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3:1-10, 개정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내용 요약

  1. 앉은뱅이를 고침 (1-10)
    1)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앉은뱅이의 형편 (1-6)
    2) 그리스도를 안 이후의 앉은뱅이의 형편 (1-10)
  2. 베드로의 설교(11-26)
예수님께 바치기에 너무 아까운 것은 없다. 우리가 그분께서 우리에게 지키도록 맡겨 주신 재물의 달란트를 그분께 돌려드리면, 그분께서는 더 많은 것을 우리의 손에 넣어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활동은 모두 그분에 의하여 보상을 받게 될 것이고,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가 완수한 의무마다 우리의 행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게 하시고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심히 사랑하시는 아들을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도록 내어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아버지와 연합되셨지만, 인간을 구원하고 그들을 서로 연합시키기 위하여 그처럼 큰 희생을 치르셨다. 그렇다면, 그 연합을 보존하기 위하여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치르는 어떤 희생을 지나치다고 할 수 있겠는가?
(1보감 446p)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무능함을 깊이 느끼고 겸비와 기도로 그들의 약함을 그분의 능력에, 그들의 무식을 그분의 지혜에, 그들의 무가치함을 그분의 의에, 그들의 빈곤을 그들의 무궁무진한 부에 연결시켰다.” (사도행적, 59)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이름과 관련된 별명이 있나요? 혹은 이름과 관련되어 놀림 받은 적이 있나요?
  2. 부모님의 이름에 욕 먹인 적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있다면 나의 어떤 행동 때문인가요?
  3. 나의 삶과 예수님의 이름과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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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베드로와 요한의 말과 행동을 음미해 볼까요?

    1)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2) 우리를 보라.
    은과 금도 없으면서 우리를 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3)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내가 가진 것 중에서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어떤 것들이 있나요?

    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있나요? 그 이름으로 능력 있게 살고 있나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죠?

    5)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너무나 오랫동안 무력하게 살아온 그는 일어서라는 말뿐만 아니라,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 주어야 했습니다. 내가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줘야 할 사람이 있나요?

  2. 앉은뱅이가 낫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행 3:16, 개정)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1) 병치료를 강조하고 선전하는 교회에 대해 의견을 말해 봅시다.

    2) 참된 병의 치료는 어떤 것일까요?

 

생각해봅시다.

 

  1. 앉은뱅이의 기쁨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이 견딜 수 없는 기쁨이 구원받은 사람의 기쁨이겠죠! 최근 우리생활 속에서 있었던 구원의 기쁨에 대하여 이야기 해 봅시다.)

    ※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뛴 사건을 개기로 그날에 구원받은 사람이 삼천명(행2:41)이나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기쁨과 증거들은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큰 원동력이 됨을 기억하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지나갈 때에 그는 동냥을 하였다. 제자들은 그를 불쌍히 여겼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에게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하였다. 베드로가 아무것도 없다고 하자 앉은뱅이의 얼굴은 낙담의 빛으로 역력해졌다. 그러나 사도가 계속하여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할 때에 그의 얼굴은 희망으로 빛나게 되었다.(행적 58p)

 

사랑과 친절로써 예수님의 이름을 발하면 즉시 하나님의 천사들이 가까이 다가와 심령을 부드럽게 하고 진정시킬 것이다”(문서전도봉사, 112).


기도 시간. 9 즉 오후 3시경(참조 2:15 주석; 10, 55). 이때는 저녁 제사드리는 시간이었다(참조 Josephus Antiquities xiv. 4. 3 [65]). 이 시간은 기도 시간분향하는 시간”(참조 눅 1:9, 10)으로 알려졌다. 조석 제사는 매일 제3시와 제9(오전 9시와 오후 3시경)에 향과 함께 드렸으며 그 시간에 경건한 자들이 성전 뜰에서 기도했다. 정오의 기도 역시 적어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통례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참조 단 6:10; 10:9 주석; 55:17). AD 2세기에 하루 중 세 번째 기도가 일몰 시간에 드려졌다고 알려진 것으로 보아 그 기도도 전부터 관례적으로 내려오던 것으로 보인다. 랍비 문헌은, 이 정확한 기도 시각에 어느 정도 편차가 허용되었음을 보여 준다. 하루 세 번 기도하는 관습은 일찍이 2세기 그리스도 교회에 확실히 나타나는데, 유대인 회당에서 직접 전수한 것으로 보인다(Didache 8). 3세기 초에 많은 그리스도인은 하루 세 시간씩 기도했던 것으로 보인다(참조 Clement of Alexandria The Stromata vii. 7).

 

올라갈새. 올라가고 있었다가 더 나은 표현이다. 진술된 사건은 두 사도가 예배하러 성전으로 들어가는 중에 일어났다.

 

2. 나면서. 이 사람이 고통받은 기간을 세심하게 기록한 것은 누가 특유의 방법이다(참조 9:33; 14:8).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았을 때의 나이는 대략 40세였다(참조 4:22 주석).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 이름은 앉은뱅이에게 생소하지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 실로암 못에서 눈을 뜬 맹인이 있었다(9:7, 8). 베데스다의 중풍병자가 고침받은 일(5:2~9)이 같은 연약함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 사람에게도 알려졌을 것이다.

나사렛은 평판이 나쁜 곳이었다(참조 요 1:46). 요한의 기사에 따르면, 십자가의 팻말에 나사렛이라는 지명이 적혀 있었다(19:19). 예수의 갈릴리적 배경(7:40~42)뿐 아니라, 그가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은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었다. 그것은 앉은뱅이가 베드로의 요구에 반응하는 데 신앙의 큰 시험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불과 몇 주 전에 이 이름으로 불린 사람이 수치를 당하고, 백성을 기만한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 이름을 발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름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구주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는 그렇게 불리는 거룩한 분의 인격과 품성이 표현되어 있다. 경건한 마음으로 그 이름을 불렀을 때 그분의 능력이 나타났다. 그 이름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 이름을 부른 사례가 사도행전에 자주 나타난다(참조 4:10, 12; 9:14; 16:18; 19:5, 13; 22:16). 치유 행위를 할 때 베드로가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그 이름을 말한 것은 주의 약속을 단순하게 믿는 믿음의 표현이었다(16:18). 참조 행 3:16 주석.

 

7. 일으키니. 베드로의 이 몸짓은, 어린아이 같고 어쩌면 이제 막 싹트기 시작했을 앉은뱅이의 믿음에 인정 많은 조력자처럼 다가왔다. 그것은 앉은뱅이의 무력함의 마지막 순간과 자신에게 기적이 일어났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첫 순간 사이의 매우 짧은 틈을 이어주는 도움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베드로가 했던 것처럼 해야 한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 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 주(35:3).

 

발목. 누가는 의사였고(4:14), 따라서 의료 경험이 있는 기자가 여기서 앉은뱅이에게 일어났던 일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다.

 

힘을 얻고. “강하게 되었다가 더 나은 표현이다. 늘어지고 연약한 힘줄과 근육에 활력이 생기고 강해졌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 성경이나 유대 문헌 어디에도 이 이름으로 알려진 문은 없다. 전반적으로 학자들의 견해는 이 문을 성전 경내 동편의 맨 바깥쪽 벽에 있는 수산 문(Shushan Gate)으로 보거나,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통하는 니카노르 문(Nicanor Gate)으로 보는 것으로 엇갈린다. 어떤 이들은 니카노르 문이 남자의 뜰과 여인의 뜰 사이에 있었다고 보았다. 미문이 바깥벽의 한 부분이었는지 아니면 두 뜰 사이에 있었는지는 주로 이 진술에서 사도들이 택한 것으로 생각되는 진입 경로에 좌우되는 것 같다. 누가는 베드로와 요한이 그 문에 이르러 앉은뱅이를 고친 후 성전에 들어갔고, 분명 기도를 드린 후에 솔로몬 행각에서 그 이적에 매료된 무리들을 만났다고 기록한다. 솔로몬 행각은 동편 바깥벽 바로 안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므로(참조 11절 주석), 미문은 아마 바깥쪽 수산 문일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뜰 사이에 있는 안쪽 문이라면, 사도들은 솔로몬 행각에 이르기 위하여 그 문을 통하여 다시 바깥으로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은 감람산에서 성전으로 들어오는 쪽에 있었으며 도성 안에 살고 있던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갔을 방향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처음부터 그 문을 사용했다는 것을 설명하기가 곤란한 것 같다. 마을에서 성전으로 바로 들어가는 다른 문들과 비교해 볼 때, 그 문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걸인이 늘 앉아 구걸할 만한 장소가 되기는 어려웠다. 이런 명백한 난점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사도들이 솔로몬 행각에서 무리를 만나기 전에 미문을 통하여 다시 밖으로 나갔고, 따라서 이 문은 여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 있는 니카노르 문일 것이라는 가정을 지지한다. 요세푸스는 이 문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것, 성전 바깥쪽에 있는 것은 고린도 산() 청동으로 만들어졌는데, 은으로 도금되고 금으로 장식한 문보다 훨씬 가치가 있었다”(War v. 5. 3 [201]). 바로 이 문에 대해 미쉬나는 이렇게 말한다. “니카노르 문을 제외하고 본래의 모든 문이 금문으로 바뀌었는데, 그 문들에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문들의 구리가 [금처럼] 빛났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다고 말한다”(Mishnah Middoth 2. 3, Soncino ed. of the Talmud, 7, 8). 이 모든 증거를 종합해 볼 때 미문은 니카노르 문으로 확인되는 것 같다.

 

11.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베드로와 요한이 나가자 그가 그들을 붙들고 따라 나갔다. 그러자 놀란 사람들이 솔로몬 행각이라는 곳으로 모여들었다라는 독법을 지지하는 본문상의 증거가 있다. 이와 같은 독법은 미문의 위치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며, 비록 원본은 아니지만 미문이 니카노르 문으로 확인되는 것을 지지하는 초기의 증거로 보인다.

 

크게 놀라며. 불과 몇 달 전, 수전절에(10:22, 23) 바로 이 솔로몬의 행각에서 예수가 백성에게 하나님의 일에 대해 설교하였다. 그때의 기억이 두 제자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때 예수가 자신이 그리스도인지 숨김없이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이 불평했으나(10:24~26), 그가 하나님과 하나임을 주장하자 돌을 들어 치려 했다(10:30~33). 이제 그들은 그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 “생명의 주”, 예언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고 선포되는 것을 듣는다(3:14, 15, 18).

 

행각. 헬라어 스토아(stoa). “주랑”(柱廊), “회랑”(回廊). 1성전 건물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에는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대한 언급이 없다. 요세푸스는, 이 행각이 성전 경내의 동편에 위치해 있었으며(Antiquities xx. 9. 7), 높이가 10.6미터쯤 되는 두 줄의 원주(圓柱)들로 인해 두드러지게 보였다(War v. 5. 2 [190])고 말한다. 이 주랑이 솔로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은, 그것이 스룹바벨 시대로부터 옛 건물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헤롯 아그립바 세가 조부의 일을 마무리할 때, 백성들이 그에게 이 행각을 허물고 다시 건축하라고 설득했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12. 왜 기이히 여기느냐. “어찌하여 서서 쳐다보느냐”(1:11)라고 한 천사의 질문과 흡사하다. 두 경우 모두, 기적을 보고 놀란 목격자들에게 그렇게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경건. 혹은 헌신.” 베드로의 말은 어떤 사람의 헌신이 충분하다면,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을 것이며, 위대한 결과가 뒤따를 것(참조 요 9:31)이라는 통념을 마음에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여기서 사도는 그러한 사상을 거부한다. 베드로의 경건 때문에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만이 그 일을 이룰 수 있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문자적으로 왜 우리를 응시하느냐”(참조 1:10 주석). 기적은 베드로나 요한과 같이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권능의 공으로 돌려야 한다.

행 2:42-47, 개정

[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 내용 요약

1. 성령의 강림(행2:1-4)

2. 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행 2:5-13)

3.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행 2:14-41)

4. 성장하는 교회의 부흥 원칙(행 2:42-47)

구주께서 가르치신 원칙과 모든 말씀이 거룩한 아름다움으로 사랑하는 제자의 기억에 간직 되었다. 그의 생애의 만년에 요한이 교회들에게 보낸 증언의 요지는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1, 16)는 말씀이었다.
이것이 초대 교회에 충만한 정신이었다. 성령의 부어 주심을 받은 후에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그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었다(행 4:32, 34, 33).(시대의 소망 550p)

 

  교회는 분기하여 활동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영은 교회가 길을 예비하지 않는 한 결코 임하시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열심히 살피는 일이 먼저 앞서야 한다. 연합하는 정신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허락들을 주장하여야 한다.(기별1 126p)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당신이 활동한 그룹 중 가장 이상적인 그룹은 어떤 그룹이었나?(동아리, 친목모임, 말씀연구모임등)

 

2. 1000명의 사람들이 갑자기 우리교회에 나온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교회에 가장 시급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되는가?

 

3. 교회생활 중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4. 내가 가장 많이 시간을 할애하여 집중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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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교회는 다음과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까? 혹시 부족한 점이 있다면 어떤 것들일까요?

   1) 사도의 가르침 (말씀)

   2) 서로 교제하여 (성도의 따뜻한 교제)

   3) 떡을 떼며 (간단한 음식 나눔)

   4) 기도하기에 전혀 힘쓰며 (기도 모임)

   5)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 (이타적 구제)

   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성전을 사모, 집회)

   7)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미 (내적 기쁨이 있는 그리스도인 생활)

   8)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세상이 빛이 되는 생활)

 

 

생각해봅시다.

1. 초대교회가 갖추고 있는 공동체의 모습 중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할까요?   

 

2. 오늘날에도 초대교회와 비슷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많은 청소년들은 말하기를 “난 교과를 공부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몇 푼의 돈을 더 벌려고 모든 시간을 바친다. 노동에 밀어 넣은 이 시간을 성경을 연구하고 그 교훈을 실행하는 데 사용한다면, 과도한 노동으로 번 돈보다 더욱 많은 것을 저축할 수 있다. 이는 필요 없는 치장에 사용되는 많은 비용이 절약되고 경건의 신비를 이해하는 마음의 힘을 저장해 주었을 것이다.(안교 20p)

  참된 신앙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그렇게 어렵진 않지만 시간이라는 비용이 지불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시간의 비용을 지불한 마음이 있나요?

 


42. 가르침. 갓 침례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고, 각각의 무리들은 여러 방언으로 전하는 기별에서 유익을 얻었다. 그 사도의 첫 가르침은 그리스도에 관한 추가적인 교훈으로 계속하여 보충되었을 것이다. 그와 같은 모든 교훈이 여기의 “가르침”이라는 용어에 다 포함될 수 있다. 사도들이 모종의 “신조”를 공식화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교제. 헬라어 코이노니아(koino-nia). 「개역한글판」에는 “교제”(고전 1:9; 빌 1:5), “사귐”(요일 1:3, 6, 7), “참예”(고전 10:16; 빌 3:10), “교통”(고후 13:13), “동정”(롬 15:26), “연보”(고후 9:13), “나눠주기”(히 13:16) 등으로 번역되었다. 여기서는 사도들과 회심자들 사이에 생긴 형제애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떡을 떼며. 주의 만찬(참조 고전 10:16)과 일상적인 친교의 식사(참조 행 2:44, 46)를 모두 포함할 것이다. 

