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안식일 개혁, 누가복음 연구 1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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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6:1-11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2]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5]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

[8]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10] 무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11]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유대인들이 하나님에게서 떠나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자신의 것으로 삼지 않았을 때 안식일은 그들에게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사단은 자신을 높이고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게 하려고 힘썼으며 안식일을 왜곡시키려고 활동하였는데 그 이유는 안식일이 그리스도의 능력의 표징이기 때문이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안식의 날을 무거운 짐이 되는 요구 사항들로 둘러싸서 사단의 뜻을 성취시켰다. 그리스도의 시대에 안식일은 매우 왜곡되어서 이날의 준수는 사랑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품성보다는 오히려 이기적이고 변덕스러운 사람들의 품성을 반영하였다. 랍비들은 사실상 사람들이 순종할 수 없는 율법을 주신 분으로 하나님을 나타냈다. 그들은 사람들로 하나님을 폭군처럼 여기게 하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안식일의 준수는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잔인스럽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게 하였다. 이런 그릇된 관념을 없애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일이었다. 랍비들이 무자비한 적개심을 품고 예수를 따라다녔지만 예수께서는 조금도 그들의 규례들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지 조차 않으셨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안식일을 지키시면서 똑바로 행하셨다.”(소망, 283-284)

 

수님께서 안식일을 어떻게 생각하셨는가? 참된 안식일을 어떻게 회복시키셨는가?

본문연구

  1. 본문의 사건이 있었던 구체적인 때는 언제인가?
    1, 6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안식일에 있었던 사건은 공관복음(마태,마가,누가) 모두에 기록되어 있다.

  2.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의하면 본문에서 안식일에 금지되는 일은 무엇인가?
    2, 7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타인의 밭의 이삭을 먹는 것에 관해서는 신 23:25을 보라.
    cf. ‘이삭을 주워 먹는 것병자를 고치는 것이 왜 안식일을 범하는 것일까?

  3. 3-5절에서 다윗의 예를 들어 반박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어떻게 설명되는가?
    9-10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다윗의 사건은 삼상 21:1-6에 기록되어 있다.

  4. 8-10절에서 예수님이 병자로 하여금 한 가운데서게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공개적이고 도전적으로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하시므로 의도하신 것은 무엇일까?
    cf. 9절에 의하면 무엇인 선행이고 악행이며, 생명을 구하는 것이며 죽이는 것인가?
    바래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율법과 하나님의 율법의 구분은 무엇인가?

 

토의사항

  1. 안식일을 거룩히 지킨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이야기 해보자.
    cf. 20:8, 22:31, 20:12을 참고하라.

  2. 예수님께서 당시의 잘못 적용된 안식일 계명을 어떻게 개혁하셨는가? 오늘날 우리의 안 식일 준수에서 개혁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손이 마른 자를 고치심으로써 유대인의 관습을 정죄하셨고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그 사람의 손을 고쳐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금하였다. 넷째 계명을 하나님께서 주신 그 본연의 모습대로 살리셨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선언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무의미한 규례들을 쓸어 버림으로 안식일을 존귀하게 하신 반면에 예수께 대하여 불평의 말을 하던 자들은 하나님의 성일을 더럽히고 있었다.”(소망, 287)

가는 마태(12)와 마가(2,3)와 더불어 안식일 논쟁을 통하여 개혁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언급하였다.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으로서 매우 중요한 안식일 계명을 본래의 의도대로 돌려 놓으셨다. 안식일은 그분이 주인이시며, 사람을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하지 못할 일. 안식일 외의 다른 날에는 제자들의 그런 행위가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배고픈 사람이 밭을 지나가며 과일이나 곡식을 먹을 수 있도록 구약의 율법이 구체적으로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참조 신 23:24, 25 주석).

제자들이 여기서 행한 일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인과 안식일에 행한 그의 치료 행위는, 그가 개인적으로 안식일 준수에 관한 구약의 율법과 규례들을 지키지도 않았고 또 그의 제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았던 증거라고 흔히 현대의 저자들은 곡해하고 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이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의 입장을 넷째 계명에 대한 거부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예수가 모세의 율법과 십계명의 요구를 개인적으로 고수했으며 그의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쳤음을 보여준다. 그는 도덕법의 영원한 구속력을 거듭하여 확언했으며(참조 마 5:17, 18; 15:10 등 주석), 모세의 의식법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적용된다는 유효성을 인정했다(참조 마 23:3 주석). 예수 역시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지상봉사 기간 내내 사람이 만든 법칙과 관습의 타당성에 관해서는 유대인 지도자들과 대립했다(참조 7:2, 3, 8 주석). 당시 많은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과 십계명보다 경건에 더욱 필수적이라고 여긴 듯이 보이는 이러한 요구들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타협하지 않고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참조 2:19 주석). 이러한 요구들 중 많은 부분을 그저 대강만 살펴보아도 그들의 어리석음이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바리새인들은 구원이 이 모든 규례들을 철저하게 준수함으로써 얻어진다고 엄격히 가르쳤다. 경건한 유대인의 생애는, 이런 순전히 사람이 만든 요구사항들을 부지중에 불순종했을지도 모르는 의식적 부정함을 피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기울이는 헛된 노력으로 일관되었다. 이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의 제도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정면충돌이 불가피했다.

