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20:13-38
[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6]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내용 요약
1. 고린도에서 드로아까지 (1-6)
2.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 (7-16)
3. 밀레도에서의 설교 (17-38)
배 경
바울은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고자 서두릅니다.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청해 자신이 이제껏 시험을 참으며 주를 섬겼고, 예루살렘에 가도 성령의 증언대로 환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예수께 받은 사명을 위해 생명도 아끼지 않겠다고 합니다.
에베소에서 삼실마일 떨어진 밀레도에 도착하자 바울은 배가 떠나기 전에 교회와 연락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함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즉시 장로들에게 기별을 보내어 그가 여행을 계속하기 전에 그들을 볼 수 있도록 밀레도에 급히 오라고 요청하였다. 그는 부름에 응하여 그들은 왔고 그는 힘차고 감동적인 권고와 고별의 말을 그들에게 주었다.
(행적 392p)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훤히 보이는 고생길을 자처해서 간 적이 있나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 혹은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요.
3. 본이 되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거리낌 없는 삶이란?
본문을 더욱 자세히
- 바울이 행한 에베소에서의 눈물의 봉사 (20:19, 31)는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이런 봉사로 인하여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인가요?
- 바울의 사명감과 열정 (20:24)이 우리 삶에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 바울의 부탁에 요점은(20:28-32) 무엇일까요?
- 바울의 정직함과 부지런함 (20:34-35)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면, 왜 그런지에 대하여 나누어 보아요.
생각해봅시다.
- 무릎을 꿇고 형제자매들과 간절히 기도한 경험이 있다면 그 일을 회고해 봅시다.
- 고난의 길을 가면서도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나를 서두르게 하는 기대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그것이 교회와 복음을 위한 것인가요?
그는“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충당하”였다고 선언하였다. 그의 힘에 겨운 수고와 그리스도의 사업을 위한 광범위한 여행 중에서도 그는 자신의 필요를 공급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료 사역자들을 부양하고 매우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어떤 것들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는 끊임없는 근면과 가장 철저한 절약을 통하여 이일을 성취하였다.(행적 396p)
19. 모든 겸손.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힌(갈 6:14) 바울은 부르심과 직분에 대해 또는 그것으로 인한 어떤 자만심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육체를 신뢰할 만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빌 3:4~7). 또한 그의 사도로서 겪은 경험과 고통을 자랑할 만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후 11:18~30). 그의 겸손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위대함에 의해 그의 작음과 연약함을 헤아리는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 속했다.
눈물. 예수처럼 바울도 울었다(고후 2:4; 참조 요 11:35). 그는 유대인 형제들이 나라를 상실한 일을 슬퍼했다(롬 9:1~5; 참조 눅 19:41, 42). 그는 그들이 진리의 길에 장애물을 놓는 것을 슬퍼했다. 그는 영혼들이 버려지는 것을 슬퍼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완고함을 슬퍼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인 목자는 주위에 있는 잃어버린 영혼들로 인하여 슬퍼하며, 진리에 대한 그들의 반대에 대해 거룩한 열정이 솟아날 것이다.
시험. 헬라어 페이라스모이(peirasmoi). “시험하는 것들”, “시험들.” 벧전 4:12과 비교하라. 행 19장은 원수들의 반대에서 발생한 역경들이 진술되어 있다.섬긴 것. 헬라어 둘류오(douleuo-). “[노예로서] 섬기다.” 바울은 종종 이 단어와 명사 둘로스(doulos), “종”, “노예”를 그리스도와 관련된 자기 자신에게 적용했는데, 그럼으로써 그의 마음과 의지가 주님께 완전히 속해 있음을 나타낸다. 그가 행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 그의 주인에게 속했다. 자신의 이익이나 세상의 어떠한 관심도 그가 섬기는 그리스도와 비교될 수 없었다.
꺼림. 헬라어 휘포스텔로(hupostello-). “아래에 두다” 그러므로 “숨기다”, “억압하다.” 이 단어는 일찍이 돛을 감는 데 사용되었다. 바울은 노력하고 활동하는 데 몸을 아끼지 않았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또한 가르치고 권고하기를 꺼리지 않았고 진리를 감추지 않았다(참조 27절).