“떡을 떼며” 혹은 그와 유사한 표현이 마 14:19; 15:36; 막 8:6, 19; 눅 24:30, 35에 있는데, 분명히 이 경우들은 주의 만찬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식사하다”는 말을 일반적으로 “떡을 떼다”라고 관용적으로 말한다. 마 26:26; 막 14:22; 눅 22:19; 고전 10:16; 11:24에서는 명확하게 주의 만찬을 가리킨다. 행 2:42, 46; 20:7, 11에서는 두 가지를 다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떡과 함께 잔이 언급되지 않는다고 해서 주의 만찬을 가리킬 가능성이 반드시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문맥상 꼭 그렇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떡을 떼다”라는 표현이 종교적 행사를 기술하는 여러 경우에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41절은 “그 말”을 받는 신자들이 “침례를 받고” 교회에 “제자의 수가” 더한 것을 묘사한다. 따라서 이 절에서 언급된 “떡을 떼며”라는 표현 역시 특별한 종교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참조 행 20:7; 고전 11:20, 21 주석.

 

기도. 참조 1:14 주석. 여기에 새로운 그리스도인 사회의 생활에 적용되던 네 가지 기본적인 요소가 있다. (1) 신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진리를 점점 더 깨닫게 되었다. (2) 그들은 공동 예배와 상호간의 친절과 선행을 통하여 서로간에 그리고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었다. (3) 그들은 아마도 성만찬을 포함하는 “떡을 떼”는 일에 참여했다. (4) 그들은 개인적으로나, 연합하여 기도하는 일에 참여했다.

 

전혀 힘쓰니라. 헬라어 프로스카르테레오(proskartereo-). “꾸준히 하다”, “끊임없이 관심을 쏟다.” 이 말은 오순절 이후의 이야기와 그 후에도 계속되는 신자들의 기도 생활을 포함한다(참조 3:1 주석).

 

43. 사람마다. 신자들과 불신자들에게 똑같이 두려움이 임했음이 분명하다. 이전 두 달 내내 예루살렘은 시련의 시간을 보냈다. 예수의 사역은 절정에 이르렀었고, 대중적 관심이 그에게 모아졌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났다. 제자들은 대담하게 그의 부활과 승천을 선포했다. 그 후 놀랄 만한 오순절 사건들이 일어났다. 성령의 강림은 하늘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에 대한 증거로 제시되었다. 비신자에게 미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영향은 수천 명을 회개와 침례로 이끌었다. 여기에 예루살렘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키는 주된 이유가 있었다.

 

44. 함께. 이것은 신자들이 실제적으로 함께 모인 것을 가리킬 수도 있고, 영적 연합을 가리킬 수도 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당시의 유대인 생활에서 물건을 통용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다. 연례 절기에 오는 방문자들은 종종 예루살렘에 있는 친구들로부터 그들의 필요를 제공받았다. 하지만 누가의 진술에는 이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스스로를 의지하도록 내팽개쳐졌으며, 그리하여 새로운 경제 체제 곧 그리스도인 경제 체제가 세워졌다. 하지만 이것이 소위 기독교 사회주의라는 제도의 설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아마도 요 12:6; 13:29의 “돈 궤” 즉 공동 자금 관리의 연장이며 확장이었을 것이다. 새 회심자들은 그리스도와 상호간에 대하여 새롭게 발견한 사랑과 주께서 곧 다시 오실 것에 대한 열렬한 기대(행 1:11) 때문에 그들의 물질적 소유를 나누어 쓸 준비가 더 잘 되어 있었을 것이다. 나누어 쓰는 데는 어떤 강제도 없었다(5:4). 이는 주의 말씀(눅 12:33)의 문자적인 성취이며, 확립된 사회에서는 매우 당연한 행위로서, 자기 이익과 경쟁의 법칙이 아니라 동정과 자기 부정의 법칙에 기초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성령은 특별한 은사들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사랑의 방법을 통해서도 그의 능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교회가 기회 있을 때마다 분명히 보여 준 관대한 자선 행위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생활 방식이 교회 안에서 얼마 동안이나 계속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 하지만 동시에 교회는 재정을 분별 있게 사용하는 방법을 배웠다(살후 3:10; 딤전 5:8, 16). 예루살렘 교회는 행 11:29에서 볼 수 있듯이 여러 차례 이방 교회들의 자선금에 의지하였다.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가 빈궁해진 것이 이전 여러 해 동안 의연금을 낭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그 교회가 겪은 가혹한 박해와 기근 때문이었다(참조 행 11:27~30; 롬 15:26; 고전 16:1~3 주석).

 

45. 재산. 헬라어로 크테마타(kte-mata), “소유물”, 땅과 같은 부동산(不動産)이란 의미의 재산.

 

소유. 헬라어로 휘파르크세이스(huparxeis), “소유물”, 동산(動産)이란 의미의 개인적 소유물.

 

팔아. 더 나은 번역은 “팔고 있어서” 또는 “팔곤 하여.” 재난을 당하는 특별한 경우가 생겨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도와줄 경비 지출이 요구될 때는 파는 일이 있었다.

 

각 사람. 모든 믿는 사람.

 

필요를 따라. 신중한 분별력이 내포되어 있다. 도움은 필요의 정도에 달려 있었다. 체계적인 구호 방안이 신속히 준비되었다(참조 6:1~6 주석).

 

나눠주고. 즉 “나누고”, “분배하고.” 그들은 소유물을 팔아 생긴 수입을 분배하였다.

 

46. 날마다. 새 신자들의 공적 헌신이 끊이지 않았다.

 

성전에. 관원들이 정죄하여 죽게 한 분을 따르는 자들은 성전을 피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오순절 전에도 그곳에 자주 출입하였다(눅 24:53). 성전은 그들이 그들의 주님을 메시야로 알기 이전보다 그들에게 더 소중했을 것이다. 그분을 통하여 제자들은 성전의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것을 배웠다. 제자들이 성전 안에서 가르치고 예배드리도록 허용되었다는 것도 이상해 보일 것이다. 사실 얼마 후에는 그렇게 하는 일이 금지되었다. 성전의 뜰은 그곳의 평온을 깨뜨리지 않는 이스라엘인들이라면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렇게 된 이유의 일부는 산헤드린에 니고데모, 아리마대 요셉, 가말리엘과 같은 위원들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들은 신앙을 받아들일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교회는 거룩한 생활과 관대한 구제 활동으로 대중에게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었을 것이다. 제자들로서는 그들의 종교를 유대교에서 이탈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완성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습관과 욕심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복음으로 이끌리는 것을 보고자 하는 희망에서 한 혈통인 유대인 형제들(3:1)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참조 3:1 주석.

 

집에서. (「제임스왕역」에는 “from house to house”[집에서 집으로]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그리스도인들은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공동체 생활의 특별 행사 즉 떡을 떼고 서로 음식을 나누는 일은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하였다.

 

기쁨. 헬라어로 아갈리아시스(agalliasis), “환희”, “극도의 기쁨.”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특권에 대하여 기뻐하였다.

 

순전한. 헬라어로 아펠로테스(aphelote-s). 문자적으로 “돌멩이가 없는”이라는 뜻이며, 부드러운 땅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품의 단순함, 진정한 자선, 관대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서가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나타났을 것이었다.

 

음식을 먹고. 떡을 떼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생활에 밀접히 연관되었던 것이 분명하다(참조 행 2:42; 고전 11:20~22 주석).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누가는 이 구절을 자주 사용했다(참조 눅 2:13, 20; 19:37; 행 3:8, 9). 새롭게 발견한 신앙 안에 있는 기쁨은 당연히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케 했다.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은 언제든지 주님을 찬양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발견한다.

 

칭송을 받으니. 예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교회도 비슷한 호의를 누렸는데, 이는 교회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선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께서. 교회는 믿음을 향한 큰 진보가 자신들 때문이 아니라 주님 때문임을 깨달았다.

 

구원받는 사람을. 헬라어로 호이 소조메노이(hoi so-zomenoi), “구원을 받고 있는 사람들.” 「제임스왕역」에는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러한 번역은 아마도 번역자들의 신학적 신조를 무의식적으로 반영한 것이겠지만, 헬라어로는 지지를 받지 못한다.

 

더하게. “더하고 있도록” 또는 “계속해서 더하게.” 이 말은 오순절이 지나서도 계속 더해졌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취지는 바로 앞에 사용된 “날마다”라는 말에 의하여 더욱 강화되고 있다.

행 2:1-13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하나님은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를 섬길 마음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 속에 새 생명을 불어 넣으실 수가 있다. 그리고 제단에서 가져온 핀 숯불을 입술에다 갖다 댈 수가 있으시다. 그리고 힘찬 음성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할 수가 있으시다. 수천의 음성들이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들을 능력 있게 말하게 될 것이다. 더듬거리던 혀가 풀릴 것이며, 겁쟁이들은 용감한 사람들이 되어 용기 있게 진리를 증거할 것이다. 주여, 당신의 백성들을 도우사 영혼의 전에서 모든 더러운 것을 청결케 하사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케 하옵소서! 이는 늦은비 성령이 쏟아져 내릴 때 그들이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함이니이다!”(리뷰 1886. 7. 20). 

 

 태초부터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류를 위한 당신의 목적을 성취시키는 일에 인간 도구들을 통하여 당신의 성령으로 역사해 오셨다.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자신이 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2. 외적으로 드러나는 기적적인 일들이 내 신앙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3. 내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변화(갈5:22,23: 성령의 열매)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성령은 어떤 분이시며 하시는 일은 어떤 것입니까? 

    1) 하나님 (행 5:9, 7:51, 8:29,39, 13:2,4)

    2) 보혜사 (요 14:26, 16:13,14, 16:8)

    

2. 성령을 받은 사람의 상태에 대하여 이야기해봅시다. 

                        

참조   흔히 성령을 받은 사람은 가슴이 뜨겁고 입이 회하며 황홀경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르치지만 그것은 성서적이 아닙니다. 성령 받은 증거로 방언을 말하거나 황홀경을 경험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위험한 신앙이 될 것입니다. 왜 위험한지 서로 이야기해 보십시오.

  특별한 환경하에서 영적인 황홀을 나타낸다고 해서 그것이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다. 성결이란 황홀경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복종이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요,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요, 빛 가운데처럼 시련과 어두움 중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요, 보는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는 것이다.(행적 52p) 

  

3. 오순절에 여러 은사 중 왜 방언의 은사를 주셨으며, 방언의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일까요?(행 2:5-13)

 

 

생각해봅시다.

1. 우리교회에 특별히 필요한 성령의 은사(고전 12:1-11)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2. 성령이 우리에게 주실 변화는 무엇인지 각자 이야기해 봅시다. 

 

3. 오늘날 일반개신교회에서 성령임재의 증거로 말하는 방언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주께서는 초기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으신 후에도 하늘에 있는 그 저장고를 잠구어 놓지 않았다. 우리도 그의 축복을 충만하게 받을 수가 있다. 하늘은 은혜의 보화로 가득차 있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은 그분이 약속하신 모든 것을 주장할 수가 있다. 우리가 그분의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나태하고, 무관심하고, 게으르기 때문이다. 죽음과 같은 이 형식주의에서 벗어나야한다(리뷰 1889. 6. 4). 


1. 오순절. 헬라어 펜테코스테스(pente-koste-s). “오십 번째”를 나타내는 형용사적 표현으로, 무교절의 시작으로부터 첫 열매를 드리는 축제일(칠칠절[七七節] 또는 오순절[五旬節])까지의 오십 일간을 의미한다. 오순절 날짜는 유월절 날짜에 따라 정해진다. 유월절은 니산월 14일에 지켜졌다. 15일은 무교절의 시작일이며, 16일에는 (보리 수확물의) 첫 열매 한 단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 드렸다(레 23:5~11). 포함식 계산법에 의하여, 16일부터 시작하여 7주일(週日)에 하루를 더한 50일째 되는 날이 (밀 수확물의)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初實節]인데, 이날은 또한 칠칠절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그 사이에 7주일이 끼어 있기 때문이다(레 23:15, 16). 이 절기가 바로 후에 오순절로 알려진 절기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해의 니산월 16일이 일요일이었으므로(참조 마 26장에 관한 추가적 설명, 설명 1), 그 날을 포함하여 7주일에 하루를 더한 날, 즉 50일이 되는 날인 오순절도 일요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일요일에 신성성을 부여할 만한 성경적인 지지는 어디에도 없다(참조 w/28/1e 주석).

 

저희가. 아마도 120명과 그에 합류한 다른 신자들을 말하는 것 같다.

 

다같이. 그들의 주께서는 보릿단 요제(搖祭)를 드리는 날에 부활하셨는데, 이것은 부활의 “첫 열매”(고전 15:20, 23)인 자신을 표상하는 것이었다. 그는 40일에 걸쳐 지상에서 그들과 반복해서 접촉했다. 그들이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날까지는 열흘이 더 남아 있었다. 이 약속은 무엇을 초래할 것인가? 기대에 찬 열흘은 진지한 기도의 열흘(1:14)이었으며, 연합된 갈망으로 드려진 기도의 기간이었다(사도행적, 36, 37,). 이러한 연합은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과의 특별한 경험을 열망하거나 그의 능력을 나타내시기를 기대할 때 그들을 특징지어야 하는 연합이었다. 그와 같은 연합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제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성령을 가로막을 것이다.

 

한곳에. 이곳은 아마도 최후의 만찬을 나누었던 바로 그 큰 다락방일 것이며(눅 22:11~14),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에 제자들이 숨었고, 주께서 승천하신 후에 되돌아온 곳과 동일한 장소일 것이다. 

 

2.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문자적으로는 “앞으로 불어 닥치는 격렬한 바람 같은.” 그것이 실제적인 바람이 아니라 바람과도 “같은” 또는 바람과 “흡사한” 것이었음을 주목하라. 이 경험을 겪은 사람들은 그것이 마치 바람과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바람”(프노에[pnoe-])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신약에서 오직 여기와 17:25에서만 사용되었는데, 후자에서는 “호흡, 숨”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70인역」에서도 이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누가가 프노에(pnoe-)를 선택한 것은 제자들이 이제 막 경험할 것이며, 주가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했을 때의 그 감동을 회상시키려 했음이 틀림없는 그 초자연적인 “호흡”을 묘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들은 한 번 더 경외심을 일으키시는 거룩한 감동, 거룩한 “호흡”을 느꼈다.

 

소리. 헬라어 에코스(e-chos). “소리”, “잡음.” 영어 단어 “echo”(메아리)는 여기서 왔다. 누가는 복음서에서 이 단어를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라고 묘사하는 데 사용했고(21:25), 히브리서 기자는 시내산에서 나는 나팔 “소리”에 사용했다(히 12:19).

 

가득하며. 동사의 주어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원문의 문맥상으로는 무엇이 “가득”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개역한글판」은 “소리”나 “바람”이 가득했던 것으로 번역하였다. 하지만 다수의 주석가들은 “바람” 즉 성령이 가득했다고 주장한다(참조 요 3:8).

 

3. 불. 실제적인 불꽃이 아니라 “불 같은 것” 또는 “불을 닮은 것”이다(참조 2절의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성경에서 신성과 불은 자주 연관되어 나타나는데(참조 출 3:2; 신 5:4; 시 50:3; 말 3:2),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이 지닌 힘과 영광과 정화시키는 효력 때문이다. 침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가 “성령과 불로”(마 3:11) 침례를 베풀 것이라고 약속했다.

 

혀같이 갈라지는 것. 더 나은 표현으로는 “스스로 갈라지는 혀들” 또는 “갈라지는 혀들.” 헬라어 표현은 최초의 불덩이가 여러 작은 혀로 나뉘어, 기다리던 사람들 각자에게 임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혀”라는 비유적 표현은 성령이 신자들에게 내려주신 방언(方言)의 은사를 감안할 때 적절한 것이었다.

