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1:19-30

[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내용 요약

  1. 이방인 논쟁 (1-25)
  2. 안디옥 교회의 설립 (19-26)
  3. 유대의 기근 구제 (27-30)

 

배 경

제11장의 첫 부분에서 다시 고넬료 사건이 문제가 된다. 28장밖에 안되는 사도행전에서 왜 고넬료 사건이 그렇게 크게 다루어지는가? 그것은 예루살렘의 제자들이 이방인을 향해 마음을 여는 일이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11장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드디어 세계선교를 위한 본부가 세워진다. 안디옥 교회이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올린고로 이방인들이 그들을 그리스도인들이라 부름은 지당한 일이었다. 이것은 자신들을 그리스도께 연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고귀한 이름이다.(행적, 157p)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지방에서 잘 할 수 없는, 서울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2. 나는 내가 속한 사회에서 “안식교인” 혹은 “재림교인”이라고 불리우는 것에 대하여 부담감이 없나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스데반의 일”(11:19)과 그 결과로 일어난 좋은 결과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볼까요?
  1. 그들이 용기 있게 헬라인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하니(11:20)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왔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습니까? (11:21)
  1. 바나바는 “착한 사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11:24)이것은 복음 전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1. 바나바는 바울을 찾으러 가서 무엇을 제안하였습니까?. (11:25)
    다메섹도상의 회심 이후 9년이나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있는 바울의 겸손과 신앙을 생각해 봅시다. 본인라면 그렇게 기다릴 수 있을까요?

  2. 안디옥의 신자들은 어떻게 살았기에 사람들이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을까요?(11:26)

생각해봅시다.

  1. 우리 주위에 헬라인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요?
  1. 안디옥교회가 설립된 의의에 대하여 생각봅시다.

안디옥에 있는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애를 통해 즐겨“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소원을 두고”(빌2:13) 일하기 원하심을 깨달았다. 영원한 가치를 지닌 사물에 관해 거의 관심이 없는 듯이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 그들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 저희가 사랑하고 섬기는 분에 대해 적극적인 증거를 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은 겸손히 봉사하면서 생명의 말씀을 효과 있게 만드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날마다 그리스도를 믿는 그들의 신앙을 증거하였다.(행적158p)

 


19. 스데반의 일로. 8:1~4에 나타난 대로, 순교자의 죽음은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광적인 핍박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신자들의 분산을 초래하였다. 빌립은 사마리아와 가이사랴에서 일했다. 다른 사람들은 베니게의 도성인 두로와 시돈 그리고 돌레마이로 갔는데, 아마도 이들은 21:3~7과 27:3에 언급된 교회들을 설립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구브로에는 바나바와 사울의 이후 사역을 위해서 길이 예비되었다(참조 13:4~13). 참조 280쪽 지도.

 

환난. 사울이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던 핍박을 가리킨다(참조 8:1; 9:1, 2).

 

안디옥. 갓 태어난 그리스도 교회가 수리아의 수도와 접촉한 것에 대한 첫 언급이다. 안디옥은 로마 제국에서 로마, 알렉산드리아, 에베소 다음으로 큰 도성이었고,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의 중요 거점이 되었다. 아마도 안디옥의 개종자 니골라(6:5)가 자기의 새로운 신앙을 선포하기 위해 귀환했을 것이다. 그곳으로 그리스도교가 들어간 것은 중대한 의미가 있었다. 실루기아(Seleucia) 항구에서 내륙으로 약 24킬로미터 떨어진 오론테스(Orontes) 강변에 위치했고, BC 300년경 셀류쿠스 Ⅰ세 니카토르(Seleucus Ⅰ Nicator)가 건립하여 그의 아버지 안티오쿠스(Antiochus)의 이름을 따라 명명된 안디옥은, 부와 영향력이 있는 곳으로 성장하여 아시아의 주도적인 도성이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곳의 학자와 문필가들을 극찬하였다. 키케로(Cicero)는 그들 중 한 사람인 아르키아스(Archias)에게 유명한 연설을 하였다. 유베날리스(Juvenal)는 로마 생활과 기호에 미친 안디옥의 영향을 인식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가진 편린(片鱗)이라도 헬라로부터 온 것이 있는가? 수리아의 오론테스 강은 오래 전부터 티베리스 강(Tiber)으로 흘러 들어오면서, 수리아의 방언과 풍습 그리고 피리와 경금현(傾琴絃, slanting harp-strings) 등도 함께 가져왔다”(Satires iii. 62~64; Loeb ed., 37).
안디옥에는 유대인 거류지가 여러 곳 있었는데, 그들을 위하여 헤롯 대왕이 그 도성을 가로질러 대리석 주랑(柱廊)을 건설하였다. 안디옥은 로마의 수리아 행정 장관 즉 총독의 본부였다. 그리스도 교회는 예루살렘이나 가이사랴보다 헬라 문화에 더 가깝게 접촉하는 안디옥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또한 그리스도 교회는 가장 유혹적이고 저급한 형태의 이교와 맞닥뜨렸다. 다프네(Daphne) 신에게 바쳐진 작은 숲들은 방탕한 우상숭배로 유명했다. 교회가 안디옥을 주요 거점 가운데 하나로 삼을 수 있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승리였다.

 

유대인에게만. 이는 물론 고넬료의 회심이 일어나기 전 혹은 고넬료의 회심이 일반적으로 알려지기 전에, 예루살렘을 떠났던 사람들에게는 예상된 것이었다.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그리스도의 예언적 명령이 최대 범위까지 수행(1:8)될 때가 이르렀다는 것을 통보받지 못했다. 유대인만 골라 말한 것은 분명히 베드로와 고넬료에 대한 앞의 이야기와 이어지는 선교사 사역에 대한 진술 모두와 대조되어 언급된 것이다. 

 

20.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 이 사람들의 경우, 좀 더 국제적인 배경을 가진 이들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고향이자 편견의 본거지인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중에 있는 이방인에 비해 어울리는 데 아마도 덜 망설였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짐작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13:1의 선지자 목록에 나오는 구레네 사람 루기오이거나 그리스도의 제자였던 구레네 사람 시몬일 수 있는데, 시몬이라고 추측할 만한 이유가 있다(참조 마 27:32 주석; 참조 막 15:21). 안디옥에 있는 교회의 설립자들은 알려지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21. 주의 손. 구약에서 하나님이 세상 역사에 직접 관여하는 것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참조 출 14: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손”을 뜻하는 히브리어 야드[yad])을 보았으므로.” 애굽 술객들의 진술과 비교해 보라.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출 8:19; 「제임스왕역」에는 “이는 하나님의 손가락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음). 이것은 매우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생동감 있게 표현한다.

 

22. 이 사람들의 소문. 즉 안디옥의 이 회심자들에 관한 소문. 만약 새로 회심한 이 사람들이 이방인이었다면, 그들의 회심 소식에 대해 나타낸 예루살렘의 호의적인 승인은 틀림없이 고넬료를 이미 용납했던 승인 덕분이었을 것이다.
바나바를…보내니. 이는 안디옥에서의 사역을 강화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승인과 지침을 전달하기 위한 것으로,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로 파송된 것(8:14)과 같은 맥락이다.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진행되고 있던 사역에 동조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아마도 바나바가 낙점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사울의 친구였고, 예루살렘에 있던 제자들 일부에게 사울을 소개했으며(9:27), 이방인에 대한 사울의 확신과 소망을 알았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사울은 같은 길에서 일할 기회를 환영했을 것이다. 안디옥에서 일하는 선교사들 일부와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는 더욱 적임자였을 것이다.

 

23. 기뻐하여. 바나바는 오직 이 새로운 사역에서 자신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았으며, 교회에 교인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크나큰 기쁨의 이유가 되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경험과 사역 전체는 언제나 지속적이고 쇠하지 않는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굳은. 바나바는 그들이 시편 기자와 같이 “나의 마음이…정해졌”(시 57:7; 108:1)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랐다.
주께 붙어 있으라. 충성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드려져야 하며, 앞 구절에서 지적한 것처럼 “굳은 마음으로” 그분 안에 남아 있어야 한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인들 위에 임한 하나님 은혜가 이룬 효력의 결과를 보았지만, 모든 참 목사가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사람의 의지 혹은 의지의 부족이 그 은혜를 방해할 수도 있음을 알았다.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라는 말은 옳지 않으며, 사람은 뒤로 물러가 변절하기 때문에 의지의 협력이 성화의 과업을 완성하는 데 필수적이다.
권하니. 혹은 “권하기 시작했으니.” 시제는 지속적인 행동의 시작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24. 착한. 혹은 “올바른”(참조 눅 18:18, 19). 바나바에게 쓰인 이 말은 극찬이었으며, 의심할 여지없이 이 사람에 대한 누가의 개인적인 의견이 표현된 것이었다. 누가는 기록에 이런 좋은 점을 남기는 데 아마도 신중했을 것인데, 이는 바나바가 누가의 친구이자 동역자인 다소 사람 사울과 결별해야만 했던 말다툼을 조금 후에 이야기해야 했기 때문이다(행 15:39).
성령…이 충만한. 안디옥의 헬라계 유대인들 사이에서 저명했던 바나바와 같은 성품의 소유자라면 그 도성에 있던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을 것이다. 동일한 자격이 스데반에게도 주어진다(6:5). 전도자들이 안디옥으로 왔던 것은 바로 스데반의 죽음 후에 이른 핍박의 결과였다. 그들 중 일부는 스데반을 순교로 몰고 간 그 사역에서 활동적이었던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을 것이다.

 

큰 무리. 21절과 관련된 사역 이후 많은 증가를 암시함. “위로의 아들” 바나바의 기쁨과 격려 가운데 표현된 것처럼, 예루살렘 교회가 이뤄진 일에 대해 승인한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이 진실한 일꾼들의 열성을 증가시켰을 것이다.

 

25. 바나바가…다소에. 이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사울이 안디옥에서 진행되고 있던 일에 찬성할 것임을 전제하며, 사울이 그곳 사역을 원조할 적임자라는 바나바의 신임을 보여 준다. 또한 사울이 예루살렘을 떠난 이 후 서신이나 사자를 통해 사울과 어느 정도 왕래가 유지되었음을 암시한다. 추측하건대, 사울은 다소나 그 근처에 머물면서, 그곳과 길리기아의 이웃 성읍에서 복음을 전파했을 것이다(참조 15:41 주석).

 

사울을 찾으러. 문자적으로 “사울을 뒤져내러”(to hunt up Saul). 주님의 현현을 경험했고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할 “택한…그릇”(9:15)으로 지정되었던 그는, 이때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에게 전파하는 이 새로운 사역을 위해 바나바에게 동참하도록 요청받았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효력을 발하고 있음을 이미 들었기 때문에, 사울은 초청을 수락하였다.

 

26. 교회에. 교회 건물이 아니라 회중을 가리키는데, 3세기가 되어서야 건물들이 교회의 소유에 들었기 때문이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신자들과 만나 복음 기별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가 무섭게 교회 조직으로 편입되었다.
일 년간. 앞선 사례들과는 달리, 여기서는 기간이 정확하게 주어진다. 사울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서, 말하자면 목숨을 걸고 전파하였다. 안디옥에 있는 교회에서 그는 그의 열심에 어울리는 안정도와 광범위한 기회를 발견하였다.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더 정확하게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받게 되었더라.” 배교자(the Apostate)라고 불린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AD 361~363년)는 풍자 형태로 별명을 창안하는 경향이 당시 안디옥 주민의 특성이었다고 언급하였다. 분명히 동일한 경향이 그리스도교가 최초로 나타났던 시기에도 유행하였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의 첫 음절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헬라어 크리스토스(Christos)에서 온 것인 반면 마지막 음절은 본래 라틴어인데, 이는 폼페이우스(Pompey)의 추종자들인 폼페이아니(Pompeiani) 같은 단어 및 다른 호칭들과 비교할 만하다. 유사하게 복음서에도 헤롯 당원(헤로디아나이[He-ro-dianai], 마 22:16)이라는 유사한 용어가 나타나는데, 이는 로마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어쩌면 이교도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조롱조로 이 호칭을 붙였을지도 모르는데, 루테라니(Lutherani) 곧 루터파라는 용어가 1,500년 이후 루터 추종자들의 적들에 의해 조롱조로 사용되었던 것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 호칭을 자신들에게 붙이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 호칭의 사용은 이 호칭을 지닌 이들이 그리스도 곧 메시야의 추종자들임을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들에게 이 호칭을 붙이지도 않았음이 분명하다. 새로운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분명하다. 이들 새 이방인 회심자들이 안디옥 교회에 동참했을 때, 이전의 어떤 이름도 국제적인 전체 조직을 포함하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더 이상 나사렛인도 갈릴리인도 헬라파 유대인도 아니었으며, 따라서 안디옥 사람들의 눈에는 특이한 혼종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라틴어 어미를 지닌 헬라어 즉 혼종어(混種語)인 “그리스도인”이 그들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보였다. 처음에는 조롱하는 말이었지만 후에는 영광스러운 이름이 되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말고”(벧전 4:16).
그러나 전승에서는 이 호칭의 기원을 안디옥의 1대 주교인 유오디우스(Euodius)에게 돌린다. 그곳 교회의 지도자로서 유오디우스의 계승자인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이 호칭을 자주 사용하였다.

 

27. 선지자들이…이르니.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2:17)에서 인용되었던 요엘의 예언에 대한 성취로서, 어린 교회에 선지자들이 있었음이 분명하다(참조 행 13:1, 2; 엡 2:20). 그러나 우리는 신약 기록들로부터 이 “선지자들”의 직무가 무엇이었는지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를 소유했고,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해석하는 일에 종사했으며, 때로는 여기서 아가보가 그랬듯이 미래 사건들을 예언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참조 행 13:1; 15:32; 19:6; 21:9, 10; 롬 12:6; 고전 12:10, 28, 29; 13:2; 14:6, 29~37). 선지자들의 사명은 분명히 사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수행하고 있었던 사역에 대해 예루살렘 교회가 부여한 부가적 승인으로 여겨졌음에 틀림없다.

 

28. 아가보. 바로 이 선지자가 후에 가이사랴와 관련된 이야기에 등장한다(21:10, 11).
천하. 헬라어 오이쿠메네(oikoumene-).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을 가리키는 단어. 눅 2:1; 눅 4:5과 신약의 다른 곳에서, 이것은 로마 제국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크게 흉년. 이 흉년은 아마도 요세푸스가 언급한 것으로 보이는데(Antiquities xx. 2. 5), 그는 티그리스(Tigris) 강 동편 아디아베네(Adiabene)의 여왕인 헬레나(Helena)가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동안 어떻게 백성들을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옥수수와 구브로의 마른 무화과를 얻어다가 도와주었는지를 말한다. 이 흉년은 마 24:7에 있는 예수의 예언에 대한 부분적인 성취로서 보여질지도 모른다. 이 사건과 신약 연대기의 관계를 알려면 제12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설명 1을 참조하라.
글라우디오. (「제임스왕역」에는 가이사 글라우디오[Claudius Caesar]). 본문상의 증거(참조 20쪽)는 “가이사”가 생략됨을 입증한다. 글라우디오의 통치는 AD 41년부터 54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 기간은 빈번한 흉년으로 유명하다(Suetonius Claudius xviii. 2; Tacitus Annals xii. 43).

 

29. 제자들이. 즉 안디옥 교회의 제자들.
그 힘대로. 문자적으로 “각각 번영한 대로.” 예언의 영향으로 모금 활동은 흉년이 임하기 전에 이뤄졌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사울과 바나바는 이방인들을 적극적으로 독려하여 후원하도록 했을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롬 15:25, 26)을 위한 모금 활동의 시초로, 후에 바울의 사역에서 매우 두드러졌으며(참조 행 24:17; 고전 16:1; 고후 9장; ) 사도가 교회의 유대인 계층과 이방인 계층 사이의 연합을 위한 끈으로 간주했다. 예루살렘의 회심자들은 타오르는 첫사랑에서 나온 관대함(행 2:45)과 그에 수반된 핍박(행 8:1)으로 인해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보다 가난의 압박에 더 노출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흉년이 다가왔을 때, 흉년에 영향받지 않은 지역에 위치한 교회들의 도움에 많이 의존했을 것이다. 안디옥 교회는 다른 교회들에게 훌륭한 모본을 보였다.

 

30. 장로들. 헬라어 프레스뷔테로이(presbuteroi). 문자적으로 “연만한 [남자].” 이것은 그리스도 교회의 이 직원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다. 그들은 아마도 사도는 아니었을 것인데, 이는 15:2, 4, 6에서 장로를 사도와 구분하여 언급하기 때문이다. 이 후부터 그들은 교회 조직의 두드러진 요소로 등장한다. “장로”라는 용어, 넓게는 이것이 언급하는 교회의 직책은 이방인과 유대인 생활 모두에 배경을 두고 있었다. 애굽의 파피루스는 “장로들”이 지역 주민들의 경제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입증한다. 그리하여 토지 임대와 세금 납부와 관련된 질문들로 인해 그들에게 간청이 들어왔다(참조 J. H. Moulton and G. Milligan, The Vocabulary of the Greek Testament, 535). 소아시아에서 이 용어는 시의회 의원을 가리켰고, 애굽에서는 신전의 사제를 가리켰다(참조 A. Deissmann, Bible Studies, 156, 233). 유대인 생활에서 “장로”(프레스뷔테로스[presbuteros])는 지역 회당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는데, 이는 테오도투스 명각(Theodotus Inscription)을 통해 입증된다(참조 6:9 주석). 이것은 또한 산헤드린의 평민 의원(히브리어로 즈케님[zeqenim])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참조 4:5 주석). 이렇게 하여 이 용어는 그리스도 교회가 지역 회중 가운데 주요 책임들을 맡은 직원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될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 이 지역 책임자들뿐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 또한 유대 산헤드린의 즈케님의 지위와 약간 유사한 지위를 점하고 있었을 것인데, 이는 사도들과 함께 그들이 자신들의 회중의 한도에 상관없이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15장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다. 이번 경우에서 안디옥에서 모금된 기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분배되도록 바나바와 사울의 손을 통해 보내진 대상이 바로 이들이었다. 
초기교회에서 장로는 또한 “감독”이라는 뜻의 에피스코포스(episkopos)로 알려졌는데, 이것은 영어에서 “bishop”이라는 단어로 편입되었다. 역사상 적어도 AD 3세기 이후 “장로”와 “감독”(bishop)이라는 용어는 교회의 서로 다른 두 직책을 나타냈지만, 신약의 증거는 사도 시대에는 두 용어가 동일한 직책을 가리켰음을 분명하게 지적한다(참조 딤전 3:2~7과 딛 1:5~9; 참조 행 20:28 주석; 참조 빌 1:1).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 AD 96년경)는 이 둘을 동일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고(Epistle to the Corinthians 44), 크뤼소스톰(Chrysostom, AD 407년 사망)도 “옛날에는 장로들이 감독관들(혹은 감독들)과 그리스도의 성직자들(혹은 집사들)로, 감독관들이 장로들로 불렸다”고 단언하였다(First Homily on Epistle to the Corinthians 1, in Migne, Patrologia Graeca, vol. 62, col. 183).
야고보의 서신에 의하면 장로의 의무 중 하나는 환자들을 방문하여 그들의 건강 회복을 위해 주님에게 기도하고, 치유를 위해 그들에게 기름을 붓는 것이었다(5:14). 후기의 장로와 감독 직책의 발전 과정에 관한 논의를 보려면 제12권 논문 “초기 그리스도 교회” Ⅷ장을 참조하라.

행 10:1-48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7]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9]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17]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21]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22]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 대
[23]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내용 요약

  1. 고넬료의 환상 (1-8)
  2. 베드로의 환상 (9-22)
  3. 베드로의 방문 (23-48)

배 경

제9장에서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할 인물을 준비하신 주께서는 10장에서 베드로로 하여금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고 이방인에게 성령이 내리는 것을 목도하고 그들에게 침례를 베풀게 하심으로서 베드로와 사도들, 즉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마음을 여신다.

 

만일 그분의 동역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기회를 활용하는 사람들이 되어 용감하고 충실하게 그들의 의무를 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 지성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을 개심시키실 것이다. (행적, 140p)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나와 신앙적인 입장이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선입견을 가지고 만났다가 그 사람의 태도와 인품에 감동된 적이 있나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재림교회의 특별한 빛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든 적이 있나요?

  2. 비 재림교인이 재림교인인 나를 보고 재림교회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가진 적이 있나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사도행전 10장에서 경건의 3요소를 찾는다면?(10:2)

  2. 고넬료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요. (10:1,2, 22, 25)

  3.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10:15)하신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무슨 음식이나 가리지 말고 잘 먹으라고 하신 말씀입니까?

  4. 베드로가 고넬료 집을 방문한 사실은 왜 그렇게 사도행전에서 중요할까요?

 

생각해봅시다.

  1. 고넬료의 신앙처럼 겸손하고 경건하기 위하여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2. 나와 신앙적인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깊이 이해하고 돕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봅시다.

 

주께서는 당신의 지혜로서 진리를 찾는 사람들을 이미 진리를 아는 이와 접촉하게 하신다. 빛을 받은 사람들이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나누어 주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시다. 지혜의 큰 근원으로부터 그 능력을 얻는 인간이 일하는 대리인, 즉 통로가 된 그를 통해서 복음이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에 변화시키는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행적 134p)

 


1. 이달리야대. 이것은 유대-로마 전쟁 기간에 수리아에 주둔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달리야 제2보병대(Cohors Ⅱ. Italica)일 것이며, 본 이야기가 일어난 시기 이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보병대는 노예 신분을 벗은 자유민 혹은 적어도 비로마인 출신의 남성들로 구성되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궁수로 구성된 원군 보병대였다.
  백부장. 참조 눅 7:2 주석. 백부장은 약 100명의 부하들을 통솔하였다. 그는 부대 직속 지휘권을 가졌고 부대원들이 임무를 수행하는지 살피고 기강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은 부장교 지위를 차지하였다. 백부장은 로마 군대에서 고위직으로 승진이 쉽지 않았다. 고넬료는 로마 시민이었다.

2. 온 집으로. 고넬료는 자기를 위해 고귀한 진리를 발견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이것을 자기의 가족과 하인들 그리고 자기의 영향 아래 있는 다른 이들에게도 나누어 주고자 했다. 베드로를 찾기 위해 파송된 병사도 “경건”(7절)하다고 일컬어졌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한 사람”이라는 표현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라는 유사 구절과 이 표현은, 유대교를 받아들여 여호와를 경배하게 된 고넬료 같은 이방인들을 언급하는 곳에서 누가가 반복적으로 사용한다(10:22, 35; 13:16, 26, 50; 16:14; 17:4, 17; 18:7). 많은 경우에 이것은 적어도 안식일 준수와 율법에서 금지한 음식을 삼가는 것 역시 포함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들이거나 경건한 유대인이 되려면 지켜야 하는 모든 규정을 철저하게 순종하지는 않음으로 유대교에 전적으로 동화하지 않았다(참조 제10권, 69~71).
이 표현들은 적지 않게 학자들의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70인역」에는 “경외하는 자들”(대하 5:6)이 언급돼 있는데,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완전히 유대인이 된 사람’(full-fledged Jews)과 구별되는 특정 계층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요세푸스(Antiquities xiv. 7. 7 [110]; Loeb ed., vol. 7, 505)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을 세계 각처에서 성전으로 예물을 보낸 자들이라고 말한다.
사도행전에 언급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과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이 “문간의 개종자”(proselytes of the gate)와 동일하다는 추가적인 주장이 조성되기도 했는데, 이들은 여호와를 경배하고 유대 율법의 일부를 준수했지만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한 유대인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반(半) 개종자들의 인가된 무리로 구성되었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 설명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므로 흔히 주장해 온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혹은 “하나님 경외자”)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회당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던 특정 계층으로, 반(半) 유대교 개종자를 가리키는 신약 시대에 사용된 전문 용어로 보인다. 후기 유대교에서 그것과 유사한 용어인 “하늘을 경외하는 자”도 그러한 무리를 대표했을 것이다. “하나님 경외자들”은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지위를 누릴 수 없었고, 따라서 유대교와의 관계는 대부분 비공식적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로마 세계 전반에 걸쳐 이러한 경건한 사람들의 존재는 그리스도인 전도자들에게 이방인 청중을 마련해 주었는데, 이들은 유대교의 율법주의에 맹목적으로 묶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고 유대인의 성경(특히 「70인역」)과 유대인의 신조들에 어느 정도 정통하였다.

많이 구제하고. 고넬료는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눅 7:5)라고 유대인들이 언급했던 다른 백부장처럼 관대하였다.

기도하더니. 구제와 기도가 함께 이루어지는 것은 유대교와 초기 그리스도 교회에서 흔한 일이었다(참조 마 6:2, 5; 행 10:4; 벧전 4:7, 8).
뒤이은 환상은 의심할 여지없이 고넬료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길을 아는 더 큰 지식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구하고 있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참조 행 11:14).

3. 제구시. 성전에서 있는 오후 기도 시간이었다(참조 마 27:45; 행 3:1 주석). 고넬료는 유대인의 기도 시간을 택했던 것으로 보이며, 환상이 그에게 주어졌을 때는 기도하는 동안이었다(10:30).

4. 두려워. 천사는 “빛난 옷”을 입은 “한 사람”으로 불린다(30절; 참조 1:10). 천사의 갑작스런 출현으로 고넬료는 잠깐 동안 두려워 떨었다. 그리스도의 무덤을 지켰던 로마 병사들은 고넬료가 그랬던 것만큼 영적으로 조율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 천사의 찬란한 영광 앞에서 떨며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참조 마 28:2, 4; 단 10:7~11).

상달하여. 더 정확하게는 “피어 올라가서.”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로 올라가는 향(참조 계 5:8; 8:3, 4) 즉 “올라가는 것”을 뜻하는 히브리어 올라(‘olah)라고 불린 번제의 연기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저녁 제사 시간에 드린 기도를 가리키는 적절한 표현이다(참조 행 10:3 주석).

욥바로.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의 거리는 약 48킬로미터이다. 욥바는 요나가 이방인들에게 생명으로 입증된 기별을 설교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을 때 달아나기 위해 이르렀던 도성이다. 이때, 동일한 도성에서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부르심을 받을 것이었다.

지붕. 헬라어 도마(do-ma). “건물”, “집.” “집 위에 올라간”다는 말은 곧 지붕에 올라가는 것을 의미했는데, 동방에서는 지붕이 대개 평평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기도와 명상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욥바 같은 도성에서 그리고 피장의 집에서 그곳은 아마도 그러한 목적에 어울리는 유일한 장소였을 것이다. 지붕을 다른 용도로 사용한 실례에 관해서는 삼상 9:25; 렘 19:13; 마 10:27을 참조하라. 

