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은혜의 해, 누가복음 연구 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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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4:14-22

[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진리가 그리스도의 시대에는 인기가 없었다. 진리는 현 시대에도 인기가 없다. 사단이 최초에 자고심을 일으키는 거짓말을 제시함으로 진리에 대한 염오를 사람에게 준 이래로, 진리는 인기가 없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지 아니한 이론과 교훈에 접촉하고 있지 않는가? 사람들은 마치 유대인들이 그들의 유전에 대하여 그리하였던 것처럼, 이런 이론과 교훈에 집요하게도 매달리고 있다”(시대의 소망, 1권, 242).

 

수님의 첫 설교(누가의 기록)는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아에 대해 예언한 말씀이었다.

 

본문연구 (참고: 시대의 소망 제 12-13장)

  1. 안식일에 회당에서(1419).
    예수께서 그의 고향 회당을 방문하신 것은 일련의 안식일 설교와 가르침이 끝난 후였다(14,15). 대체로, 예수님과 바울이 회당에 간 것은 안식일 준수를 시사한다. 예수님의 규례는 회당에 참석하는 것이었다(16).

  2. 예수님의 봉사에 권위를 준 것은 무엇인가?(4:14; 4:31, 32 비교).
    :
       예수께서는 설교하고 가르치시는 권리와, 기사를 행하시는 권능을 가지고 오셨다. 그분의 명성은 그 권능의 증거로부터 자라 나갔다. 그분은 권세와 단순성으로 말씀하셨다. “그분은 그들이 이해하기 좋게, 명백하고 단순하게 진리를 말씀하셨다. 그분의 언어는 단순하였다! 가장 가난한 자도, 무학자나 무식한 자도 그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본교 성경 주석, 51120).

  3. 요한복음 138절에서, 예수께서 봉사를 시작하실 때 처음으로 말씀하신,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이 말씀을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쓴 첫 말씀들과 비교하라(4:17; 1:14, 15; 4:17~21).
    :

       누가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전도하셨다고 말한다(4:43). 첫 세 복음서들 (마태, 마가, 누가)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비슷하게 말하기 때문에, 비록 독특한 부분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공관 (함께 본다) 복음서라고 한다. 누가가 나사렛의 설교를 기록한 것은 마태나 마가와 다르다. 요한의 복음은 대부분 공관 복음에 없는 것들이 많은데, 그것은 말씀하신 예수님에 관한 장엄하고 권위적인 진술로 시작된다.

  4. 누가가 예수님의 말씀 중에 나사렛 설교를 제일 처음 것으로 택한 의미가 무엇일까?(4:17~19; 61:1, 2; 19:10 비교)
    :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받으시는 해를 선포하셨다 (“주의 은혜의 해4:19). 그분께서는 중보의 혜택이 미치기를 기대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의 해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 속에 있다.

  5. 예수님께서는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 대한 교회와 각 교인의 책임이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4:17~19; 25:34~45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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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시매. 자적으로 그는 가르치기를 계속했다.”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가 진리를 나누어 줄 때 사용한 통상적인 방법이다. 오늘날에는 설교가 진리를 제시하는 좀 더 공식적인 방법이고 가르치는 것은 덜 공식적이다. 가르치는 것이 설교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가르칠 때는 청취자들이 참여하기 때문이고, 반면에 설교할 때는 청취자들이 주로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예수는 산상설교와 생명의 떡에 대한 설교 등과 같은 좀 더 공식적인 강론을 하곤 했다. 그러나 산상설교에서도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5:2)라고 기록되어 있다. 자신의 설교에 가르침의 특성까지 가미한 설교자는 복된 사람이다.

 