 

4. 성령. 구약에는 하나님의 영에 대한 명백한 언급이 많이 있다. 그러나 구약에 나타난 성령의 어떠한 현현(顯現)도, (1) 그분의 명확한 신원, (2) 충만히 부어짐, (3) 그에 잇따른 결과 등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리하여 이 날이 때때로 교회의 생일이라 불린다. 예수의 성육신 동안의 생애, 그의 탄생, 침례와 성령을 받은 일, 십자가에 못박힘, 부활, 승천 등에 나타난 위대한 사건들은 극히 중요했으며, 구원의 계획을 전개하는 데 중심이 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오순절에 있은 성령의 부음은 그리스도의 위대한 희생을 하늘이 받으심과, 그가 아버지와 함께 보좌에 즉위한 사건에 연이어 일어났다(참조 사도행적, 38, 39,). 성령의 부음으로 교회는 권능을 받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전에 시도된 적이 없었던 일, 즉 천하만국에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충만함을 받고. “아버지의 약속”(참조 1:4, 5 주석)의 성취와 열흘간 기도하면서 기다린 일의 결실이 여기에 있다. 제자들은 성령을 간구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눅 11:13). 부활한 날 밤에 그리스도는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말했다. 약속된 성령은 그들의 존재의 내면 깊숙한 곳에 퍼져, 그들의 모든 능력이 강하게 활동하도록 자극하면서 그들 위에 임했다. 이제 그들은 방언의 은사와 함께 자기의 말이 아닌 말로 말하고 또 생각하면서(참조 벧후 1:21) 선지자들의 경험으로 들어갔다.

 

말하게 하심을 따라. 헬라어 아포프쏀고마이(apophtheggomai), “말하다, 표명하다.” 「70인역」에서 이 단어는 예언하는 것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대상 25:1; 겔 13:19; 슥 10:2). 여기서 이 단어는 그 연설이 하루에 3,000명을 회심하도록 이끈 명쾌하고 고매하며 활력이 넘치는 것이었다는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오순절과 “이른비”의 연관성에 관해서는 욜 2:23 주석을 참조하라.

헬라어 동사 시제는 “계속 주셨음”을 시사하는데, 이것은 필요가 생길 때마다 말하는 사람 개개인에게 말씀을 주시는 성령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제자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무리들에게 번갈아 가면서 연설했고, 전체 군중에게 한 베드로의 설교(14~36절)는 그들의 기별을 요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른 방언. 그들의 모국어와는 다른 방언. 이곳과 11절에서 “방언”으로 번역된 헬라어 글롯사이(glo-ssai)는 주로 말을 하는 기관(器官)을 가리키지만 종종 언어와 관련하여 사용된다.

외국어를 말하는 능력은 복음 기별을 전 세계에 전하는 특별한 목적으로 제자들에게 주어진 은사였다. 세상 사방에서 온 순례자들(참조 9~11절 주석)이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다. 이들은 흩어진 유대인으로서 성전 봉사에 참여할 수 있을 만큼의 히브리어는 이해했을 테지만, 제자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아람어를 알아듣지는 못했을 것이다. 순례자들과 그들을 통해 기별을 받아들일 사람들을 위해, 성령은 제자들이 순례자들에게 그들의 모국어로 유창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것은 하나의 중요한 이적이었으며, 주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약속 중 한 가지를 성취하는 것이었다(참조 막 16:17 주석). 이것은 그날의 큰 수확을 거두는 데 일조(一助)했고(행 2:41), 이후로 여러 해 동안 세계적인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 

 

5. 경건한. 이 단어는 시므온에게 사용되었다(눅 2:25). 이 단어의 일차적인 의미는 사려 깊은 행동과 신성한 사물을 주의 깊게, 경건하게, 예배하는 마음으로 다루는 성향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로 보면, 여기에는 혈통상의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개종한 사람들도 포함될 수 있다. “천하 각국으로부터”라는 표현이 이와 같은 결론을 불가피하게 한다. 이 단어는 행 8:2에 다시 나온다.

 

천하 각국으로부터. 오순절 경험으로부터 두 세대 후 헤롯 아그립바 2세는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에게 반역하는 일을 막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한 그의 유명한 연설에서 “세상에는 우리 민족이 조금이라도 포함되지 않은 백성은 없다”(Josephus War ii. 16. 4 [399])라고 선언했고, 야고보도 그의 영감적인 편지서를 “널리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약 1:1) 써 보냈다. 이와 같은 유대인들의 이산(離散)은 일차적으로 그들이 겪은, 다음과 같은 대규모의 유수(幽囚) 때문이었다. (1) BC 722년에 열 지파가 앗수르와 메대로 잡혀감(왕하 17:6), (2) BC 605년부터 3차에 걸쳐 이루어진 유다 지파의 바벨론 유수(참조 대하 36:1~21; 렘 52:1~30; 단 1:1~7 주석), (3) 마게도냐의 프톨레마이오스 소테르(Ptolemy Soter)에 의하여 다수의 사람들이 애굽으로 끌려감(Josephus Antiquities xii. 1. 1 [6, 7]). 유수로 흩어진 유대인들에 더하여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상업적인 활동에 끌려 세계의 방방곡곡에 퍼져 살게 되었다.

 

7. 갈릴리 사람. “갈릴리 사람”이라는 명칭은 경멸적으로 사용된 것 같다. 왜냐하면 갈릴리 주민들은 교양이 없었기 때문이다(참조 마 2:22; 4:15; 26:73 주석; 시대의 소망, 232). 그러므로 갈릴리 사람들이 외국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더욱 더 놀라운 일이었다.

 

우리가…각 사람의…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이것은 분명히 복합적인 진술이다. 여기서 기자는 다음에 열거되는 다양한 국적들을 가진 대표자들로부터 들은 수많은 말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놀란 청중이 진술한 사실은, 언어가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할 것에 대한 맛보기이자 보증이었다.

 

8. 각 사람의 난 곳. 누가는 마치 그가 마음속으로 로마 제국 전체를 조망하고 있듯이, 민족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데 소속된 순서를 따르고 있다. 그는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하여 처음에는 동쪽, 다음에는 북쪽, 서쪽, 남쪽의 순서로 옮아간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천하 각국”(2:5)이라는 말이 사실이 되었다. 흩어진 유대인들(참조 제10권, 66, 67; 요 7:35; 행 6:1)은 일반적으로 네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 같다. 이 부류들은, 누가도 그 일부를 언급했지만, 다음과 같이 나누어진다. (1) 바벨론과 기타 동부 지역에서 온 사람들-바대인, 메대인, 엘림인, 메소보다미아 거주자들, (2) 수리아와 소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유대, 가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3) 북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애굽,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의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 (4) 로마에서 온 사람들-로마에서 온 나그네들. 그러므로 이 목록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도식에 따라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13. 새 술. 헬라어 글류코스(gleukos). 오순절이 6월에 있고, 새 포도는 8월까지 익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새로운 술”이 아니라 “달콤한 술”을 말한다. 여기서는 분명히 취하게 하는 음료를 의미한다. 조롱하는 자들의 비난은 제자들의 어조(語調)와 태도에 흥분하게 하는 요인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만약 그들이 모두 조용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로 말했다면 참으로 이상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그들 위에 임했고, 그들의 주제는 크나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행 1:1-12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해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그리스도께서 땅에서 승천하셨을 때에 그는 지금껏 자기를 믿어온 사람들, 그를 믿을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시리라고 결심하셨다. 어떤 선물을 주셔서 은혜의 보좌로 승천하시는 그분을 아주 돋보이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실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의 엄위하심과 왕의 풍모에 합당한 것이 되어야 하였다. 그분은 신성의 제 삼위되시는 성령, 곧 그분의 대리자를 보내실 작정이었다. 이 선물은 그렇게 썩 좋은 선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분은 한 선물 속에다 모든 선물을 다 포함시킬 작정이었기 때문에 회개시키는 능력이시요, 빛을 비추어 거룩하게 하시는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의 영을 그의 선물로 주셨다. (안교 1905. 11. 28).

 

1 은 복음서와 사도행적을 이어주는 다리이며 역사적인 전환의 장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그 힘없는 갈릴리의 어부들이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키는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되었는지 그 비밀을 제 일장에서 찾아봅시다.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은 무엇인가요?

  2. 기억에 오래 남는 장면을 이야기해 봅시다.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데오빌로는 누구입니까? (눅1:3)
    데오빌로(Theophilus)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2.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며칠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셨으며 그 동안에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막 16:12~18)

    참조 사십 일. 문자적으로는 40일 “내내” 또는 “동안.” 예수는 계속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머문 것이 아니라, 부활 후의 기간 동안에는 반복적으로 자신을 나타냈다(참조 마 28장). 이 40일과 복음서에 있는 누가의 매우 축소된 이야기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들(1:4, 5, 7, 8,)을 음미하면서 그 뜻을 깊이 생각해 봅시다.

    참조 성령은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이 성령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성령의 지배하에 있는 사람들이 받은 바 능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때 그것은 전신을 감전시키는 보이지 않는 전선을 붙잡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자원은 참으로 한이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다 깨달았으면 좋겠다!

생각해봅시다

  1. 약속된 성령이 임하는 조건이 있을까요? 성령이 임하면 어떤 일이 우리 삶에 일어날까요?

  2.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전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지금 당신 곁에 계시다면 개인적으로 당신에게 당부하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3. 내가 상상하는 예수님의 재림의 장면은 어떤 것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예수께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내 증인이 되리라하셨다. 세상을 경고하는 것은 성령과 산 증인의 연합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의 일꾼은 하늘의 기별을 통과시키는 대리자이다. 그리고 성령은 진리의 말씀에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한다.


1. 데오빌로.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의 친구.” 데오빌로라는 이름이 어떤 사람을 지칭하기보다는 누가가 그리스도인 전체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했다는 보편적인 주장을 지지해 주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각하라는 호칭은 이 사람이 실제 인물이었음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데오빌로(Theophilus)는 그의 헬라식 이름이 시사하는 대로 개종한 이방인이었을 것이다.

 

먼저. 문자적으로는 첫 번째로서, 현재의 작품이 일련의 작품들 가운데 두 번째 것임을 시사해 준다. 누가에 의하여 기록된 복음서는 분명히 먼저 쓴 글이다(참조 제10, 171, 172).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예수는 말과 일에 능했다(24:19). 여기에 언급된 일이란 그분의 이적들을 가리킨다(10:38). 예수의 가르침과 행함에는 권세능력이 똑같이 함께 했다(참조 눅 4:32 주석). 저자는 이러한 이중적인 활동을 이제 자기가 막 쓰고자 하는 책에서도 보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시작하심. 헬라어 아르코마이(archomai), “시작하다는 누가복음의 특징적인 말로서, 30번 나온다. 사도행전에도 나오는 이 말은 누가가 이 책의 저자임을 자연스럽게 입증해 준다.

예수가 친히 시작한 복음 사업이 사도행전에서는 교회의 사업 가운데 역사하는 성령을 통하여 이뤄져 나간다.

 

2. 사도들. 헬라어 아포스톨로이(apostoloi), “보냄을 받은 자라는 말로서, “떨어져”, “멀리라는 뜻의 아포(apo), “보내다는 뜻을 가진 스텔로(stello-)의 합성어이다. 고전 헬라어에서 아포스톨로스(apostolos, 복수형은 아포스톨로이[apostoloi])는 선박을 급파하거나 해군이 원정을 떠나는 일과 관련되어 자주 사용되었고, 또한 소함대(小艦隊)의 사령관이나 대사(大使)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자기 제자들을 사도라고 부를 때, 예수께서는 아마도 셸리하(selih.a’)라는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어 분사 샬루아흐(saluah.), 보냄을 받은 []”에 해당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들은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전문 용어로 사용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성령으로. 이 표현은 성령이 제자들을 인도하여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이끌었음(16:13)을 뜻하거나, 예수는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이나 후에 성령이 충만했던 분이었음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와 관련된 모든 일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음을 고려해 볼 때 후자를 가리킨 것이 분명한데, (1) 그의 잉태(1:35), (2) 그의 침례(3:21, 22), (3) 그의 의(), 즉 그의 의로운 생애가 나타남(딤전 3:16), (4) 그의 봉사의 생애에 나타난 성령의 지도(4:1; 참조 2:49 주석), (5) 그의 이적(12:28), (6) 그의 부활(벧전 3:18) 등이 그러하다.

 

3. 확실한증거. 헬라어 테크메리아(tekme--ria). “증거들즉 단지 그럴 듯하다든지 우연히 그러한 상황이 되었다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분명한 확신을 가져다주는 증거를 말한다. 확실한 증거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들(2:22)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에 나타나신 사실을 가리킨다. 그들은 부활이라는 최고의 이적을 확인했다. 이러한 증거는 다음과 같은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1) 그가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심, (2) 그들에게 만지도록 허락했던 그의 실제적인 몸, (3) 한번은 500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나타났던 것처럼, 그가 거듭하여 가시적(可視的)으로 나타남, (4) 천국의 성격과 교리에 관한 그의 가르침. 부활의 확실성은 제자들이 전하는 기별에 역동적인 능력을 주었다. 그것은, 구속받은 자들이 육체적으로 부활하리라는 확신에 대한 바울의 장엄한 논증의 기초가 되었다.

 

4. 같이 모이사. 헬라어 쉬날리조(sunalizo-). 문자적으로 소금을 넣다”, 따라서 함께 먹다또는 함께 모이다”, “회합하다.” 이것은 아마도 갈릴리에 있었던 모임을 가리키는 것 같다(28:16~18). 왜냐하면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모습을 제자들이 보았던 마지막 모임에 대한 언급이 행 1장에서 에 와서야 비로소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그들은, 구주가 그토록 자주 봉사하던 그곳, 그가 마침내 고난을 당하고 장사되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그 수도(首都)로 돌아가야 했다. 그곳에서 그의 제자들은 능력을 받고, 그곳에서 그들은 그들의 증거를 시작해야만 했다(사도행적, 31, 32,).

 

기다리라. 제자들이 당면한 과업은 단지 인간적인 수단만으로는 이행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1) 지정된 시간까지, (2) 지정된 장소, 곧 가장 위험하고도 가장 도전적인 장소인 예루살렘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제자들은, 베드로와 다른 이들이 조금 전에 한 것처럼 고기 잡으러 가(21:3) 대신에 기다려야만 했다. 그들은 (1)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열렬히 기대하고, (2) 그 능력을 크게 갈망하여, 그것을 받기 위해 준비하며, (3)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성취하도록 간절히 연합하여 기도해야만 했다.

 

5. 성령으로. 성령의 침례는 침례자 요한에 의하여 약속되었다(참조 마 3:11). 그 약속(1:4)은 약속이 주어진 지 몇 날이 못 되어”, 즉 오순절에, 물로써가 아니라(참조 마 3:6, 11 주석) 성령으로 말미암아 받는 침례를 필요로 했다.

 

6. 모였을 때. 이것은 주의 뜻(4)에 순종하여 그리고 서로 단합하여 예루살렘에서 모였던 때를 가리킨다. 비록 뜻밖의 초자연적인 출현이라는 언급은 없지만, 예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셨다. 이날은 주께서 승천하신 날이었으므로(16:19; 24:50, 51; 고전 15:7), 그 모임은 제자들이 그들의 주와 함께하는 마지막 집회였다.

