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선교센터교회


안식일학교

경배와 찬양 다같이
찬       미 83장
시작기도 기도자
환       영 안교장
특별순서  
교과공부 각 반
헌금소개 사회자
축       도 담임목사

 

기억절 3기 5과 (일몰 : 7시 39분)
'이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출 12:26,27).

 

8월 시무 안내
시       무 : 임영빈
헌금봉사 : 박인앙 박다정

 

다음 주 예배순서

금요일예배 안식일예배
날짜 기도 말씀 날짜 기도 말씀
1 윤애리 소그룹 2 전현주 권세진
8 임형빈 소그룹 9 정찬우 김성민
15 김영서 소그룹 16 김희중 배승환
22 김주아 소그룹 23 이한얼 권세진
29 김진겸 소그룹 30 허미라 김형준

 


안식일 예배

경배와찬양 다함께
등단 / 묵도 다함께
송        영 2장
기        원 설교자
찬        미 24장
대 표 기 도 전현주 집사
특 별 찬 양  
설        교 권세진 목사
찬        미 544장
개 인 기 도 다함께
헌        금 다함께
축        도 설교자

캠퍼스 소식

1. 강릉봉사대

2. 어린이 성경학교

 
 

광 고

  1. 환영합니다.
    기쁜 안식일을 맞이하여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가족들과 손님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2. 제자훈련 캠프
    일시 : 8월2일(안)~3일(일)
    장소 : 비전센터
  3. 담임목사 출장
    일시 : 8월10일(일)~13일(수)
    장소 : 천명선교사훈련원
  4. 한국액트 LT
    일시 : 8월15일(금)~17일(일)
    장소 : 비전센터
  5. 정기직원회
    일시 : 8월16일(안) 점심식사 전
    각 부서는 안건을 목회부 또는 서기에게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6. 비전트립
    8월23일(안)~26일(화)
  7. 함께 그리는 내일
    일시 : 8월30일(안)~31일(일)
    장소 : 비전센터
  8. 일요기도회
    이번 주 기도회는 제자훈련 캠프로 대체합니다.
     
  • 다음 주 당번
    • 식사당번 : 여집사 2조
    • 청소당번 : 경희외대 캠모

캠퍼스 모임

방학중 소그룹 목요일 18시 교회
졸업생 소그룹 화요일 20시 교회
장년 소그룹 화요일 20시30분 ZOOM

 


담임목사 권세진   부목사 배승환   전도사 김유민
수석장로 임동국   서기 문호준  재무 김성미   
선교회장 윤민식  액트회장 윤애리   


헌금계좌 : 하나은행 144-890014-45304
(ACT교회)
주소 :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로1길 11
어린이청소년비전센터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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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선교센터교회


안식일학교

경배와 찬양 다같이
찬       미 83장
시작기도 기도자
환       영 안교장
특별순서  
교과공부 각 반
헌금소개 사회자
축       도 담임목사

 

기억절 3기 4과 (일몰 : 7시 45분)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출 9:35).

 

7월 시무 안내
시       무 : 임경훈
헌금봉사 : 이한얼 정찬우

 

다음 주 예배순서

금요일예배 안식일예배
날짜 기도 말씀 날짜 기도 말씀
1 윤애리 소그룹 2 전현주 권세진
8 임형빈 소그룹 9 정찬우 김성민
15 김영서 소그룹 16 김희중 배승환
22 김주아 소그룹 23 함주원 권세진
29 김진겸 소그룹 30 허미라 김형준

 


안식일 예배

경배와찬양 다함께
등단 / 묵도 다함께
송        영 2장
기        원 설교자
찬        미 22장
대 표 기 도 함주원 청년
특 별 찬 양 장로회
설        교 권세진 목사
찬        미 411장
개 인 기 도 다함께
헌        금 다함께
축        도 설교자

캠퍼스 소식

1. 강릉봉사대

2. 학생회 활동

광 고

  1. 환영합니다.
    기쁜 안식일을 맞이하여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가족들과 손님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2. 여름 국내봉사대
    일시 : 7월22일(화)~27일(일)
    장소 : 강릉지구
  3. 어린이여름성경학교
    일시 : 7월25일(금)~27일(일)
    장소 : 별새꽃돌 과학관
  4. 제자훈련 캠프
    일시 : 8월2일(안)~3일(일)
    장소 : 비전센터
  5. 액트 워크샵
    일시 : 8월10일(일)~13일(수)
    장소 : 천명선교사 훈련원
  6. 일요기도회
    일시 : 매주 일요일 아침7시
     
  • 다음 주 당번
    • 식사당번 : 여집사 1조
    • 청소당번 : 화랑캠모

캠퍼스 모임

방학중 소그룹 목요일 6시 교회
졸업생 소그룹 화요일 오후 8시 교회
장년 소그룹 화요일 오후 8시30분 ZOOM

 


담임목사 권세진   부목사 배승환   전도사 김유민
수석장로 임동국   서기 문호준  재무 김성미   
선교회장 윤민식  액트회장 윤애리   


헌금계좌 : 하나은행 144-890014-45304
(ACT교회)
주소 :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로1길 11
어린이청소년비전센터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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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선교센터교회


안식일학교

경배와 찬양 다같이
찬       미 83장
시작기도 기도자
환       영 안교장
특별순서  
교과공부 각 반
헌금소개 사회자
축       도 담임목사

 

기억절 3기 3과 (일몰 : 7시 50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 5:1,2).

 

7월 시무 안내
시       무 : 임경훈
헌금봉사 : 이한얼 정찬우

 

다음 주 예배순서

금요일예배 안식일예배
날짜 기도 말씀 날짜 기도 말씀
4 김진수 소그룹 5 심정은 김유민
11 이마루 소그룹 12 민대홍 문호준
18   장막부흥회 19 김우진 배승환
25 임태훈 소그룹 26 함주원 권세진

 


안식일 예배

경배와찬양 다함께
등단 / 묵도 다함께
송        영 2장
기        원 설교자
찬        미 21장
대 표 기 도 민대홍 청년
특 별 찬 양 재학생청년회
설        교 배승환 목사
찬        미 383장
개 인 기 도 다함께
헌        금 다함께
축        도 설교자

캠퍼스 소식

1. 방학 중 모임
2. 학생회 활동
 

광 고

  1. 환영합니다.
    기쁜 안식일을 맞이하여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가족들과 손님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2. 학생캠프
    일시 : 7월18일(금)~20일(일)
    장소 : 비전센터
  3. 본부지구 장막부흥회
    일시 : 7월18일(금)~19일(안)
    장소 : 본부교회
  4. 여름 국내봉사대
    일시 : 7월22일(화)~27일(일)
    장소 : 강릉지구
  5. 어린이여름성경학교
    일시 : 7월25일(금)~27일(일)
    장소 : 별새꽃돌 과학관
  6. 제자훈련 캠프
    일시 : 8월2일(안)~3일(일)
    장소 : 비전센터
  7. 일요기도회
    일시 : 매주 일요일 아침7시
     
  • 다음 주 당번
    • 식사당번 : 여집사 1조
    • 청소당번 : 졸업생소그룹

캠퍼스 모임

방학중 소그룹 목요일 6시 교회
졸업생 소그룹 화요일 오후 8시 교회
장년 소그룹 화요일 오후 8시30분 ZOOM

 


담임목사 권세진   부목사 배승환   전도사 김유민
수석장로 임동국   서기 문호준  재무 김성미   
선교회장 윤민식  액트회장 윤애리   


헌금계좌 : 하나은행 144-890014-45304
(ACT교회)
주소 :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로1길 11
어린이청소년비전센터 1층

유튜브 청년반 학생반 블로그 카톡공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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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1:19-30

[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내용 요약

  1. 이방인 논쟁 (1-25)
  2. 안디옥 교회의 설립 (19-26)
  3. 유대의 기근 구제 (27-30)

 

배 경

제11장의 첫 부분에서 다시 고넬료 사건이 문제가 된다. 28장밖에 안되는 사도행전에서 왜 고넬료 사건이 그렇게 크게 다루어지는가? 그것은 예루살렘의 제자들이 이방인을 향해 마음을 여는 일이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11장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드디어 세계선교를 위한 본부가 세워진다. 안디옥 교회이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올린고로 이방인들이 그들을 그리스도인들이라 부름은 지당한 일이었다. 이것은 자신들을 그리스도께 연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고귀한 이름이다.(행적, 157p)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지방에서 잘 할 수 없는, 서울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2. 나는 내가 속한 사회에서 “안식교인” 혹은 “재림교인”이라고 불리우는 것에 대하여 부담감이 없나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스데반의 일”(11:19)과 그 결과로 일어난 좋은 결과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볼까요?
  1. 그들이 용기 있게 헬라인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하니(11:20)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왔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습니까? (11:21)
  1. 바나바는 “착한 사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11:24)이것은 복음 전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1. 바나바는 바울을 찾으러 가서 무엇을 제안하였습니까?. (11:25)
    다메섹도상의 회심 이후 9년이나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있는 바울의 겸손과 신앙을 생각해 봅시다. 본인라면 그렇게 기다릴 수 있을까요?

  2. 안디옥의 신자들은 어떻게 살았기에 사람들이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을까요?(11:26)

생각해봅시다.

  1. 우리 주위에 헬라인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요?
  1. 안디옥교회가 설립된 의의에 대하여 생각봅시다.

안디옥에 있는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애를 통해 즐겨“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소원을 두고”(빌2:13) 일하기 원하심을 깨달았다. 영원한 가치를 지닌 사물에 관해 거의 관심이 없는 듯이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 그들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 저희가 사랑하고 섬기는 분에 대해 적극적인 증거를 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은 겸손히 봉사하면서 생명의 말씀을 효과 있게 만드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날마다 그리스도를 믿는 그들의 신앙을 증거하였다.(행적158p)

 


19. 스데반의 일로. 8:1~4에 나타난 대로, 순교자의 죽음은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광적인 핍박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신자들의 분산을 초래하였다. 빌립은 사마리아와 가이사랴에서 일했다. 다른 사람들은 베니게의 도성인 두로와 시돈 그리고 돌레마이로 갔는데, 아마도 이들은 21:3~7과 27:3에 언급된 교회들을 설립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구브로에는 바나바와 사울의 이후 사역을 위해서 길이 예비되었다(참조 13:4~13). 참조 280쪽 지도.

 

환난. 사울이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던 핍박을 가리킨다(참조 8:1; 9:1, 2).

 

안디옥. 갓 태어난 그리스도 교회가 수리아의 수도와 접촉한 것에 대한 첫 언급이다. 안디옥은 로마 제국에서 로마, 알렉산드리아, 에베소 다음으로 큰 도성이었고,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의 중요 거점이 되었다. 아마도 안디옥의 개종자 니골라(6:5)가 자기의 새로운 신앙을 선포하기 위해 귀환했을 것이다. 그곳으로 그리스도교가 들어간 것은 중대한 의미가 있었다. 실루기아(Seleucia) 항구에서 내륙으로 약 24킬로미터 떨어진 오론테스(Orontes) 강변에 위치했고, BC 300년경 셀류쿠스 Ⅰ세 니카토르(Seleucus Ⅰ Nicator)가 건립하여 그의 아버지 안티오쿠스(Antiochus)의 이름을 따라 명명된 안디옥은, 부와 영향력이 있는 곳으로 성장하여 아시아의 주도적인 도성이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곳의 학자와 문필가들을 극찬하였다. 키케로(Cicero)는 그들 중 한 사람인 아르키아스(Archias)에게 유명한 연설을 하였다. 유베날리스(Juvenal)는 로마 생활과 기호에 미친 안디옥의 영향을 인식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가진 편린(片鱗)이라도 헬라로부터 온 것이 있는가? 수리아의 오론테스 강은 오래 전부터 티베리스 강(Tiber)으로 흘러 들어오면서, 수리아의 방언과 풍습 그리고 피리와 경금현(傾琴絃, slanting harp-strings) 등도 함께 가져왔다”(Satires iii. 62~64; Loeb ed., 37).
안디옥에는 유대인 거류지가 여러 곳 있었는데, 그들을 위하여 헤롯 대왕이 그 도성을 가로질러 대리석 주랑(柱廊)을 건설하였다. 안디옥은 로마의 수리아 행정 장관 즉 총독의 본부였다. 그리스도 교회는 예루살렘이나 가이사랴보다 헬라 문화에 더 가깝게 접촉하는 안디옥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또한 그리스도 교회는 가장 유혹적이고 저급한 형태의 이교와 맞닥뜨렸다. 다프네(Daphne) 신에게 바쳐진 작은 숲들은 방탕한 우상숭배로 유명했다. 교회가 안디옥을 주요 거점 가운데 하나로 삼을 수 있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승리였다.

 

유대인에게만. 이는 물론 고넬료의 회심이 일어나기 전 혹은 고넬료의 회심이 일반적으로 알려지기 전에, 예루살렘을 떠났던 사람들에게는 예상된 것이었다.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그리스도의 예언적 명령이 최대 범위까지 수행(1:8)될 때가 이르렀다는 것을 통보받지 못했다. 유대인만 골라 말한 것은 분명히 베드로와 고넬료에 대한 앞의 이야기와 이어지는 선교사 사역에 대한 진술 모두와 대조되어 언급된 것이다. 

 

20.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 이 사람들의 경우, 좀 더 국제적인 배경을 가진 이들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고향이자 편견의 본거지인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중에 있는 이방인에 비해 어울리는 데 아마도 덜 망설였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짐작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13:1의 선지자 목록에 나오는 구레네 사람 루기오이거나 그리스도의 제자였던 구레네 사람 시몬일 수 있는데, 시몬이라고 추측할 만한 이유가 있다(참조 마 27:32 주석; 참조 막 15:21). 안디옥에 있는 교회의 설립자들은 알려지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21. 주의 손. 구약에서 하나님이 세상 역사에 직접 관여하는 것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참조 출 14: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손”을 뜻하는 히브리어 야드[yad])을 보았으므로.” 애굽 술객들의 진술과 비교해 보라.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출 8:19; 「제임스왕역」에는 “이는 하나님의 손가락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음). 이것은 매우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생동감 있게 표현한다.

 

22. 이 사람들의 소문. 즉 안디옥의 이 회심자들에 관한 소문. 만약 새로 회심한 이 사람들이 이방인이었다면, 그들의 회심 소식에 대해 나타낸 예루살렘의 호의적인 승인은 틀림없이 고넬료를 이미 용납했던 승인 덕분이었을 것이다.
바나바를…보내니. 이는 안디옥에서의 사역을 강화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승인과 지침을 전달하기 위한 것으로,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로 파송된 것(8:14)과 같은 맥락이다.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진행되고 있던 사역에 동조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아마도 바나바가 낙점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사울의 친구였고, 예루살렘에 있던 제자들 일부에게 사울을 소개했으며(9:27), 이방인에 대한 사울의 확신과 소망을 알았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사울은 같은 길에서 일할 기회를 환영했을 것이다. 안디옥에서 일하는 선교사들 일부와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는 더욱 적임자였을 것이다.

 

23. 기뻐하여. 바나바는 오직 이 새로운 사역에서 자신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았으며, 교회에 교인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크나큰 기쁨의 이유가 되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경험과 사역 전체는 언제나 지속적이고 쇠하지 않는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굳은. 바나바는 그들이 시편 기자와 같이 “나의 마음이…정해졌”(시 57:7; 108:1)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랐다.
주께 붙어 있으라. 충성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드려져야 하며, 앞 구절에서 지적한 것처럼 “굳은 마음으로” 그분 안에 남아 있어야 한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인들 위에 임한 하나님 은혜가 이룬 효력의 결과를 보았지만, 모든 참 목사가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사람의 의지 혹은 의지의 부족이 그 은혜를 방해할 수도 있음을 알았다.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라는 말은 옳지 않으며, 사람은 뒤로 물러가 변절하기 때문에 의지의 협력이 성화의 과업을 완성하는 데 필수적이다.
권하니. 혹은 “권하기 시작했으니.” 시제는 지속적인 행동의 시작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24. 착한. 혹은 “올바른”(참조 눅 18:18, 19). 바나바에게 쓰인 이 말은 극찬이었으며, 의심할 여지없이 이 사람에 대한 누가의 개인적인 의견이 표현된 것이었다. 누가는 기록에 이런 좋은 점을 남기는 데 아마도 신중했을 것인데, 이는 바나바가 누가의 친구이자 동역자인 다소 사람 사울과 결별해야만 했던 말다툼을 조금 후에 이야기해야 했기 때문이다(행 15:39).
성령…이 충만한. 안디옥의 헬라계 유대인들 사이에서 저명했던 바나바와 같은 성품의 소유자라면 그 도성에 있던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을 것이다. 동일한 자격이 스데반에게도 주어진다(6:5). 전도자들이 안디옥으로 왔던 것은 바로 스데반의 죽음 후에 이른 핍박의 결과였다. 그들 중 일부는 스데반을 순교로 몰고 간 그 사역에서 활동적이었던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을 것이다.

 

큰 무리. 21절과 관련된 사역 이후 많은 증가를 암시함. “위로의 아들” 바나바의 기쁨과 격려 가운데 표현된 것처럼, 예루살렘 교회가 이뤄진 일에 대해 승인한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이 진실한 일꾼들의 열성을 증가시켰을 것이다.

 

25. 바나바가…다소에. 이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사울이 안디옥에서 진행되고 있던 일에 찬성할 것임을 전제하며, 사울이 그곳 사역을 원조할 적임자라는 바나바의 신임을 보여 준다. 또한 사울이 예루살렘을 떠난 이 후 서신이나 사자를 통해 사울과 어느 정도 왕래가 유지되었음을 암시한다. 추측하건대, 사울은 다소나 그 근처에 머물면서, 그곳과 길리기아의 이웃 성읍에서 복음을 전파했을 것이다(참조 15:41 주석).

 

사울을 찾으러. 문자적으로 “사울을 뒤져내러”(to hunt up Saul). 주님의 현현을 경험했고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할 “택한…그릇”(9:15)으로 지정되었던 그는, 이때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에게 전파하는 이 새로운 사역을 위해 바나바에게 동참하도록 요청받았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효력을 발하고 있음을 이미 들었기 때문에, 사울은 초청을 수락하였다.