나사렛. 참조 4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이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공적 봉사를 위하여 AD 27년 가을 목공소를 떠난 이래 그가 한 첫 번째 나사렛 방문이었다(시대의 소망, 236). 이때는 아마도 AD 29년 늦은 봄이며 그의 공적 봉사의 거의 반이 지난 시기였을 것이다. 1년 후, 아마도 AD 30년 이른봄에 예수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시대의 소망, 241) 이 성읍을 방문했다. 첫 번째 방문은 16~30절에만 기록되어 있고, 두 번째 방문에 대해서는 막 6:1~6을 참조하라. 나사렛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 그리고 자매들이 살고 있었고, 따라서 바로 이 안식일에도 그들이 회당의 예배자들 사이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안식일에. 누가가 구체적으로 주일 중 일곱째 날(참조 23:56~24:1)로 밝힌 안식일에 예수가 성스러운 회당 예배에 규례대로참석했다는 그의 진술에는, 자신의 주인을 사랑하므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분명히 나타나 있다(참조 요 14:15; 벧전 2:21). 그리스도가 지상에 있을 때 개인적으로 유대인들이 지켰던 것과 동일한 날을 지켰다는 사실 역시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진 이후로나 창조 이후로 날짜가 잃어버린 바 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주인”(2:28)이다. 즉 그가 그날을 만들고(2:1~3; 참조 막 2:27) 그것을 자신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안식일 준수에 대한 그의 모본은 준수 시간이나 방법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온전한 귀감이다. 더욱이 현재의 1주일은 그리스도 시대로부터 단절 없이 연속돼 내려왔고, 따라서 오늘날 주일 중 일곱째 날을 준수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지켰던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이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수백만의 유대인들이 문명화된 세계 각처로 흩어졌으며, 따라서 그들 모두가 주일 중 일곱째 날을 헤아리는 일에 일제히 같은 실수를 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기 규례대로. 문자적으로 그에게 습관이 된 것에 따라.” 그리스도는 안식일에 정규적으로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습관이 있었다. 청년 시절에 바로 이 나사렛 회당에서 그는 선지자들의 글을 낭독하라는 요청을 받았고, 또한 친숙한 성경 지식으로 예배자들을 감동시키는 교훈을 끌어내 보였다(시대의 소망, 74). 예수는 유대와 갈릴리 회당에 사람들이 모였을 때를, 그들을 가르치는 기회로 이용한 것으로 보이며(참조 눅 4:15 주석; 4:23; 12:9; 13:54; 1:21; 6:2; 18:20 ), 후에 바울도 이방 나라에서 그렇게 했다(참조 13:14, 15, 42).

 

17. 이사야. 그리스도 당시에는 선지자들의 글을 읽고 설교하라는 부탁을 받은 사람이 어떤 부분을 읽을 것인지 선택할 수 있었다. 예수는 특별히 선지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요청했다(참조 4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드리거늘. 즉 성스러운 두루마리를 궤에서 꺼내 낭독할 사람에게 건네주고, 낭독이 끝나면 다시 궤에 넣는 일을 담당하는 집사 곧 핫잔(h.azzan)드리거늘.” 회당 예식에 따라 핫잔이 선지자들의 두루마리를 궤에서 취하여 덮개를 벗기고 그것을 펼쳐서 예수에게 전해 주었다. 예수가 백성들의 일상 언어를 구사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종교적 목적 외에는 거의 쓰지 않았던 히브리어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당시에 성경은 언제나 히브리어로 읽었다.

 

기록한 데. 누가가 인용한 구절은, 많은 고대 사본에 있는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라는 구절을 생략하고 사 58:6을 의역한 눌린 자를 자유케 하여라는 구절을 삽입한 것을 제외하고는 70인역의 사 61:1, 2 상단과 일치한다. 아마도 누가는 기록할 때 그 당시의 70인역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참조 3:36 주석). 성경의 여러 구절을 이런 식으로 함께 연결하는 것은 유대인의 흔한 관행이었다(참조 막 1:2 주석).

 

찾으시니. 예수는 자신이 읽고자 하는 구절이 나올 때까지 두루마리를 계속 펼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이미 지나간 부분을 감았다(참조 제1, 33[사해두루마리 이사야서]). 61:1, 2은 그 두루마리의 거의 끝 부분에 있었을 것이다.

 

내게 임하셨으니. 예수의 지상 봉사에 권능을 부여하기 위해 침례 시에 성령이 그에게 임했다(참조 눅 3:21, 22; 1:32; 10:38).

 

가난한 자에게. 가난한 자들은 흔히 파렴치한 관료, 사업가들 그리고 이웃들의 학대를 받았다. 더욱이, 일반적으로 가난의 고통은 하나님의 저주로 인한 것이며 그들의 불행한 상황은 그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간주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불쌍한 처지에 대하여 거의 동정심을 갖지 않았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예수의 각별한 사랑은, 침례자 요한이 감옥에서 고통받고 있을 때 그의 주의를 끌었던, 예수가 메시야라는 위대한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참조 마 11:5). 이 세상의 재물을 조금밖에 갖지 못한 사람들은 궁핍함과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을 자주 느끼며, 따라서 복음 설교를 쉬 받아들이는 일이 자주 있다. 예수의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는 구제를, 무지한 자에게는 빛을, 고통받는 자에게는 그 고통의 경감을, 죄의 노예들에게는 해방을 의미한다.

 

기름을 부으시고. 헬라어 크리오(chrio-). 이 단어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하는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유래했다(참조 마 1:1 주석). 이 구절을 메시야적 배경에 맞춰 다음과 같이 의역할 수 있다. “그가 나를 그리스도로 삼았다혹은 그가 나를 메시야로 삼았다”(참조 사 61:1 주석).