10. 시장하여. 먹으려 한 점으로 보아 베드로가 금식 중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한낮에 시장함으로 인해 그는 먹으라는 명령을 따를 채비가 되어 있었는데, 그 명령은 환상과 연관되어 그에게 주어질 것이었다(13절). 이런 형편 가운데서 그 명령은 특히 설득력이 있었다.

비몽사몽간. 헬라어 엑스타시스(ekstasis). “비켜섬.” 확대 해석하면 정상적인 환경에서 마음이 이탈한 것을 의미한다. 영어 단어 “ecstasy”(무아경)는 엑스타시스에서 유래되었다. 누가는 이 단어를 성전에서 바울이 환상을 보았던 사건에서 다시 사용한다(22:17). 이 단어는 「70인역」에서 아브라함의 깊은 잠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된다(창 15:12). 이것은 감각들의 정상 행동이 중지되어, 환상이 꿈에서와 같이 정신적으로만 보이는 상태를 나타낸다(참조 고후 12:3). 베드로의 엑스타시스는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통로로 주어졌다.

12. 각색…짐승. (「제임스왕역」에는 “all manner of four-footed beasts of the earth, and wild beasts”[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들짐승과]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본문상의 증거(참조 20쪽)는 “땅에 있는”과 “들짐승”이라는 단어의 생략을 지지한다. 그러나 동일한 구절이 11:6에서 발견된다. 이 환상은 피조된 모든 동물을 상징하였다. 유대인에게 허용된 음식과, 금지되었지만 이방인들이 음식으로 사용한 것 모두를 나타낸 것이 분명하다.

13. 잡아 먹으라. 베드로는 시장했고, 식욕이라는 본능적인 이 충동을 하늘에서 들려 온 음성이 승인했다. 그가 거절한 이유는 양심 때문이었다. 베드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라졌음(갈 3:28, 29)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베드로가 이 환상 후에도 이를 충분히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이 후에 안디옥에서 드러난 그의 위선에 나타나는데, 이로 인해 바울이 그를 사정없이 꾸짖었다(갈 2:9~21).

14.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베드로가 심지어 하늘로부터 들린 음성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항변한 것은 그의 성격에 걸맞는다(참조 마 16:22; 요 13:8). 여기서 그의 절규는 이스라엘이 부정한 음식을 먹는 것을 예기했던 에스겔의 절규를 생각나게 한다(겔 4:14). 불결한 고기를 절제하는 것은 유대인의 가장 특징적인 표시 중 하나요, 엄격하게 준수했던 구분이다. 이것은 마카베오 전쟁 동안 유대인과 시리아인 사이에 가장 기본적인 논점 중 하나였는데(참조 마카베오2서 6:18~31), 이는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걸려고 했던 유대인들에게 쐐기를 박는 논점이었다. 
그러나 레 11장에서 명확하게 드러난 정결한 짐승과 불결한 짐승의 구분은 유대 국가가 생기기 전에 있었다. 이 구분은 하나님이 세웠고, 노아가 동물들이 방주로 들어오는 것을 감독할 때 고려했다(창 7:2; 참조 8:20). 사람의 최초의 음식은 과일, 곡물, 견과였다(창 1:29). 육식이 이 식단에 첨가되기 전(창 9:2, 3)에 이미 정결한 짐승과 불결한 짐승의 구분은 분명해졌다. 그러므로 불결한 음식에 대한 금지가 십자가에서 유대인의 의식법이 폐했을 때 제거되었다는 주장에는 만족할 만한 근거가 없다. 베드로의 환상에서 이 음식 규정들은 유대인들이 사람들-그들 자신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지칭했고, 따라서 여기서는 이런 구분을 폐기하는 것이 주요 쟁점이었다(참조 창 9:3; 레 11장; 행 10:15 주석; 레위기 제1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15.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 환상 중에 정결한 짐승과 불결한 짐승들은 동일한 입지에 있었고, 동일한 보자기에 담겨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생물의 전반적인 혼합을 상징했으며, 그것들 중에 아무것도 속되거나 불결하다고 일컬어지지 않았다. 이 환상을 해석할 때, 이것이 신체적으로 배고픈 상황에서 주어졌지만(10절) 음식이 아니라 사람과 관련되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베드로가 경험해야 할 배고픔은 도처에 있는 각양각색의 영혼을 향한 갈망이 되어야 했다. 이 교훈을 적어도 부분적으로 알게 된 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28절)라고 단언하였다. 일반적으로 불결하다고 여겨진 이방인들은 베드로의 영적인 봉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주저 말고 그들을 섬겨야 했다. 그들은 더 이상 불결하다고 여겨져서는 안 되었다.

16. 세 번 있은. 이 환상은 세 번 반복되었고, 따라서 의심할 여지없이 사도의 마음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바로의 꿈은 두 번 주어졌고(창 41:32), 예수는 베드로에게 “네 어린양을 먹이라” 혹은 “네 양을 먹이라”라는 명령을 세 번 반복했었는데(요 21:15~17),  이제 그 명령은 그에게 새롭고 더 완전한 의미를 띠고 다가왔을 것이다. 

18. 불러. 즉 집 안에 있는 누군가가 나오도록 “불러.” 의심할 여지없이 사자들도 고넬료처럼 이방인이었으므로, 자신들이 왔음을 알리지 않은 채 유대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머뭇거렸을 것이다.

19. 베드로가…생각할 때에. 베드로는 곤란한 상황을 숙고하며 이 환상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가르치려고 의도했는지를 묻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상고하는 동안 설명이 있었다.

성령께서…말씀하시되. 베드로는 더 이상 비몽사몽간에 있지 않았다. 하나님의 영이 이때 그의 영혼 내부 깊은 곳에서 이야기하였다. 성령의 가르침은 베드로에게 파견단의 도착과 그가 본 환상을 연결해야 한다고 암시했다.

두 사람. (「제임스왕역」에는 “세 사람”이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고넬료가 보낸 두 종과 종졸 한 사람(7절). 

20. 내려가. 베드로는 아직 지붕 위에 있었다.
의심. 혹은 “주저함.”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베드로는 주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아직 알지 못했으나, 후에는 알게 될 것이었다(요 13:7). 베드로와 고넬료의 사자들은 성령의 지시에 따라 행동한다는 점에서 똑같았다. 그 환상은 베드로에게 여행을 해야 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지 않았다. 이제야 베드로는 이것에 대해 알게 되어, “의심치 말고”라는 말이 여정을 마친 후에 유대인과 다른 인종 사이에 아무런 구분을 두지 말아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그 환상은 점차 이해되었고, 당혹감은 제거되었다.

23. 불러들여. 베드로가 이 이방인들을 집으로 불러들인 것은, 유대인들이 비유대인들을 향해 품고 있던 종교적 관념을 버리는 데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었다.

이튿날. 베드로가 기도하기 위해 지붕에 올라간 때가 정오쯤이었으므로, 그의 환상 후에 사자들이 도착한 것은 이른 오후였음에 틀림없다. 약 48킬로미터 떨어진 가이사랴를 그날 안에 가기에는 너무 늦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다음날이 돼서야 출발했다. 또한 사자들도 욥바까지 여행한 후여서 휴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두어 형제. 이 사람들은 물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45절)이었으며, 11:12에 따르면 그들은 여섯 명이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말을 기억하였다.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마 18:16). 그는 자신이 한 것은 무엇이든 그들이 교회에 보고하기를 바랐다. 후에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증언이 유용했다는 것이 행 11:12에 암시되어 있다. 틀림없이 베드로가 자기의 환상과 고넬료의 종들이 가지고 왔던 기별을 알렸을 것이다. 고넬료의 좋은 평판에 힘입어 그들은 베드로와 기꺼이 동행하기로 했다.

 

24. 이튿날. 고넬료의 사자들이 욥바로 오는 길에 그랬던 것처럼(참조 7~9절, 17절), 베드로와 그의 일행도 가이사랴로 가는 여정에 하룻밤을 묵었을 것이다. 그들은 지중해 해안 길을 따라갔다.
고넬료가…기다리더니. 더 정확하게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더니.” 그의 준비 태도는 그가 자기의 환상이 사실이고,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라는 것을 얼마나 확신하였는지 보여 준다.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 의심할 여지없이 고넬료의 종교심에 다소간 동감했던 고넬료의 통솔 아래 있던 병사들과 지역 사회의 친구들이 이들 중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받을 새로운 빛의 범위 안으로 가능한 많은 사람을 데려오고자 하였다.

행 9:1-31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침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내용 요약

  1. 박해자-다소 사람 사울, 9:1, 2
  2. 사울이 환상 중에 그리스도를 만남과 그에 따른 회심, 9:3~17
  3. 그의 침례와 첫 전도, 9:18~22
  4. 그를 죽이려는 유대인의 음모, 9:23, 24

배경

8장에서 복음이 사마리아로 전파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9장에서는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데 쓰임을 받을 사도바울을 준비하신다. 바울의 회개는 개인의 구원차원을 넘어 교회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9장의 내용은 바울의 회심과 중풍병자를 고치고 도르가를 살려 내는 베드로의 활동이다.

 

하늘의 빛이 비추이고 있는 그 시간, 사울의 마음은 놀랍도록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는 성경의 예언을 깨달았다. 그는 유대인들에 의한 예수의 거절, 그의 십자가의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선지자들이 이미 예언하였고, 그분이 약속된 메시야임을 증명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울의 마음에는 순교할 때의 스데반의 설교가 힘있게 떠올랐으며, 순교자가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말하였을 때, 순교자는 실제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음을 깨달았다(행 7:56, 55).(행적, 113p)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 있다면?(물건, 색깔, 캐릭터등)
  2. 그릇된 열성으로 일을 망친 것을 본 적이나 경험한 적이 있나요?
  3. 부모님을 가장 고통스럽게 한 일이 있다면 어떤 일인가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바울이란 인물에 대해 알아봅시다.
    • 그는 철저하게 유대인이었다.
      (빌 3:4-6, 개정)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 그는 철저하게 이방적 (헬라적)인 배경에서 살았다.
      (행 22:27,28, 개정)
      [27]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28]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 바울의 가정 - 아마도 부유하고 경건한 가정이었을 것이다.
      (행 24:26, 개정)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 바울의 교육 
      (행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2. 정당화시키려는 공적인 힘(공문)과 그릇된 열성의 위험에 대하여 이야기해봅시다.(9:2)

  3. 자신의 삶에 바울처럼 주님을 만난 영적인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9:3-10)
    어둠 속에 있던 그에게 한 빛이 비칠 때는 정오(22:6)였다.
    그 빛은 태양 빛보다 더 밝은 빛(26:13)이어서 그는 눈이 멀었다.
    그 빛은 참빛이신 그리스도이셨다. (요1:9) 이때 눈이 상한 것이 일생동안의 지병이 되었으며 (갈 4:13-15, 6:11) 또 육체의 가시(고후 12:7)가 되었다고 한다.

  4. 주께서 말씀하신 바울의 사명은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졌습니까?(9:15)
    그릇은 인상적인 표현이다. 주인이 쓸 수 있는 그릇은 비어 있어야 한다. 비어있지 않은 그릇은 쓸모가 없다.

 

생각해봅시다.

  1. 주님의 그릇이 되기 위해 내가 비워야 할 것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2. 나에게 주어진 복음 사명이 있다면?
공포에 사로잡히고 강렬한 빛으로 거의 눈이 먼 사울의 동료들은 어떤 음성은 들었으나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울은 들은 말을 깨달았으며, 그에게 말씀하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이 그에게 분명하게 나타났다. 사울은 그의 앞에 서신 영광스러운 분에게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분을 보았다. 그 상처받은 유대인의 영혼 위에 구주의 얼굴 모습이 영원히 인각되었다. 그분의 말씀은 놀라운 힘으로 그의 마음을 찔렀다. 그의 어두운 마음 구석에 큰 빛이 비쳐 들어와 과거 생애의 무지와 과오, 그리고 현재 성령의 교화하심의 필요를 깨닫게 하였다.(행적 113p)

 

 


1. 등등하여. 헬라어 엠프네오(empneo-). “숨을 들이쉬다” 또는 “입김을 내뿜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고 학살하는 것은 사울이 호흡하는 공기나 다름없었다. 셈족은 종종 분노의 감정을 호흡과 결부시켰다.

대제사장. 안나스 혹은 가야바(참조 4:6 주석). 두 사람 다 사두개인이었지만, 사울은 엄격한 바리새인인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26:5). 하지만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자연스럽지 못한 동맹(참조 제10권, 56~58)도 이 단호한 박해자를 단념시키지는 못하였다. 전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항하여 형성되었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간의 제휴는 그분의 추종자들에 대항하여 다시 이루어졌다.

2. 다메섹.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 전승에 따르면 이곳은 아벨이 살해된 현장이다. 요세푸스(Antiquities ⅰ. 6. 4 [145])는 셈의 손자인 우스가 이 성읍을 건설했다고 여긴다(참조 제1권, 248). 아브라함의 역사에서는 그의 청지기 엘리에셀의 출생지로 나타난다(창 15:2). 다윗은 이곳에 수비대를 두었으나(삼하 8:6), 르손의 지배 아래 솔로몬 반대 세력의 중심지가 되었다(왕상 11:23~25).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문둥병자 아람(수리아)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눈에 이스라엘의 어느 강보다 좋아 보였다(왕하 5:12). 이곳은 아람 왕국과 이스라엘 및 유대와의 동맹과 전쟁의 중심지였고(왕하 14:28; 16:9, 10; 암 1:3, 5), 에스겔의 기록에 따르면, 두로와 물품, 포도주, 흰 양털을 무역하였다(겔 27:16, 18). BC 333년에 마게도냐 장군 파르메니온(Parmenion)이 알렉산더 대왕을 위해 이 도성을 점령했으며, BC 64년에는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Pompey)가 점령했다. 사울의 회심 당시 이곳은 로마의 수리아(Syria) 총독 비텔리우스(Vitellius)의 관할 아래 있었다. AD 37년 디베료(Tiberius)가 죽었을 때, 비텔리우스는 서둘러 로마로 갔고, 나바태아인(Nabataeans)의 왕 아레타 Ⅳ세(Aretas Ⅳ)가 다메섹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그곳을 다스렸다. 이로 인해 사울은 이 도성에서 빠져나갈 당시 문제에 봉착하였다(고후 11:32).
 (1)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유대 지방에서 상당한 거리에 있는 이곳으로 피난했다. 
(2) 다메섹의 시민 가운데 그리스도인 회심자들이 있었다. 
(3) 다메섹이 확장 일로에 있는 교회의 외곽 중심지가 되었을 수도 있다. 
(4) 사울이 유대 당국자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리스도인을 대항하는 데 그들의 협력에 의존할 수 있었다.

회당. 이곳은 국제적인 도성이었고, 따라서 각 나라에서 온 유대인들이 살았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처럼(참조 6:9 주석) 유대 동족들은 자신들의 회당을 세웠을 것이다. 당시 다메섹에는 30개 내지 40개의 회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은 회당에 신실하게 참석하고 있었고, 따라서 사울이 바로 그들을 잡으러 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공문. 사울의 “권세와 위임”(26:12)을 정한 문서들. 이는 로마가 도주한 유대인들을 송환하는 권력을 대제사장에게 부여함으로써 유대 당국자들과 협력했음을 드러낸다. 이 권세는 아마도 BC 56년경부터 주어졌을 것이다(Josephus Antiquities xiv. 8. 5 [146~ 148]; 참조 마카베오1서 15:15~24).

3. 비추는지라. 더 정확히 말해 “번쩍였다.”22:6과 26:13은 이 시각이 정오라고 밝히고 있다. 동방의 한낮의 태양 광선도 눈부셨지만, 후에 바울은 하늘로부터 온 그 빛을 “해보다 더 밝은 빛”(참조 26:13 주석)이었다고 말한다. 이 광채 가운데서 바울은 영광스럽게 된 그리스도를 너무도 선명하게 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 후 주님을 바라보는 특권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자신을 포함시킨다(행 9:17; 고전 9:1; 15:8; 사도행적, 115). 출현한 모양에 대해 말하자면, 스데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참조 7:55, 56 주석).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라고 한 순교자 스데반의 말은 불 같은 열성을 지닌 바리새인인 사울에게는 신성모독처럼 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 사울이 성부의 영광 중에 있는 인자를 본 것이다. 사울의 동행자들은 음성을 들었으나 말소리를 분별하지는 못했다(참조 22:9; 참조 9:7 주석). 그들은 빛을 보았으나(22:9), 말하는 그분의 형상을 감지하지는 못했다(참조 12:29 주석). 이런 세부 사항들은 사건의 실재성을 증명한다.

4. 엎드러져. 하늘에서 비친 빛에 압도되어 여행자들은 모두 땅에 엎드러졌지만(26:14), 누가는 여기서 사울만 언급한다. 여행자들 중 그 누구도 말 위에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들으매. 9:7과 22:9의 비교는 사울이 그에게 말한 목소리를 듣고 이해한 반면, 그의 일행은 무슨 말이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소리만 들었음을 시사한다(참조 9:7 주석).

사울. 지금까지 기사에서는 사울의 이름이 헬라어 형태인 사울로스(Saulos)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곳과 9:17; 22:7, 13; 26:14에서는 히브리어 형태인 사울(Saoul)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1) 26:14에 나타난 대로 히브리(아람) 방언으로 말했던 예수(참조 제1권, 30)와 (2) 유대인이기 때문에 히브리어(아람어)로 말했을 아나니아가 실제로 사용한 단어가 무엇인지를 반영할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전달할 때 이름을 반복하여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창 22:11; 삼상 3:10; 마 23:37; 눅 10:41; 22:31을 참조하라.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리스도가 박해자에게 던진 통렬한 질문이다. 이것은 그의 행동의 기초에 도전하는 질문이며, 따라서 그가 그렇게도 잔혹하게 핍박했던 분을 알지 못했음을 드러냈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제자들과 너무나 동일시한 나머지 그들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이 된다고 한 사실을 주목하라(사도행적, 117).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사 63:9)하며,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슥 2:8)으로 여겨졌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행한 것을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여겼다(마 10:40).

5. 주여 뉘시오니이까. 아직 사울은 “주”라는 단어를 신약에 나타난 온전한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경외심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발언이었다(참조 요 1:38 주석). 하지만 사울은 신적 존재를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하고 “주”라는 말을 사용하여 경외심을 표했다.

네가 핍박하는. 앞에 나온 “나”라는 대명사와 마찬가지로 “네”도 헬라어 구문상 강조하는 표현이다. 사랑과 능력과 영광으로 옷 입혀진 그리스도와, 핍박하는 자였으나 이제는 엎드려 두려워하는 사울이 극명하게 대조되어 있다. 

7. 소리만 듣고. 헬라어 아쿠온테스…테스 포네스(akouontes…te-s pho-ne-s). 얼른 보기에 이 진술은 동행자들이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텐…포넨 우크 에쿠산[te-n…pho-ne-n ouk e-kousan])라고 바울이 말한 22:9의 기록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기록을 주의깊이 연구해 보면 이런 외관상의 모순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듣다”라는 뜻의 동사 아쿠오(akouo-)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의 능력(참조 마 11:15; 13:15)이나, 들은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참조 막 4:33; 고전 14:2)을 가리킨다. 본 구절에서 “소리”(포네스[pho-ne-s])라고 번역된 단어는 소유격이다. 헬라어에서 이것은 사울의 동행자들이 목소리만 듣고, 말해진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음을 가리킨다. 22:9에서 “소리”(포넨[pho-ne-n])로 번역된 단어는 대격이며, 따라서 이것은 부정어 “못하다”와 함께 사용되어 그들이 소리를 듣고도 말은 뚜렷하게 이해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참조 9:4. 여기서 누가는 알아들은 사울에 대해 말하면서 대격을 사용하여, “[소리를]…들으매”[에쿠센 포넨]라고 말한다). 이 설명은, 22:9에도 사람들이 “빛은 보”았다고 되어 있는 반면, 본 구절에는 그들이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라고 되어 있는 사실로 더욱 뒷받침된다. 그들은 눈부신 빛을 보았지만, 그들의 시력은 빛 가운데서 사울에게 나타난 그분을 식별할 정도로 명확하지 못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목소리는 들었지만, 알아들을 정도로 명확히 듣지 못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10. 아나니아. 아나니아는 유대인들에게 흔한 이름이었다. 바울이 그를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다메섹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이”라고 묘사한 22:12을 제외하고는, 성경에서 이 특정 제자를 언급한 곳은 아무데도 없다. 이런 자질로 인해 그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지도자와 사울을 향한 주님의 사자가 되는 일이 가능하였다.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그리스도의 지상 봉사 기간에 구세주를 따랐거나, 오순절이나 그 이후 유대인 회심자들 중에 속해 있었을 것이다. 그런 뒤 스데반의 죽음 후에 이어졌던 박해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도망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단지 추측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나니아가 사울을 방문하기를 꺼려하는 심정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 표현으로 보아(9:13, 14), 여전히 예루살렘과 신뢰할 만한 교신을 왕래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박해자 사울이 일으켰던 만행과 다메섹에 온 그의 목적을 아나니아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1. 직가. 오늘날 술타니예(Sultaniyeh)라고 알려진 긴 직선 도로가 여전히 고도(古都) 다메섹을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고 있는데, 아나니아가 유다의 집에서 사울을 만나기 위해 걸었던 바로 그 길일 것이다. 현재 거리의 고도(高度)가 사울 당시보다 약 30보 이상 높으므로, 사울이 머물렀던 집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소 사람 사울. 이 구절은 성경에서 사도 바울의 출생지를 처음 언급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다소는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중요한 곳으로 여겨졌다. 이곳은 16킬로미터가량 내륙에 위치했지만, 도성과 바다 사이에 안전한 항구가 있었기 때문에 작은 배가 이 성읍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도성의 경계 너머로 타우루스(Taurus) 산지가 솟아 있었는데, 길리기아 문(Cilician Gates)으로 알려진 협곡을 통해 소아시아 내륙으로 통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고대 도성은 전략적 요충지 말고 다른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곳은 대학가로 이름이 나있었고, 소아시아의 아덴(Athens of Asia Minor)으로도 알려졌다. 이곳의 학자들은 과학 기술로 인해 존경받았고, 이곳의 철학자들 중에는 사울의 견해에 일부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는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들도 있었다. 상업 영역에서 볼 때, 사울의 생업이었던 장막 제조업(18:3)이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15.이방인. 목록 가운데 이방인이 첫 번째에 놓인 이유는 사울이 노고를 쏟을 분야가 특별히 그들 가운데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참조 롬 1:13, 14; 11:13 주석). 이것은 독실한 유대인으로서 온 세상이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야만 한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 아나니아에게는 깜짝 놀랄 계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대단한 박해자로만 알았던 사람 안에서, 선택받고 훈련받아 세상 도처에 복음을 퍼뜨리는 사역에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적합해진 사람을 보고 있다.

임금들. 이 구절은 바울이 아그립바 앞(26:1, 2)과 아마도 네로 앞에서 연설한 것(참조 딤후 4:16 주석)에서 충분히 성취되었지만, 꼭 그 일들만 가리키지는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 사도는 이방인들에게 가지만, 바울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유대인들에게도 설교하였다(참조 13:5; 14:1; 17:1, 10; 18:4, 19; 19:8).

그릇. 헬라어 스큐오스(skeuos). “그릇”, “기구.” 이 단어는 신약에서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참조 13:48; 눅 8:16; 요 19:29; 행 10:11; 롬 9:21; 고후 4:7; 살전 4:4). 고전 작가들은 이 단어를 쓸모 있고 신뢰할 만한 노예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 주님이 이방인을 위한 당신의 은혜로운 뜻을 실현할 도구로서 사울에게 스큐오스라는 단어를 적용한 것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택한”(chosen)에 해당하는 에클로게(ekloge-)라는 단어가 신약에서 처음으로 여기에 나타나는데, 다른 경우에는 모두 “택하심”(election)으로 번역되었다.

18. 비늘. 헬라어 레피데스(lepides). 히포크라테스는 안질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로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사울의 눈멂은 초자연적 현시의 결과로 생겼으므로, 그의 병을 현대 의학 용어로 정확하게 밝히려고 시도하는 일은 무익하다. 그러나 누가가 사울의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의학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이해할 만하다.
침례를 받고. 22:16에 있는 자세한 설명은 아나니아가 이 예식에 임하도록 사울에게 권고했음을 보여 준다. 침례가 입교 조건으로 여겨졌음이 분명하다(참조 마 3:6; 행 22:16 주석). 주님의 환상과 계시도, 개인적인 확신의 강렬함도 사울에게서 침례를 면제시켜 주지는 않았다. 침례는 아마도 나아만의 이야기(왕하 5:8~14)에서 언급된 아마나 또는 바르발강 중 한 곳에서 행해졌을 것이다. 이 예식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사도행적, 122) 아나니아가 거행하였다.

20. 즉시로. 그리스도는 사울을 “즉시” 낫게 했고(18절), 사울은 “즉시로” 증거하기 시작했다. 두 경우에 사용된 부사는 동일한 헬라어 단어에서 나왔다.

예수…전파하니. 나사렛 예수가 오랫동안 고대하던 메시야인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것이 유대인들을 향해 사도들이 전한 기별의 요지였다. 베드로의 설교(참조 2:16 주석)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설교에도 강력한 예언적 배경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사도행적, 123, 125,).

22. 힘. 후년에 이 단어는 바울의 사상에서 현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그는 “약한 데서 온전하”게 했던 “능력”이 그리스도였음을(고후 12:9), 그를 “능하게 하신” 또는 사역을 위해 그를 강하게 하신 이가 그리스도였음을(딤전 1:12) 그리고 그의 삶의 마지막 시련들 속에서 “강건케 하신” 이가 그리스도였음을(딤후 4:17) 깨달았다.

증명하여. 헬라어 쉼비바조(sumbibazo-). “결합하다”, “결론적으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연합하도록 하다”라는 뜻이 있으며, 따라서 여기서는 “논증하다”, “증명하다”를 뜻한다. 사울은 메시야의 예언들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능수능란하게 설명하였다.

