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잔치에 청함, 누가복음 연구 2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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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4:16-24

[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종교에 대하여 전연 무관심한 것같이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 마음에는 안식과 평화를 갈망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비록 저들이 매우 깊은 죄 가운데 빠졌다고 할지라도, 저희를 구원할 가능성은 있다”
  (실물교훈, 236).

 

하나님께서는 메시야의 그 큰 잔칫상 주위가 가득 채워지길 원하신다. 손님을 부르는 그 초청은 성공할 것이다.

 

본문연구

  1. 이 비유와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참조 마 22:1~14) 사이에는 어떤 유사점이 있으며,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알아보라.

    유사점 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
    차이점 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

  2. 누가복음 14장 16~20절의 핑계들을 열거하라. 주님의 초청에 온전히 헌신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어떤 것들일까? 그리스도께서 언급하신 핑계들을 현대판 핑계로 만들어 적어보라.

    1) 18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19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20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집주인이 원래 청하였던 사람들을 대신하여 잔치자리를 채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1-23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토의사항

  1. 오늘날 예수님의 초청을 거절하게 하는 우리의 핑계거리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2. 하나님께서 베푸신 하늘 잔치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3. 내가 받은 축복들 중에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겨저 감사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는지 얘기해 봅시다.

 

누가복음의 그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최우선으로 삼으셨다. 가난한 자, 절름발이, 소경, 병신들은 가진 게 없으므로 천국의 요구에 쉽게 반응할 수 있었다. 믿음으로 “예” 함으로, 가장 비천한 영혼도 왕의 식탁에 앉을 수 있다.


16. 큰 잔치. 예수는 여기서, 청중들에게 익히 알려진 큰 잔치의 상징을 통하여 하늘나라의 풍성한 축복을 설명했다. 그는 바리새인의 의도(15절)를 반박하지 않고, 그 사람의 신실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사실, 그때 그 바리새인은 복음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 비유와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참조 마 22:1~14)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지만, 차이점 또한 많다. 두 비유가 주어진 배경 역시 확연히 다르다. 눅 14장의 비유는 바리새인의 집에서 주어진 반면, 마22:1의 비유는 예수를 체포하려는 시도와 관련하여 주어졌다(참조 마 21:46).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이것은 복음 잔치의 첫 번째 초청, 즉 구약 시대 내내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초청을 나타낸다. 특별히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보낸 하나님의 반복적인 호소를 가리킨다(참조 21~23절 주석).

 

17. 종을 보내어. 특별한 의미에서 예수 역시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라고 보내진 “종”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오늘날에도 동방에서는 손님들에게 초청한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잔치를 시작하기 며칠 전에 사자(使者)를 파송하는 것이 관례이다. 손님이 초청받은 것을 잊었거나 참석할 시간을 알지 못할 경우에, 이로 인해 행사를 위해 준비하고 지정된 연회 장소까지 도착할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 서양보다는 달력이나 시계에 관심이 덜 한 동방에서는 그같이 생각나게 해주는 사람이 실제적으로 요긴한데, 그것은 주인이나 손님을 당황하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18. 다 일치하게. 초대받은 손님들이 친절한 주인을 욕보이기로 공모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세 명 이상이었지만(16절), 예수가 열거한 세 종류의 변명은 종이 찾아가는 곳마다 들었던 이야기들의 실례로 주어진 것 같다. 세 명 이상이 등장하는 상황에서 세 명만을 대표로 언급한 비슷한 예증에 대해서는 19:16~21을 참조하라.

 

사양하여. 손님으로 청함 받은 자들 중 누구도 사양할 합당한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 나름의 핑계를 고안해냈다. 물론 각 경우마다 진짜 이유는 청함 받은 자들이 다른 일에 더 많은 관심이 쏠려 있었다는 데 있었다. 다른 일이란 잔치에 참석하게 되면 일시적으로라도 제쳐놓아야 할 것이었다. 물론 그 변명들은 잔치를 베푼 사람의 환대와 호의에 대해 감사하지 않은 것을 의미했다. 복음 잔치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은 영원한 것들보다는 현세적인 이익에 더 많은 가치를 두었다(참조 마 6:33).

동방에서는, 불가피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흔히 친교를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어떤 아랍인들은 최초의 초청을 받아들인 후에 다시 알려주는 자(참조 17절 주석)의 초청을 거절하는 것을 선전포고로 여기기도 한다. 반면, 초청을 수락하고 잔치에 참석하는 것은 우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한다.

 

밭을 샀으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밭을 이미 사들였기 때문에 구실이 빈약하다. 매입한 사람은 분명히 거래를 매듭짓기 전에 땅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을 것이다.

 

19. 소 다섯 겨리. 역시, 매입은 이미 이루어졌다. 그 사람은 거래가 얼마나 잘 이루어졌는지 시험해 보는 데 여념이 없었으며, 따라서 잔치에 참석하기를 진정으로 원했다면 그 일은 다음으로 쉽게 미룰 수도 있었을 것이다.

 

20. 가지 못하겠노라. 세 번째 변명을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무례하게 보인다. 다른 이들은 정중한 척하면서 양해를 구한 반면, 그는 종에게 딱 잘라서 “가지 못하겠노라”라고 통고했다. 이 사람이 거절한 것은 아마도 결혼하고 첫해에 해당되는 사람에게는 정규적인 병역이나 시민의 의무 중 일정 부분을 면제해 준다는 사실에 근거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참조 신 24:5 주석). 그래서 그는 “가지 못하겠노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법이 정상적인 사회관계에서 그를 면제시켜 주지는 않았으며, 그렇게 핑계를 꾸며대는 어떠한 노력도 거짓 구실일 뿐이었다. 이 사람의 변명은 사실상 처음 두 사람보다 나을 게 없었다.

 

21. 노하여. 종이 구차한 변명들을 하나씩 전하자 그 친절한 주인은 노를 발했다. 원래 그들은 모두 초청을 받아들였고, 주인은 그들의 수락을 믿고 잔치를 준비해 왔다. 그러나 준비가 완료되고 음식이 마련된 지금, 주인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작당한 것처럼 보인다(참조 18절 주석). 더군다나 그는 잔치를 준비하기 위해 상당한 비용을 지출했다.

틀림없이 하늘잔치를 준비하는 하나님은 사람이 노하는 것처럼 “노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잃어버린 인류에게 구원의 축복을 제공하기 위해 행한 모든 일에 비춰볼 때, 사람들이 그분의 의와 은혜를 받아들이라는 자비로운 초청을 경홀히 여기도록 하는 것은 그분의 자애로운 가슴을 몹시 아프게 할 수밖에 없다. 하늘의 모든 자원(資源)이 구속 사역을 위해 투자되었고, 따라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을 감사하며 받아들이는 것이다.

 

빨리…나가서. 이것은 주인이 값비싸게 준비한 양식이 낭비되는 것을 보길 원치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자신의 절친한 친구들이 호의의 표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그는 기꺼이 낯선 사람들을 초청할 것이다. 이 조치는 예수가 이 비유를 들기 직전에 준 권면(참조 12~14절)과 조화되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가 지금 참석하고 있는 잔치의 손님들이 그 권면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 잔치에 동석한 사람 중 하나가 다른 주제로 돌리고자 했었다(참조 15절 주석).

 

거리와 골목. 복음의 초청은 여기서 “도시”의 거주자로 대표된 유대 민족에게 처음으로 주어졌다. 초청을 거절한 도시의 주도적인 시민들은 유대 지도자들이었는데, 그들 중 몇 사람은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열린 잔치에 예수와 함께 모여 있었다(참조 1절 주석). 초청을 거절한 손님들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특권층을 대표한다. 이제 이 자비로운 주인은 자신의 선택받은 친구들에게 돌아서서 “도시”의 낯선 자들, 곧 사회에서 무시와 멸시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향한다. 이들은 초대받은 손님들과 같은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고, 따라서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세리요 죄인으로서, 국가 종교 지도자들에게 버림받은 자들로 취급받았다. 그렇지만 그들도 복음에 굶주리고 목말라했다(참조 마 5:6 주석).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 흔히 유대인들은 인간이 물질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고통받는 것은 하나님에게 은총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겼으며, 따라서 이러한 계층은 동료 인간들에게 무시와 멸시를 받았다(참조 막 1:40; 2:10 주석). 하나님이 그들을 버렸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사회도 그들을 폐인으로 여겼다. 이 비유에서 예수는 하나님이 그러한 사람들을 멸시한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고통이 자신들의 나쁜 행실이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생겼다 할지라도 동료 인간들에게 그들이 멸시받아서는 안 됨을 천명하고 있다. 여기서 가난에 찌들고 신체적으로 장애가 있는 자들은 일차적으로 도덕적, 영적으로 파산 상태에 있는 자들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들은 구원의 축복을 돌려 받기 위해 하나님께 드릴 만한 자신의 선행이 하나도 없다.

 

22.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종은, 자비로운 주인이 자신의 연회장이 가득 차게 되기를 몹시 바라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위대한 복음의 잔치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땅을“헛되이”, 다시 말해 황무지로 창조하지 않고 행복한 인류의 영원한 처소로서 거기에 살도록 계획했다. 죄가 얼마 동안 이 목적이 성취되는 것을 미루었지만, 결국 성취될 것이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마다 복음 잔치에 참여하여 새롭게 될 세상에서 영원히 거할 기회를 부여받았다. 이 비유는, 어떤 사람이 거절한 똑같은 기회를 다른 사람은 열렬하게 받아들일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참조 계 3:11).

 

23. 길과 산울가. 원래 복음 잔치에 초청받은 자들은 유대인들이었다(참조 16, 21절 주석).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부른 이유는, 그들을 동료 인간들보다 더 사랑하거나 더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맡겨진 신성한 특권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예수가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인 세리와 죄인과 교제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참조 막 2:15~17 주석), 이로 인해 유대 지도자들이 깜짝 놀랐다. 그는 갈릴리 봉사 기간 동안 이런 사람들, 즉 “거리와 골목”에 있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참조 14:21 주석). 그러나 AD 30년 봄, 갈릴리 사람들이 거절하자(참조 마 15:21; 요 6:66 주석), 예수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과 사마리아인을 위해서도 계속하여 봉사했다(참조 마 15:21 주석). 그러나 “길과 산울가”의 사람들에게 복음의 초청을 제공한 것은, 스데반을 돌로 쳐죽임으로 극에 달한, 복음의 초청에 대한 유대 국가의 최종적 거절 이후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것을 의미한다(참조 행 1:8). 비유에서 “길과 산울가”는 “도성” 밖에 있으며, 따라서 비유대인 곧 이방인들을 대표하기에 적당하다(참조 14:21 주석). 사도들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다가 동포들의 반대에 직면하자 이방인에게로 관심을 돌렸다(행 13:46~48).

 

강권하여. 헬라어 아낭카조(anagkazo-). 힘이나 설득으로 “강요하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회심시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해도 됨을 정당화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는 무력에 호소하여 사람들이 당신을 강제로 믿도록 하지 않았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으며 사도 시대 교회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당신의 말씀을 그렇게 해석하게 할 의도가 전혀 없었음을 증명한다. 사실, 가르침과 모본을 통해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개인적으로나 또는 복음의 공적인 사신들로서 불평거리들을 가지고 논쟁하거나 보복하지 말라고 되풀이하여 권면했다.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핍박해서도 안 되었을뿐더러(9:54~56), 핍박을 온유하게 견뎌내야 했다.

“강권하여 데려오라”라는 예수의 말씀은 단순히 초청의 긴급성과 하나님의 은혜의 강권하시는 힘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자비가 곧 강권하는 힘이 되어야 했다(참조 실물교훈, 235). 아낭카조는 예수가 그의 제자들을 배에 타라고 “재촉하셨던” 경우(마 14:22)를 언급할 때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가 염두에 두고 말한 끈질긴 호소, 그리고 과거 수 세기 동안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이 당연하다고 여겼고 오늘날에도 기회만 되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의존하려고 하는 물리적인 힘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잔치에 손님들을 데려오기 위해 어떤 경우에도 물리적인 완력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비유 자체가 증거한다. 만약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주인의 의도였다면, 그는 먼저 초대받은 손님들에게 무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복음 잔치의 초청에는 언제나 “원하는 자”라는 말이 수반된다(계 22:17). 이 비유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데려오기 위해서는 박해를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는 사상을 일절 인정하지 않는다. 종교 문제에 무력이나 박해를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마귀에게 부추김을 받은 방법이다.

 

내 집을 채우라. 참조 22절 주석. 주인은 “많은” 손님들을 초청했다(참조 16절). 더욱이 종이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갔지만 손님방을 채우기에 충분한 사람들을 찾을 수 없었다(참조 22절).

 

24. 그 사람은 하나도…못하리라. 전에 청했던 손님들을 이렇듯 강하게 배제한 표현은 비유에 나타난 주인의 선언이며, 그렇다고 이것이 하늘나라가 누군가를 임의로 배제하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야기의 은혜로운 주인은 무례하게도 거절당한 처음 초청을 단순히 취소하는 것에 불과하다. 분명히 그의 집은 이제 “채워”(23절)졌고 더 이상 남은 자리가 없다. 그러나 하늘나라에는 들어가기를 원하는 모든 자를 위한 자리가 충분하다(참조 22절 주석).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하여 이 세상의 재물이 반드시 하늘나라와 모순된 것이라고는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물질에 대한 지나친 애정이 사람을 하늘에 가기 부적합하게 만들며 사실 하늘에 속한 것에 대한 갈망에서 멀어지게 한다고 가르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참조 마 6:19~24 주석). 지상의 재물을 모으거나 세상의 쾌락을 즐기는 일에 최우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그들의 애정을 하늘의 사물보다는 세상에 두고 있기 때문에 하늘에서 제외될 것이다(참조 마 6:25~34). 세상의 사물에 대한 탐욕은 결국 하늘의 것들에 대한 소망을 제거하며(참조 눅 12:15~21 주석), 따라서 탐욕스런 사람들은 축적한 부를 나누어주라는 요청을 받을 때 “근심하며” 떠난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마 19:23) 것은 흔히 들어가고자 하는 충분한 열망이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즉 그들이 나중에 마음을 바꾸었을 경우에도. 구원은 하나님이 내민 초청과 그에 대한 인간의 수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가지 중에 하나만으로는 효력이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총을 경홀히 여긴 사람들이 너무 늦게, 즉 복음의 초청이 더 이상 발해지지 않을 때에야 마음을 바꾸려 할 가능성이 있음을 거듭거듭 보여 준다. 결국 그 초청이 철회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어떤 시간적인 한계를 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제외된 자들이 최종적인 결정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중에 마음을 바꾼다 해도 그 변화란 자신들에게 나타난 결과를 보면서 그릇된 선택을 했음을 깨달은 것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진실한 소망이 그들에게 갑자기 생겼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누가복음 연구 2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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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3:1-9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8]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하시니라

(참고. 굵은 글씨는 예수님의 말씀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훈을 말씀하실 때 심판의 경고와 자비의 초청을 연결시키셨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사람의 생명을 멸하려 함이 아니요 구원하려 함이라’(눅 9:56),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당신의 자비로운 사명과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과의 관계를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설명하셨다.”(실물, 212)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 대한 솔직한 이해가 필요하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이라 할 지라도 그분의 품성을 품지 않으면 결국에는 그 이름을 잃게 될 것이다.

 

본문연구

  1. 본문에서 갑작스런 죽음을 당한 두 부류의 사람들은 각각 어떤 경우인가?
    1) 1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4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피를 제물에 섞었다”는 의미-갈릴리 사람들의 “해받음(2절) 즉, 제사를 드리는 중에 빌라도에 의해 학살당한 것을 의미한다. 다음을 읽어보라.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소동이 자주 일어났는데 빌라도는 이것을 폭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한 번은 그의 군대들이 성전 뜰 안까지 침입해 들어가 거기서 제물로 드릴 짐승을 잡고 있던 갈릴리인 순례자들을 죽인 일이 있었다.”(실물, 212-213)

  2.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은 무엇이었으며,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는가?
    2-5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3.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동일한 표현으로 반복된 말씀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말씀 중에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무엇인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요 3:17을 읽고 대조되는 두 단어를 찾아보라.

  4. 6-9절에 기록된 [무화과 나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신 것은 무엇인가? 아래의 질문들에 답해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무화과 나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사5:7, 61:3)
    2) “열매가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사 5:2)
    3) “과원지기”는 누구의 역할을 말하는가?(사 27:3)

 

토의사항

  1. 이 세상에 일어나는 재난과 사고와 질병 등의 이유는 무엇일까?
    cf. 최근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재난과 사고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2.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통과 죽음의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3.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어떻게 드러난다고 설명할 수 있는가?
    cf. 호 14:1-8을 함께 읽고, 하나님의 심정과 우리의 할 일을 이야기 해 보자.

 

인간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지만, 설명하지 못하는 고통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할 자유는 없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에 의해 심판되어질 것이다.


1. 그때 마침. 그때는 아마도 AD 30~31년 겨울이었을 것이다. 예수는 시대의 징조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도중이었다.

 

두어 사람이…예수께 고하니. 이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이렇게 고하는 그들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들에게 어떤 저의(底意)가 있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는 듯하다.

 

와서. 이 학살 사건은 금방 있었고(실물교훈 212, 213,), 따라서 그리스도에게 말한 이 사람들이 가장 먼저 그 소식을 전해왔을 것이다.

 

갈릴리 사람들. 요세푸스가 유대 지방에서 빌라도와 그 밖에 여러 행정관료들에 의해 저질러진 유사한 대학살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이 학살은 누가 외에 다른 어떤 기자도 언급하지 않는다. 빌라도는 몇 년 후인 AD 36년에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는 사마리아인들을 학살한 일로 가이사에게 소환되었다.

 

섞은 일. 그들은 희생제사를 드리는 바로 그 행위를 하는 도중에 학살되었다.

 

2.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이 대답에는, 소식을 전한 자들과 예수 주위에 모여 있던 청중들이 어떤 면에서 이 학살을 목숨을 잃은 자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겼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참조 욥 4:7; 8:4, 20; 22:5; 요 9:1, 2). 예수는 이러한 판단을 단호하게 부정하고 있다. 적당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수는 고난을 죄에 대한 형벌로 보는 통념을 배격했다. 사고나 불행을 “하나님의 행위”로 보려는 유혹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혹하고 잔인한 아버지로 생각하게 하려고 애쓰는 사단에게서 왔다.

 

3. 회개치. 문자적으로는 “회개하라, 그리고 계속하여 회개하라.” 죄에 대한 형벌은 최후 심판의 큰 날에 받게 된다. 예수는 빌라도도 갈릴리 사람들도 정죄하지 않았다. 유대인 가운데 누구라도 예수가 빌라도의 잔혹함을 규탄해주기를 바랐다면, 그들은 실망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원하기만 하면, 겸비한 마음을 가지고 좀 더 완전하게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는 방법을 인생의 모든 경험에서 배울 수 있다. 절망이나 불행 그리고 재앙은 그것들을 목격하든지 경험하든지 겸손하고 수용적인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귀중한 교훈들을 가르쳐줄 수 있다.

 

6. 이에 비유로. 예수의 가르침과 비유 해석 원칙에 대해서는 제9권, 113~119을 참조하라. 이 비유를 통해 예수는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의 관계를 보여 주고자 했다(실물교훈, 212). 또한 이 비유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인간들이 적시에 회개해야 할 필요와 관련하여 설명한다.

 

포도원. 팔레스타인의 농원에서는 오늘날에도 포도나무 사이에서 자라는 무화과나무를 흔히 볼 수 있다.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는, 하나님은 열매 맺지 않은 사람들도 사랑하지만 그분의 자비가 결국 끝날 수 있다는 진리를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 무화과나무가 만족스러운 실과를 맺지 못한다면 베어질 것이었다(참조 사 5:1~7). 일반적인 의미에서 무화과나무는 모든 개인을 나타내며, 특별한 의미에서는 유대 민족을 대표한다.

 

7. 삼 년. 포도원 주인이 이 나무에서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 수령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이후로 3년이 흘렀다. 주인은 나무가 열매를 맺으려고만 했다면 충분히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찍어 버리라. 문자적으로, 포도원의 포도나무 “중에서” “베어내 버려라.”

 

땅만 버리느냐. 헬라어는 “또한”(also)이라는 단어를 추가하고 있다. 환언하면,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았으면 생산적으로 쓰일 땅도 차지하고 있었다. 유대민족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역할을 성취하는 일에 쓸모 없는 곳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계획을 수행하는 데도 장애물이 되었다(실물교훈, 215).

