게 절하면” 등. 사단이 이렇게 제안할 때 강한 몸짓을 하는 것이 보이는 듯하다.
마귀가 ... 얼마동안 떠나니라. 영원히 떠난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눅 4:13)이다. 유아 시절부터 “그의 생애는 흑암의 권세에 대항하여 싸운 긴 투쟁의 생애였다”(시대의 소망, 71, 116,; 참조 눅 4:2 주석). 마귀는 그리스도를 시험했으나 억지로 죄를 범하게 할 수는 없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가장 강렬한 시험이라도 우리가 죄를 범하기로 동의하지 않는 한 또는 동의할 때까지 그것은 무력하다(참조 교회증언, V, 177). 우리가 “마귀를 대적”할 때 그는 우리를 피할 것이다(약 4:7). 그리스도는 전쟁의 승리자로 개선했고 마귀는 패배한 원수로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