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자의 비유, 누가복음 연구 1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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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8:4-15

[4]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 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9]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10]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씨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천국에 대해 설명하셨을 뿐 아니라 크신 농부로써 그의 백성을 위하여 행하시는 사업에 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는 밭에서 씨를 뿌리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진리의 씨를 뿌리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 그 자체가 곧 씨앗이었으며 그는 이 씨로써 가장 귀중하고 은혜로운 진리들을 심으셨다. 씨뿌리는 비유는 너무나 평범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비유의 참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농부가 밭에 뿌리는 씨를 통하여 우리가 복음의 씨, 곧 파종되면 패역한 사람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그 씨를 생각하기 바라신다. 작은 씨의 비유를 말씀하신 그분은 하늘의 임금이시며 밭에 씨를 뿌리는 일을 주관하는 법칙이 진리의 씨를 뿌리는 일도 주관한다.”(실물, 33)

 

유 통하여 진리는 단순하고 순결하게 제시된다. 하지만, 들을 귀 있는 자만이 들고 깨닫을 수 있었다. 씨를 뿌리는 자와 씨를 뿌리는 것은 어떤 진리를 가르치고 있을까?

 

본문연구

  1. 비유에서 씨를 뿌리는 자는 누구를 의미하는가?
    13:37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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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f. 예수께서 비유(parables)로 가르치신 주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의문을 자아내기 위해서(4:10)
       2) 천국의 비밀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4:11)
       3) 어떤 이들에게는 진리를 감추기 위해(4:12)
       4) 당시에 수준 높은 랍비들의 수사법인 비유를 예수께서도 사용하심

  2.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인 는 무엇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였는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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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f.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3. 비유에서 씨가 자라서 결실을 맺기 위해 중요한 요인은 무엇인가? 씨가 뿌려진 네 곳을 각각 요약하고 비교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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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착하고 좋은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결실하기 위해서 인내”(15)도 필요하다 그 까닭은 무엇인지 설명해 보라.

 

토의사항

  1.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하셨다. 말씀은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4:4을 읽고 생활 가운데서 말씀이 우선순위가 될 수 있는 방안들을 이야기 해 보자.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여기에 모든 교육 사업의 기초가 되는 대 원칙이 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오늘날 너무나 많은 학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있다. 다른 문제들이 그들의 정신을 점령하고 있다. 그리고 불신자들의 저서를 연구하는 일이 많은 부분을 점유하고 있으며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에도 회의론적 사상들이 섞여 있다. 뿐만 아니라 과학 분야에 있어서도 그 발견된 것들이 잘못 해석되고 악용됨으로 인하여 과학적 연구가 오도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한 가상적 학설과 비교되고 있으며, 드디어는 불확실하고 미덥지 못한 것같이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의혹의 씨가 청년들의 마음속에 심어지게 되어 그들이 시험을 만나게 되면 심겨진 의혹의 씨가 발아되어 싹이 튼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면 심령은 보호자와 안내자를 잃게 되므로 청년들은 하나님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에서 탈선하게 된다.-실물교훈, 41

  2. 나는 어떤 밭일까?’ 서로 자신의 경험이나 상황을 나누어 보자.

 

비유는 천국을 위해 믿음을 가진 마음과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가르쳐주고 있다.


4. 비유로 말씀하시되 지금까지 그리스도는 비유라고 부를 수 있는 짧은 예화들을 자주 사용하였다(참조 7:24~27 ). 이제 처음으로(시대의 소망, 333; 실물교훈, 20) 그는 비유를 진리를 전달하는 주된 도구로 삼았다. 산상 설교는 불과 몇 주 전에 있었다(참조 5:1 주석). 때는 AD 29년 가을이었을 것이고, 갈릴리 전역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역인 게네사렛 평지(참조 눅 5:1 주석)를 따라, 겨울 곡식을 파종하고 있는 농부들을 볼 수 있었다(참조 실물교훈, 34). 이 바쁜 날 일어난 사건들의 요약은 12:22; 13:1 주석을 참조하라.

적어도 열 가지 비유가 이때 베풀어졌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여덟 가지에, 마가는 등잔의 비유(4:21~23)와 모르는 사이에 자라는 씨앗(26~29)을 더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마태가 기록한 비유들은 천국과 관련된 본질적인 사실들을 종합적인 모습으로 보여 주고 있다.

 

씨를 뿌리는 . 그리스도가 말씀할 때(실물교훈, 34) 갈릴리의 푸른 물결로부터 언덕 아래까지 펼쳐진 게네사렛 평지의 비옥한 토양에 농부들이 씨를 뿌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비유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알려져 있지만, 토양의 비유, 다시 말해 씨 뿌리는 자, , 토양의 비유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이 비유의 초점은 가라지의 비유(24~30)에도 등장하는 씨 뿌리는 자나 씨가 아니요, 씨가 떨어지는 네 가지 종류의 토양이다. 이 비유는 네 종류의 토양이 각각 씨를 받아들이는 것과 그것이, 씨의 성장에 미친 효과를 강조한다(참조 실물교훈, 43). 네 종류의 토양과 관련하여 씨 뿌리는 자의 기술이나 씨의 품질은 모두 동일하다. 8절 주석을 참조하라.

이 비유에서 씨가 나타내는 특정한 진리는 메시야로서 이 땅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명의 본질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의 참된 성격은 어느 정도는 비밀”(참조 11)이었는데, 교만심이 사람들로 하여금 구약에 대한 이해를 흐리게 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힘있는 정복자로 와서 다윗의 보좌에 앉고 모든 나라를 유대인에게 복종시킬 것으로 기대하였다(참조 시대의 소망, 30; 참조 눅 4:19 주석). 그러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예수는 그의 사명의 참된 성격, 곧 그가 온 것은 이방인들을 유대인에게 복종시키려 함이 아니요,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15:24)의 마음을 복종시키려 함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이 똑같은 진리를 그는 이미 산상 설교에서 공식적으로 제시한 바 있다(참조 5:2 주석).

 

5. 길가에. 마을에서 밭으로 나오는 길이 아니라, 밭의 주변에 있는 길가 또는 밭에서 더 떨어져 있는 밭으로 가로질러 나있는 길가. 길가의 표면이 딱딱하기 때문에 씨앗은 드러난 채로 놓여 있으며 싹이 틀 기회조차 없다. 길가의 청중들은 복음의 진리가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는 피상적인 청중들이다. 중국 속담의 표현대로, 그들은 마이동풍(馬耳東風)이다. 그들은 복음에 대한 개인적인 필요성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부주의하고, 깨닫지 못한다(19). 진리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는 듯이 보인다.

 

새들. , 경작할 때와 씨 뿌릴 때 언제든지 찾아오는 들새들. 마태에 의하면 이 새들은 악한 자”(19), 마가에 의하면 사단(4:15), 누가에 의하면 마귀(8:12)를 나타낸다.

 

6. 바위 위. 분명히 이 땅은 돌이 흩어져 있는 땅이 아니라, 표면이 얇은 흙으로 덮여 있는 바위 땅을 말한다. 일부 적당한 장소를 제외하고는, 팔레스타인의 고지대는 이러한 바위들 때문에 농경 지역으로서의 가치가 결정적으로 떨어진다.

돌밭 청중의 마음에 떨어진 복음의 씨앗은 싹이 틀 만큼의 땅은 찾을 수 있지만, 흙이 너무 얕아 복음은 단지 피상적인 효과를 내는 데 그치고 만다. 복음이 그들의 감정에 호소했고 그들은 빠르게 반응했으나, 주어진 감동은 변덕스러운 감정의 동요와 함께 사라져 버린다. 이기심의 돌(참조 실물교훈, 46)은 복음이 생애를 개혁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하는 어떠한 노력도, 자신을 섬기려는 삶의 기본적인 목적에 방해받은 나머지(참조 실물교훈, 50), 복음은 거의 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돌밭의 청중은 습관적으로 자신의 기호(嗜好)에 따른다. 이러한 사람들이 가짐직한 어떠한 확신이라 할지라도 원칙보다는 기호에 기초한 것이다. 진리가 어느 정도 그들의 마음을 끈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진리가 좋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사랑한다. 순간적으로 좋아 보이는 것을 재빨리 받아들였지만, 그들은 제자가 되기 위한 대가를 치르는 데 실패한다. 복음의 원칙들을 생애에 적용시키지 않고, 그 원칙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의 방식을 개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습관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말랐고. 발아가 빠른 만큼, 마르는 것도 빨랐다. 돌밭 청중들의 유일한 희망은 거듭나는 것이다(실물교훈, 48). 복음의 표면적인 영향은 그들을 자복과 죄를 버리는 일에까지 이끌지 못했다(참조 5절 주석). 그들은 칭의를 경험하지 못했다. 복음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회개의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7. 가시떨기. 헬라어 아칸싸(akantha). “가시또는 찔레나무.” 아칸싸는 엉겅퀴처럼 가시가 많은 식물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 누가는, 그리스도인 생애의 가시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참조 마 13:22; 8:14)이라고 정의한다.

가시떨기 땅에서는, 돌밭에서처럼 약한 식물들이 신속히 마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시떨기 땅의 그리스도인 경험은 돌밭 청중들의 경험보다는 더욱 발전한다. 그들은 진정한 출발을 한 것처럼 보이며, 분명히 칭의와 새로남을 경험한다. 그러나 곧 그들은 선을 행하되 낙심”(6:9)하게 되고, “완전한 데 나아”(6:2)가지 못한다. 이 세상의 쾌락에 빠지고 매혹에 이끌려 그들은 생애에서 유혹에 반응하는 경향들과 성격의 특성들을 뽑아내는 일을 게을리 한다. 그들은 마치 귀신 들렸다가 놓여났지만 다시 귀신 일곱에게 사로잡힌 사람과 같다(참조 12:43~45 주석). 가시떨기 땅 청중의 마음을 끌고 그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많은 것들이 그 자체로는 과히 나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너무 몰두해 있어서 다음 세상을 준비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가시가 자라서. 가시는 곡식을 성장할 수 없게 한다(참조 눅 8:14).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관심은 성령의 열매(5:22, 23)가 숙성하는 것을 방해한다. 신앙이 많은 취미 중의 단지 하나로 취급되는 부수적인 위치로 전락된다. 성장시키지 않음으로 그것은 말라가고 결국 죽는다. 가시떨기의 청중들에게 부족한 것은 도덕적인 변화이다(실물교훈, 50). 그들에게는 칭의가 신앙의 전체요 본체이며, 그들은 그리스도인 생애가 필연적으로 성화라고 알려진 과정 곧 악한 성격과 성향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삶의 모범으로 바뀌는 과정(참조 갈 2:20 주석)임을 깨닫지 못한다.

 

8. 좋은 땅.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씨앗이 사람의 마음을 좋게변화시키기 전에는 본성으로는 좋지 않다는 뜻인데,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2:13)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본성적으로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7:18)한다. “좋은것은 단순히 진리의 보습에 맡겼기 때문이며, 성령의 부드럽게 하는 감화에 반응하였기 때문이다.

 

백 배. 이것은 진실로 놀라운 수확이다(참조 창 26:12 주석). 미국의 평균 밀 수확은 4,046.8평방미터(1에이커)당 약 616리터 또는 약 35말로, 이것의 약 15배의 수확이다. 마가는 수확의 순서를 적은 양부터 큰 양으로 바꾸었고, 누가는 적은 수확은 생략했다.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것은 품성의 결실을 말한다(참조 갈 5:22, 23 주석). 외면적 생애에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는 건강한 그리스도인 경험의 증거이다. 길가 청중의 마음에는 진리가 응답을 얻지 못하였다. 돌밭 청중에게서는 진리가 일시적인 충동밖에는 얻지 못하였다. 가시밭 청중에게서는 잘 시작된 반응이었지만, 역경과 반대 속에서는 말라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좋은 땅 청중들의 마음에는 그 응답이 영원하고 효과적이었다. 그 결과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삶의 모범을 따라 삶이 변화되는 것이다.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은 환경의 노예가 아니다. 그는 끝까지 견딘다(참조 24:13).

 

귀 있는자는 들을지어다. 그러므로 내가말하기는. 참조 3절 주석. 그리스도의 목적은 영적 식별력이 무딘 사람들에게 진리를 숨기려는 것이 아니라(참조 실물교훈, 105), 오히려 진리를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려는 희망에서, 그들의 마음과 정신의 무딤을 뚫으려 함이다(참조 눅 8:16). 그리스도는 이 땅에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고 온 것이지 그것을 감추려고 온 것이 아니다(18:37). 어떤 것이 과실을 맺지 못하는 이유는 씨 뿌리는 자나 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토양에 있다(참조 13:3 주석).

 

10.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참조 15절 주석. 비록 이 사람들이 보는 듯하여도 그리고 자신들이 보고 있다고 생각해도, 그들은 사실상 전혀 보지 못한다. 그들이 실상은 소경이면서 본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의 죄가 그저 있다”(9:41). 그들은 일부러 소경이 된다(참조 호 4:6 주석). 그들의 식별력은 길가 청중들처럼 피상적이다(참조 13:4, 5 주석). 자연적 시력이 그에 상응하는 영적 통찰력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못하게 하려 함이라.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비유의 의미를 감지했으나, 깨닫지 못한 것처럼 가장했다(참조 실물교훈, 35). 그들이 그리스도의 가장 분명한 말씀을 거절한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들의 죄는 다른 이들보다 더 컸다. 그들은 일부러 그들의 영혼의 눈을 멀게 하였으며 스스로를 어둠 속에 가두어 버렸다(참조 12:3 주석).

백부장의 믿음, 누가복음 연구 1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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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7:1-10

[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4]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

 

 

“모든 죄인이 그리스도께 나오는 것도 이와 같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하셨”(딛 3:5)다. 사단이 그대는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바랄 수 없다고 말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사단에게 말하라. 우리는 하나님께 추천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하나 우리가 현재 그리고 항상 말할 수 있는 간구는 예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필요로 하게 만드는 우리의 전혀 무력한 상태에 대한 간구인 것이다. 우리는 모든 자기 의뢰심을 버림으로 갈바리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 손에는 가지고 갈 아무 대가도 없습니다.
다만 주의 십자가에 매달릴 뿐이옵니다.”
(소망, 317)

 

버나움의 로마 백부장은 예수님과 직접 대면하지도 않았으나 믿음을 고백했으며, 예수님은 그의 요청을 들어주셨다. 예수님께서 흐믓해 하신 그의 믿음은 어떤 것일까?

 

본문연구

  1. 본문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나열하고 그들은 어떤 이들이며 서로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설명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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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f. 등장인물들은 모두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종(8:6)의 치유를 도왔다.
    cf. 등장인물들 가운데 가장 주요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cf. 특히, 예수님과 백부장은 어떤 관계였을지 이야기해 보라.

  2. 백부장의 요청을 받은 유대 장로들은 그를 예수께 어떻게 추천하였는가? 또 백부장은 왜 그러한 요청을 하였는가?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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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f. 8:5-8을 참고하라. 7절의 말씀만은 정확히는 한 말씀”(a word)이다.
    cf. “백부장은 구주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그는 예수께서 자기 하인을 고치실 수 있 을 것이라고 믿었다.”(소망, 315)

  3. 예수께서 칭찬하신 백부장의 믿음(9)을 그가 한 말과 행동을 통하여 설명해 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8:8,10-11도 참고하라.
    cf. “그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감동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달았으나 도움을 요청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선함에 의뢰하지 않 았다...그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참된 품성을 붙잡았다. 그는 예수님을 단지 이적을 행 하는 자로만 믿지 않고 인류의 친구요 구주로 믿었다.”(소망, 317)

  4. 종의 병이 백부장의 믿음 때문에 나음을 입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는 무엇인가?
    10(
    8: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토의사항

  1. 이방인이었던 로마 백부장의 믿음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찾아볼 수 없었다는 예수님의 말 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던져주고 있을까?

  2. 그리스도의 치유를 경험하기 이전에도 백부장의 성품과 생애는 매우 아름다웠다. 종에 대 한 사랑, 벗들과의 관계, 유대인들과의 조화로운 관계 등.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일까?

 

부장의 믿음은 예수님도 감탄하셨다. 유대인들은 그의 선한 행위들로 예수님께 추천하였지만,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요청대로 그가 사랑하는 종을 고쳐주셨다.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기도의 응답의 상관관계를 깊이 생각해 보자.


 

산상설교, 누가복음 연구 1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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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6:17-26

[17]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기도와 교훈의 말씀을 주시고,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도하심으로 복음 사업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셨다. 그러고 나서, 그들과 함께 해변으로 가셨는데, 거기는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많은 무리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 그러나 그 좁은 해안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갈망하는 무리가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범위 안에 다 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그들을 다시 산으로 인도하셨다. 그 많은 무리가 다 넉넉하게 앉을 수 있는 평평한 장소에 이르자, 그분께서는 풀밭에 앉으셨다. 그러자, 그분의 제자들과 무리들도 그분을 따라 앉았다”(산상보훈,17, 19).

 

상 설교의 서두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심령의 최고의 갈망, 곧 행복에 대해 언급하셨다. 이와 같은 갈망은 창조주에 의해 친히 인간 속에 심어진 것이다.(본교 성경 주석 5, 324).

 

본문연구

다음 도표는 우리의 그리스도인 경험에 있어서 앞에서 언급한 진보들을 나타내며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필요에 어떻게 대답하시는지를 보여준다.

 

인간의 필요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

(마태복음 5장 1절~12절의 팔복에 기초함)

우리의 문제 그리스도의 대답 결과
1. 자존심, 불안
가련한 자아상
*심령이 가난한 자
자신들의 필요를 인식하고 그 일로 무언가를 하기 시작하는 사람들
*자아를 용납함
*그릇된 자존심을 정복함
*하나님과 사람들과 더불어 의미는 교제를 나눔
2. 죄와 죄의식 *애통하는 자들
죄에 대하여 회개하고 돌아섬
*깨끗한 양심
*하나님과 사람에게 용납되었다는 증거
3. 반역, 분노, 자신감의 결여 *온유한 자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고 헌신함
*권위를 인정함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신뢰와 믿음의 계발
4. 불행, 공포, 좌절, 염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생명의 물로 채움-칭의
*건강한 정서
*전인적인 발달
*하나님과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 형성
5. 쓰라림과 이기심 *긍휼히 여기는 자
용서하는 태도, 기꺼이 나누고자 함, 영적 성장
*관계의 개선
*인정, 나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
6. 불결과 부도덕 *심령이 청결한 자
생애의 청결, 순결, 고결함
*도덕적으로 자유함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이 있음
*하나님과 인간에 대하여 올바르게 행함
7. 절망과 무감각 *화평케 하는 자
평화와 행복과 만족감을 다른 사람과 나눔
*이해를 초월하는 평화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짐

 

토의사항

  1.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진정 행복하게 살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20,21)

  2. 인생의 진정한 만족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본문의 말씀은 어떤 답을 준다고 생각하십니까? (22,23)

  3. 그리스도인으로서 당하는 부당한 어려움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런 부당한 대우를 참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20. 가난한 자. 헬라어 프토코스(pto-chos). “웅크리다”, “위축되다를 의미하는 프탓소(ptasso-)에서 파생한 말로 극심한 가난을 지칭한다(참조 막 12:42; 4:18; 6:20). 여기서 프토코스는 비참한 영적 가난에 처한 자들 그리고 천국이 공급해야 할 것들에 대해 필요를 예민하게 느끼는 자들을 가리킨다(참조 사 55:1 주석; 3:6). 자신의 영적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스스로 부자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하늘에서 볼 때 곤고하고 가련하며 가난한사람들이다(3:17). “심령이 가난한자 외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에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밖의 모든 사람들은 하늘의 부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하며, 따라서 하늘의 축복을 거절한다.

 

복이 있나니. 산상 설교의 서두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의 마음에 있는 최고의 욕망, 곧 행복에 대해 연설한다. 이 욕망은 창조주가 친히 인간 속에 심었고, 본디 그것은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과 협력을 통해 참 행복을 발견하도록 이끌기 위해 정해진 것이다. 인간이 행복을 최종 목적으로 생각하여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순종을 무시하고 지름길로 그것을 달성하려고 꾀할 때 죄가 수반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의 왕으로서 그리스도는 취임 연설의 서두에서, 왕국의 주요 목적은 잃어버린 에덴의 행복을 인간의 마음에 회복하는 것이며, 따라서 좁은문과 협착한 길로 들어가기를 선택한 자들(7:13, 14)이 참 행복을 찾을 것이라고 선포한다. 그들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 때만 이르러오는 영혼의 참되고 영원한 만족, 곧 내적 평강과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4:7). 그리스도가 아버지께로 갈 때 그는 바로 이 평안, 곧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14:27)을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남겼다. 행복은 하나님(참조 롬 5:1)과 그들의 동료(참조 미 6:8)들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자들, 곧 사랑에 관한 위대한 두 계명을 좇아 행하는 자들의 마음에만 이르러 온다(참조 22:37~40). 이러한 생각과 마음의 성향은 오직 은혜의 왕국의 참된 백성들만 소유한다.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가 여기서 말하는 것이 미래에 있을 영광의 왕국이 아니라 현존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가르침 속에서 가라지, 겨자씨, 누룩, 그물의 비유(13:24, 31, 33, 47) 그리고 그밖의 많은 비유(참조 산상보훈, 8, 108)를 통해 예증한 것처럼, 종종 그의 주권을 받아들인 자들의 심령에 건설된 은혜의 왕국에 대해 다루었다. 유대인들은 천국을, 이 지상 나라들이 이스라엘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힘에 기초한 왕국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와서 세운 왕국은 사람의 심령에서 시작하여, 그들의 삶에 침투하고, 역동적이고 강력한 사랑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의 심령과 삶으로 흘러 들어가는 왕국이었다.

 

너희 . 자신의 필요를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에 들어가는 첫 번째 조건이다(참조 산상보훈, 7, 8). 비유 가운데서 세리가 자기를 의롭다고 여긴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으로 내려 간 것은 자신의 영적 필요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다(18:9~14). 천국에는 교만한 자들, 자족하는 자들 그리고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을 위한 여지는 없다. 그리스도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가난을 그의 은혜의 부요함으로 바꾸라고 명한다.