 

8. 그대로 두소서. “삼 년”(7절)은 예수의 공생애에 포함된 처음 3년을 상징적으로 가리킨다는 주장이 있어 왔다. 이제 예수가 침례받은 후 3년이 흘러(참조 마 4:12 주석) 십자가 사건이 있으려면 불과 몇 개월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참조 13:1 주석) 이때는 “삼 년”이 지난 후에 온 은혜의 해였다. 하나님의 자비는 여전히 유대 민족이 회개하고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도록 기다리며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또 한 번의 기회가 마지막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경고는 자비를 연장하는 것과 관계돼 있었다.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틀림없이 “과원지기”(참조 7절 주석)는 적어도 포도원의 다른 나무들만큼 그 나무를 돌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무가 열매 맺도록 도우려는 그의 마지막 노력은 이전보다 훨씬 더 한 것처럼 보인다(참조 마 21:37 주석; 사 5:1~4).

 

9.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if it bear fruit, well). 「제임스왕역」에 이탤릭체로 되어 있는 “well”은 첨가된 단어이다. 헬라어는 사상의 갑작스런 단절을 나타내는 보기 드문 표현법인 돈절법(頓節法, aposiopesis)을 사용하고 있다. 시험의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한 것이 없다.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누가복음 연구 2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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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2:35-48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42]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그분은 우리를 청지기로 삼으셨다. 믿음과 사랑으로 드린 우리의 가장 작은 헌물과 가장 비천한 봉사는, 영혼을 구원하여 주님을 섬기고 그분의 영광을 증진시키기 위한 헌신의 예물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관심과 번영은 모든 관심사를 능가하여야 한다. 쾌락과 이기적 관심을 생애의 주된 목적으로 삼는 자들은 충성스러운 청지기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기 위하여 자아를 부인하고, 자신과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봉사 사업에 드리는 자들은 이기적인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행복을 발견한다.”(1보감 377)

 

깨어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고유한 특성 곧 세상과 분리된 것을 나타내야 한다. 우리가 깨어 있는 것을 통해 우리는 세상에서 참으로 순례자며 나그네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본문연구

  1. 누가복음 12장 35~40절은 인자의 임함이 늦어질 것임을 가정하고 있다. 우리는 기다리는 시기에 살고 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살아갈 길을 어떻게 가르쳐 주는가?
    답:


  2. “예비”하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답:


  3. 현대 교회에 있어서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교회는 어떻게 세상을 향해 책임감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답:

이 말씀은 교회에서 책임을 가진 사람들-목사, 교회 직원 등등-에게 특히 적용된다. 권세(44절)는 계산하는 날에 책임(42, 43절)과 변명을 요구한다. 넓은 의미로, 그것은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에게 해당된다.

 

토의사항

  1. 깨어서 기다린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이야기 해 봅시다.

  2. 세상에서 내게 맡겨진 일들을 하면서 사는 삶과 깨어 주인을 기다리는 삶을 어떻게 조화시키는 것이 옳은 것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3. 예수님의 재림의 기별을 먼저 받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보여주어야 하는 삶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우리의 진정한 위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고용된 종으로서의 우리의 의무에 대해 올바른 관점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분은 당신의 고난의 생애와 흘리신 피로써 우리에게 삯을 미리 지불하심으로 당신 자신을 섬기도록 우리를 붙들어 매셨다. 우리가 가진 모든 좋은 것들은 우리 주님께로부터 빌린 것들이다.”(화잇주석, 눅 12:42)


“나는 세상의 근심에 씌여 있는 애착과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의 재물을 늘여 가면서 우리는 구주께서 명령하신 깨어 기다리는 위치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보았다. 천사는 말하였다. “그들은 세상하나만 얻을 수 있다. 하늘 보화를 얻으려는 그들은 세상의 것을 희생해야 한다. 그들은 두 세계를 다 얻을 수 없다.” 나는 사단의 속이는 덫을 빠져나오기 위해서 깨어 기다리는 일에 신실한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게 되었다. 그는 깨어 기다려야 할 사람들을 세상을 향해 한 발 전진하도록 유도하라. 그들은 앞으로 전진할 의향은 없지만 그 한 발을 뗀 만큼 예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 발을 떼기가 쉬워진다. 그리하여 한발 한발 세상을 향해 가게 된다. 결국은 그들과 세상의 차이는 신앙 고백 즉 명목만 남게 된다. 그들은 그들의 거룩하며 고유한 성격을 잃어버리고, 결국에는 그들과 그들 주위에 있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차이점이라는 것은 그들이 신앙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점밖에 없을 것이다.”(2증언, 193)

 

“세째 천사의 기별을 믿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경솔함과 농담과 경박한 행동으로 흔히 하나님의 사업에 손해를 준다. 나는 이 같은 악이 우리의 대열에 편만해 있는 것을 보았다. 주님 앞에 겸손해져야 한다. 하나님께 속한 이스라엘은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야 한다.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사람에게 칭찬받기를 하나님께 불쾌히 여김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천사는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대들을 심판하고 연약한 그대들의 생명의 줄을 끊어 버리심으로 심판을 위한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무방비 상태로 무덤에 내려가지 않도록 그대들의 마음을 정돈하라. 그대들이 하나님과 즉시 화평의 관계를 이루지 않고 그대 자신을 세상과 분리시키지 않으면서 무덤속에 침실을 마련하게 된다면, 그대들의 마음은 더욱 굳어지고, 그대들은 거짓된 도움 곧 가상적인 준비에 의존하게 되고, 그대들의 잘못을 너무 늦게 발견함으로 건전한 기초 위에 세워진 소망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나는 안식일 준수자라고 공언하는 자들 중 어떤 사람들이 연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를 꾸미기 위한 유행을 이것저것 연구함으로써 차라리 내어 버리는 것만 못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대 자신을 세상 사람들과 같은 모양으로 보이게 하고 할 수 있는 대로 아름답게 하고자 애쓰고 있을 때, 바로 그 육체가 며칠이 못 가서 벌레의 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대들이 그 육체를 그대들의 취향에 맞게, 또한 눈을 즐겁게 하도록 꾸미고 있는 동안, 그대는 사실상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는 셈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대의 허무하고 악한 교만을 미워하시고, 그대를 부패와 부정(不淨)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으로 보신다.”(1증언, 133-134)

 

 

35. 허리에 띠를 띠고. 즉 행동할 준비를 갖추고(참조 시 65:6 주석). 깨어 있으라는 것은 이 간단한 비유의 요지다. 예수는 여기서 처음으로 재림에 관하여 공개적으로 가르친다. 그의 지상봉사의 끝이 눈앞에 임박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승천 그리고 권능과 영광 가운데 있을 재림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키고자 했다. 이 비유는 주인의 다시 오심을 바라보고 바르게 살아가는 삶을 강조한다.

 

38. 이경. 대략 오후 9시와 자정 사이(참조 마 14:25 주석).

삼경. 대략 자정부터 오전 3시까지.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여느 때처럼, 베드로는 자칭 열두 제자의 대변인으로 활동한다(참조 마 14:28; 16:16; 17:14 주석).

 

모든 사람에게. 열두 제자와 무리들이 함께 있었다(참조 1절 주석). 따라서 베드로는, 깨어 있으라는 예수의 권고가 “주인”의 “종”으로서 특별히 제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전반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인지 의아해한 것 같다.

 

42.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 이것은 깨어 예비하는 일의 중요성을 보여 주기 위하여 주어진 여섯 개의 예증 가운데 두 번째 예증이다.

 

그 집 종들을 맡아. 이 비유는 특별히 “믿음의 권속”(갈 6:10; 참조 엡 2:19)의 종교적, 영적 지도자들에게 적용되는데, 그들의 의무는 구성원들의 필요를 공급하고 그리스도의 오심이 임박했음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을 교훈과 모본으로써 증거하는 것이다.

 

때를 따라 양식을. “제때에 양식을”(「개정표준역」).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벧전 5:2)고 깨어 준비하는 일의 본이 되는 것(3절)은 목자의 의무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양떼를 셈하라고 요구할 것이고, 따라서 목자들은 각기 맡겨진 책임을 신실하게 수행해야 한다(참조 겔 34:2~10).

 

43. 복이 있으리로다. 즉 “행복하리로다”(참조 5:3 주석).

 

44. 그 모든 소유를. 즉 그는 더 큰 책임을 맡게 될 것이다(참조 24:21 주석). 보디발 집에서의 요셉의 경험과 비교해 보라(참조 창 39:3~6).

 

45. 마음에 생각하기를. 그 “악한 종”은 주인이 더디 올 것이라는 믿음을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의 생활방식으로 주인을 배반하고 있다. 그는 주인이 곧 돌아오리라고 믿는 것처럼 행동하지는 않는다.

 

주인이 더디 오리라. 그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의 실제성을 부인하는 “기롱하는 자”는 아니었다(벧후 3:4). 그는 믿는 체한다. 사실 그는 “믿음의 권속”들에게 주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도록 도와줄 영적인 양식을 공급할 책임을 져왔다(참조 24:45 주석). 그러나 그의 말에는 확신이 없다. 그는 진정으로 하지 않았다. 그의 삶과 일은 주가 곧 오신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는다. 위기의 때에 그는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민 16:48) 서지 않는다.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봉사하지도 않으며, 또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딤후 4:2)지도 않고 오히려 자기 교인들의 “가려운 귀”에 부응하도록 기별을 조절한다(3절). 그는 “그리스도의 강림이 임박했다는 기별도 사람들에게 그들이 세상일에 너무 골몰하고 있음을 깨우치기 위하여 주어진”(실물교훈, 228) 것임을 잊고 있다.

 

노비를 때리며. 자신을 돌보는 것을 주업으로 삼고 자기 양들에게는 무자비하여 그 무리를 흩어버리는 목자들에 대한 에스겔의 통렬한 비난과 비교해 보라(겔 34:2~10).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하나님은,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은 진리와 의무에 대한 지식으로 사람의 책임을 평가한다.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단순히 말만 하는 단순한 공언은 무가치하다. 하나님을 아는 체하지만, 아직 그의 계명을 불순종하는 자는 그 겉모습의 어떠함과 관계없이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요일 2:4).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때 그 뜻을 행하는 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수반하나, 혹 그 행함이 가식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는 말은 진실이다. 그러나 진지하고 열렬한 믿음이 수반되지 않은 행함 역시 죽은 것이라는 것도 진실이다(히 11:6).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자들에게는 그 책임이 지워지지 않는다(눅 12:47, 48). 그러나 마음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그들 자신이 선택한 길을 고집한 자들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으며(요 15:22), 참람될 위험이 있다.

 

48. 알지 못하고 빛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기준과 진리와 빛의 지식이 풍부한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기준은 전혀 다르다. 어떤 단계의 의는 그리스도교계 사람들이 행한 일일 때는 하나님께서 별로 만족히 여기시지 않지만 이방 나라 사람들이 행한 일일 때는 만족히 여기시고 받으신다. 그분은 많이 주시지 않은 곳에는 많이 요구하시지도 않으신다 (원고 130, 1899)

 

 

재물에 대한 가르침, 누가복음 연구 2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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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2:13-34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3]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6]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참고. 볼드체는 예수님의 말씀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자신을 하나님의 지도에 맡기며 안전한 길로 인도해 주시도록 구하게 된다.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면서 스스로 택한 길을 가고자 결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실 그분의 손을 기다리며,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사 30:21)고 하시는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산상보훈, 117-118)

 

시대를 무론하고 재물에 대한 탐심은 사람들을 지배해 오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소유에 대하여 어떠한 권면을 주시는지 살펴보자.

 

본문연구

  1. 예수님의 비유와 가르침은 각각 누구에게 하신 것인지 찾아 적어보라.
    1) 13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15, 16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22, 32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13절의 “무리”는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다(1절), 반면, 32절의 “적은 무리”는 그와 대조되는 듯하다.
    cf. 일반적인 사람들, 탐심이 많은 특정한 사람, 그리스도인들에게 재물에 대한 가르침은 차이가 있는가?

  2. 본문에서 재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각자 찾아서 발표 하고 설명해 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15절, 21절, 23절, 29절, 31절, 34절 등이 아닐까?

  3. 본문의 말씀들을 참고하여 다음 질문들에 대한 적절한 답이나 설명을 적어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재물은 최고의 가치를 갖고 있는가? (15절)
    2) 재물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태도는 무엇인가? (34절, 18-19절, 29-30절)
    3) 탐심을 물리치고 ‘하나님게 대하여 부요케 되는 한 가지 방법은 무엇인가? (21, 33절)
    cf. “자신과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봉사 사업에 드리는 자들은 이기적인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행복을 발견한다.”(화잇주석, 눅 12:42)

 

토의사항

  1. 재물에 대한 각자의 가치기준과 생각들을 이야기 해 보자.

  2. 그리스도인은 물질만능주의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일에 어떤 자세를 취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3. 16절~21절에 있는 비유에 나온 부자는 왜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가진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4. 그리스도인과 부자에 대해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지 서로 나누어 봅시다.

 

우리는 재물을 넘어선 인생의 참된 가치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 재물 자체보다 그것을 주신 분에 대한 인정과 감사, 그리고 재물의 올바른 사용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13. 한 사람. 즉 예수를 대접한 바리새인(참조 11:37)의 집 밖 거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무리 가운데 한 사람(참조 1절). 예수에게 말을 건넨 이 사람은, 주님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단호하게 꾸짖는 것과 정사 잡은 자들 앞에 출두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자들에게 권면하는 것을 들었다. 이 사람은, 예수가 동일하게 대담한 권위로 자신의 형에게 말한다면 그 말을 감히 거역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 사람은 천국복음을 자신의 이기적인 관심을 발전시키는 수단 이상으로 생각지 않았다.

 

유업을…나누게. 상속에 관한 모세의 율법에 따라, 형이 아버지의 유산의 두 몫을 받았고 남은 형제들은 각각 한 몫씩 받았다(참조 신 21:17 주석). 아마도 이 경우에 예수에게 호소하고 법적으로 할당된 두 배의 몫을 형이 취하는 것을 반대한 이는 동생이었을 것이다.

 

14.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 예수가 와서 선포한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었다(참조 요 18:36). 사회적 정의를 이루는 일이 중요하지만 그는 제자들에게 그 일을 위탁하지 않았고, 어떤 경우에도 인간들 사이에서 법적 판결을 내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참조 요 8:3~11). 구약의 선지자들(미 6:8 등)과 마찬가지로, 예수도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에 적용해야 할 원칙들은 분명하게 말했지만(참조 마 5:38~47; 6:14, 15; 7:1~6, 12; 22:39 주석), 사회정의를 집행하는 일은 정당하게 임명된 국가 위정자들에게 위탁했다. 예수는 이러한 원칙에서 벗어난 적이 없으며, 따라서 그의 이름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자들은 다른 점에서뿐만 아니라 이점에서도 그의 모본을 잘 따를 것이다(실물교훈, 254).

 

15. 탐심. 헬라어 플레오넥시아(pleonexia, 참조 막 7:22 주석). 탐심은 삶에 관련된 물질적인 소유들, 특히 다른 이들에게 속한 소유에 대한 부당한 애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예수에게 말을 건넨 그 사람은 물질이 더 필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에서 탐심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되면 그에게 부(富)가 그리 큰 관심사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마음 속에 더 이상 탐심이 없다면, 해결할 분쟁도 없을 것이다. 늘 그렇듯이, 예수는 문제의 뿌리에 접근했고 미구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유사한 문제들을 막을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그는 오늘날 소위 사회복음(social gospel)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임시변통의 치료약을 천거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높은 임금(賃金)이나 더 큰 수익(收益)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생필품들을 “더하시”리라는 충만한 확신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도록 이끌어주는 마음과 정신의 변화가 필요하다(참조 마 6:33).

 

소유의 넉넉한 데. 물질주의는 오늘날 세계의 많은 주된 문제들의 뿌리다. 그것은 대부분의 정치 및 경제 철학에 기초를 제공하며, 따라서 인류에게 재앙을 몰고 오는 대부분의 계층 및 국가 간 투쟁에 원인을 제공한다. 우리의 소유에 대한 불만족은 자신 스스로 정직하게 애쓰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소유의 일부나 전부를 포기하도록 강요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확보하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탐심은 세상이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의 원인이다.

예수에게 형의 행동을 심판하는 역할을 해달라고 호소했던 사람의 요청은, 어떤 기업가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많은 이윤을 움켜쥐려는 정신 그리고 몇몇 노동자들이 생산성에 공헌한 자신의 가치나 고용주의 지불능력에 아랑곳하지 않고 항상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하는 것과 동일한 정신에 의해 촉발되었다. 이는 나라의 어떤 법률이 다른 집단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는 상관도 하지 않은 채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법률제정을 이끌려는 이익집단이 가지는 정신이며, 국민들의 염원과 최대 관심사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국정만을 관철하려는 국가를 이끄는 정신이다. 또한 자주 결손 가정, 청소년 범죄 그리고 그밖에 수많은 범죄들을 양산(量産)하게 하는 정신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모든 자들에게 진정한 시각으로 이생의 물질적 소유를 바라보고 이것들을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에 종속시키라고 요청한다(참조 마 6:24~34; 요 6:27 주석).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견해와는 달리, 더 많은 “물질”이 반드시 더 많은 행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행복은 “물질”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정신에 달려 있다(참조 전 2:1~11 주석).

 

16. 밭. 사람이 땅에 씨를 묻고 최선을 다해 돌보지만 씨가 자라도록 하는 분은 하나님이다. 사람이 성장 과정에 기여할 수는 있지만, 자라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다(참조 고전 3:6, 7). 하나님은 햇빛과 비를 주며(참조 마 5:45 주석), “결실기”(結實期)를 허락함으로 인간의 수고를 축복한다(참조 행 14:17).

이스라엘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은 “재물 얻을 능력”을 사람에게 주신 분이 당신임을 잊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준 것에 대해 자신에게 영예를 돌리는 경향이 있어서,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신 8:17)라고 말하기 십상이다. 이것은 치명적 기만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질 것이다(참조 롬 1:21). 그는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하나님 보기에 “우준”(愚蠢)하게 된다(참조 롬 1:22). 만약 그가 그러한 길을 고집한다면 마침내 완전히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물질적인 행복과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참조 롬 1:23~32). 그는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게 된다(딤후 3:4).

 

17. 둘 곳이 없으니. 쌓아 둘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풍족하게 베푼 물질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이기적인 관심이 동료 인간들의 필요에 대해 눈멀게 했다(참조 16:19~31 주석).

 

18. 내 모든 곡식. 그의 소유욕을 나타내는 표현에 주목하라. “내 곡식들”, “내 곳간”, “내 물건”, “내 영혼”(참조 호 2:5). 그의 생각은 모두 자신에 관한 것뿐이었다. 분명히 그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 19:17)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생각하고 계획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이 보기에 지각이 없는 자이다(참조 11:40 주석). 천국 복음의 목적은 사람들의 생각을 자아에게서 돌려 위로 하나님을 향하게 하고, 밖으로 동료 인간들을 향하게 하는 것이다.

 

22. 염려하지 말라. 예수는 여기서 금욕주의를 천거하거나, 가난을 장려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근면하고 자산 있는 사람보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주의한 사람을 가납한다고 단언하지 않는다. 예수는 사적인 일과 사업적인 일을 경영할 때 신중한 태도를 취하라고 충고했다. 그가 정죄하는 것은 삶에서 물질적인 것, 특히 생활에 필요한 것 이상의 물질들에 대하여 염려하는 습성이다. 그는 어느 방향이든 무절제로 이끌어 가는 욕망을 정죄한다. 그리스도인은 사물의 비교 가치에 대한 식별력을 소유할 것이며, 따라서 그의 관심은 그 가치에 비례할 것이다. 그는 재물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재물은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한 수단임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삶의 최고 목적을 재물을 축적하는 데 두지 않을 것이다.

 

23. 음식. 예수는 훨씬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중요한 것은 생명 자체라고 말한다. 음식도 중요하지만 음식 자체가 목적은 아니며 그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음식과 의복을 얻는 것을 자신의 주요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 것이다. 우리는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먹는다(참조 막 2:27).

 

28. 너희일까보냐. 생명을 주신 그분은 분명 음식과 의복이라는 더 작은 선물도 주실 것이다. 그분은 자신이 부여한 생명을 보존하는 일에 변덕스럽게 관심도 갖지 않고 방관만 하고 서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분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온당하다.

 

30. 세상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일은 천국 시민들에게 적절하지 않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이나 다름없는 것들을 얻기 위해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버린다는 것은 온당치 않다(30절).