 

이스라엘. 제자들은 그때까지도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된 메시야의 통치가 유대인의 민족적인 통수권이 회복됨으로써 이루어지기를 추구하였다. 사실 유대인들이 다윗의 자손[예수]을 거절함으로써 메시야의 왕국을 상실하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그들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그를 거절한 것은, 그가 와서 유대인들이 정복하는 세상을 만들지 않고, 보편적인 의의 왕국을 세우려 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조건적이었던 신분인 선택된 백성의 지위를 그 민족이 거절한 일은 너무나도 근래에 일어났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이 아직도 깨닫지 못했던 사실은, 비록 유대인들이 개별적으로 참된 이스라엘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그루터기에 접붙임을 받을 수 있기는 하지만, 유대 민족은 이와 같이 다윗의 자손[예수]의 통치를 거절했기 때문에 더 이상 선택된 백성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인종이나 국적 또는 지위에 의한 차별이 전혀 없다.

 

주께서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달리 표현하면, “주께서 이때에 회복하십니까?” 그 때까지도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나라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들이 기대하고 있던 것과 같은 종류의 회복을 약속한 것이 아니었다(참조 눅 4:19 주석). 그들은 예수가 로마인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24:21)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에야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그것이 다른 구속임을 깨달았다(2:37~39). 예수의 승천과 그에 뒤따른 오순절 경험은 그들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으며, 마침내 그들은 그들의 선생이 가르치는 나라의 영적인 본질을 이해하게 되었다.

 

7. 때와 기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살면서, 예수는 자기가 올 날짜와 시간을 알지 못했다(참조 마 24:36 주석). 여기에는 부드러운 책망이 있는데, 그것은 (1) 아직 모든 지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자들(16:12), (2) 그들의 주()가 맡긴 사명을 이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지식을 가진 자들(28:19, 20) 그리고 (3) 징조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도함을 받을 자들을 위한 것이다.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하나님은 시간의 종이 아니요 시간의 주관자이다. 그의 지식은 시간을 초월하는데, 그는 전지(全知)하여 모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의 선지성(先知性)은 그의 신성에 대한 증거이다(46:9, 10). 그는 자기가 뜻하는 바를, 자기를 섬기는 자들과 함께하신다.

 

8. 권능. 헬라어 뒤나미스(dunamis), “”, “수완”, “능력”(참조 요 1:12 주석). 영어 단어 “dynamite”(폭약)는 뒤나미스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누가는 성령이 임한 자들만이 받을 수 있는 초자연적인 권능을 말한다(참조 눅 1:35; 24:49 주석). 이 능력은 증거를 위한 것이다. 이것은 (1) 내적인 능력과, (2)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능력과, (3)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능력을 준다. 이런 능력을 받은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는 자기가 지상에서 시작한 사업을 계속할 것이며, 그가 한 일보다 더 큰 것도”(14:12) 이룰 것이다. 성령이 주는 이 증거는 기독교회의 특징적인 표지가 될 것이었다.

 

증인. 헬라어 마르튀레스(martures). 다른 어떤 수단을 통해 자신이 보거나 들었거나 알게 된 것을 확증하거나 확증할 수 있는 사람. 이 단어는 사도행전에서 13번 사용되었다. “증인으로서 사도들은 그리스도가 예언된 메시야이며, 인류의 구속주임을 알았다. 그들은 또한 그의 재림의 약속에 대하여 증거할 수 있었다. 증인으로서 제자들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여 승천하신 주와, 그들의 증거를 통하여 믿게 될 세상 사람들 사이의 최초이자 으뜸가는 가시적(可視的) 증거를 연결시키는 자들이었다.

 

9. 올리워 가시니. 여기서 승천은 단순한 역사적인 사실로서 진술되었다. 그 이후로 신약에서 그것이 자주 언급되지는 않지만, 부활은 역사적인 기독교의 주요 진리로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예수에 의하여 예언되었다(6:62). 그 사건은 베드로에 의하여 다시 진술되었고(3:21), 후에 바울에 의해서도 언급되었다(딤전 3:16).

 

11. 본 그대로. 이 약속에 따르면, 그의 재림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1) 본인이 친히 옴이 예수”(참조 시대의 소망, 832), (2) 볼 수 있게 옴가심을 본 그대로”, (3) 구름과 함께 옴구름이 저를 (받아들여)”, (4) 확실히 옴그대로 오시리라.” 이 권고하는 천사들의 조용하면서도 엄숙한 보증은, 승천하신 사실로 말미암아 보증된 그리스도의 재림 교리에 절대적인 확실성을 가져다 준다. 그 사건과 약속은 모두가 진실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어느 하나도 진실하지 않든지, 둘 중 하나이다. 만약 재림이 없다면, 구속의 경륜에서 앞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수확이 없는 곡식의 파종과 경작처럼 헛될 것이었다.

 

오시리라. 그리스도의 재림은, 약속된 사건이 역사적인 사건들과 결합되어 있듯이, 부활이나 승천과는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에 있다. 성경은 다음의 내용을 나타내 준다. (1) 창조주 그리스도, (2) 성육신(成肉身)한 그리스도, (3)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4) 부활한 그리스도, (5) 장차 올 왕 그리스도. 이 모든 국면들 가운데서 그는 [동일한] 예수이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13:8) 분이다.

누가복음 24:36-53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50]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51]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52]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 먼저 본문을 읽으면서 자세히 관찰하세요.

 

“그리스도는 성화된 거룩한 인성을 지니고 하늘에 오르셨다. 그는 인성을 입으시고 하늘 궁정에 들어가셨다. 그는 하나님의 도성에 있는 모든 인간을 속량하신 분으로서 아버지 앞에서 “그들을 내 손바닥에 새겼나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탄원해 오셨던 분으로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인성을 입고 계실 것이다. 그의 손바닥에는 그가 받은 상처의 흉터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한 사람으로서 그분은 그의 자녀들을 받으시기 위하여 능력과 영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를 기쁘게 하고 감사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을 의로 심판하실 한 날을 작정하신 것이다. 우리는 타락한 일이 없는 온 우주 세계가 예수께서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우리 세상에 오신 그 웅대한 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영원한 확신을 가질 수가 있을 것이다”(원고 16, 1890).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서 승천하셨다. 사람으로서, 그분은 인간의 대속물과 보증이시다. 인간으로서, 우리를 위해 살아서 보증하신다.

본문연구

  1. 예수는 부활한 후에도 자기가 실제적이고 물질적인 존재임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하여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습니까? (눅 24: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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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에 사용하신 방법에서 무슨 교훈을 배울 수 있는가?(눅 24:25~27, 32).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성경과 상황을 효과적으로 조화시킬 수 있는가?(눅 2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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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누가는 복음 사명을 표현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어떤 말씀을 사용했는가?(눅 24:47). 이것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주제와 어떻게 맺어지는지를 살펴보라(눅 19:10; 행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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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누가복음 24장 47절과 마태복음 28장 19, 20절, 마가복음 16장 15, 16절의 복음 사명을 비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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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그분의 백성을 위해서 어떻게 그들의 길을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까? (벧후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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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의사항

  1. 당신은 그리스도의 증인입니까? 증인이 갖추어야 할 자격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증인으로서 당신이 가진 증거는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통해 능력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됩니까?

  3. 예수님의 재림이 내 삶의 변화에 어떤 원동력이 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이루신 놀라운 이야기가 절정에 다다랐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의 끝은 아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우편에 오르셨으며, 그 권세와 능력의 위치가 당장 지상에 나타났다. 그분은 제자들이 “능력을 받게” 되리라고 약속하셨다(눅 24:49, 4:14 비교). 예수님께서는 지금 보좌 곁에 서 계시면서, 아들을 보내심으로 가동된 하나님의 계획의 완성을 위해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37. 놀라고 무서워하여.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다락방에 따로 숨었고(참조 요 20:19 주석), 그들은 이미 고도의 정서적인 긴장 가운데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폭동 교사죄로 사형을 당한 분의 절친한 동료들이었다. 그들도 머지않아 같은 운명을 당하지는 않을까, 그들은 언제라도 잡히게 되지는 않을까 두려웠을 것이다. 이외에도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은 그들을 흥분하게 하고, 긴장시켰을 것이다. 이런 보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부활한 그리스도와의 직접적인 대면을 위해 준비되어 있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39. 내 손. 지금 그들 앞에 살아서 나타난 분이 다름 아닌, 십자가에 죽었던 그들의 주라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거기에 있었다. 예수는 그들의 더딘 이해력에 대하여 오래 참으면서(참조 35절 주석), 그들의 믿음의 기초를 형성할 가시적인 증거를 주었다. 사도들이 전할 기별에 확신을 주는 능력을 준 것은 바로 부활했다는 사실이다(참조 눅 24:48; 요일 1:1, 2; 5:20).

 

나를 만져 보라. 예수는 부활한 후에도 자기가 실제적이고 물질적인 존재임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하여 세 가지 감각적인 증거를 주었다. 예수는 시각, 청각, 촉각을 자신이 실제적인 존재요, 유령이나 너무도 긴장한 상상력의 허상이 아니었다는 확신을 제공하는 데 복합적으로 이용했다. 부활하여 영광스럽게 된 예수의 몸 가운데서 우리는 부활 시에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예증을 보게 된다(참조 고전 15:22, 23; 요일 3:1, 2).

 

. 헬라어 프뉴마(pneuma, 참조 8:55 주석). 예수는 이 땅에 왔을 때 자기의 신성을 벗어버리지 않았으며(참조 요 1:14 주석),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에도 인간의 모습을 지니고 갔다(참조 시대의 소망, 832). 예수는 성화되고 거룩한 인성을 지닌 채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분은 이 인성을 가지고 하늘 궁전으로 가셨으며, 하나님의 도성에 있는 모든 인간을 구속하신 자로서 영세토록 그것을 지니실 것이다”(엘렌 G. 화잇, RH 1905. 3. 9.).

 

40. 손과. 못 박혔던 양손은 말이 없었으나 부활의 진리에 대한 웅변적인 증거였다.

 

41.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그리스도가 함께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좋아서 믿지 못할 일처럼 보였다(참조 눅 24:35 주석; 16:12, 13).

 

무슨 먹을 것. 문자적으로는 어떤 음식즉 먹을 수 있는 것. 예수는 자기가 여전히 실제적이고 육체적인 존재라는 네 번째 증거를 그들에게 준다(참조 39절 주석).

 

42. 구운 생선. 고대 팔레스타인 지방의 일반적인 음식물(참조 요 21:9 주석).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제자로 부름을 받기 전에는 어부였다(참조 5:1~11 주석).

 

43. 잡수시더라. 틀림없이 제자들에게 자기는 여전히 육체를 지닌 물질적인 존재임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음식을 먹었다. 다음의 내용을 추가하는 것을 지지하는 본문상의 증거를 인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남은 것들을 그들에게 주시니.”

 

44. 모세의 율법. 흔히 오경이라 불리며 성경의 첫 번째 다섯 책들로, 모세가 기록한 구약 부분. 다른 곳에서 모세오경은 율법”(7:12; 16:16 ), “모세의 율법”(28:23) 때로는 단순히 모세”(16:29, 31)라고만 지칭된다. 히브리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로 구약을 세 부분으로 구분한 것을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유일한 곳이다.

 

선지자. 히브리인들은 구약의 이 부분을 그들이 전 선지서들”(former prophets)이라 부르는 것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후 선지서들”(latter prophets)이라고 부르는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12소선지자들로 구분했다(참조 제1, 39).

 

시편. 우리가 시편이라고 부르는 책뿐만 아니라, 아마도 모세선지자에 속하지 않는 다른 모든 책을 포함한다. 이 세 번째 부류의 책들은 일반적으로 성문서(Hagiographa) 또는 단순히 글들”(Writings)이라고 불린다(참조 제1, 39).

 

45. 저희 마음을 열어. 과거에 예수가 얼마나 자주 그렇게 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던가!(참조 18:34 주석).

 

47.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는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사업을 시작하였으며(참조 마 4:17 주석), 따라서 제자들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었다. 여기서 그의 신성에 대한 가장 큰 증거들이 주어졌다. 예수는 먼저 유대에서 일했는데, 그것은 그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자기의 가르침과 사업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기 위함이며, 자기를 메시야로 받아들이고, 자기가 천국 복음을 전할 때 함께 연합하여 노력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231). 후일의 사건들이 입증해 주듯이, 다수의 제사장들과 기타 국가 지도자들이 도에 복종하게 되었다(6:7). 예루살렘에서 복음의 초기 성공은 놀랍고 고무적이었다(참조 행 2:41, 47; 4:4, 33; 5:14, 16, 28, 42; 6:1, 7).

 

48. 너희는증인이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수 년간 그와 함께 지냈고, 그들은 그가 가르친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일하였는가를 알았으며, 이제 그들은 부활의 진리에 대한 증인이었다(참조 39절 주석). 그들은 보고 들은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었다(참조 벧후 1:16~18; 요일 1:1, 2). 그들은 그리스도의 증인들이라고 인정하기를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참조 행 2:32; 3:15; 5:32; 10:39, 41 ). 그들은 남에게 말해 줄 위대한 이야기가 있었으며, 그것을 말하는 데 결코 지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부활한 구주를 믿는 자들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의 도에 대하여 보고 들은 것들을 증거할 특권이 있다(참조 딤후 2:2; 고후 5:18~20).

 

49.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즉 성령(참조 행 1:4, 8 주석). 이 약속에 관하여 예수는 배반당하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오랫동안 토론했다(참조 요 14:16~18, 26; 16:7~13 주석).

 

너희는유하라. 즉 예수가 승천한 이후에(참조 행 1:4 주석). 아직 제자들에게는 갈릴리에서 예수와 만날 약속이 남아 있었다(참조 마 28:10). 그러나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은 분명히 여기서 주어진 분부를 따르기 위함이었다.

 

능력. 헬라어 뒤나미스(dunamis). “수행할 능력.” 능력은 그들을 유능한 증인들로 만들 것이었다(참조 48절 주석). “위로부터 능력을 받지 않으면, 제자들이 전하는 증거는 사람들의 마음에 깨달음을 주거나 확신시키지 못할 것이었다. 승천한 지 10일 후에 내린 성령은 그리스도가 여기서 언급한 능력을 주었고(참조 행 1:8; 2:1~4 주석), 사도들은 즉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시작했다. 제자들의 증거는 성령의 능력으로 강화되고 유효하게 되어 하루에 3,000여 명을 회심시키는 결과를 냈다(참조 행 2:41). 성령의 지도와 깨닫게 하는 능력 아래서 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경험했다(참조 24:47 주석). 오순절 이래 신자들은 문자 그대로 위로부터 능력을 입었다.

 

50.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나가사. [승천, 24:50~53=16:19, 20=1:8~12. 주요 주석: 누가복음. 참조 제9, 140, 147]. 승천에 대한 마가의 짤막한 기록 외에는 누가만이 이 사건에 대하여 기록하며(1:8~12),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승천에 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말한다. 오직 누가만이 그 사건의 때(참조 행 1:3)와 장소(참조 24:50)를 언급한다. 승천에 관한 시간표을 알기 원하면 마 28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를 참조하라. 분명히 제자들은 갈릴리로부터 그들의 일을 시작해야 할 곳인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참조 /24/49e 주석).

 

베다니. 베다니는 감람산의 동쪽 경사지에 있었으며, 예수는 그때 열한 제자를 감람산 꼭대기로 데려갔다(참조 마 21:1 주석; 1:12; 시대의 소망, 830).

 

손을 들어. 은총이나 축복을 선언할 때 흔히 취하는 자세이고, 때때로 그런 자세로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참조 18:13 주석).