 

21. 주리고 목마른 자. 특별히 이 은유는 연평균 강우량이 66센티미터 이상이 되지 않는 나라에서 설득력이 있었다(참조 창 12:10 주석). 팔레스타인에 해당되는 사항은 일반적으로 근동의 넓은 지역에도 해당된다. 팔레스타인은 넓은 사막지역에 접해 있으며, 거주민이 많은 지역까지도 비가 적은 반건조성 지역이다. 지금 예수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청중 가운데 많은 사람이 갈증의 고통을 경험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하갈과 이스마엘의 예증에서처럼, 길을 잃거나 도중에 몇 개 안 되는 샘 가운데서 하나를 놓친 여행자는 자신이 심각한 곤경에 처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참조 창 21:14 주석).

그래서 예수는 심령의 주림과 목마름에 대하여 말했다(참조 시 42:1, 2). 음식의 결핍으로 굶주린 사람 또는 물의 부족으로 허덕이는 사람의 간절한 열망으로 의를 갈망하는 자들만이 그것을 얻을 것이다. 물질적 풍요든지, 심오한 철학이든지, 육체적 욕망의 만족이든지, 명예나 권력이든지, 세상에 속한 어떤 것도 심령의 주림과 목마름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이 모든 것을 경험한 후에 솔로몬은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결론을 내렸다(참조 전 1:2, 14; 2:1, 15, 19; 3:19; 11:8; 12:8 ). 어떤 것도 모든 인간의 마음이 갈망하는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전도자는 창조주를 인정하고 그분과 협력하는 것만이 항구적인 만족을 가져다 준다고 결론을 맺는다(12:1, 13).

산상 설교를 한 지 6개월 또는 8개월 후에 예수는 생명의 떡(6:26~59)에 관한 또 하나의 위대한 강화를 했는데, 여기서 간략하게 설명한 원칙을 좀 더 충분하게 논했다. 인간이 갈망해야 하는 은 바로 예수이다. 인간은 그 떡을 먹음으로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며, 심령의 굶주림을 충족시킬 수 있다(참조 요 6:35, 48, 58).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하늘의 공급자에게 와서 돈 없이 값 없이”(55:1, 2) 물과 양식을 얻으라는 은혜로운 초청을 받는다. 사람의 심령에 의에 대한 갈망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미 그 속에서 역사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산상보훈, 19)

 

우는 자. 이 단어는 강한 슬픔을 나타낸다. 사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만나는 불완전함 때문에 애통하게 되는 것은 영적 필요에 대한 깊은 의식에서 나온다(참조 산상보훈, 9; 시대의 소망, 300). 그리스도는 여기서 영적 가난 속에서 완전의 표준에 달하기를 열망하는 자들을 지칭하고 있다(참조 사 6:5; 7:24). 또한 여기에 실망과 사별 혹은 또 다른 슬픔 때문에 애통해하는 자들을 위한 위로의 기별이 있다(참조 산상보훈, 10~12). 하나님은 영적 부족감을 하늘의 은혜의 부요함으로 채우는 것처럼(참조 3절 주석), 죄에 대한 애통함을 용서받은 죄의 위로로 충족시킨다. 먼저 부족함에 대한 느낌이 없다면 그 부족한 것(이 경우는 품성의 의)에 대한 애통함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애통은 자신을 천국 지원자로 소개하는 자들에게 이르러오는 두 번째 필요조건이며, 그것은 순서상 첫 번째 단계 이후에 자연스럽게 뒤따라온다.

 

22. 인자를 인하여. 나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지닌 이름 곧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고통당한다. 초기교회 시대와 마찬가지로 모든 시대를 통해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기뻐했다(5:41; 참조 벧전 2:19~23; 3:14; 4:14).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자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10:22)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10:39)고 덧붙였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위하여 고난받을 것”(1:29)을 예기해야 한다.

 

멀리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회당에서 출교(黜敎)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했다(참조 요 9:22, 34; 12:42; 16:2). 유대교에서는 완전히 추방되는 영구적인 출교와 일시적인 출교가 있었다. 그리스도 시대에 일시적인 출교는 30일 동안 계속되며 멀리된사람은 그동안 종교적인 의식에 참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4규빗(2미터) 안으로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출교는 종교적 및 사회적 오염 즉 부정을 의미했다.

 

너희 이름을버릴 때에는. 즉 너희 이름을 경멸하여 내동댕이칠 때에는. 이것은 거짓되고 악한 소문을 유포하는 것을 가리킨다(벧전 4:14).

 

핍박을 받은. 여기서 그리스도는, 주로 천국을 위해 세상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박해를 말한다. 죄가 들어온 이래 그리스도와 사단, 천국과 세상 왕국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과 사단을 섬기는 자들은 원수가 되었다(3:15; 12:7~17). 이 투쟁은 이 세상 나라가 우리의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때까지계속될 것이다(11:15; 참조 단 2:44; 7:27). 바울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14:22). 천국 시민들은 이 세상에서 환란당할 것을 예기하는바(16:33), 이는 그들의 성품, 이상, 열망 그리고 행동이 모두 현 세상의 악을 거스르는 무언의 증언을 하기 때문이다(참조 요일 3:12). 하늘 왕국의 원수들은 왕 되신 그리스도를 핍박했고, 또한 그의 충성스런 백성들을 핍박할 것이다(15:20).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이와 동일한 약속이 3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졌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딤전 2:12; 참조 단 7:18, 27). 그리스도를 위해 큰 고통을 당한 자들이 그분이 그들을 위해 당한 고통을 가장 잘 헤아릴 수 있다. 첫 번째와 마지막 복에 하늘 시민의 자격 보증이 포함되는 것은 적절하다. 여기에 열거된 하늘 시민을 위한 여덟 가지 자격을 경험한 자들은 천국에서 한 자리를 얻을 가치가 있다.

 

기뻐하고. 생애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8:28)을 알고 기뻐해야 한다(4:4). 고난이 천국 시민에게 필수적인 인내와 그밖의 품성의 특성들을 계발시키며, 이것은 시험 즉 시련에도 마찬가지다(1:2~4).

 

너희의 상이 큼이라. 참조 눅 6:24~26 주석.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상에 대한 생각이 최우선은 아니다(실물교훈, 398). 그는 천국에 들어갈 목적만으로 규칙들에 순종하지는 않는다. 그는 최고의 목표와 실존의 기쁨을 창조주와 협력하는 데서 찾기 때문에 순종한다. 희생도 클지 모른다. 그러나 상 또한 크다. 인자가 영광으로 올 때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아줄 것이다(16:27; 참조 계 22:12).

 

24. 있을진저. 복과 재화(災禍)를 대조시키는 것은 유대 문학의 특유한 기법이었으며, 아마도 신명기에 나타난 축복과 저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27, 28). 그리스도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선언한 와 비교해 보라(참조 마 23). 부요한 자여. 구세주가 부자나 가난한 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회 계층의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고자 했지만(참조 마 5:3 주석), 그는 삶의 물질적인 것들을 낮게 평가함으로 부와 특권을 삶의 주목적으로 삼는 계층의 사람들에게 호의를 얻지 못했다(참조 마 6:1~6 ). 사실 비교적 극소수의 부자들만이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었고,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은 특별하게 예외였다. 예수는, 이 땅보다는 하늘에 보물을 쌓는 지도층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그들의 마음이 하늘에 더욱 밀착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참조 마 6:33, 34; 12:13~33). 많은 경우에 부()는 그것을 소유한 자들에게 하늘에 이르는 길을 막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임이 입증되었다(참조 막 10:23, 25; 18:24, 25).

 

너희의 위로. 여기서는 물질이 주는 행복한 상태에서 오는 위안과 기쁨을 의미한다(참조 마 5:4 주석).

 

26. 칭찬하면. 정확하게 욕하고”(22)라는 말과 반대말. 그리스도교와 세상, 그리스도교의 이상과 세상의 이상들 사이에 있는 큰 차이점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역설이다. 사람들은 보통 부와 권세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아첨하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아첨에 반응하는 자리에 있는 자들을 칭찬한다.

예수님의 제자도(Discipleship), 누가복음 연구 1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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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6:12-16

[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14]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및 그 형제 안드레와 및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16] 및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및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열 두 사도의 명단

No. 마 10:2-5 막 3:16-19 눅 6:14-16 행 1:13
1
2
3
4
5
6
7
8
9
10
11
12
       

 

수님께서 여러 제자들 가운데서 열 둘을 구별하여 사도로 부르셨다. 제자들을 훈련시켜 파송하는 일에 대한 그분의 계획은 무엇이었을까?

 

본문연구

  1. 몇 명의 제자들 사도로 택하였으며, 그것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셨는가?
    13, 12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사도(Apostles)”- “보내심을 받은 자
    cf. 철야기도를 통하여 그 많은 시간동안 주님의 기도는 어떤 것이었을까?

  2. 열 두 사도들의 명단은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왼편의 도표에 순서대로 이름을 적고 분석해 보라.
    1) 가장 첫 번째로 등장하는 제자는 누구인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순서가 변하지 않고 등장하는 제자들은 누구이며 좌측 번호에 O표 하시오.
    3) 열 두 사도의 구성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cf.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는 모두 누가이다.
    cf. 2명의 시몬 - 시몬 베드로와 셀롯(Zealot,열심당) 시몬이다.
    cf. 2명의 야고보 -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작은 야고보라 불린다.(15:40)
    cf. 2명의 유다 - ‘다대오’, ‘가룟은 지명(地名)이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3. 열 두 명의 사도들 내에서 두 명씩 혹은 네 명씩 짝지은 예를 찾아보라.
    cf. 10:1, 22:8, 20:2-4, 3:1, 1:29, 13:3
    cf. “제자들이 나누어져 이룬 무리 중 한 무리의 선두에는 빌립이라는 이름이 서 있다"  (시대의 소망, 292)

  4. 예수께서 열 두 사도를 세우신 목적은 무엇인가?
    3: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토의사항

  1. 예수님의 제자훈련은 그분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으며, 그것은 성공적이었는지 토의해 보자.

  2. 열 두 제자들을 훈련시킨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 마태복음 28:19-20에서 명령하신 제자도의 사명을 우리는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교훈하기를 마치고 그 작은 무리를 당신 주위에 가까이 모은 다음 그들 가운데서 무릎을 꿇고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그들을 당신의 성업에 바치는 기도를 드리셨다. 이와 같이 하여 주님의 제자들은 복음 사업을 위하여 안수를 받았다.”(소망, 296)

릴리의 어부들을 부르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사업에 사람들을 부르고 계신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최초의 제자들을 통하여 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기를 즐겨하신다.(시대의 소망, 297)


 

예수님의 안식일 개혁, 누가복음 연구 1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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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6:1-11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2]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5]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

[8]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10] 무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11]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유대인들이 하나님에게서 떠나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자신의 것으로 삼지 않았을 때 안식일은 그들에게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사단은 자신을 높이고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게 하려고 힘썼으며 안식일을 왜곡시키려고 활동하였는데 그 이유는 안식일이 그리스도의 능력의 표징이기 때문이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안식의 날을 무거운 짐이 되는 요구 사항들로 둘러싸서 사단의 뜻을 성취시켰다. 그리스도의 시대에 안식일은 매우 왜곡되어서 이날의 준수는 사랑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품성보다는 오히려 이기적이고 변덕스러운 사람들의 품성을 반영하였다. 랍비들은 사실상 사람들이 순종할 수 없는 율법을 주신 분으로 하나님을 나타냈다. 그들은 사람들로 하나님을 폭군처럼 여기게 하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안식일의 준수는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잔인스럽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게 하였다. 이런 그릇된 관념을 없애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일이었다. 랍비들이 무자비한 적개심을 품고 예수를 따라다녔지만 예수께서는 조금도 그들의 규례들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지 조차 않으셨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안식일을 지키시면서 똑바로 행하셨다.”(소망, 283-284)

 

수님께서 안식일을 어떻게 생각하셨는가? 참된 안식일을 어떻게 회복시키셨는가?

본문연구

  1. 본문의 사건이 있었던 구체적인 때는 언제인가?
    1, 6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안식일에 있었던 사건은 공관복음(마태,마가,누가) 모두에 기록되어 있다.

  2.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의하면 본문에서 안식일에 금지되는 일은 무엇인가?
    2, 7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타인의 밭의 이삭을 먹는 것에 관해서는 신 23:25을 보라.
    cf. ‘이삭을 주워 먹는 것병자를 고치는 것이 왜 안식일을 범하는 것일까?

  3. 3-5절에서 다윗의 예를 들어 반박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어떻게 설명되는가?
    9-10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다윗의 사건은 삼상 21:1-6에 기록되어 있다.

  4. 8-10절에서 예수님이 병자로 하여금 한 가운데서게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공개적이고 도전적으로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하시므로 의도하신 것은 무엇일까?
    cf. 9절에 의하면 무엇인 선행이고 악행이며, 생명을 구하는 것이며 죽이는 것인가?
    바래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율법과 하나님의 율법의 구분은 무엇인가?

 

토의사항

  1. 안식일을 거룩히 지킨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이야기 해보자.
    cf. 20:8, 22:31, 20:12을 참고하라.

  2. 예수님께서 당시의 잘못 적용된 안식일 계명을 어떻게 개혁하셨는가? 오늘날 우리의 안 식일 준수에서 개혁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손이 마른 자를 고치심으로써 유대인의 관습을 정죄하셨고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그 사람의 손을 고쳐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금하였다. 넷째 계명을 하나님께서 주신 그 본연의 모습대로 살리셨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선언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무의미한 규례들을 쓸어 버림으로 안식일을 존귀하게 하신 반면에 예수께 대하여 불평의 말을 하던 자들은 하나님의 성일을 더럽히고 있었다.”(소망, 287)

가는 마태(12)와 마가(2,3)와 더불어 안식일 논쟁을 통하여 개혁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언급하였다.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으로서 매우 중요한 안식일 계명을 본래의 의도대로 돌려 놓으셨다. 안식일은 그분이 주인이시며, 사람을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하지 못할 일. 안식일 외의 다른 날에는 제자들의 그런 행위가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배고픈 사람이 밭을 지나가며 과일이나 곡식을 먹을 수 있도록 구약의 율법이 구체적으로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참조 신 23:24, 25 주석).

제자들이 여기서 행한 일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인과 안식일에 행한 그의 치료 행위는, 그가 개인적으로 안식일 준수에 관한 구약의 율법과 규례들을 지키지도 않았고 또 그의 제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았던 증거라고 흔히 현대의 저자들은 곡해하고 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이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의 입장을 넷째 계명에 대한 거부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예수가 모세의 율법과 십계명의 요구를 개인적으로 고수했으며 그의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쳤음을 보여준다. 그는 도덕법의 영원한 구속력을 거듭하여 확언했으며(참조 마 5:17, 18; 15:10 등 주석), 모세의 의식법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적용된다는 유효성을 인정했다(참조 마 23:3 주석). 예수 역시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지상봉사 기간 내내 사람이 만든 법칙과 관습의 타당성에 관해서는 유대인 지도자들과 대립했다(참조 7:2, 3, 8 주석). 당시 많은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과 십계명보다 경건에 더욱 필수적이라고 여긴 듯이 보이는 이러한 요구들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타협하지 않고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참조 2:19 주석). 이러한 요구들 중 많은 부분을 그저 대강만 살펴보아도 그들의 어리석음이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바리새인들은 구원이 이 모든 규례들을 철저하게 준수함으로써 얻어진다고 엄격히 가르쳤다. 경건한 유대인의 생애는, 이런 순전히 사람이 만든 요구사항들을 부지중에 불순종했을지도 모르는 의식적 부정함을 피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기울이는 헛된 노력으로 일관되었다. 이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의 제도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정면충돌이 불가피했다.

미쉬나(Mishnah)에는 안식일에 금지된 39개의 주요 노동이 열거되어 있다(Shabbath 7. 2, Soncino ed. of the Talmud, 348, 349). 이 중 11개는 빵을 생산하고 준비하는 과정이다. 씨 뿌리기, 밭 갈기, 수확하기, 단을 묶기, 타작하기, 키질하기, 선별하기(합당한 음식에서 합당하지 못한 것을 골라내는 것), 가루로 만들기, 체질하기, 반죽하기, 굽기. 그 다음 12개는 옷을 준비하는 과정 즉 양털을 깎는 것으로부터 옷을 기워 만드는 일에 관련된 과정에 적용된다. 그 다음에는 사슴의 사체를 음식이나 가죽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7단계가 뒤따른다. 나머지 목록은 글쓰기, 건물 짓기, 불 켜고 끄기, 그리고 물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 일반적 규례들은 더욱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 주요 규례들에 덧붙여 안식일 준수에 관한 다른 무수한 지침들이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마도 약 1킬로미터 정도의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에 관한 지침일 것이다. 벽에 고정된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이나(Shabbath 149a, Soncino ed. of the Talmud, 759), 심지어는 촛불을 켜는 것도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같은 규례가 안식일에 낳은 달걀을 이방인에게 파는 것과 촛불이나 불을 켜기 위해 이방인을 고용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다. 풀잎에 물주는 일을 하면 안 되기 때문에 땅에 침을 뱉는 것은 불법으로 간주되었다. 안식일에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손수건 한쪽이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에 기워져 있으면 괜찮았는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손수건이 아니라 옷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에 관한 규칙도, 유사한 방식으로, 여행하고자 하는 길을 따라 적당한 거리에 음식물을 숨겨 놓는 식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런 경우에 음식이 있는 곳이 그 음식 주인의 또 다른 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음식을 숨겨 둔 곳에서 또 한 번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를 갈 수 있고 계속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 당시에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지워졌던 무거운 짐”(23:4) 가운데 몇 가지 예이다.

그렇게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킴으로써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만든 규칙들의 문자에 계속적으로 집착함으로 하나님의 법의 정신을 파괴하였다. 원래 사람이 창조주가 만든 것들을 연구하고 그의 사랑과 선함을 생각하도록 고안된 안식일이 오히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속성을 상기시키는 날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하나님을 독재자로 묘사함으로써 하나님의 품성을 왜곡시키는 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천연계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을 선포하고 안식일은 태초에 이런 것들에게로 사람의 주의를 이끌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자신에게 존재가치를 부여해주고 행복과 복지를 위해 신성의 능력을 한결같이 행사하시는 분을 잊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 행위로서 어떤 것이 적합하고 적합하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문제는 안식일의 목적이 마음에 분명해지기만 하면 이내 풀리게 되어 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끌어 주는 것은 무엇이나, 우리를 위한 그분의 뜻과 우리를 취급하시는 그 방법들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고, 우리를 우리 생활에서 그와 더욱 효과적으로 협력하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과 복리에 공헌하도록 이끌어 준다. 이것이 참된 안식일 준수이다(참조 사 58:13; 2:27, 28 주석).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은 안식일을 소유하시고 그것을 지킬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람을 창조하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전지하신 창조주가 손으로 만든 피조물인 사람의 품성 발달을 위하여 도덕적, 영적 성장의 기회가 필요됨을 아셨기 때문에 안식일을 만들었다. 사람은 자신의 관심과 취미를, 천연계와 계시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품성과 뜻을 연구하는 데 바칠 시간이 필요했다. 7일 안식일은 이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이 제정한 것이다. 언제, 어떻게 그날을 지켜야 할 것인지에 대한 창조주의 지시 사항들을 어떤 면으로든지 변경하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 손으로 만든 피조물을 위해 무엇이 최선임을 알고 있는 분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안식일이 축복이 되고 짐이 되지 말아야 하며, 사람이 그것을 지키는 것이 유익이 되고 손해가 되지 않도록 제정하였다. 그것은 사람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고안되었지 어려운 일을 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안식일 준수는 근본적으로 어떤 형식적인 것들을 시시콜콜히 지키는 것이나 어떤 일을 추구하는 것을 삼가는 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이런 빛으로 조명하는 것은 안식일 준수의 참된 정신과 목적을 완전히 놓치는 것이며, 행함에 근거하여 의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과 어떤 추구, 어떤 생각과 대화의 주제를 삼가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호의를 사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가 이런 일들을 삼가는 것은,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와 생각을 다른 데 바쳐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협력하는 능력을 증진시키고, 그리고 그분과 우리의 동료들에게 더욱 효과적으로 봉사하기 위해서이다. 주로 어떤 일들을 하지 않는 부정적인 요소로만 구성된 안식일 준수는 결코 바른 것이 아니다. 안식일 준수의 적극적인 요소를 실천할 때만 우리에게는 안식일 준수로부터 지혜와 사랑의 창조주로 말미암아 제정된 유익을 얻을 희망이 있다. 참조 사 58:13 주석 .

안식일을 세밀하게 준수하는 랍비들의 수많은 요구들은 하나님의 안목에 안식일이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는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법을 이렇게 맹목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의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안식일을 기계적으로 준수하기 위해 즉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랍비들은 안식일에 행해서는 안 될 것을 엄격하고 무의미하게 구분함으로써 그날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실추시켰다(참조 24절 주석). 그들은 어떤 특정한 일들을 삼가는 것, 즉 안식일 준수의 부정적인 요소를 강조하였다. 종교의 형식이 본질을 대신하게 되었다.

 

인자. 참조 마 1:1; 2:10 주석; 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안식일에도. , “안식일에조차도.” 트집잡는 바리새인들 앞에 그리스도가 제시한 논리의 정연함은 마태에 의하여 더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제시되었다. (1) 인간의 필요는 의례적 요구나 인간의 전통보다 더 중요하다(참조 마 12:3, 4). (2) 성전과 관련되어 행하는 노동은 안식일의 요구와 부합된다(참조 5). (3) 그리스도는 성전(참조 6)이나 안식일(참조 8)보다 더 크다.