행 8:1-13,26-40

[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9]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0]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1]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그들이 따르더니 [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침례를 받으니
[13] 시몬도 믿고 침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

[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1]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2]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침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37] (없음)
[38]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침례를 베풀고
[39]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내용 요약

  1. 예루살렘 교회의 수난 (1-3)
  2. 사마리아 전도 (4-25)
  3. 아프리카 전도 (26-40)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떠밀려 어떤 일을 함으로 좋은 결과를 이룬 적이 있나요? 어떤 경우였나요?
  2. 당신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전할 복음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요?
  3. 의외의 인물에 의하여 복음사업이 유지되는 것을 본 경험이 있나요? 어떤 사람이었나요?
  4.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한 적이 있나요? 왜 그렇게 간절했나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예루살렘교회의 사람들이 흩어진 이유는?(2절)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나요?(4절)

  2. 환경적, 상황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나요?
    • 운명하신 주님을 위하여 가난한 제자들이 할 수 없었던 그 일을 할 수 있었고, 또한 그들의 재산과 영향력으로 제자들은 제사장들과 관원들의 악의에서 크게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이제 유대인들이 어린 교회를 멸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때에 니고데모는 그 교회를 보호하려고 나아왔다. 니고데모는 그 이상 조심하거나 의심하지도 아니하였고, 제자들의 신앙을 격려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유지하는 일을 돕고 복음 사업을 발전시키는 일에 그의 재산을 사용하였다. 전날에 그에게 존경을 표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를 조롱하고 핍박하였으므로 그는 이제 세상 재물에는 가난하게 되었으나, 자신의 신앙을 옹호하는 일에는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행적104p

  3. 빌립의 전도방법과 자세를 살펴보고, 그것을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나누어보아요.
    ① 일어나서...그 길은 광야라(순종)
    ② 가까이 나아가서 (8:29)
    ③ 달려가서 (8:30)
    ④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고 (8:35)
    ⑤ 침례를 베풀고 (8:38)

  4. 빌립이 전한 기별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이 기별을 우리는 어떻게 전하고 있는지 나누어보아요.
    ①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 (8:5)
    ②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8:12)

생각해봅시다

  1. 내게 있어서 복음을 위해 가야할 광야가 있다면 그곳은 어디 일까요?

  2. 나는 지금 나의 삶 속에서 복음을 어떻게 전하고 있나요?

온 교회가 봉사의 정신을 가지고 각자 자기의 능력에 따라 그분을 위해 일하게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고대해 오셨다. 하나님의 교회의 교인들이 복음 사명을 성취하기 위하여 국내외에서 필요되는 분야에 들어가 그들에게 맡겨진 일을 할 때에, 온 세계는 오래지 아니하여 경고를 받게 될 것이고 주 예수께서는 능력과 큰 영광으로 이 땅에 재림하시게 될 것이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행적 107p)

 


그날. 스데반이 돌에 맞은 일은 교회를 조직적으로 핍박하는 시발점을 이루었다. 스데반을 죽이는 상황까지 간 유대 지도자들은 그 분노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돌렸다.

 

큰 핍박. 앉은뱅이를 고친 후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후(5:17, 18)에 적은 규모의 핍박이 있었던 것처럼, 교회는 다시 한 번 유대 당국자들로부터 핍박을 받는다(4:1~7). 이번 핍박은 범위와 가혹함을 가리키는 “큰”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점에서 이전의 핍박과는 구별된다. 참조 214쪽 지도.

이 핍박에 투옥과 큰 고통이 동반되었음을 1, 3절과 후일 바울의 묘사(참조 22:4; 26:10, 11)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흩어지니라. 헬라어 디아스페이로(diaspeiro-). “낱알처럼 흩어지다”, “분산되다.” 이렇게 하여 원수의 분노는 오히려 그리스도가 예고한 것을 교회가 성취시키도록 돕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1:8). “다”라는 말에 신자 모두를 포함시킬 필요는 없다(참조 1:1 주석). 단지 겁이 더 많은 사람들이나 행동이 빠른 사람들 아니면 핍박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알려진 사람들일 것이다. 어쨌든 남녀 신자들이 그 도시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참조 8:3).

 

잔멸할새. 헬라어 뤼마이노(lumaino-). “약탈하다”, “황폐화시키다”, “파멸시키다.” 이 단어는 「70인역」의 시 80:13에서 “수풀의 돼지가 상해한다”는 표현에 사용되었다. 여기서 사용된 시제는 계속되는 핍박을 나타낸다. 바울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다고 말한다(행 22:4; 참조 26:10). 후에 그가 고백한 것처럼(26:11), 그의 폭력은 일종의 광기어린 만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4. 두루 다니며. 헬라어 디에르코마이(dierchomai). “지나가다, 통과하다.” 선교 사역을 나타내기 위해 누가가 즐겨 사용한 용어이다(참조 눅 9:6; 행 8:40; 9:32; 11:19; 13:6). 이 경우, 새로운 신앙을 박멸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신앙의 활동 범위를 더 넓혀 주었는데, 이것은 주께서 바라신(행 1:8) 대로였다. 이러한 핍박은, 핍박이 없었다면 그 신앙이 상당히 오랜 기간 일부 지역에만 한정되었을 상황을 뛰어넘게 하였다. 후에도 그랬듯이 그때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었다.

 

말씀. 넓은 의미에서 이 단어는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가르침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이 중 많은 부분이 구약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의 대부분이 아직 문서로 기록되지 않아, 자원하는 복음전도자들이 구두(口頭)로 전하는 기별에 의존했다.

 

전파하니. 헬라어 케륏소(ke-russo-). “[전달자로서] 선포하다”라는 의미로, 4절에 사용된 것과는 다른 단어이다. 따라서 안수받지 않은 신자들이 하는 설교보다 좀 더 공식적이고 심도 있는 설교를 의미한다. 침례자 요한과 그리스도(마 3:1; 4:17)의 설교를 가리킬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동사의 시제로 보아 빌립이 계속 설교했음을 알 수 있다.

 

6. 듣고. 문자적으로 “그것을 듣고” 즉 빌립의 말을 듣고. 사마리아인들은 처음에는 아무런 표적도 없이(참조 마 12:38 42) 단순히 그리스도의 설교를 듣고(요 4:39~42) 믿었다. 지금 일어난 이적들은 믿음의 토대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키기 위해 주어졌다. 이 표적으로, 빌립을 통해 역사하는 능력에 관한 모든 의심이 일소되었다. 틀림없이 이 표적들은 마술사 시몬의 영향을 바로잡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행 8:9~11).

 

9. 그 성. 5절에 언급된 성. 9절 본문 가운데 별도로 언급된 “사마리아”는 수도 사마리아가 아니라 사마리아 지역을 가리킨다.

 

26. 사자. 누가는 천사들의 봉사를 주의 깊게 관찰한다(참조 눅 1:38과 행 10:7; 눅 2:9과 행 12:7; 눅 24:4과 행 1:10; 10:30). 헬라어 구조는 베드로와 요한이 전도하는 동안 한 천사가 빌립에게 이야기했음을 시사한다. 그 초자연적 부르심은 이상 가운데 이르러 왔을 것이다(참조 행 10:3의 고넬료).

 

그 길은 광야라. (「제임스왕역」에는 “그것은 광야라”[Which is desert]라고 되어 있음 -역자 주). 이 구절은 마치 독립된 문장인 것처럼 문자적으로 “이것은 광야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천사가 한 말인지 아니면 누가가 덧붙인 설명인지 알 수 없다. “이것”(This)이 “길”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도시”를 가리키는지도 분명하지 않지만, 누가가 어떤 도시를 언급하고 나서 그것을 “광야”로 묘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개정표준역」에는 “이는 광야 길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단순한 믿음으로 빌립은 도중에 겪게 될 기념할 만한 일 즉 한 여행자의 회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예루살렘에서 가사까지 인적이 드물고 그다지 평탄치 않은 길을 가야 했다.

 

에디오피아. 구약의 구스와 마찬가지로 에디오피아는 나일 제1폭포의 남쪽 지역과 오늘날의 에티오피아에 이르는 지역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이다. 에디오피아 북부 지역은 나일강 상류 계곡에 있던 대(大)왕국 메로에(Meroe..)의 영토였다. 이 왕국은 오랫동안 여왕들이 통치했고, 따라서 십중팔구 내시는 이 왕국에서 왔을 것이다. 이 왕국과 유대 민족의 관계는 여러 흥미로운 점을 시사한다.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13(The Letter of Aristeas 13)에 따르면, 프삼티코스(아마도 Psamtik Ⅱ, BC 594~588)라고 불리는 바로가 통치하던 시절에 에디오피아 정복 전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일단의 유대인이 파송되었다. 수 세기 동안 유대인들이 그 지역에 영향을 끼쳤음이 확실하다. 이는 예레미야 시대에 초기 에디오피아의 내시 에벳멜렉의 용기 있는 활동에 반영되어 있다(렘 38:7~13; 39:15~18). 더 이른 시기에도 히브리인들은 그들 국가에 에디오피아인들의 입국을 예상했고 또한 목도했다(시 68:31; 87:4).

 

간다게. 한 여왕의 개인적인 이름이라기보다는, 로마 제국의 캐사르(Caesar), 애굽의 프톨레마이오스, 바로(Pharaoh) 등과 같이 한 왕조의 이름이나 호칭이었을 것이다. 그 이름은 스트라본(Strabo Geography xvii. 1. 54)과 디오 캇시우스(Dio Cassius History liv. 5. 4~6)의 문헌에도 나타난다. 유세비우스(AD 325년경 사망)에 따르면, 그가 살던 당시에도 에디오피아는 여전히 여왕이 통치했다고 한다(Ecclesiastical History ii. 1. 13).

 

국고. 헬라어 가자(gaza). “왕의 보고(寶庫)”, “보물.” 페르시아어에서 유래된 말로, 이 당시 헬라와 라틴 작가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있었다(Cicero De Officiis ii. 22 [76]). 「70인역」 번역자들도 에 5:17; 6:1; 7:21; 사 39:2에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신약 다른 부분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합성어 형태로 성전의 보화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눅 21:1). 빌립은 가자(gaza) 즉 국고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 마 13:44의 비유에 나오는 사람이 부지런히 찾고 찾아 보화를 발견한 것처럼, 이 전도자는 그가 보화를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예배하러. 이 내시는 할례받은 의로운 개종자일 것이며(참조 제10권, 70), 성전 예배에 참여하러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뿐 아니라 개종한 사람들도 그 목적으로 예루살렘에 갔는데, 이는 오순절에 참석한 사람들의 목록에서 알 수 있다(행 2:10). 요 12:20에 의하면 헬라인도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 왔다. 내시는 복을 찾아서 예루살렘에 왔으나, 집에 도착하기 전 그의 모든 예상을 능가하는 한 분을 영접하게 될 것이었다.

 

30. 빌립이 달려가서. 즉 성령의 명령에 즉시 순종하여 병거로 달려가.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이 즉시 반응하는 점을 본받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중심의 신실한 대화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깨닫느뇨. 대화를 능숙하게 시작하는 것을 주목하라. 빌립은 그를 만난 바로 그곳에서 대화를 시작했고, 대상의 관심사에 적절히 맞추어 접근했다. 그는 여기서 모든 그리스도인 교역자들이 따라야 할 모본을 제공한다. 빌립이 물은 것은 성경절의 자구(字句)가 아니라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는지이다. 헬라어 구문에 의하면, 빌립이 부정적인 답변을 예상했음을 알 수 있다. 내시는 이 구절에 관한 유대인의 주석을 약간은 들었겠지만, 이 구절이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에 대하여 어떤 암시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빌립은 그 뜻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 의미를 설명하도록 성령이 그를 인도했다.

 

31 지도하는. 헬라어 호데게오(hode-geo-). “길을 인도하다”, “지도하다.” 예수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말할 때 동일한 단어를 사용했다(요 16:13). 에디오피아로 돌아가던 내시는, 그곳으로 돌아가면 예루살렘에서 이제까지 그를 지도해 주던 이들에게서 멀어지게 되므로 이러한 어려운 말씀에 대한 능숙한 지도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의 질문은, 그가 그 성경구절을 처음으로 보았거나 성령이 그 구절을 새롭게 강조하여 깊이 생각하도록 했음을 암시한다.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이 질문은 그가 성경을 해석하는 훈련을 받지 못했으므로 깨닫기에 역부족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청하여. 진지한 요청을 의미하고 좀 더 가르침받고자 하는 내시의 열의를 나타낸다. 성령의 지시가 얼마나 순조롭게 성취되었는지 주시하라(29절). 빌립은 가까이 다가가고, 내시는 그 전도자에게 자신의 병거에 타도록 청한다.

 

32. 구절. 헬라어 페리오케(perioche-). “내용.” 회당에서 공중 낭독을 위해 정해진 성경구절들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파라샤(paras∨ah) 또는 합타라(hapt.arah)에 해당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참조 제10권, 64). 이 단어는 헬라인들이 흔히 사용했고, 키케로(Cicero, Letters to Atticus xiii. 25)가 차용했다. 이 단어는 이 구절의 전체 문맥이 무엇인지를 나타낸다. 여기서 “성경 (구절)”은 성경 전체가 아니라 이 구절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성경 구절의 내용”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인용된 성경구절은 사 53:7, 8이며 「70인역」에서 사용된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끌리었고. 인용된 성경구절에 대해서는 사 53:7, 8 주석을 참조하라. 신약의 인용문은 히브리 성경의 번역이 아니라 「70인역」의 번역임을 기억하라.

 

33. 낮을 때에.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굴욕 중에 그의 심판이 제거되었으며”라고 번역할 수 있으나 이 독법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의 정죄가 철회되었다” 즉 “취소되었다”는 의미도 된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을 낮췄기 때문에 후에 높임을 받았다. 또는 분명히 심문당할 때 “굴욕 가운데서 그에게 정의가 거절되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사 53:8의 히브리어 본문은 “억압과 심판으로 그가 제거되었다” 즉 그는 사법적 살인의 희생자였음을 암시한다.

 

생명이…빼앗김이로다. 사 53:8의 히브리어 본문은 구주께서 갑자기 비명횡사했음을 암시한다. 「70인역」도 동일한 사상을 표현하며, 따라서 승천 시에 그리스도가 지상을 떠나는 것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누구를 가리킴이뇨. 내시는 자신이 읽고 있던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다시 말해 이사야의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물을 만큼 예리했다. 이사야 시대에는 이 질문이 해결되지 않았으며,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많은 논란이 있다(참조 사 41:8; 42:1; 52:13; 53:1). 그렇지만 빌립은 그 주제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으며, 우리 역시 그래야 한다. 그 질문은 빌립이 내시에게 예수를 전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했다.

 

35. 입을 열어. 이 구절이 신약에서 나타날 때는 언제든지 단순히 말을 하는 행위보다는 준비된 설교 등을 할 경우를 나타낸다(참조 마 5:2; 13:35; 행 10:34).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내시는 예루살렘에 체류하는 동안 예수의 가르침을 들었을 것이다. 사도들의 사역은 도성 전역의 주목을 끌었다(2:41; 4:33; 5:12~14; 6:7, 8). 그러나 그가 본 많은 토론은 분명 예수를 사기꾼으로 분류했고, 따라서 사도들의 설교에 비추어 볼 때 내시가 사 53장을 보았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그러나 이 예언은 죄의 경험, 정죄 그리고 그 파괴적인 능력으로부터 유일한 구원의 대로(大路)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이고 대속적인 죽음을 가장 명확히 기술하는 구약의 한 부분이다. 결과로 볼 때 빌립의 가르침에는 그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적용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에 합류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침례 후보자를 물에 잠그기 전에 이런 가르침을 주었음이 분명하다는 것을 신약에서 알 수 있다. 36. 길 가다가. 빌립이 내시에게 사 53장을 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사실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그가 침례의 의미를 이해하고 스스로 침례받기를 원하는 데 이르기까지 충분히 가르친 것으로 보아 그들이 얼마간 함께 여행했을 것이다. 물. 4세기에는 이곳을 벧수라(Bethsura) 즉 대하 11:7의 벧술(Bethzur)로 여겼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약 32킬로미터, 헤브론에서 약 6.4킬로미터 거리에 있다. 아랍어 형태인 베이트-추르(Beit-s.u-r)라는 고대 지명을 간직한 한 샘이 지금도 여기에 있다. 다른 학자들은 그 샘이 엘류테로폴리스(Eleutheropolis)와 가사(Gaza) 사이에 있는 와디-엘-헤시(Wa^di--el-H.esi-)에 있으며, 고대 도성 라기스와 에글론에서 멀지 않다고 본다. 가사 근처에서 이 일이 있었고, 여행길이 사막을 통과한다는 점에서 이 장소가 더욱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새롭게 찾은 주님의 교회의 일원이 되는 데 모든 준비를 갖춘 내시의 열의는 본보기가 된다. 그는 자발적이었고, 따라서 빌립에게 강요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구주에 대하여 배웠고 자신의 죄를 버렸다. 그는 길이신 분과 그 이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참조 행 4:12; 요 14:6). 그에게 침례를 베풀지 못할 어떤 이유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37. (없음) [네가 믿으면]. 본문상의 증거(참조 20쪽)는 이 구절의 생략을 지지한다. 초기의 침례 고백문에서 인용한 일종의 난외주가 본문의 이 부분에 점진적으로 유입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구절에 표현된 진리가 성경 다른 곳에서 다양한 이문(異文)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참조 요 3:16; 행 2:38; 16:30, 31).

 

38. 명하여. 이 명령으로 모든 수행원이 멈추어 섰다. 수행원들은 침례받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본 증인이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그들 중 일부가 에디오피아의 초창기 그리스도인 회중의 중추적인 부분을 이뤘을 가능성이 있다. 전승에 따르면, 내시가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확실하다.

 

내려가. 헬라어 카타바이노 에이스(katabaino- eis). "~로 내려가다", "~안으로 내려가다." 이 구가 단독적으로 나왔다면 빌립과 내시가 물 가장자리로 내려간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물 안으로 들어갔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그러나 39절의 보충 구절이 이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한다.

 

39. 올라갈새. 헬라어 아나바이노 에크(anabaino- ek). "~밖으로 올라오다." 이 말은 두 사람이 물 속으로 들어갔으며, 그렇지 않으면 물 밖으로 나올 수 없었음을 보여 준다. 이는 물 속에 잠그는 침례를 받기 위한 것이었음이 확실하다(참조 마 3:6; 막 16:16; 롬

6:3~6 주석). 그러므로 이와 같이 다소 비공식적이고 갑작스런 상황에서도 초기교회가 침례 방법을 채택한 분명한 예증이 여기에 있다.

 

이끌어 간지라. 헬라어 하르파조(harpazo-). “붙잡다”, “완력으로 끌고 가다”, “낚아채다.” 동일한 동사가 살전 4:17; 계 12:5에서 유사하게 사용되었다. 인간적인 생각이었다면 당연히 전도자가 남아서, 내시에게 필요한 일을 마무리짓고 그를 충분히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나 빌립은 초자연적인 힘에 이끌려, 문자 그대로 내시와 함께 있다가 낚아챔을 당했다. 왕상 18:12; 왕하 2:16; 스 3:12, 14과 비교하라.

 

흔연히. 내시는 빌립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믿었으므로 그에 대해 전혀 염려하지 않고, 그가 받은 새로운 빛 안에서 흔연히 길을 갈 수 있었다. 유세비우스(Ecclesiastical History ii. 1. 13; Loeb ed., vol., 1, 110, 111)는 내시가 그의 고국으로 돌아가 거기서 “만유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우리 주가 이 땅에 머문 일”에 대하여 전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방백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인[에디오피아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시 68:31)는 말씀을 성취했다고 전한다. 에디오피아 교회가 줄곧 유대교와 유사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에디오피아 교회는 일반 기독교계로부터 일찍이 분리되었고, 따라서 한동안 초기교회의 가르침과 생활의 단순성을 유지했다. 에디오피아 그리스도인들은 오랫동안 주일 중 첫째 날과 함께 제7일 안식일을 준수했다.

스데반의 순교-사도행전 연구 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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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7:51-60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내용 요약

  1. 아브라함과의 언약해설 (1-16)
  2. 모세의 율법 해설 (17-44)
  3. 형식에 빠져 성령을 거스리지 말라 (44-53)
  4. 스데반의 죽음 (54-60)
스데반의 순교를 목도한 모든 사람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의 얼굴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인에 대한 기억, 그것을 들었던 그 영혼들을 감명시켰던 그의 말 등은 보는 이들의 마음 속에 간직되어 그가 선포했던 그 진리를 증거하였다. 그의 죽음은 교회에게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으나, 그것은 그의 기억에서 순교자의 신앙과 지조, 그리고 그 용모에 머물러 있었던 영광을 지울 수 없었던 사울의 양심을 일깨우는 결과를 가져왔다.(행적 101p)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 일이 있나요?
  2. 이가는 버릇이 있나요? 언제 이를 가나요?
  3. 자신에게 불이익이 있을 것 같더라도 자신의 신앙을 말해야 할 때가 있다면 언제 일까요? (혹은 불이익의 상황에서 자신의 신앙을 밝힌 적이 있나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스데반의 말을 듣고 공의회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마음의 찔림을 받고 나타난 두 가지 반응에 대해 비교해 봅시다.
    ① 행 2 :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② 행 7 : 54 (왜 이런 반응이 일어났을까요?)

  2. 대적자들과 대조되는 스데반의 성령 충만한 모습을 살펴봅시다.
    ①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55절)
    ※자기를 보는 사람은 자아 충만 때문에 자기문제에 집착합니다. 그는 땅을 보지 않고 하늘을 보았습니다.
    ②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55절)
    ※그의 앞에 하늘의 문이 조금 열렸으며, 안을 들여다 보았을 때, 그는 하나님의 궁전의 영광과 그리고 마치 당신의 종을 붙드시고자 방금 그의 보좌에서 일어나 서 계신 듯한 그리스도를 보았다.(행적100p) ③ 성령의 음성을 듣고 대적하는 자들의 모습도 살펴봅시다.(57~58)

  3. 스데반의 기도(59~60)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기도(눅23:34,46)를 비교해 보고, 이 기도의 핵심을 서로 나누어봅시다.
    (눅 23:34,46)
    34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46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생각해봅시다.

  1. 순교의 자리에 설 때 나는 스데반처럼 당당하고, 용서하면서 죽을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2. 지금 나의 삶 속에서 순교자의 삶을 사는 것이란 어떠한 생각과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사는 것일까요?

  3. 나의 삶이 다른 사람의 양심을 일깨우는 삶이 되고 있나요?

 


51. 목이 곧고. 스데반의 연설 기조가 갑작스럽게 바뀐 이유는 산헤드린 회원들이 점점 흥분했고 그의 말로 인해 적개심이 치솟았기 때문이다(참조 사도행적, 100; 마 26:65).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다는 것과 더 이상 논한다 해도 그 문제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은 스데반은 엄한 견책의 말을 쏟아냈다. 그가 사용한 형용사들은 옛 이스라엘의 죄들에 대해 사용된 것들이었다. 출 33:3, 5; 34:9의 “목이 곧은”과 레 26:41의 “할례받지 아니한” 등등. “목이 곧은”은 고집 센 황소에 대하여 사용되었다(참조 출 32:8 주석). “마음에…할례받지 아니한”이란 구절은 실제로 에스겔이 “이방인”에게 사용했다(44:7). 스데반이 그들의 성전 숭배가 너무 극단적이고 또 무익하다고 말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그는 그들을 이방인의 부류에 넣었다. 이 격노한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큰 모욕적인 언사는 없었을 것이다.

항상 성령을 거스려. 정확한 역사적 요약인데, 이는 그들의 조상들이 순종하지 않았던 모세의 시대로부터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았던 예수 그리스도 때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령을 거스렸기 때문이다. “거스려”에 해당하는 헬라어(안티핍토[antipipto-〕)는 적극적이고 줄기찬 반대를 의미한다.

 

52. 선지자 중에 누구를. 여기에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이 다시 메아리되어 울려 퍼지고 있다(마 5:12; 눅 11:47; 13:34). 선지자에 대한 이러한 핍박의 역사는 마 5:12; 23:37 주석을 참조하라(참조 대하 36:16 주석; 살전 2:15).

의인. “의로운 사람.” 이 존귀한 칭호는 3:14과 22:14에도 사용되었다. 이미 이 이름은 유대 문헌에서 고대하던 메시야에게 적용되어 왔으며(에녹서 38:2), 사 11:4, 5에 암시되어 있을 수 있다. 빌라도의 아내가 예수를 지칭하면서 이렇게 묘사하였다(마 27:19). 초기교회는 그 이름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며, 그렇게 사용한 예는 요일 2:1에서 볼 수 있다. “의로우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여기 “의인”에 대해서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이다. 악인으로 정죄를 당하였던 그리스도는 “의인”으로서 모든 사람들과 구분되었다. 이 동일한 의를 나누어 줌으로써, 스데반은 사악한 분노 가운데서 그를 처형하려는 사람들과 크게 대조된다.

예고한. 정확히 말해서 “…가 된.”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 주는 자들의 얼굴에서 곧 닥칠 운명을 읽은 스데반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에게 행한 그들의 이전 행동을 상기시켜 준다.

 

53. 천사의 전한. 문자적으로 “천사의 포고로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분은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었다(참조 출 20:2 주석). 그분은 언약의 천사였다(참조 출 23:20 주석). 그러나 천사의 무리가 시내산에서 여호와와 함께 있었다(참조 신 33:2; 시 68:17; 갈 3:19; 히 2:2 주석). 신 33:2이 「70인역」에는 “그의 오른쪽에 천사들이 있고”라고 되어 있으며, 요세푸스(Antiquities xv. 5. 3)도 동일하게 생각한다.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이 말씀은 앞의 구절, “너희가…율법을 받고도”와 극적인 대조를 이루며, 그 말을 들은 자들에게 호된 일격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율법의 자구(字句)도, 그 취지도 지키지 않았다. 천사에게 받은 율법은 그들의 영광이 될 수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율법에 대한 곡해와 악용은 수치와 멸망을 재촉하였다.

 

54. 저희가…듣고. 정확히 말해서 “이제 그들이 듣고 있을 때에.”

마음에 찔려. 참조 5:33 주석. 이 말은 2:37의 “마음에 찔려”보다 더 에는 고통을 기술하고 있으며, 이제 그것은 회개가 아니라 맹렬한 분노를 낳았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이 비유적 표현은 드물지 않다(마 8:12; 13:42). 그러나 그것은 외적으로 표현된 사실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유대인들은 분노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화가 나서 말문이 막힌 그들은 마치 짐승이 먹이를 이빨로 물어뜯듯이 그를 갈기갈기 찢기를 원했다.

 

55. 스데반이. 미쳐 날뛰는 그의 적대자들과 완전히 대조적임을 가리킴.

충만하여. 갑작스런 영감이 아니라 계속된 경험을 암시함. 시작 때에 그러했던 것처럼(6:5) 끝에도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였다.