 

포로 된 자. 이것은 문자적 의미의 포로가 아니라, 몸과 마음과 영이(참조 롬 6:16) 사단의 포로가 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예수는 침례자 요한을 감옥에서 석방하지 않았다. 여기서 이 포로마귀의 올무에 걸려 그의 뜻을 좇는, 사단의 ”(참조 벧전 3:19)에서 고통당하는 영혼들을 말한다(참조 딤후 2:26).

 

눈먼 . 실제로 눈먼 사람들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눈먼 사람들도 포함한다(참조 마 15:14; 23:16~19, 26; 9:39~41).

 

눌린 . 여기에 인용된 구절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의미에서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58:6에서 압제당하는”(oppressed)으로 번역된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한 사 42:3에서는 상한”(bruised)이라는 말로 되어 있다. 42:4에는 이 단어가 낙담(discouraged)이라고 번역되었다. 예수는 죄의 무거운 짐과 랍비들이 유대인들에게 부과한 압제적인 규정들에서 사람들을 자유케 하기 위해 왔다(참조 마 23:4; 11:28~30).

 

19. 은혜의 해. 곧 복음의 시대. 영적 필요를 느끼는 자들(심령이 가난한 자들), 통회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마음이 상한 자들), 죄의 포로가 되어 영적인 사물에 눈먼 자들, 악한 자에게 상처받아 깨진 사람들이 죄로부터의 해방을 기대할 수 있는 시대를 말한다. “주의 은혜의 해는 노예들이 풀려나고, 빚이 청산되며, 양도된 땅이 본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희년을 연상케 한다(참조 레 25:10, 15, 24 주석).

여기서 예수는 사 61:1, 2 낭독을 마쳤다. 그는 다음 구절 즉 애국심이 강한 유대인들에게는 전체 구절의 절정인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이라는 구절을 읽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구원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며 징벌은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맹신했다(참조 시 79:6). ‘구원은 하나님께 대한 개인적인 순종의 문제가 아니라 국적의 문제다라는 유대인들의 개념 때문에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명의 진정한 본질에 대해 눈멀어 그를 거절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막강한 군대를 진두 지휘하는 권세 있는 왕으로 나타나 자신들의 대적을 무찌르고 온 세상을 이스라엘의 세력 아래로 이끌어 들일 메시야를 기대하였다(시대의 소망, 30, 236,).

이 근본적인 오해는, 유대인들이 고난받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들을 고의적으로 간과하고 재림의 영광을 가리키는 예언들을 잘못 적용한 사실에서 기인했다(시대의 소망, 30). 이렇듯 그들을 영적인 맹목으로 이끈 것은 교만과 편견 그리고 선입견이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65, 212, 212, 242). 그들은 한 사람에게 비치는 빛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빛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에 눈멀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예비되어 있다는 생각에 잠기기를 좋아했으며, 따라서 예수가 그런 말을 꺼내지도 않아서 놀랐을 것이다. 예수가 설교 중에 이방인들의 믿음을 칭찬하고 정작 유대인에게는 믿음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암시했을 때, 청중들은 미친 듯이 분노하고 포악해졌다(참조 25~29).

 

21. 말씀하시되. 예수는 일반에게 랍비 즉 선생으로 간주되었다(참조 요 1:38, 49; 3:2; 6:25). 특별히 나사렛이 그의 고향이며 어린 시절 바로 이 회당에서 성경을 읽었던 것을 감안할 때, 방문한 랍비로서 그가 설교를 부탁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참조 4:16 주석). 누가는 특별히 22절에 기록된 결과와 28, 29절의 과격한 반응을 불러일으킨 강론을 선별하여 그리스도가 이때 전달한 내용에 대한 개요를 제시하였음이 분명하다.

 

이 사람이아니냐. 헬라어에서 이 질문의 형태는 질문자가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의 질문은 의혹이 아니라 놀라움을 표현한 것이다. 여러 해에 걸쳐 예수를 알고 지냈기 때문에, 그들은 그가 자신들처럼 그렇게 결점 많은 사람은 아니겠지만 자신들과 같은 보통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자신들이 익히 알고 있는 그가 약속된 분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그들은 믿음의 결핍으로 당혹스럽게 되었다.

 

요셉의 아들. 예수는 일반적으로 요셉의 아들로 여겨졌다(참조 2:33, 41; 3:23 주석). 예수의 모친과 형제 자매들은 여전히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으며(참조 마 13:54~56; 시대의 소망, 236), 틀림없이 그들도 청중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자문하면서 시선을 자연스럽게 예수의 가족들이 있는 방향으로 돌렸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마리아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참조 2:34, 35,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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