 

26. 교회에. 교회 건물이 아니라 회중을 가리키는데, 3세기가 되어서야 건물들이 교회의 소유에 들었기 때문이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신자들과 만나 복음 기별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가 무섭게 교회 조직으로 편입되었다.
일 년간. 앞선 사례들과는 달리, 여기서는 기간이 정확하게 주어진다. 사울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서, 말하자면 목숨을 걸고 전파하였다. 안디옥에 있는 교회에서 그는 그의 열심에 어울리는 안정도와 광범위한 기회를 발견하였다.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더 정확하게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받게 되었더라.” 배교자(the Apostate)라고 불린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AD 361~363년)는 풍자 형태로 별명을 창안하는 경향이 당시 안디옥 주민의 특성이었다고 언급하였다. 분명히 동일한 경향이 그리스도교가 최초로 나타났던 시기에도 유행하였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의 첫 음절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헬라어 크리스토스(Christos)에서 온 것인 반면 마지막 음절은 본래 라틴어인데, 이는 폼페이우스(Pompey)의 추종자들인 폼페이아니(Pompeiani) 같은 단어 및 다른 호칭들과 비교할 만하다. 유사하게 복음서에도 헤롯 당원(헤로디아나이[He-ro-dianai], 마 22:16)이라는 유사한 용어가 나타나는데, 이는 로마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어쩌면 이교도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조롱조로 이 호칭을 붙였을지도 모르는데, 루테라니(Lutherani) 곧 루터파라는 용어가 1,500년 이후 루터 추종자들의 적들에 의해 조롱조로 사용되었던 것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 호칭을 자신들에게 붙이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 호칭의 사용은 이 호칭을 지닌 이들이 그리스도 곧 메시야의 추종자들임을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들에게 이 호칭을 붙이지도 않았음이 분명하다. 새로운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분명하다. 이들 새 이방인 회심자들이 안디옥 교회에 동참했을 때, 이전의 어떤 이름도 국제적인 전체 조직을 포함하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더 이상 나사렛인도 갈릴리인도 헬라파 유대인도 아니었으며, 따라서 안디옥 사람들의 눈에는 특이한 혼종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라틴어 어미를 지닌 헬라어 즉 혼종어(混種語)인 “그리스도인”이 그들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보였다. 처음에는 조롱하는 말이었지만 후에는 영광스러운 이름이 되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말고”(벧전 4:16).
그러나 전승에서는 이 호칭의 기원을 안디옥의 1대 주교인 유오디우스(Euodius)에게 돌린다. 그곳 교회의 지도자로서 유오디우스의 계승자인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이 호칭을 자주 사용하였다.

 

27. 선지자들이…이르니.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2:17)에서 인용되었던 요엘의 예언에 대한 성취로서, 어린 교회에 선지자들이 있었음이 분명하다(참조 행 13:1, 2; 엡 2:20). 그러나 우리는 신약 기록들로부터 이 “선지자들”의 직무가 무엇이었는지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를 소유했고,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해석하는 일에 종사했으며, 때로는 여기서 아가보가 그랬듯이 미래 사건들을 예언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참조 행 13:1; 15:32; 19:6; 21:9, 10; 롬 12:6; 고전 12:10, 28, 29; 13:2; 14:6, 29~37). 선지자들의 사명은 분명히 사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수행하고 있었던 사역에 대해 예루살렘 교회가 부여한 부가적 승인으로 여겨졌음에 틀림없다.

 

28. 아가보. 바로 이 선지자가 후에 가이사랴와 관련된 이야기에 등장한다(21:10, 11).
천하. 헬라어 오이쿠메네(oikoumene-).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을 가리키는 단어. 눅 2:1; 눅 4:5과 신약의 다른 곳에서, 이것은 로마 제국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크게 흉년. 이 흉년은 아마도 요세푸스가 언급한 것으로 보이는데(Antiquities xx. 2. 5), 그는 티그리스(Tigris) 강 동편 아디아베네(Adiabene)의 여왕인 헬레나(Helena)가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동안 어떻게 백성들을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옥수수와 구브로의 마른 무화과를 얻어다가 도와주었는지를 말한다. 이 흉년은 마 24:7에 있는 예수의 예언에 대한 부분적인 성취로서 보여질지도 모른다. 이 사건과 신약 연대기의 관계를 알려면 제12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설명 1을 참조하라.
글라우디오. (「제임스왕역」에는 가이사 글라우디오[Claudius Caesar]). 본문상의 증거(참조 20쪽)는 “가이사”가 생략됨을 입증한다. 글라우디오의 통치는 AD 41년부터 54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 기간은 빈번한 흉년으로 유명하다(Suetonius Claudius xviii. 2; Tacitus Annals xii. 43).

 

29. 제자들이. 즉 안디옥 교회의 제자들.
그 힘대로. 문자적으로 “각각 번영한 대로.” 예언의 영향으로 모금 활동은 흉년이 임하기 전에 이뤄졌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사울과 바나바는 이방인들을 적극적으로 독려하여 후원하도록 했을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롬 15:25, 26)을 위한 모금 활동의 시초로, 후에 바울의 사역에서 매우 두드러졌으며(참조 행 24:17; 고전 16:1; 고후 9장; ) 사도가 교회의 유대인 계층과 이방인 계층 사이의 연합을 위한 끈으로 간주했다. 예루살렘의 회심자들은 타오르는 첫사랑에서 나온 관대함(행 2:45)과 그에 수반된 핍박(행 8:1)으로 인해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보다 가난의 압박에 더 노출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흉년이 다가왔을 때, 흉년에 영향받지 않은 지역에 위치한 교회들의 도움에 많이 의존했을 것이다. 안디옥 교회는 다른 교회들에게 훌륭한 모본을 보였다.

 

30. 장로들. 헬라어 프레스뷔테로이(presbuteroi). 문자적으로 “연만한 [남자].” 이것은 그리스도 교회의 이 직원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다. 그들은 아마도 사도는 아니었을 것인데, 이는 15:2, 4, 6에서 장로를 사도와 구분하여 언급하기 때문이다. 이 후부터 그들은 교회 조직의 두드러진 요소로 등장한다. “장로”라는 용어, 넓게는 이것이 언급하는 교회의 직책은 이방인과 유대인 생활 모두에 배경을 두고 있었다. 애굽의 파피루스는 “장로들”이 지역 주민들의 경제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입증한다. 그리하여 토지 임대와 세금 납부와 관련된 질문들로 인해 그들에게 간청이 들어왔다(참조 J. H. Moulton and G. Milligan, The Vocabulary of the Greek Testament, 535). 소아시아에서 이 용어는 시의회 의원을 가리켰고, 애굽에서는 신전의 사제를 가리켰다(참조 A. Deissmann, Bible Studies, 156, 233). 유대인 생활에서 “장로”(프레스뷔테로스[presbuteros])는 지역 회당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는데, 이는 테오도투스 명각(Theodotus Inscription)을 통해 입증된다(참조 6:9 주석). 이것은 또한 산헤드린의 평민 의원(히브리어로 즈케님[zeqenim])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참조 4:5 주석). 이렇게 하여 이 용어는 그리스도 교회가 지역 회중 가운데 주요 책임들을 맡은 직원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될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 이 지역 책임자들뿐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 또한 유대 산헤드린의 즈케님의 지위와 약간 유사한 지위를 점하고 있었을 것인데, 이는 사도들과 함께 그들이 자신들의 회중의 한도에 상관없이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15장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다. 이번 경우에서 안디옥에서 모금된 기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분배되도록 바나바와 사울의 손을 통해 보내진 대상이 바로 이들이었다. 
초기교회에서 장로는 또한 “감독”이라는 뜻의 에피스코포스(episkopos)로 알려졌는데, 이것은 영어에서 “bishop”이라는 단어로 편입되었다. 역사상 적어도 AD 3세기 이후 “장로”와 “감독”(bishop)이라는 용어는 교회의 서로 다른 두 직책을 나타냈지만, 신약의 증거는 사도 시대에는 두 용어가 동일한 직책을 가리켰음을 분명하게 지적한다(참조 딤전 3:2~7과 딛 1:5~9; 참조 행 20:28 주석; 참조 빌 1:1).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 AD 96년경)는 이 둘을 동일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고(Epistle to the Corinthians 44), 크뤼소스톰(Chrysostom, AD 407년 사망)도 “옛날에는 장로들이 감독관들(혹은 감독들)과 그리스도의 성직자들(혹은 집사들)로, 감독관들이 장로들로 불렸다”고 단언하였다(First Homily on Epistle to the Corinthians 1, in Migne, Patrologia Graeca, vol. 62, col. 183).
야고보의 서신에 의하면 장로의 의무 중 하나는 환자들을 방문하여 그들의 건강 회복을 위해 주님에게 기도하고, 치유를 위해 그들에게 기름을 붓는 것이었다(5:14). 후기의 장로와 감독 직책의 발전 과정에 관한 논의를 보려면 제12권 논문 “초기 그리스도 교회” Ⅷ장을 참조하라.

행 10:1-48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7]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9]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17]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21]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22]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 대
[23]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내용 요약

  1. 고넬료의 환상 (1-8)
  2. 베드로의 환상 (9-22)
  3. 베드로의 방문 (23-48)

배 경

제9장에서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할 인물을 준비하신 주께서는 10장에서 베드로로 하여금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고 이방인에게 성령이 내리는 것을 목도하고 그들에게 침례를 베풀게 하심으로서 베드로와 사도들, 즉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마음을 여신다.

 

만일 그분의 동역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기회를 활용하는 사람들이 되어 용감하고 충실하게 그들의 의무를 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 지성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을 개심시키실 것이다. (행적, 140p)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나와 신앙적인 입장이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선입견을 가지고 만났다가 그 사람의 태도와 인품에 감동된 적이 있나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재림교회의 특별한 빛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든 적이 있나요?

  2. 비 재림교인이 재림교인인 나를 보고 재림교회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가진 적이 있나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사도행전 10장에서 경건의 3요소를 찾는다면?(10:2)

  2. 고넬료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요. (10:1,2, 22, 25)

  3.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10:15)하신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무슨 음식이나 가리지 말고 잘 먹으라고 하신 말씀입니까?

  4. 베드로가 고넬료 집을 방문한 사실은 왜 그렇게 사도행전에서 중요할까요?

 

생각해봅시다.

  1. 고넬료의 신앙처럼 겸손하고 경건하기 위하여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2. 나와 신앙적인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깊이 이해하고 돕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봅시다.

 

주께서는 당신의 지혜로서 진리를 찾는 사람들을 이미 진리를 아는 이와 접촉하게 하신다. 빛을 받은 사람들이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나누어 주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시다. 지혜의 큰 근원으로부터 그 능력을 얻는 인간이 일하는 대리인, 즉 통로가 된 그를 통해서 복음이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에 변화시키는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행적 134p)

 


1. 이달리야대. 이것은 유대-로마 전쟁 기간에 수리아에 주둔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달리야 제2보병대(Cohors Ⅱ. Italica)일 것이며, 본 이야기가 일어난 시기 이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보병대는 노예 신분을 벗은 자유민 혹은 적어도 비로마인 출신의 남성들로 구성되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궁수로 구성된 원군 보병대였다.
  백부장. 참조 눅 7:2 주석. 백부장은 약 100명의 부하들을 통솔하였다. 그는 부대 직속 지휘권을 가졌고 부대원들이 임무를 수행하는지 살피고 기강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은 부장교 지위를 차지하였다. 백부장은 로마 군대에서 고위직으로 승진이 쉽지 않았다. 고넬료는 로마 시민이었다.

2. 온 집으로. 고넬료는 자기를 위해 고귀한 진리를 발견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이것을 자기의 가족과 하인들 그리고 자기의 영향 아래 있는 다른 이들에게도 나누어 주고자 했다. 베드로를 찾기 위해 파송된 병사도 “경건”(7절)하다고 일컬어졌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한 사람”이라는 표현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라는 유사 구절과 이 표현은, 유대교를 받아들여 여호와를 경배하게 된 고넬료 같은 이방인들을 언급하는 곳에서 누가가 반복적으로 사용한다(10:22, 35; 13:16, 26, 50; 16:14; 17:4, 17; 18:7). 많은 경우에 이것은 적어도 안식일 준수와 율법에서 금지한 음식을 삼가는 것 역시 포함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들이거나 경건한 유대인이 되려면 지켜야 하는 모든 규정을 철저하게 순종하지는 않음으로 유대교에 전적으로 동화하지 않았다(참조 제10권, 69~71).
이 표현들은 적지 않게 학자들의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70인역」에는 “경외하는 자들”(대하 5:6)이 언급돼 있는데,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완전히 유대인이 된 사람’(full-fledged Jews)과 구별되는 특정 계층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요세푸스(Antiquities xiv. 7. 7 [110]; Loeb ed., vol. 7, 505)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을 세계 각처에서 성전으로 예물을 보낸 자들이라고 말한다.
사도행전에 언급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과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이 “문간의 개종자”(proselytes of the gate)와 동일하다는 추가적인 주장이 조성되기도 했는데, 이들은 여호와를 경배하고 유대 율법의 일부를 준수했지만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한 유대인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반(半) 개종자들의 인가된 무리로 구성되었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 설명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므로 흔히 주장해 온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혹은 “하나님 경외자”)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회당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던 특정 계층으로, 반(半) 유대교 개종자를 가리키는 신약 시대에 사용된 전문 용어로 보인다. 후기 유대교에서 그것과 유사한 용어인 “하늘을 경외하는 자”도 그러한 무리를 대표했을 것이다. “하나님 경외자들”은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지위를 누릴 수 없었고, 따라서 유대교와의 관계는 대부분 비공식적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로마 세계 전반에 걸쳐 이러한 경건한 사람들의 존재는 그리스도인 전도자들에게 이방인 청중을 마련해 주었는데, 이들은 유대교의 율법주의에 맹목적으로 묶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고 유대인의 성경(특히 「70인역」)과 유대인의 신조들에 어느 정도 정통하였다.

많이 구제하고. 고넬료는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눅 7:5)라고 유대인들이 언급했던 다른 백부장처럼 관대하였다.

기도하더니. 구제와 기도가 함께 이루어지는 것은 유대교와 초기 그리스도 교회에서 흔한 일이었다(참조 마 6:2, 5; 행 10:4; 벧전 4:7, 8).
뒤이은 환상은 의심할 여지없이 고넬료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길을 아는 더 큰 지식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구하고 있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참조 행 11:14).

3. 제구시. 성전에서 있는 오후 기도 시간이었다(참조 마 27:45; 행 3:1 주석). 고넬료는 유대인의 기도 시간을 택했던 것으로 보이며, 환상이 그에게 주어졌을 때는 기도하는 동안이었다(10:30).

4. 두려워. 천사는 “빛난 옷”을 입은 “한 사람”으로 불린다(30절; 참조 1:10). 천사의 갑작스런 출현으로 고넬료는 잠깐 동안 두려워 떨었다. 그리스도의 무덤을 지켰던 로마 병사들은 고넬료가 그랬던 것만큼 영적으로 조율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 천사의 찬란한 영광 앞에서 떨며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참조 마 28:2, 4; 단 10:7~11).

상달하여. 더 정확하게는 “피어 올라가서.”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로 올라가는 향(참조 계 5:8; 8:3, 4) 즉 “올라가는 것”을 뜻하는 히브리어 올라(‘olah)라고 불린 번제의 연기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저녁 제사 시간에 드린 기도를 가리키는 적절한 표현이다(참조 행 10:3 주석).

욥바로.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의 거리는 약 48킬로미터이다. 욥바는 요나가 이방인들에게 생명으로 입증된 기별을 설교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을 때 달아나기 위해 이르렀던 도성이다. 이때, 동일한 도성에서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부르심을 받을 것이었다.

지붕. 헬라어 도마(do-ma). “건물”, “집.” “집 위에 올라간”다는 말은 곧 지붕에 올라가는 것을 의미했는데, 동방에서는 지붕이 대개 평평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기도와 명상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욥바 같은 도성에서 그리고 피장의 집에서 그곳은 아마도 그러한 목적에 어울리는 유일한 장소였을 것이다. 지붕을 다른 용도로 사용한 실례에 관해서는 삼상 9:25; 렘 19:13; 마 10:27을 참조하라. 

10. 시장하여. 먹으려 한 점으로 보아 베드로가 금식 중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한낮에 시장함으로 인해 그는 먹으라는 명령을 따를 채비가 되어 있었는데, 그 명령은 환상과 연관되어 그에게 주어질 것이었다(13절). 이런 형편 가운데서 그 명령은 특히 설득력이 있었다.

비몽사몽간. 헬라어 엑스타시스(ekstasis). “비켜섬.” 확대 해석하면 정상적인 환경에서 마음이 이탈한 것을 의미한다. 영어 단어 “ecstasy”(무아경)는 엑스타시스에서 유래되었다. 누가는 이 단어를 성전에서 바울이 환상을 보았던 사건에서 다시 사용한다(22:17). 이 단어는 「70인역」에서 아브라함의 깊은 잠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된다(창 15:12). 이것은 감각들의 정상 행동이 중지되어, 환상이 꿈에서와 같이 정신적으로만 보이는 상태를 나타낸다(참조 고후 12:3). 베드로의 엑스타시스는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통로로 주어졌다.

12. 각색…짐승. (「제임스왕역」에는 “all manner of four-footed beasts of the earth, and wild beasts”[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들짐승과]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본문상의 증거(참조 20쪽)는 “땅에 있는”과 “들짐승”이라는 단어의 생략을 지지한다. 그러나 동일한 구절이 11:6에서 발견된다. 이 환상은 피조된 모든 동물을 상징하였다. 유대인에게 허용된 음식과, 금지되었지만 이방인들이 음식으로 사용한 것 모두를 나타낸 것이 분명하다.

13. 잡아 먹으라. 베드로는 시장했고, 식욕이라는 본능적인 이 충동을 하늘에서 들려 온 음성이 승인했다. 그가 거절한 이유는 양심 때문이었다. 베드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라졌음(갈 3:28, 29)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베드로가 이 환상 후에도 이를 충분히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이 후에 안디옥에서 드러난 그의 위선에 나타나는데, 이로 인해 바울이 그를 사정없이 꾸짖었다(갈 2:9~21).

14.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베드로가 심지어 하늘로부터 들린 음성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항변한 것은 그의 성격에 걸맞는다(참조 마 16:22; 요 13:8). 여기서 그의 절규는 이스라엘이 부정한 음식을 먹는 것을 예기했던 에스겔의 절규를 생각나게 한다(겔 4:14). 불결한 고기를 절제하는 것은 유대인의 가장 특징적인 표시 중 하나요, 엄격하게 준수했던 구분이다. 이것은 마카베오 전쟁 동안 유대인과 시리아인 사이에 가장 기본적인 논점 중 하나였는데(참조 마카베오2서 6:18~31), 이는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걸려고 했던 유대인들에게 쐐기를 박는 논점이었다. 
그러나 레 11장에서 명확하게 드러난 정결한 짐승과 불결한 짐승의 구분은 유대 국가가 생기기 전에 있었다. 이 구분은 하나님이 세웠고, 노아가 동물들이 방주로 들어오는 것을 감독할 때 고려했다(창 7:2; 참조 8:20). 사람의 최초의 음식은 과일, 곡물, 견과였다(창 1:29). 육식이 이 식단에 첨가되기 전(창 9:2, 3)에 이미 정결한 짐승과 불결한 짐승의 구분은 분명해졌다. 그러므로 불결한 음식에 대한 금지가 십자가에서 유대인의 의식법이 폐했을 때 제거되었다는 주장에는 만족할 만한 근거가 없다. 베드로의 환상에서 이 음식 규정들은 유대인들이 사람들-그들 자신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지칭했고, 따라서 여기서는 이런 구분을 폐기하는 것이 주요 쟁점이었다(참조 창 9:3; 레 11장; 행 10:15 주석; 레위기 제1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15.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 환상 중에 정결한 짐승과 불결한 짐승들은 동일한 입지에 있었고, 동일한 보자기에 담겨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생물의 전반적인 혼합을 상징했으며, 그것들 중에 아무것도 속되거나 불결하다고 일컬어지지 않았다. 이 환상을 해석할 때, 이것이 신체적으로 배고픈 상황에서 주어졌지만(10절) 음식이 아니라 사람과 관련되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베드로가 경험해야 할 배고픔은 도처에 있는 각양각색의 영혼을 향한 갈망이 되어야 했다. 이 교훈을 적어도 부분적으로 알게 된 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28절)라고 단언하였다. 일반적으로 불결하다고 여겨진 이방인들은 베드로의 영적인 봉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주저 말고 그들을 섬겨야 했다. 그들은 더 이상 불결하다고 여겨져서는 안 되었다.