하늘. 스데반은 “하늘이 열리”(참조 행 7:56; 사 6:1 주석)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열린 하늘의 영광을 본 구경꾼들은 아무도 없었으며, 이 영광을 보았다는 스데반의 진술은 그의 죄책을 더욱 무겁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이 영적 눈으로 본 것인지, 아니면 육체적 감각의 확장을 통해서인지는 오로지 선지자들만이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참조 마 3:16; 고후 12:1~6).

하나님의 영광…보고. 창 3:24; 출 13:21; 요 1:14; 행 7:2 주석과 비교하라. 스데반의 설교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여 그의 마음을 비추는 거룩한 영광에 대한 계시를 보고함으로써 끝마친다. 그는 매우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저 영광을 응시했다. 그는 그 순간의 치명적 위험도 잊고 하늘의 장면에 온전히 정신을 집중했다.

예수께서…서신. 그리스도는 통상적으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으로 묘사되었다.

하나님 우편. 참조 마 26:64 주석.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을 보고 나서 이 신실한,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이 힘을 얻었다.

 

56. 인자. 복음서를 제외하고 신약에서 이 낱말은 여기와 계 1:13; 14:14에만 나온다. 스데반은 주님의 입술로부터 이 칭호를 직접 들었든지 아니면 초기교회에서 배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설교는 어떤 복음서도 쓰여지기 이전에 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산헤드린 회원들은 그리스도가 친히 그들 앞에서 심문당할 때에 사용한 이 구절을 기억했을 것이다(마 26:64). 그들은 그때 주님의 주장이 신성모독이라며 정죄하였다. 이 칭호에 대한 언급은 막 2:10 주석을 참조하라.

 

57. 저희가…지르며. 정확히 말해서 “그러나 그들이 소리지르며.” 즉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가운데서 그의 말을 듣고 죄를 깨닫는 대신 스데반을 침묵시키려고 시도하면서.

(귀를) 막고. 헬라어 쉬네코(sunecho-). “누르다”, “감싸 잡다.” 그들은 스데반의 말을 신성모독으로 여기고 더 이상 듣기를 원치 않았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51절에 주어진 자신들이 묘사를 받아 마땅함을 입증하였다. 스데반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신성모독자였다.

그에게 달려들어. 정확히 말해서 “그에게 일제히 달려들어.” 사단은 사람에게 사형 선고를 내릴 때 율법이 요구하는 그런 종류의 일치(신 13:9, 10)를 산헤드린에서 이루어냈다. 그들은 공식적 판결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와 결정에서 만장일치를 보였다. 이처럼 약식 재판 절차의 사법적인 측면들을 보려면 마 26:59 주석을 참조하라.

 

58. 성 밖에 내치고. 레 24:14에 따르면, 돌에 맞을 사람은 반드시 진영 바깥으로 데려가야 했는데, 스데반 당시에는 예루살렘 성 바깥을 의미했다.

돌로 칠새. 문자적으로 “그에게 돌을 던지고 있을 때.” 마치 처형의 행위가 마치 그 순교자가 기도하는 중에 진행된 것처럼 보인다(59, 60절). 돌로 치는 것은 모세의 율법 아래서는 신성모독죄에 대한 처형 방법이었다(참조 레 24:14~16; 요 8:7 주석). 하지만 산헤드린이 아무리 이 법을 면밀하게 따른다하더라도, 로마의 지배 아래서 그들은 특별히 스데반이 로마 시민권자라면(참조 행 6:5 주석) 그를 사형에 처할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그러나 그저 침묵을 지키도록 로마의 관리들을 뇌물로 매수할 수 있었다(사도행적, 98, 101,). 여전히 총독이었던 빌라도(참조 제10권, 74~77)가 당시 도성 밖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심문하면서 굴욕적인 경험을 한 후에는 스데반에 대한 공격에 개입하려 하지 않았을 개연성이 높다.

옷을 벗어. 율법은 고발자가 먼저 사형의 돌을 던지도록 요구하였다(참조 신 17:7; 요 8:7 주석). 겉옷으로 입은 헐겁게 늘어진 옷은 사형 집행자들이 팔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을 방해했을 것이기 때문에 벗어서 옆에 두었다(참조 행 22:20).

 

59. 저희가 돌로…치니. 정확히 말해서 “저희가 돌로 치고 있을 때에.” 스데반은 돌에 맞는 동안 기도하였다.

스데반이 부르짖어. 스데반이 방금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본 주 예수께 요청했다는 것을 이 기도 자체가 보여 준다(56절).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참조 마 27:50; 눅 8:55; 행 7:60 주석. 예수께서 돌아가시면서 드린 이와 유사한 기도를 누가가 어떻게 기록하는지 주목하라(눅 23:46).

 

60. 무릎을 꿇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본 적 있는 그분에게 기도하면서 그리고 그분을 숭경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다. 물론 그가 돌에 맞아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는 데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긴 하지만.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은 그를 핍박하는 자들의 과거의 죄에 관해서는 어떻게 해볼 일이 없었지만, 그들의 현재의 죄에 대한 용서를 요청할 개인적 권리가 있었다. 그들을 위해 간청하는 태도를 통해서 그는 그의 주님을 특징지었던 저 용서의 정신을 얼마나 온전히 습득했는지 드러내 보였다(참조 눅 23:34).

자니라. 참조 막 5:39; 요 11:11 주석. 자신을 변호하는 전체 시간 동안 스데반이 보인 행동은 그를 고발한 자들의 행동과 현저하게 대조된다. 그들은 복수에 목말라 격분으로 충만했지만, 그는 그리스도께서 재판정에서 나타내셨던 것과 같은 침착함과 평온함을 유지한다. 이제 누가는 순교자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면서 “(그가) 자니라”고 하는 마지막 구절로 거룩한 분위기를 보존한다. 이제 투쟁은 끝났고, 그는 승리를 얻었다. 하나님의 신실한 용사는 그 소동을 떠나 부활의 날까지 조용히 잠들어 있다. 이어지는 장들은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행 6:1-7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내용 요약

  1. 일곱 집사의 선정 (6:1-7)
  2. 스데반의 활동 (6:8-15)

불만을 듣고 심각성을 깨달은 사도들은 자신들을 변호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속하게 행동했다. 그들은 모세가 세운 전례(출 18:25)를 기억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모세처럼 권한을 위임하기로 결의했다. “모든 제자”라는 표현을 예루살렘과 근방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집회에 모여야 했었다는 뜻으로가 아니라, 한 특별한 집회가 소집되었는데, 그 집회에 올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왔으며, 그 모임에서 사도들이 그 문제와 그들의 계획을 제시했다고 봐야 한다. 그 분배를 놓고 불평이 제기되었던 자금은 많은 사람이 기부한 것이므로, 당연히 그 많은 사람과 협의를 거쳤다. 일개 중심지에서의 이런 발전으로부터, 대의제적 교회 통치 형태가 자연스럽게 일어났다(사도행적, 96).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우리교회에 소외당하는 대상이 있다면? 있을까요?
  2.  
  3.  
  4. 우리교회 안에는 “선민의식”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있다면 어떤 면인가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헬라파 유대인은 히브리파 유대인에 비해서 약자였다. 약자는 똑같은 취급을 받아도 자기는 소외된다고 생각한다. 약자에게는 사랑과 관심이 좀 더 많이 가야 된다. 그래야 겨우 공평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1. 교회 안에 불화가 생길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 말해 봅시다
  2.  
  3.  
  4. 그런 불화는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을까요?
  5.  
  6.  
  7. 본문의 사건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이 있는지 나열해 봅시다. (나열되지 않은 것들을 더 찾아봅시다.)
  8. ① 모든 짐을 홀로 감당하지 말 것
  9. ② 언제나 물질을 조심할 것
  10. ③ 편애하지 말 것
  11. ④ 약자의 마음을 이해할 것
  12. ⑤ 불화에는 신속히 대처해야 한다.

※ 일곱명의 집사들이 헬라파 유대인 중에서 뽑힌 것을 살펴 보라. 얼마나 시원한 처리인가? 그래서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게 되었다. (6:7)

생각해봅시다

  1. “교회는 어떤 사업보다는 사람이 우선 되어야 된다.”이 문장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3.  
  4. 우리 주변에도 약한 자들이 있습니다. 새로운 사람, 적응을 잘 못하는 사람, 열등감이 많은 사람, 내성적인 사람들은 어떻게 대해 주어야 할까요? 그리고 최근에 내가 그들을 위해서 해 준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 봅시다.

“정직한 영혼들이 자원하여 그리스도의 사업에 자신을 바치는 곳마다 빛과 축복의 중심지를 세우는 사업이 위탁되었다.”사도행적 90P.
 


제자. 사도행전에서 이 이름이 그리스도인에게 대하여 여기서 맨 처음 사용되었다. 복음서의 제자들이 사도가 되었으며, “제자”라는 용어는 일반적인 신자들에게로 넘겨졌다.
 
헬라파. 헬라어 헬레니스타이(Helle-nistai). 즉 헬라어를 상용하는 유대인들 혹은 “그리스의 유대인들”(「개정역」). 신약의 용례는 그들과 종족상의 헬라인들인 헬레네스(Helle-nes)를 세심하게 구분한다(요 12:20). 이 헬라파 유대인은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로서(참조 제10권, 66~68; 요 7:35; 행 2:8 주석) 헬라어를 상용할 뿐 아니라 헬라 문화에도 젖어 있었다. 그들은 헬라어가 공용어인 땅에 태어난 유대인들이었을 것이며, 그렇기에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구사하지 못했으며, 팔레스타인에서 히브리 제사에 참여하는 대신 예루살렘에 그들 나름의 회당들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개종자였을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그들은 유대교에서 개종한 자들이었는데, 왜냐하면 이때까지는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지 않았던 까닭이다. 오순절 당시 개심했던 사람들 중 다수가 바나바(4:36)와 또 이 이야기에 이름이 명시되어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6:5) 이 그룹에 속했던 것이 틀림없다.
이 헬라파 유대인들은 구약의 헬라어 역본인 「70인역」을 사용했는데, 그 역본은 신약에 아주 빈번하게 인용되었다. 그들은 본방의 유대인들과는 대조적으로 대개 아주 열심이 있었다. 그들은 큰 희생을 치르면서 예루살렘의 신성한 장소들에서 예배드리러 온 반면에,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에게 성전 경내(境內)는 너무도 자주 범속(凡俗)한 곳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참조 21:27, 28). 유대교 랍비들의 전승은 여호와에 대한 히브리인의 신앙고백(신 6:4)인 셰마(s∨ema‘)를 그리스식 헬라어로 암송하도록 하는 조항을 마련하였다. 참조 제10권, 63.
 
자기의 과부들. 즉 헬라파의 과부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이 유아기의 교회 내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악의는 없었지만 헬라파들 중에 궁핍한 자들이 언어와 관습의 차이로 인하여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었을 것이다. 과부를 돌보는 일은 성경에 강조되어 있다(참조 출 22:22; 신 14:29; 사 1:17; 눅 18:3 주석). 여기서는 남의 도움에 의존해서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가리킬 것이다. 분명히 교회 내의 공유적 체제는 조성된 공유 자산(행 4:32)을 감독할 모종의 체계가 필요했다. 후에 교회는 과부들을 돌보는 규정을 만들었다(딤전 5:3~16).
 
구제. 헬라어 디아코니아(diakonia). “봉사”, “돌봄”, 「개정표준역」에는 “분배”로, 11:29에는 “구제”로 번역되었다. 이 낱말은 디아코노스(diakonos) 즉 “봉사자”(ministrant) 혹은 “집사”와 관련되어 있다. 이 도움은 날마다 제공되었다. 절박한 필요와 아마도 보관할 공간의 부족으로 날마다 도시 여러 지점에서 구제 물자를 분배해야 했을 것이다. 증여물들이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고, 기부금을 나누어 주는 일도 끊임없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 일로 사도들의 시간이 매우 많이 소모되었다. 그러나 사도들이 편파적이거나 태만했거나 혹은 그들에게 적개심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다는 암시는 전혀 없다.
 
히브리파 사람. 이들은 헬라파 유대인들과는 대조되는 유대인들로서,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거기서 살고, 신약이 히브리 방언이라고 부르는 언어(아람어)를 사용했다(참조 22:2; 제1권, 30).
 
원망한대. 그저 사소한 불평이 아니라 심각한 우려를 자아낼 만큼 충분히 목소리가 큰 항의였다. 기록에 의하면 사도들은 아무런 비난도 받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은 그런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인들의 급속한 증가는 그들의 자원을 앞질렀고 어려움을 촉진시켰다.
 
제쳐놓고. 헬라어 카탈레이포(kataleipo-). “버리다”, “포기하다.” 이 헬라어는 강조형으로서, 궁핍한 자들을 돌보는 일로 사도들의 시간이 많이 소모되었음을 암시한다.
 
공궤를 일삼는 것. 유대 회당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도록 세 사람이 임명되었다.
 
지혜. 그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의 영적 필요를 보살필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일을 하는 데 신중하고 분별력이 있고 검약하며 지혜가 있어야 할 것이었다. 바울은 지혜를 성령의 은사로 간주했다(고전 12:8). 야고보는 그것을, 선한 행실 혹은 “선행”(약 1:5)이 수반되어야 할 하나님의 선물로 강조하였다(약 3:13). 이 절 외에는, 사도행전에 “지혜”라는 단어는 오로지 스데반에 관하여(행 6:10) 또는 스데반에 의해 사용되었다(7:10, 22). 그는 또한 “믿음[이]…충만”하다고 명시적으로 진술되어 있다(6:5).
 
칭찬 듣는. 문자적으로 “입증된” 혹은 “그들에 대하여 제시된 증거를 가지고 있는”, 즉 동료들간에 평판이 좋게 나 있는(참조 딤전 5:10). 이 말은 행 10:22에서는 “칭찬”하는으로 번역되었다. 비난의 여지가 없는 사람이란 평판을 얻은 사람들이 좀 더 공정하게 분배하는 일을 떠맡도록 부름을 받지 않는 한, 그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정직하고 능률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 동료들에게 용납될 만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장로(감독)뿐아니라 집사의 자격에 관한 영감받은 목록은 딤전 3:1~14; 딛 1:5~11을 참조하라.
 
사람 일곱. 사도들이 7이란 숫자를 생각한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었다. 유대인들 사이에는 그 숫자에 대한 일반적인 존경심이 있었다. 후대에, 적어도 7은 유대의 읍들에서 공무를 처리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의 숫자였다(Talmud Megillah 26a, Soncino ed., 157). 좀 더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 당시에는 오직 일곱 명만 필요했을 것이다.
신약에는 이렇게 임명된 사람들이 “집사들”로 불리지 않는다. 이 말이 다시 언급되었을 때, 그것은 [그] “일곱”(the seven, 21:8)으로 언급되었다. 마치 그들이 거의 하나의 구별된 단일체인 듯이. 그러나 그들은 “집사들”(사도행적, 89, 90,)이라고 불리는 계층의 원조가 되었으며, 그들의 기능은 훗날 바울이 묘사한 집사의 기능과 거의 비슷했다(참조 딤전 3:8~13). 일부 교회에서는 로마에서처럼 집사의 수가 후에 일곱으로 고정되었다(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vi. 43. 11). 신(新) 가이사랴 공회(The Council of Neo-Caesarea, AD 314; Canon 14)는 한 곳에 집사들 일곱을 두도록 요청한다. 많은 주석자는 여기의 택함받은 일곱 사람이 행 11:30; 14:23 그리고 그 절 이후 언급되는 “장로들”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택하라. 열두 사도는 그 책임을 신자들의 어깨에 분명히 지웠으며, 그들 가운데서 택해야 했다.
 
기도하는 것. 그리스도의 기도 생활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 경건한 사람들은 기도할 필요성을 그들의 목록 맨 첫 번째에 놓아두었다. 그러나 기도는 개인적인 헌신뿐 아니라 교회의 공중 예배도 포함한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하는 것. 헬라어 디아코니아(diakonia). 1절에 쓰인 것과 동일한 단어이다(「개역한글판」의 1절에 “구제”로 번역된 낱말이 여기서는 “(말씀) 전하는 것”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열두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는 영적 은택을 나누어 주는 일을 하도록 자유로워지는 한편, 일곱은 물질적 복을 나눠 주는 봉사를 할 것이었다. 그들은 설교와 여러 가지 형태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 일을 할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2절)라는 구절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설명한다.
 
전무(하리라). 또는 “끈기 있게 노력하다.” 이 동일한 낱말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행한 열성적 행위를 기술하는 데에 여러 차례 사용되었다(참조 1:14; 2:42, 46).
 
스데반. 헬라어 스테파노스(Stephanos). “화관”, “보관”(寶冠), “승리의 화환”을 뜻함. 이 이름은 드물지 않았으며, 고대 명각에도 나타난다.
전승에 따르면 메시야가 왔다(눅 10:1~11)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각 성읍으로 파송된 70인 중에 스데반과 빌립, 두 사람이 모두 속해 있었다고 한다. 사마리아가 그들의 봉사 현장이었을 것이다(참조 눅 10:1 주석). 사마리아인들은 헬라어를 쓰는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 유대인들보다 필시 더 잘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마리아인을 위한 복음전도자로 빌립을 보낸 이유를 설명해 줄 수도 있다(행 8:5).
 
빌립. 헬라어 필립포스(Philippos). “말[馬]을 사랑하는 사람”(참조 막 3:18 주석). 열두 사도 중 한 명과 헤롯 대왕의 아들 중 두 명도 이름이 빌립이었다. 그 이름은 이전 여러 세기 동안 마게도냐의 통치 가문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름이다. 빌립의 과거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고, 다만 그가 70인의 일원이었다는 전승만 있을 뿐이다(스데반에 관한 앞절의 주석을 참조하라). 바울은 가이사랴에 있는 그를 방문하였으며(행 21:8), 아마도 그는 오랫동안 그곳 교회의 지도자였을 것이다. 바울이 방문했을 당시 빌립에게 성장한 딸 넷이 있었다는 사실은 빌립이 임명될 당시 이미 결혼한 상태였음을 제시해 준다.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 이 네 명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으며 추측의 토대가 될 만한 것도 전혀 없다.
 
입교한. 니골라는 “의의 개종자”, 유대교를 온전히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유대종교를 잘 배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안디옥.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이 시리아의 도시는 팔레스타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헤롯 대왕은 주요 도로 전체에 화려한 주랑을 세웠다. 니골라가 안디옥 출신이라는 사실이 매우 흥미를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이름을 얻은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11:26). 그 도시는 후일 교회 초기 선교 사업의 본부가 되었다(참조 11:19 주석).
 
니골라. 헬라어 니콜라오스(Nikolaos)로서, “사람들의 주인”을 뜻함. 이름이 기록된 최초의 비 유대그리스도인임.
 
안수하니라. 이것은 그 행위에 대한 신약의 맨 첫 언급이다. 구약에서는 이미 축복을 수여하는 행위로 사용되었으며(참조 창 48:13, 14 주석), 제사장 위임식 때(참조 민 8:10 주석) 그리고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울 때에도 사용되었다(참조 민 27:18, 23 주석). 그러므로 이 행위의 의미를 신실한 유대인들은 모르고 있지 않았다. 주님께서 자주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셔서 그들을 고치셨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수적인 의미가 첨가되었다(막 6:5; 눅 4:40; 13:13; 참조 막 16:18). 이와 비슷하게, 그분께서는 아이들을 축복하였다(마 19:15). 그런 까닭에, 사도들은 손을 얹어 일곱 명에게 축복하고 그들을 봉헌하는 일을 할 좋은 선례를 얻게 되었다. 그들은 행 8:17; 13:3; 19:6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유사한 상황들에서 이런 방법을 계속 사용하였다. 사도 시대의 교회에서는 복음 사역을 하도록 안수할 때 사람들에게 손을 얹었다(딤전 4:14; 5:22; 딤후 1:6). 그 관습이 교회 조직에서 용인된 절차로 굳어졌다는 사실이 히 6:2에 나타난다. 그것은 주님과 안수를 받는 사람 사이의 밀접한 영적 관계를 나타내야 한다(사도행적, 161, 162,).

 

행 5:1-17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내용 요약

  1.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1-11)
  2. 두 번째 체포됨 (12-32)
  3. 가말리엘의 변호 (33-42)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족을 위하여 함부로 돈을 쓴다. 남녀들은 쾌락을 찾아 그들의 기호를 만족시키는 한편, 거의 마지못하여 아까운 마음으로 헌금을 드린다.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하나님께서 당신이 주신 재산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에 대해 엄격히 설명을 요구하실 것이며, 그분께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헌물을 받지 않으신 것처럼 그들이 창고에 드리는 적은 금액을 더 이상 받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중요한 약속을 하고도 지키지 않으면 기분이 어떤가요?
  2. 거짓말 하다가,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혼 난 경험이 있나요? 왜 거짓말을 했는지 기억하시나요?
  3. 양심으로 결정한 서약과 법적 계약서 중 당신을 구속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4.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도들 앞에 가기 전에 부부끼리 어떤 의논했을 했을까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는 무엇일까요?
    • 사기죄 :
    • 위선죄 :
    • 위증죄 :
  2.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과 구약시대의 아간 사건(수7:1)과 유사한 점은 무엇일까요?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죄가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뒷면: 2절“감추매” 주석참조)

  3. 오늘날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죄는 무엇인지 생각해볼까요?
    (행적 76-78 쪽, 탐심, 위선, 위증)




  4.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왜 죽지 않을까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죽지 않고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때처럼 단호히 심판하신다면 예배가 끝난 후 의자 위에 죽어 넘어져 있는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스펄죤)

생각해봅시다.

  1. 정직은 그리스도인의 덕목(혹은 재림교인) 중 어떤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하나요?

  2. 왜 위선적인 행동을 하게 되나요?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이사야 29장 13절).

 


1. [그러나]. 바나바의 인정 많은 관대함 (4:36, 37)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물욕이 현저하게 대조된다(5:1~11).

아나니아.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를 뜻함. 당시 흔한 이름으로, 다소의 사울이 처음 회심할 때 그를 도왔던 사람(9:10~17)과 공회에서 바울의 입을 치라 명한 대제사장(23:2; 24:1)의 이름도 아나니아이다. 이것은 렘 28:1; 단 1:6, 7에 나오는 히브리 이름 하나냐에 해당된다.

…하는 사람이. 진실한 기자(記者) 외에는 이 시점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말하지 않을 것이다. 열두 제자 중에 유다가 있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순결하고 열성적이긴 했지만, 초기교회에는 관대함보다는 비열함을, 정직보다는 위선을 택한 두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침착하게 그리고 감정에 휩싸이지 않는 방식으로 기술되고 있으며, 독자들은 상술되는 꾸밈없는 사실들을 통해서 교훈을 얻고 감동을 받는다.

삽비라. 이 이름이 “사파이어”를 뜻하는 헬라어 삽페이로스(sappheiros)에서 파생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필시 그 이름은 “아름다운”을 뜻하는 아람어 샵피라 (s∨appira’)를 의미할 것이다.

 

2. 감추매. 헬라어 노스피조(nosphizo-). 여기에서 사용된 형태는 “자신을 위하여 떼어 놓다”를 뜻한다. 딛 2:10에서 이 동사는 “떼어먹다”로 번역되었다. 「70인역」(수 7:1)에는 아간의 죄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아나니아가 땅 판 돈의 일부를 갖고 있는 그 행위 자체는 죄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어떤 것도 내도록 강요받지 않았다. 그는 자원하여 내겠다고 공언했지만, 어떤 일정한 금액을 낼 의무는 없었다. 그 돈은 그의 것으로서, 전부를 낼 수도 있고 일부를 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부를 드리면서 전부를 드리는 척했다. 그것은 속임수 곧 행동으로 말한 거짓말이었다.

바나바의 자기 희생의 이야기를 말하면서 누가가 칭찬한 사실은 그런 행위가 교회의 칭찬을 받았음을 드러내고 있음에 틀림없다. 아나니아는 더 적은 희생을 하고도 동일한 칭찬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보인다. 남의 호감을 사려는 갈망은 탐욕에 대해 부분적 승리를 거둘 정도밖에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탐욕은 정직에 대해 승리를 거둘 만큼 강했다. 팔고자 하는 충동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왔다. 그러나 판매 대금의 일부를 그대로 보유하고 있으려는 충동은 악했다. 그런 행위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는 시도였다. 그 죄는 어떤 면에서 게하시의 죄와 흡사했지만(참조 왕하 5:20~27 주석), 오순절 기적과 성령의 인도 아래 이루어진 교회의 특출한 발전 배경에 비추어 볼 때 훨씬 더 흉악했으며, 더욱 엄한 형벌을 받았다.

그 아내. 삽비라가 기꺼이 공범자가 된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범죄는 계획된 것이었다.

어찌하여. 만약 아나니아가 원했더라면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물리쳤더라면, 유혹자는 물러났을 것이다(약 4:7).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베드로는 악의 근원을 찾아냈다. 그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어떤 일을 행하고 있었는지를 분별의 은사를 통해서 알았다(고전 2:14; 12:19). 슬프게도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나니아는 사단에게 마음을 열었고 마침내 그의 마음이 탐욕과 사기심(詐欺心)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성령. 성령은 신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하여 주어졌지만(요 16:13), 아나니아는 진리의 영을 속이려는 헛된 노력을 하고 있었다(참조 요 14:17, 26; 16:13 주석).

 

4. 그대로 있을. 아나니아는 그 땅을 팔도록 강요받지 않았다. 그가 서원한 것을 땅 판 돈에서 정직하게 드릴 것이라는 기대만 있었을 뿐이다. 그런 사실에 함축된 의미는, 교회는 어떤 사람에게도 공동기금에 기부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드리겠다는 약속을 했을 경우 약속한 것을 드려야했다는 것이다. 모든 단계에서, 아나니아는 자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한 대로 행동할 자유가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으려고 했던 부분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가 정직하게 그렇게 하려고 했었다면, 그는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 희생 없이 관대하다는 평판을 얻으려는 이런 시도 때문에 그는 신성 모독죄를 범하게 되었다.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문자적으로 “이 행위를 [마음에] 넣었느냐.” 이 말은 아나니아가 용의주도한 계획을 세웠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갑작스런 유혹에 굴복한 문제가 아니라 결코 바르지 않은 계획을 그의 마음속에 받아들여 악한 행위로 발전시킨 그런 문제였다. 사단은 그 계획과 관련하여 그의 마음에 들어갔으며, 바깥으로 쫓겨나지 않았다.

