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3:1-10, 개정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 내용 요약
- 앉은뱅이를 고침 (1-10)
1)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앉은뱅이의 형편 (1-6)
2) 그리스도를 안 이후의 앉은뱅이의 형편 (1-10) - 베드로의 설교(11-26)
예수님께 바치기에 너무 아까운 것은 없다. 우리가 그분께서 우리에게 지키도록 맡겨 주신 재물의 달란트를 그분께 돌려드리면, 그분께서는 더 많은 것을 우리의 손에 넣어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활동은 모두 그분에 의하여 보상을 받게 될 것이고,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가 완수한 의무마다 우리의 행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게 하시고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심히 사랑하시는 아들을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도록 내어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아버지와 연합되셨지만, 인간을 구원하고 그들을 서로 연합시키기 위하여 그처럼 큰 희생을 치르셨다. 그렇다면, 그 연합을 보존하기 위하여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치르는 어떤 희생을 지나치다고 할 수 있겠는가?
(1보감 446p)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무능함을 깊이 느끼고 겸비와 기도로 그들의 약함을 그분의 능력에, 그들의 무식을 그분의 지혜에, 그들의 무가치함을 그분의 의에, 그들의 빈곤을 그들의 무궁무진한 부에 연결시켰다.” (사도행적, 59)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 이름과 관련된 별명이 있나요? 혹은 이름과 관련되어 놀림 받은 적이 있나요?
- 부모님의 이름에 욕 먹인 적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있다면 나의 어떤 행동 때문인가요?
- 나의 삶과 예수님의 이름과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 베드로와 요한의 말과 행동을 음미해 볼까요?
1)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2) 우리를 보라.
은과 금도 없으면서 “우리를 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3)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내가 가진 것 중에서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어떤 것들이 있나요?
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있나요? 그 이름으로 능력 있게 살고 있나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죠?
5)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너무나 오랫동안 무력하게 살아온 그는 일어서라는 말뿐만 아니라,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 주어야 했습니다. 내가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줘야 할 사람이 있나요? - 앉은뱅이가 낫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행 3:16, 개정)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1) 병치료를 강조하고 선전하는 교회에 대해 의견을 말해 봅시다.
2) 참된 병의 치료는 어떤 것일까요?
생각해봅시다.
- 앉은뱅이의 기쁨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이 견딜 수 없는 기쁨이 구원받은 사람의 기쁨이겠죠! 최근 우리생활 속에서 있었던 구원의 기쁨에 대하여 이야기 해 봅시다.)
※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뛴 사건을 개기로 그날에 구원받은 사람이 삼천명(행2:41)이나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기쁨과 증거들은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큰 원동력이 됨을 기억하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지나갈 때에 그는 동냥을 하였다. 제자들은 그를 불쌍히 여겼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에게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하였다. 베드로가 아무것도 없다고 하자 앉은뱅이의 얼굴은 낙담의 빛으로 역력해졌다. 그러나 사도가 계속하여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할 때에 그의 얼굴은 희망으로 빛나게 되었다.(행적 58p)
“사랑과 친절로써 예수님의 이름을 발하면 즉시 하나님의 천사들이 가까이 다가와 심령을 부드럽게 하고 진정시킬 것이다”(문서전도봉사, 112).
기도 시간. 제9시 즉 오후 3시경(참조 2:15 주석; 제10권, 55). 이때는 저녁 제사드리는 시간이었다(참조 Josephus Antiquities xiv. 4. 3 [65]). 이 시간은 “기도 시간”과 “분향하는 시간”(참조 눅 1:9, 10)으로 알려졌다. 조석 제사는 매일 제3시와 제9시(오전 9시와 오후 3시경)에 향과 함께 드렸으며 그 시간에 경건한 자들이 성전 뜰에서 기도했다. 정오의 기도 역시 적어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통례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참조 단 6:10; 행 10:9 주석; 시 55:17). AD 2세기에 하루 중 세 번째 기도가 일몰 시간에 드려졌다고 알려진 것으로 보아 그 기도도 전부터 관례적으로 내려오던 것으로 보인다. 랍비 문헌은, 이 정확한 기도 시각에 어느 정도 편차가 허용되었음을 보여 준다. 하루 세 번 기도하는 관습은 일찍이 2세기 그리스도 교회에 확실히 나타나는데, 유대인 회당에서 직접 전수한 것으로 보인다(Didache 8). 3세기 초에 많은 그리스도인은 하루 세 시간씩 기도했던 것으로 보인다(참조 Clement of Alexandria The Stromata vii. 7).