미쉬나(Mishnah)에는 안식일에 금지된 39개의 주요 노동이 열거되어 있다(Shabbath 7. 2, Soncino ed. of the Talmud, 348, 349). 이 중 11개는 빵을 생산하고 준비하는 과정이다. 씨 뿌리기, 밭 갈기, 수확하기, 단을 묶기, 타작하기, 키질하기, 선별하기(합당한 음식에서 합당하지 못한 것을 골라내는 것), 가루로 만들기, 체질하기, 반죽하기, 굽기. 그 다음 12개는 옷을 준비하는 과정 즉 양털을 깎는 것으로부터 옷을 기워 만드는 일에 관련된 과정에 적용된다. 그 다음에는 사슴의 사체를 음식이나 가죽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7단계가 뒤따른다. 나머지 목록은 글쓰기, 건물 짓기, 불 켜고 끄기, 그리고 물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 일반적 규례들은 더욱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 주요 규례들에 덧붙여 안식일 준수에 관한 다른 무수한 지침들이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마도 약 1킬로미터 정도의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에 관한 지침일 것이다. 벽에 고정된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이나(Shabbath 149a, Soncino ed. of the Talmud, 759), 심지어는 촛불을 켜는 것도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같은 규례가 안식일에 낳은 달걀을 이방인에게 파는 것과 촛불이나 불을 켜기 위해 이방인을 고용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다. 풀잎에 물주는 일을 하면 안 되기 때문에 땅에 침을 뱉는 것은 불법으로 간주되었다. 안식일에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손수건 한쪽이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에 기워져 있으면 괜찮았는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손수건이 아니라 옷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에 관한 규칙도, 유사한 방식으로, 여행하고자 하는 길을 따라 적당한 거리에 음식물을 숨겨 놓는 식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런 경우에 음식이 있는 곳이 그 음식 주인의 또 다른 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음식을 숨겨 둔 곳에서 또 한 번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를 갈 수 있고 계속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 당시에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지워졌던 무거운 짐”(23:4) 가운데 몇 가지 예이다.

그렇게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킴으로써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만든 규칙들의 문자에 계속적으로 집착함으로 하나님의 법의 정신을 파괴하였다. 원래 사람이 창조주가 만든 것들을 연구하고 그의 사랑과 선함을 생각하도록 고안된 안식일이 오히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속성을 상기시키는 날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하나님을 독재자로 묘사함으로써 하나님의 품성을 왜곡시키는 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천연계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을 선포하고 안식일은 태초에 이런 것들에게로 사람의 주의를 이끌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자신에게 존재가치를 부여해주고 행복과 복지를 위해 신성의 능력을 한결같이 행사하시는 분을 잊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 행위로서 어떤 것이 적합하고 적합하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문제는 안식일의 목적이 마음에 분명해지기만 하면 이내 풀리게 되어 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끌어 주는 것은 무엇이나, 우리를 위한 그분의 뜻과 우리를 취급하시는 그 방법들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고, 우리를 우리 생활에서 그와 더욱 효과적으로 협력하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과 복리에 공헌하도록 이끌어 준다. 이것이 참된 안식일 준수이다(참조 사 58:13; 2:27, 28 주석).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은 안식일을 소유하시고 그것을 지킬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람을 창조하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전지하신 창조주가 손으로 만든 피조물인 사람의 품성 발달을 위하여 도덕적, 영적 성장의 기회가 필요됨을 아셨기 때문에 안식일을 만들었다. 사람은 자신의 관심과 취미를, 천연계와 계시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품성과 뜻을 연구하는 데 바칠 시간이 필요했다. 7일 안식일은 이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이 제정한 것이다. 언제, 어떻게 그날을 지켜야 할 것인지에 대한 창조주의 지시 사항들을 어떤 면으로든지 변경하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 손으로 만든 피조물을 위해 무엇이 최선임을 알고 있는 분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안식일이 축복이 되고 짐이 되지 말아야 하며, 사람이 그것을 지키는 것이 유익이 되고 손해가 되지 않도록 제정하였다. 그것은 사람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고안되었지 어려운 일을 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안식일 준수는 근본적으로 어떤 형식적인 것들을 시시콜콜히 지키는 것이나 어떤 일을 추구하는 것을 삼가는 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이런 빛으로 조명하는 것은 안식일 준수의 참된 정신과 목적을 완전히 놓치는 것이며, 행함에 근거하여 의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과 어떤 추구, 어떤 생각과 대화의 주제를 삼가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호의를 사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가 이런 일들을 삼가는 것은,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와 생각을 다른 데 바쳐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협력하는 능력을 증진시키고, 그리고 그분과 우리의 동료들에게 더욱 효과적으로 봉사하기 위해서이다. 주로 어떤 일들을 하지 않는 부정적인 요소로만 구성된 안식일 준수는 결코 바른 것이 아니다. 안식일 준수의 적극적인 요소를 실천할 때만 우리에게는 안식일 준수로부터 지혜와 사랑의 창조주로 말미암아 제정된 유익을 얻을 희망이 있다. 참조 사 58:13 주석 .