16. 세 번 있은. 이 환상은 세 번 반복되었고, 따라서 의심할 여지없이 사도의 마음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바로의 꿈은 두 번 주어졌고(창 41:32), 예수는 베드로에게 “네 어린양을 먹이라” 혹은 “네 양을 먹이라”라는 명령을 세 번 반복했었는데(요 21:15~17),  이제 그 명령은 그에게 새롭고 더 완전한 의미를 띠고 다가왔을 것이다. 

18. 불러. 즉 집 안에 있는 누군가가 나오도록 “불러.” 의심할 여지없이 사자들도 고넬료처럼 이방인이었으므로, 자신들이 왔음을 알리지 않은 채 유대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머뭇거렸을 것이다.

19. 베드로가…생각할 때에. 베드로는 곤란한 상황을 숙고하며 이 환상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가르치려고 의도했는지를 묻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상고하는 동안 설명이 있었다.

성령께서…말씀하시되. 베드로는 더 이상 비몽사몽간에 있지 않았다. 하나님의 영이 이때 그의 영혼 내부 깊은 곳에서 이야기하였다. 성령의 가르침은 베드로에게 파견단의 도착과 그가 본 환상을 연결해야 한다고 암시했다.

두 사람. (「제임스왕역」에는 “세 사람”이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고넬료가 보낸 두 종과 종졸 한 사람(7절). 

20. 내려가. 베드로는 아직 지붕 위에 있었다.
의심. 혹은 “주저함.”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베드로는 주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아직 알지 못했으나, 후에는 알게 될 것이었다(요 13:7). 베드로와 고넬료의 사자들은 성령의 지시에 따라 행동한다는 점에서 똑같았다. 그 환상은 베드로에게 여행을 해야 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지 않았다. 이제야 베드로는 이것에 대해 알게 되어, “의심치 말고”라는 말이 여정을 마친 후에 유대인과 다른 인종 사이에 아무런 구분을 두지 말아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그 환상은 점차 이해되었고, 당혹감은 제거되었다.

23. 불러들여. 베드로가 이 이방인들을 집으로 불러들인 것은, 유대인들이 비유대인들을 향해 품고 있던 종교적 관념을 버리는 데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었다.

이튿날. 베드로가 기도하기 위해 지붕에 올라간 때가 정오쯤이었으므로, 그의 환상 후에 사자들이 도착한 것은 이른 오후였음에 틀림없다. 약 48킬로미터 떨어진 가이사랴를 그날 안에 가기에는 너무 늦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다음날이 돼서야 출발했다. 또한 사자들도 욥바까지 여행한 후여서 휴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두어 형제. 이 사람들은 물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45절)이었으며, 11:12에 따르면 그들은 여섯 명이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말을 기억하였다.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마 18:16). 그는 자신이 한 것은 무엇이든 그들이 교회에 보고하기를 바랐다. 후에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증언이 유용했다는 것이 행 11:12에 암시되어 있다. 틀림없이 베드로가 자기의 환상과 고넬료의 종들이 가지고 왔던 기별을 알렸을 것이다. 고넬료의 좋은 평판에 힘입어 그들은 베드로와 기꺼이 동행하기로 했다.

 

24. 이튿날. 고넬료의 사자들이 욥바로 오는 길에 그랬던 것처럼(참조 7~9절, 17절), 베드로와 그의 일행도 가이사랴로 가는 여정에 하룻밤을 묵었을 것이다. 그들은 지중해 해안 길을 따라갔다.
고넬료가…기다리더니. 더 정확하게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더니.” 그의 준비 태도는 그가 자기의 환상이 사실이고,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라는 것을 얼마나 확신하였는지 보여 준다.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 의심할 여지없이 고넬료의 종교심에 다소간 동감했던 고넬료의 통솔 아래 있던 병사들과 지역 사회의 친구들이 이들 중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받을 새로운 빛의 범위 안으로 가능한 많은 사람을 데려오고자 하였다.

행 9:1-31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침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내용 요약

  1. 박해자-다소 사람 사울, 9:1, 2
  2. 사울이 환상 중에 그리스도를 만남과 그에 따른 회심, 9:3~17
  3. 그의 침례와 첫 전도, 9:18~22
  4. 그를 죽이려는 유대인의 음모, 9:23, 24

배경

8장에서 복음이 사마리아로 전파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9장에서는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데 쓰임을 받을 사도바울을 준비하신다. 바울의 회개는 개인의 구원차원을 넘어 교회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9장의 내용은 바울의 회심과 중풍병자를 고치고 도르가를 살려 내는 베드로의 활동이다.

 

하늘의 빛이 비추이고 있는 그 시간, 사울의 마음은 놀랍도록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는 성경의 예언을 깨달았다. 그는 유대인들에 의한 예수의 거절, 그의 십자가의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선지자들이 이미 예언하였고, 그분이 약속된 메시야임을 증명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울의 마음에는 순교할 때의 스데반의 설교가 힘있게 떠올랐으며, 순교자가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말하였을 때, 순교자는 실제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음을 깨달았다(행 7:56, 55).(행적, 113p)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 있다면?(물건, 색깔, 캐릭터등)
  2. 그릇된 열성으로 일을 망친 것을 본 적이나 경험한 적이 있나요?
  3. 부모님을 가장 고통스럽게 한 일이 있다면 어떤 일인가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바울이란 인물에 대해 알아봅시다.
    • 그는 철저하게 유대인이었다.
      (빌 3:4-6, 개정)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 그는 철저하게 이방적 (헬라적)인 배경에서 살았다.
      (행 22:27,28, 개정)
      [27]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28]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 바울의 가정 - 아마도 부유하고 경건한 가정이었을 것이다.
      (행 24:26, 개정)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 바울의 교육 
      (행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2. 정당화시키려는 공적인 힘(공문)과 그릇된 열성의 위험에 대하여 이야기해봅시다.(9:2)

  3. 자신의 삶에 바울처럼 주님을 만난 영적인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9:3-10)
    어둠 속에 있던 그에게 한 빛이 비칠 때는 정오(22:6)였다.
    그 빛은 태양 빛보다 더 밝은 빛(26:13)이어서 그는 눈이 멀었다.
    그 빛은 참빛이신 그리스도이셨다. (요1:9) 이때 눈이 상한 것이 일생동안의 지병이 되었으며 (갈 4:13-15, 6:11) 또 육체의 가시(고후 12:7)가 되었다고 한다.

  4. 주께서 말씀하신 바울의 사명은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졌습니까?(9:15)
    그릇은 인상적인 표현이다. 주인이 쓸 수 있는 그릇은 비어 있어야 한다. 비어있지 않은 그릇은 쓸모가 없다.

 

생각해봅시다.

  1. 주님의 그릇이 되기 위해 내가 비워야 할 것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2. 나에게 주어진 복음 사명이 있다면?
공포에 사로잡히고 강렬한 빛으로 거의 눈이 먼 사울의 동료들은 어떤 음성은 들었으나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울은 들은 말을 깨달았으며, 그에게 말씀하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이 그에게 분명하게 나타났다. 사울은 그의 앞에 서신 영광스러운 분에게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분을 보았다. 그 상처받은 유대인의 영혼 위에 구주의 얼굴 모습이 영원히 인각되었다. 그분의 말씀은 놀라운 힘으로 그의 마음을 찔렀다. 그의 어두운 마음 구석에 큰 빛이 비쳐 들어와 과거 생애의 무지와 과오, 그리고 현재 성령의 교화하심의 필요를 깨닫게 하였다.(행적 113p)

 

 


1. 등등하여. 헬라어 엠프네오(empneo-). “숨을 들이쉬다” 또는 “입김을 내뿜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고 학살하는 것은 사울이 호흡하는 공기나 다름없었다. 셈족은 종종 분노의 감정을 호흡과 결부시켰다.

대제사장. 안나스 혹은 가야바(참조 4:6 주석). 두 사람 다 사두개인이었지만, 사울은 엄격한 바리새인인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26:5). 하지만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자연스럽지 못한 동맹(참조 제10권, 56~58)도 이 단호한 박해자를 단념시키지는 못하였다. 전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항하여 형성되었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간의 제휴는 그분의 추종자들에 대항하여 다시 이루어졌다.

2. 다메섹.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 전승에 따르면 이곳은 아벨이 살해된 현장이다. 요세푸스(Antiquities ⅰ. 6. 4 [145])는 셈의 손자인 우스가 이 성읍을 건설했다고 여긴다(참조 제1권, 248). 아브라함의 역사에서는 그의 청지기 엘리에셀의 출생지로 나타난다(창 15:2). 다윗은 이곳에 수비대를 두었으나(삼하 8:6), 르손의 지배 아래 솔로몬 반대 세력의 중심지가 되었다(왕상 11:23~25).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문둥병자 아람(수리아)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눈에 이스라엘의 어느 강보다 좋아 보였다(왕하 5:12). 이곳은 아람 왕국과 이스라엘 및 유대와의 동맹과 전쟁의 중심지였고(왕하 14:28; 16:9, 10; 암 1:3, 5), 에스겔의 기록에 따르면, 두로와 물품, 포도주, 흰 양털을 무역하였다(겔 27:16, 18). BC 333년에 마게도냐 장군 파르메니온(Parmenion)이 알렉산더 대왕을 위해 이 도성을 점령했으며, BC 64년에는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Pompey)가 점령했다. 사울의 회심 당시 이곳은 로마의 수리아(Syria) 총독 비텔리우스(Vitellius)의 관할 아래 있었다. AD 37년 디베료(Tiberius)가 죽었을 때, 비텔리우스는 서둘러 로마로 갔고, 나바태아인(Nabataeans)의 왕 아레타 Ⅳ세(Aretas Ⅳ)가 다메섹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그곳을 다스렸다. 이로 인해 사울은 이 도성에서 빠져나갈 당시 문제에 봉착하였다(고후 11:32).
 (1)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유대 지방에서 상당한 거리에 있는 이곳으로 피난했다. 
(2) 다메섹의 시민 가운데 그리스도인 회심자들이 있었다. 
(3) 다메섹이 확장 일로에 있는 교회의 외곽 중심지가 되었을 수도 있다. 
(4) 사울이 유대 당국자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리스도인을 대항하는 데 그들의 협력에 의존할 수 있었다.

회당. 이곳은 국제적인 도성이었고, 따라서 각 나라에서 온 유대인들이 살았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처럼(참조 6:9 주석) 유대 동족들은 자신들의 회당을 세웠을 것이다. 당시 다메섹에는 30개 내지 40개의 회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은 회당에 신실하게 참석하고 있었고, 따라서 사울이 바로 그들을 잡으러 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공문. 사울의 “권세와 위임”(26:12)을 정한 문서들. 이는 로마가 도주한 유대인들을 송환하는 권력을 대제사장에게 부여함으로써 유대 당국자들과 협력했음을 드러낸다. 이 권세는 아마도 BC 56년경부터 주어졌을 것이다(Josephus Antiquities xiv. 8. 5 [146~ 148]; 참조 마카베오1서 15:15~24).

3. 비추는지라. 더 정확히 말해 “번쩍였다.”22:6과 26:13은 이 시각이 정오라고 밝히고 있다. 동방의 한낮의 태양 광선도 눈부셨지만, 후에 바울은 하늘로부터 온 그 빛을 “해보다 더 밝은 빛”(참조 26:13 주석)이었다고 말한다. 이 광채 가운데서 바울은 영광스럽게 된 그리스도를 너무도 선명하게 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 후 주님을 바라보는 특권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자신을 포함시킨다(행 9:17; 고전 9:1; 15:8; 사도행적, 115). 출현한 모양에 대해 말하자면, 스데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참조 7:55, 56 주석).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라고 한 순교자 스데반의 말은 불 같은 열성을 지닌 바리새인인 사울에게는 신성모독처럼 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 사울이 성부의 영광 중에 있는 인자를 본 것이다. 사울의 동행자들은 음성을 들었으나 말소리를 분별하지는 못했다(참조 22:9; 참조 9:7 주석). 그들은 빛을 보았으나(22:9), 말하는 그분의 형상을 감지하지는 못했다(참조 12:29 주석). 이런 세부 사항들은 사건의 실재성을 증명한다.

4. 엎드러져. 하늘에서 비친 빛에 압도되어 여행자들은 모두 땅에 엎드러졌지만(26:14), 누가는 여기서 사울만 언급한다. 여행자들 중 그 누구도 말 위에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들으매. 9:7과 22:9의 비교는 사울이 그에게 말한 목소리를 듣고 이해한 반면, 그의 일행은 무슨 말이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소리만 들었음을 시사한다(참조 9:7 주석).

사울. 지금까지 기사에서는 사울의 이름이 헬라어 형태인 사울로스(Saulos)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곳과 9:17; 22:7, 13; 26:14에서는 히브리어 형태인 사울(Saoul)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1) 26:14에 나타난 대로 히브리(아람) 방언으로 말했던 예수(참조 제1권, 30)와 (2) 유대인이기 때문에 히브리어(아람어)로 말했을 아나니아가 실제로 사용한 단어가 무엇인지를 반영할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전달할 때 이름을 반복하여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창 22:11; 삼상 3:10; 마 23:37; 눅 10:41; 22:31을 참조하라.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리스도가 박해자에게 던진 통렬한 질문이다. 이것은 그의 행동의 기초에 도전하는 질문이며, 따라서 그가 그렇게도 잔혹하게 핍박했던 분을 알지 못했음을 드러냈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제자들과 너무나 동일시한 나머지 그들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이 된다고 한 사실을 주목하라(사도행적, 117).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사 63:9)하며,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슥 2:8)으로 여겨졌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행한 것을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여겼다(마 10:40).

5. 주여 뉘시오니이까. 아직 사울은 “주”라는 단어를 신약에 나타난 온전한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경외심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발언이었다(참조 요 1:38 주석). 하지만 사울은 신적 존재를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하고 “주”라는 말을 사용하여 경외심을 표했다.

네가 핍박하는. 앞에 나온 “나”라는 대명사와 마찬가지로 “네”도 헬라어 구문상 강조하는 표현이다. 사랑과 능력과 영광으로 옷 입혀진 그리스도와, 핍박하는 자였으나 이제는 엎드려 두려워하는 사울이 극명하게 대조되어 있다. 

7. 소리만 듣고. 헬라어 아쿠온테스…테스 포네스(akouontes…te-s pho-ne-s). 얼른 보기에 이 진술은 동행자들이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텐…포넨 우크 에쿠산[te-n…pho-ne-n ouk e-kousan])라고 바울이 말한 22:9의 기록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기록을 주의깊이 연구해 보면 이런 외관상의 모순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듣다”라는 뜻의 동사 아쿠오(akouo-)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의 능력(참조 마 11:15; 13:15)이나, 들은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참조 막 4:33; 고전 14:2)을 가리킨다. 본 구절에서 “소리”(포네스[pho-ne-s])라고 번역된 단어는 소유격이다. 헬라어에서 이것은 사울의 동행자들이 목소리만 듣고, 말해진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음을 가리킨다. 22:9에서 “소리”(포넨[pho-ne-n])로 번역된 단어는 대격이며, 따라서 이것은 부정어 “못하다”와 함께 사용되어 그들이 소리를 듣고도 말은 뚜렷하게 이해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참조 9:4. 여기서 누가는 알아들은 사울에 대해 말하면서 대격을 사용하여, “[소리를]…들으매”[에쿠센 포넨]라고 말한다). 이 설명은, 22:9에도 사람들이 “빛은 보”았다고 되어 있는 반면, 본 구절에는 그들이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라고 되어 있는 사실로 더욱 뒷받침된다. 그들은 눈부신 빛을 보았지만, 그들의 시력은 빛 가운데서 사울에게 나타난 그분을 식별할 정도로 명확하지 못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목소리는 들었지만, 알아들을 정도로 명확히 듣지 못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10. 아나니아. 아나니아는 유대인들에게 흔한 이름이었다. 바울이 그를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다메섹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이”라고 묘사한 22:12을 제외하고는, 성경에서 이 특정 제자를 언급한 곳은 아무데도 없다. 이런 자질로 인해 그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지도자와 사울을 향한 주님의 사자가 되는 일이 가능하였다.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그리스도의 지상 봉사 기간에 구세주를 따랐거나, 오순절이나 그 이후 유대인 회심자들 중에 속해 있었을 것이다. 그런 뒤 스데반의 죽음 후에 이어졌던 박해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도망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단지 추측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나니아가 사울을 방문하기를 꺼려하는 심정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 표현으로 보아(9:13, 14), 여전히 예루살렘과 신뢰할 만한 교신을 왕래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박해자 사울이 일으켰던 만행과 다메섹에 온 그의 목적을 아나니아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1. 직가. 오늘날 술타니예(Sultaniyeh)라고 알려진 긴 직선 도로가 여전히 고도(古都) 다메섹을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고 있는데, 아나니아가 유다의 집에서 사울을 만나기 위해 걸었던 바로 그 길일 것이다. 현재 거리의 고도(高度)가 사울 당시보다 약 30보 이상 높으므로, 사울이 머물렀던 집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소 사람 사울. 이 구절은 성경에서 사도 바울의 출생지를 처음 언급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다소는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중요한 곳으로 여겨졌다. 이곳은 16킬로미터가량 내륙에 위치했지만, 도성과 바다 사이에 안전한 항구가 있었기 때문에 작은 배가 이 성읍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도성의 경계 너머로 타우루스(Taurus) 산지가 솟아 있었는데, 길리기아 문(Cilician Gates)으로 알려진 협곡을 통해 소아시아 내륙으로 통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고대 도성은 전략적 요충지 말고 다른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곳은 대학가로 이름이 나있었고, 소아시아의 아덴(Athens of Asia Minor)으로도 알려졌다. 이곳의 학자들은 과학 기술로 인해 존경받았고, 이곳의 철학자들 중에는 사울의 견해에 일부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는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들도 있었다. 상업 영역에서 볼 때, 사울의 생업이었던 장막 제조업(18:3)이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15.이방인. 목록 가운데 이방인이 첫 번째에 놓인 이유는 사울이 노고를 쏟을 분야가 특별히 그들 가운데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참조 롬 1:13, 14; 11:13 주석). 이것은 독실한 유대인으로서 온 세상이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야만 한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 아나니아에게는 깜짝 놀랄 계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대단한 박해자로만 알았던 사람 안에서, 선택받고 훈련받아 세상 도처에 복음을 퍼뜨리는 사역에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적합해진 사람을 보고 있다.