 

주인. 오직 구주만이 그날에 무엇이 합당한지를 결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권리 이상을 침범한 셈이 되었다(참조 24). 교회는 안식일에 유대인들처럼 강압적인 규제를 부과하거나 한 날에서 다른 날로 그 거룩함을 전가시킬 수 있는 권리가 없다. 둘 다 사람을 참된 안식일 준수의 정신으로부터 미혹시키기 위하여 마련된 악한 자의 계교이다. 바리새인이든 기독교인인이든 간에 하나님이 택한 날을 변경할 권리가 없다.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 들린 자(참조 막 1:21~28), 베데스다 연못에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참조 요 5:1~16), 실로암 연못에서 눈먼 자를 고치신 것(참조 요 9:1~17), 그리고 18년 동안 병에 시달린 여자(참조 13:10~17), 고창병 걸린 남자(참조 14:1~6)를 고치신 것과 비교해 보라. 그리스도는 이처럼 안식일에 공개적으로 치유 이적을 베풀었으며, 베드로의 장모를 집에서 고치기도 했다(참조 막 1:29~31). 손 마른 사람을 고친 것과 합하여 안식일에 행한 치유 이적이 일곱 번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구체적으로 언급된 20가지의 치료 사례 가운데 3분의 1이 안식일에 일어났다. 참조 제9, 122~126; 5:16 주석.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 여기서는 유익을 끼치는 것과 해를 끼치는 것을 뜻함. 마태의 기사에 의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전에 이미 예수에게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은지 물었다(12:10). 랍비들의 규정은 고질병일 때와 당장 죽음에 처할 만큼 위험한 경우를 자세하게 구분하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질병들은 다른 것보다 더 중한 병이며 이러한 병으로 고통받는 자들은 필요에 따라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안식일에 심각한 병과 관련되지 않은 고통을 제거해 준다든지, 예수가 지금 막 치료하려고 하는 사람의 경우처럼 오랫동안 병을 앓아온 사람을 돕는 규정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율법은 다소 관대하게 해석되었을 것이며, 실제로는 안식일에 다른 많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보살핌을 받았을 것이다.

 

생명을 구하는 . 유대 금언에 의하면, 선을 행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해를 끼치는 것과 같고, 생명 돌보기를 소홀히 하는 것은 생명을 빼앗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사람의 생명은 위험에 처해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치료 행위는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연기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예수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 될 수 없음을 확언했다. 예수의 관점에서 볼 때, 고통받는 사람의 고통을 제거해 줄 수 있는 기회를 지나치는 것은 잘못을 행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시시콜콜한 규정을 위반할까봐 부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관심을 거기에 포함된 근본적인 원칙으로 돌리고 있었다. 생명을 구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빼앗는 것과 같고, 생명을 향상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약화시키는 것과 같다(참조 약 4:17).

 

어느 것이 옳으냐. 참조 막 2:24 주석. 또다시 랍비들의 법이 사람들의 필요와 대립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예수가 하나님의 율법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시 말해 그가 교훈과 모본으로써 계명의 요구에서 떠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정신에 참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예수는 지상 생애의 마지막에 아버지의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확언했다(참조 요 15:10).

 

지붕 뚫고 내려온 병자, 누가복음 연구 1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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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5:17-26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지붕을 뚫고 내려온 중풍병자의 이야기는 누구나 좋아한다. 이 이야기는 결단과 지혜의 이야기이다. 예수께로 접근하려 했으나 군중에 의해 길이 막히자 지붕으로 올라가 구멍을 뚫어 병자를 상에 달아 내린 사람들의 행동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심지어 익살스러운 감동마저 준다. 땀내 풍기는 평민들로 가득 찬 방에서 서기관들은 벌써 소외되는 기분을 느꼈으며, 천장에서 흙 조각이 쏟아져 내리고 거기서 어떤 사람이 달려 내려오는 광경을 보았을 때 그들이 놀라는 표정을 상상해 보라!
예수께서는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높이셨으나, 그들이 기대했던 방식대로 하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중풍병자의 마음을 가장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영적인 것임을 알고 계셨다. 그 병자는 육신이 낫기를 원하였으나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화평, 곧 그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확신 갖기를 더욱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본문연구

  1.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은 것은 친구들의 믿음 때문인가? 아니면 본인의 믿음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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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사람들은 왜 예수님께 신성모독의 죄를 지었다고 하는 것인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참람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2:7절을 참고하세요.

  3. 23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는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토의사항

  1. 내 삶에 존재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말 해결 할 수 없는 장애물인가요?

       이 고통을 당하는 자의 마음에 세 가지 큰 장애물이 있었을 것이다. 치료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중 어느 것도 치유의 가망성을 멀어지게 하기에 족했을 것이다. 첫째로 약 8세기 전, 엘리사 시대 이후로는 문둥병자가 치유되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 장애물은 더욱 더 암담한 것인데, 문둥병자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신념이었다. 예수가 그를 기꺼이 치유하고자 할 것인가? 셋째 장애물은 더 실제적인 문제였다. 문둥병자가 어떻게 그의 요구를 말하기 위하여 예수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 예수가 가는 곳마다 군중들이 몰려들었으며, 의식법은 문둥병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접근하거나 섞이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었다.


  2. 내가 살아온 생애 중에 가장 후회되는 일(양심의 가책이 되는)은 어떤 것인가?

       “이 중풍병자의 질병은 죄악 된 생활의 결과였으며 그 고통은 양심의 가책에 의해 더욱 심해졌다. 그는 정신적인 고민과 육체적 고통을 덜기를 바라면서 이미 오래 전에 바리새인들과 의원들에게 애원하였었다. 그는 어떤 곳으로부터도 도움의 가망이 없음을 알고 절망에 빠져 버렸다. 그가 바란 것은 육체적 회복이라기보다는 죄 짐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 그가 만일 예수를 보고, 용서와 하늘의 평강의 보증을 받을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든지 죽든지 만족할 수 있었다”(시대의 소망, 267).


  3. 꼭 고침을 받고 싶은 병은 어떤 것인가?(스스로 병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


  4. 예수님께서 내 문제를 반듯이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은 얼마나 되는가?

       크신 의사께서는 치유책을 처방해 주실 뿐만 아니라 돌보고 관심을 베푸시며동정심이 충만하시다그분께서는 이 세상에 계셨을 때당신의 사랑과 관심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온전해질 수 있도록 당신을 충분히 신뢰할 수 있게 하셨다그분의 사랑은 육체적ㆍ정서적ㆍ영적 치료를 가져다준다.

가버나움. 마태는 가버나움을 그리스도의 본 동네”(own city, 9:1)라고 언급한다. , 그가 갈릴리 사역을 수행하고 고향같이 여긴 듯한 본부였다.

 

[]. (개역한글판에는 없고 제임스왕역에 나옴역자 주). 그리스도가 첫 선교 여행을 위해 가버나움을 떠나게 된 것은 그를 찾아나선 큰 군중의 무리와 대중적 흥분으로 기인된 것이었다(참조 1:33, 37). 그러나 그가 가버나움을 떠나자 사람들의 열기가 식었다. 예수가 다시 가버나움에 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왔다.

 

네 사람에게 메워. 마가만 이 구체적인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와 또 다른 곳의 구체적인 설명은 이 기사의 사실성을 반영해 줄 뿐만 아니라 이 기사가 목격자의 증언아마도 베드로임을 증거해 준다.

 

무리를 인하여. , 많은 사람들의 무리.

 

지붕을 뜯어. 누가(5:19)는 그들이 기와를 벗기고내리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동에서는 흔히 그렇듯이, 이 집의 지붕도 아래 정원에서 사다리나 층계로 올라가도록 평평하게 되어 있었을 것이다(참조 신 22:8 주석; 10:9). 서까래 위에 기와를 깔아 지붕을 만들었을 것이다.

예수에게 접근하기 위해 사용한 특이한 방법은, 그에게 아주 가까이 왔으나 여전히 기회를 놓쳐버릴 것을 염려한 중풍병자 자신이 내놓은 절박한 제안이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268). 갑자기 가버나움을 떠나가고(1:37, 38), 수 주일 동안 멀리 떨어져서 머물렀으며 마침내는 사막에 은둔하였던 예수의 행적이 죽음에 직면한 이 사람의 절망감을 더 심화시켰다(참조 시대의 소망, 267).

 

침상. 헬라어 크랍바토스(krabbatos). 가난한 사람의 소파침대.” 그 병자가 누운 초라한 침상은 아마도 풀이나 헝겊 조각을 누벼 만들었을 것이다.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 메고 온 네 사람과 중풍병자의 믿음. 지붕을 뚫어 구멍을 낸 것은 그들의 절박한 필요와 예수만이 그것을 충족시킬 수 있음을 생생하게 말해 준다. 그러한 필요 의식과 믿음은 예수의 치료 능력이 각 사람의 영혼과 신체에 적용되기 전에 있어야 할 필수적인 것이다(참조 눅 5:8 주석).

 

소자야. 헬라어 테크논(teknon). 문자적으로 어린아이.” 여기서처럼 부를 때는 내 자식아”, “내 아들아로 쓰인다. 이 질병이 죄악된 생애의 결과로(시대의 소망, 267) 생긴 만큼, 그가 살아온 이야기는 탕자와 유사한 것 같다(참조 눅 15:13, 14). 몇 개월 전에 베데스다에서 치유 받은 중풍병자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참조 요 5:14).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참조 10절 주석. 고통은 그에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으며, 그 고통이 자기 자신이 저지른 죄의 결과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예수가 언급한 것은 그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는 이러한 죄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 중풍병자는 신체의 치료는 물론 영혼의 치유를 위해 찾아 온 것이다(참조 시대의 소망, 267, 268,). 그는 신체적으로는 무력하고 영적으로는 절망적이었으나 예수에게 나아와서 도움을 받고 소망을 갖게 되었다(참조 요 9:2 주석).

 

어떤 서기관들이. 누가에 의하면(참조 5:17 주석),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갈릴리와 유대와 예루살렘각처에서 왔다. 이들이 여러 지역에서 대표로 왔으며 이 특정한 경우에 등장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음을 말해 준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가 지금까지 일했던 바로 그 지역에서 가버나움으로 왔다는 사실은, 그렇게 대중의 열렬한 관심의 중심 인물이 된 분을 조사하기 위해서였음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러한 상황은 2년 전에 침례자 요한의 일을 조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대표자들을 요단강으로 파견했던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1:19~28). 예수가 전에 일한 적이 있던 유대로부터 온 대표자들은 최근 갈릴리에서 행한 예수의 행적에 관하여 그곳 지도자들에게 어떠한 방침을 일러주기 위해 보내졌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정탐꾼들이며(참조 시대의 소망, 213, 267,), 예수는 이들에게 마치 베데스다에서 중풍병자를 고쳐준 사실을(5:1~9) 생생하게 생각나게 해주려는 듯이,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치유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찾고 있는 것예수가 참람된 자라는 확실한 증거을 머지않아 찾을 것이다.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 했던 예수의 말은 신성모독이라는 낙인이 찍혔으며(5:18), 그들이 또다시 신성모독이라고 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권리를 예수는 공적으로 행사하였다. 이 경우는 갈릴리 봉사 기간 동안 유대 지도자들과의 몇 번의 마찰 가운데 첫 번째에 해당된다.

 

마음에 의논하기를. 헬라어 디알로기조마이(dialogizomai). “결산하다”, “대화하다”, “토론하다.”

 

이 사람이. 헬라어 후토스(houtos). “[사람].” 시비걸 때 쓰는 말투 같다. 그들은 예수가 신성모독을 범한 현장을 포착했다고 생각했으나, 이상하게도 그 증거는 1년 반 후에 재판할 때 그를 반박하기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어려움은 예수가 메시야 주장을 하였다기보다 그가 신성의 능력죄를 용서하고 질병을 치유함에 있어서을 실제적으로 행사함으로써 그들과 맞닥뜨렸다는 사실에 있었다.

 

참람하도다. 헬라어 블라스페미아이(blasphe--miai). “상처를 주는 말들”, “중상즉 권위를 손상시키는 말들. 서기관들은,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여 줌으로써 예수가 그들의 주장대로 한낱 인간으로서 신성의 권한을 침해했다고 생각했다. 의식 제도 아래에서 제사장이 사람의 고백을 관장했으나 실제로 용서의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가 제사를 받는 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고백을 받으시는 것을 상징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참조 히 10:1~12). 서기관들은 신성의 임재의 증거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를 비난했던 바로 그 죄를 마음속에 범하고 있었다(참조 마 12:22~32). 레위기에 의하면 신성모독에 대한 형벌은, 물론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굳이 그대로 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이었다(참조 24:16).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서기관들은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는 한 철저하게 옳았다. 왜냐하면 구약은 죄를 사하시는 분이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43:25; 31:34; 참조 요 10:33). 그들의 과오는 그들 앞에 서 있는 분이 하나님임을 인식하기를 실패한 데 있었다.

 

중심에 아시고. 헬라어 에피기노스코(epigino-sko-). “정확히 알다”, “인지하다.” 예수는 자주 사람의 생각을 읽었다(12:15; 6:8; 9:47; 11:17; 참조 요 4:16~19; 8:7~9). 이것은 대체로 그들을 심히 발분(發憤)케 하는 효과를 주었다.

 

어느 것이 쉽겠느냐. 서기관들은, “사람의 죄가 사하여졌다고 말하는 것이 쉽지, 왜냐하면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를 아무도 말할 수 없을 테니까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예수는 즉시 그들 속에 품고 있는 도전에 응수하여 이렇게 질문했다.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과 중풍병자를 치료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너희는] 쉽겠느냐?” 대답은 명백하다.

 

인자. 이 대목에서 처음으로 세 공관복음서 기자 모두가 이 유명한 호칭을 사용한다(9:6; 2:10; 5:24). 이것은 그리스도가 스스로를 가리켜 즐겨 사용한 호칭이었으며 복음서에 80번 정도 나온다. 그러나 아무도 이 명칭을 써서 그를 부르지 않았으며 복음서 기자들도 그를 이렇게 언급한 적이 없다. 이 명칭은 최소한 어떤 유대인들에게는 새로 건설될 왕국의 통치자인 메시야를 칭하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맹세의 경우(26:63, 64; 14:61, 62), 그를 그리스도로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사적으로 말씀한 경우(16:16, 17; 3:13~16; 4:25, 26; 16:30, 31)를 제외하고는, 예수 자신이 직접 메시야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예수의 생애와 말씀과 사역에서 메시야 예언들이 그에게 성취되었다는 증거를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예수는 문자 그대로 순전히 역사적인 사실에서나(참조 눅 1:31~35; 1:3, 4; 4:4), 더 높은 의미에서도 사람의 아들[人子]”이다. 인자라는 명칭은 그를 성육신한 그리스도로 나타내준다(참조 요 1:14; 2:6~8). 그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이 한 신성과 인성으로 연합된 기적을 가리킨다. 그것은 사람의 아들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것이라는 진리를 증거해 준다(1:12; 4:3~7; 요일 3:1, 2). 인성이 다시 신성의 형상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신성이 인성으로 나타난 것이다(시대의 소망, 25).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에 관해서는 눅 1:35; 1:1~3 주석을 참조하라. 그리고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에 관해서는 눅 2:49, 52; 1:14 주석을 참조하라. 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을 참조하라.죄를 사하는. 고통당하는 자가 고통을 주는 질병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그 질병의 원인이 먼저 제거되어야만 한다(참조 5절 주석). 영혼을 치유하지 않은 신체의 치료는 젊은이가 질병을 얻은 과정을 반복하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게 새로운 몸을 준 그리스도는 새로운 마음을 먼저 주어야만 했다.

 

권세. 헬라어 엑수시아(exousia). “권세.” “또는 능력을 의미하는 헬라어는 보통 뒤나미스(dunamis)이다. 기적을 행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요구되나, 죄의 용서는 권세의 문제이다. 여기에서는 엑수시아가 이 구절의 시작 부분에 와 있으며 죄를 용서하는 그리스도의 권세를 강조해준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이 권위에 도전했다(참조 11:28).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예수는 그들이 볼 수 없는 훨씬 더 위대한 사실의 증거로서 그들이 볼 수 있는 기적을 행했다(참조 롬 1:20).

 

말씀하시되. 예수의 선포 도중에 이 말씀이 삽입된 것은 이 시점에서 예수가 서기관들에게서 돌이켜 중풍병자를 향하여 말하고 있음을 의도하고 있다. 다른 모든 복음서의 서술에서도 같은 지점에 삽입되어 있다(참조 마 9:6; 5:24). 같은 말의 유사한 용례가 막 1:16과 마 4:18; 5:28과 마 9:21; 14:2과 마 26:5; 15:10과 마 27:18에도 나타난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헬라어 소이 레고(soi lego-). “너에게 내가 말한다.” 여기에서 헬라어 어순이 강조하는 바는 예수가 말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있다. 10절에서는 믿지 않는 서기관들에게 말했으나 이제 그들에게 증명해주기 위해서 중풍병자를 향하여 너에게 나는 말한다, 일어나라고 했다. 육체적으로 치료하는 능력은 영적으로 치유하는 권위에 대한 증거이다.

 

네 침상을 가지고. 병자는 침상에 누운 채 예수에게 운반되었다. 그는 이제 일어난 큰 변화의 증거로서 그의 침상을 가지고 예수를 떠난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 누가복음 연구 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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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5:1-11

[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그 이적이 제자들에게 전하여 준 그 의미 심장한 교훈은 우리를 위한 교훈이기도 하다. 즉, 말씀으로 바다에서 고기를 모을 수 있었던 그분은 또한 인간의 마음에 감명을 주고 그의 사랑의 끈으로 그 마음들을 이끌어서 그의 종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할 수 있으셨다.
그들은 미천하고 배우지 못한 갈릴리의 어부들이었지만 세상의 빛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택하여 앉히시려고 부르신 그 지위에 합당하게 하실 수 있으셨다. 구주께서는 교육을 멸시하시지 않으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지배를 받아 그 사업에 헌신할 때에 지적 교양은 축복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 당시의 지혜 있는 사람들을 지나쳐 버리신 것은 그들이 너무 자신만만해서 신음하는 인류들을 동정할 수가 없고 따라서 나사렛 사람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완고하게도 그리스도의 가르침 받는 것을 비웃었다. 주 예수께서는 당신의 은혜를 전달하는 데 막힘이 없는 통로가 될 자들의 협력을 구하신다.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첫째로 배워야 할 일은 자아를 불신하는 교훈이다. 그리하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품성을 나누어 받을 준비가 갖추어진다. 이것은 가장 훌륭한 과학적인 학교의 교육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늘의 교사에게서만 얻어지는 지혜의 열매인 것이다.”(소망, 249-250)

 

수님께서 부르신 첫 제자들은 어부들이었다. 그 과정과 의도는 무엇일까?

 

본문연구

  1. 11절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저희들은 누구들인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4:18-22과 막 1:16-20과 비교하여 첫 제자들의 이름을 나열해 보라.

  2. 마태(4:18-22)와 마가(1:16-20)의 기록에 비하면 누가의 기록은 자세한 사실을 말해주 고 있다. 복음서 기자들의 본문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시몬 베드로를 부르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본문에서 모두 찾아보라.
    cf. 1절의 게네사렛은 구약에서는 긴네렛”, 신약에서는 갈릴리혹은 디베랴라고도 불리는 갈릴리 북서쪽의 지명이다.

  3. 5-6절에서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가득 잡은 이적을 통하여 예수님께 서는 무엇을 암시하시고자 하셨는가?
    9-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4:19과 막 1:17을 참고하라.

  4. 베드로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한 것은 왜일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전문지식 vs 하나님의 말씀 이 충돌될 때.. 나는 어떻게 하는가?
    cf. 10:8과 사 6:5을 참고하여 설명해 보자.

 

토의사항

  1. 예수님께서 주로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신 까닭은 무엇인지 이야기 해보라.

    예수께서 배움이 없는 어부들을 선정하신 것은 그들이 그 당시의 유전과 그릇된 관습들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천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겸손하고 온순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업을 위하여 교육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 시대의 소망, 250.

  2.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11)는 어부들의 순 종과 비교하여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과 순종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보자. (직접 부르심? 간접 부르심?)

 

가는 마태와 마가와는 달리 매우 상세하게 첫 제자들을 부르신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예수를 옹위(press)하던 많은 무리들 가운데서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을 선별하셨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특권을 우리는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1. 무리가. 누가는 순서에 관계없이 갈릴리 호숫가에서 있었던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의 부름을 기록한다. 시간적인 순서로 보면 이 기사(1~11)4:3233절 사이에 속한다(참조 마 4:23 주석). 누가가 이렇게 배열한 이유는 나사렛(4:16~30)과 가버나움(31~37)에서 베푼 두 번의 회당 설교를 하나로 묶고, 첫 번째 갈릴리 전도여행에 관한 기사(12~15)를 제자들의 부름(5:1~11)과 연결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게네사렛. 비옥한 게네사렛 평지가 근처에 있었으며, 아마도 이 때문에 호수에 그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참조 마 14:34; 6:53). 산지와 호수 사이에 위치한 이 평지의 북쪽에는 가버나움이, 남쪽에는 막달라가 있는데 지금은 엘-구웨이르(el-Ghuweir)라고 불린다. 이 평지는 길이가 5킬로미터이고 폭이 2.4킬로미터 정도 된다. 아열대성 기후로 인하여 호두, 무화과, 감람 열매 그리고 포도가 생산된다. 게네사렛 호수는 구약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긴네렛이라고 불렸다(34:11; 12:3 ). 그리스도 당시에는 갈릴리 바다(혹은 게네사렛 호수)가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풍요롭고 인구가 밀집된 지역과 맞닿아 있었다. 갈릴리는 주로 유대인들로 구성되었지만 유대교의 본부인 예루살렘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참조 2:42, 44 주석). 갈릴리는 유대교의 편견과 적대에서 벗어나 있었고, 따라서 여러 면에서 그리스도가 자신의 사업을 수행하기에 이상적인 곳이었다.

 

2. . 여기에 언급된 배들 가운데 하나는 베드로와 안드레의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야고보와 요한의 것이었다.

 

어부. 문자적으로 바닷사람.” 얼마 안 있어 사람 낚는 어부가 될, 세베대와 둘 이상의 삯꾼”(참조 막 1:20)과 함께 이 네 명의 어부는 야간 고기잡이에서 이제 막 돌아왔다(참조 5:5).