안식일을 세밀하게 준수하는 랍비들의 수많은 요구들은 하나님의 안목에 안식일이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는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법을 이렇게 맹목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의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안식일을 기계적으로 준수하기 위해 즉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랍비들은 안식일에 행해서는 안 될 것을 엄격하고 무의미하게 구분함으로써 그날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실추시켰다(참조 24절 주석). 그들은 어떤 특정한 일들을 삼가는 것, 즉 안식일 준수의 부정적인 요소를 강조하였다. 종교의 형식이 본질을 대신하게 되었다.

 

인자. 참조 마 1:1; 2:10 주석; 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안식일에도. , “안식일에조차도.” 트집잡는 바리새인들 앞에 그리스도가 제시한 논리의 정연함은 마태에 의하여 더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제시되었다. (1) 인간의 필요는 의례적 요구나 인간의 전통보다 더 중요하다(참조 마 12:3, 4). (2) 성전과 관련되어 행하는 노동은 안식일의 요구와 부합된다(참조 5). (3) 그리스도는 성전(참조 6)이나 안식일(참조 8)보다 더 크다.

 

주인. 오직 구주만이 그날에 무엇이 합당한지를 결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권리 이상을 침범한 셈이 되었다(참조 24). 교회는 안식일에 유대인들처럼 강압적인 규제를 부과하거나 한 날에서 다른 날로 그 거룩함을 전가시킬 수 있는 권리가 없다. 둘 다 사람을 참된 안식일 준수의 정신으로부터 미혹시키기 위하여 마련된 악한 자의 계교이다. 바리새인이든 기독교인인이든 간에 하나님이 택한 날을 변경할 권리가 없다.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 들린 자(참조 막 1:21~28), 베데스다 연못에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참조 요 5:1~16), 실로암 연못에서 눈먼 자를 고치신 것(참조 요 9:1~17), 그리고 18년 동안 병에 시달린 여자(참조 13:10~17), 고창병 걸린 남자(참조 14:1~6)를 고치신 것과 비교해 보라. 그리스도는 이처럼 안식일에 공개적으로 치유 이적을 베풀었으며, 베드로의 장모를 집에서 고치기도 했다(참조 막 1:29~31). 손 마른 사람을 고친 것과 합하여 안식일에 행한 치유 이적이 일곱 번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구체적으로 언급된 20가지의 치료 사례 가운데 3분의 1이 안식일에 일어났다. 참조 제9, 122~126; 5:16 주석.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 여기서는 유익을 끼치는 것과 해를 끼치는 것을 뜻함. 마태의 기사에 의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전에 이미 예수에게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은지 물었다(12:10). 랍비들의 규정은 고질병일 때와 당장 죽음에 처할 만큼 위험한 경우를 자세하게 구분하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질병들은 다른 것보다 더 중한 병이며 이러한 병으로 고통받는 자들은 필요에 따라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안식일에 심각한 병과 관련되지 않은 고통을 제거해 준다든지, 예수가 지금 막 치료하려고 하는 사람의 경우처럼 오랫동안 병을 앓아온 사람을 돕는 규정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율법은 다소 관대하게 해석되었을 것이며, 실제로는 안식일에 다른 많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보살핌을 받았을 것이다.

 

생명을 구하는 . 유대 금언에 의하면, 선을 행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해를 끼치는 것과 같고, 생명 돌보기를 소홀히 하는 것은 생명을 빼앗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사람의 생명은 위험에 처해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치료 행위는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연기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예수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 될 수 없음을 확언했다. 예수의 관점에서 볼 때, 고통받는 사람의 고통을 제거해 줄 수 있는 기회를 지나치는 것은 잘못을 행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시시콜콜한 규정을 위반할까봐 부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관심을 거기에 포함된 근본적인 원칙으로 돌리고 있었다. 생명을 구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빼앗는 것과 같고, 생명을 향상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약화시키는 것과 같다(참조 약 4:17).

 

어느 것이 옳으냐. 참조 막 2:24 주석. 또다시 랍비들의 법이 사람들의 필요와 대립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예수가 하나님의 율법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시 말해 그가 교훈과 모본으로써 계명의 요구에서 떠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정신에 참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예수는 지상 생애의 마지막에 아버지의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확언했다(참조 요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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