임금들. 이 구절은 바울이 아그립바 앞(26:1, 2)과 아마도 네로 앞에서 연설한 것(참조 딤후 4:16 주석)에서 충분히 성취되었지만, 꼭 그 일들만 가리키지는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 사도는 이방인들에게 가지만, 바울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유대인들에게도 설교하였다(참조 13:5; 14:1; 17:1, 10; 18:4, 19; 19:8).

그릇. 헬라어 스큐오스(skeuos). “그릇”, “기구.” 이 단어는 신약에서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참조 13:48; 눅 8:16; 요 19:29; 행 10:11; 롬 9:21; 고후 4:7; 살전 4:4). 고전 작가들은 이 단어를 쓸모 있고 신뢰할 만한 노예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 주님이 이방인을 위한 당신의 은혜로운 뜻을 실현할 도구로서 사울에게 스큐오스라는 단어를 적용한 것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택한”(chosen)에 해당하는 에클로게(ekloge-)라는 단어가 신약에서 처음으로 여기에 나타나는데, 다른 경우에는 모두 “택하심”(election)으로 번역되었다.

18. 비늘. 헬라어 레피데스(lepides). 히포크라테스는 안질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로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사울의 눈멂은 초자연적 현시의 결과로 생겼으므로, 그의 병을 현대 의학 용어로 정확하게 밝히려고 시도하는 일은 무익하다. 그러나 누가가 사울의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의학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이해할 만하다.
침례를 받고. 22:16에 있는 자세한 설명은 아나니아가 이 예식에 임하도록 사울에게 권고했음을 보여 준다. 침례가 입교 조건으로 여겨졌음이 분명하다(참조 마 3:6; 행 22:16 주석). 주님의 환상과 계시도, 개인적인 확신의 강렬함도 사울에게서 침례를 면제시켜 주지는 않았다. 침례는 아마도 나아만의 이야기(왕하 5:8~14)에서 언급된 아마나 또는 바르발강 중 한 곳에서 행해졌을 것이다. 이 예식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사도행적, 122) 아나니아가 거행하였다.

20. 즉시로. 그리스도는 사울을 “즉시” 낫게 했고(18절), 사울은 “즉시로” 증거하기 시작했다. 두 경우에 사용된 부사는 동일한 헬라어 단어에서 나왔다.

예수…전파하니. 나사렛 예수가 오랫동안 고대하던 메시야인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것이 유대인들을 향해 사도들이 전한 기별의 요지였다. 베드로의 설교(참조 2:16 주석)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설교에도 강력한 예언적 배경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사도행적, 123, 125,).

22. 힘. 후년에 이 단어는 바울의 사상에서 현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그는 “약한 데서 온전하”게 했던 “능력”이 그리스도였음을(고후 12:9), 그를 “능하게 하신” 또는 사역을 위해 그를 강하게 하신 이가 그리스도였음을(딤전 1:12) 그리고 그의 삶의 마지막 시련들 속에서 “강건케 하신” 이가 그리스도였음을(딤후 4:17) 깨달았다.

증명하여. 헬라어 쉼비바조(sumbibazo-). “결합하다”, “결론적으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연합하도록 하다”라는 뜻이 있으며, 따라서 여기서는 “논증하다”, “증명하다”를 뜻한다. 사울은 메시야의 예언들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능수능란하게 설명하였다.

대학선교센터교회


안식일학교

경배와 찬양 다같이
찬       미 83장
시작기도 기도자
환       영 안교장
특별순서  
교과공부 각 반
헌금소개 사회자
축       도 담임목사

 

기억절 3기 2과 (일몰 : 7시 54분)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3:7,8).

 

7월 시무 안내
시       무 : 임경훈
헌금봉사 : 이한얼 정찬우

 

다음 주 예배순서

금요일예배 안식일예배
날짜 기도 말씀 날짜 기도 말씀
4 김진수 소그룹 5 심정은 김유민
11 이마루 소그룹 12 민대홍 문호준
18 이지오 장막부흥회 19 김우진 배승환
25 임태훈 소그룹 26 함주원 권세진

 


안식일 예배

경배와찬양 다함께
등단 / 묵도 다함께
송        영 2장
기        원 설교자
찬        미 19장
대 표 기 도 민대홍 청년
특 별 찬 양 여집사회
설        교 문호준 장로
찬        미 118장
개 인 기 도 다함께
헌        금 다함께
축        도 설교자

캠퍼스 소식

1. 학생회 활동

 


광 고

  1. 환영합니다.
    기쁜 안식일을 맞이하여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가족들과 손님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2. 7월 정기직원회
    일시 : 점심식사 전
    장소 : 3층 세미나실
    모든 직원은 직원회에 참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3. 학생캠프
    일시 : 7월18일(금)~20일(일)
    장소 : 비전센터
  4. 본부지구 장막부흥회
    일시 : 7월18일(금)~19일(안)
    장소 : 본부교회
  5. 여름 국내봉사대
    일시 : 7월22일(화)~27일(일)
    장소 : 강릉지구
  6. 어린이여름성경학교
    일시 : 7월25일(금)~27일(일)
    장소 : 별새꽃돌 과학관
  7. 담임목사 휴가
    일시 : 7월14일(월)~17일(목)
  8. 일요기도회
    일시 : 매주 일요일 아침7시
     
  • 다음 주 당번
    • 식사당번 : 여집사 1조
    • 청소당번 : 과기광운캠모

캠퍼스 모임

방학중 소그룹 목요일 6시 교회
졸업생 소그룹 화요일 오후 8시 교회
장년 소그룹 화요일 오후 8시30분 ZOOM

 


담임목사 권세진   부목사 배승환   전도사 김유민
수석장로 임동국   서기 문호준  재무 김성미   
선교회장 윤민식  액트회장 윤애리   


헌금계좌 : 하나은행 144-890014-45304
(ACT교회)
주소 :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로1길 11
어린이청소년비전센터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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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8:1-13,26-40

[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9]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0]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1]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그들이 따르더니 [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침례를 받으니
[13] 시몬도 믿고 침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

[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1]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2]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침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37] (없음)
[38]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침례를 베풀고
[39]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내용 요약

  1. 예루살렘 교회의 수난 (1-3)
  2. 사마리아 전도 (4-25)
  3. 아프리카 전도 (26-40)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떠밀려 어떤 일을 함으로 좋은 결과를 이룬 적이 있나요? 어떤 경우였나요?
  2. 당신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전할 복음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요?
  3. 의외의 인물에 의하여 복음사업이 유지되는 것을 본 경험이 있나요? 어떤 사람이었나요?
  4.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한 적이 있나요? 왜 그렇게 간절했나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예루살렘교회의 사람들이 흩어진 이유는?(2절)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나요?(4절)

  2. 환경적, 상황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나요?
    • 운명하신 주님을 위하여 가난한 제자들이 할 수 없었던 그 일을 할 수 있었고, 또한 그들의 재산과 영향력으로 제자들은 제사장들과 관원들의 악의에서 크게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이제 유대인들이 어린 교회를 멸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때에 니고데모는 그 교회를 보호하려고 나아왔다. 니고데모는 그 이상 조심하거나 의심하지도 아니하였고, 제자들의 신앙을 격려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유지하는 일을 돕고 복음 사업을 발전시키는 일에 그의 재산을 사용하였다. 전날에 그에게 존경을 표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를 조롱하고 핍박하였으므로 그는 이제 세상 재물에는 가난하게 되었으나, 자신의 신앙을 옹호하는 일에는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행적104p

  3. 빌립의 전도방법과 자세를 살펴보고, 그것을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나누어보아요.
    ① 일어나서...그 길은 광야라(순종)
    ② 가까이 나아가서 (8:29)
    ③ 달려가서 (8:30)
    ④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고 (8:35)
    ⑤ 침례를 베풀고 (8:38)

  4. 빌립이 전한 기별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이 기별을 우리는 어떻게 전하고 있는지 나누어보아요.
    ①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 (8:5)
    ②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8:12)

생각해봅시다

  1. 내게 있어서 복음을 위해 가야할 광야가 있다면 그곳은 어디 일까요?

  2. 나는 지금 나의 삶 속에서 복음을 어떻게 전하고 있나요?

온 교회가 봉사의 정신을 가지고 각자 자기의 능력에 따라 그분을 위해 일하게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고대해 오셨다. 하나님의 교회의 교인들이 복음 사명을 성취하기 위하여 국내외에서 필요되는 분야에 들어가 그들에게 맡겨진 일을 할 때에, 온 세계는 오래지 아니하여 경고를 받게 될 것이고 주 예수께서는 능력과 큰 영광으로 이 땅에 재림하시게 될 것이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행적 107p)

 


그날. 스데반이 돌에 맞은 일은 교회를 조직적으로 핍박하는 시발점을 이루었다. 스데반을 죽이는 상황까지 간 유대 지도자들은 그 분노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돌렸다.

 

큰 핍박. 앉은뱅이를 고친 후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후(5:17, 18)에 적은 규모의 핍박이 있었던 것처럼, 교회는 다시 한 번 유대 당국자들로부터 핍박을 받는다(4:1~7). 이번 핍박은 범위와 가혹함을 가리키는 “큰”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점에서 이전의 핍박과는 구별된다. 참조 214쪽 지도.

이 핍박에 투옥과 큰 고통이 동반되었음을 1, 3절과 후일 바울의 묘사(참조 22:4; 26:10, 11)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흩어지니라. 헬라어 디아스페이로(diaspeiro-). “낱알처럼 흩어지다”, “분산되다.” 이렇게 하여 원수의 분노는 오히려 그리스도가 예고한 것을 교회가 성취시키도록 돕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1:8). “다”라는 말에 신자 모두를 포함시킬 필요는 없다(참조 1:1 주석). 단지 겁이 더 많은 사람들이나 행동이 빠른 사람들 아니면 핍박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알려진 사람들일 것이다. 어쨌든 남녀 신자들이 그 도시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참조 8:3).

 

잔멸할새. 헬라어 뤼마이노(lumaino-). “약탈하다”, “황폐화시키다”, “파멸시키다.” 이 단어는 「70인역」의 시 80:13에서 “수풀의 돼지가 상해한다”는 표현에 사용되었다. 여기서 사용된 시제는 계속되는 핍박을 나타낸다. 바울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다고 말한다(행 22:4; 참조 26:10). 후에 그가 고백한 것처럼(26:11), 그의 폭력은 일종의 광기어린 만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4. 두루 다니며. 헬라어 디에르코마이(dierchomai). “지나가다, 통과하다.” 선교 사역을 나타내기 위해 누가가 즐겨 사용한 용어이다(참조 눅 9:6; 행 8:40; 9:32; 11:19; 13:6). 이 경우, 새로운 신앙을 박멸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신앙의 활동 범위를 더 넓혀 주었는데, 이것은 주께서 바라신(행 1:8) 대로였다. 이러한 핍박은, 핍박이 없었다면 그 신앙이 상당히 오랜 기간 일부 지역에만 한정되었을 상황을 뛰어넘게 하였다. 후에도 그랬듯이 그때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었다.

 

말씀. 넓은 의미에서 이 단어는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가르침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이 중 많은 부분이 구약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의 대부분이 아직 문서로 기록되지 않아, 자원하는 복음전도자들이 구두(口頭)로 전하는 기별에 의존했다.

 

전파하니. 헬라어 케륏소(ke-russo-). “[전달자로서] 선포하다”라는 의미로, 4절에 사용된 것과는 다른 단어이다. 따라서 안수받지 않은 신자들이 하는 설교보다 좀 더 공식적이고 심도 있는 설교를 의미한다. 침례자 요한과 그리스도(마 3:1; 4:17)의 설교를 가리킬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동사의 시제로 보아 빌립이 계속 설교했음을 알 수 있다.

 

6. 듣고. 문자적으로 “그것을 듣고” 즉 빌립의 말을 듣고. 사마리아인들은 처음에는 아무런 표적도 없이(참조 마 12:38 42) 단순히 그리스도의 설교를 듣고(요 4:39~42) 믿었다. 지금 일어난 이적들은 믿음의 토대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키기 위해 주어졌다. 이 표적으로, 빌립을 통해 역사하는 능력에 관한 모든 의심이 일소되었다. 틀림없이 이 표적들은 마술사 시몬의 영향을 바로잡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행 8:9~11).

 

9. 그 성. 5절에 언급된 성. 9절 본문 가운데 별도로 언급된 “사마리아”는 수도 사마리아가 아니라 사마리아 지역을 가리킨다.

 

26. 사자. 누가는 천사들의 봉사를 주의 깊게 관찰한다(참조 눅 1:38과 행 10:7; 눅 2:9과 행 12:7; 눅 24:4과 행 1:10; 10:30). 헬라어 구조는 베드로와 요한이 전도하는 동안 한 천사가 빌립에게 이야기했음을 시사한다. 그 초자연적 부르심은 이상 가운데 이르러 왔을 것이다(참조 행 10:3의 고넬료).

 

그 길은 광야라. (「제임스왕역」에는 “그것은 광야라”[Which is desert]라고 되어 있음 -역자 주). 이 구절은 마치 독립된 문장인 것처럼 문자적으로 “이것은 광야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천사가 한 말인지 아니면 누가가 덧붙인 설명인지 알 수 없다. “이것”(This)이 “길”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도시”를 가리키는지도 분명하지 않지만, 누가가 어떤 도시를 언급하고 나서 그것을 “광야”로 묘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개정표준역」에는 “이는 광야 길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단순한 믿음으로 빌립은 도중에 겪게 될 기념할 만한 일 즉 한 여행자의 회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예루살렘에서 가사까지 인적이 드물고 그다지 평탄치 않은 길을 가야 했다.

 

에디오피아. 구약의 구스와 마찬가지로 에디오피아는 나일 제1폭포의 남쪽 지역과 오늘날의 에티오피아에 이르는 지역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이다. 에디오피아 북부 지역은 나일강 상류 계곡에 있던 대(大)왕국 메로에(Meroe..)의 영토였다. 이 왕국은 오랫동안 여왕들이 통치했고, 따라서 십중팔구 내시는 이 왕국에서 왔을 것이다. 이 왕국과 유대 민족의 관계는 여러 흥미로운 점을 시사한다.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13(The Letter of Aristeas 13)에 따르면, 프삼티코스(아마도 Psamtik Ⅱ, BC 594~588)라고 불리는 바로가 통치하던 시절에 에디오피아 정복 전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일단의 유대인이 파송되었다. 수 세기 동안 유대인들이 그 지역에 영향을 끼쳤음이 확실하다. 이는 예레미야 시대에 초기 에디오피아의 내시 에벳멜렉의 용기 있는 활동에 반영되어 있다(렘 38:7~13; 39:15~18). 더 이른 시기에도 히브리인들은 그들 국가에 에디오피아인들의 입국을 예상했고 또한 목도했다(시 68:31; 87:4).

 

간다게. 한 여왕의 개인적인 이름이라기보다는, 로마 제국의 캐사르(Caesar), 애굽의 프톨레마이오스, 바로(Pharaoh) 등과 같이 한 왕조의 이름이나 호칭이었을 것이다. 그 이름은 스트라본(Strabo Geography xvii. 1. 54)과 디오 캇시우스(Dio Cassius History liv. 5. 4~6)의 문헌에도 나타난다. 유세비우스(AD 325년경 사망)에 따르면, 그가 살던 당시에도 에디오피아는 여전히 여왕이 통치했다고 한다(Ecclesiastical History ii. 1. 13).

 

국고. 헬라어 가자(gaza). “왕의 보고(寶庫)”, “보물.” 페르시아어에서 유래된 말로, 이 당시 헬라와 라틴 작가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있었다(Cicero De Officiis ii. 22 [76]). 「70인역」 번역자들도 에 5:17; 6:1; 7:21; 사 39:2에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신약 다른 부분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합성어 형태로 성전의 보화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눅 21:1). 빌립은 가자(gaza) 즉 국고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 마 13:44의 비유에 나오는 사람이 부지런히 찾고 찾아 보화를 발견한 것처럼, 이 전도자는 그가 보화를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예배하러. 이 내시는 할례받은 의로운 개종자일 것이며(참조 제10권, 70), 성전 예배에 참여하러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뿐 아니라 개종한 사람들도 그 목적으로 예루살렘에 갔는데, 이는 오순절에 참석한 사람들의 목록에서 알 수 있다(행 2:10). 요 12:20에 의하면 헬라인도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 왔다. 내시는 복을 찾아서 예루살렘에 왔으나, 집에 도착하기 전 그의 모든 예상을 능가하는 한 분을 영접하게 될 것이었다.

 

30. 빌립이 달려가서. 즉 성령의 명령에 즉시 순종하여 병거로 달려가.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이 즉시 반응하는 점을 본받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중심의 신실한 대화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깨닫느뇨. 대화를 능숙하게 시작하는 것을 주목하라. 빌립은 그를 만난 바로 그곳에서 대화를 시작했고, 대상의 관심사에 적절히 맞추어 접근했다. 그는 여기서 모든 그리스도인 교역자들이 따라야 할 모본을 제공한다. 빌립이 물은 것은 성경절의 자구(字句)가 아니라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는지이다. 헬라어 구문에 의하면, 빌립이 부정적인 답변을 예상했음을 알 수 있다. 내시는 이 구절에 관한 유대인의 주석을 약간은 들었겠지만, 이 구절이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에 대하여 어떤 암시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빌립은 그 뜻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 의미를 설명하도록 성령이 그를 인도했다.

 

31 지도하는. 헬라어 호데게오(hode-geo-). “길을 인도하다”, “지도하다.” 예수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말할 때 동일한 단어를 사용했다(요 16:13). 에디오피아로 돌아가던 내시는, 그곳으로 돌아가면 예루살렘에서 이제까지 그를 지도해 주던 이들에게서 멀어지게 되므로 이러한 어려운 말씀에 대한 능숙한 지도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의 질문은, 그가 그 성경구절을 처음으로 보았거나 성령이 그 구절을 새롭게 강조하여 깊이 생각하도록 했음을 암시한다.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이 질문은 그가 성경을 해석하는 훈련을 받지 못했으므로 깨닫기에 역부족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청하여. 진지한 요청을 의미하고 좀 더 가르침받고자 하는 내시의 열의를 나타낸다. 성령의 지시가 얼마나 순조롭게 성취되었는지 주시하라(29절). 빌립은 가까이 다가가고, 내시는 그 전도자에게 자신의 병거에 타도록 청한다.