 

31. 너희는 먼저…구하라. 인간의 삶의 위대한 목적은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하는 것이다(행 17:27). 대부분의 사람들은 “썩는 양식을 위하여”(요 6:27),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를 물(요 4:13)을 위하여 일하는 데 몰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한다(사 55:2). 우리는 매우 자주, 하나님이 관대하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 여정 끝에 7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영원한 왕국을 더해줄 것이라는 헛된 희망으로 “이 모든 (물질적인) 것들”을 인생의 주요 목적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첫째 일을 첫째로 삼기를 바라며, 덜 중요한 것과 덜 가치 있는 것은 필요에 따라 각 사람에게 공급될 것이라고 보증한다.

 

그의 나라 모든 시대를 통해 이 세상 왕국이 결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 될 것이라는 약속(계 11:15)은, 은혜의 왕국 시민들이 거룩한 생애를 살며(요일 3:2, 3) 그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자기를 희생하도록 고무시켰다(참조 행 20:24; 딤후 4:6~8). 모든 시대의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정신 속에서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딛 2:13)이 항상 최고 우선적인 자리를 차지했으며 그들이 더욱 거룩한 생애를 살도록 북돋았다.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을 떠나 그의 왕국의 시민이 되지 않는다면, 안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염려에 대한 최상의 치료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몫을 충실히 이행한다면, 천국을 우리의 사상과 생애에서 첫째로 삼는다면 하나님은 삶의 여정에서 우리를 돌보아 주실 것이다. 그는 자비롭게도 우리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실” 것이며(참조 17절 주석), 우리의 경험의 잔은 좋은 것으로 넘칠 것이다(시 23:6).

 

 

 

기도에 대한 가르침, 누가복음 연구 1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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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1:1-13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6]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함께 나와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참고. 굵은 글씨는 예수님의 말씀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자신을 하나님의 지도에 맡기며 안전한 길로 인도해 주시도록 구하게 된다.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면서 스스로 택한 길을 가고자 결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실 그분의 손을 기다리며,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사 30:21)고 하시는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산상보훈, 117-118)

 

우리의 구주께서는 주의 기도를 두 번 가르치셨는데, 한 번은 산상 설교를 듣던 무리에게 하시고, 또 한 번은 그로부터 몇 달 후 제자들만 있는 데서 하셨다.-산상보훈, 102.

 

본문연구

  1. 본문에서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각각의 내용을 요약하고 특징들을 설명해 보라.
    1) 2-4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5-8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9-13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제자들은 왜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까? 우리에게도 기도의 필요성이 있을까?
    1
    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제자들은 그분의 기도하시는 모습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cf.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과 사업의 능력이 그분의 기도 시간과 관련이 있다고 결론지었 다...그들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하고 부르짖은 것은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 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산상보훈, 103)

  3. 우리가 기도(간구,요청)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가?
    13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우리가 구하는 것과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은 다를 수 있을까?
    cf. 어떤 이유에서 ‘성령’이 가장 좋은 것일까?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실 때 우리의 마음은 부드럽고 겸손해지며, 시험은 그 힘을 잃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품성을 변화시키게 된다.”(상동, 118)

 

토의사항

  1. 우리는 1)왜 기도하며 2)무엇을 기도하며 3)어떻게 기도하는가? 서로의 기도생활을 나누어 보자.

  2. “기도는 생활이다.” 라는 말을 어떻게 나의 생활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3.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고 응답해 주시는 데 우리는 왜 계속 기도해야 하는가?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가운데 생활하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결코 놓지 않을 손으로 그대를 굳게 붙들어 주실 것이다. - 상동, 119

 

기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처럼 스스로가 기도의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구하고 기도할지를 아는 것은 참으로 큰 능력을 소유하는 비결임에 틀림없다.


1. 예수께서…기도하시고. [기도에 관한 가르침, 11:1~13]. 누가는 이 사건이 일어난 시간이나 장소에 관하여 명확한 사항을 기록하지 않는다. 누가가 연대기적 순서를 따라 기록하였다면, 이 일은 베다니를 방문한 직후에(10:38~42)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예수가 수전절에 참석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한 때쯤이었을 것이며 이때 그를 돌로 쳐죽이려는 시도가 있었다(시대의 소망, 470; 참조 눅 17:1; 요 10:22, 31, 33 주석). 이 사건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났거나 혹은 예루살렘이 아니면 아마도 페래아 지방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이즈음에 일어난 사건들에 관한 추가적인 정보를 보려면 마 19:1 주석을 참조하라. 그때는 예수가 흔히 이러한 기도를 드리던 이른 아침이었을지도 모른다(실물교훈, 139). 이때 제자들은 선교하러 갔든지(참조 10:1 주석) 혹은 자신들의 집에 잠깐 다니러갔든지(참조 시대의 소망, 259) 해서 부재중이었다(실물교훈, 140). 예수의 개인적인 기도생활에 대해서는 막 1:35; 3:13 주석을 참조하라.

 

요한이…가르친 것과 같이. 성경의 다른 어떤 곳에도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를 따르는 자들과 합류한 이후에 자신들의 이전 스승에게 배운 것들을 언급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기도를…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제자들은 예수가 기도할 때 마치 친구가 친구에게 하듯 하늘 아버지와 친밀하게 교통하는 것을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의 기도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기도와 달랐고, 사실 그들이 들어왔던 어떤 기도와도 달랐다. 틀에 박힌 말들로 하나님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비인격적인 분처럼 생각하고 드린 형식적인 기도에는 기도의 특징이 되어야 할 진실성과 생명력이 결핍되어 있다. 제자들은 예수가 기도한 것처럼 기도할 수만 있다면, 제자들로서 그들 자신의 능력이 크게 증대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가 이미 기도하는 방법에 대한 교훈(마 6:7~15)과 실례(9:29)를 그들에게 가르친 사실에 비춰볼 때, 이 경우는 과거의 유사한 상황에서 예수와 함께 있지 않았던 몇몇 제자에게 받은 요청인 것 같다. “제자들”이라는 용어를 열두 제자에게 제한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 이 제자들은 70인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는 요청에 부응하여, 예수는 모본이 되는 기도와 기도의 정신을 묘사하는 비유 그리고 기도할 때 가져야 할 신실함과 근면을 독려하는 교훈을 주었다(11:2~13).

 

2. 이렇게 하라. 이 기도는 예수가 해오던 기도의 유형이 아니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제자들의 기도’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것은 실수를 범하기 쉬운 인간들에게 더 적합해 보인다. 이를테면, 예수는 죄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할 필요가 없었다. 예수가 이전에 제시한 기도에 대해서는 마 6:9~13 주석을 참조하라(참조 실물교훈, 140).

 

6.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그 사람에게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그가 왜 밤중에 도움을 구하러 왔는지를 설명해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 15:5)는 자각이 우리를 영적 양식의 위대한 원천으로 이끈다(참조 요 6:27~58). 모든 이의 위대한 친구와 사귐을 갖도록 도와 주기 위해 사람들과 교제하고자 하는 자들은 다른 이들에게 나눠 주길 그토록 열렬히 원하는 하늘의 양식이 자신들에게 없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7.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라는 말이 나오도록 만든 것은 인색함이 아니라 방해받는 것이 싫어서였다. 일단 침소를 박차고 일어나는 수고를 치르고 난 후에 그는 필요한 모든 떡을 밤에 찾아온 손님에게 제공하였다(8절).

때때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당신을 귀찮게 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분으로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사려 깊고 자애로우며 관대한 아버지로서의 그의 진정한 품성이 9~13절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마지못해 일어나서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벗의 모습은 결코 하나님을 나타내 주는 행동이 아니다(참조 13절). 이 비유는 비교가 아니라 대조로써 교훈을 제시한다.

 

8. 강청. 헬라어 아나이데이아(anaideia). 문자적으로 “파렴치함” 혹은 “뻔뻔스러움.” 거듭하여 집주인은 밤중에 찾아온 방문자의 긴급한 호소를 거절했으나(참조 실물교훈, 143), 그 방문자는 ‘안 된다’는 대답을 듣지 않으려 했다. “참된 믿음에는 시간의 경과나 수고의 과중함으로도 쇠약하게 만들 수 없는 회복력과 원칙에 대한 확고함과 목적에 대한 견인불발의 정신이 있다”(실물교훈, 147). 이곳의 비유는 다시 한 번 유사한 비교보다는 상반되는 대조를 통해 가르친다(참조 7절 주석). 하나님은 이 세상의 자녀들에게 유익한 것을 마지못해 주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선한 일을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도 설득하거나 부추긴다고 하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알며 그것들을 충분히 채워 줄 수 있으며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엡 3:20) 채워 주기를 원한다.

 

9. 구하라. 기도는 어떤 문제에 대한 우리의 뜻을 받아들이도록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그분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는 구하기도 전에 우리의 필요를 알고, 더욱이 우리에게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도 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우리 자신의 가장 큰 필요가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자주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고 오히려 해가 되는 것들을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우리의 가장 큰 필요를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참조 실물교훈, 145). 기도는 우리의 의지와 삶을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게 할 것이다(참조 실물교훈, 143). 기도는 우리의 욕망을 훈련하기 위해 하나님이 정한 방법이다. 기도의 진정한 목적은 하나님 안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며, 이로써 하나님이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빌 2:13).

하나님은 진실한 탄원자가 겸손과 믿음으로 드리는 모든 탄원에 응답을 보낼 것이다. 하나님은 “그래”라고 하거나 “안 된다”라고 할 수도 있고, 단순히 “기다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때때로 기도의 응답이 지체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응답하기 전에 우리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참조 시대의 소망, 200). 응답받는 기도에는 분명한 조건이 있으며, 따라서 지체되는 것처럼 보이면 우리에게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할 수 있도록 해주는 조건들에 부응하지 않으면서 안달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다.

이 비유의 중심 교훈은 물론 끈기 있는 기도이다. 이 비유는 또한 우리 주님이 끈기 있게 하라고 권고한 기도의 유형-동료 인간들의 복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목적으로 삼는 기도들-이 무엇인지를 정의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우리도 받을 수 있다”(실물교훈, 149). 기도자의 변덕스러움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약 1:17)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 기도에 변덕을 부리는 사람은 사실 하나님께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 “요동하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지 말아야 한다(약 1:6, 7).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들과 조화되는 삶을 죄인들 스스로 조정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청중들에게 그리스도인 삶을 위한 능력의 원천을 설명한다. 왕국의 시민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바로 그들이 구하는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능력이 연합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구하는 자들은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9~11절). 하나님은 하늘의 선물들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를 취급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취급하지 않는다(1~6절). 그는 은혜롭고 자비로운 분이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누가복음 연구 1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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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0:25-37

[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 교훈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당시보다 오늘날 더욱 필요하다. 이기심과 냉정한 형식주의는 사랑의 불길을 거의 꺼버렸으며 품성을 향기롭게 할 은혜를 쫓아 버렸다. 그리스도인임을 공언하는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대표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가정 내에서, 이웃 간에, 교회에서,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남의 유익을 위하여 실제적으로 자아를 희생하지 않는 한, 우리가 무엇을 공언하든지 간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관심을 인간의 관심과 연결시키시고 우리에게 인간을 구원하는 사업에 그와 하나가 되라고 요청하신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8)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모든 악한 것들 중에 가장 큰 것이 죄이지만, 죄인을 동정하고 도와주는 일이 우리의 할 일이다. 과오를 범하고 수치심과 자신의 어리석음을 느끼는 많은 사람이 있다. 그들은 격려의 말에 굶주리고 있다. 그들은 잘못과 과오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거의 절망 직전까지 내몰린다. 우리는 이런 영혼들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도움이 가장 필요되는 바로 그 사람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피하여 다른 길로 지나가 버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병으로 인한 것이든 죄로 인한 것이든 곤경에 빠진 인간들을 볼 때 이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라고 결코 말하지 말 것이다.”(소망, 504)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율법사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도전적인 답변이었다. 영생은 율법의 참 정신을 행하는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

 

본문연구

  1. 율법사의 두 가지 질문은 무엇이었나? 또한 질문의 의도와 동기는 어떠했는가?
    25, 29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율법사’에 관한 눅 7:30; 11:46의 언급을 통해 어떤 부류의 사람이었는지 참고하라.

  2. 율법사의 첫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인가?
    26-28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율법사가 말한 율법의 핵심은 율법서인 신 6:5과 레 19:18를 인용한 것이다.
    cf. 율법사의 율법에 대한 이해는 옳은 것이었는가? 마 22:37-40, 갈 5:14, 약 2:8에서의 예수님과 바울과 야고보의 율법에 대한 이해와 비교해 보라.

  3.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하여 대답해 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이야기에서 그냥 지나간 이들은 왜 하필 ‘제사장’과 ‘레위인’인가?
    cf. 사마리아인은 어떤 점에서 좋은 이웃인가? 그는 율법을 행했는가? 영생을 얻을까?
“이렇게 하여 “누가 내 이웃이니이까”라는 질문은 영원한 답을 얻었다. 그리스도께서 는 우리의 이웃이 단순히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교회나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보이셨다. 그것은 인종이나 피부색이나 계급의 구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리의 이웃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이다. 대적에게 상처 받아 죽게 된 영혼은 누구나 우리의 이웃이다. 하나님의 소유인 모든 사람은 다 우리의 이웃이다.”(소망, 503)

 

토의사항

  1. 영생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까? 의도된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우리는 율법을 어떤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또 율법의 말씀대로 행한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서로 나누어 봅시다.

  3. 다른 사람을 향하여 내가 가진 편견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편견을 해결할수 있을까요?
우리가 형제들에게 나타내는 정신이 곧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정신이 어떠한지를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있을 때에만 이웃에 대한 사랑이 솟아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는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20,12). - 소망, 505

25. 어떤 율법사. 이 사람들은 오늘날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인 “법관들”(lawyers)이 아니었다. 그들은 유대교의 율법학자이명 율법의 해설자였다. 그들 중 대다수는 바리새인이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법과 기록된 법을 해설하는 이 직업 교사들은 예수와 계속 논박(論駁)중에 있었다. 그들은 자주, 심지어는 일상생활의 가장 사소한 행동들의 적법성까지 규명하려고 하는 철저한 율법주의를 과시했다. 그들은 성경을 분명하게 하기보다는 그 뜻에 의심을 품게끔 설명했으며, 그들이 성경과 동등하거나 월등하게 여긴 조상들의 유전을 지키기에 여념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렸다(7:9, 13). 그래서 그들은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예수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마지막 여행 중이었다. 이 사건이 여리고 지역에서 일어난 일임이 이야기 속에 암시되어 있다. 사마리아인과 강도 만난 사람과 관련된 사건은 최근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499). 예수는 율법사와 만나 선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이야기를 한 직후, 여리고에서 올라와 베다니에 있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525). 수전절에 참석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이었고, 그후에 페래아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있다(요 10:39, 40). 요한은 그리스도가 페래아로 물러난 사건 바로 다음에(39, 40절) 나사로를 살린 이야기를 기록한다(11:1~46).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사의 질문은 의에 대한 그의 생각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준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구원을 얻는 것은 본질적으로 서기관이 규정한 것들을 행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헬라어 본문에서의 강조점은 “하여야”라는 말에 있다.

 

26. 네가 어떻게 읽느냐.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율법사의 일이었다. 그는 유대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였고, 따라서 이처럼 그에게 대답할 기회를 주는 것은 매우 적절했다. 예수의 질문이 반드시 견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자신의 질문에 대답할 기회를 주는 것은 정중한 행동이었다.

 

27. 사랑하라. 율법사는 신 6:5을 인용한다(참조 11:13). 예수가 나중에 또 다른 율법사가 던진 이와 동일한 질문에 대해 같은 대답을 한 마 22:36~38과 비교하라. 신 6:5은 쉐마(s∨ema‘)의 일부로 독실한 유대교 신자들이 조석으로 암송하는 말씀이며, 또한 경문(經文)으로 착용했다(참조 출 13:9 주석). “율법”의 영적 의미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 유대인이라면 그 원칙들이 독단적인 것이 아니고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적절하게 요약될 수 있는 근본 원리들에 기초해 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의미는 전 존재와 애정과 생명 그리고 육체적 및 지적 능력을 그분을 위한 봉사에 바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 13:10)이며,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계명”(요 14:15; 15:9, 10)을 “지키기” 시작할 때 거하게 될 “사랑”이다. 사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낸 것은 우리가 이러한 의미와 정신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가능함을 가르쳐 주기 위한 특별한 목적 때문이었다. “율법의 의”는 이와 같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된다(롬 8:3, 4).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그의 계명”을 지킬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서 “온전케” 되었기 때문이다(요일 2:4~6; 참조 마 5:48 주석).

 

28. 네 대답이 옳도다. 나중에 예수가 또 다른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 같은 대답을 했을 때, 그 질문자는 “선생님이여 옳소이다”라는 말로 그를 칭찬하였다(막 12:32). 그리스도의 대답은 율법의 구전된 해설과 기록된 해설 모두 그리고 심지어는 율법 자체의 모든 구체적인 명령들을 능가하였다. 넓은 의미로 “율법”과 좁은 의미로 십계명인 “율법”의 모든 명령은 “사랑”이라는 원칙의 표현이고 확대이며 적용이다. 율법사가 대답한 표현은 전적으로 옳았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자신의 삶에 이 원칙을 적용하는 영적 통찰력이었다. 그는 율법의 자구(字句)는 알고 있었으나 그 정신은 알지 못했다. 이러한 지식은 오직 율법의 원칙들을 생활에 적용할 때 이르러 온다(참조 요 7:17 주석).

 

이를 행하라. 헬라어에 의하면 “계속하여 이를 행하라”, 다시 말해 이 원칙들을 네 삶에 적용하기 시작하고, 계속하여 적용하라. 젊은 부자 관원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도 어려서부터 모든 것을 지켜왔다고 생각했으나(참조 마 19:20) 여전히 그의 영적인 생활 가운데 부족함이 있음을 느끼고 있는 사실에 그의 문제가 있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삶을 “강권하기” 전에는 치명적으로 부족한 어떤 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율법적인 의는 결코 영혼을 만족시키지 못한다(참조 고후 5:14). 인간은 오직 그 사랑의 감화력(참조 10:27 주석)에 온전히 굴복할 때만 진정으로 율법의 정신을 지킬 수 있다(참조 롬 8:3, 4).

 

살리라. 단어의 온전한 의미는 현세뿐만 아니라 내세(참조 요 10:10 주석)에도 “살리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문맥에 비춰 볼 때, 예수가 여기서 일차적으로 가리킨 것은 영생이다.

 

29. 자기를 옳게. 젊은 부자 관원(마 19:16~22)과 마찬가지로 이 율법사도 의에 대한 바리새적 개념으로 만족하지 않았다(참조 시대의 소망, 497). 젊은 부자 관원처럼 그도 자기의 삶 속에 부족함이 있음을 분명하게 깨달았으며, 자기도 모르게 예수가 그것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니고데모(참조 요 3:2, 3 주석)처럼, 그는 심지어 자신도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는 자신의 내적 자책감을 회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는 동료 인간들을 실제로 사랑하는 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했다(참조 시대의 소망, 498).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참조 5:43 주석. 헬라어로 보면 강조점이 대명사인 “누구”에 있다. 이 질문의 목적은 죄의식을 회피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데 있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498). 그 대답을 분명히 알고 있거나 알 만한 이 사람이 딴청부리는 질문을 던진 것으로 보아, 그가 양심의 가책 아래 있으며(참조 요 4:18~20) 자신의 양심이 행하라고 촉구하는 것을 행하지 않기 위한 어떤 이유나 변명을 찾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율법사의 생각에는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들은 “이웃”의 범주에서 제외되어 있었고 오직 질문은 그가 “이웃”으로 생각한 동포 이스라엘인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에 놓여 있었다.

 

30. 어떤 사람. 이것은 실제 사건이었고, 아마도 이 사건에 연루된 제사장과 레위인의 고향인 여리고의 최근 뉴스였을 것이다. 이들 제사장과 레위인은 사건에 등장했다(시대의 소망, 499).

 

예루살렘에서…내려가다가. “내려가다”라는 말은 해발 약 792미터인 예루살렘에서 해면보다 213미터 낮은 여리고로 가는 내리막길을 묘사하는 적절한 표현이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간선 도로는 황량하고 인적이 드문 유대 광야의 구릉지대를 따라 와디 켈트(Wa^di- Qelt)를 지나간다. 와디 켈트 지역이 갑자기 좁아져 바위가 많은 협곡으로 진입하는 지점은 예로부터 강도들의 소굴이었다. 전 지역이 수많은 동굴과 바위로 쌓여 있어 무법자들에게 완벽한 은신처를 제공했다.