올라갈새. “올라가고 있었다”가 더 나은 표현이다. 진술된 사건은 두 사도가 예배하러 성전으로 들어가는 중에 일어났다.
2. 나면서. 이 사람이 고통받은 기간을 세심하게 기록한 것은 누가 특유의 방법이다(참조 9:33; 14:8).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았을 때의 나이는 대략 40세였다(참조 4:22 주석).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 이름은 앉은뱅이에게 생소하지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 실로암 못에서 눈을 뜬 맹인이 있었다(요 9:7, 8). 베데스다의 중풍병자가 고침받은 일(요 5:2~9)이 같은 연약함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 사람에게도 알려졌을 것이다.
나사렛은 평판이 나쁜 곳이었다(참조 요 1:46). 요한의 기사에 따르면, 십자가의 팻말에 나사렛이라는 지명이 적혀 있었다(요 19:19). 예수의 갈릴리적 배경(7:40~42)뿐 아니라, 그가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은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었다. 그것은 앉은뱅이가 베드로의 요구에 반응하는 데 신앙의 큰 시험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불과 몇 주 전에 이 이름으로 불린 사람이 수치를 당하고, 백성을 기만한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 이름을 발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름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구주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는 그렇게 불리는 거룩한 분의 인격과 품성이 표현되어 있다. 경건한 마음으로 그 이름을 불렀을 때 그분의 능력이 나타났다. 그 이름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 이름을 부른 사례가 사도행전에 자주 나타난다(참조 4:10, 12; 9:14; 16:18; 19:5, 13; 22:16). 치유 행위를 할 때 베드로가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그 이름을 말한 것은 주의 약속을 단순하게 믿는 믿음의 표현이었다(막 16:18). 참조 행 3:16 주석.
7. 일으키니. 베드로의 이 몸짓은, 어린아이 같고 어쩌면 이제 막 싹트기 시작했을 앉은뱅이의 믿음에 인정 많은 조력자처럼 다가왔다. 그것은 앉은뱅이의 무력함의 마지막 순간과 자신에게 기적이 일어났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첫 순간 사이의 매우 짧은 틈을 이어주는 도움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베드로가 했던 것처럼 해야 한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 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 주”라(사 35:3).
발목. 누가는 의사였고(골 4:14), 따라서 의료 경험이 있는 기자가 여기서 앉은뱅이에게 일어났던 일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다.