 

51. 축복하실 때에. 제자들이 예수와 교제했던 몇 년을 마무리하는 적합한 끝맺음이다.

 

저희를 떠나. 예수는 제자들과 아주 가깝게 서 있었는데, 아마도 제자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을 축복하면서 양손을 펼칠 때에 그는 그들 가운데서 천천히 승천하였다(참조 시대의 소망, 830, 831,).

 

하늘로 올리우시니. 예수는 인간의 형체 가운데”(시대의 소망, 832; 참조 24:39 주석) 승천하였다. 이 구절의 생략을 지지하는 중요한 본문상의 증거를 인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 언급된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참조 행 1:9~11 ).

 

52.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참조 마 28:17 주석. 이 말의 생략을 지지하는 어떤 본문상의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예루살렘에 돌아가. 그들은 마지막 만찬을 함께했던 다락방에 머물렀다(참조 행 1:13; 시대의 소망, 802). 그들은 기쁨과 큰 믿음으로 저희의 주님이 위탁한 일을 시작했다(참조 막 16:20 주석).

 

53. 늘 성전에 있어. 성전은 집합 장소였는데, 특히 조석 기도 시간이 그러했다(참조 1:9 주석). 여기에서 사도들은 신앙을 증거할 기회를 가장 먼저 발견했다(참조 행 2:46; 3:1; 5:21, 42)

누가복음 24:13-35

[13]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19]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 먼저 본문을 읽으면서 자세히 관찰하세요.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앞으로 성취될 사건의 예언을 깨닫지 못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마지막 부분도 첫 부분처럼 확실히 성취되어 제 삼일에 그분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것은 저희가 반드시 기억했어야 할 부분이었다.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그 말씀을 잊지 않았다. 그날은 “예비일 다음날이라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마 27:62, 63)라고 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였다.”(시대의 소망, 796)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돌아가던 두 제자들과 동행하셨다. 주님의 죽으심만을 보고 슬픔 가운데 돌아가던 그들에게 예수님은 부활을 확신케 하셨다. 제자들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꾸어 질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본문연구

  1. 본문에서 “이 모든 된 일”(14절) 즉 두 사람이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란 무엇인가? 
    ________________________
    cf.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는 약 12km 북쪽에 있다.   
    cf. 두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까닭은 16절과 막 16:12을 참고하라.

  2. 17절에서 두 제자들의 상태를 말해주는 표현을 찾아보고 그들이 현재까지 알고 있는 사실을 요약해 보라.
    19-24절
    ________________________

  3. 25절에서 예수께서 그들을 “미련하다”고 하신 까닭은 무엇인가?
    25-26절
    _______________________

  4. 두 제자들이 부활을 확신하게 된 것은 언제였으며, 또 자신들과 동행한 사람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언제였나?
    27,32절; 30-31절 
    ________________________
    cf. (소망, 799)“그리스도의 생애와 신약 성경의 교훈을 분명하고 아름답게 나타내는 것은 과거에 예언된 것에서 오는 빛이다... 예언을 들어 설명하시면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인성을 취하시고 어떤 분이 되기로 되어 있었는지에 대한 바른 견해를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다.”


토의사항

  1. 두 사람은 예수님이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알아보지 못했다. 왜 그랬다고 생각됩니까?
    오늘날 우리의 눈과 귀를 흐리게 하는 것들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해 봅시다. 

  3. 말씀을 통해 마음이 뜨거워진 경험에 대해 이야기 해 봅시다.

  4. 이설이나 쓸데없는 의심에 흔들리지 않고 말씀에 굳게서기 위하여 어떻게 성경을 공부하면 좋을지 의견을 나누고 자신의 결심을 세워봅시다. 

   

부활과 승천으로써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구속사역은 마쳐졌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만이 아닌 부활하여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 구약과 신약성경을 통하여 주님의 모든 구속사업을 이해하고 증거할 수 있다.


13. 그날에. 이때는 부활한 날 늦은 오후였다(참조 마 28:1 주석).

 

저희 중 둘이. 이 이야기 후반부에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글로바로 밝혀진다(참조 18). 그들은 분명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왔고, 십자가형과 상관되는 사건들과 예수가 살아났다는 소문 때문에 안식 후 첫째 날 거의 하루 종일 성읍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이십오 리(제임스왕역에는 “60펄롱[furlong]”이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1“펄롱”(헬라어 스타디온[stadion])186미터에 해당하며, 따라서 60“펄롱11.2킬로미터 가량 된다. 도로상으로는 12.8킬로미터쯤 될 것이다(참조 시대의 소망, 795).

 

엠마오. 엠마오는 엘-쿠베이베(el-Qubeibe) 마을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예루살렘 북서쪽에 있는 룻다(Lydda)11킬로미터쯤 가다보면 있다. 종종 엠마오라고 여겨지는 다른 곳은 칼로니예(Qalo-niyeh) 마을인데, -쿠베이베에서 남쪽으로 4.8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이다.

 

15.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두 제자가 엠마오를 향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참조 시대의 소망, 795), 예수가 그들을 따라왔다. 아마도 예수는 거의 2시간 걸리는 여행 내내 그들과 동행했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들은 예수를 자신들처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온 순례자로 여겼을 것이다.

 

16. 눈이 가리워져서. 두 제자는 피곤하고, 슬픈 생각에 깊이 빠져 그들과 합류한 예수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분명히 이와 비슷한 상황으로 인해, 그날 일찍 예수가 처음으로 마리아에게 가까이 갔을 때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가 부활 후에 나타난 경우, 어떤 때는 즉시 알아보기도 했으나 다른 때에는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 이곳과 31절에 누가가 기록한 말들은, 이때 두 제자는 자신들의 생각에 몰두해 있었고 또한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시야가 가려져 있었음을 암시한다.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는 즉시 자신을 그들에게 드러낼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가 그들에게 가르쳐 주려는 중요한 진리들을 충분히 인식하거나 제대로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들뜨지는 않을까 해서였다. 그들은 메시야에 관한 구약의 예언과 함께, 그리스도를 지적하던 역사적인 사건들과 거룩한 의식들을 꼭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것들만이 그들의 신앙에 견고한 토대를 제공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에 관해 성경의 가르침에 굳게 뿌리박지 않은 추상적인 신앙은 의심의 폭풍이 불 때 건재할 수가 없다(참조 마 7:24~27 주석). 그때 예수는 그들의 관심을 성취된 구약의 예언으로 이끌고자 했으며, 후일 그 사건들은 신약에 기록되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799).

 

17. 이야기가 무엇이냐. 대화를 시작할 때 하는 적절한 질문이다. 두 제자가 부활에 관한 사건들을 진지하게 토론했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는 지나가는 행인의 눈에도 띄었을 것이다. 두 제자는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것에 매우 놀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동행자를 쳐다보며 가던 길을 멈추어 섰을 것이다.

 

슬픈 빛을 띠고. 그들이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슬픈 빛을 띠었다. 하나님이나 동료 인간들을 오해한 결과, 얼마나 자주 슬퍼하고 실망하게 되는가! 구약을 올바로 이해하면 그들의 슬픈 생각들은 사라질 것이었으며, 실제로 그들이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렇게 되었다(참조 25~27, 33, 44~46).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가 운명하기 전에 그들에게 직접 주었던 교훈들을 잊었다(참조 44).

 

18. 홀로 알지 못하느뇨. 두 제자는 예루살렘에서 오는 사람이 그런 내용을 모른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수가 분명히 그 쪽에서 왔기 때문이다.

 

19. 선지자. 두 제자는 예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전에 그가 메시야일 것이라고 믿었지만(참조 21절 주석), 아직도 그를 위대한 선지자로 믿고 있었다.

 

20. 우리관원들. 두 제자는 사실을 알았고, 비난받아야 할 사람들을 올바로 지적한다. 그들은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한 일반인들을 비난하거나, 로마 당국자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지 않는다. 예수의 죽음은 유대 나라 지도자들의 소행이었다(참조 마 27:2).

 

21. 우리는바랐노라. 문자적으로는 우리는 희망하고 있었다.” 두 제자는 이제 확신을 표명한다. 그들은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했고, 후에는 선지자보다 더 위대한 분으로 믿게 되었다. 그들에게 그 확신은 안정되게 뿌리박은 것이었으나, 메시야에 관한 성경 말씀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은 크게 흔들렸다. 그들은 이제 전에 가졌던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토론의 진지함은 그들이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음을 드러내 주는데, 특히 예수를 보았다고 주장한 여성 제자들의 놀라운 보고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그러하다(참조 22~24).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 이스라엘을 구속하는 일과 관련된 그들의 개념은 의심할 것도 없이 로마의 철권 통치로부터 정치적으로 구원한다는 원론에 한정되었다. 유대인들이 가졌던 메시야에 관한 잘못된 희망에 대한 토론은 4:19 주석을 참조하라.

 

25. 모든 것을더디 믿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았으며(딤후 3:16, 17), 우리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에만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구약 선지자들의 많은 기록을 내버리거나, 소홀히 하거나, 공상적인 해석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면 올바른 분별력이 결여된 자들이다.

 

26. 할 것이 아니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냐?”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했다(참조 27절 주석). 예수도 자신이 고난받고 죽게 될 것을 거듭 예언했다(참조 18:31 주석). 더욱이 예수는 자기에 관한 예언의 성취가 믿음의 근거가 될 것이라는 점을 그 예언을 준 이유로 제시했다. 다시 말해, 예언된 사건이 이루어질 때에 그들이 믿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수의 죽음은 실망을 주는 대신에 믿음을 더욱 굳게 하는 증거가 되어야 했다.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제자들의 희망을 꺾어 버린 반면, 요셉과 니고데모에게는 위대한 진리를 확신케 하는 증거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27. 모든 성경에. 구약의 모든 성경이 자신의 메시야적 사업을 전망하고 있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핵심이었다. 구약 기자들이 메시야의 필생의 사명을 묘사하기 위해 어떻게 지도를 받았는지를 보려면 마 1:22 주석을 참조하라. 잘못된 지도를 받음으로 구약을 폄하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거룩한 영감의 기록을 크게 존중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음을 나타낸다. 모세와, 다른 이들의 손으로 기록된 구약을 연구하고 믿는 자들은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것이다(참조 요 5:39 주석). 그리스도는 친히 경고하기를, 구약의 중요성과 가치를 최소화하는 자들은 실제로 자기를 믿지 않는다고 하였다.

 

28. 더 가려 하는 것같이. 예수는 더 가려 했고, 따라서 그들이 강권하여 머물도록 하지 않았다면 떠나 버렸을 것이다. 만약 예수에게 자신들의 환대를 받아주라고 간청하지 않았다면, 두 제자는 자신들에게 이르러 온 축복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자기들과 함께 머물자고 간청한 이유는, 그가 지난 한두 시간 동안 주었던 귀한 교훈을 좀 더 받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다.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더 깊이 이해하기를 원하여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자들만이 더 풍성한 하늘 만나의 공급을 기대할 수 있다(참조 마 5:6 주석).

 

29. 저물어 가고. 문자적으로는 기울었다.” 여기서는 아마도 유대인들의 계산법에 따라 일몰 시에 주일 중 첫째 날이 끝나고, 새날이 시작된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엠마오에 도착하기 전에 해는 이미 졌다(일년 중 그 시기에는 오후 630분경에. 참조 시대의 소망, 800).

 

32.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상징적인 언어의 표현(참조 시 39:3; 20:9). 헬라어의 질문 형태는 긍정적인 대답을 요구한다(참조 6:39 주석). 그들이 성경 말씀을 열어 주는 예수에게 주목하여 듣고 있는 동안 영적인 밝은 빛이 그들 영혼의 암흑을 꿰뚫었다. 이제 그들은 저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어두움은 사라졌다. 그리스도의 임재가 그들의 초라한 가정을 밝혀 주었으며, 그가 가르쳐 준 영광스러운 진리는 그들의 마음을 가로지르고 있던 의심과 불확실함의 그늘들을 쫓아내 버렸다. 낯선 손님이 그때까지 함께 있었다면 그들은 그가 예수처럼 말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두 제자의 마음의 경험은, 성경 말씀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에 말하는 하늘의 음성을 주의 깊게 경청하는 사람들의 경험이 될 것이다. 저희의 초점 없는 생각에, 구약이 흐릿하고 무감동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자들은 겸손히 예수께로 나와서 배워야 한다(참조 27절 주석).

 

33. 그 시로. 그들 앞에 놓인 음식을 맛도 보지 않은 채(참조 시대의 소망, 801), 다른 제자들에게 놀라운 발견을 말해주기 위하여, 그들은 즉시 집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예루살렘에 돌아가. 그들이 엠마오에 도착하기 전에 해는 졌고, 따라서 그때는 오후 6시 반이 지난 후였다(참조 29절 주석). 저녁 노을도 8시경에는 사라졌다. 그 두 제자는 거의 어두워졌을 때에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밤중에 여행을 했다. 엠마오의 집으로 올 때는 피곤했으나, 이제 그들의 피곤함과 배고픔은 사라졌다. 그들이 동문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에, 떠오르는 달이 어둡고 고요한 성읍을 어슴푸레 비추고 있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802).

 

열한 사도. 유다가 빠지기 전까지는 열두명이라는 용어가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제자들을 가리킨 것처럼, “열한 사도라는 말도 어떤 면에서 특수한 의미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참조 8:1; 9:12 ). 실제로 그곳에는 열 명의 사도가 있었으며 이때에 도마는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참조 요 20:24).

 

34. 시몬. 열한 제자 중에서 그는 부활한 주와의 교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위로와 확신이 가장 필요했다(참조 막 16:7 주석). 틀림없이 열한 제자는 예수가 여자들에게는 나타났지만 자기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틀림없이 예수가 살아 있다면 가장 가까운 동료인 자기들에게 알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난 직후에 예수가 그들과 합류했다는 사실(참조 시대의 소망, 795), 그가 사라진 후에도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갈 때 함께하였다는 사실(참조 시대의 소망, 801)에 비추어 볼 때, 예수는 그 두 여행자가 엠마오로 갈 때 합류하기 전에 베드로에게 보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두 제자는 적어도 그날의 대부분을 동료 신자들과 밀접히 교제하는 일로 보냈을 것이기 때문에(참조 14절 주석), 만일 베드로에게 보인 일이 그들의 출발 훨씬 전에 있었다면, 그들은 아마도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35. 두 사람도말하더라. 헬라어 엑세게오마이(exe-geomai). “이끌어 내다혹은 자세히 말하다.” 두 제자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에, 그 추가된 증거도 무리 전체의 마음속에 있는 의심과 불신을 모두 없애 주지는 못했다(참조 막 16:13; 시대의 소망, 802). 실제로 예수가 약간의 음식을 들 때까지는 그들의 모든 불신이 사라지지 않았다(참조 24:41~43).

누가복음 23:1-25

[1]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5]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

[6] 빌라도가 듣고 묻되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 하여

[7]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8]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

[11]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13]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14]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17] (없음)

[18] 무리가 일제히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19]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러라

[20]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되

[21] 저희는 소리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23]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24]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5] 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 

 

* 먼저 본문을 읽으면서 자세히 관찰하세요.