 

5. 선생. 헬라어 에피스타테스(epistate-s). 문자적으로 “[다른 사람의] 위에 서 있는 사람.” 따라서 감독관혹은 관리자를 뜻한다. 누가는 예수를 가리키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한 유일한 공관복음서 기자이다. 누가와 그 밖의 기자들이 자주 사용한 더 일반적인 단어는 디다스칼로스(didaskalos)인데 문자적 의미는 선생이다(참조 요 1:32 주석). 사실 베드로는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그들이 고용한 사람들이 경영하는 고기잡이 사업의 감독즉 에피스타테스였다(참조 막 3:16 주석).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낮에는 고기들이 갈릴리 호수의 깨끗한 물 속에 펼쳐진 그물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고기잡이하기에 알맞은 시간은 밤이었다.

 

얻은 것이 없지마는. 갈릴리 호수에는 고기가 가득했고, 따라서 고기잡이는 지역의 일반적인 직업이었다.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돌아오는 일은 흔한 경험이 아니었다. 수 분 후에 풍성한 고기를 잡도록 도운 동일한 능력이 밤새 쏟은 수고에 아무런 결실이 없도록 만들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때때로 우리가 힘을 다해 쏟은 수고가 아무런 열매 없이 끝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오직 더 큰 능력과 연합으로만 바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수와 연합의 필요성을 더욱 분명하고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하여 우리의 계획과 수고를 방해한다.

고기잡이는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베드로의 직업이었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그의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성공했음이 분명하다. 경험 많은 어부인 베드로는 자신의 고기잡이 지식이 목수이며 건축가였던 예수의 지식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선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지난날 예수가 행한 일을 보았던 것을 근거로 신뢰하는 마음에서, 베드로는 동료들과 함께 예수의 요청에 응하였다. 어떤 경우든 그들이 밤새도록 수고했던 것보다 더 악화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동료 어부들은 지난밤의 헛수고를 생각하면서 낙담에 빠져 있었다. 밤새도록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지루한 감옥에서 6개월 동안 괴로운 나날을 보냈던 침례자 요한의 운명을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참조 3:20 주석).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가 지난해에 거의 모든 노력을 유대 지방에 기울였지만, 유대 지도자들의 신임과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향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던 나사렛에서의 최근 경험을 회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헛된 수고로 지치고 불신의 마귀로 인해 시험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는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틀림없이 옛날의 야곱처럼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42:36)라고 외치려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난밤의 실망스러운 경험에 뒤이어 어부 베드로에게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줄 경험이 이제 막 일어나려는 참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봉사에서도 유대와 나사렛에서의 실망스러운 경험은 이제 갈릴리의 영광스러운 성공으로 바뀌려 하고 있었다. 무리들이 곧 예수에게 몰려들어 때로는 식사와 수면을 취하기 위해 그들에게서 피해야 할 정도가 될 것이었다.

 

6. 심히 많아.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호숫가에서 계속 그물을 정리하고 있었을 것이다(참조 7).

전에는 아무것도 잡을 수 없었지만 이제 예수와 연합하여 그들의 기대를 훨씬 능가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스도 조차도 사람들 가운데 인간으로 사는 동안 아무것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하지 않은 것처럼(참조 요 5:19, 30; 8:28),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 예수를 좇고자 하는 사람들도 그와 함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워야만 한다(15:5). 특별히 사람을 낚는 일을 할 때는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노력과 결합될 때만 그 결과가 효과적이고 지속적일 수 있다. 1년 반 후에 비슷한 상황에서 무수한 고기가 잡힌 일과 비교해 보라(참조 요 21:11).

 

8. 베드로가 이를 보고. 숙련된 어부로서 바로 이 호수에서 일을 하면서 삶의 대부분을 보낸 베드로는 이적이 일어났음을 곧바로 알았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 사는 고기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심지어 자신의 일터인 호수에 있는 고기들조차도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듯 보였다. 이제 그 역시 사람을 낚는 대가(大家)의 부름에 순종할 준비가 되었다. 참조 6, 9절 주석.

 

엎드려. 배들이 아직도 호수에 나가 있고, 다른 사람들도 그물에 걸린 고기들을 꺼내고 있는 동안에. 그리스도 역시 아직 시몬의 배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참조 3).

 

나를 떠나소서. 예수와 교제할 가치가 없다는 자각이 베드로의 양심에 강렬하게 엄습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그리스도께 매달렸고, 따라서 그의 말은 예수에게서 분리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전적인 무가치함에 대한 자각을 암시했다(참조 시대의 소망, 246).

 

죄인이로소이다. 경찰이 도둑의 범죄행각을 모른다 할지라도 경찰이 앞에 있으면 도둑이 불안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죄인들이 완전한 구주 앞에 있을 때 얼마나 더 부끄럽고 무가치한 감정을 갖겠는가? 무가치함에 대한 자각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삶과 성품을 바꾸는 일을 시작할 때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생기는 첫 번째 반응이다. 이사야가 이상 가운데서 거룩한 임재 속으로 들어갔을 때 동일한 감정을 느꼈다(6:5). 하나님은 구원의 필요성을 먼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오직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만이 배부를 것이다(참조 마 5:3, 6 주석). 아마도 처음으로 베드로에게 영적인 필요에 대한 깊은 각성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11. 모든 것을 버려 두고. 그들이 예전에 잡아보지 못한 엄청난 양의 고기를 소유하게 된 네 명의 동업자가 거기에 서 있었다. 그들은 가장 큰 물질적 성공을 거둔 그 순간 자신들의 사업을 버렸다(참조 시대의 소망, 273). 그들이 기적의 더 고귀한 의미를 보았다 해도, 지금까지는 미미한 성과만을 올린 떠돌이 선생의 제자로서 불확실한 생계를 위해 자신들이 선택한 직업을 버리는 데는 참으로 큰 믿음이 필요했을 것이다(시대의 소망, 245). 그러나 예수는 고기를 풍부하게 제공해 줌으로써 제자들의 필요를 채워 줄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었으며, 그들은 겸비하게 믿었다.

제자들에게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예수와 함께 더욱 고귀한 동업을 하기 위해 어부로서의 성공적인 동업을 해체하려는 것은 즉각적이고 현명한 결정이었다. 그들은 곰곰이 생각해 볼 시간도, 가족들의 필요를 제공해 줄 시간도 필요치 않았다(참조 마 8:19~22). 그들은 평범한 어부로서 깊은 곳으로 나아갔지만, 해안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그리스도가 이제 그들을 불러 사람을 낚도록 하기 위하여 지시한 깊은 곳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유지해 줄 것으로 믿었던 것들을 찾기 위해 밤이 새도록 수고했으나 허사로 끝났다. 이제 그들은 삶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포기하고자 했고, 그렇게 함으로 더 부요하고 더 풍성한 삶을 시작했다(참조 막 10:39). 그들은 봉사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갔다(참조 막 3:14 주석).

 

예수를 좇으니라. 지금까지는 적어도 네 명 중 세 명 즉 베드로, 안드레, 요한이 간헐적으로 예수를 좇았다. 두 가을 전에 요단강에서 그들이 받은 부름은 예수를 메시야 즉 세상 죄를 짊어지기 위해 온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인정하라는 부름이었다(참조 요 1:35~50 주석). 이제 그들은 신자로서만이 아니라 제자와 동역자로서, 자신들의 삶과 소유를 그의 것과 결합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 이전에는 이들 중 누구도 예수와 완전히 그리고 영구적으로 연합한 자는 없었다(시대의 소망, 246). 그들은 그동안 시간제 제자들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관심은 현세적 삶과 더 높은 삶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제부터 그들은 시간과 재능을 전적인 봉사에 바쳐야 했다. 네 제자가 예수를 따라간 것은 그들이 게을러 생계를 위해 일하기 싫어서나 그들의 세상적인 사업이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깊은 확신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가 부른 다른 제자들처럼 그들도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르라는 부름을 받을 때까지 자신들이 택한 직업에 충실하였다.

이스라엘의 지식인들은 네 제자 가운데 누구도 선생이 될 충분한 자질을 가졌다고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비천하고 불학 무식했지만 바로 이런 특성들이 제자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그들이 랍비의 잘못된 사상으로 교육받지 않았기 때문에 천국을 건설하는 일에 숙련된 일꾼으로 만들어 주는 데 필요한 교훈을 배우기가 훨씬 쉬웠다(참조 막 3:15 주석). 때로는 예수가 가르치고자 하는 교훈을 더디 배웠지만 그들은 예수에게 진정으로 헌신하였다. 예수의 사랑은 그들이 개인적으로 그에게 굴복하는 정도에 따라 점차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변화시켰다. 그들이 훈련을 마치고 나왔을 때, 더 이상 교양이 없거나 무식하지 않고, 예리한 통찰력과 건전한 판단력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와 닮은 점이 무척 많아 그들이 예수와 함께 있었음을 다른 사람들이 알 정도였다(참조 행 4:13).

하나님의 사업에 유용하게 되는 것은 뛰어난 지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눈앞에 있는 일에 대한 헌신에 달려 있다. 만일 그러한 재능들을 하나님께 바친다면, 위대한 재능과 탁월한 지성을 가진 한 사람의 영향력은 더 넓은 영역에서 일반에게 알려질 것이 분명하다(참조 실물교훈, 333).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보다, 사랑스런 마음과 온유한 마음 그리고 자원하는 손들로 당신의 사업을 훨씬 쉽게 이룰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아를 제쳐두고 마음속에 성령이 역사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것이다(참조 시대의 소망, 250).

주의 은혜의 해, 누가복음 연구 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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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4:14-22

[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진리가 그리스도의 시대에는 인기가 없었다. 진리는 현 시대에도 인기가 없다. 사단이 최초에 자고심을 일으키는 거짓말을 제시함으로 진리에 대한 염오를 사람에게 준 이래로, 진리는 인기가 없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지 아니한 이론과 교훈에 접촉하고 있지 않는가? 사람들은 마치 유대인들이 그들의 유전에 대하여 그리하였던 것처럼, 이런 이론과 교훈에 집요하게도 매달리고 있다”(시대의 소망, 1권, 242).

 

수님의 첫 설교(누가의 기록)는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아에 대해 예언한 말씀이었다.

 

본문연구 (참고: 시대의 소망 제 12-13장)

  1. 안식일에 회당에서(1419).
    예수께서 그의 고향 회당을 방문하신 것은 일련의 안식일 설교와 가르침이 끝난 후였다(14,15). 대체로, 예수님과 바울이 회당에 간 것은 안식일 준수를 시사한다. 예수님의 규례는 회당에 참석하는 것이었다(16).

  2. 예수님의 봉사에 권위를 준 것은 무엇인가?(4:14; 4:31, 32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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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께서는 설교하고 가르치시는 권리와, 기사를 행하시는 권능을 가지고 오셨다. 그분의 명성은 그 권능의 증거로부터 자라 나갔다. 그분은 권세와 단순성으로 말씀하셨다. “그분은 그들이 이해하기 좋게, 명백하고 단순하게 진리를 말씀하셨다. 그분의 언어는 단순하였다! 가장 가난한 자도, 무학자나 무식한 자도 그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본교 성경 주석, 51120).

  3. 요한복음 138절에서, 예수께서 봉사를 시작하실 때 처음으로 말씀하신,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이 말씀을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쓴 첫 말씀들과 비교하라(4:17; 1:14, 15; 4:17~21).
    :

       누가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전도하셨다고 말한다(4:43). 첫 세 복음서들 (마태, 마가, 누가)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비슷하게 말하기 때문에, 비록 독특한 부분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공관 (함께 본다) 복음서라고 한다. 누가가 나사렛의 설교를 기록한 것은 마태나 마가와 다르다. 요한의 복음은 대부분 공관 복음에 없는 것들이 많은데, 그것은 말씀하신 예수님에 관한 장엄하고 권위적인 진술로 시작된다.

  4. 누가가 예수님의 말씀 중에 나사렛 설교를 제일 처음 것으로 택한 의미가 무엇일까?(4:17~19; 61:1, 2; 19:10 비교)
    :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받으시는 해를 선포하셨다 (“주의 은혜의 해4:19). 그분께서는 중보의 혜택이 미치기를 기대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의 해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 속에 있다.

  5. 예수님께서는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 대한 교회와 각 교인의 책임이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4:17~19; 25:34~45 비교).
    :

가르치시매. 자적으로 그는 가르치기를 계속했다.”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가 진리를 나누어 줄 때 사용한 통상적인 방법이다. 오늘날에는 설교가 진리를 제시하는 좀 더 공식적인 방법이고 가르치는 것은 덜 공식적이다. 가르치는 것이 설교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가르칠 때는 청취자들이 참여하기 때문이고, 반면에 설교할 때는 청취자들이 주로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예수는 산상설교와 생명의 떡에 대한 설교 등과 같은 좀 더 공식적인 강론을 하곤 했다. 그러나 산상설교에서도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5:2)라고 기록되어 있다. 자신의 설교에 가르침의 특성까지 가미한 설교자는 복된 사람이다.

 

나사렛. 참조 4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이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공적 봉사를 위하여 AD 27년 가을 목공소를 떠난 이래 그가 한 첫 번째 나사렛 방문이었다(시대의 소망, 236). 이때는 아마도 AD 29년 늦은 봄이며 그의 공적 봉사의 거의 반이 지난 시기였을 것이다. 1년 후, 아마도 AD 30년 이른봄에 예수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시대의 소망, 241) 이 성읍을 방문했다. 첫 번째 방문은 16~30절에만 기록되어 있고, 두 번째 방문에 대해서는 막 6:1~6을 참조하라. 나사렛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 그리고 자매들이 살고 있었고, 따라서 바로 이 안식일에도 그들이 회당의 예배자들 사이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안식일에. 누가가 구체적으로 주일 중 일곱째 날(참조 23:56~24:1)로 밝힌 안식일에 예수가 성스러운 회당 예배에 규례대로참석했다는 그의 진술에는, 자신의 주인을 사랑하므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분명히 나타나 있다(참조 요 14:15; 벧전 2:21). 그리스도가 지상에 있을 때 개인적으로 유대인들이 지켰던 것과 동일한 날을 지켰다는 사실 역시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진 이후로나 창조 이후로 날짜가 잃어버린 바 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주인”(2:28)이다. 즉 그가 그날을 만들고(2:1~3; 참조 막 2:27) 그것을 자신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안식일 준수에 대한 그의 모본은 준수 시간이나 방법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온전한 귀감이다. 더욱이 현재의 1주일은 그리스도 시대로부터 단절 없이 연속돼 내려왔고, 따라서 오늘날 주일 중 일곱째 날을 준수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지켰던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이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수백만의 유대인들이 문명화된 세계 각처로 흩어졌으며, 따라서 그들 모두가 주일 중 일곱째 날을 헤아리는 일에 일제히 같은 실수를 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기 규례대로. 문자적으로 그에게 습관이 된 것에 따라.” 그리스도는 안식일에 정규적으로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습관이 있었다. 청년 시절에 바로 이 나사렛 회당에서 그는 선지자들의 글을 낭독하라는 요청을 받았고, 또한 친숙한 성경 지식으로 예배자들을 감동시키는 교훈을 끌어내 보였다(시대의 소망, 74). 예수는 유대와 갈릴리 회당에 사람들이 모였을 때를, 그들을 가르치는 기회로 이용한 것으로 보이며(참조 눅 4:15 주석; 4:23; 12:9; 13:54; 1:21; 6:2; 18:20 ), 후에 바울도 이방 나라에서 그렇게 했다(참조 13:14, 15, 42).

 

17. 이사야. 그리스도 당시에는 선지자들의 글을 읽고 설교하라는 부탁을 받은 사람이 어떤 부분을 읽을 것인지 선택할 수 있었다. 예수는 특별히 선지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요청했다(참조 4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드리거늘. 즉 성스러운 두루마리를 궤에서 꺼내 낭독할 사람에게 건네주고, 낭독이 끝나면 다시 궤에 넣는 일을 담당하는 집사 곧 핫잔(h.azzan)드리거늘.” 회당 예식에 따라 핫잔이 선지자들의 두루마리를 궤에서 취하여 덮개를 벗기고 그것을 펼쳐서 예수에게 전해 주었다. 예수가 백성들의 일상 언어를 구사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종교적 목적 외에는 거의 쓰지 않았던 히브리어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당시에 성경은 언제나 히브리어로 읽었다.

 

기록한 데. 누가가 인용한 구절은, 많은 고대 사본에 있는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라는 구절을 생략하고 사 58:6을 의역한 눌린 자를 자유케 하여라는 구절을 삽입한 것을 제외하고는 70인역의 사 61:1, 2 상단과 일치한다. 아마도 누가는 기록할 때 그 당시의 70인역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참조 3:36 주석). 성경의 여러 구절을 이런 식으로 함께 연결하는 것은 유대인의 흔한 관행이었다(참조 막 1:2 주석).

 

찾으시니. 예수는 자신이 읽고자 하는 구절이 나올 때까지 두루마리를 계속 펼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이미 지나간 부분을 감았다(참조 제1, 33[사해두루마리 이사야서]). 61:1, 2은 그 두루마리의 거의 끝 부분에 있었을 것이다.

 

내게 임하셨으니. 예수의 지상 봉사에 권능을 부여하기 위해 침례 시에 성령이 그에게 임했다(참조 눅 3:21, 22; 1:32; 10:38).

 

가난한 자에게. 가난한 자들은 흔히 파렴치한 관료, 사업가들 그리고 이웃들의 학대를 받았다. 더욱이, 일반적으로 가난의 고통은 하나님의 저주로 인한 것이며 그들의 불행한 상황은 그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간주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불쌍한 처지에 대하여 거의 동정심을 갖지 않았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예수의 각별한 사랑은, 침례자 요한이 감옥에서 고통받고 있을 때 그의 주의를 끌었던, 예수가 메시야라는 위대한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참조 마 11:5). 이 세상의 재물을 조금밖에 갖지 못한 사람들은 궁핍함과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을 자주 느끼며, 따라서 복음 설교를 쉬 받아들이는 일이 자주 있다. 예수의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는 구제를, 무지한 자에게는 빛을, 고통받는 자에게는 그 고통의 경감을, 죄의 노예들에게는 해방을 의미한다.

 

기름을 부으시고. 헬라어 크리오(chrio-). 이 단어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하는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유래했다(참조 마 1:1 주석). 이 구절을 메시야적 배경에 맞춰 다음과 같이 의역할 수 있다. “그가 나를 그리스도로 삼았다혹은 그가 나를 메시야로 삼았다”(참조 사 61:1 주석).

 

포로 된 자. 이것은 문자적 의미의 포로가 아니라, 몸과 마음과 영이(참조 롬 6:16) 사단의 포로가 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예수는 침례자 요한을 감옥에서 석방하지 않았다. 여기서 이 포로마귀의 올무에 걸려 그의 뜻을 좇는, 사단의 ”(참조 벧전 3:19)에서 고통당하는 영혼들을 말한다(참조 딤후 2:26).

 

눈먼 . 실제로 눈먼 사람들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눈먼 사람들도 포함한다(참조 마 15:14; 23:16~19, 26; 9:39~41).

 

눌린 . 여기에 인용된 구절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의미에서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58:6에서 압제당하는”(oppressed)으로 번역된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한 사 42:3에서는 상한”(bruised)이라는 말로 되어 있다. 42:4에는 이 단어가 낙담(discouraged)이라고 번역되었다. 예수는 죄의 무거운 짐과 랍비들이 유대인들에게 부과한 압제적인 규정들에서 사람들을 자유케 하기 위해 왔다(참조 마 23:4; 11:28~30).

 

19. 은혜의 해. 곧 복음의 시대. 영적 필요를 느끼는 자들(심령이 가난한 자들), 통회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마음이 상한 자들), 죄의 포로가 되어 영적인 사물에 눈먼 자들, 악한 자에게 상처받아 깨진 사람들이 죄로부터의 해방을 기대할 수 있는 시대를 말한다. “주의 은혜의 해는 노예들이 풀려나고, 빚이 청산되며, 양도된 땅이 본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희년을 연상케 한다(참조 레 25:10, 15, 24 주석).

여기서 예수는 사 61:1, 2 낭독을 마쳤다. 그는 다음 구절 즉 애국심이 강한 유대인들에게는 전체 구절의 절정인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이라는 구절을 읽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구원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며 징벌은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맹신했다(참조 시 79:6). ‘구원은 하나님께 대한 개인적인 순종의 문제가 아니라 국적의 문제다라는 유대인들의 개념 때문에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명의 진정한 본질에 대해 눈멀어 그를 거절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막강한 군대를 진두 지휘하는 권세 있는 왕으로 나타나 자신들의 대적을 무찌르고 온 세상을 이스라엘의 세력 아래로 이끌어 들일 메시야를 기대하였다(시대의 소망, 30, 236,).

이 근본적인 오해는, 유대인들이 고난받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들을 고의적으로 간과하고 재림의 영광을 가리키는 예언들을 잘못 적용한 사실에서 기인했다(시대의 소망, 30). 이렇듯 그들을 영적인 맹목으로 이끈 것은 교만과 편견 그리고 선입견이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65, 212, 212, 242). 그들은 한 사람에게 비치는 빛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빛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에 눈멀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예비되어 있다는 생각에 잠기기를 좋아했으며, 따라서 예수가 그런 말을 꺼내지도 않아서 놀랐을 것이다. 예수가 설교 중에 이방인들의 믿음을 칭찬하고 정작 유대인에게는 믿음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암시했을 때, 청중들은 미친 듯이 분노하고 포악해졌다(참조 25~29).

 

21. 말씀하시되. 예수는 일반에게 랍비 즉 선생으로 간주되었다(참조 요 1:38, 49; 3:2; 6:25). 특별히 나사렛이 그의 고향이며 어린 시절 바로 이 회당에서 성경을 읽었던 것을 감안할 때, 방문한 랍비로서 그가 설교를 부탁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참조 4:16 주석). 누가는 특별히 22절에 기록된 결과와 28, 29절의 과격한 반응을 불러일으킨 강론을 선별하여 그리스도가 이때 전달한 내용에 대한 개요를 제시하였음이 분명하다.