 

32. 구절. 헬라어 페리오케(perioche-). “내용.” 회당에서 공중 낭독을 위해 정해진 성경구절들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파라샤(paras∨ah) 또는 합타라(hapt.arah)에 해당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참조 제10권, 64). 이 단어는 헬라인들이 흔히 사용했고, 키케로(Cicero, Letters to Atticus xiii. 25)가 차용했다. 이 단어는 이 구절의 전체 문맥이 무엇인지를 나타낸다. 여기서 “성경 (구절)”은 성경 전체가 아니라 이 구절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성경 구절의 내용”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인용된 성경구절은 사 53:7, 8이며 「70인역」에서 사용된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끌리었고. 인용된 성경구절에 대해서는 사 53:7, 8 주석을 참조하라. 신약의 인용문은 히브리 성경의 번역이 아니라 「70인역」의 번역임을 기억하라.

 

33. 낮을 때에.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굴욕 중에 그의 심판이 제거되었으며”라고 번역할 수 있으나 이 독법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의 정죄가 철회되었다” 즉 “취소되었다”는 의미도 된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을 낮췄기 때문에 후에 높임을 받았다. 또는 분명히 심문당할 때 “굴욕 가운데서 그에게 정의가 거절되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사 53:8의 히브리어 본문은 “억압과 심판으로 그가 제거되었다” 즉 그는 사법적 살인의 희생자였음을 암시한다.

 

생명이…빼앗김이로다. 사 53:8의 히브리어 본문은 구주께서 갑자기 비명횡사했음을 암시한다. 「70인역」도 동일한 사상을 표현하며, 따라서 승천 시에 그리스도가 지상을 떠나는 것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누구를 가리킴이뇨. 내시는 자신이 읽고 있던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다시 말해 이사야의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물을 만큼 예리했다. 이사야 시대에는 이 질문이 해결되지 않았으며,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많은 논란이 있다(참조 사 41:8; 42:1; 52:13; 53:1). 그렇지만 빌립은 그 주제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으며, 우리 역시 그래야 한다. 그 질문은 빌립이 내시에게 예수를 전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했다.

 

35. 입을 열어. 이 구절이 신약에서 나타날 때는 언제든지 단순히 말을 하는 행위보다는 준비된 설교 등을 할 경우를 나타낸다(참조 마 5:2; 13:35; 행 10:34).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내시는 예루살렘에 체류하는 동안 예수의 가르침을 들었을 것이다. 사도들의 사역은 도성 전역의 주목을 끌었다(2:41; 4:33; 5:12~14; 6:7, 8). 그러나 그가 본 많은 토론은 분명 예수를 사기꾼으로 분류했고, 따라서 사도들의 설교에 비추어 볼 때 내시가 사 53장을 보았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그러나 이 예언은 죄의 경험, 정죄 그리고 그 파괴적인 능력으로부터 유일한 구원의 대로(大路)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이고 대속적인 죽음을 가장 명확히 기술하는 구약의 한 부분이다. 결과로 볼 때 빌립의 가르침에는 그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적용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에 합류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침례 후보자를 물에 잠그기 전에 이런 가르침을 주었음이 분명하다는 것을 신약에서 알 수 있다. 36. 길 가다가. 빌립이 내시에게 사 53장을 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사실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그가 침례의 의미를 이해하고 스스로 침례받기를 원하는 데 이르기까지 충분히 가르친 것으로 보아 그들이 얼마간 함께 여행했을 것이다. 물. 4세기에는 이곳을 벧수라(Bethsura) 즉 대하 11:7의 벧술(Bethzur)로 여겼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약 32킬로미터, 헤브론에서 약 6.4킬로미터 거리에 있다. 아랍어 형태인 베이트-추르(Beit-s.u-r)라는 고대 지명을 간직한 한 샘이 지금도 여기에 있다. 다른 학자들은 그 샘이 엘류테로폴리스(Eleutheropolis)와 가사(Gaza) 사이에 있는 와디-엘-헤시(Wa^di--el-H.esi-)에 있으며, 고대 도성 라기스와 에글론에서 멀지 않다고 본다. 가사 근처에서 이 일이 있었고, 여행길이 사막을 통과한다는 점에서 이 장소가 더욱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새롭게 찾은 주님의 교회의 일원이 되는 데 모든 준비를 갖춘 내시의 열의는 본보기가 된다. 그는 자발적이었고, 따라서 빌립에게 강요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구주에 대하여 배웠고 자신의 죄를 버렸다. 그는 길이신 분과 그 이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참조 행 4:12; 요 14:6). 그에게 침례를 베풀지 못할 어떤 이유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37. (없음) [네가 믿으면]. 본문상의 증거(참조 20쪽)는 이 구절의 생략을 지지한다. 초기의 침례 고백문에서 인용한 일종의 난외주가 본문의 이 부분에 점진적으로 유입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구절에 표현된 진리가 성경 다른 곳에서 다양한 이문(異文)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참조 요 3:16; 행 2:38; 16:30, 31).

 

38. 명하여. 이 명령으로 모든 수행원이 멈추어 섰다. 수행원들은 침례받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본 증인이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그들 중 일부가 에디오피아의 초창기 그리스도인 회중의 중추적인 부분을 이뤘을 가능성이 있다. 전승에 따르면, 내시가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확실하다.

 

내려가. 헬라어 카타바이노 에이스(katabaino- eis). "~로 내려가다", "~안으로 내려가다." 이 구가 단독적으로 나왔다면 빌립과 내시가 물 가장자리로 내려간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물 안으로 들어갔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그러나 39절의 보충 구절이 이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한다.

 

39. 올라갈새. 헬라어 아나바이노 에크(anabaino- ek). "~밖으로 올라오다." 이 말은 두 사람이 물 속으로 들어갔으며, 그렇지 않으면 물 밖으로 나올 수 없었음을 보여 준다. 이는 물 속에 잠그는 침례를 받기 위한 것이었음이 확실하다(참조 마 3:6; 막 16:16; 롬

6:3~6 주석). 그러므로 이와 같이 다소 비공식적이고 갑작스런 상황에서도 초기교회가 침례 방법을 채택한 분명한 예증이 여기에 있다.

 

이끌어 간지라. 헬라어 하르파조(harpazo-). “붙잡다”, “완력으로 끌고 가다”, “낚아채다.” 동일한 동사가 살전 4:17; 계 12:5에서 유사하게 사용되었다. 인간적인 생각이었다면 당연히 전도자가 남아서, 내시에게 필요한 일을 마무리짓고 그를 충분히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나 빌립은 초자연적인 힘에 이끌려, 문자 그대로 내시와 함께 있다가 낚아챔을 당했다. 왕상 18:12; 왕하 2:16; 스 3:12, 14과 비교하라.

 

흔연히. 내시는 빌립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믿었으므로 그에 대해 전혀 염려하지 않고, 그가 받은 새로운 빛 안에서 흔연히 길을 갈 수 있었다. 유세비우스(Ecclesiastical History ii. 1. 13; Loeb ed., vol., 1, 110, 111)는 내시가 그의 고국으로 돌아가 거기서 “만유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우리 주가 이 땅에 머문 일”에 대하여 전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방백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인[에디오피아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시 68:31)는 말씀을 성취했다고 전한다. 에디오피아 교회가 줄곧 유대교와 유사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에디오피아 교회는 일반 기독교계로부터 일찍이 분리되었고, 따라서 한동안 초기교회의 가르침과 생활의 단순성을 유지했다. 에디오피아 그리스도인들은 오랫동안 주일 중 첫째 날과 함께 제7일 안식일을 준수했다.

스데반의 순교-사도행전 연구 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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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7:51-60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내용 요약

  1. 아브라함과의 언약해설 (1-16)
  2. 모세의 율법 해설 (17-44)
  3. 형식에 빠져 성령을 거스리지 말라 (44-53)
  4. 스데반의 죽음 (54-60)
스데반의 순교를 목도한 모든 사람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의 얼굴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인에 대한 기억, 그것을 들었던 그 영혼들을 감명시켰던 그의 말 등은 보는 이들의 마음 속에 간직되어 그가 선포했던 그 진리를 증거하였다. 그의 죽음은 교회에게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으나, 그것은 그의 기억에서 순교자의 신앙과 지조, 그리고 그 용모에 머물러 있었던 영광을 지울 수 없었던 사울의 양심을 일깨우는 결과를 가져왔다.(행적 101p)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 일이 있나요?
  2. 이가는 버릇이 있나요? 언제 이를 가나요?
  3. 자신에게 불이익이 있을 것 같더라도 자신의 신앙을 말해야 할 때가 있다면 언제 일까요? (혹은 불이익의 상황에서 자신의 신앙을 밝힌 적이 있나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스데반의 말을 듣고 공의회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마음의 찔림을 받고 나타난 두 가지 반응에 대해 비교해 봅시다.
    ① 행 2 :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② 행 7 : 54 (왜 이런 반응이 일어났을까요?)

  2. 대적자들과 대조되는 스데반의 성령 충만한 모습을 살펴봅시다.
    ①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55절)
    ※자기를 보는 사람은 자아 충만 때문에 자기문제에 집착합니다. 그는 땅을 보지 않고 하늘을 보았습니다.
    ②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55절)
    ※그의 앞에 하늘의 문이 조금 열렸으며, 안을 들여다 보았을 때, 그는 하나님의 궁전의 영광과 그리고 마치 당신의 종을 붙드시고자 방금 그의 보좌에서 일어나 서 계신 듯한 그리스도를 보았다.(행적100p) ③ 성령의 음성을 듣고 대적하는 자들의 모습도 살펴봅시다.(57~58)

  3. 스데반의 기도(59~60)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기도(눅23:34,46)를 비교해 보고, 이 기도의 핵심을 서로 나누어봅시다.
    (눅 23:34,46)
    34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46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생각해봅시다.

  1. 순교의 자리에 설 때 나는 스데반처럼 당당하고, 용서하면서 죽을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2. 지금 나의 삶 속에서 순교자의 삶을 사는 것이란 어떠한 생각과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사는 것일까요?

  3. 나의 삶이 다른 사람의 양심을 일깨우는 삶이 되고 있나요?

 


51. 목이 곧고. 스데반의 연설 기조가 갑작스럽게 바뀐 이유는 산헤드린 회원들이 점점 흥분했고 그의 말로 인해 적개심이 치솟았기 때문이다(참조 사도행적, 100; 마 26:65).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다는 것과 더 이상 논한다 해도 그 문제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은 스데반은 엄한 견책의 말을 쏟아냈다. 그가 사용한 형용사들은 옛 이스라엘의 죄들에 대해 사용된 것들이었다. 출 33:3, 5; 34:9의 “목이 곧은”과 레 26:41의 “할례받지 아니한” 등등. “목이 곧은”은 고집 센 황소에 대하여 사용되었다(참조 출 32:8 주석). “마음에…할례받지 아니한”이란 구절은 실제로 에스겔이 “이방인”에게 사용했다(44:7). 스데반이 그들의 성전 숭배가 너무 극단적이고 또 무익하다고 말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그는 그들을 이방인의 부류에 넣었다. 이 격노한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큰 모욕적인 언사는 없었을 것이다.

항상 성령을 거스려. 정확한 역사적 요약인데, 이는 그들의 조상들이 순종하지 않았던 모세의 시대로부터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았던 예수 그리스도 때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령을 거스렸기 때문이다. “거스려”에 해당하는 헬라어(안티핍토[antipipto-〕)는 적극적이고 줄기찬 반대를 의미한다.

 

52. 선지자 중에 누구를. 여기에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이 다시 메아리되어 울려 퍼지고 있다(마 5:12; 눅 11:47; 13:34). 선지자에 대한 이러한 핍박의 역사는 마 5:12; 23:37 주석을 참조하라(참조 대하 36:16 주석; 살전 2:15).

의인. “의로운 사람.” 이 존귀한 칭호는 3:14과 22:14에도 사용되었다. 이미 이 이름은 유대 문헌에서 고대하던 메시야에게 적용되어 왔으며(에녹서 38:2), 사 11:4, 5에 암시되어 있을 수 있다. 빌라도의 아내가 예수를 지칭하면서 이렇게 묘사하였다(마 27:19). 초기교회는 그 이름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며, 그렇게 사용한 예는 요일 2:1에서 볼 수 있다. “의로우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여기 “의인”에 대해서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이다. 악인으로 정죄를 당하였던 그리스도는 “의인”으로서 모든 사람들과 구분되었다. 이 동일한 의를 나누어 줌으로써, 스데반은 사악한 분노 가운데서 그를 처형하려는 사람들과 크게 대조된다.

예고한. 정확히 말해서 “…가 된.”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 주는 자들의 얼굴에서 곧 닥칠 운명을 읽은 스데반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에게 행한 그들의 이전 행동을 상기시켜 준다.

 

53. 천사의 전한. 문자적으로 “천사의 포고로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분은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었다(참조 출 20:2 주석). 그분은 언약의 천사였다(참조 출 23:20 주석). 그러나 천사의 무리가 시내산에서 여호와와 함께 있었다(참조 신 33:2; 시 68:17; 갈 3:19; 히 2:2 주석). 신 33:2이 「70인역」에는 “그의 오른쪽에 천사들이 있고”라고 되어 있으며, 요세푸스(Antiquities xv. 5. 3)도 동일하게 생각한다.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이 말씀은 앞의 구절, “너희가…율법을 받고도”와 극적인 대조를 이루며, 그 말을 들은 자들에게 호된 일격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율법의 자구(字句)도, 그 취지도 지키지 않았다. 천사에게 받은 율법은 그들의 영광이 될 수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율법에 대한 곡해와 악용은 수치와 멸망을 재촉하였다.

 

54. 저희가…듣고. 정확히 말해서 “이제 그들이 듣고 있을 때에.”

마음에 찔려. 참조 5:33 주석. 이 말은 2:37의 “마음에 찔려”보다 더 에는 고통을 기술하고 있으며, 이제 그것은 회개가 아니라 맹렬한 분노를 낳았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이 비유적 표현은 드물지 않다(마 8:12; 13:42). 그러나 그것은 외적으로 표현된 사실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유대인들은 분노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화가 나서 말문이 막힌 그들은 마치 짐승이 먹이를 이빨로 물어뜯듯이 그를 갈기갈기 찢기를 원했다.

 

55. 스데반이. 미쳐 날뛰는 그의 적대자들과 완전히 대조적임을 가리킴.

충만하여. 갑작스런 영감이 아니라 계속된 경험을 암시함. 시작 때에 그러했던 것처럼(6:5) 끝에도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였다.

하늘. 스데반은 “하늘이 열리”(참조 행 7:56; 사 6:1 주석)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열린 하늘의 영광을 본 구경꾼들은 아무도 없었으며, 이 영광을 보았다는 스데반의 진술은 그의 죄책을 더욱 무겁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이 영적 눈으로 본 것인지, 아니면 육체적 감각의 확장을 통해서인지는 오로지 선지자들만이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참조 마 3:16; 고후 12:1~6).

하나님의 영광…보고. 창 3:24; 출 13:21; 요 1:14; 행 7:2 주석과 비교하라. 스데반의 설교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여 그의 마음을 비추는 거룩한 영광에 대한 계시를 보고함으로써 끝마친다. 그는 매우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저 영광을 응시했다. 그는 그 순간의 치명적 위험도 잊고 하늘의 장면에 온전히 정신을 집중했다.

예수께서…서신. 그리스도는 통상적으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으로 묘사되었다.

하나님 우편. 참조 마 26:64 주석.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을 보고 나서 이 신실한,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이 힘을 얻었다.

 

56. 인자. 복음서를 제외하고 신약에서 이 낱말은 여기와 계 1:13; 14:14에만 나온다. 스데반은 주님의 입술로부터 이 칭호를 직접 들었든지 아니면 초기교회에서 배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설교는 어떤 복음서도 쓰여지기 이전에 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산헤드린 회원들은 그리스도가 친히 그들 앞에서 심문당할 때에 사용한 이 구절을 기억했을 것이다(마 26:64). 그들은 그때 주님의 주장이 신성모독이라며 정죄하였다. 이 칭호에 대한 언급은 막 2:10 주석을 참조하라.

 

57. 저희가…지르며. 정확히 말해서 “그러나 그들이 소리지르며.” 즉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가운데서 그의 말을 듣고 죄를 깨닫는 대신 스데반을 침묵시키려고 시도하면서.

(귀를) 막고. 헬라어 쉬네코(sunecho-). “누르다”, “감싸 잡다.” 그들은 스데반의 말을 신성모독으로 여기고 더 이상 듣기를 원치 않았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51절에 주어진 자신들이 묘사를 받아 마땅함을 입증하였다. 스데반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신성모독자였다.

그에게 달려들어. 정확히 말해서 “그에게 일제히 달려들어.” 사단은 사람에게 사형 선고를 내릴 때 율법이 요구하는 그런 종류의 일치(신 13:9, 10)를 산헤드린에서 이루어냈다. 그들은 공식적 판결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와 결정에서 만장일치를 보였다. 이처럼 약식 재판 절차의 사법적인 측면들을 보려면 마 26:59 주석을 참조하라.

 

58. 성 밖에 내치고. 레 24:14에 따르면, 돌에 맞을 사람은 반드시 진영 바깥으로 데려가야 했는데, 스데반 당시에는 예루살렘 성 바깥을 의미했다.

돌로 칠새. 문자적으로 “그에게 돌을 던지고 있을 때.” 마치 처형의 행위가 마치 그 순교자가 기도하는 중에 진행된 것처럼 보인다(59, 60절). 돌로 치는 것은 모세의 율법 아래서는 신성모독죄에 대한 처형 방법이었다(참조 레 24:14~16; 요 8:7 주석). 하지만 산헤드린이 아무리 이 법을 면밀하게 따른다하더라도, 로마의 지배 아래서 그들은 특별히 스데반이 로마 시민권자라면(참조 행 6:5 주석) 그를 사형에 처할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그러나 그저 침묵을 지키도록 로마의 관리들을 뇌물로 매수할 수 있었다(사도행적, 98, 101,). 여전히 총독이었던 빌라도(참조 제10권, 74~77)가 당시 도성 밖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심문하면서 굴욕적인 경험을 한 후에는 스데반에 대한 공격에 개입하려 하지 않았을 개연성이 높다.

옷을 벗어. 율법은 고발자가 먼저 사형의 돌을 던지도록 요구하였다(참조 신 17:7; 요 8:7 주석). 겉옷으로 입은 헐겁게 늘어진 옷은 사형 집행자들이 팔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을 방해했을 것이기 때문에 벗어서 옆에 두었다(참조 행 22:20).

 

59. 저희가 돌로…치니. 정확히 말해서 “저희가 돌로 치고 있을 때에.” 스데반은 돌에 맞는 동안 기도하였다.

스데반이 부르짖어. 스데반이 방금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본 주 예수께 요청했다는 것을 이 기도 자체가 보여 준다(56절).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참조 마 27:50; 눅 8:55; 행 7:60 주석. 예수께서 돌아가시면서 드린 이와 유사한 기도를 누가가 어떻게 기록하는지 주목하라(눅 23:46).