 

31. 지나가고. 분명히 보지 못해 지나친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위선은 귀찮은 일에서 이기심을 가리는 가면이 되었다. 이 불행한 길손은 옷 벗김 당하고 상처 입어(참조 30, 34절) 피와 흙먼지로 뒤범벅 되어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 불운한 사람이 죽었다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그를 만지는 것은 의식적(儀式的)으로 부정함을 의미하였다(참조 민 19:11~22). 더욱이 그는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직계가족을 제외한 어떤 경우에도, 제사장이 시체를 만지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참조 레 21:1~4).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했을 때 틀림없이 마음속에 이와 같은 많은 핑곗거리들이 스쳐지나갔을 것이다.

 

33. 어떤 사마리아인.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에게 행한 일이 타지에서 여행 중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그의 자비의 행위를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지역으로 볼 때 이 불행한 길손은 사마리아인들에게 가장 혹독한 적대감을 품은 한 족속 곧 유대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길가에 쓰러져 있는 상처 입은 희생자라고 해도 어느 유대인에게도 자비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마리아인은 자신에게 닥칠지도 모를 강도들의 습격을 무릅쓰고 불쌍한 희생자를 돕기로 결심했다. 매우 실제적인 방법으로 사마리아인이 베푼 자비는, 하나님의 아들을 감동시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게 한 정신을 반영한다.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도 여리고로 가는 도상에서 불쌍한 여행자를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죄인들을 지나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받기에 합당한 대우를 받게 하고자 우리가 받아야 마땅한 대우를” 기꺼이 받았다.

 

34. 내가…갚으리라. 헬라어는 “내가”를 강조한다. “데나리온 둘”은 단지 선불이었다. 틀림없이 상처 입은 여행자가 충분히 회복되어 자기의 갈 길을 계속하기까지는 여러 날이 걸릴 것이었다(참조 30절). 이로 보건대, 그 동정심 많은 사마리아인은 낯선 사람을 위해 완전히 책임을 짊어진 것이다. 그 사고는 유대 땅에서 일어났고 사고를 당한 사람은 십중팔구 유대인이었고 여관 주인도 유대인이었을 것이므로 그는 사마리아인으로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마리아인의 관심은 순간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했다. 낯선 자를 위한 그의 관심은 행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를 훨씬 뛰어넘어 계속되었다.

 

37. 베푼. 어떤 상황에서 단지 자비를 베풀려는 생각만 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 생각을 실천해야 한다. 율법사는 이야기의 요점을 알았다. 그것은 자신의 질문에 대한 적절하고도 효과적인 대답이었다(참조 29절). 삶에서 실제로 벌어진 이 이야기에서 예수는 누가 이웃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모든 율법적인 핑곗거리를 일소해 버렸다(참조 29절 주석). 이웃이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을 말한다.

그 진정한 이웃이 율법사의 동료들 중 한 사람, 어쩌면 그의 친구 중 한 사람의 생명을 구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에서 아무런 흠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예수가 “이웃”에 대해 내린 정의가 참되다는 것을 마음속 깊이 인정했다. 그는 율법사로서 율법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예수의 깊은 이해를 다른 청중들보다 훨씬 더 완전하게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선생으로서 그는 예수가 자신의 질문에 재치 있게 대처했음을 인정한 것 같다. 어쨌든 예수에 대한 그의 편견은 제거되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헬라어 본문에서의 강조점은 대명사 “너”에 있다. “하라”라는 단어는 헬라어 포이에오(poieo-)에서 왔는데, 동일한 단어가 위에서 예수에게 한 율법사의 대답에 “베푼”으로 번역되었다.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말했다. 예수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대답했다. 다시 말해, 만일 네가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가서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본받아 행하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종교의 본질이다(참조 미 6:8; 약 1:27). 우리 동료 인간들은 “따뜻한 손”을 붙잡을 필요가 있고 “자비가 넘치는 가슴”에 기댈 필요가 있다(실물교훈, 388). 하나님은 “우리의 이기심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곤란과 재난을 겪도록 허락하신다”(실물교훈, 388). 우리가 기회를 얻을 때마다 진정한 이웃의 도리를 실천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영원한 유익을 위하는 것이다(참조 히 13:2).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누가복음 연구 1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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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9:18-26

[18]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9] 대답하여 가로되 침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21] 경계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22]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그리스도가 이방인 지역으로 물러난 것은, 부분적으로는 그가 갈릴리에 있으면 조금의 쉴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첩자에게서 피하기 위함이며, 또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장차 곧 그의 짧은 봉사에 종지부를 찍게 할 위기의 시간들을 위해 그들을 준비시킬 기회를 얻기 위함이었다(시대의 소망, 411). 다음에 나오는 토론은 예수와 제자들이 여행하는 도중에(참조 막 8:27), 예수의 기도 기간 중 하나가 마쳐지는 때에 일어났음이 분명하다. 이 이야기에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세부 사항들은 헤르몬산 기슭의 어느 야외에서 예수와 제자들이 밤을 지냈을 것이라는 가능성과, 예수가 그곳에서 기도로 밤을 지샜거나 아침 일찍 일어나 제자들과 떨어져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특별한 기도의 시간을 보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는 이제 막 지상 봉사의 마지막 장면에 관해서 가르침을 시작하려고 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생각을 공개하는 데 필요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고 그분께서 나누어 주고자 하는 것들을 받을 준비가 되도록 기도했다(참조 시대의 소망, 411).

 

호수에서 폭풍과 투쟁한 후 모든 제자들은 그에게 경배하고(참조 14:33 주석), 갈릴리에서 겪은 그 위기 이후에 그들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을 고백했다(요 6:68, 69).

 

본문연구

  1. 사람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19절(마 16:13-14 참고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이야기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2. 20절의 베드로의 대답은 혼자만의 생각이었을까요 아니면 제자들 모두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이것은 베드로 혼자만의 견해가 아니라(시대의 소망, 412, 415,) 열두 제자의 대변자로서 말한 것이다(참조 요 6:69; 참조 마 14:28; 막 3:16 주석).
    cf. 마 16:16-19 절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읽어보고 베드로에게 부탁하신 것이 무엇인지 말해 봅시다.

  3.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경계하시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토의사항

  1. 예수님이 나에게는 어떤 분이신지 얘기해 봅시다. 예수님은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말해 봅시다.
  2.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세상에서의 삶에서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말해 봅시다.

  3. 나를 부인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말해 봅시다.

  4. 내가 지어야할 나의 십자가에 대해 말해 봅시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것인지 토론해 봅시

 


18.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로 물러남; 위대한 신앙 고백]. 가이사랴 빌립보로 물러난 일은 아마도 AD 30년 여름에 일어났을 것이며 공생애에서 물러난 반 년 동안 예수는 주로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전념하였다. 그리스도의 봉사의 이 국면은 봄 유월절(요 6:66) 무렵 가버나움에서 거절당한 때부터 가을 초막절(참조 요 7:2 주석)까지 계속되었다. 예수는 유대 지도자들과 따라다니는 첩자들(막 7:1)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갈릴리 변방 너머 베니게와 데가볼리에서 이미 수 주일을 지냈다(마 15:21, 22; 막 7:31). 그러나 그가 갈릴리로 돌아오자마자 산헤드린에서 임무를 부여받은 첩자들이 예수에게 다시 도전했으며(16:1), 따라서 그는 갈릴리를 떠나 헤롯 빌립의 영토인 율리아 벳새다로 갔다(참조 막 8:22 주석; 222). 그 첩자들은 따라 오지 않았다. 예수와 제자들은 율리아 벳새다를 떠나서 북쪽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향하여 또다시 40킬로미터를 여행했다. 이 빌립보는 이두래의 수도이며 갈릴리의 분봉왕(참조 222) 헤롯 안티파스의 형제인 빌립의 관할 아래 있는 곳이었다. 원래는 파네아스(Paneas)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가이사랴 빌립보는 오늘날의 바니야스(Ba^niya^s)라는 동네와 동일시되어 왔다. 파네아스라는 이름은 양떼와 목초지와 숲의 헬라 신이며 목자와 사냥꾼의 수호신인 판(Pan)의 이름을 따라 지어졌다. 과거에 판 신에게 바쳐졌던, 파네아스(가이사랴 빌립보) 근처 가파른 절벽에 있는 석굴에는 1년 내내 마르지 않는 바니야스(Ba^niya^s)라는 샘이 있었으며, 그것은 요단강의 주요 수원지(水源池) 가운데 하나였다. 빌립이 파네아스를 재건하고 단장했으며, 자기 자신과 가이사 디베료 (Tiberius Caesar)의 이름을 따라 그곳을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명명했다(Josephus Antiqui- ties xviii. 2. 1; War ii. 9. 1 [168]).

 

무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는 제자들의 생각을 메시야인 자신에게로 돌림으로써 장차 다가올 자신의 수난에 대해 대화의 문을 열었다. 이 질문은 그가 전에 결코 직접적으로 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갈바리의 대속적인 희생의 의미를 생각하기 앞서 그를 메시야로 깨닫는 것이 필요했다. 만약 그를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참조 요 3:2 주석)이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고대의 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만 이해한다면(참조 16:14 주석), 그의 죽음은 다른 어떤 위대하고 선한 사람의 죽음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대속적인 차원이 아닌 하나의 모본이 될 것이며 그 안에는 속죄하는 능력이 없을 것이다. 갈바리의 십자가에서 구원을 찾는 자는 반드시 십자가에 달린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구세주, 메시야, 그리스도임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십자가를 올바른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사렛 예수의 메시야 됨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 물론 예수는 백성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자신이 장차 세울 왕국(참조 눅 4:19 주석)의 성격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생각도 알고 있었다. 그가 이 질문을 제자들에게 한 이유는 그 다음 질문을 위하여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함이었다. 곧 그들은 스스로 그에 대한 생각(16:15)에 이르러야만 했다. 제자들의 믿음은 다른 동포들의 온전치 못한 신앙과 대조할 때 훨씬 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들은 주님과 한동안 밀접한 교제를 나눴음이 분명하다.

 

19. 대답하여 가로되 제자들은 예수에 관해서 들은 네 가지 견해를 언급한다. 그러나 이 네 가지 견해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그들 모두 예수를 위대한 인간으로는 인정하지만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니고데모가 바로 여기에 해당되었다(참조 요 3:2 주석).

 

20.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헬라어 문장 구조는 “너희”를 강조한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와 제자들이 나눈 비슷한 대화는 요 6:66~69을 참조하라. 제자들은 1년 이상 예수와 끊임없는 교분을 가졌으며 그들 중 몇 사람은 2년 이상 교제했으므로 다른 어떤 사람보다 예수의 신성에 관한 더 많은 증거들을 관찰할 기회를 가졌다(참조 요 1:1~3). 이제 예수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믿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에 대한 이해력이 아직 완전하지 못했지만 안드레와 빌립과 나다나엘은 처음부터 예수가 메시야임을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참조 요 1:40~49; 시대의 소망, 141). 호수에서 폭풍과 투쟁한 후 모든 제자들은 그에게 경배하고(참조 14:33), 갈릴리에서 겪은 그 위기 이후에 그들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을 고백했다(요 6:68, 69).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는 1:1 주석을 참조하라.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예언된 메시야(참조 16:13, 14 주석)일 것이라는 생각을 거절했지만 제자들은 아직도 그에게 충실했다. 그들은 이해했지만 그 안에 포함된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물론 후에는 이해하였다(참조 눅 24:25~34). 그들이 믿음으로 이 근본적인 진리를 파악하고 굳게 붙들지 않는다면 메시야가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막다른 순간에 “제자들이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였다”(26:56). 그런데도 예수는 미래 교회의 희망의 기초를 이 소수의 증인들 위에 세우고 있었다. 제자들조차도 그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이 숭엄한 진리를 믿을 것이라는 무슨 희망이 있었겠는가? 참조 요 1:11, 12 주석.

예수는 단순히 위대하고 선량한 사람이었거나 아마도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최고의 인간이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라는 가정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했으며, 그를 따르는 자들도 이러한 믿음에 동의하기를 바랐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든지 그렇지 않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만약 아니라면, 그는 역사상 가장 큰 사기꾼이요 협잡꾼이다. 예수가 세상의 구세주가 아닌데도 세상의 구세주로 선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여기라고 촉구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존경은 고사하고 칭찬받을 가치도 없다. 나사렛 예수는 그리스도,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아니면 역사상 가장 큰 사기꾼이었을 것이다.

 

21.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예수는 봉사의 마지막 순간 즉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이 있기까지는 자신이 메시야임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기를 피했다. 그분은 결코 자신이 메시야라고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메시야로 널리 알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막 1:24, 25) 거듭해서 악한 영들에게 자신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참조 막 1:24, 25, 34; 3:11, 12; 눅 4:34, 35, 41)로 부르지 말라고 명한 것으로 보인다. 열두 제자들은 갈릴리를 여행하는 도중에 예수가 메시야인지 아닌지에 관한 문제를 거론하지 말아야 했다. 왜냐하면 일반에 퍼져 있는 메시야에 관한 잘못된 개념이 복음의 선포와 영접을 좌절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시대의 소망, 30, 414, 414, 415; 참조 눅 4:19 주석). 예수의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마 21:5, 5; 요 6:15) 때 나타난 것처럼, 사람들이 이러한 선포를 정치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

 

22. 가라사대 ... 하시고 예수가 여기서 처음으로 소개하는 그의 임박한 고난과 죽음과 부활(참조 13절 주석)의 주제에 적합한 서론부였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예수는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자신이 메시야임을 거론하지 않았으며, 또한 메시야로서 세상 죄를 위해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사실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이 있기 적어도 2년 전, 첫 번째 성전 정결 시에 그가 수수께끼 같은 표현으로 자신의 죽음을 암시한 것은 사실이다(참조 요 2:19 주석). 그리고 사적이긴 하지만 니고데모에게도 자신의 죽음의 성격(참조 요 3:14)과 사실성을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제부터 예수가 이 문제를 제자들과 거듭 논했는데, 그것은 그의 왕국과 메시야(참조 16:22)에 관해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잘못된 개념에서 제자들의 마음을 떼어놓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때 그들이, 메시야는 고난을 당하고 죽어야 한다(참조 16:22)는 생각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한 것은, 그리스도가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품고 있는 그들의 마음을 깨우치기 위해 겪은 곤란을 잘 나타낸다. 예수는 거듭거듭(17:22, 23; 20:17~19) 그 일에 대해 그들과 이야기했다. 그러나 막상 때가 이르렀을 때 나타난 그들의 실망은, 예수가 지금 그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 가르침을 위해서 그들에게 열중했던 것이 부분적인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장로들. 이것은 아마도 이 세 부류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진 산헤드린회였을 것이다. 산헤드린은 71명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최고의 입법, 사법부이다.

 

많은 고난을. 이것은 구약에 예언되어 있다(참조 시 22:1, 7, 8, 15~18; 사 53:3~10 등). 예수의 고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이며 사람들의 구세주라는 관점으로 볼 때만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그는 메시야였기 때문에 고난을 당해야 했다.

 

죽임을 당하고. 예수가 거듭거듭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분명하게 말했지만 제자들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으며, 그들이 믿기를 원하는 것들은 맹목적으로 믿기로 선택하고 그들의 선입견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쳐 버렸다(참조 시대의 소망, 30).

 

23. 아무든지…거든. 예수는 이제 모든 제자들에게 말한다(참조 9:23). 마가(막 8:34)는 그의 제자들 외에 다른 사람들-아마도 그를 믿고자 찾아온 지역 사람들, 갈릴리에서 그가 행한 놀라운 기적들에 대해 모두 다 들은 사람들-도 있었다고 부언한다. 16:24에 나타난 사상에 대해서는 10:38, 39 주석을 참조하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을 포기하고.” 자신의 의지를 그리스도에게 굴복시키고 이제부터는 자신보다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라는 의미.

 

자기 십자가를 지고. 제자에게 수반되는 책임을 짊어져야 하며, 그때에 요구되는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을 말한다. 죄인을 처형할 때 사용하는 십자가는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인의 형틀이었다(참조 10:38 주석). 그러나 당시에는 팔레스타인에서도 십자가의 처형이 잘 알려져 있었다.

십자가형으로 사형을 언도받은 죄인은 실제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갔거나, 적어도 십자가의 가로 막대기를 사형장까지 메고 갔다. 아마도 예수는 바로 이것을 언급한 것 같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언급한 문맥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제자로서 만나게 될 장애물이나 사소한 어려움이라기보다는 죽음 자체에 직면했을 때 준비가 필요함을 말한 것이다(참조 16:21, 22). 다른 곳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위탁된 봉사의 삶에 헌신할 때 그들이 자신들의 십자가를 “매일”(참조 눅 9:23) 져야 한다는 사상을 덧붙여 제시했다. 만약 사람들이 예수를 미워한다면 그들은 그분의 대표자들인 제자 역시 미워할 것이다

 

나를 좇을 것이니라.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들은 먼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계획과 개인적인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그런 다음 그가 의무로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이든 기꺼이 짊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한다(벧전 2:21).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가 그의 생애를 본받아 살며, 그가 보여 준 대로 하나님과 우리의 동료 인간들을 섬기는 것을 말한다(요일 2:6).

 

26 영광으로…올 때.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을 버린 자들은 이 세상 끝에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돌아올 때 그들의 생명을 얻을 보증을 받는다(고전 15:51~55). 바로 그때 각인은 저마다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를 위하여 생명을 버린 그리스도인들이다. 인기 있는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죽을 때 희생에 대한 “상급”이 주어진다면 여기서 그리스도가 구체적으로 천명한, 세상 마지막에 그가 영광 중에 올 때 이러한 상급이 주어진다는 말씀은 이상한 것이 되고 만다.

제자들의 전도 훈련, 누가복음 연구 1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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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9:1-6

[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3]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4]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라

[5]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6] 제자들이 나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제자들은 예수의 한 가족이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갈릴리 온 지방을 도보로 여행하실 때 그와 동행하였다. 그들은 닥쳐오는 고생과 곤난을 예수와 함께 견디었다. 그들은 예수의 설교를 들었으며 하나님의 아들과 동행하며 이야기하였고 그의 일상의 교훈에서 인류의 향상을 위하여 어떻게 일해야 할지를 배웠다. 예수께서 당신의 주위에 모인 매우 많은 무리들을 위하여 봉사하실 때에 제자들은 시중을 들었으며, 예수의 분부하심을 행하고 그 수고를 덜어드리기 위하여 힘썼다. 그들은 사람들을 정돈하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구주께로 데려오며 모든 사람을 평안하게 하는 일을 도왔다. 그들은 청중 가운데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내어 그들에게 성경을 풀이해 주었으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의 영적 유익을 위하여 일하였다. 제자들은 예수에 관하여 배운 바를 가르쳤으며 날마다 풍부한 경험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홀로 일하는 경험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많은 교훈과 큰 인내와 친절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제 제자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그들의 그릇됨을 지적하고 권면하시고 교정시키는 동시에 그들을 당신의 대리자로서 파견하셨다.”(소망, 349)

 

최초의 전도훈련 기간을 통하여 열 두 제자들이 배우고 느낀 것들은 무엇일까?

 

본문연구

  1. 열 두 제자들을 “각 촌에 두루”(6절) 내보내신 목적은 무엇인가?
    2절(마 9:37-38 참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우리는 무엇을 가장 훈련받기를 원하는가?
    cf. 마 28:19-20을 읽고 가장 중요한 제자들의 사명에 대해 이야기 해 보라.