 

이 사람이아니냐. 헬라어에서 이 질문의 형태는 질문자가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의 질문은 의혹이 아니라 놀라움을 표현한 것이다. 여러 해에 걸쳐 예수를 알고 지냈기 때문에, 그들은 그가 자신들처럼 그렇게 결점 많은 사람은 아니겠지만 자신들과 같은 보통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자신들이 익히 알고 있는 그가 약속된 분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그들은 믿음의 결핍으로 당혹스럽게 되었다.

 

요셉의 아들. 예수는 일반적으로 요셉의 아들로 여겨졌다(참조 2:33, 41; 3:23 주석). 예수의 모친과 형제 자매들은 여전히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으며(참조 마 13:54~56; 시대의 소망, 236), 틀림없이 그들도 청중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자문하면서 시선을 자연스럽게 예수의 가족들이 있는 방향으로 돌렸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마리아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참조 2:34, 35, 51).

눅 4:1-13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10]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사단은 자기가 정복하지 못하면 정복당할 것을 알았다. 이 투쟁의 결과는 너무나 중대해서 그와 동맹한 천사들에게 위임할 수 없었다. 그가 직접 싸움을 싸워야 했다. . . .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이 투쟁이 그들 자신의 생애와 특별한 관계가 없는 것처럼 바라본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에 거의 관심이 없다. 그러나 모든 인류의 마음 가운데서 이 투쟁이 되풀이 된다. 그 누구도 사단의 공격을 받음 없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악의 대열을 떠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대항하신 유혹들은 우리가 막아 내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이 시험들은 그의 품성이 우리의 성품보다 뛰어나신 것만큼 더 극심하게 임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심히 무거운 죄 짐을 지시고 식욕과 세상에 대한 사랑과 참람으로 인도하는 과시를 사랑하는 시험에 대항하셨다. 이 시험들은 아담과 하와를 정복하였고, 우리들을 쉽게 정복하는 것들이다.”(소망, 116-117)

 

수님은 시험은 어떤 것이었으며,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본문연구 (참고: 시대의 소망 제 12-13장)

  1. 예수님이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은 무엇인가? 괄호 안에 성결절을 기입하여 보라.
    첫 번째 시험(         )                         두 번째 시험(          )                         세 번째 시험(          )
         마귀의 유혹(          )                          마귀의 유혹(          )                         마귀의 유혹(          )
         주님의 대응(          )                          주님의 대응(          )                         주님의 대응(          )
    요약: _______________________ 요약: _______________________ 요약
    : 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시험(temptation)”유혹의 의미이다.
    cf. 마귀의 유혹의 말의 길이에 비해 예수님의 대답은 언제나 단순하였다.
  2. 마귀가 침례직후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1) 광야로 가신 예수님을 시험한 까닭은 무엇 인가? , 이 때를 선택하였는가? (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금식과 기도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9:9을 읽어보라. 모세의 금식과 예수님 의 금식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cf. 40일을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않은예수님의 상태는 어떠했을까? (109:24)

  3. 시험(유혹)에 대한 예수님의 대처는 어떠했으며, 그분이 사용한 말씀은 어디로부터 인용 한 것인가?
    1) 4(8: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8(6: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12(
    6: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흥미롭게도 모두 신명기의 말씀을 암기해 내셨다. 신명기의 기록 목적과 주요 내용은 무엇이며(1:5), 말씀을 어떻게 간직할 것을 명령하였는가?(6:6-9)
    cf. 마귀도 말씀을 사용하였으나(6:13, 91:11-12) 왜곡된 문맥으로 사용하였다.

  4. 13절에서 마귀가 얼마 동안 떠나니라는 말은 어떤 것을 암시하는가?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우리가 당하는 시험과 유혹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승리는 모본이 되는가? (4:7)

 

토의사항    

  1.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시험은 결국 승리가 예정된 것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전 10:13을 참고하여 설명해 보라.

  2. 오늘날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장 큰 시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3. 예수님이 당하신 세가지 시험이 지금 우리가 격는 시험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얘기해 봅시다.

 

가는 예수님의 시험을 가장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분의 승리는 말씀이었다.


성령에게. 탄생할 때부터 예수는 성령의 인도와 지도 아래 있었으나(참조 마 3:16; 2:52 주석), 침례받을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풍성하게 임하여 위탁된 사명을 이룰 수 있도록 지혜와 기능을 부어 주셨다(10:38; 참조 행 1:8). 예수는 지상에 오시기 전에” “그 앞에 제시완전한 계획에 맞추어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한 걸음씩 인도받았다”(참조 시대의 소망, 147; 2:49 주석).

 

마귀. 헬라어 디아볼로스(diabolos)“~을 통하여란 뜻의 디아(dia)밀치다란 의미의 발로(ballo-)에서 왔으며, 이 단어의 형용사는 비방하는을 뜻하며, 명사는 비방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 단어에서 영어의 “devil”(마귀)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70인역에는 대적자란 뜻을 가진 히브리어 사탄(sat.an)이 디아볼로스로 번역돼 있다(참조 슥 3:1 주석). 디아볼로스가 사탄을 지칭할 때는 일반적으로 관사와 함께 나타난다(벧전 5:8은 예외임). 관사가 없는 경우에 그것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6:70; 딤전 3:11; 딤후 3:3; 2:3).

인격을 가진 마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비방하는 자란 뜻의 디아볼로스와 대적하는 자란 의미의 사탄이라는 단어 자체가 마귀가 인격적인 존재라는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는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10:18). 오직 인격적인 존재만이 예수의 시험받는 이야기에 나타난 마귀의 역할을 해낼 수가 있었으며(4:1, 5, 8, 11), 신약의 여러 기자들의 마귀에 관한 진술들을 해명할 수 있다(13:2; 2:14; 4:7; 요일 3:8; 9; 2:10; 20:2, 7~10).

 

시험을 받으러. 헬라어로 페이라조(peirazo-). “~하게 하다”(9:26; 16:7; 24:6 ), 선한 동기(6:6; 고후 13:5)에서 시험하다”, 악한 동기(19:3; 11:16), 특히 죄를 범하게 하려고 어떤 사람을 유혹한다는 의미에서 시험하다”(고전 7:5; 살전 3:5; 1:13)를 뜻한다. 여기서 페이라조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는 시험을 자초하거나 의식적으로 마귀의 시험의 땅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와 홀로 있기 위해, 자신 앞에 놓인 사업에 대해 명상하기 위해 광야로 물러났다.

예수는 인성을 취했으며, 그것과 함께 죄에 굴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함께 취했다(시대의 소망, 117). 그는 인간이면 누구나 당하는 인생의 위험을 겪고 또한 인간이면 누구나 해야 할 싸움을 실패와 영원한 손실의 위험을 무릅쓰고받아들여야 했다(시대의 소망, 49). 오직 그렇게 해야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는 말씀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가 신성을 가졌기 때문에 시험받을 수 없다면 이것은 연극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가 시험을 경험한 것은 인성을 통해서였다(참조 시대의 소망, 686). 만일 그가 당한 시험이 우리가 당하는 시험보다 조금이라도 약한 것이었다면 그는 우리를 도울 수 없을 것이다”(시대의 소망, 117). 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을 참조하라. 또한 /2/40e, 52; 1:14; 4:15 주석을 참조하라.

우리에게는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할수 있는 한 대표자가 아버지 앞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도록 명령받고 있다(4:15, 16). 예수는 인간이 무엇을 견딜 수 있는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으며, 각 개인이 견딜 수 있는 힘에 따라 시험하는 자의 세력을 조절하시며 피할 길을 주신다”(고전 10:13)고 약속했다. 그리스도가 시험의 광야에서 겪은 큰 싸움은 각 사람의 마음의 영토에서 반복되고 있다. 시험 곧 선이나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면 어떠한 성품의 발전도 없다. 우리가 유혹에 설 수 있는 능력은 유혹을 저항함으로써 생긴다.

 

네가 만일. 사단은 예수의 침례를 목격했으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하늘의 선포를 들었다(3:17; 참조 시대의 소망, 116, 119,). 적어도 예수의 겉모습은 그 선포의 진실성에 의문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는 너무도 창백하고 여위었으며, 지치고 굶주렸기 때문에(참조 시대의 소망, 137) 외모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네가 만일이라고 한 사단의 말은 예수에게 너는 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라고 질문하는 격이다. 에덴동산에 있던 하와로 하여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 명백하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 유혹자의 목적이었다. 그와 동일한 방법으로 사단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하게 드러난 진리들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남녀들에게 접근한다. 오직 그들의 믿음이 예수처럼 기록되었으되주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말씀에 굳게 선 자들만이 마귀의 계교에 대항하여 설 수 있을 것이다. 유혹은 항상 명백하게 알려진 진리에 도전한다. 또한 상황에 따라서는 원칙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제안한다.

 

하나님의 아들. 40일 전에 요단강에서 있었던 아버지의 말씀의 분명한 메아리(참조 3:17 주석). 사단은 자신이 하늘에서 쫓겨나기 전에 그렇게도 통렬히 비난했던 그분에게 거만하게 업신여기는 태도로 말했다. 사실상 당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보다는 마치 금방 죽음을 맞이할 인간처럼 보였다(시대의 소망, 118, 137,). 이때 사단이 했던 말은 조롱하던 유대 지도자들의 입을 통해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 다시 한 번 발해졌다(27:40). 참조 마 23; /1/35e; 1:1~3, 14 주석.

 

명하여. 예수는 공생애 기간 중에도 기적적인 능력을 보여 메시야임을 입증하라는 요구를 수시로 받았다(12:38; 16:1; 8:11, 12; 2:18; 6:30). 그러나 그는 그러한 도전이 있을 때 이적 행하기를 거절했다. 오히려 모든 이적들은 그가 돕기를 원하는 백성들의 특별한 필요를 채우기 위해 베풀어졌다. 사실, 천연계의 힘과 원소들은 그들의 창조주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다(8:26; 2:6~11 ). 그러나 예수는 우리에게는 소용도 없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해 하늘의 능력을 요청하지 않았다.

 

이 돌들. 아마도 사단은 예수의 발 밑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둥글넓적하게 생긴 동양 지역의 떡과 비슷한 돌들을 가리켰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단은 금단의 열매를 따서 하와의 손에 넣어 주었던 것처럼(부조와 선지자, 55), 돌 가운데 하나를 집어(참조 눅 4:3) 예수에게 주었을지도 모른다.

 

. 여기서 떡은 인간의 육체적 본성이 가진 물질적 필요를 대표한다. 떡은 생명에 대한 물질주의적 철학, 곧 인간의 생명은 자신의 소유가 된 풍부한 물질에 달려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오직 떡으로만 산다고 가정하는 철학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식욕에 호소하는 것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하는 토대가 되었던 것처럼, 사단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공격을 여는 토대가 되었다. 인간에게 닥쳐오는 많은 시험들이 이 부류에 해당한다. 첫 번째로, 사단은 인간의 육체적 본성에 대한 시험이 더 손쉽게 즉각적인 성공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두 번째로, 그는 육체적으로 쇠퇴하고 약한 곳에 유혹을 집중하는데, 육체적 본성과 감각을 통해서 전 존재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파멸을 피하기 위해서, 육체적 본성은 끊임없이 마음과 의지와 이성이라는 더 높은 힘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 육체는, 마음과 영혼이 계발되고 성품이 형성되는 매개체이다(치료봉사, 130). 이 시험을 더욱 사실적으로 만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음식을 만들어 배고픔을 채울 능력을 지녔다는 것에 있다.

이 시험은 그리스도에게 아버지의 뜻을 무시한 채 잘못된 방법으로 배고픔을 채우라는 사단의 제안에 있었다. 사단의 제안은, 전혀 배고픔으로 고통받을 필요가 없는데도 하나님이 그의 아들이 이것을 겪도록 내버려 두실 만큼 몰인정한 분이라고 암암리에 인식시키는 데 있었다.

 

사람이살 것이 아니요. 8:3에서 인용함.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1,500년 전에 모세에게 계시했던 진리이다. 시험이 지나갔을 때, 예수는 거의 죽음에 이른 것처럼 보였다(시대의 소망, 131). 사단은, 그리스도가 자신이 가려고 하는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예수는 대답을 통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죽는 것이 그것을 떠난 상태로 사는 것보다 더 낫다고 단언했다. 이런 형태의 시험을 통해 사단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순종하기를 갈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압력을 행사한다. “만을 의지하며 그것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결단코 진정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마침내는 죽을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 없는 은 죽음을 가져올 뿐 생명을 가져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첫 번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그리고 의심없이 굴복해야 함을 천명한다. 예수는 말씀이 지닌 구속력(拘束力)을 받아들이고, 물질적인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기를 거부한다. 영적인 것들은 초월적인 가치와 중요성을 가진다. 참조 마 6:24~34; 6:27 주석.

 

떡으로만. 인간은 동물 이상이다. 그의 가장 긴급한 필요는 육체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예수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18:36)고 확언한다. 그런데 예수는 모든 가능한 방법을 다 동원하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일의 중요성을 지지하면서도(25:31~46), 이것이 메시야인 그분에게 드리는 충성과 헌신을 대신할 수는 없음을 분명히 말했다(26:11). 사람이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6:8)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22:39). 그러나 그는 또한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6:8). 마귀에게 준 그리스도의 대답은 어떤 형태를 막론하고 생명에 관한 물질주의적 철학을 정죄한 것이다. 물질을 소유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며, 바람직한 인생의 목표는 더더욱 아니다

 

5. 순식간에. 헬라어 스티그메(stigme-). 문자적으로는 똑똑 두드리다”, 따라서 따끔하게 찌르다혹은 구멍을 내다를 뜻하는 스티조(stizo-)에서 파생했다. 스티그메는 어떤 시점을 의미한다. 아마도 잠깐 사이혹은 시계가 똑딱하는 순간일 것이다. 틴덜역에는 눈 깜짝할 사이로 되어 있다.

 

6.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이 일은 아담의 범죄로 이루어졌다. 타락 후에, 사단은 아담이 창조주에게 충성할 때는 이 세상에 대한 권한이 그에게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는 자신을 이 세상 임금으로 칭했다(시대의 소망, 114). 사단은 자신을 아담이 하늘에 있는 주권자요 대표로 선택했었다고 암시했다. 헬라어 본문에서 여기에 주어진 대명사들의 위치는 강조를 나타낸다. “네게 내가 줄 것이다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네가, 만일 네가 내게 절하면. 사단이 이렇게 제안할 때 강한 몸짓을 하는 것이 보이는 듯하다.

 

마귀가 ... 얼마동안 떠나니라. 영원히 떠난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4:13)이다. 유아 시절부터 그의 생애는 흑암의 권세에 대항하여 싸운 긴 투쟁의 생애였다”(시대의 소망, 71, 116,; 참조 눅 4:2 주석). 마귀는 그리스도를 시험했으나 억지로 죄를 범하게 할 수는 없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가장 강렬한 시험이라도 우리가 죄를 범하기로 동의하지 않는 한 또는 동의할 때까지 그것은 무력하다(참조 교회증언, V, 177). 우리가 마귀를 대적할 때 그는 우리를 피할 것이다(4:7). 그리스도는 전쟁의 승리자로 개선했고 마귀는 패배한 원수로 떠나갔다.

 

요한의 봉사와 예수님의 침례, 누가복음 연구 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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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3:1-22(23a)

[1]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3]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7] 요한이 침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10]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 세리들도 침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14]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

[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8] 또 기타 여러가지로 권하여 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19]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21] 백성이 다 침례를 받을새 예수도 침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23a]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심 세쯤 되시니라

 

 

“예수께서 침례를 받기 위해 오셨을 때에 요한은 전에 어떤 사람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품성의 순결성을 그에게서 보게 되었다. 그가 계신 그 자리는 분위기까지도 거룩하고 엄숙하였다. 요한은 요단강에서 자기 주위에 모여들었던 무리들 가운데서 범죄에 대한 험악한 이야기를 들었고 숱한 죄 짐에 눌린 사람들을 만난 적은 있었으나 그처럼 신령한 감화력을 나타내는 사람과 접촉해 본 적은 결코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다 메시야에 관하여 요한에게 계시된 것과 부합되었다.”(소망, 110)

 

수님의 구원의 사역은 기름부음으로 시작되었다. 그분에게 침례를 베푼 특권은 요한에게 주어졌다.

 

본문연구

  1. 1-2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각 누구이며 오늘날 어떤 지위에 비교될 수 있을까?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고위관직들의 이름을 나열한 후에 마지막으로 사가랴의 아들 요한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어떤 효과를 나타내 주고 있는가?

  2. 3-6절에서 요한의 사명 혹을 기별을 찾아 요약해 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7절에서 요한이 침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강하게 꾸짖었는 데, 그들이 누구였기에 그렇게 했는가?
    3:7 참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회개의 합당한 열매”(8)10-14절에서 사람들과 세리와 군병들에게 각각 어떻게 적용되는가?
    cf. 우리 각자에게는 어떻게 회개가 실천 될는지 이야기 해 보자.

  4. 누가가 21-23a절에 쓴 예수님 침례 받으신 기록이 갖는 중요한 의의는 무엇인가?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누가의 기록에는 마태(3:13-17)와 마가(1:9-11)의 기록에는 없는 침례받으실 당시의 예수님의 나이에 관한 언급이 있다.
    cf. 9:25절에 예언된 메시야(그리스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출현의 시기는 에스 라 7:11-26에 기록된 아닥사스다 왕의 중건령이 내린 BC 457년부터 69이레(483) 후인 AD 27년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BC 4년경이며, 누가는 “30세 즈음에침례를 받으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예언은 정확하게 30세의 해인 AD 27년에 기름부음 즉 침례 시에 성령이 부어진 사건으로 성취를 이룬 것이다.

 

토의사항    

  1. 요한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말씀”(2)이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 우리에게 임하도록 하는기 위한 준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2. 요한의 기별에 사람들이 반응한 것처럼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들은 지금 무엇을 하여야 할까요? 이야기해 보자.

 

가만이 예수님의 침례와 성령의 부어짐이 30세에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누가는 예수님에 관한 많은 자료들을 살피는 가운데, 구약의 예언들을 깨달았을 것이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벧후 1:19)

 

1. 디베료. 2:1에 나타난 아구스도를 제외하고, 사복음서 전반에 걸쳐 가이사에 대한 언급은 항상 디베료 가이사에게 적용된다. 그는 엄격한 규율, 관대한 세금제도 그리고 매우 효율적인 행정으로 알려졌다. 그는 무역과 교역을 장려했다. 갈릴리 호수는 그를 기념하여 디베랴 바다(6:1 )로 개명되었다.

 

열다섯 . 디베료의 통치 1년은 AD 14년 가을에 마쳐진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열다섯 해AD 27년 가을에 시작하여 AD 28년 가을까지 계속되었을 것이다. 시대의 소망, 233에 의하면 예수의 침례는 AD 27년 가을에 있었고, 따라서 디베료의 열다섯 해의 아주 이른 시기에 있었다.

 

본디오 빌라도. AD 6년에 있었던 아켈라오의 파면과 추방에 뒤이어 로마가 임명한 일련의 총독들 가운데 다섯 번째 사람. 빌라도는 AD 26년경에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Gratus)를 계승했지만 AD 36년경에 직권 남용의 이유로 디베료에 의하여 파면되었다. 참조 제9, 142, 148.

 

헤롯. 이 사람은 자기 아버지 헤롯 대왕이 갈릴리와 페래아(Peraea)의 분봉왕으로 임명한 헤롯 안티파스(참조 마 2:22 주석)이다. 그의 어머니는 사마리아인이었다. 이 사람은 이복 형제의 부인인 자신의 조카 헤로디아와 결혼한 헤롯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반대한 결합이었고 결국 안티파스는 이 때문에 침례자 요한에게 비난을 받았다(3:19, 20). 예수는 그의 성격을 저 여우라고 묘사하고(13:31, 32) 그의 악한 영향을 헤롯의 누룩”(8:15)으로 언급했는데, 그것은 적절한 표현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빌라도가 예수를 바로 이 헤롯 안티파스에게 보냈다(23:7~15). 그는 한낱 분봉왕에 불과했으나 실제적으로는 아버지 헤롯 대왕이 죽은 후부터 AD 39년에 폐위될 때까지 왕으로 통치했다(Josephus Anti- quities xvii. 11. 4; War ii. 6. 3 [94, 95]).

 

빌립. 헤롯 대왕의 아들인 헤롯 빌립(참조 제9, 51)으로, 아마도 헤롯 대왕의 아들들 가운데 가장 공정하고 현명한 사람이었을 것이다(Josephus Antiquities xvii. 4. 6). 그는 막 6:22~25에 기록된 사건이 있은 지 얼마 후에 헤로디아와 헤롯 빌립 세 사이에서 태어난 딸 살로메와 결혼했다(Josephus Antiquities xvii. 5, 4). 빌립은 헤롯 가문에서 처음으로 주화에 아구스도와 디베료의 형상을 새겨 넣은 사람이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우상숭배로 간주했지만, 다행히도 빌립의 신민들은 거의 전부가 이방인들이었다. 그는 헤르몬산 기슭에 디베료 가이사와 자신을 기념하여 그 이름에 따라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를 재건했다(Josephus Antiquities xviii. 2. 1; War ii. 9. 1 [168]). 그는 율리아 벳새다(Bethsaida Julias) 성읍을 재건했으며, 아구스도의 딸을 기념하여 그렇게 명명했다. 갈릴리 호수의 북단에 위치한 벳새다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빌립의 고향이다(참조 요 1:44; 12:21). 빌립은 BC 4년부터 AD 34년까지 37년을 통치했다.

 

빈 들. 공관복음서 모두 요한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잘 모이는 장소를 피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그가 광야에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마도 요한이 유년과 청년 시절 대부분을 보냈던 유대 광야에서 요한에게 임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가 설교를 시작하고 침례를 베푼 곳은 여리고 맞은편에 있는 페래아(Peraea)이다.

 

요한. 오직 누가만 요한을 사가랴의 아들로 지적한다. 요한은 아마도 자신의 사역을 AD 27년의 유월절 기간에 시작했을 것이다(참조 제9, 144).