거짓말한 것이…하나님께로다. 이 말은 아나니아가 사람들에게 전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범죄는 일차적으로 그가 감히 하나님을 속이려고 했다는 사실에 있다는 뜻이다. 모든 죄가 사람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치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시 51:4)라고 말한 다윗은 이런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아나니아가 하나님을 무시했든지 아니면 자기 동료를 속였으면 하고 바랐던 것처럼 하나님도 속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든지 둘 중의 하나다. 어느 쪽에 해당이 되든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범하고 있었으며, 베드로는 바르게 이 사실을 부각시켰다.

“하나님”이란 단어의 사용은 성령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 빛을 비춘다. 행 5:3에서 아나니아의 죄는 “성령”께 거짓말을 한 것으로 확인되며, 여기서는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것은 성령과 아버지 사이에 존재하는 일치성을 시사하며, 그리스도인에게 허위적으로 신앙이 깊은 체하는 행위의 흉악성을 경고하는 데 이바지한다(참조 마 12:31 주석).

 

5. 혼이 떠나니. 헬라어 엑프쉬코(ekpsucho-). “숨을 거두다”(expire)를 뜻하며, 의학 문헌에서 발견되는 용어이다. 죽음은 우연히 발생하지 않았다. 죄에 대한 베드로의 탄핵과 죄인의 죽음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었다. 기만을 폭로한 후에 베드로가 예고한 삽비라의 죽음(7~10절)을 고려해 볼 때 이 점에 대한 어떤 의혹도 사라진다. 나답과 아비후에 대한 심판(레 10:2), 아간에 대한 심판(수 7:20~26)과 비교해 보라(참조 대하 22:8 주석). 마 27:50 주석과 비교하라.

이것은 매우 두려운 심판이었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의아해 할 필요는 없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제 막 태어난 교회의 구성원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이끌려 갔다. 그들은 분명 하늘의 구원의 선물을 다소 맛보았다. 아마 그들은 성령의 은사들 중 몇 가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거짓된 영의 꼬드김을 받아 그들은 신성 모독적 행위를 저질렀다. 만약 교회의 이 초기 시절에 이런 행위를 이처럼 강력하면서도 현저하게 대처하지 않았더라면, 이와 같은 기만적 행위는 사도들의 사업을 저해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더 큰 위험과 악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개입하셨다. 이 경험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만약 누군가 종교 집회나 예배에 참석하여,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열정적으로 ‘나의 모든 것을 제단에 바쳤다!’고 노래 부른다면, 그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G. 캠벨 모건).

크게 두려워하더라. 누가는 자주 기적과 그것을 목격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생기는 두려움을 함께 기록한다(참조 눅 1:12, 65; 5:26; 7:16; 8:37; 행 2:43; 19:17). 그러나 여기서는 행 2:43의 경건한 경외심 그 이상이 분명하다. 큰 무리 가운데는 부정직한 다른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며, 그런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공포감이 엄습했을 수 있다.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의를 그처럼 옹호하는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경외심이 엄습했음이 틀림없다. 두려움이 즉시 임했다. 삽비라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채 듣기 전 이미 신자들 가운데 그 두려움이 퍼져 나갔다. 이런 형태의 두려움은 기독교 신앙을 공언하면서도 온전히 진실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대하여는 억지력을 발휘할 것이었다.

장사하니라. 나사로(참조 요 11:38 주석)와 예수의 장사에서 보듯이(참조 마 27:60 주석), 죽은 사람은 동굴이나 무덤에 안치되었고, 입구는 커다란 돌로 폐쇄되었다. 그러므로 아나니아를 장사지낼 시간이 약간은 필요했을 것이다. 장례 의식에 대한 유대인들의 관심을 살펴보려면 행 8:2 주석을 참조하라.

 

7. 세 시간쯤 지나. 문자적으로 “약 세 시간 간격을 두고.” 짐작컨대 그 다음 기도 시간 때까지. 이것은 아나니아의 시신을 처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아직 삽비라에게는 그 소식이 전해지지 못했다.

들어오니. 베드로와 나머지 회중이 그녀의 남편이 죽어서 장사지낸 바 된 것을 방금 목격했던 그 방으로.

 

8. 베드로가 가로되. 아마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일 것이다. 베드로의 질문은 공모자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삽비라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삽비라는 남편의 범행을 막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녀는 이제 고백을 통하여 자신의 양심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녀는 이전의 기회를 잘못 사용하였고, 지금 또 실패하였다.

내게 말하라. 베드로의 단도직입적 질문은 삽비라로 하여금 그들의 계책이 탄로났다는 것을 경고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남편과 함께 꾸민 거짓말을 계속하였다. 그녀는 입심 좋게 “예 이뿐이로라”고 대답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가 가져왔던 금액을 언급했을 것이다.

 

9. 함께 꾀하여. 그 범죄는 미리 계획된 기만이었기 때문에 특히 가증스러운 것이었다.

영을 시험하려. 즉 성령이 사람들의 마음의 은밀한 일들을 분간하시는 분인지 아닌지 “시험하려.” “주의 영”이란 표현은 필시 여호와의 영(참조 왕하 2:16; 사 61:1 등등)처럼 구약적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런 조합은 신약에서는 드문데 이곳에서와 고후 3:17에만 나온다.

너를 메어 내가리라. 베드로는 심판자가 아니라 예언자로서 말하고 있다. 성령이 이미 그들을 정죄하였다. 이 경우에, 다가올 심판이 예고되었으며, 그 발표에 곧 뒤이어 심판이 집행되었다. 그의 식별의 은사를 통하여 베드로는 아나니아를 장사지내고 오는 젊은이들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그들이 곧바로 그와 같은 성격의 일을 한 번 더 치르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11. 교회. 2:47의 확실하지 않은 독법을 제외하고, 이 단어는 사도행전에서 이곳에 처음 등장한다(「제임스왕역」 2:47에는 “church”[교회]라는 단어가 본문에 있으나 「개역한글판」에는 없음-역자 주). 그 단어의 등장은 조직상의 발전이 있었음을 가리킨다. 참조 마 18:17 주석.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깜짝 놀랄 만한 죽음은 그 사회와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가져다 줄 것이다.

듣는 사람들이 다. 이들은 교회 밖에 있었으나 교인들 가운데서 행사되고 있는 능력에 대하여 들었다.

행 4:5-22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 내용 요약

  1. 제자들의 체포와 석방 
    • 체포 (1-4)
    • 베드로의 답변 (5-12)
    • 산헤드린의 고민 (13-21)
  사랑받은 제자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요일 1:1-3)하노라고 기록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우리가 아는바와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전하여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한 계단 한 계단씩 예수를 따른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 길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어떤 요점을 갖게 할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허락을 어떻게 시험하여 보았고 그 허락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하여 아는 바를 증거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 주께서 요구하시는 증거인데, 이런 증거의 부족으로 세상은 멸망해 가고 있다. ─ 시대의 소망, 340(영문).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사람이 두려워서 바르지 않은 길을 간 적이 있나요?

  2. 자신이 만나본 사람 중 최고의 권력자는 누구였습니까?

  3. 좋은 것을 나누어주고 싶어 견디지 못한 적이 있나요?

  4. 예수님을 담대히 전한 적이 있나요? 왜 그렇게 하였나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다음의 사람들이 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가르치는 것을 싫어했는지 의논해볼까요?
    • 제사장들
    • 사두개인들
    • 성전 맡은 자(레위인, 성전 경호대장) 
      ※ 산헤드린은 71명으로 구성된 그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 권력 기관이었다. 그해의 대제사장이 의장이 되고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제사장들 (사두개인들), 원로 장로들 (귀족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 71명
  2. 5~6절의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마26:57, 뒷장 8절 “베드로” 주석참조)

  3. 베드로의 당당하고 신앙 깊은 모습을 찾아보고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8절)
    •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13절)
    •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14절)

 

  생각해봅시다.

  1.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18)는 산헤드린의 요구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19-21)을 깊이 생각하면서 참된 증인의 태도에 대해 말해 봅시다. 



장로. 여기에 언급된 무리는 히브리어 즈케님(zeqenim)으로 알려진 자들이 확실하다. 그들은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에 대조되는 평신도 산헤드린 회원을 대표했다.

서기관들. 산헤드린의 세 번째 구성원은 직업적인 법률가요 공인된 율법 해석자인 서기관들로 이뤄졌다(참조 제10, 62). 자격을 갖추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제시한 새로운 가르침에 분노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참조 마 7:29).

 

6. 안나스. (Seth)의 아들인 이 사람(요세푸스는 아나누스[Ananus]라고 칭함)AD 6년경 로마 총독 구레뇨(Quirinius 또는 Cyrenius)의 임명으로 대제사장이 되었으며, AD 14년경에 퇴진했다(Josephus Antiquities xviii. 2. 1, 2). 그리스도는 처음에 안나스 앞으로 보내졌고(18:13), 그 후에 안나스가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냈다. 이는 안나스가 당시 실제로는 대제사장이 아니었지만 유대인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가야바가 안나스의 사위였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특히 이해할 만하다. 두 사람 안나스와 가야바의 직능을 정확히 확인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일단 대제사장직을 맡았던 사람들은 직무를 중단한 후에도 그 직함을 계속 지니는 것이 관례였다. 안나스가 죽을 때까지 그의 아들 중 다섯이 대제사장직을 거쳤다(위의 책 xx. 9. 1). 그러나 AD 66~73년의 전쟁 기간에 폭도들이 성전 안에서 저지른 잔혹한 행위로 인해 그의 노년에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참조 Josephus War iv. 3. 78 [151~157]).

가야바. 가야바는 AD 18년이나 19년경에 임명되어 AD 36년경에 물러났다. 그는 복음서에 정략적이며 편의주의적인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참조 요 18:14; “안나스에 관한 주석).

요한. AD 70년 성전이 파멸되기까지 40년 동안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전해지는 유대 지도자 요하난(요한) 벤 작카이일 수도 있다. 그는 유대-로마 전쟁 후에 얌니아 회의(참조 제10, 90)의 발기인 겸 의장이 된 사람이다. 하지만 이렇게 보는 것은 매우 불확실하다. “요나단이라고 되어 있는 고대의 한 필사본이 시사하는 대로, 이 사람은 가야바 후에 잠깐 대제사장이 되었다가 벨릭스 때(AD 52~60년경) 다시 대제사장이 된 안나스의 아들 요나단일 가능성도 있다.

 

7. 가운데. 산헤드린은 반원(半圓) 형태로 자리에 앉았다(참조 Mishnah Sanhedrin 4. 3, Soncino ed. of the Talmud, 230). 베드로와 요한은 분명히 중앙에 자리했을 것이다.

 

8. 베드로. 이 일이 있기 몇 주 전 베드로는 대제사장 관저의 뜰에서 하속과 군인들 앞에서 떨면서 주님을 부인했다. 그러나 그 후 성령이 임하여 그를 새 사람으로 변화시켰다(참조 삼상 10:6 주석; 10:19, 20). 이제 그는 유대인의 최고 법정에 서서 예의를 갖추되 위축되지 않고 담대하게 말한다. 베드로는 쓰라린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부인한 것을 회개했다(22:54~62). 참된 회개를 나타내는 증거 중 하나는 뉘우친 잘못으로 인해 초래된 악한 결과를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유대인들 앞에서 주님과 그의 사업에 불명예를 가져왔다. 그러나 지금, 바로 그 도성에서, 예수를 정죄하는 일에 관여했던 바로 그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는 한때 자신이 부인했던 구주의 거룩한 사명을 기쁘게 증거했다. 여기서 베드로는 후에 자신이 준 권면 곧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라는 말씀의 효력을 보여 주었다.

 

11. . 이 성경 구절은 시 118:22을 문자에 매이지 않고 인용한 것이다. 베드로가 말을 건네고 있는 산헤드린 회원들 중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이 말을 인용하여 회의적인 유대인들에게 적용하는 것을 들었다(21:42~44). 그들은 영적인 눈이 멀어, 그 당시 예수의 도전과 경고를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 교회를 세우는 자로 부름을 받았으나(참조 행 7:38 주석) 하나님이 모퉁잇돌로 선택한 돌을 거절하였다(참조 엡 2:20). 교회가 모퉁이의 머릿돌”(벧전 2:6~8)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초석 위에 산 돌들로 지어졌다는 이 동일한 사상은 베드로전서에 지배적으로 나타난 주제 중 하나이다.

 

12.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육체적 치료는 영혼을 구원하는 예수의 능력에 대한 외적 표시이며, 앉은뱅이도 그 능력을 받았다고 암시했다. 목격자들은 일어나 걸으라는 명령으로 이루어진 결과를 보고, 그 동일한 능력으로 영적 구원의 더 큰 축복이 확실히 이르러 올 수 있다고 결론지었을 것이다(참조 마 9:5).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구원은 관원들이 찾고 있다고 고백한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주라는 베드로의 주장은 예수가 친히 자신의 독특성에 대해 주장한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참조 요 3:16; 14:6).

구원을 얻을 만한. 그리스도는,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 한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유일한 길이다(참조 요 14:6; 17:3).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공된 구원의 계획은 (1) 하나님을 도덕적 통치자로 드높이며, (2) 하나님의 율법을 통치 규칙으로 견지하고, (3) 그 계획의 근원의 특징이 하나님의 계시 가운데 나타나 있음을 보여 주며, (4)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인 인간의 필요를 대속(代贖)을 통해 채워준다. 그리스도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다(딤전 2:5).

기탄없이 말함. 헬라어 파레시아(parre-sia). “모든이라는 의미의 판(pan)을 뜻하는 레시스(rhe-sis)에서 유래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말의 거침없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담대함이라는 뜻이 된다. 이 단어는 교육으로 훈련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거침없고 재치있는 언어 구사를 의미한다. 파레시아는 드러내 놓고”(8:32) 행해진 주님의 가르침의 특징이었다. 이후로 기탄없음, 여기서 베드로와 후에 바울이 보여 준 것처럼 사도들의 사역에 나타난 특징이 되었다(참조 행 28:31; 고후 7:4). 파레시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 대하여 요한이 보여준 확신을 나타낼 때 그가 사용한 특징적인 단어이다(요일 4:17; 5:14).

학문 없는. 헬라어 아그람마토스(agrammatos). “문맹의.” 즉 유대인들의 학문과 전승의 견지에서 교육받지 못한.” 반면 서기관들은 그람마테이스(grammateis) 학문 있는 자들로 알려졌다. 유대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서기관들처럼 교육받지 못한 것을 주목하여 자연스럽게 그처럼 무식한 사람들은 종교 교사가 될 자격이 없다고 결론지었을 것이다.

범인. 헬라어 이디오테스(idio-te-s). “자신의 것이라는 뜻의 이디오스(idios)에서 파생했다. 여기서 이 단어는 공직에 있는 사람과 대조되는 평민 곧 사인(私人)을 지칭한다. 제자들은 종교 교사로서 인정된 지위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특별한 직위나 직업 혹은 그러한 직업에 요구되는 교양이 없었다. 이디오테스라는 단어는 후에 흥미로운 역사를 갖게 된다. 라틴 사람들은 철자를 거의 바꾸지 않고 이디오테스를 이디오타(idiota)로 재생시켰다. 그것은 이 형태에서 그것에 부여된 무지와 무능을 묘사하는 용어로 현대 유럽 언어에 유입되었다. 이렇게 하여 현재의 영어인 “idiot”(백치)가 되었다. 누가가 이 단어를 사용할 당시 이것은 베드로나 요한이 지능이 결여된 사람들이라는 의미보다는 공적인 사람들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이것이 바로 사도들이 종교 교사의 일을 하려고 했을 때 산헤드린 회원들이 분노한 이유였다.

알고. 알아보기 시작하고.” 베드로는 이미 산헤드린 앞에서 그의 능력이 나사렛 예수에게서 나왔음을 분명히 했다. 이제 유대 지도자들은 사도들이 정식 훈련을 받지 못했는데도 담대하게 가르치는 원인을 찾다가, 베드로가 말하는 방법이 또한 예수의 방법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병 고치는 그의 능력뿐 아니라, 그의 기별과 그것을 제시하는 방식 모두가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다. 산헤드린 회원들에게는 마치 예수가 두 제자의 모습으로 그들 눈앞에 다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따르는 모든 자는 항상 그래야 한다. 오늘날 주님을 대변하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분명한 확신과 능력은 기도와 명상 그리고 생애의 모든 활동에서 이룬 협력을 통하여 예수와 동행해 왔던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거룩한 주님과 더불어 누린 이런 교제는 측량할 수 없는 특권과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져다 주며, 그리스도의 일을 위한 중대한 책임감을 불러일으킨다.

 

14.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문자적으로 반박할 말이 없는지라.” 그 증거를 반박할 수 없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바로 그 당사자가 나음을 입고 그들 앞에 서 있었으므로(참조 16), 그들이 주님의 부활 사건에서 그랬던 것처럼 속임수라고 비난할 수 없었다. 이어지는 사건들로 판단해 볼 때, 신분이 높은 무리들 가운데는 하나님이 사도들을 통하여 일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 사건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가말리엘이 그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비쳤다(참조 5:34~39).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두려워한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다(39; 참조 40).

 

16. 어떻게 할꼬. 현안은 심의되지 않았다. 산헤드린은 개정 중에 있었고, 따라서 증거에 의해 피고에게 평결을 내려야 했다. 앉은뱅이는 나았고, 산헤드린은 그를 보았다. 치유 사건에서 매개가 되었던 두 사람이 그들 앞에서 판결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산헤드린 회원들은 사법적 직무를 유기하고는, 편의에 따라 어떤 노선을 따라야 할지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절차는 가야바의 특유의 방법이다(참조 요 11:49, 50).

판단하라. 이렇듯 자신들이 무죄하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었지만, 사도들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그 사실을 인정하라고 담대하게 요구했다. 산헤드린이 베드로와 요한을 벌하지 않고 놓아주는 것은 그들이 무죄함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20. 우리는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헬라어 본문은 대명사 우리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들은 예수의 사도로서 그에 대하여 증언하도록 특별히 위임받았다(28:19, 20; 1:8).

보고 들은 것을. 사도들의 증언은 예수와 함께했던 개인적인 경험에 기초하였다. 여러 해 후에,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이 보낸 편지서들 가운데서 그들이 가르친 진리에 대해 자신들이 목격자라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벧후 1:16~18; 요일 1:1~3).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의 생애에서 그리스도가 함께한 개인적인 경험은 그리스도교 진리의 실재를 보여 주는 가장 설득력있는 증거 중 하나가 된다.

행 3:1-10, 개정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내용 요약

  1. 앉은뱅이를 고침 (1-10)
    1)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앉은뱅이의 형편 (1-6)
    2) 그리스도를 안 이후의 앉은뱅이의 형편 (1-10)
  2. 베드로의 설교(11-26)
예수님께 바치기에 너무 아까운 것은 없다. 우리가 그분께서 우리에게 지키도록 맡겨 주신 재물의 달란트를 그분께 돌려드리면, 그분께서는 더 많은 것을 우리의 손에 넣어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활동은 모두 그분에 의하여 보상을 받게 될 것이고,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가 완수한 의무마다 우리의 행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게 하시고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심히 사랑하시는 아들을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도록 내어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아버지와 연합되셨지만, 인간을 구원하고 그들을 서로 연합시키기 위하여 그처럼 큰 희생을 치르셨다. 그렇다면, 그 연합을 보존하기 위하여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치르는 어떤 희생을 지나치다고 할 수 있겠는가?
(1보감 446p)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무능함을 깊이 느끼고 겸비와 기도로 그들의 약함을 그분의 능력에, 그들의 무식을 그분의 지혜에, 그들의 무가치함을 그분의 의에, 그들의 빈곤을 그들의 무궁무진한 부에 연결시켰다.” (사도행적, 59)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이름과 관련된 별명이 있나요? 혹은 이름과 관련되어 놀림 받은 적이 있나요?
  2. 부모님의 이름에 욕 먹인 적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있다면 나의 어떤 행동 때문인가요?
  3. 나의 삶과 예수님의 이름과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베드로와 요한의 말과 행동을 음미해 볼까요?

    1)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2) 우리를 보라.
    은과 금도 없으면서 우리를 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3)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내가 가진 것 중에서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어떤 것들이 있나요?

    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있나요? 그 이름으로 능력 있게 살고 있나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죠?

    5)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너무나 오랫동안 무력하게 살아온 그는 일어서라는 말뿐만 아니라,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 주어야 했습니다. 내가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줘야 할 사람이 있나요?

  2. 앉은뱅이가 낫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행 3:16, 개정)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1) 병치료를 강조하고 선전하는 교회에 대해 의견을 말해 봅시다.

    2) 참된 병의 치료는 어떤 것일까요?

 

생각해봅시다.

 

  1. 앉은뱅이의 기쁨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이 견딜 수 없는 기쁨이 구원받은 사람의 기쁨이겠죠! 최근 우리생활 속에서 있었던 구원의 기쁨에 대하여 이야기 해 봅시다.)

    ※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뛴 사건을 개기로 그날에 구원받은 사람이 삼천명(행2:41)이나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기쁨과 증거들은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큰 원동력이 됨을 기억하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지나갈 때에 그는 동냥을 하였다. 제자들은 그를 불쌍히 여겼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에게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하였다. 베드로가 아무것도 없다고 하자 앉은뱅이의 얼굴은 낙담의 빛으로 역력해졌다. 그러나 사도가 계속하여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할 때에 그의 얼굴은 희망으로 빛나게 되었다.(행적 58p)

 

사랑과 친절로써 예수님의 이름을 발하면 즉시 하나님의 천사들이 가까이 다가와 심령을 부드럽게 하고 진정시킬 것이다”(문서전도봉사, 112).


기도 시간. 9 즉 오후 3시경(참조 2:15 주석; 10, 55). 이때는 저녁 제사드리는 시간이었다(참조 Josephus Antiquities xiv. 4. 3 [65]). 이 시간은 기도 시간분향하는 시간”(참조 눅 1:9, 10)으로 알려졌다. 조석 제사는 매일 제3시와 제9(오전 9시와 오후 3시경)에 향과 함께 드렸으며 그 시간에 경건한 자들이 성전 뜰에서 기도했다. 정오의 기도 역시 적어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통례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참조 단 6:10; 10:9 주석; 55:17). AD 2세기에 하루 중 세 번째 기도가 일몰 시간에 드려졌다고 알려진 것으로 보아 그 기도도 전부터 관례적으로 내려오던 것으로 보인다. 랍비 문헌은, 이 정확한 기도 시각에 어느 정도 편차가 허용되었음을 보여 준다. 하루 세 번 기도하는 관습은 일찍이 2세기 그리스도 교회에 확실히 나타나는데, 유대인 회당에서 직접 전수한 것으로 보인다(Didache 8). 3세기 초에 많은 그리스도인은 하루 세 시간씩 기도했던 것으로 보인다(참조 Clement of Alexandria The Stromata vii. 7).

 

올라갈새. 올라가고 있었다가 더 나은 표현이다. 진술된 사건은 두 사도가 예배하러 성전으로 들어가는 중에 일어났다.

 

2. 나면서. 이 사람이 고통받은 기간을 세심하게 기록한 것은 누가 특유의 방법이다(참조 9:33; 14:8).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았을 때의 나이는 대략 40세였다(참조 4:22 주석).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 이름은 앉은뱅이에게 생소하지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 실로암 못에서 눈을 뜬 맹인이 있었다(9:7, 8). 베데스다의 중풍병자가 고침받은 일(5:2~9)이 같은 연약함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 사람에게도 알려졌을 것이다.

나사렛은 평판이 나쁜 곳이었다(참조 요 1:46). 요한의 기사에 따르면, 십자가의 팻말에 나사렛이라는 지명이 적혀 있었다(19:19). 예수의 갈릴리적 배경(7:40~42)뿐 아니라, 그가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은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었다. 그것은 앉은뱅이가 베드로의 요구에 반응하는 데 신앙의 큰 시험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불과 몇 주 전에 이 이름으로 불린 사람이 수치를 당하고, 백성을 기만한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 이름을 발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름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구주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는 그렇게 불리는 거룩한 분의 인격과 품성이 표현되어 있다. 경건한 마음으로 그 이름을 불렀을 때 그분의 능력이 나타났다. 그 이름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 이름을 부른 사례가 사도행전에 자주 나타난다(참조 4:10, 12; 9:14; 16:18; 19:5, 13; 22:16). 치유 행위를 할 때 베드로가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그 이름을 말한 것은 주의 약속을 단순하게 믿는 믿음의 표현이었다(16:18). 참조 행 3:16 주석.

 

7. 일으키니. 베드로의 이 몸짓은, 어린아이 같고 어쩌면 이제 막 싹트기 시작했을 앉은뱅이의 믿음에 인정 많은 조력자처럼 다가왔다. 그것은 앉은뱅이의 무력함의 마지막 순간과 자신에게 기적이 일어났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첫 순간 사이의 매우 짧은 틈을 이어주는 도움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베드로가 했던 것처럼 해야 한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 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 주(35:3).

 

발목. 누가는 의사였고(4:14), 따라서 의료 경험이 있는 기자가 여기서 앉은뱅이에게 일어났던 일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다.

 

힘을 얻고. “강하게 되었다가 더 나은 표현이다. 늘어지고 연약한 힘줄과 근육에 활력이 생기고 강해졌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 성경이나 유대 문헌 어디에도 이 이름으로 알려진 문은 없다. 전반적으로 학자들의 견해는 이 문을 성전 경내 동편의 맨 바깥쪽 벽에 있는 수산 문(Shushan Gate)으로 보거나,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통하는 니카노르 문(Nicanor Gate)으로 보는 것으로 엇갈린다. 어떤 이들은 니카노르 문이 남자의 뜰과 여인의 뜰 사이에 있었다고 보았다. 미문이 바깥벽의 한 부분이었는지 아니면 두 뜰 사이에 있었는지는 주로 이 진술에서 사도들이 택한 것으로 생각되는 진입 경로에 좌우되는 것 같다. 누가는 베드로와 요한이 그 문에 이르러 앉은뱅이를 고친 후 성전에 들어갔고, 분명 기도를 드린 후에 솔로몬 행각에서 그 이적에 매료된 무리들을 만났다고 기록한다. 솔로몬 행각은 동편 바깥벽 바로 안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므로(참조 11절 주석), 미문은 아마 바깥쪽 수산 문일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뜰 사이에 있는 안쪽 문이라면, 사도들은 솔로몬 행각에 이르기 위하여 그 문을 통하여 다시 바깥으로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은 감람산에서 성전으로 들어오는 쪽에 있었으며 도성 안에 살고 있던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갔을 방향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처음부터 그 문을 사용했다는 것을 설명하기가 곤란한 것 같다. 마을에서 성전으로 바로 들어가는 다른 문들과 비교해 볼 때, 그 문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걸인이 늘 앉아 구걸할 만한 장소가 되기는 어려웠다. 이런 명백한 난점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사도들이 솔로몬 행각에서 무리를 만나기 전에 미문을 통하여 다시 밖으로 나갔고, 따라서 이 문은 여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 있는 니카노르 문일 것이라는 가정을 지지한다. 요세푸스는 이 문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것, 성전 바깥쪽에 있는 것은 고린도 산() 청동으로 만들어졌는데, 은으로 도금되고 금으로 장식한 문보다 훨씬 가치가 있었다”(War v. 5. 3 [201]). 바로 이 문에 대해 미쉬나는 이렇게 말한다. “니카노르 문을 제외하고 본래의 모든 문이 금문으로 바뀌었는데, 그 문들에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문들의 구리가 [금처럼] 빛났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다고 말한다”(Mishnah Middoth 2. 3, Soncino ed. of the Talmud, 7, 8). 이 모든 증거를 종합해 볼 때 미문은 니카노르 문으로 확인되는 것 같다.