  2. 제자들이 전도 훈련을 나갈 때의 구체적인 방법과 지시를 찾아보고 왜 그와 같이 하였는 지 생각해 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막 6:7에는 제자들이 형제 혹은 친구끼리 둘 씩 짝지어 나간 것으로 기록한다.
    cf. 아무 것도 가지지 않도록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3. 제자들의 복음전파 훈련과 함께 “고쳐주는 일”(healing)이 강조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cf. 마 10:8, 사 58:8을 참고하라.
    cf.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분께서 하신 것처럼 일해야 한다. 우리는 주린 자를 먹 이고 벗은 자를 입히며 고통받는 자와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해야 한다. 우리는 절망 하는 자들을 위하여 봉사하고 소망 없는 자들에게 소망을 고취시켜 주어야 한다...이 기심 없는 봉사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은 악인을 개심시키는 데 있어서 칼이나 법정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다.”(소망, 350)

 

토의사항

  1.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어떠한 훈련을 받아야 할 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고, 경험 들을 나누어 보자.
    cf. 마 10:5-20을 참고하라.
  2. 현재 우리 캠퍼스에서 행해지는 제자훈련에 대해 들어보고 보다 효과적인 훈련이 되기 위 해 노력해야 할 점들을 이야기 해보자.
제자들의 전도 훈련
“홀로 일하는 경험이 필요하였다...아무도 혼자 나가지 않았으며...이 전도 여행에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이미 그들보다 앞서 가셔서 친구들을 사귀어 놓으신 곳에만 갈 것이었다...그들은 종교 교사들의 옷을 입거나 미천한 농부들과 구별되는 어떤 옷차림도 하지 말아야 하였다...그들은 회당에 들어가서 공중 예배를 보기 위하여 사람들을 불러 모을 것이 아니라 집집 방문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일 것이었다...불필요한 인사나 집집을 다니면서 대접을 받는 일에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그들의 기도와 찬미와 가족끼리의 성경연구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을 것이었다...그리스도의 종들은 타고난 마음의 지시대로 행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눈을 그리스도의 인자하심에 고정시켜야 한다. 그 때에야 그들은 하늘의 재치와 온유함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성경을 부지런히 상고함으로 얻은 지식은 적절한 시기에 기억 속에 번개같이 떠오를 것이었다. . . . 전도 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은 용기를 내어 그분 앞에 좋고 궂은 경험들, 곧 그들의 활동의 결과를 보았을 때의 기쁨과, 그들의 실패와 과오와 연약으로 인하여 맛본 슬픔을 보고하였다...예수께서는 그들에세 많은 교훈과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다.” (소망, 349-360)

 

우리도 주님의 제자들로서 특별하면서도 지속적인 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다. 주님과 동역하면서 영혼들을 구원한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 있을까?


1. 열 두 제자.

지금까지 예수의 봉사를 도왔던 열두 제자(참조 시대의 소망, 349)는 이제 홀로 일하도록 보냄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AD 29년 여름에 공식적으로 제자가 되었고(참조 5:1 주석), 그것은 아마도 6개월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참조 9:36 주석).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아마도 AD 29년 늦봄에(참조 눅 5:1 주석) 전임(full-time) 제자로 부름을 받았다. 이들 중 세 명-야고보를 제외한-은 빌립, 바돌로매와 더불어 AD 27년 늦가을 이후로(참조 요 1:35~45 주석) 파트 타임(part-time) 제자였다. 열두 제자는 아마도 모두 AD 29년 늦여름이나 초가을에 있었던(참조 마 9:35; 눅 8:1 주석) 두 번째 갈릴리 선교 여행에 예수와 동행했고, 따라서 예수의 방법을 관찰하고, 그의 가르침을 듣고, 때때로 제자들에게 개인적으로 하는 말씀을 통해 유익을 얻을 기회를 가졌다. 이제 열두 제자가 보냄을 받아(참조 막 3:14 주석; 막 6:7), 형제는 형제와, 친구는 친구와 둘씩 짝을 지어 나갔다(시대의 소망, 350).

 

능력과 권세

열두 제자는 여기에 진술된 것처럼, 이적을 행하고 천국의 복음을 “전파”(10:7)하는 권세를 받았다. 이전에는 제자들이 단지 예수를 돕기만 했지, 이적을 행하거나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참조 시대의 소망, 349).

 

2. 앓는 자를 고치게.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자주 목격했던, 그가 베푼 다양한 유형의 이적들을 열거하고 있다. 제자들은 그가 행한 모든 것들을 행해야 했다. 마귀와 죽음조차도 그들에게 복종할 것이었다.

 

3. 가지지 말라.

헬라어 크타오마이(ktaomai). “(자신을 위해) 획득하다” 또는 “(자신을 위해) 얻다.” 그들은 필요가 채워지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준비는 간단하고, 임무 수행에 방해되는 어떠한 것도 없어야 했다. 여행 중에 그들에게 베풀어지는 환대를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참조 10~13절). 그러나 당장의 필요보다 지나친 선물을 기대하거나 받아서는 안 되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봉사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면 안 되었다.

 

지팡이.

마가복음의 평행절(막 6:8)을 보면, 제자들은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도록 지시받았다. 아마도 마태는 그들이 여행을 위하여 어떠한 여분의 것도 “가지지” 말아야 함을(참조 9절 주석) 강조하려 한 듯하며,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이미 지팡이가 없었던 사람은 꼭 하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주머니.

헬라어 페라(pe-ra). “가죽 주머니” 또는 “지갑.” 여행자들이 필수품이나 옷가지 등을 넣고 다니는 데 썼다.

 

옷.

헬라어 키토네스(chito-nes). “튜닉” 즉 속옷(참조 5:40 주석). 제자들은 그들이 입은 옷만 가지고 가야했다. 그들은 일해야 할 곳의 평범한 농부들처럼 입어야 했고, 그들과 하나가 되어야했다. 그렇게 해야 그들의 노력이 보다 효과적이 될 것이다.

 

4. 거기서 유하다가.

70인에 대한 지시에서 특별히 “이 집에서 저 집으로”(눅 10:7) 옮기지 말라고 했다. 즉, 어떤 고을이나 촌에 머무는 동안 이 집 저 집의 대접을 받지 말라는 것이다(시대의 소망, 351). 그들의 일에 방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 다니는 것은, 처음 주인들이 그들이나 그들의 기별을 친절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더 이상 그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암시를 사람들에게 줄 수 있다. 그와 반대로, 한 집에 “머무는” 것은 안정감을 주고 좋은 평판을 얻게 할 것이다.

 

5. 먼지를 떨어 버려

반갑지 않은 대접을 받은 곳에서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이, 그들을 기쁘게 맞이할 곳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할 것이었다. 어떤 집이나 마을에서 떠나는 이러한 행동은, 무례한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엄숙한 항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발에서 먼지를 떨어냄으로써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단순히, “당신들의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누가복음 연구 1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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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8:4-15

[4]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 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9]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10]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씨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천국에 대해 설명하셨을 뿐 아니라 크신 농부로써 그의 백성을 위하여 행하시는 사업에 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는 밭에서 씨를 뿌리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진리의 씨를 뿌리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 그 자체가 곧 씨앗이었으며 그는 이 씨로써 가장 귀중하고 은혜로운 진리들을 심으셨다. 씨뿌리는 비유는 너무나 평범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비유의 참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농부가 밭에 뿌리는 씨를 통하여 우리가 복음의 씨, 곧 파종되면 패역한 사람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그 씨를 생각하기 바라신다. 작은 씨의 비유를 말씀하신 그분은 하늘의 임금이시며 밭에 씨를 뿌리는 일을 주관하는 법칙이 진리의 씨를 뿌리는 일도 주관한다.”(실물, 33)

 

비유 통하여 진리는 단순하고 순결하게 제시된다. 하지만, 들을 귀 있는 자만이 들고 깨닫을 수 있었다. 씨를 뿌리는 자와 씨를 뿌리는 것은 어떤 진리를 가르치고 있을까?

 

본문연구

  1. 비유에서 “씨를 뿌리는 자”는 누구를 의미하는가?
    마 13:37 참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예수께서 비유(parables)로 가르치신 주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의문을 자아내기 위해서(막 4:10)
       2) 천국의 비밀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막 4:11)
       3) 어떤 이들에게는 진리를 감추기 위해(막 4:12)
       4) 당시에 수준 높은 랍비들의 수사법인 비유를 예수께서도 사용하심

  2.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인 “씨”는 무엇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였는가?
    11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3. 비유에서 씨가 자라서 결실을 맺기 위해 중요한 요인은 무엇인가? 씨가 뿌려진 네 곳을 각각 요약하고 비교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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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착하고 좋은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결실하기 위해서 “인내”(15절)도 필요하다 그 까닭은 무엇인지 설명해 보라.

 

토의사항

  1.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하셨다. 말씀은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마 4:4을 읽고 생활 가운데서 말씀이 우선순위가 될 수 있는 방안들을 이야기 해 보자.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여기에 모든 교육 사업의 기초가 되는 대 원칙이 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오늘날 너무나 많은 학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있다. 다른 문제들이 그들의 정신을 점령하고 있다. 그리고 불신자들의 저서를 연구하는 일이 많은 부분을 점유하고 있으며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에도 회의론적 사상들이 섞여 있다. 뿐만 아니라 과학 분야에 있어서도 그 발견된 것들이 잘못 해석되고 악용됨으로 인하여 과학적 연구가 오도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한 가상적 학설과 비교되고 있으며, 드디어는 불확실하고 미덥지 못한 것같이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의혹의 씨가 청년들의 마음속에 심어지게 되어 그들이 시험을 만나게 되면 심겨진 의혹의 씨가 발아되어 싹이 튼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면 심령은 보호자와 안내자를 잃게 되므로 청년들은 하나님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에서 탈선하게 된다.-실물교훈, 41

  2. ‘나는 어떤 밭일까?’ 서로 자신의 경험이나 상황을 나누어 보자.

 

이 비유는 천국을 위해 믿음을 가진 마음과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가르쳐주고 있다.


4. 비유로 말씀하시되 지금까지 그리스도는 비유라고 부를 수 있는 짧은 예화들을 자주 사용하였다(참조 7:24~27 등). 이제 처음으로(시대의 소망, 333; 실물교훈, 20) 그는 비유를 진리를 전달하는 주된 도구로 삼았다. 산상 설교는 불과 몇 주 전에 있었다(참조 5:1 주석). 때는 AD 29년 가을이었을 것이고, 갈릴리 전역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역인 게네사렛 평지(참조 눅 5:1 주석)를 따라, 겨울 곡식을 파종하고 있는 농부들을 볼 수 있었다(참조 실물교훈, 34). 이 바쁜 날 일어난 사건들의 요약은 12:22; 13:1 주석을 참조하라.

적어도 열 가지 비유가 이때 베풀어졌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여덟 가지에, 마가는 등잔의 비유(4:21~23)와 모르는 사이에 자라는 씨앗(26~29절)을 더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마태가 기록한 비유들은 천국과 관련된 본질적인 사실들을 종합적인 모습으로 보여 주고 있다.

 

씨를 뿌리는 자. 그리스도가 말씀할 때(실물교훈, 34) 갈릴리의 푸른 물결로부터 언덕 아래까지 펼쳐진 게네사렛 평지의 비옥한 토양에 농부들이 씨를 뿌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비유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알려져 있지만, 토양의 비유, 다시 말해 씨 뿌리는 자, 씨, 토양의 비유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이 비유의 초점은 가라지의 비유(24~30절)에도 등장하는 씨 뿌리는 자나 씨가 아니요, 씨가 떨어지는 네 가지 종류의 토양이다. 이 비유는 네 종류의 토양이 각각 씨를 받아들이는 것과 그것이, 씨의 성장에 미친 효과를 강조한다(참조 실물교훈, 43). 네 종류의 토양과 관련하여 씨 뿌리는 자의 기술이나 씨의 품질은 모두 동일하다. 8절 주석을 참조하라.

이 비유에서 씨가 나타내는 특정한 진리는 메시야로서 이 땅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명의 본질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의 참된 성격은 어느 정도는 “비밀”(참조 11절)이었는데, 교만심이 사람들로 하여금 구약에 대한 이해를 흐리게 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힘있는 정복자로 와서 다윗의 보좌에 앉고 모든 나라를 유대인에게 복종시킬 것으로 기대하였다(참조 시대의 소망, 30; 참조 눅 4:19 주석). 그러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예수는 그의 사명의 참된 성격, 곧 그가 온 것은 이방인들을 유대인에게 복종시키려 함이 아니요,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15:24)의 마음을 복종시키려 함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이 똑같은 진리를 그는 이미 산상 설교에서 공식적으로 제시한 바 있다(참조 5:2 주석).

 

5. 길가에. 마을에서 밭으로 나오는 길이 아니라, 밭의 주변에 있는 길가 또는 밭에서 더 떨어져 있는 밭으로 가로질러 나있는 길가. 길가의 표면이 딱딱하기 때문에 씨앗은 드러난 채로 놓여 있으며 싹이 틀 기회조차 없다. 길가의 청중들은 복음의 진리가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는 피상적인 청중들이다. 중국 속담의 표현대로, 그들은 마이동풍(馬耳東風)이다. 그들은 복음에 대한 개인적인 필요성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부주의하고, 깨닫지 못한다(19절). 진리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는 듯이 보인다.

 

새들. 즉, 경작할 때와 씨 뿌릴 때 언제든지 찾아오는 들새들. 마태에 의하면 이 새들은 “악한 자”(19절)를, 마가에 의하면 사단(막 4:15)을, 누가에 의하면 마귀(눅 8:12)를 나타낸다.

 

6. 바위 위. 분명히 이 땅은 돌이 흩어져 있는 땅이 아니라, 표면이 얇은 흙으로 덮여 있는 바위 땅을 말한다. 일부 적당한 장소를 제외하고는, 팔레스타인의 고지대는 이러한 바위들 때문에 농경 지역으로서의 가치가 결정적으로 떨어진다.

돌밭 청중의 마음에 떨어진 복음의 씨앗은 싹이 틀 만큼의 땅은 찾을 수 있지만, 흙이 너무 얕아 복음은 단지 피상적인 효과를 내는 데 그치고 만다. 복음이 그들의 감정에 호소했고 그들은 빠르게 반응했으나, 주어진 감동은 변덕스러운 감정의 동요와 함께 사라져 버린다. 이기심의 돌(참조 실물교훈, 46)은 복음이 생애를 개혁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하는 어떠한 노력도, 자신을 섬기려는 삶의 기본적인 목적에 방해받은 나머지(참조 실물교훈, 50), 복음은 거의 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돌밭의 청중은 습관적으로 자신의 기호(嗜好)에 따른다. 이러한 사람들이 가짐직한 어떠한 확신이라 할지라도 원칙보다는 기호에 기초한 것이다. 진리가 어느 정도 그들의 마음을 끈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진리가 좋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사랑한다. 순간적으로 좋아 보이는 것을 재빨리 받아들였지만, 그들은 제자가 되기 위한 대가를 치르는 데 실패한다. 복음의 원칙들을 생애에 적용시키지 않고, 그 원칙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의 방식을 개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습관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말랐고. 발아가 빠른 만큼, 마르는 것도 빨랐다. 돌밭 청중들의 유일한 희망은 거듭나는 것이다(실물교훈, 48). 복음의 표면적인 영향은 그들을 자복과 죄를 버리는 일에까지 이끌지 못했다(참조 5절 주석). 그들은 칭의를 경험하지 못했다. 복음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회개의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7. 가시떨기. 헬라어 아칸싸(akantha). “가시” 또는 “찔레나무.” 아칸싸는 “엉겅퀴”처럼 가시가 많은 식물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 누가는, 그리스도인 생애의 “가시”는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참조 마 13:22; 눅 8:14)이라고 정의한다.

가시떨기 땅에서는, 돌밭에서처럼 약한 식물들이 신속히 마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시떨기 땅의 그리스도인 경험은 돌밭 청중들의 경험보다는 더욱 발전한다. 그들은 진정한 출발을 한 것처럼 보이며, 분명히 칭의와 새로남을 경험한다. 그러나 곧 그들은 “선을 행하되 낙심”(갈 6:9)하게 되고, “완전한 데 나아”(히 6:2)가지 못한다. 이 세상의 쾌락에 빠지고 매혹에 이끌려 그들은 생애에서 유혹에 반응하는 경향들과 성격의 특성들을 뽑아내는 일을 게을리 한다. 그들은 마치 귀신 들렸다가 놓여났지만 다시 귀신 일곱에게 사로잡힌 사람과 같다(참조 12:43~45 주석). 가시떨기 땅 청중의 마음을 끌고 그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많은 것들이 그 자체로는 과히 나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너무 몰두해 있어서 다음 세상을 준비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가시가 자라서. 가시는 곡식을 성장할 수 없게 한다(참조 눅 8:14).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관심은 성령의 열매(갈 5:22, 23)가 숙성하는 것을 방해한다. 신앙이 많은 취미 중의 단지 하나로 취급되는 부수적인 위치로 전락된다. 성장시키지 않음으로 그것은 말라가고 결국 죽는다. 가시떨기의 청중들에게 부족한 것은 도덕적인 변화이다(실물교훈, 50). 그들에게는 칭의가 신앙의 전체요 본체이며, 그들은 그리스도인 생애가 필연적으로 성화라고 알려진 과정 곧 악한 성격과 성향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삶의 모범으로 바뀌는 과정(참조 갈 2:20 주석)임을 깨닫지 못한다.

 

8. 좋은 땅.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씨앗이 사람의 마음을 “좋게” 변화시키기 전에는 본성으로는 좋지 않다는 뜻인데,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빌 2:13)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본성적으로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롬 7:18)한다. “땅”이 “좋은” 것은 단순히 진리의 보습에 맡겼기 때문이며, 성령의 부드럽게 하는 감화에 반응하였기 때문이다.

 

백 배. 이것은 진실로 놀라운 수확이다(참조 창 26:12 주석). 미국의 평균 밀 수확은 4,046.8평방미터(1에이커)당 약 616리터 또는 약 35말로, 이것의 약 15배의 수확이다. 마가는 수확의 순서를 적은 양부터 큰 양으로 바꾸었고, 누가는 적은 수확은 생략했다.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것은 품성의 결실을 말한다(참조 갈 5:22, 23 주석). 외면적 생애에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는 건강한 그리스도인 경험의 증거이다. 길가 청중의 마음에는 진리가 응답을 얻지 못하였다. 돌밭 청중에게서는 진리가 일시적인 충동밖에는 얻지 못하였다. 가시밭 청중에게서는 잘 시작된 반응이었지만, 역경과 반대 속에서는 말라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좋은 땅 청중들의 마음에는 그 응답이 영원하고 효과적이었다. 그 결과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삶의 모범을 따라 삶이 변화되는 것이다.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은 환경의 노예가 아니다. 그는 끝까지 견딘다(참조 24:13).

 

귀 있는자는 들을지어다. 그러므로 내가…말하기는. 참조 3절 주석. 그리스도의 목적은 영적 식별력이 무딘 사람들에게 진리를 숨기려는 것이 아니라(참조 실물교훈, 105), 오히려 진리를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려는 희망에서, 그들의 마음과 정신의 무딤을 뚫으려 함이다(참조 눅 8:16). 그리스도는 이 땅에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고 온 것이지 그것을 감추려고 온 것이 아니다(요 18:37). 어떤 것이 과실을 맺지 못하는 이유는 씨 뿌리는 자나 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토양에 있다(참조 13:3 주석).

 

10.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참조 15절 주석. 비록 이 사람들이 보는 듯하여도 그리고 자신들이 보고 있다고 생각해도, 그들은 사실상 전혀 보지 못한다. 그들이 실상은 소경이면서 “본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의 “죄가 그저 있다”(요 9:41). 그들은 일부러 소경이 된다(참조 호 4:6 주석). 그들의 식별력은 길가 청중들처럼 피상적이다(참조 13:4, 5 주석). 자연적 시력이 그에 상응하는 영적 통찰력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못하게 하려 함이라.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비유의 의미를 감지했으나, 깨닫지 못한 것처럼 가장했다(참조 실물교훈, 35). 그들이 그리스도의 가장 분명한 말씀을 거절한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들의 죄는 다른 이들보다 더 컸다. 그들은 일부러 그들의 영혼의 눈을 멀게 하였으며 스스로를 어둠 속에 가두어 버렸다(참조 12:3 주석).

백부장의 믿음, 누가복음 연구 1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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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7:1-10

[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4]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

 

 

“모든 죄인이 그리스도께 나오는 것도 이와 같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하셨”(딛 3:5)다. 사단이 그대는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바랄 수 없다고 말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사단에게 말하라. 우리는 하나님께 추천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하나 우리가 현재 그리고 항상 말할 수 있는 간구는 예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필요로 하게 만드는 우리의 전혀 무력한 상태에 대한 간구인 것이다. 우리는 모든 자기 의뢰심을 버림으로 갈바리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 손에는 가지고 갈 아무 대가도 없습니다.
다만 주의 십자가에 매달릴 뿐이옵니다.”
(소망, 317)

 

가버나움의 로마 백부장은 예수님과 직접 대면하지도 않았으나 믿음을 고백했으며, 예수님은 그의 요청을 들어주셨다. 예수님께서 흐믓해 하신 그의 믿음은 어떤 것일까?

 

본문연구

  1. 본문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나열하고 그들은 어떤 이들이며 서로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설명해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등장인물들은 모두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종(마 8:6)의 치유를 도왔다.
    cf. 등장인물들 가운데 가장 주요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cf. 특히, 예수님과 백부장은 어떤 관계였을지 이야기해 보라.