 

죄 사함. 헬라어 아페시스(aphesis). 회개, 자백 그리고 용서는 침례보다 앞서며,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하는 일 곧 품성의 골짜기를 메우고 산들을 낮아지게 하는 일들을 이루기 위한 첫 번째 단계들이다(3:4, 5; 참조 마 3:6). 누가는 기타 신약의 모든 기자의 용례를 합한 것보다 더 자주 아페시스를 사용했다.

 

회개의 침례. 요한이 전파한 회개는 과거의 죄에 대한 자백 이상을 포함했다(참조 시 32:1). 그의 권면에 분명히 나타난 대로(3:9~14), “회개에는 성경에 이미 계시된 의의 원칙들을 실천하는 새로운 삶이 수반되어야 했다(참조 미 6:8).

 

자식들 (generation). 이 말은 특별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전달되었다. 요한이 자신의 설교에 사용한, 평범하고 일상적인 시골 장면들을 강조하는 생동감 넘치는 이미지는 구약의 요엘과 아모스 같은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들을 연상시킨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요한은 힘있는 전도자였다. 사람들에게 주의 오심을 준비하도록 하기 위한 요한의 호소가 있은 후에 그들은 그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물었다. 그 대답으로 요한은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죄를 각 개인이나 그룹들에게 지적해 주고 각 사람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요한은 선한 사람으로서 유대인들에게 인간 상호에 대한 의와 하나님께 대한 경건을 행하라고 명했으며 침례받기 위해 나아오라고 권면했다”(Antiquities xviii. 5. 2).

 

모든 사람들이. 요한의 사명은 수 세기 동안 잠자고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우고, 새날이 동터오고 있다는 희망으로 그들의 마음을 불타오르게 하고, 모든 시대의 소망인 오시는 분을 위하여 준비하도록 촉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과업에서 탁월한 성공을 거두었다. 사실, 요한은 유대 지도자들까지도 자극하여 그들이 그의 기별을 조사할 정도가 되었다(참조 요 1:19~25). “모든 사람들이요한에 대하여 알고 있었으며, 그에게 올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나아왔다.

 

혹 그리스도신가. 유대 지도자들은 종종 예수에게 메시야라는 증거로 이적을 요구했다(참조 마 12:38; 16:1 등 주석). 그러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10:41). 요한의 볼품없는 옷차림은 왕의 위엄을 닮은 데가 없었다. 사실 요한은, 선지자들이 말한 바 그리스도가 속할 유대 족속(참조 마 1:1 주석)이 아니라 레위 족속이었다(참조 1:5 주석).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가 그러한 주장을 개진하기만 한다면 메시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산헤드린 회원들조차도 그가 약속된 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참조 요 1:19~20). 유대 나라는 이보다 더 큰 찬사를 요한에게 돌릴 수 없었을 것이며, 그의 기별의 능력에 대하여 더 웅변적인 증거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요한의 선포는 너무나 효과적이어서 사람들이 그를 메시야로 오해할 정도였다!

 

요한을가두니라. 요한은 2년여 동안의 사역 후, AD 29년 이른봄에 투옥되었다(참조 제9, 142~144; 3:1 주석). 헤롯이 요한을 투옥했다는 사실은, 요한이 체포될 당시에 요단강의 페래아 쪽에서 설교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참조 3:3 주석).

헤롯에게는 요한이 무엇을 말하든지 사람들이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였으며, 따라서 그는 민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다(Antiquities xviii. 5. 2; 시대의 소망, 360). 요세푸스는 다른 곳에서 안티파스와 결혼한 헤로디아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요한의 투옥이 헤로디아의 문제와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Antiquities xviii. 5. 4). 그러므로 요세푸스는 헤롯이 요한을 투옥한 이유로 일반에게 알려진 사실을 기록했을 것이다. 헤롯이 유대인들 전체가 반대하는 헤로디아와의 개인적인 문제를 요한을 투옥한 이유로 공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참조 마 3:17 주석. 베자 사본(Codex Bezae)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여기서 누가는 예수의 참된 신성을 확언하지만 곧바로 그의 참된 인성을 증거한다(23~28).

 

삼십 세쯤. 누가는 예수가 침례받을 때의 정확한 나이를 밝히지 않고 다만 삼십 세쯤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누가의 언급과 관련지어 말한다면, 정확하게 30세보다 한두 살쯤 많거나 적을 수도 있다. 유대인들에게 30세는 일반적으로 한 사람이 완전한 성숙에 도달하는 시기라고 여겨지며, 따라서 공적인 삶의 책임을 짊어지기에 적합한 나이였다. 참조 제9, 141, 142.

예수의 탄생이 BC 5년 가을에 있었다면(참조 2:6, 8 주석), 유대인들의 계산법에 따라(참조 2:42 주석) 그의 서른 번째 해는 AD 25년 가을에 시작되어 AD 26년 가을에 마쳤을 것이다(참조 1절 주석). 이것은 예수가 30되었다는 누가의 대략적인 진술과,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해 알려진 모든 연대기적 자료들에 완전히 조화된다. 그러므로 누가는 여기서 정확한 연대기적 진술을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가 침례를 받고 그의 공적 봉사를 시작할 무렵 성숙한 나이였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예수님의 유소년기, 누가복음 연구 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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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21-40

[21]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22]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39]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그의 초기 생애에 관한 간단한 기록은 실로 의미 심장하다.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예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의 얼굴에서 비취는 햇빛 아래서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눅 2:52)셨다. 그는 정신이 민활하고 통찰력이 있었으며, 나이에 비하여 생각이 깊고 지혜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품성에는 균형잡힌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의 마음과 육체는 아이의 성장 법칙에 따라 점점 발육하였다.”(소망, 68)

 

수님의 성장기는 어떠했을까?

 

본문연구

  1. 누가는 예수의 성장기에 대하여 몇 세부터 몇 세까지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가?
    21, 22, 40-42, 5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결례(정결예식)의 날의 시기에 관하여는 레 12:2-6을 참고하여 계산해 보라.
    cf. 2:1-12에 기록된 동방박사들의 방문은 아직 베들레헴 탄생 시에 있던 일이다.
    cf. 유대에서는 12세가 되는 해를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분기점을 여겼다.

  2. 24절에서 예수의 부모가 비둘기로 봉헌 제물을 드린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2:8, 5:11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23절의 첫 태생의 의미를 출 13:2,12을 통해 설명해 보라.

  3. 25-35절에 나오는 시므온의 기록을 통하여 그가 평소에 드린 기도의 제목은 무엇이었을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4. 시므온과 여선지자 안나가 성령으로써 아기 예수에 대하여 한 말은 어떤 의미인가?
    29-32, 38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37절의 안나의 나이는 84세 혹은 100세 이상으로 계산된다.

 

토의사항    

  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성령에 감동된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3. 예수님의 성장기를 통하여 우리의 초,,고등학교 시절 가정과 학교와 교회에서의 교육은 어떠했는지 서로 이야기 해 보자.

 

가만이 예수님의 어린시절부터 청소년기에 관한 자세한 성장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30세 이후보다는 훨씬 적은 분량이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 가정에서의 교육, 그리고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의 사명을 확신하는 과정을 충분히 살펴 볼 수 있다.

“예수는 우리의 모본이시다. 예수의 유년 생애의 교훈은 주목하지 않고 지나치면서 그의 공생애 기간에 대하여 관심을 집중시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가 모든 유년들과 청소년들의 모본이 되신 곳은 바로 그의 가정 생활에서였다. 그가 자기를 낮추사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가 비록 비천한 처지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는 생애의 평범한 일들 가운데서 그의 하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높이고 영광 돌리기 위하여 생애하셨다.”(소망, 74)

22. 결례. 본문상의 증거는 그들의 결례”(제임스왕역에는 그녀의 결례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라는 독법을 지지한다. “그들의라는 단어는 예수와 마리아 또는 요셉과 마리아를 가리킬 것이다. 만일 그들의라는 단어가 예수를 포함한다면 성전에서의 그의 봉헌이 어떤 의미에서 마리아의 결례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처럼 보인다. 만일 요셉과 마리아의 결례로 본다면 어떤 의미로 요셉은 가정의 가장으로서 마리아가 결례 의식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책임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그들”(요셉을 포함한)이라는 대명사를 동일한 대상을 나타내기 위해 쓴 것으로 보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요셉과 마리아의 결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레위기의 규례에 의하면 사내아이를 낳은 어머니는 40일간, 여자아이를 낳은 어머니는 80일간 부정하다고 규정한다(참조 레 12). 이 기간에 여자는 집에 머물러 있어야 했으며 공적인 종교행사에 참석해서는 안 되었다. “결례가 필요한 사람은 아이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부정한 기간이 끝나고 어머니와 아들은 함께 성전으로 가야만 했는데, 어머니는 정결케 되는 의식을 위해, 아들은 봉헌을 위해 성전으로 나아왔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약 20리 떨어진 예루살렘까지 간 것은 이중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 방문은 분명 동방박사가 방문하기 전에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 이후에는 요셉과 마리아가 예루살렘을 방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은 동방박사의 방문 거의 직후에 애굽으로 가기 위해 베들레헴을 떠났다(참조 마 2:12~15).

 

23. 아기를 데리고. 모든 맏아들은 하나님께 봉헌해야 했다. 이것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맏아들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인정하고, 출애굽 당시에 초태생을 구원한 사건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행되었다(참조 출 13:2, 12; 3:12, 13 주석). 맏아들은 5세겔의 속전(贖錢)을 주고 도로 사야 했다(18:15, 16). 이 금액은 로마의 20데나리온쯤 되는데 노동자의 20일치 임금에 해당하였다.

 

24. 비둘기. 요셉과 마리아가 좀 더 부요했다면, 번제를 위해 새끼 양을 가져왔을 것이다(참조 레 12:6). 그들은 가난한 자의 제물인 두 마리의 비둘기를 가져왔다. 한 마리는 번제물로, 다른 한 마리는 속죄 제물로 가져왔다(참조 레 1:14; 5:7 주석; 12:8).

 

25. 이스라엘의 위로. 이 표현은 유대인의 일반적인 기도 형식의 한 부분이다. “내가 이스라엘의 위로를 볼 수 있습니까내가 메시야를 볼 때까지 살 수 있을까요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위로는 구세주에 대한 희망을 안위라고 표현한 구약의 여러 메시야 예언을 반영한다(참조 사 12:1; 40:1; 49:13; 51:3; 61:2; 66:13 ).

 

기다리는. 시므온은 분명히 사가랴와 엘리사벳(1:6, 67), 요셉(1:19), 마리아(1:28), 목자들(시대의 소망, 47), 안나(2:37), 동방박사(2:11; 시대의 소망, 59), 아리마대 요셉(15:43) 그리고 다른 몇몇 사람들(2:38)처럼 겸손하고 성경을 경건하게 연구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속했다. 하나님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이런 신실한 사람들에게 메시야의 출현을 알려 주었다(참조 히 9:28).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나타나심”(2:13)을 기다리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특권이다.

 

26. 죽지 아니하리라. 각 시대를 통하여 경건한 사람들은 구세주에 대한 소망의 성취를 볼 때까지 생존하고자 하는 희망을 소중히 간직해왔다. 하나님은 이 소망을 당신의 신실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밝히 타오르게 하고자 했는데, 그 이유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 소망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생애를 성별하도록 이끌기 때문이었다(참조 요일 3:2, 3). 그러나 시므온의 시대에 경건한 자들은 예언을 통해 자신들의 세대에 메시야를 볼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27. 성령의 감동으로들어가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25)하여 지금까지 하늘이 그의 길을 비춘 빛 가운데서 걸어왔고, 따라서 그의 눈은 더 큰 빛을 받기 위해 열려 있었다. 잠깐 동안 어린 예수를 자기 팔에 안았던 제사장과 비교할 때 시므온은 얼마나 다른가!(참조 시대의 소망, 52). 수많은 다른 동료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이 제사장도 성경에 계시된 원칙대로 살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참조 호 4:6) 성경을 연구했지만 허사였다(참조 시대의 소망, 30). 결과적으로 그 제사장은 생명의 빛인 분과 얼굴을 마주 대했지만 그의 영적인 눈은 완전히 멀어 있었다(참조 요 1:7~11). 이미 나타난 빛이 주는 유익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더 큰 빛을 위해 준비되지 못했다.

 

29.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시므온은 믿음으로 구약의 메시야 언약이 어린 예수를 통해 성취되는 것을 보았을 때 자기 마음의 소망이 실현되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예수 외에는 채울 수 없고 만족시킬 수 없는 공허함과 갈망이 있다. 우리도 시므온과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주의 그리스도를 볼 때까지는 쉴 수 없다. 시므온은 자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는 고대하던 분을 살아서 만났다. 그에게는 더 이상의 희망이나 요구가 없었으며, 따라서 그는 죽음이 가져다줄, 노고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준비가 되어 있다. 26절 주석을 참조하라.

 

기이히 여기더라. 단순히 놀랐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천사가 이미 요셉(1:20)과 마리아(1:26, 27)에게 동일한 기별을 가지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더욱이 엘리사벳이 영감받은 말로 명확하게 마리아에게 일러 주었다(41~45). 또한 요셉과 마리아는 목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2:20).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예수에게 부여한 특별한 임무가 영감의 기별에 의해 더욱 분명해짐에 따라, 아이 예수가 메시야라는 증거가 잇달아 나타남으로 그들의 놀라움은 증폭되었다. 또한 그들은 이 낯선 사람도 그 위대한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놀랐을 것이다.

 

35. . 헬라어 롬파이아(rhomphaia). 일반적으로 트라키아인의 장도(長刀)와 같은 큰칼을 말한다. 롬파이아는 로마인들의 단도(短刀)를 가리키는 신약의 흔한 단어인 마카이라(machaira)와 구별되어야 한다. 롬파이아는 70인역에 골리앗의 칼로 나온다. 아마도 롬파이아는 마카이라보다 더 무서운 무기로서 십자가 사건에서 마리아의 마음을 찌른 슬픔을 비유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것 같다(참조 요 19:25; 시대의 소망, 744, 752,). 신약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고통을 예시하는 이 표현은 사 52:14; 53:12의 예언을 반영하고 있다. 시므온의 신비스런 이 표현은 틀림없이 다가올 사건들에 대한 오싹하고 불길한 전조처럼 마리아의 생각을 스쳐갔을 것이다. 더욱이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이 말을 했다는 사실은, 요셉이 예수가 갈바리 십자가에 달릴 때 현장에 목격자로 있지 않을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다른 모든 유대인처럼, 마리아도 분명히 예수가 이 땅에서 다윗의 보좌에 앉아 영광스럽게 통치할 것이라고 기대했다(참조 1:32).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역시 이 기대를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그들의 기대는 십자가의 절망을 더욱 쓰라리게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써 마리아가 무엇을 예상해야 할 것인지를 미리 통고해 주신 것이다.

 

36. 안나. 헬라어 한나(Hanna). 히브리어 한나(H.annah, 참조 삼상 1:2 주석)에서 나온 말. 이 나이 많은 성도는 선지자학교의 설립자인 사무엘의 어머니와 이름이 같다. 안나가 계속적으로 성전에서 기거한 사실은 그녀가 하나님을 섬긴 사랑이 어떠했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안나처럼 미미한 인물에 관해서도 누가가 비교적 상세하게 전기적인 필치로 설명한 것은 누가의 기사가 지닌 역사적인 성격을 입증한다.

 

바라는사람. 이 수수께끼 같은 표현은 예언을 연구하여 때가 찬(4:4; 참조 눅 2:25 주석; 9:24~27; 시대의 소망, 34, 35,)을 알고 있는 소수의 진지한 무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말하니라. 헬라어 시제에 의하면 계속하여 말하다.” 안나는 지금까지 장차 강림할 메시야를 가리키는 예언을 했으나 이제 그녀는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메시야가 강림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었다.

 

돌아가. 누가는 박사들의 방문과 애굽으로 피신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는데, 이 두 사건은 갈릴리로 돌아오기 전에 있었다(참조 마 2:1~23). 이와 같이 이야기의 상세한 전모를 다 기록하지 않고 생략한 경우가 행 9:26에 있는데, 여기서 누가는 사울이 즉시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간 것처럼 나타냈다. 그러나 갈 1:17, 18에 의하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전에 3년의 간격이 있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동방박사들의 방문이 성전에서 봉헌한 이후에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그 이유는 요셉이 이미 헤롯을 피해 애굽으로 도망하라는 경고를 받은 상태에서 마리아와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갔다는 것은 믿기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이 가족이 나사렛에 돌아왔을 때 헤롯은 이미 죽었고 아켈라오가 대신 통치하고 있었다(참조 마 2:19~23).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아켈라오는 BC 4년부터 AD 6년까지 재위하였으므로 이 기간 안에 나사렛으로 돌아왔음이 틀림없으며, 아마도 아켈라오의 통치가 시작된 직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40. 아기가 자라며. 51, 52절이 예수의 청년기와 장년 초기를 다루고 있듯이, 이 구절은 열두 살 때까지의 어린 시절을 다루고 있다(42).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품성의 발달은, 단 한번도 죄에 굴복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는, 보통의 과정을 따라 성장해갔다. 그는 보통 어린이나 청년들처럼, 가족사회 안에서 살았다. 어떤 결점도 그의 성장 과정을 훼손하지 않은 것 외에는, 이 기간에 체력과 지성, 영성과 사회성(참조 52절 주석)이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성장하였다. 마치 예수의 완전함이 그의 신성을 입증하듯 성장 과정은 그의 참된 인성을 입증한다.

 

예수의 탄생, 누가복음 연구 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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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1-20

[1]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18]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20]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cf) 가이사 아구스도(Augustus, BC 63. 9. 23-AD 14. 8. 19) - 로마의 초대 황제(BC 27-AD14).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

 

cf) 표적(標蹟)(12) - "sign". 한글성경에서는 이적, 표징, 징조 등으로 번역됨. ‘과녁을 뜻하는 표적이 아님.

 

 

“베들레헴의 이야기는 다함이 없는 주제이다. 그 속에는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롬 11:33)이 숨기어 있다. 우리는 하늘의 보좌를 구유와 바꾸시고 경배하는 천사들과의 교제를 외양간의 가축과 바꾸신 구주의 희생에 경탄한다. 사람의 자만심과 자부심은 그의 임재 앞에 견책을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놀라운 겸비의 시초에 지나지 않았다. 아담이 에덴에서 죄를 짓지 않았을 때에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취하는 것은 거의 무한한 굴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인류가 4천 년간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진 때에 인성을 취하셨다. 그는 아담의 모든 자녀들과 같이 유전 법칙이 끼쳐온 결과를 받으셨다. 이러한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는 예수의 육신의 조상들의 역사 가운데 드러나 있다. 그는 이러한 유전을 지니고 우리의 슬픔과 시험을 당하시고 우리에게 죄 없는 생애의 모본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소망, 48-49)

 

수님의 탄생(BC4)은 로마의 첫 황제의 통치(BC27-AD14)때에 있었다. 베들레헴, 구유, 목자들, 이와 같은 단어들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본문연구

  1. 10-11절에서 천사는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무엇이라고 외쳤는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13-14절에도 예수님의 탄생의 기쁨을 천사들이 노래하고 있다.

  2. 그리스도의 탄생의 장소가 베들레헴이 된 까닭은 무엇인가?
    3, 4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신약) 2:5-6, 7:42을 추가로 연구하라.
    cf. (구약) 5:2의 예언과 그리스도의 탄생과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3. 다윗의 족속’(후손)에 대한 분명한 근거 자료를 살펴보라.
    1) 1:1-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3:23-3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4. 아기 예수가 침대가 아닌 구유에 누인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12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토의사항    

  1. 탄생의 소식이 양을 지키던 목자들에게만 알려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목자들을 통하여 마리아는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cf. “유대나라의 제사장과 교사들은 각 시대를 통하여 가장 큰 사건이 이제 곧 일어나려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무의미한 기도를 외우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예배 의식을 거행하였으나 재물과 세상의 명예를 위하여 다투는 가운데 메시야의 나타나심을 위하여는 준비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무관심이 이스라엘 땅에 편만하였다. 이기심과 세상에 몰두한 심령들은 온 하늘을 진동시킨 기쁨에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자를 보고자 갈망하고 있었던 사람은 극소수였다. 이러한 자들에게 하늘의 천사들이 보내심을 받았다.”(소망, 44)

  2.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신 것, 연약한 아기로 태어나신 것,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되신 것을 성육신(成肉身)”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의 신비에 대한 각자의 생각들을 나누어 보라.

 

가는 예수님의 탄생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당시의 황제와 총독, 국가적 호적령 등의 역사적 사료와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와 구유 등의 매우 상세한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누가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그분의 탄생 당시의 상황에 매우 어두웠을 것이다.


1 가이사 아구스도(K* A, 카이사로스 아우구스투).카이사로스는 하나의 인명일 수도 있고 후대적 용법에서처럼 칭호일 수도 있다. 아구스도는 원래 라틴어인데 헬라어로는 보통 황제’(세바스토스, 25:21, 25)로 번역되며 여기서는 인명으로 사용되었다. 아구스도 황제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이다. 그는 B.C. 27-A.D. 14까지 로마의 황제로 있었고 그후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이저의 이름을 따라 가이우스 율리우스 시이저(Gaius Julius Caesar)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B.C. 27년에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위대하고 고귀하며 지극히 숭배받는이란 뜻)라는 칭호를 부여받으며 그후 그는 시이저 아우구스투스로 명명되고 최고의 권위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탁월한 통치 능력과 현명하고 훌륭한 정치 및 행정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점령지에 대한 정책의 일환(一環)으로 점령지의 지방 자치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기도 하며 점령지의 문화와 종교, 생활 풍습등을 인정해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 나라의 법률까지도 로마법에 비추어 무리가 크게 없는 한 인정해 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술. 문화. 건축 등을 장려하기도 했으며 그 자신이 또한 위대한 건축가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정책과 통치로 인해 전에 없이 오랜 세월동안 평화가 지속되었고 그는 자비로운 정치가’, ‘로마의 대부’(代父)로까지 불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최고 승원장(Pontifex Maximus) 또는 대제사장(Highest Priest)이란 칭호를 받아들여 모든 종교의 최고의 위치를 차지했다. 게다가 그는 피살(被殺)된 자신의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이저를 신격화하여 그를 기념하는 사원을 건립하여 그를 신으로 받들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그는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많은 죄를 범하기도 하였다. 한편 탁월한 정치 지도자이며 행정가인 그가 자기에게 속한 나라들이 무질서하다는 것을 알고는 로마에 속한 모든나라들로 하여금 인구 조사를 실시하도록 명령했다. 따라서 그는 인구조사의 실시로 말미암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 5:2의 예언을 성취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Hendriksen).