23. 성령이…내게 증거하여. 이것이 직접적인 계시에 의한 것인지(참조 16:6, 7 주석) 혹은 21:4, 11에서처럼 선지자의 예언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바울이 마음에 계속해서 깊은 감명을 받은 것에 의한 것인지 언급이 없다.
24. 달려갈 길. 헬라어 드로모스(dromos). “경주”, “경주로”, “인생살이” 또는 “임기”, “경력.” 자기 앞에 펼쳐진 경주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 바울은 스스로를 산 제사(롬 12:1)로 드리고 있었다. 고별 편지에서 그는 자신이 그러한 길을 마쳤음을(딤후 4:7) 주장했다. 그렇게 그는 히브리인들에게 그들 앞에 당한 “경주를 인내[참음]로써 경주”하라고(히 12:1) 권고했다. 바울은 그렇게 삶을 경주하고자 했기 때문에, 마지막에 부주의나 무관심으로 인한 소홀함이나 실패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그의 생애를 깨끗한 양심으로 마치기를 원했다.
사명. 헬라어 디아코니아(diakonia). “봉사.” 이 단어에서 영어 단어 “deaconate”(집사)가 파생되었다. 여기서는 교회의 직분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쳐진 봉사를 의미한다. 충성스런 봉사가 바울의 주된 원칙이었고 그는 그의 “아들” 디모데에게도 동일한 헌신을 권고했다(딤후 4:5).
귀한 것. 내 자신의 소망에 가치 있는 것. 어떤 개인적인 선택이나 소망도 바울을 꾸준한 사역의 특권에서 떼놓을 수 없었다. 그는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그리스도의 종이었다(롬 1:1). 어떤 것도 그가 의무를 소홀히 하도록 유혹할 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이것은 구주의 정신이었고 초기 그리스도인의 정신이었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바울은 여기서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으나, 의심할 여지없이 에베소에서 온 장로들과 밀레도와 에베소의 교회들이 그를 다시 보지 못할 것으로 믿고 있다. 이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위험들을(행 20:22, 23; 롬 15:30, 31)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수 있으며, 로마와 스페인을 방문하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행 19:21; 롬 15:23~28)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1차와 2차 로마 투옥 사이(빌 1:25~27; 몬 22절)에 밀레도와 에베소는 아니더라도 마게도냐와 아시아로 돌아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때 이것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27. 꺼리지 않고. 참조 20절 주석. 인기 없는 진리로 인해 빚어지는 두려움이나 인기에 대한 쓸모없는 갈망이 바울의 봉사를 방해할 수 없었다. 진리를 부끄러워하거나 위장하는 일은 없었다.
하나님의 뜻. 즉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 바울은 이 계획을 스데반의 설교(참조 7:54~58)를 통해 최초로 듣고 그리스도에게 친히 들은 것 같다(행 9:4~6; 갈 1:15~20). 그는 사람들 앞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사망하신 목적, 그의 부활과 승천, 대제사장으로서의 하늘 성소 사업 그리고 중보 사업의 마지막에 그의 백성들을 데려가기 위해 다시 오리라는 약속의 목적을 제시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에서 명확히 제시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28. 양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고전 12:12~27; 엡 4:12), 하나님의 성전이요(고전 3:16, 17), 주의 신부다(엡 5:23~32). 하지만 더 친숙하게는 하나님의 양떼이다(요 10:11~16; 참조 벧전 5:4; 히 13:20). 그러므로 그들은 쫓겨나지 않고(요 10:26~30) 인도를 받아야 하며, 착취되지 않고 공급받아야 한다(시 23; 요 10:7~14; 벧전 5:2).
파스토르(pastor, 목사)는 “내가 먹이다”라는 동사 파스코(pasco-)에서 온 라틴어 단어이다. 성경에 아주 선명하게 제시된, 호소하는 듯한 선한 목자는 복음 사역자의 모본이다. “온”은 모든 양떼와 각 양을 의미하는데,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약 2:1~9).