 

60. 무릎을 꿇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본 적 있는 그분에게 기도하면서 그리고 그분을 숭경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다. 물론 그가 돌에 맞아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는 데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긴 하지만.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은 그를 핍박하는 자들의 과거의 죄에 관해서는 어떻게 해볼 일이 없었지만, 그들의 현재의 죄에 대한 용서를 요청할 개인적 권리가 있었다. 그들을 위해 간청하는 태도를 통해서 그는 그의 주님을 특징지었던 저 용서의 정신을 얼마나 온전히 습득했는지 드러내 보였다(참조 눅 23:34).

자니라. 참조 막 5:39; 요 11:11 주석. 자신을 변호하는 전체 시간 동안 스데반이 보인 행동은 그를 고발한 자들의 행동과 현저하게 대조된다. 그들은 복수에 목말라 격분으로 충만했지만, 그는 그리스도께서 재판정에서 나타내셨던 것과 같은 침착함과 평온함을 유지한다. 이제 누가는 순교자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면서 “(그가) 자니라”고 하는 마지막 구절로 거룩한 분위기를 보존한다. 이제 투쟁은 끝났고, 그는 승리를 얻었다. 하나님의 신실한 용사는 그 소동을 떠나 부활의 날까지 조용히 잠들어 있다. 이어지는 장들은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대학선교센터교회


안식일학교

경배와 찬양 다같이
찬       미 83장
시작기도 기도자
환       영 안교장
특별순서  
교과공부 각 반
헌금소개 사회자
축       도 담임목사

 

기억절 3기 1과 (일몰 : 7시 56분)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아식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출 2:23-25).

 

7월 시무 안내
시       무 : 임경훈
헌금봉사 : 이한얼 정찬우

 

다음 주 예배순서

금요일예배 안식일예배
날짜 기도 말씀 날짜 기도 말씀
4 김진수 소그룹 5 심정은 김유민
11 이마루 소그룹 12 민대홍 문호준
18 이지오 장막부흥회 19 김우진 배승환
25 임태훈 소그룹 26 함주원 권세진

 


안식일 예배

경배와찬양 다함께
등단 / 묵도 다함께
송        영 2장
기        원 설교자
찬        미 18장
대 표 기 도 심정은 집사
특 별 찬 양  
설        교 김유민 전도사
찬        미 376장
개 인 기 도 다함께
헌        금 다함께
축        도 설교자

캠퍼스 소식

1. 제34회 전국 SDA 대학생 여름수련회
    6.29.(일)~7.1.(화) / 안면도 연수원 
    강사:김나미 교수

2. 방학 중 모임


광 고

  1. 환영합니다.
    기쁜 안식일을 맞이하여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가족들과 손님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2. 학생캠프
    일시 : 7월18일(금)~20일(일)
    장소 : 비전센터
  3. 본부지구 장막부흥회
    일시 : 7월18일(금)~19일(안)
    장소 : 본부교회
  4. 여름 국내봉사대
    일시 : 7월22일(화)~27일(일)
    장소 : 강릉지구
  5. 어린이여름성경학교
    일시 : 7월25일(금)~27일(일)
    장소 : 별새꽃돌 과학관
  6. 담임목사 휴가
    일시 : 7월14일(월)~17일(목)
  7. 일요기도회
    일시 : 매주 일요일 아침7시
     

 

  • 다음 주 당번
    • 식사당번 : 여집사 2조
    • 청소당번 : 경희외대캠모

캠퍼스 모임

방학중 소그룹 목요일 6시 교회
졸업생 소그룹 화요일 오후 8시 교회
장년 소그룹 화요일 오후 8시30분 ZOOM

 


담임목사 권세진   부목사 배승환   전도사 김유민
수석장로 임동국   서기 문호준  재무 김성미   
선교회장 윤민식  액트회장 윤애리   


헌금계좌 : 하나은행 144-890014-45304
(ACT교회)
주소 :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로1길 11
어린이청소년비전센터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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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6:1-7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내용 요약

  1. 일곱 집사의 선정 (6:1-7)
  2. 스데반의 활동 (6:8-15)

불만을 듣고 심각성을 깨달은 사도들은 자신들을 변호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속하게 행동했다. 그들은 모세가 세운 전례(출 18:25)를 기억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모세처럼 권한을 위임하기로 결의했다. “모든 제자”라는 표현을 예루살렘과 근방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집회에 모여야 했었다는 뜻으로가 아니라, 한 특별한 집회가 소집되었는데, 그 집회에 올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왔으며, 그 모임에서 사도들이 그 문제와 그들의 계획을 제시했다고 봐야 한다. 그 분배를 놓고 불평이 제기되었던 자금은 많은 사람이 기부한 것이므로, 당연히 그 많은 사람과 협의를 거쳤다. 일개 중심지에서의 이런 발전으로부터, 대의제적 교회 통치 형태가 자연스럽게 일어났다(사도행적, 96).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우리교회에 소외당하는 대상이 있다면? 있을까요?
  2.  
  3.  
  4. 우리교회 안에는 “선민의식”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있다면 어떤 면인가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헬라파 유대인은 히브리파 유대인에 비해서 약자였다. 약자는 똑같은 취급을 받아도 자기는 소외된다고 생각한다. 약자에게는 사랑과 관심이 좀 더 많이 가야 된다. 그래야 겨우 공평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1. 교회 안에 불화가 생길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 말해 봅시다
  2.  
  3.  
  4. 그런 불화는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을까요?
  5.  
  6.  
  7. 본문의 사건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이 있는지 나열해 봅시다. (나열되지 않은 것들을 더 찾아봅시다.)
  8. ① 모든 짐을 홀로 감당하지 말 것
  9. ② 언제나 물질을 조심할 것
  10. ③ 편애하지 말 것
  11. ④ 약자의 마음을 이해할 것
  12. ⑤ 불화에는 신속히 대처해야 한다.

※ 일곱명의 집사들이 헬라파 유대인 중에서 뽑힌 것을 살펴 보라. 얼마나 시원한 처리인가? 그래서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게 되었다. (6:7)

생각해봅시다

  1. “교회는 어떤 사업보다는 사람이 우선 되어야 된다.”이 문장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3.  
  4. 우리 주변에도 약한 자들이 있습니다. 새로운 사람, 적응을 잘 못하는 사람, 열등감이 많은 사람, 내성적인 사람들은 어떻게 대해 주어야 할까요? 그리고 최근에 내가 그들을 위해서 해 준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 봅시다.

“정직한 영혼들이 자원하여 그리스도의 사업에 자신을 바치는 곳마다 빛과 축복의 중심지를 세우는 사업이 위탁되었다.”사도행적 90P.
 


제자. 사도행전에서 이 이름이 그리스도인에게 대하여 여기서 맨 처음 사용되었다. 복음서의 제자들이 사도가 되었으며, “제자”라는 용어는 일반적인 신자들에게로 넘겨졌다.
 
헬라파. 헬라어 헬레니스타이(Helle-nistai). 즉 헬라어를 상용하는 유대인들 혹은 “그리스의 유대인들”(「개정역」). 신약의 용례는 그들과 종족상의 헬라인들인 헬레네스(Helle-nes)를 세심하게 구분한다(요 12:20). 이 헬라파 유대인은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로서(참조 제10권, 66~68; 요 7:35; 행 2:8 주석) 헬라어를 상용할 뿐 아니라 헬라 문화에도 젖어 있었다. 그들은 헬라어가 공용어인 땅에 태어난 유대인들이었을 것이며, 그렇기에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구사하지 못했으며, 팔레스타인에서 히브리 제사에 참여하는 대신 예루살렘에 그들 나름의 회당들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개종자였을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그들은 유대교에서 개종한 자들이었는데, 왜냐하면 이때까지는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지 않았던 까닭이다. 오순절 당시 개심했던 사람들 중 다수가 바나바(4:36)와 또 이 이야기에 이름이 명시되어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6:5) 이 그룹에 속했던 것이 틀림없다.
이 헬라파 유대인들은 구약의 헬라어 역본인 「70인역」을 사용했는데, 그 역본은 신약에 아주 빈번하게 인용되었다. 그들은 본방의 유대인들과는 대조적으로 대개 아주 열심이 있었다. 그들은 큰 희생을 치르면서 예루살렘의 신성한 장소들에서 예배드리러 온 반면에,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에게 성전 경내(境內)는 너무도 자주 범속(凡俗)한 곳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참조 21:27, 28). 유대교 랍비들의 전승은 여호와에 대한 히브리인의 신앙고백(신 6:4)인 셰마(s∨ema‘)를 그리스식 헬라어로 암송하도록 하는 조항을 마련하였다. 참조 제10권, 63.
 
자기의 과부들. 즉 헬라파의 과부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이 유아기의 교회 내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악의는 없었지만 헬라파들 중에 궁핍한 자들이 언어와 관습의 차이로 인하여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었을 것이다. 과부를 돌보는 일은 성경에 강조되어 있다(참조 출 22:22; 신 14:29; 사 1:17; 눅 18:3 주석). 여기서는 남의 도움에 의존해서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가리킬 것이다. 분명히 교회 내의 공유적 체제는 조성된 공유 자산(행 4:32)을 감독할 모종의 체계가 필요했다. 후에 교회는 과부들을 돌보는 규정을 만들었다(딤전 5:3~16).
 
구제. 헬라어 디아코니아(diakonia). “봉사”, “돌봄”, 「개정표준역」에는 “분배”로, 11:29에는 “구제”로 번역되었다. 이 낱말은 디아코노스(diakonos) 즉 “봉사자”(ministrant) 혹은 “집사”와 관련되어 있다. 이 도움은 날마다 제공되었다. 절박한 필요와 아마도 보관할 공간의 부족으로 날마다 도시 여러 지점에서 구제 물자를 분배해야 했을 것이다. 증여물들이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고, 기부금을 나누어 주는 일도 끊임없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 일로 사도들의 시간이 매우 많이 소모되었다. 그러나 사도들이 편파적이거나 태만했거나 혹은 그들에게 적개심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다는 암시는 전혀 없다.
 
히브리파 사람. 이들은 헬라파 유대인들과는 대조되는 유대인들로서,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거기서 살고, 신약이 히브리 방언이라고 부르는 언어(아람어)를 사용했다(참조 22:2; 제1권, 30).
 
원망한대. 그저 사소한 불평이 아니라 심각한 우려를 자아낼 만큼 충분히 목소리가 큰 항의였다. 기록에 의하면 사도들은 아무런 비난도 받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은 그런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인들의 급속한 증가는 그들의 자원을 앞질렀고 어려움을 촉진시켰다.
 
제쳐놓고. 헬라어 카탈레이포(kataleipo-). “버리다”, “포기하다.” 이 헬라어는 강조형으로서, 궁핍한 자들을 돌보는 일로 사도들의 시간이 많이 소모되었음을 암시한다.
 
공궤를 일삼는 것. 유대 회당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도록 세 사람이 임명되었다.
 
지혜. 그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의 영적 필요를 보살필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일을 하는 데 신중하고 분별력이 있고 검약하며 지혜가 있어야 할 것이었다. 바울은 지혜를 성령의 은사로 간주했다(고전 12:8). 야고보는 그것을, 선한 행실 혹은 “선행”(약 1:5)이 수반되어야 할 하나님의 선물로 강조하였다(약 3:13). 이 절 외에는, 사도행전에 “지혜”라는 단어는 오로지 스데반에 관하여(행 6:10) 또는 스데반에 의해 사용되었다(7:10, 22). 그는 또한 “믿음[이]…충만”하다고 명시적으로 진술되어 있다(6:5).
 
칭찬 듣는. 문자적으로 “입증된” 혹은 “그들에 대하여 제시된 증거를 가지고 있는”, 즉 동료들간에 평판이 좋게 나 있는(참조 딤전 5:10). 이 말은 행 10:22에서는 “칭찬”하는으로 번역되었다. 비난의 여지가 없는 사람이란 평판을 얻은 사람들이 좀 더 공정하게 분배하는 일을 떠맡도록 부름을 받지 않는 한, 그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정직하고 능률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 동료들에게 용납될 만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장로(감독)뿐아니라 집사의 자격에 관한 영감받은 목록은 딤전 3:1~14; 딛 1:5~11을 참조하라.
 
사람 일곱. 사도들이 7이란 숫자를 생각한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었다. 유대인들 사이에는 그 숫자에 대한 일반적인 존경심이 있었다. 후대에, 적어도 7은 유대의 읍들에서 공무를 처리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의 숫자였다(Talmud Megillah 26a, Soncino ed., 157). 좀 더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 당시에는 오직 일곱 명만 필요했을 것이다.
신약에는 이렇게 임명된 사람들이 “집사들”로 불리지 않는다. 이 말이 다시 언급되었을 때, 그것은 [그] “일곱”(the seven, 21:8)으로 언급되었다. 마치 그들이 거의 하나의 구별된 단일체인 듯이. 그러나 그들은 “집사들”(사도행적, 89, 90,)이라고 불리는 계층의 원조가 되었으며, 그들의 기능은 훗날 바울이 묘사한 집사의 기능과 거의 비슷했다(참조 딤전 3:8~13). 일부 교회에서는 로마에서처럼 집사의 수가 후에 일곱으로 고정되었다(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vi. 43. 11). 신(新) 가이사랴 공회(The Council of Neo-Caesarea, AD 314; Canon 14)는 한 곳에 집사들 일곱을 두도록 요청한다. 많은 주석자는 여기의 택함받은 일곱 사람이 행 11:30; 14:23 그리고 그 절 이후 언급되는 “장로들”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택하라. 열두 사도는 그 책임을 신자들의 어깨에 분명히 지웠으며, 그들 가운데서 택해야 했다.
 
기도하는 것. 그리스도의 기도 생활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 경건한 사람들은 기도할 필요성을 그들의 목록 맨 첫 번째에 놓아두었다. 그러나 기도는 개인적인 헌신뿐 아니라 교회의 공중 예배도 포함한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하는 것. 헬라어 디아코니아(diakonia). 1절에 쓰인 것과 동일한 단어이다(「개역한글판」의 1절에 “구제”로 번역된 낱말이 여기서는 “(말씀) 전하는 것”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열두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는 영적 은택을 나누어 주는 일을 하도록 자유로워지는 한편, 일곱은 물질적 복을 나눠 주는 봉사를 할 것이었다. 그들은 설교와 여러 가지 형태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 일을 할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2절)라는 구절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설명한다.
 
전무(하리라). 또는 “끈기 있게 노력하다.” 이 동일한 낱말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행한 열성적 행위를 기술하는 데에 여러 차례 사용되었다(참조 1:14; 2:42, 46).
 
스데반. 헬라어 스테파노스(Stephanos). “화관”, “보관”(寶冠), “승리의 화환”을 뜻함. 이 이름은 드물지 않았으며, 고대 명각에도 나타난다.
전승에 따르면 메시야가 왔다(눅 10:1~11)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각 성읍으로 파송된 70인 중에 스데반과 빌립, 두 사람이 모두 속해 있었다고 한다. 사마리아가 그들의 봉사 현장이었을 것이다(참조 눅 10:1 주석). 사마리아인들은 헬라어를 쓰는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 유대인들보다 필시 더 잘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마리아인을 위한 복음전도자로 빌립을 보낸 이유를 설명해 줄 수도 있다(행 8:5).
 
빌립. 헬라어 필립포스(Philippos). “말[馬]을 사랑하는 사람”(참조 막 3:18 주석). 열두 사도 중 한 명과 헤롯 대왕의 아들 중 두 명도 이름이 빌립이었다. 그 이름은 이전 여러 세기 동안 마게도냐의 통치 가문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름이다. 빌립의 과거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고, 다만 그가 70인의 일원이었다는 전승만 있을 뿐이다(스데반에 관한 앞절의 주석을 참조하라). 바울은 가이사랴에 있는 그를 방문하였으며(행 21:8), 아마도 그는 오랫동안 그곳 교회의 지도자였을 것이다. 바울이 방문했을 당시 빌립에게 성장한 딸 넷이 있었다는 사실은 빌립이 임명될 당시 이미 결혼한 상태였음을 제시해 준다.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 이 네 명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으며 추측의 토대가 될 만한 것도 전혀 없다.
 
입교한. 니골라는 “의의 개종자”, 유대교를 온전히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유대종교를 잘 배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안디옥.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이 시리아의 도시는 팔레스타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헤롯 대왕은 주요 도로 전체에 화려한 주랑을 세웠다. 니골라가 안디옥 출신이라는 사실이 매우 흥미를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이름을 얻은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11:26). 그 도시는 후일 교회 초기 선교 사업의 본부가 되었다(참조 11:19 주석).
 
니골라. 헬라어 니콜라오스(Nikolaos)로서, “사람들의 주인”을 뜻함. 이름이 기록된 최초의 비 유대그리스도인임.
 
안수하니라. 이것은 그 행위에 대한 신약의 맨 첫 언급이다. 구약에서는 이미 축복을 수여하는 행위로 사용되었으며(참조 창 48:13, 14 주석), 제사장 위임식 때(참조 민 8:10 주석) 그리고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울 때에도 사용되었다(참조 민 27:18, 23 주석). 그러므로 이 행위의 의미를 신실한 유대인들은 모르고 있지 않았다. 주님께서 자주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셔서 그들을 고치셨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수적인 의미가 첨가되었다(막 6:5; 눅 4:40; 13:13; 참조 막 16:18). 이와 비슷하게, 그분께서는 아이들을 축복하였다(마 19:15). 그런 까닭에, 사도들은 손을 얹어 일곱 명에게 축복하고 그들을 봉헌하는 일을 할 좋은 선례를 얻게 되었다. 그들은 행 8:17; 13:3; 19:6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유사한 상황들에서 이런 방법을 계속 사용하였다. 사도 시대의 교회에서는 복음 사역을 하도록 안수할 때 사람들에게 손을 얹었다(딤전 4:14; 5:22; 딤후 1:6). 그 관습이 교회 조직에서 용인된 절차로 굳어졌다는 사실이 히 6:2에 나타난다. 그것은 주님과 안수를 받는 사람 사이의 밀접한 영적 관계를 나타내야 한다(사도행적, 161, 162,).

 

행 5:1-17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내용 요약

  1.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1-11)
  2. 두 번째 체포됨 (12-32)
  3. 가말리엘의 변호 (33-42)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족을 위하여 함부로 돈을 쓴다. 남녀들은 쾌락을 찾아 그들의 기호를 만족시키는 한편, 거의 마지못하여 아까운 마음으로 헌금을 드린다.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하나님께서 당신이 주신 재산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에 대해 엄격히 설명을 요구하실 것이며, 그분께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헌물을 받지 않으신 것처럼 그들이 창고에 드리는 적은 금액을 더 이상 받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중요한 약속을 하고도 지키지 않으면 기분이 어떤가요?
  2. 거짓말 하다가,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혼 난 경험이 있나요? 왜 거짓말을 했는지 기억하시나요?
  3. 양심으로 결정한 서약과 법적 계약서 중 당신을 구속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4.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도들 앞에 가기 전에 부부끼리 어떤 의논했을 했을까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는 무엇일까요?
    • 사기죄 :
    • 위선죄 :
    • 위증죄 :
  2.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과 구약시대의 아간 사건(수7:1)과 유사한 점은 무엇일까요?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죄가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뒷면: 2절“감추매” 주석참조)

  3. 오늘날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죄는 무엇인지 생각해볼까요?
    (행적 76-78 쪽, 탐심, 위선, 위증)




  4.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왜 죽지 않을까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죽지 않고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때처럼 단호히 심판하신다면 예배가 끝난 후 의자 위에 죽어 넘어져 있는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스펄죤)

생각해봅시다.