 

호적하라. 헬라어 아포그라포(apographo-). “기입하다”, “등재하다”, “등록하다또는 명부에 올리다”(참조 시대의 소망, 44). 아포그라포를 세금 징수를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은 적합하지 않고(제임스왕역(KJV)에는 “taxed”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인구 조사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고대의 인구 조사는 대체로 이름과 함께 재산의 등록을 포함하며, 일반적으로 재산세 부과를 위한 기초 자료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용어는 정확하게 과세를 가리키는 말로 보기는 어렵지만 그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로마인들 중에는 조상들이 살던 고향이 아닌, 자기가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호적해도 충분했던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대체로 로마의 호적은 도시에서 시행하는 것처럼 지방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시행하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갈리아(Gauls)에서는 부족별로 호적하였다. 애굽에까지 확대된 로마의 인구 조사 명령으로 백성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해야 했다(참조 참고 문헌 Caird, 265). 유대인에게 지파의 족보가 대단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헤롯 대왕이 자기 영토 내에서는 지파별로 호적하게 하는 것이 최상의 절차라고 결정했을 수 있다. 아무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언급은 로마 당국이 유대 지방의 호적령을 시행하기 위해 헤롯을 지명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되며, 또한 누가의 기록이 신빙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4 다윗의 집 족속 다윗의 동네로.은 단순한 문자적 의미보다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나타내어 민족’, ‘족속’, ‘나라등의 의미를 내포하며, ‘족속은 문자 그대로의 뜻을 나타내나 이 곳에서는 둘이 서로 동의어로 사용된 것 같다. 평행본문 마 1:6, 16에서도 요셉이 다윗의 후손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거니와 본 절에서 다윗의 집 혹은 다윗의 동네라는 말이 거듭 언급되는 것은, 예수께서 육신상으로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함과 아울러 다윗 왕가의 후손이자 만왕의 왕으로 오실 예수께서 일개초라한 시골민의 가정에서 태어남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내포한다. 삼상 20:6에서 베들레헴은 다윗 성이라 불리운다. 다윗은 약 천년전 이곳에서 태어났고, 그가 양떼를 돌보던(삼상 17:15) 곳도 이 마을 근처의 언덕이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7.2 km 떨어졌고 나사렛에서는 약 144 km 떰어진 곳이며 그것의 옛 이름은 에브라다이고 라헬이 장사된 곳이기도 하다(35:19). 이 마을 이름의 뜻은 떡집이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곳이 다윗이 자라난 곳이고 미 5:2에 나타난 대로 메시아가 출생한 곳이라는데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은 태어난 아기가 다윗성에서 난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구유. 아기 예수를 눕히기에 이보다 더 천한 곳은 찾을 수가 없었으므로 아무도 자신이 예수보다 경축을 덜 받으며 인생을 출발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세상의 부에서는 가난했으나(참조 24절 주석) 요셉과 마리아는 믿음에서는 부요하였다. 몇 세기 후에 생긴 전승은 베들레헴 근처의 한 동굴을 예수가 탄생한 장소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의 탄생지는 짐승들이 거하는” “보잘것없는 가옥이었다(시대의 소망, 44). 일반적으로 화가들이 예수 탄생에 관한 그림에 삽입한 소와 나귀는 사 1:3에서 연상한 것으로 생각된다.

 

8 목자들. [목자에게 알림, 2:8~20. 참조 제9, 128]. 단순하지만 신앙심 깊은 이 사람들은 약속된 메시야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그의 오심을 위해 기도하면서 그 밤에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참조 시대의 소망, 47). 그들은 분명 이스라엘의 위로”(25)를 기다리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2:38; 참조 마 1:18; 2:25, 26, 38 주석) 신실한 적은 무리 가운데 속하였다. 하나님은 늘 이런 사람들에게 빛과 진리를 나눠 준다.

오직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들만 배부를것을 기대할 수 있다. 오직 빛과 진리를 찾는 자만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참조 마 7:7; 9:28). 신분의 귀천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다만 마음속에 복스러운 소망”(2:13)을 간직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특권은 자신들의 책임에 충실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지나쳐 겸손하고 신앙심이 깊은 목자들에게로 돌아가고 말았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들과 랍비들까지도 천사들이 목자들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믿으려 하지 않았다. 목자들과는 달리 그들은 알아보기 위해 베들레헴에 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소식을 근거 없는 이야기로 간주하였다(참조 시대의 소망, 63).

 

19 지키어 생각하니라.지키어에 해당하는 쉬네테레이는 원형 쉰테레오의 미완료 시제로서 보호하다’,(기억으로) ‘간직하다의 뜻이며, ‘생각하니라에 해당하는 쉼발루사는 원형 쉼발로의 주격 분사 현재형으로 숙고하다’, ‘생각하다’, ‘만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서 마리아는 사건 전반을 기도하는 마음과 자세로 계속해서 생각하여 그 의미를 되새겼음을 알 수 있다. 예수 탄생을 전후하여 천사로부터 전해진 메시지들이나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사실 등은 마리아로 하여금 아기 예수의 신분과 사명에 대해 거듭 상고해 보게끔 하였을 것임에 분명하다.

 

20 목자가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하나님께라는 목적어를 받는 영광을 돌리다’(돝사조)라는 표현이 누가복음에 자주 쓰인다(5:25, 7:16, 13, 17:15, 18:43, 23:47). 그리고 본 절에서와 같이 어떤 이야기가 찬양으로 끝맺는 것은 누가복음의 특징중 하나이다(24:53). 목자들은 그들이 천사들로부터 들은 바와 실제로 본 것이 똑같음을 알고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린다. 사실 아기의 탄생 자체는 평범한 보통의 사건으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아기 예수는 그 비슷한 시간에 태어난 많은 아기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는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성육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예수의 탄생 예고, 누가복음 연구 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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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26-38

(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30)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 .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 5).
구주의 강림은 에덴에서 예언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이 약속을 처음으로 듣고 이 약속이 속히 성취되기를 고대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맏아들이 구주이기를 바라면서 그 아들을 기쁨으로 환영하였다. 그러나 이 약속의 성취는 지체되었다. 이 약속을 처음으로 받은 사람들은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에녹의 시대로부터 다시 이 약속은 족장들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반복되어, 그의 강림에 대한 소망이 소멸되지 않게 했지만 그는 오시지 않았다. 다니엘의 예언은 그의 강림의 시기를 계시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그 예언을 다 바로 해석한 것은 아니었다.”(소망, 31)

 

수님의 탄생을 알린 천사는 누구였는가? 예수님의 탄생은 꼭 그때여야만 했는가? 그분의 탄생은 왜 복음일까?

 

본문연구

  1. 26절의 여섯째 달의 기점은 언제인가? 천사 가브리엘의 역할은 무엇인가?
    36, 19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가브리엘은 구약에 2(8:16, 9:21), 신약에서는 누가복음에만 2회 언급되었다.
    cf. 예수님의 탄생이 침례요한의 출생시어야만 하는 까닭은 단 9:20-27에서 한 가브리엘 의 예언을 살펴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예수님의 탄생은 BC 4년이다.)

  2. 본문에서 예수님을 일컫는 표현이나 그분의 역할에 관한 말씀들을 찾아 말해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침례요한과 예수의 탄생 예언의 유사점을 찾아보라.(1)
         1) 13절과 31절      2) 15절과 32,35절      3) 19절과 26

  3. 37-38에서 마리아의 대답이 이전의 사가랴와 다른 점은 무엇이었는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토의사항    

  1. 마리아를 처녀로 표현한 의미는 무엇인가? 혹자들은 처녀"virgin"이 아닌 단순히 "young woman"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cf) 34절의 사내를 알지 못하니알다동사는 헬라어 ‘ginosko'이며, 1:25에서 는 동침하다로 번역되었다.

  2. 그대는 요셉과 마리아, 사가랴와 엘리사벳과 같은 특별한 선택을 기다리는가?

 

가는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 관한 것을 침례요한의 경우와 동일한 과정으로 기록하고 있다. , 하나님의 특별한 택하심과 성령에 의한 출생, 그리고 특별한 사명을 가진 생애임을 강조하는 듯하다.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여 동참한 요한의 부모와 예수의 부모들의 역할 또한 중요하였다.

 

<예수의 탄생과 십자가 죽으심을 때를 가리킨 가브리엘의 예언>
단9:24 - 70이레(예언상 490년)
단9:25 - 기산점:예루살렘 중건령(cf. 스7:11-26 아닥사스다 7년=BC457)
           - 7이레와 62이레(69이레) 후에 기름부은 왕이 일어남(침례)
           - 69이레(예언상 483년)이므로 BC457에서 483년 후는 AD27. 그리스도께서 침례받으심(BC4년 출생, 30세에 침례)
단9:26-27 - 69이레 후 한 이래(1주일)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함’
                 - AD27부터 AD34년의 중간인 AD34년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제사와 예물’ 즉 속죄제사가 폐함(마27:50-51)
요19:31 - “큰 날”(명절과 안식일이 중첩된 날)
요19:14 - ‘유월절 전날 예배일’에 죽으심
눅23;44-46 - ‘제9시’(오후3시경)에 운명하심 * 십자가상의 운명 - AD31년 니산월(1월) 14일) 오후 3시경

26 천사 가브리엘이 동네에 가서. 타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는 예수의 탄생과 유년 시절을 소개하기에 앞서 침례 요한의 출생과 유년시절을 병행하며 소개하는 치밀감을 보여준다. 이는 그가 예수와 관련된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음을 나타낸다. 이제 본 절로 부터는 예수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27 요셉이라 마리아라. 요셉과 마리아의 약혼은 천사가 나타날 때까지 잘 지켜지고 있었다. 유대 관습에 따르면 결혼하기 1년 전에 약혼한다. 샴마이(Shammai)학파는 약혼한 여인의 부정은 사형으로 처벌된다고 했다. 그리고 혼전의 성관계도 물론 용납되지 않았다. 또한 약혼 기간 내에 신랑이 사망할 경우 신부는 과부로 간주되기도 했다. 본 절과 29, 34절 등에서는 마리아의 처녀성이 거듭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강조는 약혼 이후에 마리아가 더욱 더 조신(操身)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였음을 부각시킴은 물론이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확증시키려는 의도를 나타낸다.

 

처녀. [, 파르데논] 이 단어는 원형이 파르데노스로서 미혼녀’, ‘소녀라는 뜻이다. 성경 외적 문헌에 의하면 이 말이 동정녀만을 뜻하지 않고 단지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단어로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후 문맥과 특히 34절에 수록된 마리아 자신의 고백으로 미루어 볼 때,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의 동정녀를 뜻한다.

 

31 예수라 하라.예수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의 뜻인 히브리어 예호수아의 헬라음으로서 이 이름은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다(24:13, 삼상 6:14, 왕하 23:8, 대하 31:15, 1:1, 3:8). 이 이름은 주후 2세기 초까지 흔하게 사용되었으나 2세기 이후부터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13:6, 4:11). 이는 아마도 의식적으로 그 이름의 사용을 꺼렸기 때문인 것같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내며 이 이름의 기독교적 의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한 마 1:21에서 잘 나타난다.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여타의 다른 인물들과 그분을 구별하기 위하여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21:11), ‘다윗의 자손’(27:37, 10:47-48, 18:5) 등의 문구를 덧붙여 사용하기도 했다.

 

그 조상 다윗의 위(). 당시의 대중적인 메시아 칭호는 다윗의 자손이었다. 예수의 호적상 아버지인 요셉의 족보를 더듬어 올라가면 예수는 다윗의 혈통임을 확인 할 수 있다(3:31). ‘에 해당하는 헬라어 드로논등받침이나 팔받침 또는 발등상을 갖춘 높은 의자를 가리킨다. 또 이 단어의 복수형은 왕이나 신의 권능을 의미할 수도 있다(1:16). 여기서 다윗의 위는 왕되신 메시아의 보좌를 상징하는 다윗 왕의 보좌를 가리킨다. 요컨데, 예수는 예언된 바 그대로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사(삼하 7:12-16, 89:29, 132:11, 9:7) 다윗 왕권을 통해 드러내 보이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신령한 뜻을 온전히 성취하신 것이다.

 

33 영원히(아이오나스).시대’, ‘영원등의 뜻인 아이온의 복수 목적격이다. 이 단어는 때때로 오래 전부터’(70), 혹은 창세 이후로를 뜻하기도 하나, 특정한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영원성과 결부된 문맥에서 잘 쓰인다(55, 6:51). 특히 이 단어는 복수형으로 사용될 때 영원성에 대한 암시를 두드러지게 나타낸다(6:13, 1:25, 13:8, 1:25, H. Sasse, TDNT. I, 197-209).

 

야곱의 집(오이콘 야콥).에 해당하는 오이콘오이코스의 단수 목적격으로서 ’, ‘가족’, ‘가문’, ‘종족의 뜻을 나타낸다. ‘야곱의 집이라는 표현은 행 7:46에도 나타나며 그 의미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나타내지만 더 정확히는 영적 이스라엘로(3:9, 10:10-13) 그리스도를 왕으로 받드는 모든 성도들을 의미한다는 견행에 많은 학자들이 공통된 입장을 취한다(Lenski, Geldenhuys, 이상근).

 

 

왕 노릇. 다윗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으로써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통치자가 된다는 의미이다(고전 15:25, 11:15).

 

그 나라(바실레이아스).왕국의 의미를 담고있는 이 단어는 때때로 왕권’, ‘왕정’, ‘통치등의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의와 사랑에 의해 통치되며 의와 평강과 희락(喜樂)으로 가득한(14:17) 하나님의 나라에 다름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관해서는 막 1:15의 주제 강해에서 다루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그리스도께 넘겨 주셨고(22:29), 우리를 그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1:13).

 

무궁하리라(우크 에스타이 텔로스).무궁을 나타내는 텔로스’, ‘목표’,’정지등의 뜻을 가지며,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우크와 함께 사용되어 정지되지 아니하리라또는 끝이 없으리라는 뜻을 나타낸다. ‘영원무궁을 연이어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의 영원성과 무한성을 강조하고 있다(45:6, 2:24, 7:14, 12:34, 11:15).

 

34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알지에 해당하는 기노스코은 히브리어에서 성적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 야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4:1, 19:8, 11:39). 이 동사는 현재 시상으로 사용되어서, 과거의 모든 행동을 포함한 현재의 상태를 나타낸다. NIV는 이 부분을 나는 처녀이니’(since I am a virgin)라고 번역한다. , 과거에나 지금 이 순간에나 아무 남자도 알지 못한 처녀임을 말해 준다(Liefeld). 그러나 이 구절을 놓고 로마 가톨릭이 마리아가 영원한 동정녀로서 지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에겐 육친(肉親)의 형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12:46, 3:31, 32).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의심하여 표적을 구한 사가랴와는 달리(18) 마리아는 표적을 구하지 않고 성취 방법을 묻는다(18절 주석 참조). 천사의 수태 고지(announcement)를 듣고서 처음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지만, 무소불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 믿음이 었었기에 이제 마리아는 천사의 전언(傳言)을 오히려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35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누가는 다시 성령을 언급하고 있는데, 1, 2장에서만도 여섯번 이상을 언급한다(41, 67, 80, 2:25, 26, 27). 유대인들은 모든 아이들이 출생하는 데는 세분히 동역자, 즉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요구된다고 생각하였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결코 아이를 출생할 수 없다고 믿은 것이다(Lenski, Barclay). 하지만 예수의 경우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셨다는 점에서 유일 무이한 기적이었다.

 

37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없느니라. ‘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마생생한 목소리로 말해진 것’, ‘말씀’, ‘진슬등의 뜻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동의어인 로고스에 비해 계속적인의미와 단일 개념을 강조한다. 한편 본 절은 창 18:14과 마 19:26에서도 나오는 내용으로서 천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로서 제시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이 행치 않으시겠느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리아의 이 고백은 엘리(삼상 3:18)나 다윗(삼하 7:25)의 전례를 연상시킨다(이상근). 마리아의 이 고백은 결코 가볍게 여겨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처녀 수태로 인해 파급될 문제는 엄청난 것이다. 요셉과의 파혼과 함께 부정한 여인으로 몰려 세인(世人)의 멸시와 지탄을 받아야 하고 자칫하면 돌에 맞아 죽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사의 마지막 말(37)이 마리아의 가슴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모든 일을 다 하나님이 처리하시리라는 굳센 믿음이 마리아의 심령을 사로잡았다.

침례요한의 탄생 예고, 누가복음 연구 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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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5-25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새

[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12]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13]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15]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17]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19]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20]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21]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의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기더니

[22] 그가 나와서 저희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 성소 안에서 이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형용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더니

[23]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24] 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가로되

[25]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요한은 여호와의 사자로서 나가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빛을 가져다 줄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사상에 새 방향을 제시해야 했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의 신성성을 인식시키고 하나님의 완전한 의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해야 했다. 그러한 기별자는 거룩해야 했다. 그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실 성전이 되어야 했다. 그는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건전한 체력과 정신적·영적 능력을 가져야 했다. 그러므로 그는 식욕과 정욕을 지배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광야의 바위나 산들처럼 주위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사람들 가운데 설 수 있도록 자기의 모든 능력들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하였다”(소망, 100)

 

가복음은 침례요한의 출생에 관한 예언으로 시작된다.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 보다 먼저 기록된 까닭은 무엇이며, 그의 출생에 관한 특별한 사실들은 무엇인가?

리들은 출생시에 어떤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을까?

 

본문연구

  1. 요한의 부모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아비야 반열”(5)에 대하여는 역대상 24:1-19을 참조하라.

  2. 장차 태어날 요한의 사명은 무엇이었는가?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포도주와 소주”(15)를 마시지 말라는 것의 의미를 민 6:1-3, 20-21, 13:7을 참고하여 설명해 보라
    cf.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17) - 4:5, 11:13-14을 참조하라.

  3. 20절에서 사가랴가 벙어리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하나님의 말씀에 조금도 의심없이 순종할 수 있는 비결은 없을까?

 

토의사항    

  1. 하나님께서 예수의 초림을 예비하기 위하여 예언된 선지 엘리야의 역할을 위하여 요한을 선택하여 성령으로 출생케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6, 13, 25절 참조)

    "결혼 생활을 하면서 사가랴는 내내 아들을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사가랴와 그의 아내는 이제 늙었고 그때까지도 그들의 기도는 응답을 받지 못하였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하나님도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어 주시기로 정해 놓으신 때를 갖고 계셨다. 그리고 사가랴가 기도의 응답을 받았을 때는 희망이 전혀 없어 보이는 상황이었다. . . . 그 기도의 응답이 온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종의 기도를 잊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분이 가장 좋다고 여기시는 시간에 응답하시려고 그 기도를 그의 기록책에 기록해 두셨다. 표면적으로 볼 때에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그들의 희망을 땅에 묻어버렸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다. 사가랴는 실망의 긴 세월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이름이 가장 크게 영광 받으실 만한 때에 그들의 아들이 태어나게 하셨다. 크시고 무한하신 사랑의 마음은 참으로 부드럽고, 친절하시며, 참으로 사랑과 긍휼이 가득하지 않으신가! 하나님이 사가랴에게 주신 아들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업의 높은 위치를 점해야 할 사람이었다. 그로부터 하늘의 빛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비추어져야 하였다" - 원고 27, 1898

  2. 우리는 어떤 점에서 요한과 같이 특별한 선택을 받은 ‘나실인’인지 서로 이야기 합시다.

한은 특별한 출생의 비밀을 가진 자였다. 그런데, 그의 선택은 부모들에게 주어진 축복의 결과이기도 했다. 우리는 침례 요한의 출생에 관한 기록을 통하여 하나님과 누가가 의도한 교훈들을 배울 수 있다. 우리도 각자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음을 확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지 생각해 보자!


5 유대 왕 헤롯 때에. 헤롯은 유대인의 왕으로 보통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이라 하는데, 본문에서 헤롯 때에라 함은 곧 그의 통치 기간 중에라는 의미가 된다. 헤롯 대왕에 대해서는 마 2:1의 주석을 참고하라.

 

실로 이 시기는 종교적으로 타락한 시기였고 정치, 사회적으로 비극적이며 희망이 없는 시대였다. 이제 이러한 비극과 어두움을 버경으로, 누가는 새로운 희망의 빛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특별히 그는 말라기 선지가(B.C. 435-425 추정) 이후 400년동안 하나님의 계시의 중단으로 인한 영적 암흑기를 마감하는 위대한 여명기(黎明期)가 시작됨을 알리려 한다.

 

사가랴요 엘리사벳이라. 사가랴는 히브리 이름으로 보통 스가랴(Zechariah)라고 하며 유대인 사회에서 흔한 이름이다(왕하 14:29). 그 이름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편 엘리사벳(Elizabeth)내 하나님은 맹세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을 가지며 엘리세바와 동일 이름으로 여겨진다(6:23). 이들 부부는 모두 제사장 가문의 출신으로, 제사장 가문끼리 결혼을 한다는 것은 이중적인 영예로 여겨졌다(Geldenhuys). 본래 율법은 제사장이 이스라엘 태생의 처녀에게 결혼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21:14). 그러나 반드시 제사장 가문에서 아내를 취해야만 한다는 조항은 없다. 그럼에도 사가랴가 대제사장 가문(아론의 자손)의 처녀와 결혼했다는 것은 상당히 영광스럽고도 특기할 만한 일이라 할 것이다. 한편 엘키사벳이 이스라엘 최초의 대제사장인 아론의 아내 이름과 같다는 사실은(6:23) 매우 의미있는 일치로 본다.