  2. 백부장의 요청을 받은 유대 장로들은 그를 예수께 어떻게 추천하였는가? 또 백부장은 왜 그러한 요청을 하였는가?
    4-5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마 8:5-8을 참고하라. 7절의 “말씀만”은 정확히는 “한 말씀”(a word)이다.
    cf. “백부장은 구주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그는 예수께서 자기 하인을 고치실 수 있 을 것이라고 믿었다.”(소망, 315)

  3. 예수께서 칭찬하신 백부장의 믿음(9절)을 그가 한 말과 행동을 통하여 설명해 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마 8:8,10-11도 참고하라.
    cf. “그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감동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달았으나 도움을 요청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선함에 의뢰하지 않 았다...그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참된 품성을 붙잡았다. 그는 예수님을 단지 이적을 행 하는 자로만 믿지 않고 인류의 친구요 구주로 믿었다.”(소망, 317)

  4. 종의 병이 백부장의 믿음 때문에 나음을 입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는 무엇인가?
    10절(마
    8: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토의사항

  1. 이방인이었던 로마 백부장의 믿음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찾아볼 수 없었다는 예수님의 말 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던져주고 있을까?

  2. 그리스도의 치유를 경험하기 이전에도 백부장의 성품과 생애는 매우 아름다웠다. 종에 대 한 사랑, 벗들과의 관계, 유대인들과의 조화로운 관계 등.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일까?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도 감탄하셨다. 유대인들은 그의 선한 행위들로 예수님께 추천하였지만,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요청대로 그가 사랑하는 종을 고쳐주셨다.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기도의 응답의 상관관계를 깊이 생각해 보자.


 

산상설교, 누가복음 연구 1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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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6:17-26

[17]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기도와 교훈의 말씀을 주시고,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도하심으로 복음 사업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셨다. 그러고 나서, 그들과 함께 해변으로 가셨는데, 거기는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많은 무리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 그러나 그 좁은 해안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갈망하는 무리가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범위 안에 다 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그들을 다시 산으로 인도하셨다. 그 많은 무리가 다 넉넉하게 앉을 수 있는 평평한 장소에 이르자, 그분께서는 풀밭에 앉으셨다. 그러자, 그분의 제자들과 무리들도 그분을 따라 앉았다”(산상보훈,17, 19).

 

산상 설교의 서두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심령의 최고의 갈망, 곧 행복에 대해 언급하셨다. 이와 같은 갈망은 창조주에 의해 친히 인간 속에 심어진 것이다.(본교 성경 주석 5권, 324).

 

본문연구

다음 도표는 우리의 그리스도인 경험에 있어서 앞에서 언급한 진보들을 나타내며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필요에 어떻게 대답하시는지를 보여준다.

 

인간의 필요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

(마태복음 5장 1절~12절의 팔복에 기초함)

우리의 문제 그리스도의 대답 결과
1. 자존심, 불안
가련한 자아상
*심령이 가난한 자
자신들의 필요를 인식하고 그 일로 무언가를 하기 시작하는 사람들
*자아를 용납함
*그릇된 자존심을 정복함
*하나님과 사람들과 더불어 의미는 교제를 나눔
2. 죄와 죄의식 *애통하는 자들
죄에 대하여 회개하고 돌아섬
*깨끗한 양심
*하나님과 사람에게 용납되었다는 증거
3. 반역, 분노, 자신감의 결여 *온유한 자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고 헌신함
*권위를 인정함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신뢰와 믿음의 계발
4. 불행, 공포, 좌절, 염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생명의 물로 채움-칭의
*건강한 정서
*전인적인 발달
*하나님과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 형성
5. 쓰라림과 이기심 *긍휼히 여기는 자
용서하는 태도, 기꺼이 나누고자 함, 영적 성장
*관계의 개선
*인정, 나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
6. 불결과 부도덕 *심령이 청결한 자
생애의 청결, 순결, 고결함
*도덕적으로 자유함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이 있음
*하나님과 인간에 대하여 올바르게 행함
7. 절망과 무감각 *화평케 하는 자
평화와 행복과 만족감을 다른 사람과 나눔
*이해를 초월하는 평화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짐

 

토의사항

  1.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진정 행복하게 살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20,21절)

  2. 인생의 진정한 만족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본문의 말씀은 어떤 답을 준다고 생각하십니까? (22,23절)

  3. 그리스도인으로서 당하는 부당한 어려움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런 부당한 대우를 참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20. 가난한 자. 헬라어 프토코스(pto-chos). “웅크리다”, “위축되다”를 의미하는 프탓소(ptasso-)에서 파생한 말로 극심한 가난을 지칭한다(참조 막 12:42; 눅 4:18; 6:20). 여기서 프토코스는 비참한 영적 가난에 처한 자들 그리고 천국이 공급해야 할 것들에 대해 필요를 예민하게 느끼는 자들을 가리킨다(참조 사 55:1 주석; 행 3:6). 자신의 영적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스스로 “부자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하늘에서 볼 때 “곤고하고 가련하며 가난한” 사람들이다(계 3:17). “심령이 가난한” 자 외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에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밖의 모든 사람들은 하늘의 부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하며, 따라서 하늘의 축복을 거절한다.

 

복이 있나니. 산상 설교의 서두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의 마음에 있는 최고의 욕망, 곧 행복에 대해 연설한다. 이 욕망은 창조주가 친히 인간 속에 심었고, 본디 그것은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과 협력을 통해 참 행복을 발견하도록 이끌기 위해 정해진 것이다. 인간이 행복을 최종 목적으로 생각하여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순종을 무시하고 지름길로 그것을 달성하려고 꾀할 때 죄가 수반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의 왕으로서 그리스도는 취임 연설의 서두에서, 왕국의 주요 목적은 잃어버린 에덴의 행복을 인간의 마음에 회복하는 것이며, 따라서 “좁은” 문과 “협착”한 길로 들어가기를 선택한 자들(7:13, 14)이 참 행복을 찾을 것이라고 선포한다. 그들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 때만 이르러오는 영혼의 참되고 영원한 만족, 곧 내적 평강과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빌 4:7). 그리스도가 아버지께로 갈 때 그는 바로 이 평안, 곧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요 14:27)을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남겼다. 행복은 하나님(참조 롬 5:1)과 그들의 동료(참조 미 6:8)들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자들, 곧 사랑에 관한 위대한 두 계명을 좇아 행하는 자들의 마음에만 이르러 온다(참조 22:37~40). 이러한 생각과 마음의 성향은 오직 은혜의 왕국의 참된 백성들만 소유한다.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가 여기서 말하는 것이 미래에 있을 영광의 왕국이 아니라 현존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가르침 속에서 가라지, 겨자씨, 누룩, 그물의 비유(13:24, 31, 33, 47) 그리고 그밖의 많은 비유(참조 산상보훈, 8, 108)를 통해 예증한 것처럼, 종종 그의 주권을 받아들인 자들의 심령에 건설된 은혜의 왕국에 대해 다루었다. 유대인들은 천국을, 이 지상 나라들이 이스라엘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힘에 기초한 왕국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와서 세운 왕국은 사람의 심령에서 시작하여, 그들의 삶에 침투하고, 역동적이고 강력한 사랑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의 심령과 삶으로 흘러 들어가는 왕국이었다.

 

너희 것. 자신의 필요를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에 들어가는 첫 번째 조건이다(참조 산상보훈, 7, 8). 비유 가운데서 세리가 “자기를 의롭다고 여긴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으로 내려 간 것”은 자신의 영적 필요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다(눅 18:9~14). 천국에는 교만한 자들, 자족하는 자들 그리고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을 위한 여지는 없다. 그리스도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가난을 그의 은혜의 부요함으로 바꾸라고 명한다.

 

21. 주리고 목마른 자. 특별히 이 은유는 연평균 강우량이 66센티미터 이상이 되지 않는 나라에서 설득력이 있었다(참조 창 12:10 주석). 팔레스타인에 해당되는 사항은 일반적으로 근동의 넓은 지역에도 해당된다. 팔레스타인은 넓은 사막지역에 접해 있으며, 거주민이 많은 지역까지도 비가 적은 반건조성 지역이다. 지금 예수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청중 가운데 많은 사람이 갈증의 고통을 경험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하갈과 이스마엘의 예증에서처럼, 길을 잃거나 도중에 몇 개 안 되는 샘 가운데서 하나를 놓친 여행자는 자신이 심각한 곤경에 처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참조 창 21:14 주석).

그래서 예수는 심령의 주림과 목마름에 대하여 말했다(참조 시 42:1, 2). 음식의 결핍으로 굶주린 사람 또는 물의 부족으로 허덕이는 사람의 간절한 열망으로 의를 갈망하는 자들만이 그것을 얻을 것이다. 물질적 풍요든지, 심오한 철학이든지, 육체적 욕망의 만족이든지, 명예나 권력이든지, 세상에 속한 어떤 것도 심령의 주림과 목마름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이 모든 것을 경험한 후에 솔로몬은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결론을 내렸다(참조 전 1:2, 14; 2:1, 15, 19; 3:19; 11:8; 12:8 등). 어떤 것도 모든 인간의 마음이 갈망하는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전도자는 창조주를 인정하고 그분과 협력하는 것만이 항구적인 만족을 가져다 준다고 결론을 맺는다(전 12:1, 13).

산상 설교를 한 지 6개월 또는 8개월 후에 예수는 생명의 떡(요 6:26~59)에 관한 또 하나의 위대한 강화를 했는데, 여기서 간략하게 설명한 원칙을 좀 더 충분하게 논했다. 인간이 갈망해야 하는 “떡”은 바로 예수이다. 인간은 그 떡을 먹음으로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며, 심령의 굶주림을 충족시킬 수 있다(참조 요 6:35, 48, 58).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하늘의 공급자에게 와서 “돈 없이 값 없이”(사 55:1, 2) 물과 양식을 얻으라는 은혜로운 초청을 받는다. 사람의 심령에 의에 대한 갈망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미 그 속에서 역사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산상보훈, 19)

 

우는 자. 이 단어는 강한 슬픔을 나타낸다. 사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만나는 불완전함 때문에 “애통하”게 되는 것은 영적 필요에 대한 깊은 의식에서 나온다(참조 산상보훈, 9; 시대의 소망, 300). 그리스도는 여기서 영적 가난 속에서 완전의 표준에 달하기를 열망하는 자들을 지칭하고 있다(참조 사 6:5; 롬 7:24). 또한 여기에 실망과 사별 혹은 또 다른 슬픔 때문에 애통해하는 자들을 위한 위로의 기별이 있다(참조 산상보훈, 10~12). 하나님은 영적 부족감을 하늘의 은혜의 부요함으로 채우는 것처럼(참조 3절 주석), 죄에 대한 애통함을 용서받은 죄의 위로로 충족시킨다. 먼저 부족함에 대한 느낌이 없다면 그 부족한 것(이 경우는 품성의 의)에 대한 애통함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애통은 자신을 천국 지원자로 소개하는 자들에게 이르러오는 두 번째 필요조건이며, 그것은 순서상 첫 번째 단계 이후에 자연스럽게 뒤따라온다.

 

22. 인자를 인하여. “나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지닌 이름 곧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고통당한다. 초기교회 시대와 마찬가지로 모든 시대를 통해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행 5:41; 참조 벧전 2:19~23; 3:14; 4:14).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자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10:22)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10:39)고 덧붙였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위하여 고난받을 것”(빌 1:29)을 예기해야 한다.

 

멀리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회당에서 출교(黜敎)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했다(참조 요 9:22, 34; 12:42; 16:2). 유대교에서는 완전히 추방되는 영구적인 출교와 일시적인 출교가 있었다. 그리스도 시대에 일시적인 출교는 30일 동안 계속되며 “멀리된” 사람은 그동안 종교적인 의식에 참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4규빗(약 2미터) 안으로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출교는 종교적 및 사회적 오염 즉 부정을 의미했다.

 

너희 이름을…버릴 때에는. 즉 너희 이름을 경멸하여 내동댕이칠 때에는. 이것은 거짓되고 악한 소문을 유포하는 것을 가리킨다(벧전 4:14).

 

핍박을 받은. 여기서 그리스도는, 주로 천국을 위해 세상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박해를 말한다. 죄가 들어온 이래 그리스도와 사단, 천국과 세상 왕국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과 사단을 섬기는 자들은 “원수”가 되었다(창 3:15; 계 12:7~17). 이 투쟁은 “이 세상 나라가 우리의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계 11:15; 참조 단 2:44; 7:27). 바울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행 14:22). 천국 시민들은 이 세상에서 환란당할 것을 예기하는바(요 16:33), 이는 그들의 성품, 이상, 열망 그리고 행동이 모두 현 세상의 악을 거스르는 무언의 증언을 하기 때문이다(참조 요일 3:12). 하늘 왕국의 원수들은 왕 되신 그리스도를 핍박했고, 또한 그의 충성스런 백성들을 핍박할 것이다(요 15:20).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이와 동일한 약속이 3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졌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딤전 2:12; 참조 단 7:18, 27). 그리스도를 위해 큰 고통을 당한 자들이 그분이 그들을 위해 당한 고통을 가장 잘 헤아릴 수 있다. 첫 번째와 마지막 복에 하늘 시민의 자격 보증이 포함되는 것은 적절하다. 여기에 열거된 하늘 시민을 위한 여덟 가지 자격을 경험한 자들은 천국에서 한 자리를 얻을 가치가 있다.

 

기뻐하고. 생애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롬 8:28)을 알고 기뻐해야 한다(빌 4:4). 고난이 천국 시민에게 필수적인 인내와 그밖의 품성의 특성들을 계발시키며, 이것은 시험 즉 시련에도 마찬가지다(약 1:2~4).

 

너희의 상이 큼이라. 참조 눅 6:24~26 주석.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상에 대한 생각이 최우선은 아니다(실물교훈, 398). 그는 천국에 들어갈 목적만으로 규칙들에 순종하지는 않는다. 그는 최고의 목표와 실존의 기쁨을 창조주와 협력하는 데서 찾기 때문에 순종한다. 희생도 클지 모른다. 그러나 상 또한 크다. 인자가 영광으로 올 때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아줄 것”이다(마 16:27; 참조 계 22:12).

 

24. 화 있을진저. 복과 재화(災禍)를 대조시키는 것은 유대 문학의 특유한 기법이었으며, 아마도 신명기에 나타난 축복과 저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27, 28장). 그리스도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선언한 “화”와 비교해 보라(참조 마 23장). 부요한 자여. 구세주가 부자나 가난한 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회 계층의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고자 했지만(참조 마 5:3 주석), 그는 삶의 물질적인 것들을 낮게 평가함으로 부와 특권을 삶의 주목적으로 삼는 계층의 사람들에게 호의를 얻지 못했다(참조 마 6:1~6 등). 사실 비교적 극소수의 부자들만이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었고,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은 특별하게 예외였다. 예수는, 이 땅보다는 하늘에 보물을 쌓는 지도층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그들의 마음이 하늘에 더욱 밀착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참조 마 6:33, 34; 눅 12:13~33). 많은 경우에 부(富)는 그것을 소유한 자들에게 하늘에 이르는 길을 막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임이 입증되었다(참조 막 10:23, 25; 눅 18:24, 25).

 

너희의 위로. 여기서는 물질이 주는 행복한 상태에서 오는 위안과 기쁨을 의미한다(참조 마 5:4 주석).

 

26. 칭찬하면. 정확하게 “욕하고”(22절)라는 말과 반대말. 그리스도교와 세상, 그리스도교의 이상과 세상의 이상들 사이에 있는 큰 차이점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역설이다. 사람들은 보통 부와 권세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아첨하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아첨에 반응하는 자리에 있는 자들을 “칭찬”한다.

예수님의 제자도(Discipleship), 누가복음 연구 1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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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6:12-16

[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14]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및 그 형제 안드레와 및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16] 및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및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열 두 사도의 명단

No. 마 10:2-5 막 3:16-19 눅 6:14-16 행 1:13
1
2
3
4
5
6
7
8
9
10
11
12
       

 

예수님께서 여러 제자들 가운데서 열 둘을 구별하여 사도로 부르셨다. 제자들을 훈련시켜 파송하는 일에 대한 그분의 계획은 무엇이었을까?

 

본문연구

  1. 몇 명의 제자들 ‘사도’로 택하였으며, 그것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셨는가?
    13절, 12절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사도(Apostles)”- “보내심을 받은 자”
    cf. 철야기도를 통하여 그 많은 시간동안 주님의 기도는 어떤 것이었을까?

  2. 열 두 사도들의 명단은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왼편의 도표에 순서대로 이름을 적고 분석해 보라.
    1) 가장 첫 번째로 등장하는 제자는 누구인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순서가 변하지 않고 등장하는 제자들은 누구이며 좌측 번호에 O표 하시오.
    3) 열 두 사도의 구성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cf.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는 모두 누가이다.
    cf. 2명의 시몬 - 시몬 베드로와 셀롯(Zealot,열심당) 시몬이다.
    cf. 2명의 야고보 -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작은 야고보’라 불린다.(막 15:40)
    cf. 2명의 유다 - ‘다대오’, ‘가룟’은 지명(地名)이다. 예) 레오나르도 다빈치

  3. 열 두 명의 사도들 내에서 두 명씩 혹은 네 명씩 짝지은 예를 찾아보라.
    cf. 눅 10:1, 눅 22:8, 요 20:2-4, 행 3:1, 막 1:29, 막 13:3
    cf. “제자들이 나누어져 이룬 무리 중 한 무리의 선두에는 빌립이라는 이름이 서 있다"  (시대의 소망, 292)

  4. 예수께서 열 두 사도를 세우신 목적은 무엇인가?
    막
    3: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토의사항

  1. 예수님의 제자훈련은 그분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으며, 그것은 성공적이었는지 토의해 보자.

  2. 열 두 제자들을 훈련시킨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 마태복음 28:19-20에서 명령하신 ‘제자도’의 사명을 우리는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교훈하기를 마치고 그 작은 무리를 당신 주위에 가까이 모은 다음 그들 가운데서 무릎을 꿇고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그들을 당신의 성업에 바치는 기도를 드리셨다. 이와 같이 하여 주님의 제자들은 복음 사업을 위하여 안수를 받았다.”(소망, 296)

갈릴리의 어부들을 부르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사업에 사람들을 부르고 계신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최초의 제자들을 통하여 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기를 즐겨하신다.(시대의 소망, 297)


 

예수님의 안식일 개혁, 누가복음 연구 1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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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6:1-11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2]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5]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

[8]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10] 무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11]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유대인들이 하나님에게서 떠나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자신의 것으로 삼지 않았을 때 안식일은 그들에게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사단은 자신을 높이고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게 하려고 힘썼으며 안식일을 왜곡시키려고 활동하였는데 그 이유는 안식일이 그리스도의 능력의 표징이기 때문이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안식의 날을 무거운 짐이 되는 요구 사항들로 둘러싸서 사단의 뜻을 성취시켰다. 그리스도의 시대에 안식일은 매우 왜곡되어서 이날의 준수는 사랑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품성보다는 오히려 이기적이고 변덕스러운 사람들의 품성을 반영하였다. 랍비들은 사실상 사람들이 순종할 수 없는 율법을 주신 분으로 하나님을 나타냈다. 그들은 사람들로 하나님을 폭군처럼 여기게 하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안식일의 준수는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잔인스럽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게 하였다. 이런 그릇된 관념을 없애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일이었다. 랍비들이 무자비한 적개심을 품고 예수를 따라다녔지만 예수께서는 조금도 그들의 규례들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지 조차 않으셨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안식일을 지키시면서 똑바로 행하셨다.”(소망, 283-284)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어떻게 생각하셨는가? 참된 안식일을 어떻게 회복시키셨는가?

본문연구

  1. 본문의 사건이 있었던 구체적인 때는 언제인가?
    1절, 6절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안식일에 있었던 사건은 공관복음(마태,마가,누가) 모두에 기록되어 있다.

  2.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의하면 본문에서 안식일에 금지되는 일은 무엇인가?
    2절, 7절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타인의 밭의 이삭을 먹는 것에 관해서는 신 23:25을 보라.
    cf. ‘이삭을 주워 먹는 것’과 ‘병자를 고치는 것’이 왜 안식일을 범하는 것일까?

  3. 3-5절에서 다윗의 예를 들어 반박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어떻게 설명되는가?
    9-10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다윗의 사건은 삼상 21:1-6에 기록되어 있다.

  4. 8-10절에서 예수님이 병자로 하여금 “한 가운데” 서게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공개적이고 도전적으로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하시므로 의도하신 것은 무엇일까?
    cf. 9절에 의하면 무엇인 선행이고 악행이며, 생명을 구하는 것이며 죽이는 것인가?
    바래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율법과 하나님의 율법의 구분은 무엇인가?