 

11.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베드로와 요한이 나가자 그가 그들을 붙들고 따라 나갔다. 그러자 놀란 사람들이 솔로몬 행각이라는 곳으로 모여들었다라는 독법을 지지하는 본문상의 증거가 있다. 이와 같은 독법은 미문의 위치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며, 비록 원본은 아니지만 미문이 니카노르 문으로 확인되는 것을 지지하는 초기의 증거로 보인다.

 

크게 놀라며. 불과 몇 달 전, 수전절에(10:22, 23) 바로 이 솔로몬의 행각에서 예수가 백성에게 하나님의 일에 대해 설교하였다. 그때의 기억이 두 제자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때 예수가 자신이 그리스도인지 숨김없이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이 불평했으나(10:24~26), 그가 하나님과 하나임을 주장하자 돌을 들어 치려 했다(10:30~33). 이제 그들은 그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 “생명의 주”, 예언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고 선포되는 것을 듣는다(3:14, 15, 18).

 

행각. 헬라어 스토아(stoa). “주랑”(柱廊), “회랑”(回廊). 1성전 건물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에는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대한 언급이 없다. 요세푸스는, 이 행각이 성전 경내의 동편에 위치해 있었으며(Antiquities xx. 9. 7), 높이가 10.6미터쯤 되는 두 줄의 원주(圓柱)들로 인해 두드러지게 보였다(War v. 5. 2 [190])고 말한다. 이 주랑이 솔로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은, 그것이 스룹바벨 시대로부터 옛 건물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헤롯 아그립바 세가 조부의 일을 마무리할 때, 백성들이 그에게 이 행각을 허물고 다시 건축하라고 설득했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12. 왜 기이히 여기느냐. “어찌하여 서서 쳐다보느냐”(1:11)라고 한 천사의 질문과 흡사하다. 두 경우 모두, 기적을 보고 놀란 목격자들에게 그렇게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경건. 혹은 헌신.” 베드로의 말은 어떤 사람의 헌신이 충분하다면,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을 것이며, 위대한 결과가 뒤따를 것(참조 요 9:31)이라는 통념을 마음에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여기서 사도는 그러한 사상을 거부한다. 베드로의 경건 때문에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만이 그 일을 이룰 수 있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문자적으로 왜 우리를 응시하느냐”(참조 1:10 주석). 기적은 베드로나 요한과 같이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권능의 공으로 돌려야 한다.

행 2:42-47, 개정

[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 내용 요약

1. 성령의 강림(행2:1-4)

2. 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행 2:5-13)

3.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행 2:14-41)

4. 성장하는 교회의 부흥 원칙(행 2:42-47)

구주께서 가르치신 원칙과 모든 말씀이 거룩한 아름다움으로 사랑하는 제자의 기억에 간직 되었다. 그의 생애의 만년에 요한이 교회들에게 보낸 증언의 요지는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1, 16)는 말씀이었다.
이것이 초대 교회에 충만한 정신이었다. 성령의 부어 주심을 받은 후에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그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었다(행 4:32, 34, 33).(시대의 소망 550p)

 

  교회는 분기하여 활동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영은 교회가 길을 예비하지 않는 한 결코 임하시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열심히 살피는 일이 먼저 앞서야 한다. 연합하는 정신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허락들을 주장하여야 한다.(기별1 126p)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당신이 활동한 그룹 중 가장 이상적인 그룹은 어떤 그룹이었나?(동아리, 친목모임, 말씀연구모임등)

 

2. 1000명의 사람들이 갑자기 우리교회에 나온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교회에 가장 시급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되는가?

 

3. 교회생활 중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4. 내가 가장 많이 시간을 할애하여 집중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우리의 교회는 다음과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까? 혹시 부족한 점이 있다면 어떤 것들일까요?

   1) 사도의 가르침 (말씀)

   2) 서로 교제하여 (성도의 따뜻한 교제)

   3) 떡을 떼며 (간단한 음식 나눔)

   4) 기도하기에 전혀 힘쓰며 (기도 모임)

   5)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 (이타적 구제)

   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성전을 사모, 집회)

   7)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미 (내적 기쁨이 있는 그리스도인 생활)

   8)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세상이 빛이 되는 생활)

 

 

생각해봅시다.

1. 초대교회가 갖추고 있는 공동체의 모습 중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할까요?   

 

2. 오늘날에도 초대교회와 비슷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많은 청소년들은 말하기를 “난 교과를 공부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몇 푼의 돈을 더 벌려고 모든 시간을 바친다. 노동에 밀어 넣은 이 시간을 성경을 연구하고 그 교훈을 실행하는 데 사용한다면, 과도한 노동으로 번 돈보다 더욱 많은 것을 저축할 수 있다. 이는 필요 없는 치장에 사용되는 많은 비용이 절약되고 경건의 신비를 이해하는 마음의 힘을 저장해 주었을 것이다.(안교 20p)

  참된 신앙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그렇게 어렵진 않지만 시간이라는 비용이 지불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시간의 비용을 지불한 마음이 있나요?

 


42. 가르침. 갓 침례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고, 각각의 무리들은 여러 방언으로 전하는 기별에서 유익을 얻었다. 그 사도의 첫 가르침은 그리스도에 관한 추가적인 교훈으로 계속하여 보충되었을 것이다. 그와 같은 모든 교훈이 여기의 “가르침”이라는 용어에 다 포함될 수 있다. 사도들이 모종의 “신조”를 공식화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교제. 헬라어 코이노니아(koino-nia). 「개역한글판」에는 “교제”(고전 1:9; 빌 1:5), “사귐”(요일 1:3, 6, 7), “참예”(고전 10:16; 빌 3:10), “교통”(고후 13:13), “동정”(롬 15:26), “연보”(고후 9:13), “나눠주기”(히 13:16) 등으로 번역되었다. 여기서는 사도들과 회심자들 사이에 생긴 형제애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떡을 떼며. 주의 만찬(참조 고전 10:16)과 일상적인 친교의 식사(참조 행 2:44, 46)를 모두 포함할 것이다. 

“떡을 떼며” 혹은 그와 유사한 표현이 마 14:19; 15:36; 막 8:6, 19; 눅 24:30, 35에 있는데, 분명히 이 경우들은 주의 만찬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식사하다”는 말을 일반적으로 “떡을 떼다”라고 관용적으로 말한다. 마 26:26; 막 14:22; 눅 22:19; 고전 10:16; 11:24에서는 명확하게 주의 만찬을 가리킨다. 행 2:42, 46; 20:7, 11에서는 두 가지를 다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떡과 함께 잔이 언급되지 않는다고 해서 주의 만찬을 가리킬 가능성이 반드시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문맥상 꼭 그렇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떡을 떼다”라는 표현이 종교적 행사를 기술하는 여러 경우에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41절은 “그 말”을 받는 신자들이 “침례를 받고” 교회에 “제자의 수가” 더한 것을 묘사한다. 따라서 이 절에서 언급된 “떡을 떼며”라는 표현 역시 특별한 종교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참조 행 20:7; 고전 11:20, 21 주석.

 

기도. 참조 1:14 주석. 여기에 새로운 그리스도인 사회의 생활에 적용되던 네 가지 기본적인 요소가 있다. (1) 신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진리를 점점 더 깨닫게 되었다. (2) 그들은 공동 예배와 상호간의 친절과 선행을 통하여 서로간에 그리고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었다. (3) 그들은 아마도 성만찬을 포함하는 “떡을 떼”는 일에 참여했다. (4) 그들은 개인적으로나, 연합하여 기도하는 일에 참여했다.

 

전혀 힘쓰니라. 헬라어 프로스카르테레오(proskartereo-). “꾸준히 하다”, “끊임없이 관심을 쏟다.” 이 말은 오순절 이후의 이야기와 그 후에도 계속되는 신자들의 기도 생활을 포함한다(참조 3:1 주석).

 

43. 사람마다. 신자들과 불신자들에게 똑같이 두려움이 임했음이 분명하다. 이전 두 달 내내 예루살렘은 시련의 시간을 보냈다. 예수의 사역은 절정에 이르렀었고, 대중적 관심이 그에게 모아졌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났다. 제자들은 대담하게 그의 부활과 승천을 선포했다. 그 후 놀랄 만한 오순절 사건들이 일어났다. 성령의 강림은 하늘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에 대한 증거로 제시되었다. 비신자에게 미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영향은 수천 명을 회개와 침례로 이끌었다. 여기에 예루살렘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키는 주된 이유가 있었다.

 

44. 함께. 이것은 신자들이 실제적으로 함께 모인 것을 가리킬 수도 있고, 영적 연합을 가리킬 수도 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당시의 유대인 생활에서 물건을 통용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다. 연례 절기에 오는 방문자들은 종종 예루살렘에 있는 친구들로부터 그들의 필요를 제공받았다. 하지만 누가의 진술에는 이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스스로를 의지하도록 내팽개쳐졌으며, 그리하여 새로운 경제 체제 곧 그리스도인 경제 체제가 세워졌다. 하지만 이것이 소위 기독교 사회주의라는 제도의 설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아마도 요 12:6; 13:29의 “돈 궤” 즉 공동 자금 관리의 연장이며 확장이었을 것이다. 새 회심자들은 그리스도와 상호간에 대하여 새롭게 발견한 사랑과 주께서 곧 다시 오실 것에 대한 열렬한 기대(행 1:11) 때문에 그들의 물질적 소유를 나누어 쓸 준비가 더 잘 되어 있었을 것이다. 나누어 쓰는 데는 어떤 강제도 없었다(5:4). 이는 주의 말씀(눅 12:33)의 문자적인 성취이며, 확립된 사회에서는 매우 당연한 행위로서, 자기 이익과 경쟁의 법칙이 아니라 동정과 자기 부정의 법칙에 기초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성령은 특별한 은사들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사랑의 방법을 통해서도 그의 능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교회가 기회 있을 때마다 분명히 보여 준 관대한 자선 행위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생활 방식이 교회 안에서 얼마 동안이나 계속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 하지만 동시에 교회는 재정을 분별 있게 사용하는 방법을 배웠다(살후 3:10; 딤전 5:8, 16). 예루살렘 교회는 행 11:29에서 볼 수 있듯이 여러 차례 이방 교회들의 자선금에 의지하였다.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가 빈궁해진 것이 이전 여러 해 동안 의연금을 낭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그 교회가 겪은 가혹한 박해와 기근 때문이었다(참조 행 11:27~30; 롬 15:26; 고전 16:1~3 주석).

 

45. 재산. 헬라어로 크테마타(kte-mata), “소유물”, 땅과 같은 부동산(不動産)이란 의미의 재산.

 

소유. 헬라어로 휘파르크세이스(huparxeis), “소유물”, 동산(動産)이란 의미의 개인적 소유물.

 

팔아. 더 나은 번역은 “팔고 있어서” 또는 “팔곤 하여.” 재난을 당하는 특별한 경우가 생겨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도와줄 경비 지출이 요구될 때는 파는 일이 있었다.

 

각 사람. 모든 믿는 사람.

 

필요를 따라. 신중한 분별력이 내포되어 있다. 도움은 필요의 정도에 달려 있었다. 체계적인 구호 방안이 신속히 준비되었다(참조 6:1~6 주석).

 

나눠주고. 즉 “나누고”, “분배하고.” 그들은 소유물을 팔아 생긴 수입을 분배하였다.

 

46. 날마다. 새 신자들의 공적 헌신이 끊이지 않았다.

 

성전에. 관원들이 정죄하여 죽게 한 분을 따르는 자들은 성전을 피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오순절 전에도 그곳에 자주 출입하였다(눅 24:53). 성전은 그들이 그들의 주님을 메시야로 알기 이전보다 그들에게 더 소중했을 것이다. 그분을 통하여 제자들은 성전의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것을 배웠다. 제자들이 성전 안에서 가르치고 예배드리도록 허용되었다는 것도 이상해 보일 것이다. 사실 얼마 후에는 그렇게 하는 일이 금지되었다. 성전의 뜰은 그곳의 평온을 깨뜨리지 않는 이스라엘인들이라면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렇게 된 이유의 일부는 산헤드린에 니고데모, 아리마대 요셉, 가말리엘과 같은 위원들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들은 신앙을 받아들일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교회는 거룩한 생활과 관대한 구제 활동으로 대중에게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었을 것이다. 제자들로서는 그들의 종교를 유대교에서 이탈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완성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습관과 욕심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복음으로 이끌리는 것을 보고자 하는 희망에서 한 혈통인 유대인 형제들(3:1)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참조 3:1 주석.

 

집에서. (「제임스왕역」에는 “from house to house”[집에서 집으로]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그리스도인들은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공동체 생활의 특별 행사 즉 떡을 떼고 서로 음식을 나누는 일은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하였다.

 

기쁨. 헬라어로 아갈리아시스(agalliasis), “환희”, “극도의 기쁨.”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특권에 대하여 기뻐하였다.

 

순전한. 헬라어로 아펠로테스(aphelote-s). 문자적으로 “돌멩이가 없는”이라는 뜻이며, 부드러운 땅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품의 단순함, 진정한 자선, 관대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서가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나타났을 것이었다.

 

음식을 먹고. 떡을 떼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생활에 밀접히 연관되었던 것이 분명하다(참조 행 2:42; 고전 11:20~22 주석).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누가는 이 구절을 자주 사용했다(참조 눅 2:13, 20; 19:37; 행 3:8, 9). 새롭게 발견한 신앙 안에 있는 기쁨은 당연히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케 했다.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은 언제든지 주님을 찬양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발견한다.

 

칭송을 받으니. 예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교회도 비슷한 호의를 누렸는데, 이는 교회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선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께서. 교회는 믿음을 향한 큰 진보가 자신들 때문이 아니라 주님 때문임을 깨달았다.

 

구원받는 사람을. 헬라어로 호이 소조메노이(hoi so-zomenoi), “구원을 받고 있는 사람들.” 「제임스왕역」에는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러한 번역은 아마도 번역자들의 신학적 신조를 무의식적으로 반영한 것이겠지만, 헬라어로는 지지를 받지 못한다.

 

더하게. “더하고 있도록” 또는 “계속해서 더하게.” 이 말은 오순절이 지나서도 계속 더해졌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취지는 바로 앞에 사용된 “날마다”라는 말에 의하여 더욱 강화되고 있다.

행 2:1-13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하나님은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를 섬길 마음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 속에 새 생명을 불어 넣으실 수가 있다. 그리고 제단에서 가져온 핀 숯불을 입술에다 갖다 댈 수가 있으시다. 그리고 힘찬 음성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할 수가 있으시다. 수천의 음성들이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들을 능력 있게 말하게 될 것이다. 더듬거리던 혀가 풀릴 것이며, 겁쟁이들은 용감한 사람들이 되어 용기 있게 진리를 증거할 것이다. 주여, 당신의 백성들을 도우사 영혼의 전에서 모든 더러운 것을 청결케 하사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케 하옵소서! 이는 늦은비 성령이 쏟아져 내릴 때 그들이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함이니이다!”(리뷰 1886. 7. 20). 

 

 태초부터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류를 위한 당신의 목적을 성취시키는 일에 인간 도구들을 통하여 당신의 성령으로 역사해 오셨다.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자신이 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2. 외적으로 드러나는 기적적인 일들이 내 신앙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3. 내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변화(갈5:22,23: 성령의 열매)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성령은 어떤 분이시며 하시는 일은 어떤 것입니까? 

    1) 하나님 (행 5:9, 7:51, 8:29,39, 13:2,4)

    2) 보혜사 (요 14:26, 16:13,14, 16:8)

    

2. 성령을 받은 사람의 상태에 대하여 이야기해봅시다. 

                        

참조   흔히 성령을 받은 사람은 가슴이 뜨겁고 입이 회하며 황홀경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르치지만 그것은 성서적이 아닙니다. 성령 받은 증거로 방언을 말하거나 황홀경을 경험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위험한 신앙이 될 것입니다. 왜 위험한지 서로 이야기해 보십시오.

  특별한 환경하에서 영적인 황홀을 나타낸다고 해서 그것이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다. 성결이란 황홀경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복종이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요,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요, 빛 가운데처럼 시련과 어두움 중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요, 보는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는 것이다.(행적 52p) 

  

3. 오순절에 여러 은사 중 왜 방언의 은사를 주셨으며, 방언의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일까요?(행 2:5-13)

 

 

생각해봅시다.

1. 우리교회에 특별히 필요한 성령의 은사(고전 12:1-11)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2. 성령이 우리에게 주실 변화는 무엇인지 각자 이야기해 봅시다. 

 

3. 오늘날 일반개신교회에서 성령임재의 증거로 말하는 방언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주께서는 초기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으신 후에도 하늘에 있는 그 저장고를 잠구어 놓지 않았다. 우리도 그의 축복을 충만하게 받을 수가 있다. 하늘은 은혜의 보화로 가득차 있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은 그분이 약속하신 모든 것을 주장할 수가 있다. 우리가 그분의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나태하고, 무관심하고, 게으르기 때문이다. 죽음과 같은 이 형식주의에서 벗어나야한다(리뷰 1889. 6. 4). 


1. 오순절. 헬라어 펜테코스테스(pente-koste-s). “오십 번째”를 나타내는 형용사적 표현으로, 무교절의 시작으로부터 첫 열매를 드리는 축제일(칠칠절[七七節] 또는 오순절[五旬節])까지의 오십 일간을 의미한다. 오순절 날짜는 유월절 날짜에 따라 정해진다. 유월절은 니산월 14일에 지켜졌다. 15일은 무교절의 시작일이며, 16일에는 (보리 수확물의) 첫 열매 한 단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 드렸다(레 23:5~11). 포함식 계산법에 의하여, 16일부터 시작하여 7주일(週日)에 하루를 더한 50일째 되는 날이 (밀 수확물의)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初實節]인데, 이날은 또한 칠칠절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그 사이에 7주일이 끼어 있기 때문이다(레 23:15, 16). 이 절기가 바로 후에 오순절로 알려진 절기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해의 니산월 16일이 일요일이었으므로(참조 마 26장에 관한 추가적 설명, 설명 1), 그 날을 포함하여 7주일에 하루를 더한 날, 즉 50일이 되는 날인 오순절도 일요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일요일에 신성성을 부여할 만한 성경적인 지지는 어디에도 없다(참조 w/28/1e 주석).

 

저희가. 아마도 120명과 그에 합류한 다른 신자들을 말하는 것 같다.

 

다같이. 그들의 주께서는 보릿단 요제(搖祭)를 드리는 날에 부활하셨는데, 이것은 부활의 “첫 열매”(고전 15:20, 23)인 자신을 표상하는 것이었다. 그는 40일에 걸쳐 지상에서 그들과 반복해서 접촉했다. 그들이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날까지는 열흘이 더 남아 있었다. 이 약속은 무엇을 초래할 것인가? 기대에 찬 열흘은 진지한 기도의 열흘(1:14)이었으며, 연합된 갈망으로 드려진 기도의 기간이었다(사도행적, 36, 37,). 이러한 연합은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과의 특별한 경험을 열망하거나 그의 능력을 나타내시기를 기대할 때 그들을 특징지어야 하는 연합이었다. 그와 같은 연합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제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성령을 가로막을 것이다.

 

한곳에. 이곳은 아마도 최후의 만찬을 나누었던 바로 그 큰 다락방일 것이며(눅 22:11~14),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에 제자들이 숨었고, 주께서 승천하신 후에 되돌아온 곳과 동일한 장소일 것이다. 

 

2.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문자적으로는 “앞으로 불어 닥치는 격렬한 바람 같은.” 그것이 실제적인 바람이 아니라 바람과도 “같은” 또는 바람과 “흡사한” 것이었음을 주목하라. 이 경험을 겪은 사람들은 그것이 마치 바람과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바람”(프노에[pnoe-])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신약에서 오직 여기와 17:25에서만 사용되었는데, 후자에서는 “호흡, 숨”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70인역」에서도 이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누가가 프노에(pnoe-)를 선택한 것은 제자들이 이제 막 경험할 것이며, 주가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했을 때의 그 감동을 회상시키려 했음이 틀림없는 그 초자연적인 “호흡”을 묘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들은 한 번 더 경외심을 일으키시는 거룩한 감동, 거룩한 “호흡”을 느꼈다.

 

소리. 헬라어 에코스(e-chos). “소리”, “잡음.” 영어 단어 “echo”(메아리)는 여기서 왔다. 누가는 복음서에서 이 단어를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라고 묘사하는 데 사용했고(21:25), 히브리서 기자는 시내산에서 나는 나팔 “소리”에 사용했다(히 12:19).

 

가득하며. 동사의 주어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원문의 문맥상으로는 무엇이 “가득”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개역한글판」은 “소리”나 “바람”이 가득했던 것으로 번역하였다. 하지만 다수의 주석가들은 “바람” 즉 성령이 가득했다고 주장한다(참조 요 3:8).

 

3. 불. 실제적인 불꽃이 아니라 “불 같은 것” 또는 “불을 닮은 것”이다(참조 2절의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성경에서 신성과 불은 자주 연관되어 나타나는데(참조 출 3:2; 신 5:4; 시 50:3; 말 3:2),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이 지닌 힘과 영광과 정화시키는 효력 때문이다. 침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가 “성령과 불로”(마 3:11) 침례를 베풀 것이라고 약속했다.

 

혀같이 갈라지는 것. 더 나은 표현으로는 “스스로 갈라지는 혀들” 또는 “갈라지는 혀들.” 헬라어 표현은 최초의 불덩이가 여러 작은 혀로 나뉘어, 기다리던 사람들 각자에게 임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혀”라는 비유적 표현은 성령이 신자들에게 내려주신 방언(方言)의 은사를 감안할 때 적절한 것이었다.

 

4. 성령. 구약에는 하나님의 영에 대한 명백한 언급이 많이 있다. 그러나 구약에 나타난 성령의 어떠한 현현(顯現)도, (1) 그분의 명확한 신원, (2) 충만히 부어짐, (3) 그에 잇따른 결과 등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리하여 이 날이 때때로 교회의 생일이라 불린다. 예수의 성육신 동안의 생애, 그의 탄생, 침례와 성령을 받은 일, 십자가에 못박힘, 부활, 승천 등에 나타난 위대한 사건들은 극히 중요했으며, 구원의 계획을 전개하는 데 중심이 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오순절에 있은 성령의 부음은 그리스도의 위대한 희생을 하늘이 받으심과, 그가 아버지와 함께 보좌에 즉위한 사건에 연이어 일어났다(참조 사도행적, 38, 39,). 성령의 부음으로 교회는 권능을 받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전에 시도된 적이 없었던 일, 즉 천하만국에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충만함을 받고. “아버지의 약속”(참조 1:4, 5 주석)의 성취와 열흘간 기도하면서 기다린 일의 결실이 여기에 있다. 제자들은 성령을 간구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눅 11:13). 부활한 날 밤에 그리스도는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말했다. 약속된 성령은 그들의 존재의 내면 깊숙한 곳에 퍼져, 그들의 모든 능력이 강하게 활동하도록 자극하면서 그들 위에 임했다. 이제 그들은 방언의 은사와 함께 자기의 말이 아닌 말로 말하고 또 생각하면서(참조 벧후 1:21) 선지자들의 경험으로 들어갔다.

 

말하게 하심을 따라. 헬라어 아포프쏀고마이(apophtheggomai), “말하다, 표명하다.” 「70인역」에서 이 단어는 예언하는 것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대상 25:1; 겔 13:19; 슥 10:2). 여기서 이 단어는 그 연설이 하루에 3,000명을 회심하도록 이끈 명쾌하고 고매하며 활력이 넘치는 것이었다는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오순절과 “이른비”의 연관성에 관해서는 욜 2:23 주석을 참조하라.

헬라어 동사 시제는 “계속 주셨음”을 시사하는데, 이것은 필요가 생길 때마다 말하는 사람 개개인에게 말씀을 주시는 성령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제자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무리들에게 번갈아 가면서 연설했고, 전체 군중에게 한 베드로의 설교(14~36절)는 그들의 기별을 요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른 방언. 그들의 모국어와는 다른 방언. 이곳과 11절에서 “방언”으로 번역된 헬라어 글롯사이(glo-ssai)는 주로 말을 하는 기관(器官)을 가리키지만 종종 언어와 관련하여 사용된다.

외국어를 말하는 능력은 복음 기별을 전 세계에 전하는 특별한 목적으로 제자들에게 주어진 은사였다. 세상 사방에서 온 순례자들(참조 9~11절 주석)이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다. 이들은 흩어진 유대인으로서 성전 봉사에 참여할 수 있을 만큼의 히브리어는 이해했을 테지만, 제자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아람어를 알아듣지는 못했을 것이다. 순례자들과 그들을 통해 기별을 받아들일 사람들을 위해, 성령은 제자들이 순례자들에게 그들의 모국어로 유창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것은 하나의 중요한 이적이었으며, 주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약속 중 한 가지를 성취하는 것이었다(참조 막 16:17 주석). 이것은 그날의 큰 수확을 거두는 데 일조(一助)했고(행 2:41), 이후로 여러 해 동안 세계적인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 

 

5. 경건한. 이 단어는 시므온에게 사용되었다(눅 2:25). 이 단어의 일차적인 의미는 사려 깊은 행동과 신성한 사물을 주의 깊게, 경건하게, 예배하는 마음으로 다루는 성향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로 보면, 여기에는 혈통상의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개종한 사람들도 포함될 수 있다. “천하 각국으로부터”라는 표현이 이와 같은 결론을 불가피하게 한다. 이 단어는 행 8:2에 다시 나온다.