자기 피로. 헬라어 원문이 분명하게 지적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아들의] 피로”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이 번역은 앞에서 소개한 “하나님의 교회”라는 독법에 적합한 반면, 다른 번역은 신성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거나(다른 참고 문헌들이 명확히 하는 개념) “주의 교회”라는 독법에 적합하다. “피는 생명”이다(신 12:23). 피가 흘려지면 생명은 끊어진다. 희생동물의 피가 땅에 흘려지고 죽는 것은,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한다. 그러므로 갈바리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아버지와의 분리로(마 27:46; 요 19:34, 35) 그의 심장이 터져 물과 함께 피가 나올 때 “구원하는 피”(고전 1:17, 18), 피로 사신 일(행 20:28) 그리고 깨끗하게 하는 피(요일 1:7)로 일컬어진다. 그리스도는 구원을 가능케 한 속죄제물로서 죽으셨기 때문에 교회는 특별한 헌신과 관심으로 목사들의 관리를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처럼 목사는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한 봉사에 자신을 바쳐야 한다.
29. 내가 떠난 후에. 바울은 그가 함께 세운 교회들의 후견인으로 일해 왔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와 여호수아 후에 생존한 장로들이 사는 날 동안에는 신실했으나(삿 2:7) 후에는 배교했다. 바울이 떠남으로 그들에게 위험이 많아질 것이다.
30. 너희 중에서도. 교회 외부로부터 양떼를 공격할 앞 절에 나타난 “이리”는, AD 400년경 일반에 널리 퍼져 있던 그리스도교를 급진적으로 변질시킨 유대화주의자들과 이교의 영향력을 대표한다. 이제 바울은 데마(딤후 4:10), 후메내오, 빌레도(딤후 2:17)와 같은 내부에서 오는 배교의 영향력에 대해 경고하는데, 그들의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짐 같으며”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렸다.
31. 일깨어. 바울이 틀림없이 인식하고 있었을 주의 권고(마 24:42; 25:13)를 의미심장하게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이 방금 “감독자”(참조 20:28 주석)라고 부른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렇게 설교하는 일은 매우 적절했다. 바울은 교회를 지도하고 목양하는 자들의 특징이 되어야 할 경계를 강조한다.
삼 년. 바울은 삼 년 동안 에베소 교회 앞에 경계의 모본을 보여 주었다. 사도행전의 역사에는 회당에서 설교한 3개월(19:8), 두란노 서원에서의 2년(10절), 데메드리오의 폭동 바로 전후의 분명치 않은 기간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과 잘 알려진 유대인의 포함식 계산법(참조 제2권, 83, 84)은 “삼 년”이라는 바울의 일반적인 언급에 충분한 설명이 된다. 참조 61쪽.
눈물로. “감정을 나누는 일”이라는 뜻 그대로 바울의 깊은 동정심은 그의 기록 많은 부분에서 밝혀진다(참조 행 20:19; 고후 11:29). 바울은 목회적 능률과 열심에 대해 강도 높게 말하고 있으나 장로들 중 누구도 그의 언급을 논박하지 않는다.
32. 은혜의 말씀. “그의 은혜로운 말씀”을 의미하는 형용사구로 볼 수도 있다. 유사한 표현은 “그의 능력의 말씀”(히 1:3) 또는 우주를 지탱하는 힘이 있는 “그의 능력 있는 말씀”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의 은혜의 말씀”은 그를 믿는 자들의 구원을 이룰 수 있다(유 24절). “은혜”(카리스[charis])라는 단어는 고후 12:9에서와 같이 종종 “능력”(뒤나미스[dunamis])이라는 단어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말씀”(로고스[logos])이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격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가 말할 때 그의 말씀에는 은혜뿐만 아니라 능력이 충만하다(참조 약 1:21; 히 4:12; 렘 23:29). 카리스에 대한 논의를 보려면 롬 3:24 주석을 참조하라.
부탁하노니. 헬라어 파라티쎄미(paratithe-mi). “곁에 두다”, “위임하다.” 여기서는 “위탁하다”(벧전 4:19)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날까지 믿음의 “의탁” 또는 “맡겨 놓은 것”(파라쎄케[parathe-ke-])이 된, 그들이 받은 진리(딤후 1:14)를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교사들(딤후 1:14)이 있었다.