 

“제사장들은 연약하고 우유부단한 빌라도와는 그들의 계획을 무난히 성취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저희가 알기로는 일전에 빌라도가 사형에 처할 만한 죄가 없는 사람들에게 사형 선고를 하고 그 사형 영장에 급히 서명한 일들이 있었다. 그의 생각에는 죄수의 생명이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며 그에게 죄가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사장들이 바란 것은 빌라도에게 예수님과 말할 수 있는 여지도 주지 않고 그로 하여금 사형을 선고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민족의 대축제일에 드리는 청이므로 이것을 그대로 받아 주도록 간청하였다. 그러나 이 죄수에게는 빌라도를 주저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는 감히 이 일을 할 수 없었다.”
(시대의 소망, 724-725)

 

산헤드린에 의해 시작된 재판은 새벽에 이르자 빌라도의 재판정으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셨으며, 또 헤롯에게도 재판을 받으셨다. 그들은 과연 십자가를 언도할만한 죄목을 찾아냈는가?
 

본문연구

  1. 본문을 세 부분으로 구분하고, 빌라도와 헤롯에 의한 재판이 왜 의미가 있는지 말해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빌라도는 그 지역을 관할하는 로마의 총독, 헤롯은 로마황제에 의해 임명받은 유대 분봉왕이었다.(눅 3:1-2a)    

  2. 사형에 해당된다는 고소내용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은 사실이었는가?
    2절; 눅 20:22-25
    __________________________

  3. 빌라도와 헤롯의 판결은 무엇이었는가? 예수님에게서 어떤 죄를 찾았는가?
    4, 14, 15, 22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행 3:13을 참조하라.
    cf. 시 2:2; 행 4:26-28을 읽어라.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누가는 다윗의 예언과 그 성취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cf. 재판받으시는 예수님에 대한 누가의 기록은 다른 복음서들에 비하면 대체로 간략하다. 하지만, 헤롯에게로 보내져 재판받는 것은 누가만이 언급하고 있다. 사복음서를 비교하면서 살펴본다면 더 많은 사실들을 찾을 수 있다.

  4. 재판 받으시는 동안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3, 9, 11, 25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
      

토의사항

  1. 빌라도와 헤롯은 왜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됐을까요?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요인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예수님은 왜 대체로 침묵하셨으며, 온갖 수모를 묵묵히 참으셨는지 그 이유를 이야기해 봅시다. 

    cf. “. 죄가 있든 없든, 보통 사람 같았으면 자신의 무죄를 큰 소리로 항변했을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의 자제심에 놀랐으며,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탄복할 일이었다. 그때 빌라도는 예수에 대한 고소들이 모두 악의에 찬 것임을 잘 알게 되었다(참조 막 15:10). 그러므로 예수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었다.”(성경주석, 마 27:13)

  3. 우리가 세상을 향해 침묵해야 할 일과 그렇지 말아야 할 일은 무엇일지 이야기해 봅시다.

    cf. (소망, 730)“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사명은 쓸데없는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상한 심령을 고치기 위하여 오셨다. 죄로 병든 영혼들의 상처를 싸매시기 위하여 말씀해야 하셨다면 그분은 침묵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거룩하지 않은 말로 진리를 짓밟는 자들을 위해서는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공식적인은 재판은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했으며, 도리어 유대 지도자들의 음흉함을 드러냈다. 그러나, 자신의 권한을 옳게 사용할 기회가 있었으나 자신의 자리와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 준 빌라도는 크나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2. 백성을 미혹하고. 누가는 유대 당국자들이 예수를 고발하기 위해 사용했던 세 가지 죄목을 열거한다. 여기에서는 그들이 예수를 혁명 선동자라고 고발한다. 예수는 공중 봉사 기간 내내 지금처럼 그에게 돌려지는 비난의 근거를 피하기 위하여 크게 주의를 기울였다. 이 조작된 고소는 유대 지도자들의 메시야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참조 4:19 주석).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3일 전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유인하여, 여기서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대로 그가 말했다고 진술하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그들은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자칭 왕 그리스도. 예수는 직접적으로 그런 주장을 한 적이 결코 없었다. 틀림없이 그들은 불과 5일 전에 예수가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던 사건을 생각했을 텐데, 이 사건을 유대인들은 모두 그가 다윗의 보좌를 차지할 것이라는 선언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5. 굳세게. 혹은 긴급하게.” 그들은 빌라도가 그들의 요구에 동의하도록 집요하게 주장했다.

 

유대. 여기서는 아마도 모든 이스라엘에 속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포함한 것 같다(참조 1:5; 7:17 주석). 분명히 누가도 유대에 상관되는 용어를 올바로 사용한다. 그러나 누가는 유일하게 이 용어를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사용하는 신약 기록자인 것으로 보인다.

 

갈릴리에서부터. 즉 예수의 사업이 크게 성공을 거둔 곳이다. 베드로도 복음의 확산을 묘사할 때 거의 같은 문구를 행 10:37에서 사용한다.

 

여기까지. 예수를 고발하는 자들은 마음속에 그가 갈릴리에서보다도 유대에서 더욱 성공적이고도 오래 갈 공중 봉사를 시작했다는 사실로 두려움을 일으켰던 수 일 전의 극적인 사건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 이 고발은 비록 지도자들이 빌라도가 믿도록 하려는 뜻에서 한 것은 아니었으나, 사실이 그랬다. 최근 몇 주일 동안, 특히 나사로를 부활시킨 후부터 민심은 예수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에 앞서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침통한 가운데 서로 인정하기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12:19)라고 하였다.

 

6. 갈릴리 사람. 오직 누가만이 예수 재판 시의 사건을 기록한다. 그리스도의 공중 봉사 중 가장 성공적이고 인상적인 부분은 갈릴리에서 있었다.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출생했으나 갈릴리에서 성장했고, 실제적으로 그의 전 생애를 그곳에서 보냈다.

 

7. 헤롯의 관할. 즉 갈릴리와 페래아를 가리킨다(참조 3:1 주석).

 

헤롯에게 보내니. 빌라도는 궁지에 빠졌다. 그는 예수의 무죄를 충분히 인식했고, 이 문제에 대한 결심을 대중 앞에서 발표했다. 예수를 놓아주려는 그의 결심은 구주를 십자가에 못박으려는 유대 당국자들의 결심에 압도당했다. 과거 약 5년간의 임기 동안 유대(그 당시에는 사마리아를 포함함) 총독으로서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없는 사람이 되었으며 따라서 더 이상 그들을 불쾌하게 만들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두려워했다. 그는 유대 지도자들의 배반 행위를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예수에 대한 그들의 증오심은 순전히 악의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예수를 헤롯에게 보냄으로써 난제를 해결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유대 당국자들과 우호감도 유지하며, 동시에 무죄임이 분명한 사람을 죽이는 문제에 대한 책임도 회피할 수 있을 것이었다.

 

예루살렘에 있더라. 헤롯 안티파스는 이두매인과 사마리아인의 혼혈인이었으나, 유대 신앙을 열렬히 따르노라고 공언했고 유월절에 참여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경건한 유대인이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며, 단순히 정치적인 방편으로서 그런 종교의 외양을 유지했다는 뜻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 헤롯은 아마도 하스모내의 관저에 유했을 것이며, 그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참조 제9, 526쪽 지도 예수 당시의 예루살렘”).

 

8. 보고자 한 지. 헤롯은 그 당시 방탕하게 살고 있었다(참조 마 14:3; 6:17 주석). 침례자 요한을 죽인 지 1년 정도가 지났으나(참조 막 6:1, 2 주석), 양심은 이 문제로 그를 계속 괴롭혔다. 처음에는 예수를 부활한 침례자 요한이라고 생각하며 두려워했다(참조 막 6:14, 16 주석). 얼마 동안 헤롯은 예수와 만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참조 9:9 주석).

 

이적 행하심을 볼까. 호기심도 헤롯이 예수와 만나고 싶도록 자극했던 또 다른 동기로 보인다. 그는 병약해진 불구자들을 관저로 데리고 와서 예수에게 그들을 고치면 대가로 놓아주겠다고 약속했다(시대의 소망, 729). 헤롯은 예수가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그가 참 선지자요,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이 그를 대적하여 고발하기를 좋아하던 죄가 없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헤롯의 호기심은 채워질 것이고, 동시에 그는 유대 지도자들이 할 수 있는 어떤 항의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석방하는 데 충분한 근거를 가질 수 있을 것이었다.

 

9. 여러 말로 물으나. 호의와 석방을 약속하는 암시의 표로서 헤롯은 예수의 결박을 풀어 주도록 명했으며,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한 고발 내용들을 제시하기 전에 그에게 오랫동안 질문했다.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예수가 산헤드린과 빌라도 앞에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이유들에 더하여(참조 마 26:63; 27:13 주석), 헤롯이 침례자 요한의 기별을 듣고도 거절했다는 이유 때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헤롯은 하나님이 그의 길 위에 비치도록 허락하신 진리의 빛을 거절했으므로, 이렇게 소망 없이 죄 가운데 강퍅해진 영혼에게 예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침묵은 오만한 군주에게 가혹한 질책이 되었으며, 그가 요청했지만 예수가 이적 행하기를 거부하자 헤롯은 화가 나서 예수에게서 등을 돌렸다.

 

10. 힘써 고소하더라. 이 말은 그들이 크고 성난 음성으로 그렇게 했음을 암시한다.

 

11. 업신여기며. 문자적으로는 그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다즉 그를 모욕했다. 빌라도와 마찬가지로, 헤롯도 예수를 대적하는 고발들이 순전히 악의에 의하여 촉발된 것임을 확신했으나, 예수의 침묵이 자기의 권위를 경시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는 화가 났다.

 

빛난 옷을 입혀. 아마도 이것은 헤롯이 버린 옷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겉으로는 그것이 평상시에 예수가 입던 단순하고 수수한 옷과 비교할 때 저속하면서도 화려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도로 보내니. 산헤드린 앞에서 낮에 심문을 받은 다음에 그랬던 것처럼, 로마 군인들이 간섭하지 않았다면(참조 22:71 주석) 예수는 틀림없이 이곳에 묘사된 야만적인 시위 과정에서 폭도들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헤롯도 빌라도처럼 책임을 회피하고자 예수를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12. 친구가 되니라. 그들은 그들의 불화를 가라앉혔다. 아마도 빌라도와 헤롯 사이에는 여러 해 동안 간헐적인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6. [그를] 때려서. 이는 빌라도가 예수에게 가한 첫 번째 채찍질이었다(두 번째 채찍질에 대해서는 마 27:26 주석을 참조하라). 이렇게 채찍질을 함으로써 빌라도는 사형 선고를 모면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폭도들에게 예수에 대한 동정심을 일으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당시 행해진 채찍질은 죽음을 초래하기도 했다(참조 마 10:17 주석). 하지만 예수를 죽이라는 그들의 열렬한 요구에 이만큼 양보하자 폭도들은 무마되어 잠잠해지는 대신, 그의 피를 보려는 갈증을 더욱 자극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빌라도가 죄 없는 사람을 매질하도록 허용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면, 조금 더 압박할 경우 그의 죽음을 허락하도록 설득될 수 있을 것이었다.

 

19. 민란. 헬라어 스타시스(stasis). 문자적으로는 일어남.” 그러므로 폭동이라는 뜻도 된다.

 

20. 놓고자 하여. 오히려 놓아주기를 바라면서.”

 

21. 저희는 소리질러. 문자적으로는 그들이 계속 외쳤다빌라도 앞에서.

 

23 구하니. 오히려 요구하니혹은 주장하니.”

 

25. 예수를 넘겨주어. 예수는 로마인의 감독 아래 로마인의 사형 선고에 따라 죽임을 당했다.

누가복음 22:39-62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40]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41]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47]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와서

[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 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하고

[50]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55]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 한 비자가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8]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가로되 너도 그 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 한 시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가로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먼저 본문을 읽으면서 자세히 관찰하세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는 인간의 대리자로서 고통을 당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은 죄의 사악함의 공포아래 마음이 흔들리어 마침내 창백하고 떨리는 그의 입술에서 “오,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하는 고뇌에 찬 부르짖음이 흘러 나오게 하였다. 그러나 타락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으시다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 하셨다. 만약 하늘로부터 천사들이 와서 힘을 돕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의 인성은 두려운 죄의식 때문에 그때 거기에서 죽고 말았을 것이다.  
세상 죄의 통탄할만한 성질을 생각할 때에 그리스도는 아무도 없는 곳에 따로 떨어져 혼자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어둠의 주관자들이 거기 있어서 할 수 있는 대로 죄를 광범하고, 깊고, 두려운 모습으로 보이게 하였다. 사단은 하나님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하나님의 품성을 왜곡시키고 하늘 정부의 율법에 대한 불경과 멸시와 증오심을 나타냄으로써 죄악을 하늘에 사무치게 하였다. 그리고 속죄가 불가능하게 보일만큼 죄를 사악하게 보이게 하고 따라서 잃어버린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아들이 죄의 저주 아래서 압착, 분쇄되어 버릴만큼 죄를 크게 부풀리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다.

 

예수님의 고난은 겟세마네에서 시작되었다. 그분께서 그곳에서 참아내신 것은 대쟁투의 빛에 비추어 볼 때, 우주의 관객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본문연구

  1. 왜 예수님의 “땀이 땅에 떨어자는 핏방울 같이 되”도록 기도하셨는가? 예수께서 가능하면 벗어나게 되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셨던 잔은 무슨 잔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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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께서는“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맛보셨다”(시대의 소망 3권, 193).

  2. “그 잔”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은 무엇처럼 연상되는가?(시 11:6; 사 51:17). 그 시간에, 그리스도를 위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는가?(히 10:7,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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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시간 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새 언약의 잔을 나누셨다. 이제, 그분은 슬픔과 흑암의 쓴 잔을 맛보신다. 그러나 이 순간에 승리는 왔다. 

  3. 유다의 배반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며, 또한 흑암의 세력의 일이 되는가?(눅 22:42, 53; 요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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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베드로를 고소하는 소리 배경에, 사단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유다를 유혹하였고, 이제는 베드로에게 덫을 놓았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위하여 사단의 계교를 막으시겠다고 선언하셨다(32절).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방어가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를 보여 주는가?(행 5: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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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의사항

  1. 예수님이 받으신 잔이 내 삶의 변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베드로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베드로가 그의 그런 행동에도 불구하고 돌이킨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3. 나는 어떤 상황 하에서도 예수님과의 관계를 기꺼이 인정할 수 있을까? 자신의 결심을 이야기해 봅시다. 

“만일 베드로가 자기 주님을 위하여 싸우도록 부르심을 받았더라면 그는 용감한 군인이 되었을 것이나 조롱의 손가락이 그를 지적할 때에 그는 자신이 겁쟁이라는 것을 나타내었다. 그와 동시에 베드로의 시선도 주님께 이끌렸다. 그 부드러운 얼굴에서 그는 깊은 동정과 슬픔을 엿볼 수 있었을 뿐 분노의 그림자는 추호도 없었다. 
창백하고 고통에 차 있는 얼굴, 떨리는 입술, 동정과 용서하시는 정이 서린 모습은 화살처럼 그의 마음을 찔렀다”(시대의 소망 3권, 218,219).


39. 습관을 좇아. [겟세마네로 감]. 겟세마네. “기름 틀을 뜻하는 아람어에서 따온 이름. 명상과 기도 그리고 휴식을 위해 구주는 이곳에 자주 갔으며, 여기에서 종종 밤을 보냈다(22:39; 18:2; 시대의 소망, 685, 686,). 십중팔구 십자가에 달리기 전, 화요일과 수요일 밤에 그는 이곳으로 물러나 있었을 것이다(참조 마 21:17; 24:1, 3; 26:17, 18 주석; 21:37).