 

천하 각국으로부터. 오순절 경험으로부터 두 세대 후 헤롯 아그립바 2세는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에게 반역하는 일을 막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한 그의 유명한 연설에서 “세상에는 우리 민족이 조금이라도 포함되지 않은 백성은 없다”(Josephus War ii. 16. 4 [399])라고 선언했고, 야고보도 그의 영감적인 편지서를 “널리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약 1:1) 써 보냈다. 이와 같은 유대인들의 이산(離散)은 일차적으로 그들이 겪은, 다음과 같은 대규모의 유수(幽囚) 때문이었다. (1) BC 722년에 열 지파가 앗수르와 메대로 잡혀감(왕하 17:6), (2) BC 605년부터 3차에 걸쳐 이루어진 유다 지파의 바벨론 유수(참조 대하 36:1~21; 렘 52:1~30; 단 1:1~7 주석), (3) 마게도냐의 프톨레마이오스 소테르(Ptolemy Soter)에 의하여 다수의 사람들이 애굽으로 끌려감(Josephus Antiquities xii. 1. 1 [6, 7]). 유수로 흩어진 유대인들에 더하여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상업적인 활동에 끌려 세계의 방방곡곡에 퍼져 살게 되었다.

 

7. 갈릴리 사람. “갈릴리 사람”이라는 명칭은 경멸적으로 사용된 것 같다. 왜냐하면 갈릴리 주민들은 교양이 없었기 때문이다(참조 마 2:22; 4:15; 26:73 주석; 시대의 소망, 232). 그러므로 갈릴리 사람들이 외국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더욱 더 놀라운 일이었다.

 

우리가…각 사람의…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이것은 분명히 복합적인 진술이다. 여기서 기자는 다음에 열거되는 다양한 국적들을 가진 대표자들로부터 들은 수많은 말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놀란 청중이 진술한 사실은, 언어가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할 것에 대한 맛보기이자 보증이었다.

 

8. 각 사람의 난 곳. 누가는 마치 그가 마음속으로 로마 제국 전체를 조망하고 있듯이, 민족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데 소속된 순서를 따르고 있다. 그는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하여 처음에는 동쪽, 다음에는 북쪽, 서쪽, 남쪽의 순서로 옮아간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천하 각국”(2:5)이라는 말이 사실이 되었다. 흩어진 유대인들(참조 제10권, 66, 67; 요 7:35; 행 6:1)은 일반적으로 네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 같다. 이 부류들은, 누가도 그 일부를 언급했지만, 다음과 같이 나누어진다. (1) 바벨론과 기타 동부 지역에서 온 사람들-바대인, 메대인, 엘림인, 메소보다미아 거주자들, (2) 수리아와 소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유대, 가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3) 북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애굽,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의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 (4) 로마에서 온 사람들-로마에서 온 나그네들. 그러므로 이 목록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도식에 따라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13. 새 술. 헬라어 글류코스(gleukos). 오순절이 6월에 있고, 새 포도는 8월까지 익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새로운 술”이 아니라 “달콤한 술”을 말한다. 여기서는 분명히 취하게 하는 음료를 의미한다. 조롱하는 자들의 비난은 제자들의 어조(語調)와 태도에 흥분하게 하는 요인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만약 그들이 모두 조용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로 말했다면 참으로 이상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그들 위에 임했고, 그들의 주제는 크나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행 1:1-12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해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그리스도께서 땅에서 승천하셨을 때에 그는 지금껏 자기를 믿어온 사람들, 그를 믿을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시리라고 결심하셨다. 어떤 선물을 주셔서 은혜의 보좌로 승천하시는 그분을 아주 돋보이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실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의 엄위하심과 왕의 풍모에 합당한 것이 되어야 하였다. 그분은 신성의 제 삼위되시는 성령, 곧 그분의 대리자를 보내실 작정이었다. 이 선물은 그렇게 썩 좋은 선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분은 한 선물 속에다 모든 선물을 다 포함시킬 작정이었기 때문에 회개시키는 능력이시요, 빛을 비추어 거룩하게 하시는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의 영을 그의 선물로 주셨다. (안교 1905. 11. 28).

 

1 은 복음서와 사도행적을 이어주는 다리이며 역사적인 전환의 장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그 힘없는 갈릴리의 어부들이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키는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되었는지 그 비밀을 제 일장에서 찾아봅시다.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은 무엇인가요?

  2. 기억에 오래 남는 장면을 이야기해 봅시다.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데오빌로는 누구입니까? (눅1:3)
    데오빌로(Theophilus)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2.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며칠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셨으며 그 동안에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막 16:12~18)

    참조 사십 일. 문자적으로는 40일 “내내” 또는 “동안.” 예수는 계속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머문 것이 아니라, 부활 후의 기간 동안에는 반복적으로 자신을 나타냈다(참조 마 28장). 이 40일과 복음서에 있는 누가의 매우 축소된 이야기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들(1:4, 5, 7, 8,)을 음미하면서 그 뜻을 깊이 생각해 봅시다.

    참조 성령은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이 성령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성령의 지배하에 있는 사람들이 받은 바 능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때 그것은 전신을 감전시키는 보이지 않는 전선을 붙잡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자원은 참으로 한이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다 깨달았으면 좋겠다!

생각해봅시다

  1. 약속된 성령이 임하는 조건이 있을까요? 성령이 임하면 어떤 일이 우리 삶에 일어날까요?

  2.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전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지금 당신 곁에 계시다면 개인적으로 당신에게 당부하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3. 내가 상상하는 예수님의 재림의 장면은 어떤 것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예수께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내 증인이 되리라하셨다. 세상을 경고하는 것은 성령과 산 증인의 연합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의 일꾼은 하늘의 기별을 통과시키는 대리자이다. 그리고 성령은 진리의 말씀에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한다.


1. 데오빌로.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의 친구.” 데오빌로라는 이름이 어떤 사람을 지칭하기보다는 누가가 그리스도인 전체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했다는 보편적인 주장을 지지해 주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각하라는 호칭은 이 사람이 실제 인물이었음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데오빌로(Theophilus)는 그의 헬라식 이름이 시사하는 대로 개종한 이방인이었을 것이다.

 

먼저. 문자적으로는 첫 번째로서, 현재의 작품이 일련의 작품들 가운데 두 번째 것임을 시사해 준다. 누가에 의하여 기록된 복음서는 분명히 먼저 쓴 글이다(참조 제10, 171, 172).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예수는 말과 일에 능했다(24:19). 여기에 언급된 일이란 그분의 이적들을 가리킨다(10:38). 예수의 가르침과 행함에는 권세능력이 똑같이 함께 했다(참조 눅 4:32 주석). 저자는 이러한 이중적인 활동을 이제 자기가 막 쓰고자 하는 책에서도 보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시작하심. 헬라어 아르코마이(archomai), “시작하다는 누가복음의 특징적인 말로서, 30번 나온다. 사도행전에도 나오는 이 말은 누가가 이 책의 저자임을 자연스럽게 입증해 준다.

예수가 친히 시작한 복음 사업이 사도행전에서는 교회의 사업 가운데 역사하는 성령을 통하여 이뤄져 나간다.

 

2. 사도들. 헬라어 아포스톨로이(apostoloi), “보냄을 받은 자라는 말로서, “떨어져”, “멀리라는 뜻의 아포(apo), “보내다는 뜻을 가진 스텔로(stello-)의 합성어이다. 고전 헬라어에서 아포스톨로스(apostolos, 복수형은 아포스톨로이[apostoloi])는 선박을 급파하거나 해군이 원정을 떠나는 일과 관련되어 자주 사용되었고, 또한 소함대(小艦隊)의 사령관이나 대사(大使)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자기 제자들을 사도라고 부를 때, 예수께서는 아마도 셸리하(selih.a’)라는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어 분사 샬루아흐(saluah.), 보냄을 받은 []”에 해당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들은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전문 용어로 사용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성령으로. 이 표현은 성령이 제자들을 인도하여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이끌었음(16:13)을 뜻하거나, 예수는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이나 후에 성령이 충만했던 분이었음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와 관련된 모든 일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음을 고려해 볼 때 후자를 가리킨 것이 분명한데, (1) 그의 잉태(1:35), (2) 그의 침례(3:21, 22), (3) 그의 의(), 즉 그의 의로운 생애가 나타남(딤전 3:16), (4) 그의 봉사의 생애에 나타난 성령의 지도(4:1; 참조 2:49 주석), (5) 그의 이적(12:28), (6) 그의 부활(벧전 3:18) 등이 그러하다.

 

3. 확실한증거. 헬라어 테크메리아(tekme--ria). “증거들즉 단지 그럴 듯하다든지 우연히 그러한 상황이 되었다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분명한 확신을 가져다주는 증거를 말한다. 확실한 증거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들(2:22)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에 나타나신 사실을 가리킨다. 그들은 부활이라는 최고의 이적을 확인했다. 이러한 증거는 다음과 같은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1) 그가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심, (2) 그들에게 만지도록 허락했던 그의 실제적인 몸, (3) 한번은 500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나타났던 것처럼, 그가 거듭하여 가시적(可視的)으로 나타남, (4) 천국의 성격과 교리에 관한 그의 가르침. 부활의 확실성은 제자들이 전하는 기별에 역동적인 능력을 주었다. 그것은, 구속받은 자들이 육체적으로 부활하리라는 확신에 대한 바울의 장엄한 논증의 기초가 되었다.

 

4. 같이 모이사. 헬라어 쉬날리조(sunalizo-). 문자적으로 소금을 넣다”, 따라서 함께 먹다또는 함께 모이다”, “회합하다.” 이것은 아마도 갈릴리에 있었던 모임을 가리키는 것 같다(28:16~18). 왜냐하면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모습을 제자들이 보았던 마지막 모임에 대한 언급이 행 1장에서 에 와서야 비로소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그들은, 구주가 그토록 자주 봉사하던 그곳, 그가 마침내 고난을 당하고 장사되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그 수도(首都)로 돌아가야 했다. 그곳에서 그의 제자들은 능력을 받고, 그곳에서 그들은 그들의 증거를 시작해야만 했다(사도행적, 31, 32,).

 

기다리라. 제자들이 당면한 과업은 단지 인간적인 수단만으로는 이행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1) 지정된 시간까지, (2) 지정된 장소, 곧 가장 위험하고도 가장 도전적인 장소인 예루살렘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제자들은, 베드로와 다른 이들이 조금 전에 한 것처럼 고기 잡으러 가(21:3) 대신에 기다려야만 했다. 그들은 (1)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열렬히 기대하고, (2) 그 능력을 크게 갈망하여, 그것을 받기 위해 준비하며, (3)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성취하도록 간절히 연합하여 기도해야만 했다.

 

5. 성령으로. 성령의 침례는 침례자 요한에 의하여 약속되었다(참조 마 3:11). 그 약속(1:4)은 약속이 주어진 지 몇 날이 못 되어”, 즉 오순절에, 물로써가 아니라(참조 마 3:6, 11 주석) 성령으로 말미암아 받는 침례를 필요로 했다.

 

6. 모였을 때. 이것은 주의 뜻(4)에 순종하여 그리고 서로 단합하여 예루살렘에서 모였던 때를 가리킨다. 비록 뜻밖의 초자연적인 출현이라는 언급은 없지만, 예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셨다. 이날은 주께서 승천하신 날이었으므로(16:19; 24:50, 51; 고전 15:7), 그 모임은 제자들이 그들의 주와 함께하는 마지막 집회였다.

 

이스라엘. 제자들은 그때까지도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된 메시야의 통치가 유대인의 민족적인 통수권이 회복됨으로써 이루어지기를 추구하였다. 사실 유대인들이 다윗의 자손[예수]을 거절함으로써 메시야의 왕국을 상실하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그들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그를 거절한 것은, 그가 와서 유대인들이 정복하는 세상을 만들지 않고, 보편적인 의의 왕국을 세우려 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조건적이었던 신분인 선택된 백성의 지위를 그 민족이 거절한 일은 너무나도 근래에 일어났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이 아직도 깨닫지 못했던 사실은, 비록 유대인들이 개별적으로 참된 이스라엘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그루터기에 접붙임을 받을 수 있기는 하지만, 유대 민족은 이와 같이 다윗의 자손[예수]의 통치를 거절했기 때문에 더 이상 선택된 백성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인종이나 국적 또는 지위에 의한 차별이 전혀 없다.

 

주께서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달리 표현하면, “주께서 이때에 회복하십니까?” 그 때까지도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나라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들이 기대하고 있던 것과 같은 종류의 회복을 약속한 것이 아니었다(참조 눅 4:19 주석). 그들은 예수가 로마인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24:21)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에야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그것이 다른 구속임을 깨달았다(2:37~39). 예수의 승천과 그에 뒤따른 오순절 경험은 그들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으며, 마침내 그들은 그들의 선생이 가르치는 나라의 영적인 본질을 이해하게 되었다.

 

7. 때와 기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살면서, 예수는 자기가 올 날짜와 시간을 알지 못했다(참조 마 24:36 주석). 여기에는 부드러운 책망이 있는데, 그것은 (1) 아직 모든 지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자들(16:12), (2) 그들의 주()가 맡긴 사명을 이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지식을 가진 자들(28:19, 20) 그리고 (3) 징조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도함을 받을 자들을 위한 것이다.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하나님은 시간의 종이 아니요 시간의 주관자이다. 그의 지식은 시간을 초월하는데, 그는 전지(全知)하여 모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의 선지성(先知性)은 그의 신성에 대한 증거이다(46:9, 10). 그는 자기가 뜻하는 바를, 자기를 섬기는 자들과 함께하신다.

 

8. 권능. 헬라어 뒤나미스(dunamis), “”, “수완”, “능력”(참조 요 1:12 주석). 영어 단어 “dynamite”(폭약)는 뒤나미스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누가는 성령이 임한 자들만이 받을 수 있는 초자연적인 권능을 말한다(참조 눅 1:35; 24:49 주석). 이 능력은 증거를 위한 것이다. 이것은 (1) 내적인 능력과, (2)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능력과, (3)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능력을 준다. 이런 능력을 받은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는 자기가 지상에서 시작한 사업을 계속할 것이며, 그가 한 일보다 더 큰 것도”(14:12) 이룰 것이다. 성령이 주는 이 증거는 기독교회의 특징적인 표지가 될 것이었다.

 

증인. 헬라어 마르튀레스(martures). 다른 어떤 수단을 통해 자신이 보거나 들었거나 알게 된 것을 확증하거나 확증할 수 있는 사람. 이 단어는 사도행전에서 13번 사용되었다. “증인으로서 사도들은 그리스도가 예언된 메시야이며, 인류의 구속주임을 알았다. 그들은 또한 그의 재림의 약속에 대하여 증거할 수 있었다. 증인으로서 제자들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여 승천하신 주와, 그들의 증거를 통하여 믿게 될 세상 사람들 사이의 최초이자 으뜸가는 가시적(可視的) 증거를 연결시키는 자들이었다.

 

9. 올리워 가시니. 여기서 승천은 단순한 역사적인 사실로서 진술되었다. 그 이후로 신약에서 그것이 자주 언급되지는 않지만, 부활은 역사적인 기독교의 주요 진리로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예수에 의하여 예언되었다(6:62). 그 사건은 베드로에 의하여 다시 진술되었고(3:21), 후에 바울에 의해서도 언급되었다(딤전 3:16).

 

11. 본 그대로. 이 약속에 따르면, 그의 재림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1) 본인이 친히 옴이 예수”(참조 시대의 소망, 832), (2) 볼 수 있게 옴가심을 본 그대로”, (3) 구름과 함께 옴구름이 저를 (받아들여)”, (4) 확실히 옴그대로 오시리라.” 이 권고하는 천사들의 조용하면서도 엄숙한 보증은, 승천하신 사실로 말미암아 보증된 그리스도의 재림 교리에 절대적인 확실성을 가져다 준다. 그 사건과 약속은 모두가 진실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어느 하나도 진실하지 않든지, 둘 중 하나이다. 만약 재림이 없다면, 구속의 경륜에서 앞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수확이 없는 곡식의 파종과 경작처럼 헛될 것이었다.

 

오시리라. 그리스도의 재림은, 약속된 사건이 역사적인 사건들과 결합되어 있듯이, 부활이나 승천과는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에 있다. 성경은 다음의 내용을 나타내 준다. (1) 창조주 그리스도, (2) 성육신(成肉身)한 그리스도, (3)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4) 부활한 그리스도, (5) 장차 올 왕 그리스도. 이 모든 국면들 가운데서 그는 [동일한] 예수이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13:8) 분이다.

누가복음 24:36-53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50]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51]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52]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 먼저 본문을 읽으면서 자세히 관찰하세요.

 

“그리스도는 성화된 거룩한 인성을 지니고 하늘에 오르셨다. 그는 인성을 입으시고 하늘 궁정에 들어가셨다. 그는 하나님의 도성에 있는 모든 인간을 속량하신 분으로서 아버지 앞에서 “그들을 내 손바닥에 새겼나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탄원해 오셨던 분으로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인성을 입고 계실 것이다. 그의 손바닥에는 그가 받은 상처의 흉터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한 사람으로서 그분은 그의 자녀들을 받으시기 위하여 능력과 영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를 기쁘게 하고 감사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을 의로 심판하실 한 날을 작정하신 것이다. 우리는 타락한 일이 없는 온 우주 세계가 예수께서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우리 세상에 오신 그 웅대한 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영원한 확신을 가질 수가 있을 것이다”(원고 16, 1890).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서 승천하셨다. 사람으로서, 그분은 인간의 대속물과 보증이시다. 인간으로서, 우리를 위해 살아서 보증하신다.

본문연구

  1. 예수는 부활한 후에도 자기가 실제적이고 물질적인 존재임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하여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습니까? (눅 24: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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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에 사용하신 방법에서 무슨 교훈을 배울 수 있는가?(눅 24:25~27, 32).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성경과 상황을 효과적으로 조화시킬 수 있는가?(눅 2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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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누가는 복음 사명을 표현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어떤 말씀을 사용했는가?(눅 24:47). 이것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주제와 어떻게 맺어지는지를 살펴보라(눅 19:10; 행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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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누가복음 24장 47절과 마태복음 28장 19, 20절, 마가복음 16장 15, 16절의 복음 사명을 비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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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그분의 백성을 위해서 어떻게 그들의 길을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까? (벧후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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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의사항

  1. 당신은 그리스도의 증인입니까? 증인이 갖추어야 할 자격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증인으로서 당신이 가진 증거는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통해 능력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됩니까?

  3. 예수님의 재림이 내 삶의 변화에 어떤 원동력이 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이루신 놀라운 이야기가 절정에 다다랐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의 끝은 아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우편에 오르셨으며, 그 권세와 능력의 위치가 당장 지상에 나타났다. 그분은 제자들이 “능력을 받게” 되리라고 약속하셨다(눅 24:49, 4:14 비교). 예수님께서는 지금 보좌 곁에 서 계시면서, 아들을 보내심으로 가동된 하나님의 계획의 완성을 위해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37. 놀라고 무서워하여.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다락방에 따로 숨었고(참조 요 20:19 주석), 그들은 이미 고도의 정서적인 긴장 가운데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폭동 교사죄로 사형을 당한 분의 절친한 동료들이었다. 그들도 머지않아 같은 운명을 당하지는 않을까, 그들은 언제라도 잡히게 되지는 않을까 두려웠을 것이다. 이외에도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은 그들을 흥분하게 하고, 긴장시켰을 것이다. 이런 보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부활한 그리스도와의 직접적인 대면을 위해 준비되어 있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39. 내 손. 지금 그들 앞에 살아서 나타난 분이 다름 아닌, 십자가에 죽었던 그들의 주라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거기에 있었다. 예수는 그들의 더딘 이해력에 대하여 오래 참으면서(참조 35절 주석), 그들의 믿음의 기초를 형성할 가시적인 증거를 주었다. 사도들이 전할 기별에 확신을 주는 능력을 준 것은 바로 부활했다는 사실이다(참조 눅 24:48; 요일 1:1, 2; 5:20).

 

나를 만져 보라. 예수는 부활한 후에도 자기가 실제적이고 물질적인 존재임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하여 세 가지 감각적인 증거를 주었다. 예수는 시각, 청각, 촉각을 자신이 실제적인 존재요, 유령이나 너무도 긴장한 상상력의 허상이 아니었다는 확신을 제공하는 데 복합적으로 이용했다. 부활하여 영광스럽게 된 예수의 몸 가운데서 우리는 부활 시에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예증을 보게 된다(참조 고전 15:22, 23; 요일 3:1, 2).

 

. 헬라어 프뉴마(pneuma, 참조 8:55 주석). 예수는 이 땅에 왔을 때 자기의 신성을 벗어버리지 않았으며(참조 요 1:14 주석),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에도 인간의 모습을 지니고 갔다(참조 시대의 소망, 832). 예수는 성화되고 거룩한 인성을 지닌 채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분은 이 인성을 가지고 하늘 궁전으로 가셨으며, 하나님의 도성에 있는 모든 인간을 구속하신 자로서 영세토록 그것을 지니실 것이다”(엘렌 G. 화잇, RH 1905. 3. 9.).

 

40. 손과. 못 박혔던 양손은 말이 없었으나 부활의 진리에 대한 웅변적인 증거였다.

 

41.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그리스도가 함께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좋아서 믿지 못할 일처럼 보였다(참조 눅 24:35 주석; 16:12, 13).

 

무슨 먹을 것. 문자적으로는 어떤 음식즉 먹을 수 있는 것. 예수는 자기가 여전히 실제적이고 육체적인 존재라는 네 번째 증거를 그들에게 준다(참조 39절 주석).

 

42. 구운 생선. 고대 팔레스타인 지방의 일반적인 음식물(참조 요 21:9 주석).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제자로 부름을 받기 전에는 어부였다(참조 5:1~11 주석).

 

43. 잡수시더라. 틀림없이 제자들에게 자기는 여전히 육체를 지닌 물질적인 존재임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음식을 먹었다. 다음의 내용을 추가하는 것을 지지하는 본문상의 증거를 인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남은 것들을 그들에게 주시니.”

 

44. 모세의 율법. 흔히 오경이라 불리며 성경의 첫 번째 다섯 책들로, 모세가 기록한 구약 부분. 다른 곳에서 모세오경은 율법”(7:12; 16:16 ), “모세의 율법”(28:23) 때로는 단순히 모세”(16:29, 31)라고만 지칭된다. 히브리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로 구약을 세 부분으로 구분한 것을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유일한 곳이다.

 

선지자. 히브리인들은 구약의 이 부분을 그들이 전 선지서들”(former prophets)이라 부르는 것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후 선지서들”(latter prophets)이라고 부르는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12소선지자들로 구분했다(참조 제1, 39).

 

시편. 우리가 시편이라고 부르는 책뿐만 아니라, 아마도 모세선지자에 속하지 않는 다른 모든 책을 포함한다. 이 세 번째 부류의 책들은 일반적으로 성문서(Hagiographa) 또는 단순히 글들”(Writings)이라고 불린다(참조 제1, 39).

 

45. 저희 마음을 열어. 과거에 예수가 얼마나 자주 그렇게 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던가!(참조 18:34 주석).

 

47.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는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사업을 시작하였으며(참조 마 4:17 주석), 따라서 제자들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었다. 여기서 그의 신성에 대한 가장 큰 증거들이 주어졌다. 예수는 먼저 유대에서 일했는데, 그것은 그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자기의 가르침과 사업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기 위함이며, 자기를 메시야로 받아들이고, 자기가 천국 복음을 전할 때 함께 연합하여 노력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231). 후일의 사건들이 입증해 주듯이, 다수의 제사장들과 기타 국가 지도자들이 도에 복종하게 되었다(6:7). 예루살렘에서 복음의 초기 성공은 놀랍고 고무적이었다(참조 행 2:41, 47; 4:4, 33; 5:14, 16, 28, 42; 6:1, 7).

 

48. 너희는증인이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수 년간 그와 함께 지냈고, 그들은 그가 가르친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일하였는가를 알았으며, 이제 그들은 부활의 진리에 대한 증인이었다(참조 39절 주석). 그들은 보고 들은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었다(참조 벧후 1:16~18; 요일 1:1, 2). 그들은 그리스도의 증인들이라고 인정하기를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참조 행 2:32; 3:15; 5:32; 10:39, 41 ). 그들은 남에게 말해 줄 위대한 이야기가 있었으며, 그것을 말하는 데 결코 지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부활한 구주를 믿는 자들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의 도에 대하여 보고 들은 것들을 증거할 특권이 있다(참조 딤후 2:2; 고후 5:18~20).

 

49.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즉 성령(참조 행 1:4, 8 주석). 이 약속에 관하여 예수는 배반당하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오랫동안 토론했다(참조 요 14:16~18, 26; 16:7~13 주석).

 

너희는유하라. 즉 예수가 승천한 이후에(참조 행 1:4 주석). 아직 제자들에게는 갈릴리에서 예수와 만날 약속이 남아 있었다(참조 마 28:10). 그러나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은 분명히 여기서 주어진 분부를 따르기 위함이었다.

 

능력. 헬라어 뒤나미스(dunamis). “수행할 능력.” 능력은 그들을 유능한 증인들로 만들 것이었다(참조 48절 주석). “위로부터 능력을 받지 않으면, 제자들이 전하는 증거는 사람들의 마음에 깨달음을 주거나 확신시키지 못할 것이었다. 승천한 지 10일 후에 내린 성령은 그리스도가 여기서 언급한 능력을 주었고(참조 행 1:8; 2:1~4 주석), 사도들은 즉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시작했다. 제자들의 증거는 성령의 능력으로 강화되고 유효하게 되어 하루에 3,000여 명을 회심시키는 결과를 냈다(참조 행 2:41). 성령의 지도와 깨닫게 하는 능력 아래서 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경험했다(참조 24:47 주석). 오순절 이래 신자들은 문자 그대로 위로부터 능력을 입었다.

 

50.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나가사. [승천, 24:50~53=16:19, 20=1:8~12. 주요 주석: 누가복음. 참조 제9, 140, 147]. 승천에 대한 마가의 짤막한 기록 외에는 누가만이 이 사건에 대하여 기록하며(1:8~12),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승천에 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말한다. 오직 누가만이 그 사건의 때(참조 행 1:3)와 장소(참조 24:50)를 언급한다. 승천에 관한 시간표을 알기 원하면 마 28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를 참조하라. 분명히 제자들은 갈릴리로부터 그들의 일을 시작해야 할 곳인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참조 /24/49e 주석).

 

베다니. 베다니는 감람산의 동쪽 경사지에 있었으며, 예수는 그때 열한 제자를 감람산 꼭대기로 데려갔다(참조 마 21:1 주석; 1:12; 시대의 소망, 830).