 

7 엘리사벳이 … 무자(無子)하고. 유대인들은 자식을 하나님의 축복과 그 기업으로 믿고 있어 자식이 없는 것을 대단한 수치와, 하나님께 대한 죄의 형벌로 알았다(127:3). 또한 유대 랍비들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파문당할 수있는 7가지 유형을 기록한 목록 서두에서 유대인이면서 아내가 없고, 또 아내가 있으면서도 자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무자한 것은 합법적인 이혼 사유가 되었다(Barclay). 더구나 두 부부는 이미 나이가 많아 수태(受胎)의 가능성은 더욱 희박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 수태를 못하므로라는 표현 가운데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 카도티란 말은 신약 성경 중 본서 저자인 누가만 주로 사용하는 단어이다(2:45, 4:35). 카도티는 대략 때문에’, ‘ 만큼’, ‘왜냐하면등의 뜻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후기 헬라어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어쨌든 이러한 슬픔과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욱 빛나 보이는 것은 두 노부부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자세이다. 이들은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주어진 자신들의 위치에서 묵묵히 그 역할을 감당해 갔다. 결국 이 경건한 노부부는 구약의 예와 같이(17:16-17-사라, 삼상 1:5-11-한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된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이 얻은 아들이 메시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로 선택되는 영광까지 얻음으로써 지금까지 그 어떤 부모도 얻지 못한 큰 은혜를 덧입게 되었던 것이다.

 

제비를 뽑아(엘라케). 제사장들의 24반열 중 각 반열의 차례가 돌아오면 그 해당 반열의 제사장들은 제비를 뽑아 각각 수행해야 할 임무를 맡게 되었다. 한편 이 제비뽑기는 히브리어로 고랄이라 하는데,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특수한 표시를 한 물건을 땅에 던지거나 용기(容器)에서 뽑는 제비뽑기가 매우 유행하였다. 물론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 제비뽑기는 미신적 의미에서 이뤼진 것이라기 보다 항상 여호와 앞에서제비를 뽑는다는 신전 의식(Coram Deo)하에서 이뤼진 것이다(18:10-12, 18:6, 8). 구약에서는 여러 경우의 제비뽑기 사례가 등장하는데, 새로운 땅 분배시(26:55, 14:2), 죄인을 찾아낼 때(7:14, 삼상 14:42), 첫 번째 왕 선택시 (삼상 10:20,21), 성도의 일을 다스리는 자나 노래부르는 자 또는 문지기의 일을 맡을 자 등을 선택할 때 제비뽑기를 하였다. 그리고 신약에서도 제비뽑는 경우를 볼수 있는데 예수의 11제자가 맛디아를 가룟 유다대신에 제자로 선출할 때 등에서 나타난다(1:26). 여기서 보듯이 이 제비뽑기는 모든 의사결정의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시행되던 시기,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필요했던 경우에 한해서만 시행되어졌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인간들에게 알리시기 위해 제비뽑기를 부분적으로 허용하셨으며, 그 일의 배후에는 당신이 친히 섭리하셨으나(16:33) 특별 계시인 성경이 완성되고 성령의 적극적인 역사가 시행되는 오늘날에는 이 제비뽑기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여하튼 사가랴 당시에 제사장들은 제비뽑기를 통하여 대략 아침 일찍 제단과 불을 준비하고, 제물이나 성소의 기구들을 예비하며, 또 준비된 기구들로 분향하거나 제물을 드려 제사하는 일 등을 각각 분담받았다.

 

10 모든 백성은 기도하더니. 이 구절의 모든 백성에 대해 NIV운집한 경배자들’(all the assembled worshipers)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부분의 헬라어 원문은 라오스’(’백성’)이다. 따라서 정확한 의미 전달이 안 되고 있다. 예배자들만이 성소 밖에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기도한 것이다. 백성들은 기도하기 위해서 하루에 세번씩 성전뜰이나 성소 바깥뜰에서 모였다. 이들의 첫째와 섯째 모임 시간은 아침과 저녁 분향 시간과 일치하는 시간이었다(Geldenhuys). 한편 이 백성들 가운데 연로한 시므온(2:25)과 여선지자 안나(2:36)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 이 곳에 모인 백성들은 뒤에 21, 22절에 기록된 백성들과 일치한다(Liefeld).

 

 

 

11 주의 사자. 사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앙겔로스사자’, ‘천사’,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성경에는 곳에 따라 사자’(12:9, 2:13), 또는 천사’(24:36, 12:25, 8:38, 고전 4:9, 1:13, 14)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 곳 외에도 누가복음 전체를 통해서 천사에 관련된 기사는 매우 많이 등장한다(1:26, 2:9, 13, 21, 12:8, 15:10, 16:22, 22:43, 24:4, 23).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서도 이러한 특징들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10:4, 7, 12:8-10). 주의 사자가 사가랴에게 나타난 이 사건은 결국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의 시작이 된다.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실 구체적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13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간구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에시스는 일반적인 기도를 뜻하는 단어 프로슈케과 비교해 특별한 기도를 뜻한다. 따라서 사가랴는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들린지라에 해당하는 부분을 KJV는 현재형으로, NIV는 현재완료형으로 각각 표현하고 있다. 헬라어 원문 에이세쿠스데은 제1부정과거 직설법의 형태로 사용되었다. 이는 일종의 무시간적 부정과거의 형태로, 과거에도 들렸고 지금도 들린다는 의미이다(Robertson). 따라서 사가랴의 기도는 일회적이 아니고 지속적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제사장 사가랴가 성소안에서 무슨 기도를 드렸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손을 위하여 기도하였을 것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메시아의 강림을 위하여 기도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말에 사가랴가 반응한 것을 보면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엘렌 지 화잇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구주의 강림을 위하여 기도해 왔었다. 이제 그의 이러한 기도가 막 응답되려고 한다는 것을 발표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한 사자가 보냄을 받았다.” (시대의 소망, 97)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줌으로써 확신을 더해준다. 요한(요안넨)은 히브리어 예호하난과 같은 말로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시다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요난’(대상 3:24), ‘요아네스’(대하 28:12)등의 변형으로 히브리인들이 좋아하는 이름 중 하나이다. 성경적인 사고 방식에 의하면 이름이란 단순한 호칭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성(本性)과 인격까지 나타낸다. 다시말해 이름은 인격의 본질이자 내적 존재의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작명법(作名法)은 바벨론 유수기(幽囚期)를 전후허서 뚜렷한 차이점이 나타났다. 초기에는 아이의 타고난 특성에 따라 특징있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나 B.C. 5세기 이후부터 아이의 이름을 친척이나 특히 조부의 이름을 따르는 관습이 생겼다. 이러한 관습에 의해 과거 인물들의 이름이 다시 등장하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사람들의 이름도 따서 쓰게 되었다.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이 말을 통해 우리는 나실인에 대한 계율을 기억할 수 있다(6:3, 4). 요한은 평생 나실인으로 살아가며 자신의 기별과 일치하는 절제된 생활을 한다. 독한 술에 해당하는 시케라는 강한 독주 등을 말하며, 신약 성경에서는 본 구절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16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선지자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3:7, 10, 3:19, 9:13). 요한의 사역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회개의 사역이었다(Alford). 요한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를 연결하는 마지막 선지자이다. 요한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주께 돌아오게 하여 그의 뒤에 오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다. 그러므로 그는 일찍이 요한보다 더 큰 선지자가 없었다는 칭송을 듣게 된다. 요한은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었지만 선지자의 직무를 행하였다(3:3).

 

17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심령을 나타내는 프뉴마어떤 사람의 영혼을 지배하는 성질 또는 영향력, 어떤 능력이나 애정, 감정, 욕구 등의 근원등을 나타낸다. 그리고 능력을 나타내는 뒤나메이물려받은 힘’, 또는 사람이나 사물에 내재된 물리적 혹은 정신적 힘을 의미한다. 더러는 기적을 행할 때와 같은 놀라운 권능을 의미할 때도 있다. , 요한은 엘리야가 지녔던 기질이나 영향력, 그리고 엘리야가 하나님께 받은 능력같은 것을 가지고 사역을 할것이라는 말이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가 먼저 와서 주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40:1, 3:1-5, 4:5, 6). 이것은 말라기 선지자때부터 요한이 탄생할 때까지 약 400년 동안의 유대인들의 소망이기도 했다. 요한은 전생애가 엘리야와 너무도 비슷했다. 삶과 사역을 통해 그 유사성은 더욱 확연히 들어난다. 광야에서의 삶(털옷과 가죽띠를 두르고)이나 지위고하(地位高河)를 막론하고 회개를 선포한 사실(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벧에게 회개를 요청하고 탄압을 당했으며 요한은 헤롯과 헤로디아에게서 박해를 받는다) 등이 그러하다. 그렇다고 엘리야와 요한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아니며 엘리야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능력들과 갖은 사역의 성격과 내용에 있어서 바로 엘리야를 지칭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뒤에 그를 엘리야로 말씀하신다(17:12, 9:13).

 

주를 위하여 예비하리라. ‘백성이라는 헬라어 라오스은 공관 복음서에 49회나 사용되는데 그 중 누가복음에서 35회나 사용되고 있다. 누가는 이 단어를 무리’, ‘군중을 나타내는 오클로스과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21:26) 백성은 단순히 무리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세운 구별된 백성, 즉 이제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복음으로 하나가 된 이방인들까지도 포함하는 말이다(Liefeld). 여기서 요한의 사역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요한의 사역은 주를 위하여 예비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누가복음 서론, 누가복음 연구 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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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1-4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

 

그 시대에는 글을 쓰는 사람이 그의 원고를 누구에게 보내어서 검토를 하게하고 비판을 받는 것이 관례였다. 누가는 그가 신임하던 데오빌로를 택하여 이 중대한 일을 하게 하였다. 누가는 맨 먼저 누가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생애의 기록으로 데오빌로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 누가복음 역시도 그가 데오빌로에게 보낸 글이었다(행1:1-5인용). …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원고들과 책들로 보존되어야 했다(원고 40, 1903)

 

은 책 한 권이 있다. 그것만 공부하면 영어가 마스터 된다고 한다.

번 도전해 보겠는가?

 

본문연구

  1. 누가는 누구인가? 또 어떤 사람이었나?
    4:14, 딤후 4:11, 1:24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누가라는 이름은 라틴어 lukaus라는 말에서 유래했는데, 그 뜻은 빛을 전달함이다.

  2. 1절에서 이루어진 사실즉 이미 발생한 사실이나 그것에 관한 기록을 2절에서는 무엇 이라고 표현하는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2절에서 말씀”(.logos)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1:1-3, 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4절의 배운 바의 원어는 말씀과 동일한 "logos"이다.

  4. 저자인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하기 위하여 한 노력은 무엇이었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토의사항                                                 

  1. 1절에서 사실이란 표현은 왜 중요할까? 누가가 말하는 사실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 표 현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2. 누가의 모본처럼 우리도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노력들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 을지 서로 발표해보자.

 

가는 그의 복음서 기록 목적이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1:4)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그와 그의 복음서에 영감을 더하신 성령을 신뢰하면서 읽고 연구한다면,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될 것이다. 시도해 보겠는가?

 

“마태복음이 일차적으로 유대인 독자들을 위하여, 마가복음은 라틴어 배경을 가진 자들을 위하여 기록된 것으로 생각된다. 누가의 어투는 그가 당시의 교양 있고 교육 받은 사람들을 향하여 기록한 것임을 암시한다. 그는 분명히 당시의 문학적 양식에 익숙해 있던 지성과 교양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붙인 서문들, 여러 관리들의 재임 연도에 따라 사건들의 연대를 매긴 일, 그리고 그가 의존한 정보들의 출처의 사용 및 언급 방법 등에 의하여 분명하게 나타난다.”

1번 보충자료

유세비우스는 누가가 민족으로는 안디옥 사람이요, 직업은 의사였다고 기술하였다. 추측컨대, 그는 안디옥 출신이었으며, 어떤 이들은 그가 복음서를 기록한 곳도 그곳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다른 이들은 기록 장소가 로마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누가와 바울은 신약의 가장 많은 분량을 기록한 기고가(寄稿家)이다. 누가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전설에 의하면 그가 헬라에서 순교를 당할 때에 살아 있는 감람나무에 못박혀 죽었다고 한다. 4:11~14의 문맥에 의하면, 누가는 할례당 가운데 포함되지 않고, 이방인으로 알려진 사람들과 함께 명단에 올라 있으므로,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기독교의 기원과 초기 발전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는 한 작품의 제1부와 제2부로 간주될 수 있다. 사도행전의 서두(1:1)는 두 책의 저자가 동일인임을 명백하게 가리켜 보여 주고 있다. 문체와 어투도 현저한 동일성을 나타내고 있다. 두 책 모두 같은 사람인 데오빌로(참조 1:3 주석)에게 헌정(獻呈)되고 있다. 사도행전의 어떤 부분에서는 저자가 우리라는 인칭 대명사를 쓰고 있는데, 이는 그가 바울의 측근으로서 바울의 후기 봉사에 동참했음을 말해 준다. 드로아로부터 저자는 헬라 지방의 개척 전도 기간에 바울과 동행했고(16:10~18),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마지막 방문에도 동행했고(20:5~21:18), 로마로 가는 여행에도 동행한(27:1~18:16) 것으로 나타난다. 4:14과 몬 23, 24에서 바울의 동역자로서 누가는 그 편지들이 전달되는 자들에게 문안을 보낸다. 로마에서의 그의 마지막 투옥 기간이 끝날 무렵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오직 누가만이 나와 함께 있(딤후 4:11)고 했다. 그 사도의 다른 동역자들은 다른 교회들에 파견되었거나 그를 배반하여 떠나갔다. 그의 생애의 마지막 날들의 암운(暗雲) 가운데서, 바울은 사랑받는 의사와 같은 사람의 부드럽고도 유능한 봉사에 대해 한없는 감사를 느꼈음에 틀림이 없다. 바로 이 사람이 사도행전과 그의 이름이 붙어 있는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임이 틀림없어 보인다.”(성경주석, )

 

(4:14)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딤후 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1: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3번 보충자료

(1:1,2,3,14)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가능한 질문에 대한 답

 

2. 처음부터. 즉 예수의 공중 봉사가 시작될 때부터. 그러나 목격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침례자 요한과 예수의 유아기에 관계된 상황을 보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목격자. 헬라어 아우톱타이(autoptai). “자신의 눈으로 본 사람.” 요한은 자신을 목격자로 언급했다(1:14; 21:24; 요일 1:1, 2). 열두 사도, 70명의 제자 그리고 예수와 제자들을 따라다니며 섬기던 모든 여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처음부터목격자(eyewitness)였다. 반면 누가, 바울, 디모데는 귀로 들은 증인”(ear-witness)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예수의 생애와 봉사에 관한 그들의 지식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결함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들은 지식의 목격자일 뿐만 아니라 거룩한 계시의 가르침을 통해 받았기 때문에(고전 15:3~7; 1:11, 12) 그들의 증거의 가치를 조금도 감소시키지 않는다.

여기서 누가가 보여 준 겸손은 그의 이름이 붙은 복음서의 신빙성과 타당성을 뒷받침해 주는 탁월한 증거이다. 그는 정확한 진리를 진술하기 위해 조심하면서, 날조자들이 늘 그렇게 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이 목격자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사실 누가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봉사에 관한 자신의 이해가 본래 목격자들의 이야기에서 유래되었음을 분명하게 진술한다. 그러므로 누가의 경우 영감의 역할은 본래의 지식을 나누어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듣고 자신이 기록한 것의 정확성을 보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누가가 원자료(原資料)를 접했던 역사가인 것은 사실이나 그 이상으로 그는 영감받은 역사가였다.

 

내력. 헬라어 디에게시스(die-ge-sis). “사화”(史話). 두 개의 헬라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길을 인도한다”(lead the way through)라는 뜻이 있다.

 

저술하려고. 헬라어 아나탓소마이(anatas-somai). “편찬하다”, “정리하다”, “작문하다.” 이 말은 굳이 연대적인 배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헬라어 파쎄크세스(pathexe-s, 참조 3절 주석)와 비교해 보라. 이 용어들은 이전 복음서 기자들이 기록한 이야기들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부정확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붓을 든. 헬라어 에피케이레오(epicheireo-). 문자적으로 손을 대다를 뜻하고, 따라서 착수하다또는 시도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어떤 주석가들은 누가의 이 진술을, 그가 언급하고 있는 필자들이 성령의 인도 없이 자의로 기록했음을 암시하는 말로 이해한다. 그러나 파피루스에 나타난 에피케이레오의 용례들에 비춰볼 때, 분명 그런 결론은 부당하며 누가도 이전의 필자들에게 어떤 비난도 하지 않는다. 그들의 의도는 적절했으며, 따라서 누가와는 달리 전적으로 거룩한 영감을 받지는 못했지만 역사적 자료로서 그들의 기록을 배격해서는 안 된다. 누가는 이 필자들을 지지하는 관점에서 보고 있으며, 사실은 나도”(3)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을 그들과 같은 부류에 넣고 있다.

 

많은지라. 누가가 많은지라라는 언급에 마태와 마가를 포함시켰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볼 때 적어도 마가복음은 이미 기록되었고 마태복음도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많은지라라는 표현은 둘 이상을 뜻하므로 이 말에는 복음서 이외의 다른 기록된 역사가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누가가 오늘날 존재하는 외경 복음서를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은 그것들이 오랜 후에야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전 기록자들 중 얼마는 자신들이 기록한 것에 대한 목격자들이었으며, 열두 제자나 70인의 무리에 속할 수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참조 2절 주석).

 

3. 근원부터. 즉 예수의 생애의 근원부터.” 마치 탐험가처럼 누가는 사건의 흐름을 그 발단까지 추적해 올라가 그 흐름의 과정을 철저하게 따라 내려갔다. 따라서 누가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보다 훨씬 상세하게 예수의 탄생과 어린 시절의 배경을 제시한다. 음서에 언급된 예수 탄생 이전에 있었던 여섯 개의 사건 중 다섯 개를 누가가 기록하고 있다.

 

자세히 미루어 살핀.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뒤를 따라가다.”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한 두 번째 이유는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대한 자신의 깊은 연구에서 얻은 유익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누가는 근원부터 시작했으며 모든 것을 조사하였다. 그는 자기의 복음서 기록에서 예수의 이야기를 정확하고 철저하고 체계적으로 제시한다. 이는 진지한 학자들의 특징이다. 마태는 예수의 가르침을 강조하고 마가는 예수의 봉사에 나타난 사건들을 강조하는 반면, 누가는 어느 누구보다 이 두 가지 요소를 더욱 완전하고 체계적으로 결합시킨다. “그 모든 일을자세히 미루어 살핀다는 누가의 주장은 근거 없는 자랑이 아니다. 공관복음 이야기 179가지 중 43가지가 누가복음에만 나타난다.

 

데오빌로.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의 친구.” 데오빌로라는 이름이 어떤 사람을 지칭하기보다는 누가가 그리스도인 전체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했다는 보편적인 주장을 지지해 주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각하라는 호칭은 이 사람이 실제 인물이었음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데오빌로(Theophilus)는 그의 헬라식 이름이 시사하는 대로 개종한 이방인이었을 것이다.

 

각하. 흔히 정부의 고관에게 사용되는 호칭이다. 동일한 용어가 유대의 로마 총독들에게 사용되었다(23:26; 24:3; 26:25). 이렇게 초기에 정부 고위직에 있는 것이 확실한 인사가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차례대로. 헬라어 카쎄크세스(kathexes). “잇따라서또는 연속적으로”(참조 2절 주석). 마태는 예수의 강화(講話)들을 주로 주제별로 정리한 반면, 마가는 예수의 생애의 사건들을 종류대로 모아서 다뤘다. 마태와 마가는 전반적으로 연대순으로 배열했지만 연대적으로 순서를 맞추는 것이 그들의 주목적은 아니다. 그들은 여러 사건을 자신들의 복음서가 지향하는 목적에 조화되도록 재배열하였다. 반면에 누가는 좀 더 정확한 연대순을 따른다. 마태와 마가는 정확하게 연대순으로 배열하려고 하지 않았다.

 

좋은 줄 알았노니. 전에 많은사람이 쓴 이야기에는 빠져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사건들을 기록할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완전하고 정확하며 믿을 만한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기사를 기록하는 것이 누가에게 적절해 보였던 것 같다(참조 2절 주석). 이 말에는 적어도 어떤 성경 기자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영감의 기록을 준비한 방법이 나타나 있다. 성령에 의해 누가의 마음에 전달된 감동은 그에게 적절하고 바람직하게 보이는 어떤 행동 노선을 정하는 일에 영향을 주었다. 누가는 이방인을 그리스도교회 안으로 받아들이는 일의 여부를 숙의하던 예루살렘 총회에 관해 기록하면서 안디옥의 신자들에게 그들의 행동 노선이 가하다”(참조 행 15:25)고 쓴 사도들의 편지를 인용한다. 형제들이 함께 모여 논의했으나, 그들의 생각은 성령의 지도를 받았다. 따라서 그들은 성령과 우리는가한 줄 알았노니”(28)라고 확신 있게 설명했다. 누가복음도 마찬가지다. 성령이 누가에게 기록하도록 강권했지만, 기록할 때는 하나님의 지도를 받아 자유 의지를 가지고 기록하였다.

 

4. 배운 바. 이 단어는 데오빌로가 그때까지는 침례 전에 있었을지도 모르며 그가 구두 교육만 받았다는 사실을 나타낼 수 있다. 그는 누가가 가르쳐서 개종한 사람들 중 하나일 것이다. 아니면 누가가 기독교에 대한 그릇된 보도에 대처하기 위해 이것들을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다.

 

확실함. 헬라어 아스팔레이아(asphaleia). “비틀거리다”, “떨어지다를 뜻하는 스팔로(sphallo-)아니다를 뜻하는 부정접두어 아(a)가 결합된 단어로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사실들에는 확실함이 있으며, 따라서 이것들을 믿는 사람들은 견고하고 안전하여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알게 하려 함. 헬라어 에피기노스코(epi- gino-sko-). “충분히 알다.” 데오빌로는 이미 배운것들에 부가하여 충분한 지식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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