기업. 이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땅 분배를 가리킨다(수 14~19장).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 부족으로 그들의 땅을 성공적으로 차지하는 데 실패했다(삿 1장; 2장; 히 3장; 4장). 하나님의 자녀의 기업은 분명히 히브리인에게 할당된 소유로 간주되어야 하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히 주장되어야 한다. 에베소인의 기업에 대한 바울의 사상 전개를 비교하라.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받은 구원의 서약이 되는 “우리 기업에 보증”(엡 1:14)이 있는데, 그것은 현재 그리스도인의 영적 소유로서의 “성도 안에서 그 기업”(엡 1:18)과 그리스도의 재림시 들어갈(마 25:34; 눅 12:32), “하나님 나라에서” 얻을 “기업”(엡 5:5)이다. 재림시 하나님의 성도들은 하늘에 들어가서 1,000년 동안 통치할 것이고(살전 4:16, 17; 계 20:4), 그 후 새로 창조된 땅에서 살 것이다(계 21:1~4).
33. 내가…탐하지. 사무엘이 그의 백성들에게 한 호소와 비교하라(삼상 12:3~5). 바울과 사무엘 둘 다 불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변명을 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정직함을 잃고 타락했다(삼상 8:3). 바울은 “탐심의 탈”(살전 2:5; 참조 고후 7:2; 12:17, 18)을 썼다고 비난받았다. 바울은 그의 복음사역에 대하여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으나(고전 9:13, 14) 탐욕의 비난을 받지 않으려고(고전 9:12, 15)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미치는 그의 두드러진 영향력으로(참조 갈 4:13~15) 바울은 자신의 부를 위하여 물질적인 이익을 얻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울은 “비천에 처할 줄도”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다(빌 4:12). 그는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자족하기를”(빌 4:11) 배웠다. 그는 고린도인들에게서 어떤 “이”(利)도 취하지 않았다(고후 12:17). 그는 빌립보인들에게서 어떤 “선물”도 바라지 않았다(빌 4:17). 바울은 지원을 바라기보다 그의 손으로 일했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 절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그의 노력이 실제로 다른 사람들의 부에 대한 탐욕 때문이었다는 비난에 대한 변호로 이 사실을 말한다.
은이나 금이나 의복. 동방에서는 흔히 이런 것들을 소유하고 있으면 부유하다고 간주했다. 나아만(왕하 5:5)과 다른 이들(창 24:53; 45:22; 왕하 7:8; 참조 마 6:19; 약 5:2, 3)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34. 이 손으로…당하여. 자급하는 바울의 습관을 가리키며, 탐욕의 비난에 대한 부분적인 변호로 소개된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장막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18:1~3). 그는 이전에 에베소에서 친히 손으로 일했고(고전 4:12) 데살로니가에서도 일했다(살전 2:9; 살후 3:8). 이 절은 그가 에베소에서도 이와 같이 일했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바울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한 사람들과 그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일했다. “자주 나는 병”이 있었던 디모데(딤전 5:23)는 그들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교회가 아직 목사들을 부양하는 방법을 세우지 못한 때에 복음을 전하는 동안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일해야 하는 것을 조금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약한 사람들. “아픈 자들”, “고통받는 자들.” “믿음이 약한” 자들(롬 14:1)에게 적용될 수도 있지만, 바울이 방금 여기서 육체노동에 대해 말했기 때문에(행 20:34, 35) 여기서는 “약한” 사람이 문자적으로 가난하고 병약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이 절의 뒷 부분도 같은 결론을 내리게 한다. 사도 교회 신자들은 그 후 어느 시대 사람들보다 이러한 책임에 잘 준비되어 있었다(참조 6:1, 2 주석).
복이 있다. 축복에는 “주고받는” 양면이 있다. 필요가 영적인 것이든 육신적인 것이든 복을 받은 자는 행복하다. 그러나 주는 자에게 더 큰 복이 있다. 나눔에는 기쁨이 있다. 주는 자는 자신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본성의 좋은 부분을 활용하게 되며,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마 25:34~40). 하나님은 무한한 공급자라는 점에서(창 22:8~13; 시 23장; , 34), 주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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