 

손을 들어. 은총이나 축복을 선언할 때 흔히 취하는 자세이고, 때때로 그런 자세로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참조 18:13 주석).

 

51. 축복하실 때에. 제자들이 예수와 교제했던 몇 년을 마무리하는 적합한 끝맺음이다.

 

저희를 떠나. 예수는 제자들과 아주 가깝게 서 있었는데, 아마도 제자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을 축복하면서 양손을 펼칠 때에 그는 그들 가운데서 천천히 승천하였다(참조 시대의 소망, 830, 831,).

 

하늘로 올리우시니. 예수는 인간의 형체 가운데”(시대의 소망, 832; 참조 24:39 주석) 승천하였다. 이 구절의 생략을 지지하는 중요한 본문상의 증거를 인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 언급된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참조 행 1:9~11 ).

 

52.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참조 마 28:17 주석. 이 말의 생략을 지지하는 어떤 본문상의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예루살렘에 돌아가. 그들은 마지막 만찬을 함께했던 다락방에 머물렀다(참조 행 1:13; 시대의 소망, 802). 그들은 기쁨과 큰 믿음으로 저희의 주님이 위탁한 일을 시작했다(참조 막 16:20 주석).

 

53. 늘 성전에 있어. 성전은 집합 장소였는데, 특히 조석 기도 시간이 그러했다(참조 1:9 주석). 여기에서 사도들은 신앙을 증거할 기회를 가장 먼저 발견했다(참조 행 2:46; 3:1; 5:21, 42)

누가복음 24:13-35

[13]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19]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 먼저 본문을 읽으면서 자세히 관찰하세요.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앞으로 성취될 사건의 예언을 깨닫지 못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마지막 부분도 첫 부분처럼 확실히 성취되어 제 삼일에 그분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것은 저희가 반드시 기억했어야 할 부분이었다.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그 말씀을 잊지 않았다. 그날은 “예비일 다음날이라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마 27:62, 63)라고 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였다.”(시대의 소망, 796)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돌아가던 두 제자들과 동행하셨다. 주님의 죽으심만을 보고 슬픔 가운데 돌아가던 그들에게 예수님은 부활을 확신케 하셨다. 제자들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꾸어 질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본문연구

  1. 본문에서 “이 모든 된 일”(14절) 즉 두 사람이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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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f.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는 약 12km 북쪽에 있다.   
    cf. 두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까닭은 16절과 막 16:12을 참고하라.

  2. 17절에서 두 제자들의 상태를 말해주는 표현을 찾아보고 그들이 현재까지 알고 있는 사실을 요약해 보라.
    19-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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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5절에서 예수께서 그들을 “미련하다”고 하신 까닭은 무엇인가?
    25-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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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두 제자들이 부활을 확신하게 된 것은 언제였으며, 또 자신들과 동행한 사람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언제였나?
    27,32절; 30-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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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f. (소망, 799)“그리스도의 생애와 신약 성경의 교훈을 분명하고 아름답게 나타내는 것은 과거에 예언된 것에서 오는 빛이다... 예언을 들어 설명하시면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인성을 취하시고 어떤 분이 되기로 되어 있었는지에 대한 바른 견해를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다.”


토의사항

  1. 두 사람은 예수님이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알아보지 못했다. 왜 그랬다고 생각됩니까?
    오늘날 우리의 눈과 귀를 흐리게 하는 것들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해 봅시다. 

  3. 말씀을 통해 마음이 뜨거워진 경험에 대해 이야기 해 봅시다.

  4. 이설이나 쓸데없는 의심에 흔들리지 않고 말씀에 굳게서기 위하여 어떻게 성경을 공부하면 좋을지 의견을 나누고 자신의 결심을 세워봅시다. 

   

부활과 승천으로써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구속사역은 마쳐졌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만이 아닌 부활하여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 구약과 신약성경을 통하여 주님의 모든 구속사업을 이해하고 증거할 수 있다.


13. 그날에. 이때는 부활한 날 늦은 오후였다(참조 마 28:1 주석).

 

저희 중 둘이. 이 이야기 후반부에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글로바로 밝혀진다(참조 18). 그들은 분명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왔고, 십자가형과 상관되는 사건들과 예수가 살아났다는 소문 때문에 안식 후 첫째 날 거의 하루 종일 성읍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이십오 리(제임스왕역에는 “60펄롱[furlong]”이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1“펄롱”(헬라어 스타디온[stadion])186미터에 해당하며, 따라서 60“펄롱11.2킬로미터 가량 된다. 도로상으로는 12.8킬로미터쯤 될 것이다(참조 시대의 소망, 795).

 

엠마오. 엠마오는 엘-쿠베이베(el-Qubeibe) 마을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예루살렘 북서쪽에 있는 룻다(Lydda)11킬로미터쯤 가다보면 있다. 종종 엠마오라고 여겨지는 다른 곳은 칼로니예(Qalo-niyeh) 마을인데, -쿠베이베에서 남쪽으로 4.8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이다.

 

15.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두 제자가 엠마오를 향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참조 시대의 소망, 795), 예수가 그들을 따라왔다. 아마도 예수는 거의 2시간 걸리는 여행 내내 그들과 동행했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들은 예수를 자신들처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온 순례자로 여겼을 것이다.

 

16. 눈이 가리워져서. 두 제자는 피곤하고, 슬픈 생각에 깊이 빠져 그들과 합류한 예수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분명히 이와 비슷한 상황으로 인해, 그날 일찍 예수가 처음으로 마리아에게 가까이 갔을 때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가 부활 후에 나타난 경우, 어떤 때는 즉시 알아보기도 했으나 다른 때에는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 이곳과 31절에 누가가 기록한 말들은, 이때 두 제자는 자신들의 생각에 몰두해 있었고 또한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시야가 가려져 있었음을 암시한다.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는 즉시 자신을 그들에게 드러낼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가 그들에게 가르쳐 주려는 중요한 진리들을 충분히 인식하거나 제대로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들뜨지는 않을까 해서였다. 그들은 메시야에 관한 구약의 예언과 함께, 그리스도를 지적하던 역사적인 사건들과 거룩한 의식들을 꼭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것들만이 그들의 신앙에 견고한 토대를 제공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에 관해 성경의 가르침에 굳게 뿌리박지 않은 추상적인 신앙은 의심의 폭풍이 불 때 건재할 수가 없다(참조 마 7:24~27 주석). 그때 예수는 그들의 관심을 성취된 구약의 예언으로 이끌고자 했으며, 후일 그 사건들은 신약에 기록되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799).

 

17. 이야기가 무엇이냐. 대화를 시작할 때 하는 적절한 질문이다. 두 제자가 부활에 관한 사건들을 진지하게 토론했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는 지나가는 행인의 눈에도 띄었을 것이다. 두 제자는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것에 매우 놀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동행자를 쳐다보며 가던 길을 멈추어 섰을 것이다.

 

슬픈 빛을 띠고. 그들이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슬픈 빛을 띠었다. 하나님이나 동료 인간들을 오해한 결과, 얼마나 자주 슬퍼하고 실망하게 되는가! 구약을 올바로 이해하면 그들의 슬픈 생각들은 사라질 것이었으며, 실제로 그들이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렇게 되었다(참조 25~27, 33, 44~46).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가 운명하기 전에 그들에게 직접 주었던 교훈들을 잊었다(참조 44).

 

18. 홀로 알지 못하느뇨. 두 제자는 예루살렘에서 오는 사람이 그런 내용을 모른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수가 분명히 그 쪽에서 왔기 때문이다.

 

19. 선지자. 두 제자는 예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전에 그가 메시야일 것이라고 믿었지만(참조 21절 주석), 아직도 그를 위대한 선지자로 믿고 있었다.

 

20. 우리관원들. 두 제자는 사실을 알았고, 비난받아야 할 사람들을 올바로 지적한다. 그들은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한 일반인들을 비난하거나, 로마 당국자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지 않는다. 예수의 죽음은 유대 나라 지도자들의 소행이었다(참조 마 27:2).

 

21. 우리는바랐노라. 문자적으로는 우리는 희망하고 있었다.” 두 제자는 이제 확신을 표명한다. 그들은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했고, 후에는 선지자보다 더 위대한 분으로 믿게 되었다. 그들에게 그 확신은 안정되게 뿌리박은 것이었으나, 메시야에 관한 성경 말씀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은 크게 흔들렸다. 그들은 이제 전에 가졌던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토론의 진지함은 그들이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음을 드러내 주는데, 특히 예수를 보았다고 주장한 여성 제자들의 놀라운 보고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그러하다(참조 22~24).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 이스라엘을 구속하는 일과 관련된 그들의 개념은 의심할 것도 없이 로마의 철권 통치로부터 정치적으로 구원한다는 원론에 한정되었다. 유대인들이 가졌던 메시야에 관한 잘못된 희망에 대한 토론은 4:19 주석을 참조하라.

 

25. 모든 것을더디 믿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았으며(딤후 3:16, 17), 우리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에만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구약 선지자들의 많은 기록을 내버리거나, 소홀히 하거나, 공상적인 해석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면 올바른 분별력이 결여된 자들이다.

 

26. 할 것이 아니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냐?”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했다(참조 27절 주석). 예수도 자신이 고난받고 죽게 될 것을 거듭 예언했다(참조 18:31 주석). 더욱이 예수는 자기에 관한 예언의 성취가 믿음의 근거가 될 것이라는 점을 그 예언을 준 이유로 제시했다. 다시 말해, 예언된 사건이 이루어질 때에 그들이 믿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수의 죽음은 실망을 주는 대신에 믿음을 더욱 굳게 하는 증거가 되어야 했다.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제자들의 희망을 꺾어 버린 반면, 요셉과 니고데모에게는 위대한 진리를 확신케 하는 증거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27. 모든 성경에. 구약의 모든 성경이 자신의 메시야적 사업을 전망하고 있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핵심이었다. 구약 기자들이 메시야의 필생의 사명을 묘사하기 위해 어떻게 지도를 받았는지를 보려면 마 1:22 주석을 참조하라. 잘못된 지도를 받음으로 구약을 폄하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거룩한 영감의 기록을 크게 존중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음을 나타낸다. 모세와, 다른 이들의 손으로 기록된 구약을 연구하고 믿는 자들은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것이다(참조 요 5:39 주석). 그리스도는 친히 경고하기를, 구약의 중요성과 가치를 최소화하는 자들은 실제로 자기를 믿지 않는다고 하였다.

 

28. 더 가려 하는 것같이. 예수는 더 가려 했고, 따라서 그들이 강권하여 머물도록 하지 않았다면 떠나 버렸을 것이다. 만약 예수에게 자신들의 환대를 받아주라고 간청하지 않았다면, 두 제자는 자신들에게 이르러 온 축복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자기들과 함께 머물자고 간청한 이유는, 그가 지난 한두 시간 동안 주었던 귀한 교훈을 좀 더 받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다.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더 깊이 이해하기를 원하여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자들만이 더 풍성한 하늘 만나의 공급을 기대할 수 있다(참조 마 5:6 주석).

 

29. 저물어 가고. 문자적으로는 기울었다.” 여기서는 아마도 유대인들의 계산법에 따라 일몰 시에 주일 중 첫째 날이 끝나고, 새날이 시작된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엠마오에 도착하기 전에 해는 이미 졌다(일년 중 그 시기에는 오후 630분경에. 참조 시대의 소망, 800).

 

32.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상징적인 언어의 표현(참조 시 39:3; 20:9). 헬라어의 질문 형태는 긍정적인 대답을 요구한다(참조 6:39 주석). 그들이 성경 말씀을 열어 주는 예수에게 주목하여 듣고 있는 동안 영적인 밝은 빛이 그들 영혼의 암흑을 꿰뚫었다. 이제 그들은 저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어두움은 사라졌다. 그리스도의 임재가 그들의 초라한 가정을 밝혀 주었으며, 그가 가르쳐 준 영광스러운 진리는 그들의 마음을 가로지르고 있던 의심과 불확실함의 그늘들을 쫓아내 버렸다. 낯선 손님이 그때까지 함께 있었다면 그들은 그가 예수처럼 말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두 제자의 마음의 경험은, 성경 말씀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에 말하는 하늘의 음성을 주의 깊게 경청하는 사람들의 경험이 될 것이다. 저희의 초점 없는 생각에, 구약이 흐릿하고 무감동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자들은 겸손히 예수께로 나와서 배워야 한다(참조 27절 주석).

 

33. 그 시로. 그들 앞에 놓인 음식을 맛도 보지 않은 채(참조 시대의 소망, 801), 다른 제자들에게 놀라운 발견을 말해주기 위하여, 그들은 즉시 집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예루살렘에 돌아가. 그들이 엠마오에 도착하기 전에 해는 졌고, 따라서 그때는 오후 6시 반이 지난 후였다(참조 29절 주석). 저녁 노을도 8시경에는 사라졌다. 그 두 제자는 거의 어두워졌을 때에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밤중에 여행을 했다. 엠마오의 집으로 올 때는 피곤했으나, 이제 그들의 피곤함과 배고픔은 사라졌다. 그들이 동문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에, 떠오르는 달이 어둡고 고요한 성읍을 어슴푸레 비추고 있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802).

 

열한 사도. 유다가 빠지기 전까지는 열두명이라는 용어가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제자들을 가리킨 것처럼, “열한 사도라는 말도 어떤 면에서 특수한 의미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참조 8:1; 9:12 ). 실제로 그곳에는 열 명의 사도가 있었으며 이때에 도마는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참조 요 20:24).

 

34. 시몬. 열한 제자 중에서 그는 부활한 주와의 교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위로와 확신이 가장 필요했다(참조 막 16:7 주석). 틀림없이 열한 제자는 예수가 여자들에게는 나타났지만 자기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틀림없이 예수가 살아 있다면 가장 가까운 동료인 자기들에게 알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난 직후에 예수가 그들과 합류했다는 사실(참조 시대의 소망, 795), 그가 사라진 후에도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갈 때 함께하였다는 사실(참조 시대의 소망, 801)에 비추어 볼 때, 예수는 그 두 여행자가 엠마오로 갈 때 합류하기 전에 베드로에게 보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두 제자는 적어도 그날의 대부분을 동료 신자들과 밀접히 교제하는 일로 보냈을 것이기 때문에(참조 14절 주석), 만일 베드로에게 보인 일이 그들의 출발 훨씬 전에 있었다면, 그들은 아마도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35. 두 사람도말하더라. 헬라어 엑세게오마이(exe-geomai). “이끌어 내다혹은 자세히 말하다.” 두 제자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에, 그 추가된 증거도 무리 전체의 마음속에 있는 의심과 불신을 모두 없애 주지는 못했다(참조 막 16:13; 시대의 소망, 802). 실제로 예수가 약간의 음식을 들 때까지는 그들의 모든 불신이 사라지지 않았다(참조 24:41~43).

누가복음 23:1-25

[1]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5]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

[6] 빌라도가 듣고 묻되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 하여

[7]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8]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

[11]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13]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14]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17] (없음)

[18] 무리가 일제히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19]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러라

[20]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되

[21] 저희는 소리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23]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24]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5] 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 

 

* 먼저 본문을 읽으면서 자세히 관찰하세요.

 

“제사장들은 연약하고 우유부단한 빌라도와는 그들의 계획을 무난히 성취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저희가 알기로는 일전에 빌라도가 사형에 처할 만한 죄가 없는 사람들에게 사형 선고를 하고 그 사형 영장에 급히 서명한 일들이 있었다. 그의 생각에는 죄수의 생명이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며 그에게 죄가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사장들이 바란 것은 빌라도에게 예수님과 말할 수 있는 여지도 주지 않고 그로 하여금 사형을 선고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민족의 대축제일에 드리는 청이므로 이것을 그대로 받아 주도록 간청하였다. 그러나 이 죄수에게는 빌라도를 주저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는 감히 이 일을 할 수 없었다.”
(시대의 소망, 724-725)

 

산헤드린에 의해 시작된 재판은 새벽에 이르자 빌라도의 재판정으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셨으며, 또 헤롯에게도 재판을 받으셨다. 그들은 과연 십자가를 언도할만한 죄목을 찾아냈는가?
 

본문연구

  1. 본문을 세 부분으로 구분하고, 빌라도와 헤롯에 의한 재판이 왜 의미가 있는지 말해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빌라도는 그 지역을 관할하는 로마의 총독, 헤롯은 로마황제에 의해 임명받은 유대 분봉왕이었다.(눅 3:1-2a)    

  2. 사형에 해당된다는 고소내용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은 사실이었는가?
    2절; 눅 20:22-25
    __________________________

  3. 빌라도와 헤롯의 판결은 무엇이었는가? 예수님에게서 어떤 죄를 찾았는가?
    4, 14, 15, 22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행 3:13을 참조하라.
    cf. 시 2:2; 행 4:26-28을 읽어라.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누가는 다윗의 예언과 그 성취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cf. 재판받으시는 예수님에 대한 누가의 기록은 다른 복음서들에 비하면 대체로 간략하다. 하지만, 헤롯에게로 보내져 재판받는 것은 누가만이 언급하고 있다. 사복음서를 비교하면서 살펴본다면 더 많은 사실들을 찾을 수 있다.

  4. 재판 받으시는 동안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3, 9, 11, 25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
      

토의사항

  1. 빌라도와 헤롯은 왜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됐을까요?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요인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예수님은 왜 대체로 침묵하셨으며, 온갖 수모를 묵묵히 참으셨는지 그 이유를 이야기해 봅시다. 

    cf. “. 죄가 있든 없든, 보통 사람 같았으면 자신의 무죄를 큰 소리로 항변했을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의 자제심에 놀랐으며,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탄복할 일이었다. 그때 빌라도는 예수에 대한 고소들이 모두 악의에 찬 것임을 잘 알게 되었다(참조 막 15:10). 그러므로 예수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었다.”(성경주석, 마 27:13)

  3. 우리가 세상을 향해 침묵해야 할 일과 그렇지 말아야 할 일은 무엇일지 이야기해 봅시다.

    cf. (소망, 730)“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사명은 쓸데없는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상한 심령을 고치기 위하여 오셨다. 죄로 병든 영혼들의 상처를 싸매시기 위하여 말씀해야 하셨다면 그분은 침묵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거룩하지 않은 말로 진리를 짓밟는 자들을 위해서는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공식적인은 재판은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했으며, 도리어 유대 지도자들의 음흉함을 드러냈다. 그러나, 자신의 권한을 옳게 사용할 기회가 있었으나 자신의 자리와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 준 빌라도는 크나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2. 백성을 미혹하고. 누가는 유대 당국자들이 예수를 고발하기 위해 사용했던 세 가지 죄목을 열거한다. 여기에서는 그들이 예수를 혁명 선동자라고 고발한다. 예수는 공중 봉사 기간 내내 지금처럼 그에게 돌려지는 비난의 근거를 피하기 위하여 크게 주의를 기울였다. 이 조작된 고소는 유대 지도자들의 메시야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참조 4:19 주석).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3일 전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유인하여, 여기서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대로 그가 말했다고 진술하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그들은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자칭 왕 그리스도. 예수는 직접적으로 그런 주장을 한 적이 결코 없었다. 틀림없이 그들은 불과 5일 전에 예수가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던 사건을 생각했을 텐데, 이 사건을 유대인들은 모두 그가 다윗의 보좌를 차지할 것이라는 선언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5. 굳세게. 혹은 긴급하게.” 그들은 빌라도가 그들의 요구에 동의하도록 집요하게 주장했다.

 

유대. 여기서는 아마도 모든 이스라엘에 속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포함한 것 같다(참조 1:5; 7:17 주석). 분명히 누가도 유대에 상관되는 용어를 올바로 사용한다. 그러나 누가는 유일하게 이 용어를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사용하는 신약 기록자인 것으로 보인다.

 

갈릴리에서부터. 즉 예수의 사업이 크게 성공을 거둔 곳이다. 베드로도 복음의 확산을 묘사할 때 거의 같은 문구를 행 10:37에서 사용한다.

 

여기까지. 예수를 고발하는 자들은 마음속에 그가 갈릴리에서보다도 유대에서 더욱 성공적이고도 오래 갈 공중 봉사를 시작했다는 사실로 두려움을 일으켰던 수 일 전의 극적인 사건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 이 고발은 비록 지도자들이 빌라도가 믿도록 하려는 뜻에서 한 것은 아니었으나, 사실이 그랬다. 최근 몇 주일 동안, 특히 나사로를 부활시킨 후부터 민심은 예수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에 앞서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침통한 가운데 서로 인정하기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12:19)라고 하였다.

 

6. 갈릴리 사람. 오직 누가만이 예수 재판 시의 사건을 기록한다. 그리스도의 공중 봉사 중 가장 성공적이고 인상적인 부분은 갈릴리에서 있었다.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출생했으나 갈릴리에서 성장했고, 실제적으로 그의 전 생애를 그곳에서 보냈다.

 

7. 헤롯의 관할. 즉 갈릴리와 페래아를 가리킨다(참조 3:1 주석).

 

헤롯에게 보내니. 빌라도는 궁지에 빠졌다. 그는 예수의 무죄를 충분히 인식했고, 이 문제에 대한 결심을 대중 앞에서 발표했다. 예수를 놓아주려는 그의 결심은 구주를 십자가에 못박으려는 유대 당국자들의 결심에 압도당했다. 과거 약 5년간의 임기 동안 유대(그 당시에는 사마리아를 포함함) 총독으로서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없는 사람이 되었으며 따라서 더 이상 그들을 불쾌하게 만들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두려워했다. 그는 유대 지도자들의 배반 행위를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예수에 대한 그들의 증오심은 순전히 악의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예수를 헤롯에게 보냄으로써 난제를 해결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유대 당국자들과 우호감도 유지하며, 동시에 무죄임이 분명한 사람을 죽이는 문제에 대한 책임도 회피할 수 있을 것이었다.

 

예루살렘에 있더라. 헤롯 안티파스는 이두매인과 사마리아인의 혼혈인이었으나, 유대 신앙을 열렬히 따르노라고 공언했고 유월절에 참여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경건한 유대인이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며, 단순히 정치적인 방편으로서 그런 종교의 외양을 유지했다는 뜻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 헤롯은 아마도 하스모내의 관저에 유했을 것이며, 그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참조 제9, 526쪽 지도 예수 당시의 예루살렘”).

 

8. 보고자 한 지. 헤롯은 그 당시 방탕하게 살고 있었다(참조 마 14:3; 6:17 주석). 침례자 요한을 죽인 지 1년 정도가 지났으나(참조 막 6:1, 2 주석), 양심은 이 문제로 그를 계속 괴롭혔다. 처음에는 예수를 부활한 침례자 요한이라고 생각하며 두려워했다(참조 막 6:14, 16 주석). 얼마 동안 헤롯은 예수와 만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참조 9:9 주석).

 

이적 행하심을 볼까. 호기심도 헤롯이 예수와 만나고 싶도록 자극했던 또 다른 동기로 보인다. 그는 병약해진 불구자들을 관저로 데리고 와서 예수에게 그들을 고치면 대가로 놓아주겠다고 약속했다(시대의 소망, 729). 헤롯은 예수가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그가 참 선지자요,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이 그를 대적하여 고발하기를 좋아하던 죄가 없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헤롯의 호기심은 채워질 것이고, 동시에 그는 유대 지도자들이 할 수 있는 어떤 항의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석방하는 데 충분한 근거를 가질 수 있을 것이었다.

 

9. 여러 말로 물으나. 호의와 석방을 약속하는 암시의 표로서 헤롯은 예수의 결박을 풀어 주도록 명했으며,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한 고발 내용들을 제시하기 전에 그에게 오랫동안 질문했다.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예수가 산헤드린과 빌라도 앞에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이유들에 더하여(참조 마 26:63; 27:13 주석), 헤롯이 침례자 요한의 기별을 듣고도 거절했다는 이유 때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헤롯은 하나님이 그의 길 위에 비치도록 허락하신 진리의 빛을 거절했으므로, 이렇게 소망 없이 죄 가운데 강퍅해진 영혼에게 예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침묵은 오만한 군주에게 가혹한 질책이 되었으며, 그가 요청했지만 예수가 이적 행하기를 거부하자 헤롯은 화가 나서 예수에게서 등을 돌렸다.

 

10. 힘써 고소하더라. 이 말은 그들이 크고 성난 음성으로 그렇게 했음을 암시한다.

 

11. 업신여기며. 문자적으로는 그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다즉 그를 모욕했다. 빌라도와 마찬가지로, 헤롯도 예수를 대적하는 고발들이 순전히 악의에 의하여 촉발된 것임을 확신했으나, 예수의 침묵이 자기의 권위를 경시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는 화가 났다.

 

빛난 옷을 입혀. 아마도 이것은 헤롯이 버린 옷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겉으로는 그것이 평상시에 예수가 입던 단순하고 수수한 옷과 비교할 때 저속하면서도 화려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도로 보내니. 산헤드린 앞에서 낮에 심문을 받은 다음에 그랬던 것처럼, 로마 군인들이 간섭하지 않았다면(참조 22:71 주석) 예수는 틀림없이 이곳에 묘사된 야만적인 시위 과정에서 폭도들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헤롯도 빌라도처럼 책임을 회피하고자 예수를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12. 친구가 되니라. 그들은 그들의 불화를 가라앉혔다. 아마도 빌라도와 헤롯 사이에는 여러 해 동안 간헐적인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6. [그를] 때려서. 이는 빌라도가 예수에게 가한 첫 번째 채찍질이었다(두 번째 채찍질에 대해서는 마 27:26 주석을 참조하라). 이렇게 채찍질을 함으로써 빌라도는 사형 선고를 모면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폭도들에게 예수에 대한 동정심을 일으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당시 행해진 채찍질은 죽음을 초래하기도 했다(참조 마 10:17 주석). 하지만 예수를 죽이라는 그들의 열렬한 요구에 이만큼 양보하자 폭도들은 무마되어 잠잠해지는 대신, 그의 피를 보려는 갈증을 더욱 자극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빌라도가 죄 없는 사람을 매질하도록 허용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면, 조금 더 압박할 경우 그의 죽음을 허락하도록 설득될 수 있을 것이었다.

 

19. 민란. 헬라어 스타시스(stasis). 문자적으로는 일어남.” 그러므로 폭동이라는 뜻도 된다.

 

20. 놓고자 하여. 오히려 놓아주기를 바라면서.”

 

21. 저희는 소리질러. 문자적으로는 그들이 계속 외쳤다빌라도 앞에서.

 

23 구하니. 오히려 요구하니혹은 주장하니.”

 

25. 예수를 넘겨주어. 예수는 로마인의 감독 아래 로마인의 사형 선고에 따라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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