  1. 정직은 그리스도인의 덕목(혹은 재림교인) 중 어떤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하나요?

  2. 왜 위선적인 행동을 하게 되나요?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이사야 29장 13절).

 


1. [그러나]. 바나바의 인정 많은 관대함 (4:36, 37)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물욕이 현저하게 대조된다(5:1~11).

아나니아.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를 뜻함. 당시 흔한 이름으로, 다소의 사울이 처음 회심할 때 그를 도왔던 사람(9:10~17)과 공회에서 바울의 입을 치라 명한 대제사장(23:2; 24:1)의 이름도 아나니아이다. 이것은 렘 28:1; 단 1:6, 7에 나오는 히브리 이름 하나냐에 해당된다.

…하는 사람이. 진실한 기자(記者) 외에는 이 시점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말하지 않을 것이다. 열두 제자 중에 유다가 있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순결하고 열성적이긴 했지만, 초기교회에는 관대함보다는 비열함을, 정직보다는 위선을 택한 두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침착하게 그리고 감정에 휩싸이지 않는 방식으로 기술되고 있으며, 독자들은 상술되는 꾸밈없는 사실들을 통해서 교훈을 얻고 감동을 받는다.

삽비라. 이 이름이 “사파이어”를 뜻하는 헬라어 삽페이로스(sappheiros)에서 파생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필시 그 이름은 “아름다운”을 뜻하는 아람어 샵피라 (s∨appira’)를 의미할 것이다.

 

2. 감추매. 헬라어 노스피조(nosphizo-). 여기에서 사용된 형태는 “자신을 위하여 떼어 놓다”를 뜻한다. 딛 2:10에서 이 동사는 “떼어먹다”로 번역되었다. 「70인역」(수 7:1)에는 아간의 죄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아나니아가 땅 판 돈의 일부를 갖고 있는 그 행위 자체는 죄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어떤 것도 내도록 강요받지 않았다. 그는 자원하여 내겠다고 공언했지만, 어떤 일정한 금액을 낼 의무는 없었다. 그 돈은 그의 것으로서, 전부를 낼 수도 있고 일부를 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부를 드리면서 전부를 드리는 척했다. 그것은 속임수 곧 행동으로 말한 거짓말이었다.

바나바의 자기 희생의 이야기를 말하면서 누가가 칭찬한 사실은 그런 행위가 교회의 칭찬을 받았음을 드러내고 있음에 틀림없다. 아나니아는 더 적은 희생을 하고도 동일한 칭찬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보인다. 남의 호감을 사려는 갈망은 탐욕에 대해 부분적 승리를 거둘 정도밖에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탐욕은 정직에 대해 승리를 거둘 만큼 강했다. 팔고자 하는 충동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왔다. 그러나 판매 대금의 일부를 그대로 보유하고 있으려는 충동은 악했다. 그런 행위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는 시도였다. 그 죄는 어떤 면에서 게하시의 죄와 흡사했지만(참조 왕하 5:20~27 주석), 오순절 기적과 성령의 인도 아래 이루어진 교회의 특출한 발전 배경에 비추어 볼 때 훨씬 더 흉악했으며, 더욱 엄한 형벌을 받았다.

그 아내. 삽비라가 기꺼이 공범자가 된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범죄는 계획된 것이었다.

어찌하여. 만약 아나니아가 원했더라면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물리쳤더라면, 유혹자는 물러났을 것이다(약 4:7).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베드로는 악의 근원을 찾아냈다. 그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어떤 일을 행하고 있었는지를 분별의 은사를 통해서 알았다(고전 2:14; 12:19). 슬프게도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나니아는 사단에게 마음을 열었고 마침내 그의 마음이 탐욕과 사기심(詐欺心)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성령. 성령은 신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하여 주어졌지만(요 16:13), 아나니아는 진리의 영을 속이려는 헛된 노력을 하고 있었다(참조 요 14:17, 26; 16:13 주석).

 

4. 그대로 있을. 아나니아는 그 땅을 팔도록 강요받지 않았다. 그가 서원한 것을 땅 판 돈에서 정직하게 드릴 것이라는 기대만 있었을 뿐이다. 그런 사실에 함축된 의미는, 교회는 어떤 사람에게도 공동기금에 기부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드리겠다는 약속을 했을 경우 약속한 것을 드려야했다는 것이다. 모든 단계에서, 아나니아는 자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한 대로 행동할 자유가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으려고 했던 부분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가 정직하게 그렇게 하려고 했었다면, 그는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 희생 없이 관대하다는 평판을 얻으려는 이런 시도 때문에 그는 신성 모독죄를 범하게 되었다.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문자적으로 “이 행위를 [마음에] 넣었느냐.” 이 말은 아나니아가 용의주도한 계획을 세웠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갑작스런 유혹에 굴복한 문제가 아니라 결코 바르지 않은 계획을 그의 마음속에 받아들여 악한 행위로 발전시킨 그런 문제였다. 사단은 그 계획과 관련하여 그의 마음에 들어갔으며, 바깥으로 쫓겨나지 않았다.

거짓말한 것이…하나님께로다. 이 말은 아나니아가 사람들에게 전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범죄는 일차적으로 그가 감히 하나님을 속이려고 했다는 사실에 있다는 뜻이다. 모든 죄가 사람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치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시 51:4)라고 말한 다윗은 이런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아나니아가 하나님을 무시했든지 아니면 자기 동료를 속였으면 하고 바랐던 것처럼 하나님도 속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든지 둘 중의 하나다. 어느 쪽에 해당이 되든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범하고 있었으며, 베드로는 바르게 이 사실을 부각시켰다.

“하나님”이란 단어의 사용은 성령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 빛을 비춘다. 행 5:3에서 아나니아의 죄는 “성령”께 거짓말을 한 것으로 확인되며, 여기서는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것은 성령과 아버지 사이에 존재하는 일치성을 시사하며, 그리스도인에게 허위적으로 신앙이 깊은 체하는 행위의 흉악성을 경고하는 데 이바지한다(참조 마 12:31 주석).

 

5. 혼이 떠나니. 헬라어 엑프쉬코(ekpsucho-). “숨을 거두다”(expire)를 뜻하며, 의학 문헌에서 발견되는 용어이다. 죽음은 우연히 발생하지 않았다. 죄에 대한 베드로의 탄핵과 죄인의 죽음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었다. 기만을 폭로한 후에 베드로가 예고한 삽비라의 죽음(7~10절)을 고려해 볼 때 이 점에 대한 어떤 의혹도 사라진다. 나답과 아비후에 대한 심판(레 10:2), 아간에 대한 심판(수 7:20~26)과 비교해 보라(참조 대하 22:8 주석). 마 27:50 주석과 비교하라.

이것은 매우 두려운 심판이었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의아해 할 필요는 없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제 막 태어난 교회의 구성원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이끌려 갔다. 그들은 분명 하늘의 구원의 선물을 다소 맛보았다. 아마 그들은 성령의 은사들 중 몇 가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거짓된 영의 꼬드김을 받아 그들은 신성 모독적 행위를 저질렀다. 만약 교회의 이 초기 시절에 이런 행위를 이처럼 강력하면서도 현저하게 대처하지 않았더라면, 이와 같은 기만적 행위는 사도들의 사업을 저해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더 큰 위험과 악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개입하셨다. 이 경험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만약 누군가 종교 집회나 예배에 참석하여,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열정적으로 ‘나의 모든 것을 제단에 바쳤다!’고 노래 부른다면, 그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G. 캠벨 모건).

크게 두려워하더라. 누가는 자주 기적과 그것을 목격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생기는 두려움을 함께 기록한다(참조 눅 1:12, 65; 5:26; 7:16; 8:37; 행 2:43; 19:17). 그러나 여기서는 행 2:43의 경건한 경외심 그 이상이 분명하다. 큰 무리 가운데는 부정직한 다른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며, 그런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공포감이 엄습했을 수 있다.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의를 그처럼 옹호하는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경외심이 엄습했음이 틀림없다. 두려움이 즉시 임했다. 삽비라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채 듣기 전 이미 신자들 가운데 그 두려움이 퍼져 나갔다. 이런 형태의 두려움은 기독교 신앙을 공언하면서도 온전히 진실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대하여는 억지력을 발휘할 것이었다.

장사하니라. 나사로(참조 요 11:38 주석)와 예수의 장사에서 보듯이(참조 마 27:60 주석), 죽은 사람은 동굴이나 무덤에 안치되었고, 입구는 커다란 돌로 폐쇄되었다. 그러므로 아나니아를 장사지낼 시간이 약간은 필요했을 것이다. 장례 의식에 대한 유대인들의 관심을 살펴보려면 행 8:2 주석을 참조하라.

 

7. 세 시간쯤 지나. 문자적으로 “약 세 시간 간격을 두고.” 짐작컨대 그 다음 기도 시간 때까지. 이것은 아나니아의 시신을 처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아직 삽비라에게는 그 소식이 전해지지 못했다.

들어오니. 베드로와 나머지 회중이 그녀의 남편이 죽어서 장사지낸 바 된 것을 방금 목격했던 그 방으로.

 

8. 베드로가 가로되. 아마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일 것이다. 베드로의 질문은 공모자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삽비라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삽비라는 남편의 범행을 막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녀는 이제 고백을 통하여 자신의 양심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녀는 이전의 기회를 잘못 사용하였고, 지금 또 실패하였다.

내게 말하라. 베드로의 단도직입적 질문은 삽비라로 하여금 그들의 계책이 탄로났다는 것을 경고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남편과 함께 꾸민 거짓말을 계속하였다. 그녀는 입심 좋게 “예 이뿐이로라”고 대답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가 가져왔던 금액을 언급했을 것이다.

 

9. 함께 꾀하여. 그 범죄는 미리 계획된 기만이었기 때문에 특히 가증스러운 것이었다.

영을 시험하려. 즉 성령이 사람들의 마음의 은밀한 일들을 분간하시는 분인지 아닌지 “시험하려.” “주의 영”이란 표현은 필시 여호와의 영(참조 왕하 2:16; 사 61:1 등등)처럼 구약적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런 조합은 신약에서는 드문데 이곳에서와 고후 3:17에만 나온다.

너를 메어 내가리라. 베드로는 심판자가 아니라 예언자로서 말하고 있다. 성령이 이미 그들을 정죄하였다. 이 경우에, 다가올 심판이 예고되었으며, 그 발표에 곧 뒤이어 심판이 집행되었다. 그의 식별의 은사를 통하여 베드로는 아나니아를 장사지내고 오는 젊은이들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그들이 곧바로 그와 같은 성격의 일을 한 번 더 치르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11. 교회. 2:47의 확실하지 않은 독법을 제외하고, 이 단어는 사도행전에서 이곳에 처음 등장한다(「제임스왕역」 2:47에는 “church”[교회]라는 단어가 본문에 있으나 「개역한글판」에는 없음-역자 주). 그 단어의 등장은 조직상의 발전이 있었음을 가리킨다. 참조 마 18:17 주석.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깜짝 놀랄 만한 죽음은 그 사회와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가져다 줄 것이다.

듣는 사람들이 다. 이들은 교회 밖에 있었으나 교인들 가운데서 행사되고 있는 능력에 대하여 들었다.

행 4:5-22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 내용 요약

  1. 제자들의 체포와 석방 
    • 체포 (1-4)
    • 베드로의 답변 (5-12)
    • 산헤드린의 고민 (13-21)
  사랑받은 제자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요일 1:1-3)하노라고 기록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우리가 아는바와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전하여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한 계단 한 계단씩 예수를 따른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 길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어떤 요점을 갖게 할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허락을 어떻게 시험하여 보았고 그 허락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하여 아는 바를 증거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 주께서 요구하시는 증거인데, 이런 증거의 부족으로 세상은 멸망해 가고 있다. ─ 시대의 소망, 340(영문).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사람이 두려워서 바르지 않은 길을 간 적이 있나요?

  2. 자신이 만나본 사람 중 최고의 권력자는 누구였습니까?

  3. 좋은 것을 나누어주고 싶어 견디지 못한 적이 있나요?

  4. 예수님을 담대히 전한 적이 있나요? 왜 그렇게 하였나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다음의 사람들이 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가르치는 것을 싫어했는지 의논해볼까요?
    • 제사장들
    • 사두개인들
    • 성전 맡은 자(레위인, 성전 경호대장) 
      ※ 산헤드린은 71명으로 구성된 그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 권력 기관이었다. 그해의 대제사장이 의장이 되고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제사장들 (사두개인들), 원로 장로들 (귀족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 71명
  2. 5~6절의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마26:57, 뒷장 8절 “베드로” 주석참조)

  3. 베드로의 당당하고 신앙 깊은 모습을 찾아보고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8절)
    •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13절)
    •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14절)

 

  생각해봅시다.

  1.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18)는 산헤드린의 요구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19-21)을 깊이 생각하면서 참된 증인의 태도에 대해 말해 봅시다. 



장로. 여기에 언급된 무리는 히브리어 즈케님(zeqenim)으로 알려진 자들이 확실하다. 그들은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에 대조되는 평신도 산헤드린 회원을 대표했다.

서기관들. 산헤드린의 세 번째 구성원은 직업적인 법률가요 공인된 율법 해석자인 서기관들로 이뤄졌다(참조 제10, 62). 자격을 갖추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제시한 새로운 가르침에 분노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참조 마 7:29).

 

6. 안나스. (Seth)의 아들인 이 사람(요세푸스는 아나누스[Ananus]라고 칭함)AD 6년경 로마 총독 구레뇨(Quirinius 또는 Cyrenius)의 임명으로 대제사장이 되었으며, AD 14년경에 퇴진했다(Josephus Antiquities xviii. 2. 1, 2). 그리스도는 처음에 안나스 앞으로 보내졌고(18:13), 그 후에 안나스가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냈다. 이는 안나스가 당시 실제로는 대제사장이 아니었지만 유대인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가야바가 안나스의 사위였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특히 이해할 만하다. 두 사람 안나스와 가야바의 직능을 정확히 확인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일단 대제사장직을 맡았던 사람들은 직무를 중단한 후에도 그 직함을 계속 지니는 것이 관례였다. 안나스가 죽을 때까지 그의 아들 중 다섯이 대제사장직을 거쳤다(위의 책 xx. 9. 1). 그러나 AD 66~73년의 전쟁 기간에 폭도들이 성전 안에서 저지른 잔혹한 행위로 인해 그의 노년에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참조 Josephus War iv. 3. 78 [151~157]).

가야바. 가야바는 AD 18년이나 19년경에 임명되어 AD 36년경에 물러났다. 그는 복음서에 정략적이며 편의주의적인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참조 요 18:14; “안나스에 관한 주석).

요한. AD 70년 성전이 파멸되기까지 40년 동안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전해지는 유대 지도자 요하난(요한) 벤 작카이일 수도 있다. 그는 유대-로마 전쟁 후에 얌니아 회의(참조 제10, 90)의 발기인 겸 의장이 된 사람이다. 하지만 이렇게 보는 것은 매우 불확실하다. “요나단이라고 되어 있는 고대의 한 필사본이 시사하는 대로, 이 사람은 가야바 후에 잠깐 대제사장이 되었다가 벨릭스 때(AD 52~60년경) 다시 대제사장이 된 안나스의 아들 요나단일 가능성도 있다.

 

7. 가운데. 산헤드린은 반원(半圓) 형태로 자리에 앉았다(참조 Mishnah Sanhedrin 4. 3, Soncino ed. of the Talmud, 230). 베드로와 요한은 분명히 중앙에 자리했을 것이다.

 

8. 베드로. 이 일이 있기 몇 주 전 베드로는 대제사장 관저의 뜰에서 하속과 군인들 앞에서 떨면서 주님을 부인했다. 그러나 그 후 성령이 임하여 그를 새 사람으로 변화시켰다(참조 삼상 10:6 주석; 10:19, 20). 이제 그는 유대인의 최고 법정에 서서 예의를 갖추되 위축되지 않고 담대하게 말한다. 베드로는 쓰라린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부인한 것을 회개했다(22:54~62). 참된 회개를 나타내는 증거 중 하나는 뉘우친 잘못으로 인해 초래된 악한 결과를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유대인들 앞에서 주님과 그의 사업에 불명예를 가져왔다. 그러나 지금, 바로 그 도성에서, 예수를 정죄하는 일에 관여했던 바로 그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는 한때 자신이 부인했던 구주의 거룩한 사명을 기쁘게 증거했다. 여기서 베드로는 후에 자신이 준 권면 곧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라는 말씀의 효력을 보여 주었다.

 

11. . 이 성경 구절은 시 118:22을 문자에 매이지 않고 인용한 것이다. 베드로가 말을 건네고 있는 산헤드린 회원들 중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이 말을 인용하여 회의적인 유대인들에게 적용하는 것을 들었다(21:42~44). 그들은 영적인 눈이 멀어, 그 당시 예수의 도전과 경고를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 교회를 세우는 자로 부름을 받았으나(참조 행 7:38 주석) 하나님이 모퉁잇돌로 선택한 돌을 거절하였다(참조 엡 2:20). 교회가 모퉁이의 머릿돌”(벧전 2:6~8)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초석 위에 산 돌들로 지어졌다는 이 동일한 사상은 베드로전서에 지배적으로 나타난 주제 중 하나이다.

 

12.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육체적 치료는 영혼을 구원하는 예수의 능력에 대한 외적 표시이며, 앉은뱅이도 그 능력을 받았다고 암시했다. 목격자들은 일어나 걸으라는 명령으로 이루어진 결과를 보고, 그 동일한 능력으로 영적 구원의 더 큰 축복이 확실히 이르러 올 수 있다고 결론지었을 것이다(참조 마 9:5).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구원은 관원들이 찾고 있다고 고백한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주라는 베드로의 주장은 예수가 친히 자신의 독특성에 대해 주장한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참조 요 3:16; 14:6).

구원을 얻을 만한. 그리스도는,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 한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유일한 길이다(참조 요 14:6; 17:3).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공된 구원의 계획은 (1) 하나님을 도덕적 통치자로 드높이며, (2) 하나님의 율법을 통치 규칙으로 견지하고, (3) 그 계획의 근원의 특징이 하나님의 계시 가운데 나타나 있음을 보여 주며, (4)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인 인간의 필요를 대속(代贖)을 통해 채워준다. 그리스도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다(딤전 2:5).