 

토의사항

  1. 안식일을 거룩히 지킨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이야기 해보자.
    cf. 출 20:8, 22:31, 겔 20:12을 참고하라.

  2. 예수님께서 당시의 잘못 적용된 안식일 계명을 어떻게 개혁하셨는가? 오늘날 우리의 안 식일 준수에서 개혁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손이 마른 자를 고치심으로써 유대인의 관습을 정죄하셨고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그 사람의 손을 고쳐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금하였다. 넷째 계명을 하나님께서 주신 그 본연의 모습대로 살리셨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선언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무의미한 규례들을 쓸어 버림으로 안식일을 존귀하게 하신 반면에 예수께 대하여 불평의 말을 하던 자들은 하나님의 성일을 더럽히고 있었다.”(소망, 287)

누가는 마태(12장)와 마가(2,3장)와 더불어 안식일 논쟁을 통하여 개혁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언급하였다.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으로서 매우 중요한 안식일 계명을 본래의 의도대로 돌려 놓으셨다. 안식일은 그분이 주인이시며, 사람을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하지 못할 일. 안식일 외의 다른 날에는 제자들의 그런 행위가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배고픈 사람이 밭을 지나가며 과일이나 곡식을 먹을 수 있도록 구약의 율법이 구체적으로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참조 신 23:24, 25 주석).

제자들이 여기서 행한 일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인과 안식일에 행한 그의 치료 행위는, 그가 개인적으로 안식일 준수에 관한 구약의 율법과 규례들을 지키지도 않았고 또 그의 제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았던 증거라고 흔히 현대의 저자들은 곡해하고 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이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의 입장을 넷째 계명에 대한 거부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예수가 모세의 율법과 십계명의 요구를 개인적으로 고수했으며 그의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쳤음을 보여준다. 그는 도덕법의 영원한 구속력을 거듭하여 확언했으며(참조 마 5:17, 18; 요 15:10 등 주석), 모세의 의식법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적용된다는 유효성을 인정했다(참조 마 23:3 주석). 예수 역시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지상봉사 기간 내내 사람이 만든 법칙과 관습의 타당성에 관해서는 유대인 지도자들과 대립했다(참조 7:2, 3, 8 주석). 당시 많은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과 십계명보다 경건에 더욱 필수적이라고 여긴 듯이 보이는 이러한 요구들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타협하지 않고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참조 2:19 주석). 이러한 요구들 중 많은 부분을 그저 대강만 살펴보아도 그들의 어리석음이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바리새인들은 구원이 이 모든 규례들을 철저하게 준수함으로써 얻어진다고 엄격히 가르쳤다. 경건한 유대인의 생애는, 이런 순전히 사람이 만든 요구사항들을 부지중에 불순종했을지도 모르는 의식적 부정함을 피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기울이는 헛된 노력으로 일관되었다. 이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의 제도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정면충돌이 불가피했다.

미쉬나(Mishnah)에는 안식일에 금지된 39개의 주요 노동이 열거되어 있다(Shabbath 7. 2, Soncino ed. of the Talmud, 348, 349). 이 중 11개는 빵을 생산하고 준비하는 과정이다. 씨 뿌리기, 밭 갈기, 수확하기, 단을 묶기, 타작하기, 키질하기, 선별하기(합당한 음식에서 합당하지 못한 것을 골라내는 것), 가루로 만들기, 체질하기, 반죽하기, 굽기. 그 다음 12개는 옷을 준비하는 과정 즉 양털을 깎는 것으로부터 옷을 기워 만드는 일에 관련된 과정에 적용된다. 그 다음에는 사슴의 사체를 음식이나 가죽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7단계가 뒤따른다. 나머지 목록은 글쓰기, 건물 짓기, 불 켜고 끄기, 그리고 물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 일반적 규례들은 더욱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 주요 규례들에 덧붙여 안식일 준수에 관한 다른 무수한 지침들이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마도 약 1킬로미터 정도의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에 관한 지침일 것이다. 벽에 고정된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이나(Shabbath 149a, Soncino ed. of the Talmud, 759), 심지어는 촛불을 켜는 것도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같은 규례가 안식일에 낳은 달걀을 이방인에게 파는 것과 촛불이나 불을 켜기 위해 이방인을 고용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다. 풀잎에 물주는 일을 하면 안 되기 때문에 땅에 침을 뱉는 것은 불법으로 간주되었다. 안식일에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손수건 한쪽이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에 기워져 있으면 괜찮았는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손수건이 아니라 옷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에 관한 규칙도, 유사한 방식으로, 여행하고자 하는 길을 따라 적당한 거리에 음식물을 숨겨 놓는 식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런 경우에 음식이 있는 곳이 그 음식 주인의 또 다른 “집”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음식을 숨겨 둔 곳에서 또 한 번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를 갈 수 있고 계속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 당시에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지워졌던 “무거운 짐”(마 23:4) 가운데 몇 가지 예이다.

그렇게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킴으로써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만든 규칙들의 문자에 계속적으로 집착함으로 하나님의 법의 정신을 파괴하였다. 원래 사람이 창조주가 만든 것들을 연구하고 그의 사랑과 선함을 생각하도록 고안된 안식일이 오히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속성을 상기시키는 날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하나님을 독재자로 묘사함으로써 하나님의 품성을 왜곡시키는 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천연계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을 선포하고 안식일은 태초에 이런 것들에게로 사람의 주의를 이끌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자신에게 존재가치를 부여해주고 행복과 복지를 위해 신성의 능력을 한결같이 행사하시는 분을 잊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 행위로서 어떤 것이 적합하고 적합하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문제는 안식일의 목적이 마음에 분명해지기만 하면 이내 풀리게 되어 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끌어 주는 것은 무엇이나, 우리를 위한 그분의 뜻과 우리를 취급하시는 그 방법들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고, 우리를 우리 생활에서 그와 더욱 효과적으로 협력하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과 복리에 공헌하도록 이끌어 준다. 이것이 참된 안식일 준수이다(참조 사 58:13; 막 2:27, 28 주석).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은 안식일을 소유하시고 그것을 지킬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람을 창조하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전지하신 창조주가 손으로 만든 피조물인 사람의 품성 발달을 위하여 도덕적, 영적 성장의 기회가 필요됨을 아셨기 때문에 안식일을 만들었다. 사람은 자신의 관심과 취미를, 천연계와 계시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품성과 뜻을 연구하는 데 바칠 시간이 필요했다. 제7일 안식일은 이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이 제정한 것이다. 언제, 어떻게 그날을 지켜야 할 것인지에 대한 창조주의 지시 사항들을 어떤 면으로든지 변경하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 손으로 만든 피조물을 위해 무엇이 최선임을 알고 있는 분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안식일이 축복이 되고 짐이 되지 말아야 하며, 사람이 그것을 지키는 것이 유익이 되고 손해가 되지 않도록 제정하였다. 그것은 사람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고안되었지 어려운 일을 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안식일 준수는 근본적으로 어떤 형식적인 것들을 시시콜콜히 지키는 것이나 어떤 일을 추구하는 것을 삼가는 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이런 빛으로 조명하는 것은 안식일 준수의 참된 정신과 목적을 완전히 놓치는 것이며, 행함에 근거하여 의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과 어떤 추구, 어떤 생각과 대화의 주제를 삼가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호의를 사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가 이런 일들을 삼가는 것은,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와 생각을 다른 데 바쳐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협력하는 능력을 증진시키고, 그리고 그분과 우리의 동료들에게 더욱 효과적으로 봉사하기 위해서이다. 주로 어떤 일들을 하지 않는 부정적인 요소로만 구성된 안식일 준수는 결코 바른 것이 아니다. 안식일 준수의 적극적인 요소를 실천할 때만 우리에게는 안식일 준수로부터 지혜와 사랑의 창조주로 말미암아 제정된 유익을 얻을 희망이 있다. 참조 사 58:13 주석 .

안식일을 세밀하게 준수하는 랍비들의 수많은 요구들은 하나님의 안목에 안식일이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는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법을 이렇게 맹목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의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안식일을 기계적으로 준수하기 위해 즉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랍비들은 안식일에 행해서는 안 될 것을 엄격하고 무의미하게 구분함으로써 그날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실추시켰다(참조 24절 주석). 그들은 어떤 특정한 일들을 삼가는 것, 즉 안식일 준수의 부정적인 요소를 강조하였다. 종교의 형식이 본질을 대신하게 되었다.

 

인자. 참조 마 1:1; 막 2:10 주석; 요 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안식일에도. 즉, “안식일에조차도.” 트집잡는 바리새인들 앞에 그리스도가 제시한 논리의 정연함은 마태에 의하여 더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제시되었다. (1) 인간의 필요는 의례적 요구나 인간의 전통보다 더 중요하다(참조 마 12:3, 4). (2) 성전과 관련되어 행하는 노동은 안식일의 요구와 부합된다(참조 5절). (3) 그리스도는 성전(참조 6절)이나 안식일(참조 8절)보다 더 크다.

 

주인. 오직 구주만이 그날에 무엇이 합당한지를 결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권리 이상을 침범한 셈이 되었다(참조 24절). 교회는 안식일에 유대인들처럼 강압적인 규제를 부과하거나 한 날에서 다른 날로 그 거룩함을 전가시킬 수 있는 권리가 없다. 둘 다 사람을 참된 안식일 준수의 정신으로부터 미혹시키기 위하여 마련된 악한 자의 계교이다. 바리새인이든 기독교인인이든 간에 하나님이 택한 날을 변경할 권리가 없다.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 들린 자(참조 막 1:21~28), 베데스다 연못에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참조 요 5:1~16), 실로암 연못에서 눈먼 자를 고치신 것(참조 요 9:1~17), 그리고 18년 동안 병에 시달린 여자(참조 13:10~17), 고창병 걸린 남자(참조 14:1~6)를 고치신 것과 비교해 보라. 그리스도는 이처럼 안식일에 공개적으로 치유 이적을 베풀었으며, 베드로의 장모를 집에서 고치기도 했다(참조 막 1:29~31). 손 마른 사람을 고친 것과 합하여 안식일에 행한 치유 이적이 일곱 번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구체적으로 언급된 20가지의 치료 사례 가운데 3분의 1이 안식일에 일어났다. 참조 제9권, 122~126; 요 5:16 주석.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여기서는 유익을 끼치는 것과 해를 끼치는 것을 뜻함. 마태의 기사에 의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전에 이미 예수에게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은지 물었다(마 12:10). 랍비들의 규정은 고질병일 때와 당장 죽음에 처할 만큼 위험한 경우를 자세하게 구분하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질병들은 다른 것보다 더 중한 병이며 이러한 병으로 고통받는 자들은 필요에 따라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안식일에 심각한 병과 관련되지 않은 고통을 제거해 준다든지, 예수가 지금 막 치료하려고 하는 사람의 경우처럼 오랫동안 병을 앓아온 사람을 돕는 규정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율법은 다소 관대하게 해석되었을 것이며, 실제로는 안식일에 다른 많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보살핌을 받았을 것이다.

 

생명을 구하는 것. 유대 금언에 의하면, 선을 행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해를 끼치는 것과 같고, 생명 돌보기를 소홀히 하는 것은 생명을 빼앗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사람의 생명은 위험에 처해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치료 행위는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연기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예수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 될 수 없음을 확언했다. 예수의 관점에서 볼 때, 고통받는 사람의 고통을 제거해 줄 수 있는 기회를 지나치는 것은 잘못을 행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시시콜콜한 규정을 위반할까봐 부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관심을 거기에 포함된 근본적인 원칙으로 돌리고 있었다. 생명을 구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빼앗는 것과 같고, 생명을 향상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약화시키는 것과 같다(참조 약 4:17).

 

어느 것이 옳으냐. 참조 막 2:24 주석. 또다시 랍비들의 법이 사람들의 필요와 대립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예수가 하나님의 율법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시 말해 그가 교훈과 모본으로써 계명의 요구에서 떠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정신에 참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예수는 지상 생애의 마지막에 아버지의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확언했다(참조 요 15:10).

 

지붕 뚫고 내려온 병자, 누가복음 연구 1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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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5:17-26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지붕을 뚫고 내려온 중풍병자의 이야기는 누구나 좋아한다. 이 이야기는 결단과 지혜의 이야기이다. 예수께로 접근하려 했으나 군중에 의해 길이 막히자 지붕으로 올라가 구멍을 뚫어 병자를 상에 달아 내린 사람들의 행동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심지어 익살스러운 감동마저 준다. 땀내 풍기는 평민들로 가득 찬 방에서 서기관들은 벌써 소외되는 기분을 느꼈으며, 천장에서 흙 조각이 쏟아져 내리고 거기서 어떤 사람이 달려 내려오는 광경을 보았을 때 그들이 놀라는 표정을 상상해 보라!
예수께서는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높이셨으나, 그들이 기대했던 방식대로 하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중풍병자의 마음을 가장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영적인 것임을 알고 계셨다. 그 병자는 육신이 낫기를 원하였으나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화평, 곧 그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확신 갖기를 더욱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본문연구

  1.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은 것은 친구들의 믿음 때문인가? 아니면 본인의 믿음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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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사람들은 왜 예수님께 신성모독의 죄를 지었다고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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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f. 참람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막 2:7절을 참고하세요.

  3. 23절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는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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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의사항

  1. 내 삶에 존재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말 해결 할 수 없는 장애물인가요?

       이 고통을 당하는 자의 마음에 세 가지 큰 장애물이 있었을 것이다. 치료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중 어느 것도 치유의 가망성을 멀어지게 하기에 족했을 것이다. 첫째로 약 8세기 전, 엘리사 시대 이후로는 문둥병자가 치유되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 장애물은 더욱 더 암담한 것인데, 문둥병자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신념이었다. 예수가 그를 기꺼이 치유하고자 할 것인가? 셋째 장애물은 더 실제적인 문제였다. 문둥병자가 어떻게 그의 요구를 말하기 위하여 예수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 예수가 가는 곳마다 군중들이 몰려들었으며, 의식법은 문둥병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접근하거나 섞이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었다.


  2. 내가 살아온 생애 중에 가장 후회되는 일(양심의 가책이 되는)은 어떤 것인가?

       “이 중풍병자의 질병은 죄악 된 생활의 결과였으며 그 고통은 양심의 가책에 의해 더욱 심해졌다. 그는 정신적인 고민과 육체적 고통을 덜기를 바라면서 이미 오래 전에 바리새인들과 의원들에게 애원하였었다. 그는 어떤 곳으로부터도 도움의 가망이 없음을 알고 절망에 빠져 버렸다. 그가 바란 것은 육체적 회복이라기보다는 죄 짐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 그가 만일 예수를 보고, 용서와 하늘의 평강의 보증을 받을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든지 죽든지 만족할 수 있었다”(시대의 소망, 267).


  3. 꼭 고침을 받고 싶은 병은 어떤 것인가?(스스로 병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


  4. 예수님께서 내 문제를 반듯이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은 얼마나 되는가?

       크신 의사께서는 치유책을 처방해 주실 뿐만 아니라 돌보고 관심을 베푸시며, 동정심이 충만하시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 계셨을 때, 당신의 사랑과 관심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온전해질 수 있도록 당신을 충분히 신뢰할 수 있게 하셨다. 그분의 사랑은 육체적ㆍ정서적ㆍ영적 치료를 가져다준다.

가버나움. 마태는 가버나움을 그리스도의 “본 동네”(own city, 9:1)라고 언급한다. 즉, 그가 갈릴리 사역을 수행하고 고향같이 여긴 듯한 본부였다.

 

[곧]. (「개역한글판」에는 없고 「제임스왕역」에 나옴-역자 주). 그리스도가 첫 선교 여행을 위해 가버나움을 떠나게 된 것은 그를 찾아나선 큰 군중의 무리와 대중적 흥분으로 기인된 것이었다(참조 1:33, 37). 그러나 그가 가버나움을 떠나자 사람들의 열기가 식었다. 예수가 다시 가버나움에 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왔다.

 

네 사람에게 메워. 마가만 이 구체적인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와 또 다른 곳의 구체적인 설명은 이 기사의 사실성을 반영해 줄 뿐만 아니라 이 기사가 목격자의 증언-아마도 베드로-임을 증거해 준다.

 

무리를 인하여. 즉, 많은 사람들의 무리.

 

지붕을 뜯어. 누가(눅 5:19)는 그들이 “기와를 벗기고…내리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동에서는 흔히 그렇듯이, 이 집의 지붕도 아래 정원에서 사다리나 층계로 올라가도록 평평하게 되어 있었을 것이다(참조 신 22:8 주석; 행 10:9). 서까래 위에 기와를 깔아 지붕을 만들었을 것이다.

예수에게 접근하기 위해 사용한 특이한 방법은, 그에게 아주 가까이 왔으나 여전히 기회를 놓쳐버릴 것을 염려한 중풍병자 자신이 내놓은 절박한 제안이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268). 갑자기 가버나움을 떠나가고(1:37, 38), 수 주일 동안 멀리 떨어져서 머물렀으며 마침내는 사막에 은둔하였던 예수의 행적이 죽음에 직면한 이 사람의 절망감을 더 심화시켰다(참조 시대의 소망, 267).

 

침상. 헬라어 크랍바토스(krabbatos). 가난한 사람의 “소파”나 “침대.” 그 병자가 누운 초라한 침상은 아마도 풀이나 헝겊 조각을 누벼 만들었을 것이다.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즉, 메고 온 네 사람과 중풍병자의 믿음. 지붕을 뚫어 구멍을 낸 것은 그들의 절박한 필요와 예수만이 그것을 충족시킬 수 있음을 생생하게 말해 준다. 그러한 필요 의식과 믿음은 예수의 치료 능력이 각 사람의 영혼과 신체에 적용되기 전에 있어야 할 필수적인 것이다(참조 눅 5:8 주석).

 

소자야. 헬라어 테크논(teknon). 문자적으로 “어린아이.” 여기서처럼 부를 때는 “내 자식아”, “내 아들아”로 쓰인다. 이 질병이 죄악된 생애의 결과로(시대의 소망, 267) 생긴 만큼, 그가 살아온 이야기는 탕자와 유사한 것 같다(참조 눅 15:13, 14). 몇 개월 전에 베데스다에서 치유 받은 중풍병자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참조 요 5:14).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참조 10절 주석. 고통은 그에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으며, 그 고통이 자기 자신이 저지른 죄의 결과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예수가 언급한 것은 그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는 이러한 죄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 중풍병자는 신체의 치료는 물론 영혼의 치유를 위해 찾아 온 것이다(참조 시대의 소망, 267, 268,). 그는 신체적으로는 무력하고 영적으로는 절망적이었으나 예수에게 나아와서 도움을 받고 소망을 갖게 되었다(참조 요 9:2 주석).

 

어떤 서기관들이. 누가에 의하면(참조 5:17 주석), 이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은 “갈릴리와 유대와 예루살렘” 각처에서 왔다. 이들이 여러 지역에서 대표로 왔으며 이 특정한 경우에 등장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음을 말해 준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가 지금까지 일했던 바로 그 지역에서 가버나움으로 왔다는 사실은, 그렇게 대중의 열렬한 관심의 중심 인물이 된 분을 조사하기 위해서였음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러한 상황은 2년 전에 침례자 요한의 일을 조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대표자들을 요단강으로 파견했던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요 1:19~28). 예수가 전에 일한 적이 있던 유대로부터 온 대표자들은 최근 갈릴리에서 행한 예수의 행적에 관하여 그곳 지도자들에게 어떠한 방침을 일러주기 위해 보내졌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정탐꾼들이며(참조 시대의 소망, 213, 267,), 예수는 이들에게 마치 베데스다에서 중풍병자를 고쳐준 사실을(요 5:1~9) 생생하게 생각나게 해주려는 듯이,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치유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찾고 있는 것-예수가 참람된 자라는 확실한 증거-을 머지않아 찾을 것이다.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 했던 예수의 말은 신성모독이라는 낙인이 찍혔으며(요 5:18), 그들이 또다시 신성모독이라고 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권리를 예수는 공적으로 행사하였다. 이 경우는 갈릴리 봉사 기간 동안 유대 지도자들과의 몇 번의 마찰 가운데 첫 번째에 해당된다.

 

마음에 의논하기를. 헬라어 디알로기조마이(dialogizomai). “결산하다”, “대화하다”, “토론하다.”