성경 시대에 이 동산이 어디에 있었는지 정확하지 않다. 이 조용한 장소는 아마도 성전에서 볼 때 기드론 골짜기 바로 건너편에 있으며, 도성에서 도보로 10분쯤 걸리는 곳에 있는 감람산의 아래쪽 경사지 어떤 곳에 있었을 것이다(참조 21:1; 26:30 주석). 오늘날 방문객들에게 일반적으로 가르쳐 주는 장소는, 그리스도 이후 3세기가 지난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 이전에는 찾을 수 없는 전승에 근거한 것이다. 여러 주석가와 팔레스타인을 여행한 사람들의 의견에 따르면, 본래의 겟세마네는 경사지의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참조 483.

 

41. 돌 던질 만큼. 누가만이 이런 내용을 언급한다. 누가는 그 거리가 돌 던질 만큼의 거리였다는 말을 첨가한다(22:41). 그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보고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천사를 보았고(22:43) 천사의 음성을 들었다(시대의 소망, 685, 694,).

 

42. 이 잔. 은 선하든 악하든 생애의 경험들을 나타내기 위해 흔히 쓰이는 성경적 표현이다.

 

그러나. 사단이 온갖 맹렬한 시험으로 예수의 영혼을 압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문이나 주저함 없이 아버지의 뜻에 순복했다. 그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복한 것은 우리가 따라가야 할 완전한 모본을 제시한다.

 

43. 사자가. 그는 여러 번 그리스도를 친히 수종들었던 가브리엘이다(참조 1:19 주석). 광야에서 예수가 사단을 대면한 끝 즈음에 겪은 경험과 비교해 보라(참조 마 4:11 주석).

 

힘을 돕더라. 예수가 세 번 기도한 후에,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길을 다 가기로 큰 결심을 한 다음,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의 고통을 맛보시, “예수께서는 약간 일으키셨던 그 몸을 죽어가는 사람처럼 땅위에 엎드리셨다”(시대의 소망, 693, 694,). 예수와 십자가 사이에 놓인 고통의 시간에 그에게 힘을 주고자 강한 천사가 왔으며, 힘을 얻은 후에 그의 얼굴에서는, “그분이 방금 당하신 고통의 흔적은 사라지고 고요하고 평안하게 일어나셨다”(시대의 소망, 694). 그런 모습으로 예수는 자기를 잡으러 온 폭도들을 만났다.

 

44. 애써.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갔을 때 그를 짓누른 그 심한 고민과 신비한 슬픔을 우리가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를 사로잡은 특별한 슬픔은 제자들을 당황하게 했다. 그들이 전에 결코 목격하지 못했던 격렬한 고민으로 괴로워하는 신-(神人), 곧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자(참조 마 1:1; 2:10; 1:35 주석)가 거기에 있었다. 그 고통은 부분적으로는 육체적인 것이었지만, 단지 세상 죄를 짊어진 자인 그리스도의 무한한 고통에 대한 눈에 보이는 반영에 불과했다.

 

45. 잠든 것을. 잠시 그들은 깨어 있어 그와 연합하여 기도했으나, 얼마 후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의 혼미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이 기도에 골몰했다면 혼미케 하는 잠을 떨쳐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47. 열둘 중에 하나인. 이 부가적인 표현은 틀림없이 유다의 배신적인 행위의 가증한 성격을 더욱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해 덧붙였을 것이다(참조 21, 23절 주석). 이 말은 그의 배신적인 행위의 가증함을 크게 부각시킨다.

 

유다. 그 배신자는 어디에서 예수를 찾을 수 있을지를 알았다(18:2). “묵상과 기도를 위해 그분이 자주 가는 한 곳에서 그를 잡기로 조치가 되어 있었는데, 겟세마네는 그가 그런 목적을 위해 자주 갔으며 때로는 밤을 보내기도 한 장소였다. 유다의 임무는, 예수가 조용하고 한적한 은둔처에 차단돼 있을 때 관원들을 인도하여 그를 가리켜 주는 일이었다(참조 행 1:16).

 

51. 이것까지 참으라.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가 제자들에게 이 말을 함으로써 일이 제 과정을 따르도록 내버려두라고 지시한 것인지, 아니면 힘이나 폭력 사용을 그치라고 그들에게 명한 것인지(참조 50) 혹은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말고의 귀를 고쳐주는 것을 막지 말라고 종용한 것인지 분명치 않다. 시대의 소망, 69에 따르면, 그는 자기를 꽉 잡고 있는 로마 병사들에게 말했다.

 

그 귀를 만져. 이것은 예수를 체포하러 온 자들에게 주어진 그의 신성에 대한 두 번째 증거였는데, 첫 번째 증거는 천사의 영광이 나타난 것이었다(참조 요 18:6 주석). 베드로의 성급한 행동이 즉시 무마되지 않았다면, 산헤드린과 빌라도 앞에서 예수와 제자들은 위험한 사람들이며, 국가에 위협적인 존재들이라는 증거로서 제시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당국자들은 치유의 이적이 행해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심문할 때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52.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 이 잡다한 무리들 가운데는 대제사장도 있었고, 여러 유대 지도자들도 동행했으며(참조 시대의 소망, 695, 696,), 바리새인들(18:3), 유대인들로 구성된 성전 치안관(18:12; 참조 시대의 소망, 696), 로마군의 분견대(참조 시대의 소망, 694, 695,)가 있었다. 그 밖에 건달패도 있었는데, 그들 중 어떤 자들은 틀림없이 깡패로서 흥분된 소요를 구경하기 위해 따라온 자들이었을 것이다(참조 시대의 소망, 696).

 

53. 성전에 있을 때어. 예수는 자신의 행동이, 무력과 폭력으로 체포해야 할 무자비한 악당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지적한다. 그는 남몰래 행동하지 않고 모두가 보는 데서 행동했다(참조 요 18:19~21). 그는 유대나 로마 당국에 대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비난을 받을 만한 구실을 주지 않았다.

 

너희 때요. 즉 그들이 예수에게 하려는 일이 허락된 라는 뜻이다. 마침내 예수가 악한 사람들과 악한 천사들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다.

 

어두움. 때는 밤이었고, 그들의 사악한 계획들을 실행하기에 적합한 시간이요, 최적의 시기였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을 덮은 영적인 흑암은 밤의 어두움보다 더 심했다. 이 악한 사람들은 제어받지 않고 마귀의 뜻을 이행하였으며, 마음속에 있던 증오심을 마음껏 발산하였다.

 

54. 예수를 잡아 끌고. [산헤드린 앞에서의 밤중 재판]. 누가는 심문과 베드로의 배반을 엄밀하게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기록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베드로가따라. 요한이 좇아간 것처럼(참조 요 18:15). 예수가 저항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확실해지는 순간 모든 제자가 그를 버렸다(26:56).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최소한 어느 정도의 평정을 되찾고 대제사장 관저까지 그 무리들을 따라갔다. 다른 이들은 용기가 부족했다.

 

멀찍이. 거리를 두고”(개정표준역). 베드로는 공개적으로 예수 편에 설 만큼 충분한 용기를 갖진 못했으나 그럭저럭 대부분의 동료 제자들보다는 좀 더 용기가 있음이 증명되었다.

 

56. 한 여종. 이 사람은 베드로가 들어오도록 허락해 준 여자 문지기였다(18:16, 17; 시대의 소망, 710, 711,).

 

57. 베드로가부인하여. 베드로는 불과 몇 시간 전에 주어진 예수의 경고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참조 31~35절 주석). 그는 남들이 자기를 몰라보길 바랐고, 심지어 예수를 험담하는 무리에 가담했다(참조 시대의 소망, 712). 이것은 베드로의 첫 번째 부인이었다. 기록이 지적하는 바에 의하면 세 번의 부인은 모두 오전 3시부터 5시 사이에 있었던, 산헤드린 앞에서의 첫 번째 심문 도중에 행해졌다. 예루살렘의 위도에 비춰 볼 때, 연중 이때쯤이면 4시경에 첫 새벽빛을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일출은 5시 반경에 있었을 것이다.

 

61. 베드로가생각나서. 베드로가, 예수가 처음에 다락방에서 말하고 또다시 겟세마네로 가는 도상에서 말한 그 경고(참조 34절 주석)를 완전히 잊어버렸음이 분명하다. 그의 과오의 뿌리는 자신감과 자랑에 있었다(35). 이제야 생각이 났으나 너무 늦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예수의 말을 성취시켰다. 겸손함과 선한 권고에 기꺼이 유의하려는 마음은 어리석은 과오를 막아 주는 최선의 방책이 된다.

 

62. 밖에 나가서. 두세 시간 전에 그가 들어왔던 뜰에서 밖으로 나갔다는 말이다. 22:61에 따르면, 베드로가 급히 떠나기 직전에 예수는 베드로 쪽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이리저리 방황하던 베드로는, 선생님이 불과 얼마 전에 엎드려 있던 바로 그 장소인 겟세마네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참조 시대의 소망, 713).

 

심히 통곡하니라. 눈물을 터뜨리다.” 만일 베드로가 저주하는 말을 한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린 만큼 깨어 기도하라”(41)는 예수의 권고에 진지하게 유념했다면 그는 결코 그런 말들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베드로는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겠지만, 구주의 사랑은 그에게 희망을 주었고 참담한 경험을 안전하게 통과하도록 해주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어두운 시간일지라도, 번민과 패배의 경험이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예수의 사랑의 빛이 힘을 주지 못하거나 구원할 수 없는 경우는 없다. 참조 시대의 소망, 382.

누가복음 22:14-34
[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7]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21]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23] 저희가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24]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34]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 먼저 본문을 읽으면서 자세히 관찰하세요.

 

“그리스도의 모본은 성만찬 예식에 사람들을 제외시키는 것을 금하신다. 공개된 죄로 인해 죄지은 자가 제외되는 것은 사실이다. 성령께서는 이것을 분명히 가르치신다(고전 5:11). 그러나 이 이상은 아무도 판단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이 경우에 참석시킬 것인가를 말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그 까닭은 누가 마음을 읽을 수 있겠는가? 누가 알곡에서 가라지를 골라낼 수 있겠는가?
신자들이 이 의식을 거행하려고 모일 때에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자들이 합께 참석한다. 회중 가운데는 유다와 같은 자도 있을 수 있다. 회중 가운데 마음으로는 진리와 거룩함의 종들이 아니지만 예식에 참석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올지 모른다. 그들을 금하지 말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다의 발을 씻기실 때에 참석하였던 증인들이 그 곳에도 참석한다. 인간 이상의 존재들의 안목이 그 장면을 보았다.
영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 유다의 발을 씻기신 분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에서 죄악의 오점(汚點)을 씻으시기를 열망하신다.
합당치 못한 어떤 사람이 참석하였다는 이유로 아무라도 참석을 거부하지 말 것이다. 모든 제자들은 공개적으로 참석하므로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증거하도록 요청을 받는다.”(시대의 소망, 656)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당신이 친히 세우신 의식을 시인하려고 그 곳에 계신다. 그분은 죄를 깨닫게 하고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려고 그 곳에 계신다. 죄를 뉘우치는 단 한번의 표정이나 생각일지라도 예수께서 주목하지 않으시는 일이 없다.
 

본문연구

  1. 주의 만찬은, 온 세대를 통하여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을 보존하고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눅 22:15~18; 출 1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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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찬의 식사는 겨우 네 절밖에 언급하지 않았지만(눅 22:17~20), 그 속에는 예수님의 희생이 상징되고, 구주 안에 있는 교제가 표현되며, 서로 그리스도를 나누어 먹고 새로워지며, 어린양의 잔칫상을 기대하며, 우리는 주님의 재림의 소망을 함께 간직한다. 상세한 것을 알기 위해서, 고린도전서 11장 23~26절에서 바울의 설명을 읽어라.
        
  2. 신자들이 자주 주님을 실망시키는 일은 무엇인가?(눅 22:24). 그러한 분쟁을 역전시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조치를 취하셨는가?(요 1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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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든지 이 예식을 바르게 거행할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서로 도우며 서로 축복하는 거룩한 교제에 들어가게 된다. 저들은 저희 생애를 무아적 봉사 사업에 바칠 것을 맹세한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 봉사하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저들의 일터는 주님이 가지셨던 그것처럼 넓다. … 다락방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성찬에 참여했던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봉사하기 위하여 나아갈 것이다”(시대의 소망 3권, 135).

  3. 유다와 베드로는 사단이 이기는 것을 비방하기 위해서 어떤 조처를 취할 수 있었는가?
    (눅 22:3~6, 31~34; 약 1:13~15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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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의사항

  1. 섬기는 자로서 나는 우리교회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함께 나누어 봅시다.

  2.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들로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 경험이 있습니까? 그것이 내게 어떤 축복이 되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3. 내 형제를 굳게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4. 주님이 우리 각자의 문제들과 시험들에 대하여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될 때 여러분은 얼마나 큰 위로를 받습니까? 

과거와 미래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시련 가운데서도 그분과 함께 견뎠다고 선언하셨다(눅 22:28). 그리스도께 헌신한 것은 보상을 받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승리의 삶을 통하여, 왕국의 선물이 그들에게 가능하게 해주셨다. 


14. . 이것은 7~13절이 관련된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는 때이다. 이때는 목요일 밤이었다. 예수가 정규적인 유월절 만찬이 진행되는 동안 그리스도인의 성만찬 예식을 제정했음을 주목하라. 이것은 12명이 함께 한자리에 모인 마지막 기회였음을 증거한다. 관례에 따르면, 유월절 식사 때는 최소 10명에서 30명 미만의 인원이 한자리에 참석해야만 했다. 이 모임에는 13명이 참석했다.

 

앉으사. 오히려 기대사.” 최초의 유월절 식사 때는 참여자들이 애굽에서 떠날 준비를 하고, 서서 식사를 했다. 그러나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후에는 그들이 더 이상 서지 않고, 앉거나 편히 기대었다. 최초의 유월절에 서서 식사한 자세가 그들이 급히 출발해야 할 것을 암시했다면, 이때의 기대어 누운 자세는 약속된 땅에서의 평안함과 안전함을 나타냈다.

 

15.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거듭하여 예수는 자기의 고난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했다. 종종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야의 고난에 대하여 말했다(참조 시 22; 53장 등). 예수는 우리 구원의 ”(참조 brews/2/10e)로서 인정되기 위하여 십자가로 가는 내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있을 수 없었다(참조 벧전 1:11). 겸손한 예수를 따라가는 자들로서, 그의 고난에 한 몫을 나누어 가지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이 유월절. 예수의 공중 봉사의 네 번째 유월절(참조 제9, 101, 143),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함께 지키는 세 번째 유월절이었다. 그러나 이전의 경우, 이 무리의 구성원으로서 그들 모두가 참여하지는 못했다. AD 28년과 29년의 유월절은, AD 29년 여름에 12명을 선정, 지명하기 전이었다. 이번에 예수와 열두 제자가 함께 지키는 유월절이야말로 진정한 유월절 만찬이었다.

 

원하고. 원하고 원하였노라라는 표현은 내가 심히 원하였노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특유의 관용구이다. 이와 유사한 관용적인 표현이 요 3:29(“크게 기뻐하나니”), 4:17(“위협하여”)을 포함하여 신약의 다른 곳에도 나온다. 이런 표현들은 70인역에 아주 흔하게 나온다. 이것은 배반당함과 심문,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기 전에 예수가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할 마지막 기회였다. 예수의 지상 봉사의 절정인 이것은 그가 사람들 가운데서 봉사하는 동안 늘 그의 심중에 있었다. 거의 1년 동안 예수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 때 일어날 이 사건들을 위해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준비시키고자 부지런히 애썼다(참조 마 16:21; 20:17 주석 등).