기탄없이 말함. 헬라어 파레시아(parre-sia). “모든이라는 의미의 판(pan)을 뜻하는 레시스(rhe-sis)에서 유래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말의 거침없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담대함이라는 뜻이 된다. 이 단어는 교육으로 훈련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거침없고 재치있는 언어 구사를 의미한다. 파레시아는 드러내 놓고”(8:32) 행해진 주님의 가르침의 특징이었다. 이후로 기탄없음, 여기서 베드로와 후에 바울이 보여 준 것처럼 사도들의 사역에 나타난 특징이 되었다(참조 행 28:31; 고후 7:4). 파레시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 대하여 요한이 보여준 확신을 나타낼 때 그가 사용한 특징적인 단어이다(요일 4:17; 5:14).

학문 없는. 헬라어 아그람마토스(agrammatos). “문맹의.” 즉 유대인들의 학문과 전승의 견지에서 교육받지 못한.” 반면 서기관들은 그람마테이스(grammateis) 학문 있는 자들로 알려졌다. 유대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서기관들처럼 교육받지 못한 것을 주목하여 자연스럽게 그처럼 무식한 사람들은 종교 교사가 될 자격이 없다고 결론지었을 것이다.

범인. 헬라어 이디오테스(idio-te-s). “자신의 것이라는 뜻의 이디오스(idios)에서 파생했다. 여기서 이 단어는 공직에 있는 사람과 대조되는 평민 곧 사인(私人)을 지칭한다. 제자들은 종교 교사로서 인정된 지위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특별한 직위나 직업 혹은 그러한 직업에 요구되는 교양이 없었다. 이디오테스라는 단어는 후에 흥미로운 역사를 갖게 된다. 라틴 사람들은 철자를 거의 바꾸지 않고 이디오테스를 이디오타(idiota)로 재생시켰다. 그것은 이 형태에서 그것에 부여된 무지와 무능을 묘사하는 용어로 현대 유럽 언어에 유입되었다. 이렇게 하여 현재의 영어인 “idiot”(백치)가 되었다. 누가가 이 단어를 사용할 당시 이것은 베드로나 요한이 지능이 결여된 사람들이라는 의미보다는 공적인 사람들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이것이 바로 사도들이 종교 교사의 일을 하려고 했을 때 산헤드린 회원들이 분노한 이유였다.

알고. 알아보기 시작하고.” 베드로는 이미 산헤드린 앞에서 그의 능력이 나사렛 예수에게서 나왔음을 분명히 했다. 이제 유대 지도자들은 사도들이 정식 훈련을 받지 못했는데도 담대하게 가르치는 원인을 찾다가, 베드로가 말하는 방법이 또한 예수의 방법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병 고치는 그의 능력뿐 아니라, 그의 기별과 그것을 제시하는 방식 모두가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다. 산헤드린 회원들에게는 마치 예수가 두 제자의 모습으로 그들 눈앞에 다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따르는 모든 자는 항상 그래야 한다. 오늘날 주님을 대변하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분명한 확신과 능력은 기도와 명상 그리고 생애의 모든 활동에서 이룬 협력을 통하여 예수와 동행해 왔던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거룩한 주님과 더불어 누린 이런 교제는 측량할 수 없는 특권과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져다 주며, 그리스도의 일을 위한 중대한 책임감을 불러일으킨다.

 

14.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문자적으로 반박할 말이 없는지라.” 그 증거를 반박할 수 없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바로 그 당사자가 나음을 입고 그들 앞에 서 있었으므로(참조 16), 그들이 주님의 부활 사건에서 그랬던 것처럼 속임수라고 비난할 수 없었다. 이어지는 사건들로 판단해 볼 때, 신분이 높은 무리들 가운데는 하나님이 사도들을 통하여 일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 사건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가말리엘이 그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비쳤다(참조 5:34~39).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두려워한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다(39; 참조 40).

 

16. 어떻게 할꼬. 현안은 심의되지 않았다. 산헤드린은 개정 중에 있었고, 따라서 증거에 의해 피고에게 평결을 내려야 했다. 앉은뱅이는 나았고, 산헤드린은 그를 보았다. 치유 사건에서 매개가 되었던 두 사람이 그들 앞에서 판결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산헤드린 회원들은 사법적 직무를 유기하고는, 편의에 따라 어떤 노선을 따라야 할지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절차는 가야바의 특유의 방법이다(참조 요 11:49, 50).

판단하라. 이렇듯 자신들이 무죄하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었지만, 사도들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그 사실을 인정하라고 담대하게 요구했다. 산헤드린이 베드로와 요한을 벌하지 않고 놓아주는 것은 그들이 무죄함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20. 우리는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헬라어 본문은 대명사 우리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들은 예수의 사도로서 그에 대하여 증언하도록 특별히 위임받았다(28:19, 20; 1:8).

보고 들은 것을. 사도들의 증언은 예수와 함께했던 개인적인 경험에 기초하였다. 여러 해 후에,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이 보낸 편지서들 가운데서 그들이 가르친 진리에 대해 자신들이 목격자라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벧후 1:16~18; 요일 1:1~3).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의 생애에서 그리스도가 함께한 개인적인 경험은 그리스도교 진리의 실재를 보여 주는 가장 설득력있는 증거 중 하나가 된다.

대학선교센터교회


안식일학교

경배와 찬양 다같이
찬       미 83장
시작기도 기도자
환       영 안교장
특별순서 13 기억절암송
교과공부 각 반
헌금소개 사회자
축       도 담임목사

 

기억절 2기 13과 (일몰 : 7시 57분)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욘 1:9).

 

7월 시무 안내
시       무 : 임경훈
헌금봉사 : 이한얼 정찬우

 

다음 주 예배순서

금요일예배 안식일예배
날짜 기도 말씀 날짜 기도 말씀
4 김진수 소그룹 5 심정은 김유민
11 이마루 소그룹 12 민대홍 문호준
18 이지오 소그룹 19 김우진 배승환
25 임태훈 소그룹 26 함주원 권세진

 


안식일 예배

경배와찬양 다함께
등단 / 묵도 다함께
송        영 2장
기        원 설교자
찬        미 17장
대 표 기 도 이현민 청년
특 별 찬 양  
설        교 배승환 목사
찬        미 421장
개 인 기 도 다함께
헌        금 다함께
축        도 설교자

캠퍼스 소식


광 고

  1. 환영합니다.
    기쁜 안식일을 맞이하여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가족들과 손님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2. 전국액트수련회
    일시 : 6월29일(일)~7월1일(화)
    장소 : 안면도수련원
  3. 학생캠프
    일시 : 7월18일(금)~20일(일)
    장소 : 비전센터
  4. 본부지구 장막부흥회
    일시 : 7월18일(금)~19일(안)
    장소 : 본부교회
  5. 여름 국내봉사대
    일시 : 7월22일(화)~27일(일)
    장소 : 강릉지구
  6. 어린이여름성경학교
    일시 : 7월25일(금)~27일(일)
    장소 : 별새꽃돌 과학관
  7. 캠퍼스모임 활동보고 (5/26~6/25)
    https://blog.naver.com/1967act/223878337579
  8. 일요기도회
    전국 수련회로 인하여 가정에서 드립니다.

 

  • 다음 주 당번
    • 식사당번 : 여집사 1조
    • 청소당번 : 화랑캠모

캠퍼스 모임

방학중 소그룹 목요일 6시 교회
졸업생 소그룹 화요일 오후 8시 교회
장년 소그룹 화요일 오후 8시30분 ZOOM

 


담임목사 권세진   부목사 배승환   전도사 김유민
수석장로 임동국   서기 문호준  재무 김성미   
선교회장 윤민식  액트회장 윤애리   


헌금계좌 : 하나은행 144-890014-45304
(ACT교회)
주소 :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로1길 11
어린이청소년비전센터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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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3:1-10, 개정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내용 요약

  1. 앉은뱅이를 고침 (1-10)
    1)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앉은뱅이의 형편 (1-6)
    2) 그리스도를 안 이후의 앉은뱅이의 형편 (1-10)
  2. 베드로의 설교(11-26)
예수님께 바치기에 너무 아까운 것은 없다. 우리가 그분께서 우리에게 지키도록 맡겨 주신 재물의 달란트를 그분께 돌려드리면, 그분께서는 더 많은 것을 우리의 손에 넣어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활동은 모두 그분에 의하여 보상을 받게 될 것이고,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가 완수한 의무마다 우리의 행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게 하시고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심히 사랑하시는 아들을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도록 내어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아버지와 연합되셨지만, 인간을 구원하고 그들을 서로 연합시키기 위하여 그처럼 큰 희생을 치르셨다. 그렇다면, 그 연합을 보존하기 위하여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치르는 어떤 희생을 지나치다고 할 수 있겠는가?
(1보감 446p)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무능함을 깊이 느끼고 겸비와 기도로 그들의 약함을 그분의 능력에, 그들의 무식을 그분의 지혜에, 그들의 무가치함을 그분의 의에, 그들의 빈곤을 그들의 무궁무진한 부에 연결시켰다.” (사도행적, 59)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이름과 관련된 별명이 있나요? 혹은 이름과 관련되어 놀림 받은 적이 있나요?
  2. 부모님의 이름에 욕 먹인 적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있다면 나의 어떤 행동 때문인가요?
  3. 나의 삶과 예수님의 이름과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베드로와 요한의 말과 행동을 음미해 볼까요?

    1)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2) 우리를 보라.
    은과 금도 없으면서 우리를 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3)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내가 가진 것 중에서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어떤 것들이 있나요?

    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있나요? 그 이름으로 능력 있게 살고 있나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죠?

    5)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너무나 오랫동안 무력하게 살아온 그는 일어서라는 말뿐만 아니라,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 주어야 했습니다. 내가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줘야 할 사람이 있나요?

  2. 앉은뱅이가 낫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행 3:16, 개정)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1) 병치료를 강조하고 선전하는 교회에 대해 의견을 말해 봅시다.

    2) 참된 병의 치료는 어떤 것일까요?

 

생각해봅시다.

 

  1. 앉은뱅이의 기쁨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이 견딜 수 없는 기쁨이 구원받은 사람의 기쁨이겠죠! 최근 우리생활 속에서 있었던 구원의 기쁨에 대하여 이야기 해 봅시다.)

    ※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뛴 사건을 개기로 그날에 구원받은 사람이 삼천명(행2:41)이나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기쁨과 증거들은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큰 원동력이 됨을 기억하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지나갈 때에 그는 동냥을 하였다. 제자들은 그를 불쌍히 여겼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에게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하였다. 베드로가 아무것도 없다고 하자 앉은뱅이의 얼굴은 낙담의 빛으로 역력해졌다. 그러나 사도가 계속하여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할 때에 그의 얼굴은 희망으로 빛나게 되었다.(행적 58p)

 

사랑과 친절로써 예수님의 이름을 발하면 즉시 하나님의 천사들이 가까이 다가와 심령을 부드럽게 하고 진정시킬 것이다”(문서전도봉사, 112).


기도 시간. 9 즉 오후 3시경(참조 2:15 주석; 10, 55). 이때는 저녁 제사드리는 시간이었다(참조 Josephus Antiquities xiv. 4. 3 [65]). 이 시간은 기도 시간분향하는 시간”(참조 눅 1:9, 10)으로 알려졌다. 조석 제사는 매일 제3시와 제9(오전 9시와 오후 3시경)에 향과 함께 드렸으며 그 시간에 경건한 자들이 성전 뜰에서 기도했다. 정오의 기도 역시 적어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통례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참조 단 6:10; 10:9 주석; 55:17). AD 2세기에 하루 중 세 번째 기도가 일몰 시간에 드려졌다고 알려진 것으로 보아 그 기도도 전부터 관례적으로 내려오던 것으로 보인다. 랍비 문헌은, 이 정확한 기도 시각에 어느 정도 편차가 허용되었음을 보여 준다. 하루 세 번 기도하는 관습은 일찍이 2세기 그리스도 교회에 확실히 나타나는데, 유대인 회당에서 직접 전수한 것으로 보인다(Didache 8). 3세기 초에 많은 그리스도인은 하루 세 시간씩 기도했던 것으로 보인다(참조 Clement of Alexandria The Stromata vii. 7).

 

올라갈새. 올라가고 있었다가 더 나은 표현이다. 진술된 사건은 두 사도가 예배하러 성전으로 들어가는 중에 일어났다.

 

2. 나면서. 이 사람이 고통받은 기간을 세심하게 기록한 것은 누가 특유의 방법이다(참조 9:33; 14:8).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았을 때의 나이는 대략 40세였다(참조 4:22 주석).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 이름은 앉은뱅이에게 생소하지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 실로암 못에서 눈을 뜬 맹인이 있었다(9:7, 8). 베데스다의 중풍병자가 고침받은 일(5:2~9)이 같은 연약함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 사람에게도 알려졌을 것이다.

나사렛은 평판이 나쁜 곳이었다(참조 요 1:46). 요한의 기사에 따르면, 십자가의 팻말에 나사렛이라는 지명이 적혀 있었다(19:19). 예수의 갈릴리적 배경(7:40~42)뿐 아니라, 그가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은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었다. 그것은 앉은뱅이가 베드로의 요구에 반응하는 데 신앙의 큰 시험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불과 몇 주 전에 이 이름으로 불린 사람이 수치를 당하고, 백성을 기만한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 이름을 발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름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구주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는 그렇게 불리는 거룩한 분의 인격과 품성이 표현되어 있다. 경건한 마음으로 그 이름을 불렀을 때 그분의 능력이 나타났다. 그 이름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 이름을 부른 사례가 사도행전에 자주 나타난다(참조 4:10, 12; 9:14; 16:18; 19:5, 13; 22:16). 치유 행위를 할 때 베드로가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그 이름을 말한 것은 주의 약속을 단순하게 믿는 믿음의 표현이었다(16:18). 참조 행 3:16 주석.

 

7. 일으키니. 베드로의 이 몸짓은, 어린아이 같고 어쩌면 이제 막 싹트기 시작했을 앉은뱅이의 믿음에 인정 많은 조력자처럼 다가왔다. 그것은 앉은뱅이의 무력함의 마지막 순간과 자신에게 기적이 일어났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첫 순간 사이의 매우 짧은 틈을 이어주는 도움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베드로가 했던 것처럼 해야 한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 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 주(35:3).

 

발목. 누가는 의사였고(4:14), 따라서 의료 경험이 있는 기자가 여기서 앉은뱅이에게 일어났던 일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다.

 

힘을 얻고. “강하게 되었다가 더 나은 표현이다. 늘어지고 연약한 힘줄과 근육에 활력이 생기고 강해졌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 성경이나 유대 문헌 어디에도 이 이름으로 알려진 문은 없다. 전반적으로 학자들의 견해는 이 문을 성전 경내 동편의 맨 바깥쪽 벽에 있는 수산 문(Shushan Gate)으로 보거나,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통하는 니카노르 문(Nicanor Gate)으로 보는 것으로 엇갈린다. 어떤 이들은 니카노르 문이 남자의 뜰과 여인의 뜰 사이에 있었다고 보았다. 미문이 바깥벽의 한 부분이었는지 아니면 두 뜰 사이에 있었는지는 주로 이 진술에서 사도들이 택한 것으로 생각되는 진입 경로에 좌우되는 것 같다. 누가는 베드로와 요한이 그 문에 이르러 앉은뱅이를 고친 후 성전에 들어갔고, 분명 기도를 드린 후에 솔로몬 행각에서 그 이적에 매료된 무리들을 만났다고 기록한다. 솔로몬 행각은 동편 바깥벽 바로 안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므로(참조 11절 주석), 미문은 아마 바깥쪽 수산 문일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뜰 사이에 있는 안쪽 문이라면, 사도들은 솔로몬 행각에 이르기 위하여 그 문을 통하여 다시 바깥으로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은 감람산에서 성전으로 들어오는 쪽에 있었으며 도성 안에 살고 있던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갔을 방향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처음부터 그 문을 사용했다는 것을 설명하기가 곤란한 것 같다. 마을에서 성전으로 바로 들어가는 다른 문들과 비교해 볼 때, 그 문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걸인이 늘 앉아 구걸할 만한 장소가 되기는 어려웠다. 이런 명백한 난점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사도들이 솔로몬 행각에서 무리를 만나기 전에 미문을 통하여 다시 밖으로 나갔고, 따라서 이 문은 여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 있는 니카노르 문일 것이라는 가정을 지지한다. 요세푸스는 이 문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것, 성전 바깥쪽에 있는 것은 고린도 산() 청동으로 만들어졌는데, 은으로 도금되고 금으로 장식한 문보다 훨씬 가치가 있었다”(War v. 5. 3 [201]). 바로 이 문에 대해 미쉬나는 이렇게 말한다. “니카노르 문을 제외하고 본래의 모든 문이 금문으로 바뀌었는데, 그 문들에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문들의 구리가 [금처럼] 빛났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다고 말한다”(Mishnah Middoth 2. 3, Soncino ed. of the Talmud, 7, 8). 이 모든 증거를 종합해 볼 때 미문은 니카노르 문으로 확인되는 것 같다.

 

11.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베드로와 요한이 나가자 그가 그들을 붙들고 따라 나갔다. 그러자 놀란 사람들이 솔로몬 행각이라는 곳으로 모여들었다라는 독법을 지지하는 본문상의 증거가 있다. 이와 같은 독법은 미문의 위치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며, 비록 원본은 아니지만 미문이 니카노르 문으로 확인되는 것을 지지하는 초기의 증거로 보인다.

 

크게 놀라며. 불과 몇 달 전, 수전절에(10:22, 23) 바로 이 솔로몬의 행각에서 예수가 백성에게 하나님의 일에 대해 설교하였다. 그때의 기억이 두 제자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때 예수가 자신이 그리스도인지 숨김없이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이 불평했으나(10:24~26), 그가 하나님과 하나임을 주장하자 돌을 들어 치려 했다(10:30~33). 이제 그들은 그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 “생명의 주”, 예언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고 선포되는 것을 듣는다(3:14, 15, 18).

 

행각. 헬라어 스토아(stoa). “주랑”(柱廊), “회랑”(回廊). 1성전 건물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에는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대한 언급이 없다. 요세푸스는, 이 행각이 성전 경내의 동편에 위치해 있었으며(Antiquities xx. 9. 7), 높이가 10.6미터쯤 되는 두 줄의 원주(圓柱)들로 인해 두드러지게 보였다(War v. 5. 2 [190])고 말한다. 이 주랑이 솔로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은, 그것이 스룹바벨 시대로부터 옛 건물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헤롯 아그립바 세가 조부의 일을 마무리할 때, 백성들이 그에게 이 행각을 허물고 다시 건축하라고 설득했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12. 왜 기이히 여기느냐. “어찌하여 서서 쳐다보느냐”(1:11)라고 한 천사의 질문과 흡사하다. 두 경우 모두, 기적을 보고 놀란 목격자들에게 그렇게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경건. 혹은 헌신.” 베드로의 말은 어떤 사람의 헌신이 충분하다면,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을 것이며, 위대한 결과가 뒤따를 것(참조 요 9:31)이라는 통념을 마음에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여기서 사도는 그러한 사상을 거부한다. 베드로의 경건 때문에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만이 그 일을 이룰 수 있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문자적으로 왜 우리를 응시하느냐”(참조 1:10 주석). 기적은 베드로나 요한과 같이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권능의 공으로 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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