 

이 사람이. 헬라어 후토스(houtos). “이 [사람].” 시비걸 때 쓰는 말투 같다. 그들은 예수가 신성모독을 범한 현장을 포착했다고 생각했으나, 이상하게도 그 증거는 1년 반 후에 재판할 때 그를 반박하기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어려움은 예수가 메시야 주장을 하였다기보다 그가 신성의 능력-죄를 용서하고 질병을 치유함에 있어서-을 실제적으로 행사함으로써 그들과 맞닥뜨렸다는 사실에 있었다.

 

참람하도다. 헬라어 블라스페미아이(blasphe--miai). “상처를 주는 말들”, “중상” 즉 권위를 손상시키는 말들. 서기관들은,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여 줌으로써 예수가 그들의 주장대로 한낱 인간으로서 신성의 권한을 침해했다고 생각했다. 의식 제도 아래에서 제사장이 사람의 고백을 관장했으나 실제로 용서의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가 제사를 받는 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고백을 받으시는 것을 상징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참조 히 10:1~12). 서기관들은 신성의 임재의 증거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를 비난했던 바로 그 죄를 마음속에 범하고 있었다(참조 마 12:22~32). 레위기에 의하면 신성모독에 대한 형벌은, 물론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굳이 그대로 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이었다(참조 24:16).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서기관들은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는 한 철저하게 옳았다. 왜냐하면 구약은 죄를 사하시는 분이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사 43:25; 렘 31:34; 참조 요 10:33). 그들의 과오는 그들 앞에 서 있는 분이 하나님임을 인식하기를 실패한 데 있었다.

 

중심에 아시고. 헬라어 에피기노스코(epigino-sko-). “정확히 알다”, “인지하다.” 예수는 자주 사람의 생각을 읽었다(막 12:15; 눅 6:8; 9:47; 11:17; 참조 요 4:16~19; 8:7~9). 이것은 대체로 그들을 심히 발분(發憤)케 하는 효과를 주었다.

 

어느 것이 쉽겠느냐. 서기관들은, “사람의 죄가 사하여졌다고 말하는 것이 쉽지, 왜냐하면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를 아무도 말할 수 없을 테니까”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예수는 즉시 그들 속에 품고 있는 도전에 응수하여 이렇게 질문했다.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과 중풍병자를 치료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너희는] 쉽겠느냐?” 대답은 명백하다.

 

인자. 이 대목에서 처음으로 세 공관복음서 기자 모두가 이 유명한 호칭을 사용한다(마 9:6; 막 2:10; 눅 5:24). 이것은 그리스도가 스스로를 가리켜 즐겨 사용한 호칭이었으며 복음서에 80번 정도 나온다. 그러나 아무도 이 명칭을 써서 그를 부르지 않았으며 복음서 기자들도 그를 이렇게 언급한 적이 없다. 이 명칭은 최소한 어떤 유대인들에게는 새로 건설될 왕국의 통치자인 메시야를 칭하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맹세의 경우(마 26:63, 64; 막 14:61, 62)나, 그를 그리스도로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사적으로 말씀한 경우(마 16:16, 17; 요 3:13~16; 4:25, 26; 16:30, 31)를 제외하고는, 예수 자신이 직접 메시야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예수의 생애와 말씀과 사역에서 메시야 예언들이 그에게 성취되었다는 증거를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예수는 문자 그대로 순전히 역사적인 사실에서나(참조 눅 1:31~35; 롬 1:3, 4; 갈 4:4), 더 높은 의미에서도 “사람의 아들[人子]”이다. 인자라는 명칭은 그를 성육신한 그리스도로 나타내준다(참조 요 1:14; 빌 2:6~8). 그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이 한 신성과 인성으로 연합된 기적을 가리킨다. 그것은 사람의 아들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것이라는 진리를 증거해 준다(요 1:12; 갈 4:3~7; 요일 3:1, 2). 인성이 다시 신성의 형상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신성이 인성으로 나타난 것이다(시대의 소망, 25).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에 관해서는 눅 1:35; 요 1:1~3 주석을 참조하라. 그리고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에 관해서는 눅 2:49, 52; 요 1:14 주석을 참조하라. 요 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을 참조하라.죄를 사하는. 고통당하는 자가 고통을 주는 질병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그 질병의 원인이 먼저 제거되어야만 한다(참조 5절 주석). 영혼을 치유하지 않은 신체의 치료는 젊은이가 질병을 얻은 과정을 반복하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게 새로운 몸을 준 그리스도는 새로운 마음을 먼저 주어야만 했다.

 

권세. 헬라어 엑수시아(exousia). “권세.” “힘” 또는 “능력”을 의미하는 헬라어는 보통 뒤나미스(dunamis)이다. 기적을 행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요구되나, 죄의 용서는 권세의 문제이다. 여기에서는 엑수시아가 이 구절의 시작 부분에 와 있으며 죄를 용서하는 그리스도의 권세를 강조해준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이 권위에 도전했다(참조 11:28).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예수는 그들이 볼 수 없는 훨씬 더 위대한 사실의 증거로서 그들이 볼 수 있는 기적을 행했다(참조 롬 1:20).

 

말씀하시되. 예수의 선포 도중에 이 말씀이 삽입된 것은 이 시점에서 예수가 서기관들에게서 돌이켜 중풍병자를 향하여 말하고 있음을 의도하고 있다. 다른 모든 복음서의 서술에서도 같은 지점에 삽입되어 있다(참조 마 9:6; 눅 5:24). 같은 말의 유사한 용례가 막 1:16과 마 4:18; 막 5:28과 마 9:21; 막 14:2과 마 26:5; 막 15:10과 마 27:18에도 나타난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헬라어 소이 레고(soi lego-). “너에게 내가 말한다.” 여기에서 헬라어 어순이 강조하는 바는 예수가 말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있다. 10절에서는 믿지 않는 서기관들에게 말했으나 이제 그들에게 증명해주기 위해서 중풍병자를 향하여 “너에게 나는 말한다, 일어나라”고 했다. 육체적으로 치료하는 능력은 영적으로 치유하는 권위에 대한 증거이다.

 

네 침상을 가지고. 병자는 침상에 누운 채 예수에게 운반되었다. 그는 이제 일어난 큰 변화의 증거로서 그의 침상을 가지고 예수를 떠난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 누가복음 연구 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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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5:1-11

[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그 이적이 제자들에게 전하여 준 그 의미 심장한 교훈은 우리를 위한 교훈이기도 하다. 즉, 말씀으로 바다에서 고기를 모을 수 있었던 그분은 또한 인간의 마음에 감명을 주고 그의 사랑의 끈으로 그 마음들을 이끌어서 그의 종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할 수 있으셨다.
그들은 미천하고 배우지 못한 갈릴리의 어부들이었지만 세상의 빛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택하여 앉히시려고 부르신 그 지위에 합당하게 하실 수 있으셨다. 구주께서는 교육을 멸시하시지 않으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지배를 받아 그 사업에 헌신할 때에 지적 교양은 축복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 당시의 지혜 있는 사람들을 지나쳐 버리신 것은 그들이 너무 자신만만해서 신음하는 인류들을 동정할 수가 없고 따라서 나사렛 사람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완고하게도 그리스도의 가르침 받는 것을 비웃었다. 주 예수께서는 당신의 은혜를 전달하는 데 막힘이 없는 통로가 될 자들의 협력을 구하신다.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첫째로 배워야 할 일은 자아를 불신하는 교훈이다. 그리하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품성을 나누어 받을 준비가 갖추어진다. 이것은 가장 훌륭한 과학적인 학교의 교육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늘의 교사에게서만 얻어지는 지혜의 열매인 것이다.”(소망, 249-250)

 

예수님께서 부르신 첫 제자들은 어부들이었다. 그 과정과 의도는 무엇일까?

 

본문연구

  1. 11절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은 “저희들”은 누구들인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마 4:18-22과 막 1:16-20과 비교하여 첫 제자들의 이름을 나열해 보라.

  2. 마태(4:18-22)와 마가(1:16-20)의 기록에 비하면 누가의 기록은 자세한 사실을 말해주 고 있다. 복음서 기자들의 본문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시몬 베드로를 부르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본문에서 모두 찾아보라.
    cf. 1절의 “게네사렛”은 구약에서는 “긴네렛”, 신약에서는 “갈릴리” 혹은 “디베랴”라고도 불리는 갈릴리 북서쪽의 지명이다.

  3. 5-6절에서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가득 잡은 이적”을 통하여 예수님께 서는 무엇을 암시하시고자 하셨는가?
    9-10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마 4:19과 막 1:17을 참고하라.

  4. 베드로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한 것은 왜일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전문지식 vs 하나님의 말씀 이 충돌될 때.. 나는 어떻게 하는가?
    cf. 단 10:8과 사 6:5을 참고하여 설명해 보자.

 

토의사항

  1. 예수님께서 주로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신 까닭은 무엇인지 이야기 해보라.

    예수께서 배움이 없는 어부들을 선정하신 것은 그들이 그 당시의 유전과 그릇된 관습들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천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겸손하고 온순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업을 위하여 교육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 시대의 소망, 250.

  2.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11절)는 어부들의 순 종과 비교하여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과 순종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보자. (직접 부르심? 간접 부르심?)

 

누가는 마태와 마가와는 달리 매우 상세하게 첫 제자들을 부르신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예수를 옹위(press)하던 많은 무리들 가운데서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을 선별하셨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특권을 우리는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1. 무리가…. 누가는 순서에 관계없이 갈릴리 호숫가에서 있었던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의 부름을 기록한다. 시간적인 순서로 보면 이 기사(1~11절)는 4:32과 33절 사이에 속한다(참조 마 4:23 주석). 누가가 이렇게 배열한 이유는 나사렛(4:16~30)과 가버나움(31~37절)에서 베푼 두 번의 회당 설교를 하나로 묶고, 첫 번째 갈릴리 전도여행에 관한 기사(12~15절)를 제자들의 부름(5:1~11)과 연결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게네사렛. 비옥한 게네사렛 평지가 근처에 있었으며, 아마도 이 때문에 호수에 그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참조 마 14:34; 막 6:53). 산지와 호수 사이에 위치한 이 평지의 북쪽에는 가버나움이, 남쪽에는 막달라가 있는데 지금은 엘-구웨이르(el-Ghuweir)라고 불린다. 이 평지는 길이가 5킬로미터이고 폭이 2.4킬로미터 정도 된다. 아열대성 기후로 인하여 호두, 무화과, 감람 열매 그리고 포도가 생산된다. 게네사렛 호수는 구약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긴네렛이라고 불렸다(민 34:11; 수 12:3 등). 그리스도 당시에는 갈릴리 바다(혹은 게네사렛 호수)가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풍요롭고 인구가 밀집된 지역과 맞닿아 있었다. 갈릴리는 주로 유대인들로 구성되었지만 유대교의 본부인 예루살렘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참조 2:42, 44 주석). 갈릴리는 유대교의 편견과 적대에서 벗어나 있었고, 따라서 여러 면에서 그리스도가 자신의 사업을 수행하기에 이상적인 곳이었다.

 

2. 배. 여기에 언급된 배들 가운데 하나는 베드로와 안드레의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야고보와 요한의 것이었다.

 

어부. 문자적으로 “바닷사람.” 얼마 안 있어 사람 낚는 어부가 될, 세베대와 둘 이상의 “삯꾼”(참조 막 1:20)과 함께 이 네 명의 어부는 야간 고기잡이에서 이제 막 돌아왔다(참조 5:5).

 

5. 선생. 헬라어 에피스타테스(epistate-s). 문자적으로 “[다른 사람의] 위에 서 있는 사람.” 따라서 “감독관” 혹은 “관리자”를 뜻한다. 누가는 예수를 가리키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한 유일한 공관복음서 기자이다. 누가와 그 밖의 기자들이 자주 사용한 더 일반적인 단어는 디다스칼로스(didaskalos)인데 문자적 의미는 “선생”이다(참조 요 1:32 주석). 사실 베드로는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그들이 고용한 사람들이 경영하는 고기잡이 사업의 “감독” 즉 에피스타테스였다(참조 막 3:16 주석).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낮에는 고기들이 갈릴리 호수의 깨끗한 물 속에 펼쳐진 그물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고기잡이하기에 알맞은 시간은 밤이었다.

 

얻은 것이 없지마는. 갈릴리 호수에는 고기가 가득했고, 따라서 고기잡이는 지역의 일반적인 직업이었다.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돌아오는 일은 흔한 경험이 아니었다. 수 분 후에 풍성한 고기를 잡도록 도운 동일한 능력이 밤새 쏟은 수고에 아무런 결실이 없도록 만들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때때로 우리가 힘을 다해 쏟은 수고가 아무런 열매 없이 끝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오직 더 큰 능력과 연합으로만 바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수와 연합의 필요성을 더욱 분명하고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하여 우리의 계획과 수고를 방해한다.

고기잡이는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베드로의 직업이었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그의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성공했음이 분명하다. 경험 많은 어부인 베드로는 자신의 고기잡이 지식이 목수이며 건축가였던 예수의 지식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선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지난날 예수가 행한 일을 보았던 것을 근거로 신뢰하는 마음에서, 베드로는 동료들과 함께 예수의 요청에 응하였다. 어떤 경우든 그들이 밤새도록 수고했던 것보다 더 악화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동료 어부들은 지난밤의 헛수고를 생각하면서 낙담에 빠져 있었다. 밤새도록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지루한 감옥에서 6개월 동안 괴로운 나날을 보냈던 침례자 요한의 운명을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참조 3:20 주석).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가 지난해에 거의 모든 노력을 유대 지방에 기울였지만, 유대 지도자들의 신임과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향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던 나사렛에서의 최근 경험을 회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헛된 수고로 지치고 불신의 마귀로 인해 시험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는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틀림없이 옛날의 야곱처럼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창 42:36)라고 외치려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난밤의 실망스러운 경험에 뒤이어 어부 베드로에게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줄 경험이 이제 막 일어나려는 참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봉사에서도 유대와 나사렛에서의 실망스러운 경험은 이제 갈릴리의 영광스러운 성공으로 바뀌려 하고 있었다. 무리들이 곧 예수에게 몰려들어 때로는 식사와 수면을 취하기 위해 그들에게서 피해야 할 정도가 될 것이었다.

 

6. 심히 많아.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호숫가에서 계속 그물을 정리하고 있었을 것이다(참조 7절).

전에는 아무것도 잡을 수 없었지만 이제 예수와 연합하여 그들의 기대를 훨씬 능가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스도 조차도 사람들 가운데 인간으로 사는 동안 아무것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하지 않은 것처럼(참조 요 5:19, 30; 8:28),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 예수를 좇고자 하는 사람들도 그와 함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워야만 한다(요 15:5). 특별히 사람을 낚는 일을 할 때는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노력과 결합될 때만 그 결과가 효과적이고 지속적일 수 있다. 약 1년 반 후에 비슷한 상황에서 무수한 고기가 잡힌 일과 비교해 보라(참조 요 21:11).

 

8. 베드로가 이를 보고. 숙련된 어부로서 바로 이 호수에서 일을 하면서 삶의 대부분을 보낸 베드로는 이적이 일어났음을 곧바로 알았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 사는 고기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심지어 자신의 일터인 호수에 있는 고기들조차도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듯 보였다. 이제 그 역시 사람을 낚는 대가(大家)의 부름에 순종할 준비가 되었다. 참조 6, 9절 주석.

 

엎드려. 배들이 아직도 호수에 나가 있고, 다른 사람들도 그물에 걸린 고기들을 꺼내고 있는 동안에. 그리스도 역시 아직 시몬의 배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참조 3절).

 

나를 떠나소서. 예수와 교제할 가치가 없다는 자각이 베드로의 양심에 강렬하게 엄습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그리스도께 매달렸고, 따라서 그의 말은 예수에게서 분리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전적인 무가치함에 대한 자각을 암시했다(참조 시대의 소망, 246).

 

죄인이로소이다. 경찰이 도둑의 범죄행각을 모른다 할지라도 경찰이 앞에 있으면 도둑이 불안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죄인들이 완전한 구주 앞에 있을 때 얼마나 더 부끄럽고 무가치한 감정을 갖겠는가? 무가치함에 대한 자각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삶과 성품을 바꾸는 일을 시작할 때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생기는 첫 번째 반응이다. 이사야가 이상 가운데서 거룩한 임재 속으로 들어갔을 때 동일한 감정을 느꼈다(사 6:5). 하나님은 구원의 필요성을 먼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오직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만이 배부를 것이다(참조 마 5:3, 6 주석). 아마도 처음으로 베드로에게 영적인 필요에 대한 깊은 각성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11. 모든 것을 버려 두고. 그들이 예전에 잡아보지 못한 엄청난 양의 고기를 소유하게 된 네 명의 동업자가 거기에 서 있었다. 그들은 가장 큰 물질적 성공을 거둔 그 순간 자신들의 사업을 버렸다(참조 시대의 소망, 273). 그들이 기적의 더 고귀한 의미를 보았다 해도, 지금까지는 미미한 성과만을 올린 떠돌이 선생의 제자로서 불확실한 생계를 위해 자신들이 선택한 직업을 버리는 데는 참으로 큰 믿음이 필요했을 것이다(시대의 소망, 245). 그러나 예수는 고기를 풍부하게 제공해 줌으로써 제자들의 필요를 채워 줄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었으며, 그들은 겸비하게 믿었다.

제자들에게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예수와 함께 더욱 고귀한 동업을 하기 위해 어부로서의 성공적인 동업을 해체하려는 것은 즉각적이고 현명한 결정이었다. 그들은 곰곰이 생각해 볼 시간도, 가족들의 필요를 제공해 줄 시간도 필요치 않았다(참조 마 8:19~22). 그들은 평범한 어부로서 깊은 곳으로 나아갔지만, 해안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그리스도가 이제 그들을 불러 사람을 낚도록 하기 위하여 지시한 “깊은 곳”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유지해 줄 것으로 믿었던 것들을 찾기 위해 밤이 새도록 수고했으나 허사로 끝났다. 이제 그들은 삶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포기하고자 했고, 그렇게 함으로 더 부요하고 더 풍성한 삶을 시작했다(참조 막 10:39). 그들은 봉사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갔다(참조 막 3:14 주석).

 

예수를 좇으니라. 지금까지는 적어도 네 명 중 세 명 즉 베드로, 안드레, 요한이 간헐적으로 예수를 좇았다. 두 가을 전에 요단강에서 그들이 받은 부름은 예수를 메시야 즉 세상 죄를 짊어지기 위해 온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인정하라는 부름이었다(참조 요 1:35~50 주석). 이제 그들은 신자로서만이 아니라 제자와 동역자로서, 자신들의 삶과 소유를 그의 것과 결합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 이전에는 이들 중 누구도 예수와 완전히 그리고 영구적으로 연합한 자는 없었다(시대의 소망, 246). 그들은 그동안 시간제 제자들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관심은 현세적 삶과 더 높은 삶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제부터 그들은 시간과 재능을 전적인 봉사에 바쳐야 했다. 네 제자가 예수를 따라간 것은 그들이 게을러 생계를 위해 일하기 싫어서나 그들의 세상적인 사업이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깊은 확신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가 부른 다른 제자들처럼 그들도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르라는 부름을 받을 때까지 자신들이 택한 직업에 충실하였다.

이스라엘의 지식인들은 네 제자 가운데 누구도 선생이 될 충분한 자질을 가졌다고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비천하고 불학 무식했지만 바로 이런 특성들이 제자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그들이 랍비의 잘못된 사상으로 교육받지 않았기 때문에 천국을 건설하는 일에 숙련된 일꾼으로 만들어 주는 데 필요한 교훈을 배우기가 훨씬 쉬웠다(참조 막 3:15 주석). 때로는 예수가 가르치고자 하는 교훈을 더디 배웠지만 그들은 예수에게 진정으로 헌신하였다. 예수의 사랑은 그들이 개인적으로 그에게 굴복하는 정도에 따라 점차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변화시켰다. 그들이 훈련을 마치고 나왔을 때, 더 이상 교양이 없거나 무식하지 않고, 예리한 통찰력과 건전한 판단력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와 닮은 점이 무척 많아 그들이 예수와 함께 있었음을 다른 사람들이 알 정도였다(참조 행 4:13).

하나님의 사업에 유용하게 되는 것은 뛰어난 지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눈앞에 있는 일에 대한 헌신에 달려 있다. 만일 그러한 재능들을 하나님께 바친다면, 위대한 재능과 탁월한 지성을 가진 한 사람의 영향력은 더 넓은 영역에서 일반에게 알려질 것이 분명하다(참조 실물교훈, 333).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보다, 사랑스런 마음과 온유한 마음 그리고 자원하는 손들로 당신의 사업을 훨씬 쉽게 이룰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아를 제쳐두고 마음속에 성령이 역사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것이다(참조 시대의 소망,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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