힘을 얻고. “강하게 되었다”가 더 나은 표현이다. 늘어지고 연약한 힘줄과 근육에 활력이 생기고 강해졌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 성경이나 유대 문헌 어디에도 이 이름으로 알려진 문은 없다. 전반적으로 학자들의 견해는 이 문을 성전 경내 동편의 맨 바깥쪽 벽에 있는 수산 문(Shushan Gate)으로 보거나,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통하는 니카노르 문(Nicanor Gate)으로 보는 것으로 엇갈린다. 어떤 이들은 니카노르 문이 남자의 뜰과 여인의 뜰 사이에 있었다고 보았다. 미문이 바깥벽의 한 부분이었는지 아니면 두 뜰 사이에 있었는지는 주로 이 진술에서 사도들이 택한 것으로 생각되는 진입 경로에 좌우되는 것 같다. 누가는 베드로와 요한이 그 문에 이르러 앉은뱅이를 고친 후 성전에 들어갔고, 분명 기도를 드린 후에 솔로몬 행각에서 그 이적에 매료된 무리들을 만났다고 기록한다. 솔로몬 행각은 동편 바깥벽 바로 안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므로(참조 11절 주석), 미문은 아마 바깥쪽 수산 문일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뜰 사이에 있는 안쪽 문이라면, 사도들은 솔로몬 행각에 이르기 위하여 그 문을 통하여 다시 바깥으로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은 감람산에서 성전으로 들어오는 쪽에 있었으며 도성 안에 살고 있던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갔을 방향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처음부터 그 문을 사용했다는 것을 설명하기가 곤란한 것 같다. 마을에서 성전으로 바로 들어가는 다른 문들과 비교해 볼 때, 그 문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걸인이 늘 앉아 구걸할 만한 장소가 되기는 어려웠다. 이런 명백한 난점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사도들이 솔로몬 행각에서 무리를 만나기 전에 미문을 통하여 다시 밖으로 나갔고, 따라서 이 문은 여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 있는 니카노르 문일 것이라는 가정을 지지한다. 요세푸스는 이 문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것, 성전 바깥쪽에 있는 것은 고린도 산(産) 청동으로 만들어졌는데, 은으로 도금되고 금으로 장식한 문보다 훨씬 가치가 있었다”(War v. 5. 3 [201]). 바로 이 문에 대해 미쉬나는 이렇게 말한다. “니카노르 문을 제외하고 본래의 모든 문이 금문으로 바뀌었는데, 그 문들에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문들의 구리가 [금처럼] 빛났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다고 말한다”(Mishnah Middoth 2. 3, Soncino ed. of the Talmud, 7, 8). 이 모든 증거를 종합해 볼 때 미문은 니카노르 문으로 확인되는 것 같다.
11.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베드로와 요한이 나가자 그가 그들을 붙들고 따라 나갔다. 그러자 놀란 사람들이 솔로몬 행각이라는 곳으로 모여들었다”라는 독법을 지지하는 본문상의 증거가 있다. 이와 같은 독법은 미문의 위치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며, 비록 원본은 아니지만 미문이 니카노르 문으로 확인되는 것을 지지하는 초기의 증거로 보인다.
크게 놀라며. 불과 몇 달 전, 수전절에(요 10:22, 23) 바로 이 솔로몬의 행각에서 예수가 백성에게 하나님의 일에 대해 설교하였다. 그때의 기억이 두 제자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때 예수가 자신이 그리스도인지 숨김없이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이 불평했으나(요 10:24~26), 그가 하나님과 하나임을 주장하자 돌을 들어 치려 했다(요 10:30~33). 이제 그들은 그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 “생명의 주”, 예언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고 선포되는 것을 듣는다(행 3:14, 15, 18).
행각. 헬라어 스토아(stoa). “주랑”(柱廊), “회랑”(回廊). 제1성전 건물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에는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대한 언급이 없다. 요세푸스는, 이 행각이 성전 경내의 동편에 위치해 있었으며(Antiquities xx. 9. 7), 높이가 10.6미터쯤 되는 두 줄의 원주(圓柱)들로 인해 두드러지게 보였다(War v. 5. 2 [190])고 말한다. 이 주랑이 솔로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은, 그것이 스룹바벨 시대로부터 옛 건물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헤롯 아그립바 Ⅰ세가 조부의 일을 마무리할 때, 백성들이 그에게 이 행각을 허물고 다시 건축하라고 설득했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12. 왜 기이히 여기느냐. “어찌하여 서서 쳐다보느냐”(1:11)라고 한 천사의 질문과 흡사하다. 두 경우 모두, 기적을 보고 놀란 목격자들에게 그렇게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경건. 혹은 “헌신.” 베드로의 말은 어떤 사람의 헌신이 충분하다면,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을 것이며, 위대한 결과가 뒤따를 것(참조 요 9:31)이라는 통념을 마음에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여기서 사도는 그러한 사상을 거부한다. 베드로의 경건 때문에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만이 그 일을 이룰 수 있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문자적으로 “왜 우리를 응시하느냐”(참조 1:10 주석). 기적은 베드로나 요한과 같이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권능의 공으로 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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