 

16. 이루기까지. 죄로부터의 최종적이고도 완전한 구원은 영광의 나라에서 있을 것인데, 그것에 관하여는 이미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말했다(참조 마 25:31 주석). 예수가 한 이 말은 아마도 어린양의 혼인만찬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참조 계 19:7~9),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는 사실을 기념하여 열리는 것이다(참조 1~6). 영원한 나라에서 구원받은 자들이 누리는 행복을 상징하는 엄숙한 종교 절기에 대한 해설은 1:15, 16 주석을 참조하라.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뜻깊은 마지막 유월절이었다.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가 임종하는 순간에 성전에 있던 휘장이 찢어진 일(참조 마 27:51 주석)은 유대 종교 체계의 상징이 폐기되었다는 하늘의 표징이었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것이 가리킨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기 생명을 주었기 때문이다(참조 골 2:17). 지금 예수는 과거의 죽은 상징물들을 자신의 몸과 자신이 흘릴 피의 살아 있는 상징물들로 대체하려 하고 있었다(참조 눅 22:19, 20; 시대의 소망, 652).

 

21. 나를 파는 자. 문자적으로는 팔고 있는 자.” 유다는 이미 유대 지도자들과 만나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줄 것을 합의했다(참조 마 26:14, 15 주석). 그 배반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손이. 누가는 주의 만찬에 관한 이야기를 배반자로서의 유다에 관한 이야기보다 먼저 말하는 데 비해, 마태와 마가는 이 순서를 바꾼다. 누가의 기록은 시간적인 순서를 따른다.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아마도 제자들의 모든 손이 상 위에있었을 것이다. 이 말은 유다를 배신자로서 밝히지는 않았고, 단순히 배신자가 식탁 주위에 기대어 있는 자들 가운데 한 사람임을 확인해 주었다.

 

24. 누가 크냐.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막 세우려 한다고 생각하는 나라에서 차지할 지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다툼. 문자적으로는 논쟁.” 이것은 싸우고자 하는 투쟁 정신과 열기를 암시한다. 이런 불화의 물 밑 조류는 유월절 식사 내내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이야기는 요한이 기록한 겸손 예식이 탄생하게 된 경위를 설명해 준다. 이제 곧 일어나려는 사건들을 생각해 볼 때, 제자들이 그리스도가 세우려고 온 것도 아닌 상상의 나라에서, 어느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에 대해 논란을 벌인 것은 비극적인 일이었다. 상대적으로 누가 크냐 하는 논란은 이전의 경우와 같이(참조 마 18:1; 20:21; 9:33~35; 9:46~48),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나라의 성격에 대한 제자들의 잘못된 개념 때문이었다.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부활 후까지 가지고 있던 잘못된 개념들, 그리고 메시야 나라의 성격에 관하여는 24:19 주석을 참조하라. 유다는 스스로 예수의 왼편에서, 요한은 예수의 오른편에서 영예로운 자리를 하나씩 차지했다(시대의 소망, 644).

 

26. 너희 중에 큰 자. 가장 위대한 사람은 가장 무아적으로 다른 이들을 섬길 것이다. 예수는 군림하는 대신 섬김이라는 관점에서 크게 되고자 하는 욕구를 승인한 것이 분명하다.

 

젊은 자. 동방인의 가정생활에서 동생은 형의 의견을 따르는 데 익숙해 있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큰 자에게 순복하는 자세를 가지라고 말했다.

 

27. 섬기는 자. 예수는 남을 위해 봉사하는 자신의 무아적인 모본을 지적한다. 인류의 육적·영적 필요를 위해 봉사하도록 그리스도를 고무시켰던 그 정신이, 그의 제자들이 될 모든 사람의 생애를 고무시켜야 할 것이다.

 

28. 항상. 이 말은 끈질기고 일관된 충성에 관한 개념을 나타낸다. 제자들은 분명한 결함들을 갖고 있었지만, 대체로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헌신에 비춰 볼 때 충성되었다.

 

29. 나도 너희에게 맡겨. 이것은 그들의 충성에 대한 보상이 될 것이었다.

 

31. 시몬아, 시몬아. 시몬을 거듭 부른 것은 예수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사단이청구하였으나. 사단은 이미 유다를 손아귀에 넣었다(참조 욥 1:12; 2:6).

 

너희를. 헬라어 본문에는 복수로 되어 있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은 모든 제자를 위한 것이다.

 

32. 내가기도하였노니. 주님이 우리 각자의 문제들과 시험들에 대하여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가! 이 대화가 있은 지 오래지 않아 예수는 음성을 높여 아버지께 기도하였다. 예수의 제자들 모두가 그 기도의 대상이었다(참조 요 17:2, 9, 15, 17).

 

. 너희라는 말과 대조적으로(참조 31절 주석), “는 단수형이며, 따라서 예수의 추종자들 각자, 여기서는 특히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개인적인 관심을 강조한다.

 

떨어지지. 헬라어 에클레이포(ekleipo-). “내버려 두다또는 저버리다.” 완전히 저버린다는 개념을 나타낸다. 영어의 “eclipse”([])은 에클레이포에서 유래했다.

 

돌이킨. 헬라어 에피스트레포(epistrepho-). “돌다또는 돌아오다따라서 개혁하다.” 예수는 베드로가 정말로 떨어져 나갈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다시 돌아설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부인한 결과로 베드로가 곧 겪게 될 쓰라린 경험은 동료 제자들도 분명히 알 수 있을 만큼 그에게 변화를 가져왔다.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진리를 위한 베드로의 담대함은 그의 회심이 철저했음을 증거하며, 그가 걸어온 봉사의 길은 예루살렘 안과 주변에 살던 신자들에게 힘과 용기가 되었음을 입증해 주었다(참조 행 2:14; 3:12~15; 4:8~13; 5:29~33 ).

 

34. 베드로야. 여기서 예수는 자기가 직접 지어준 베드로의 이름을 부른다.

누가복음 21:29-36
[29]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31]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3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 먼저 본문을 읽으면서 자세히 관찰하세요.

방탕함과 불경건한 향락으로 가득찬 세상에 심취되어 있으며 현세적 안전에 마비되어 있다. 사람들은 주의 오심을 멀리 지체시키고 있다. 저들은 경고를 비웃는다. 거만하게 자랑하기를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내일도 오늘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고 말한다(벧후 3:4; 사 56:12). 우리는 향락을 사랑하는데 더 깊이 빠져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라고 말씀하신다(계 16:15). 세상이 조롱하면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하고 묻는 바로 그때에 징조는 성취되고 있는 중이다. 저들이 “평화와 안전”을 부르짖을 때에 홀연히 멸망이 이른다. 진리를 경멸하고 거절하는 자가 건방지게 될 때에, 여러가지 영리적 방면에 있어서 원칙을 돌보지 않고 사업의 일과를 수행할 그때에, 학생이 그의 성경은 연구하지 않고 각 방면의 지식을 열심히 추구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는 도적과 같이 임하신다(소망 635). 

 

항상 하나님께서는 다가오는 심판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셨다. 저희 시대에 주신 하나님의 기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중에 믿음으로 행한 자들은 불순종하고 불신하는 자들에게 내린 심판을 면하였다.
 

본문연구

  1.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우리는 왜 예수께서 오실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습니까?(29~31절).
    그리스도의 재림의 정확한 때를 아는 것이 왜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
    만일 우리가 눈을 뜬다면 천연계는 우리에게 재림을 경고해 준다. 봄에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여름이 오고 있음을 안다. 우리는 뜨거운 날이 정확히 언제 닥칠지는 모르지만 그날이 오리라는 것은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다. 엘렌 화잇도 봉사 기간에 재림의 시기를 정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보았다. 그녀는 재림신자들이 이러한 추측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가르쳤다.  
        
  2. 주께서는 당신께서 오시기 전에 당신의 자녀들이 각자 어떤 품성을 소유하게 되기를 바라시는가?(계 3:1~5,18,19)

    __________________________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그러나 이 문은 허술하게 이리 저리 밀리는 문이 아니다. 그것은 의심쩍은 사람은 들여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 앞에 있는 상급의 가치와 비례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천국 문은 돈이나 땅이나 지위를 가진 자에게 열리지 않고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소유한 자에게 열릴 것이다. 영생의 면류관은 고관이나 학식 있는 자가 얻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온유하고 겸손한 자 곧 하나님을 그들의 능력으로 삼은 자들이 이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그리스도인 선교봉사, 301).  

토의사항

  1. 요즘 이루어지고 있는 재림의 징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재림을 맞이 하기위해 내가 스스로 조심해야 하는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나에게 가장 큰 덫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3.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기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인지 각자 자신의 방법을 이야기해 봅시다. 

그리스도께서는 구름을 타고 큰 영광으로 오신다. 한 무리의 빛나는 천사들이 그를 옹위할 것이다. 그는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고 살아 있는 성도들을 변화시켜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하시려고 오실 것이다. 그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킨 자들을 높이고 저들을 그에게로 데려가시려고 오실 것이다. 그는 저들을 잊지도 않으실 것이요, 그의 약속도 잊지 않으실 것이다. 


29. 비유. 이 간단한 비유는 천연계에서 끌어낸예증에 바탕을 둔 것이다. 팔레스타인에는 무화과나무가 흔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 싹이 트는 것은 날씨가 따뜻해진다는 확실한 징조였다.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의 비유(13:6~9)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11:12~14, 20~26)를 비교해 보라.

 

모든 나무. 누가는 무화과나무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여기서 설명한 진리는 단지 무화과나무뿐만 아니라 모든 나무에 적용할 수 있음을 알려 준다.

 

31. 너희가보거든. 징조에 대한 개인적인 인식과 그것들의 의미에 대한 이해를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선지자들(참조 24절 주석)큰 표적과 기사, 예수가 언급한 참 징조들을 구별해야 한다. 그들은, 예수가 예고한 바 끝은 아직 아니지만(8) “재난의 시작”(6)을 가리키는 사건들과, 그의 다시 오심이 가까이 곧 문 앞에 이”(33)르렀음을 가리키는 징조의 차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일이. 이것은 30절 인자의 징조를 포함하지 않는데, 이것이 보일 즈음이면 예수가 단지 문 앞에 이른것이 아니라 이미 구름을 타고 오시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이란 표현은 특히 29절을 가리키며, 예수가 마지막 이전에 일어날 일로 언급한 다른 사건들과 징조들도 포함한다. 이런 것들에 대한 완전한 목록을 보려면 막 13장과 /21/1을 참조하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와 대조되는 영광의 나라이다(참조 마 4:17; 5:2).

 

32. 이 세대. 주석가들은 일반적으로 23:36이 세대라는 표현이 사도들의 세대를 가리킨다고 주장해왔다(참조 23:36 주석). 예수는 이 세대라는 표현을 이런 의미로 거듭해서 사용하였다(참조 11:16; 12:39, 41, 42, 45; 16:4; 17:17; 11:16 주석). AD 70년에 일어났던 예루살렘의 몰락에 관한 그리스도의 예언은 문자적으로 당시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 생전에 실현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34절의 이 세대라는 낱말은 오로지 세상 끝에 있을 인자의 오심만을 다루고 있는 27~51절의 문맥안에 놓여 있다(참조 시대의 소망, 633). 27~51절과 누가복음하늘과 땅에있는 징조”(21:25)에 언급된 징조들은 그리스도의 오시는 날이 아주 가까울 때 일어날 것이므로 마지막 징조들을 보게 될 그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그리스도의 오심과 세상의 끝)이 다 이루리라, 그분이 선언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를 따르는 자들이 그분이 다시 올 때를 정확히 알아야 함을 의도하였던 것은 아니다. 예고된 징조들은 그의 오심의 임박함은 증거했지만, 그분은 그 사건의 날과 그때아무도 모르나니”(24:36)라고 강조해서 선언하였다. “이 세대라는 표현을, 그분의 오심으로 종결될 시간을 추정하여 산정하기 위한 근거로 삼는 것은 그분의 교훈이 갖는 문자적인 면과 영적인 면을 다 어기는 것이다(참조 36, 42절 주석).

 

33. 천지. 대기권의 하늘과 땅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성경적 표현이다(참조 창 1:8; 벧후 3:5, 7, 10, 12, 13 ).

 

없어지겠으나. 이는 행성으로서의 지구의 존재가 없어지겠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오히려 대기권의 하늘과 땅의 표면이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에 관한 설명을 보려면 사 34:4; 벧후 3:7~13을 참조하라.

 

내 말. 참조 5:18 주석. 땅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의 정책은 변하지만, 하나님의 원칙이 영원히 굳게 서는 것은 하나님이 변역치 않는분이기 때문이다(3:6). 여기에서 예수는 미래에 관한 계시의 확실성을 강조하는데 특히 그의 오심과 세상의 끝에 관하여 그렇다(참조 24:3 주석).

 

34. 방탕함. 헬라어 크라이팔레(kraipale-). “취기또는 술로 인한 두통.” “머리를 뜻하는 크라스(kras)흔들다또는 주위로 던져 올리다라는 뜻의 팔로(pallo-)에서 유래되었다. 헬라의 의학자들은 크라이팔레를 폭음 후에 오는 구토증이나 혼수 상태에 적용하였다.

 

36. 능히 피하고. 효과적으로 피하다또는 피할 힘을 가지다라는 독법을 지지하는 중요한 본문상의 증거를 인용할 수 있다.

 

항상 기도하며. 특히 재림과 그 전에 있을 시험의 때를 고려해 볼 때 그러하다. 기도는 의무 이상의 것으로서 필수적이다. 예수는 여기에서, 기도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늘의 대리자들과 협력하고자 실제적인 노력을 경주하는 일을 배제하거나, 개인적인 책임을 소홀히 하면서까지 기도에 몰두하는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낙망치 말아야의 주석을 참조하라). 예수가 의미하는 내용은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응답이 지연될 때에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참조 7, 8). “항상기도한다는 말은 매일, 매 시간 하나님과 끊임없는 접촉 가운데 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비유들을 해석하는 원칙에 대해서는 제9, 113, 114을 참조하라. 예수의 기도생활에 관한 토론은 막 1:35; 3:13 주석을 참조하라. 이외에 예수가 제자들에게 준 기도에 관한 교훈은 11:1~9 주석을 참조하라. 또한 마 9:38에 언급된 그의 교훈과 비교해 보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주의하라깨어 있으라라는 경고는 이 장의 거듭되는 주제를 구성한다. 경성함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예수는 여섯 가지 비유를 말씀하였다: 여기에서는 한 절로 압축된다(24:42). 문지기 비유(13:34~37), 집주인의 비유(43, 44), 충성스러운 종과 불충성한 종의 비유(45~51), 열 처녀의 비유(25:1~13), 달란트의 비유(14~30), 양과 염소의 비유(31~46).

그리스도인들은 나태한 마음으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그들은 깨어 기다리며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자신들의 영혼을 정결케 하는 일에 부지런하고 또 남을 위하여 일하는 데에 열심을 내야 한다. “하나님의 날이 도래하기를 고대할 뿐 아니라 촉진시켜야”(시대의 소망, 633) 하는 것은 그들의 특권이다.

누가복음 21:5-28
[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7] 저희가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8]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9]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10]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11]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12]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13]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14]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16]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17]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20]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21]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찌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찌어다

[22]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23]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24]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25]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27]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8]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이르는 사건들과 당신의 재림 직전에 있을 사건들 사이의 어떤 유사성을 묘사하셨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의 재림의 큰 날을 따로 분리하여 제자들에게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는 이 두 사건을 섞어서 말씀하셨다. 만일 예수께서 당신이 보신대로의 장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제자들에게 공개하셨다면 저들은 그 광경에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저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는 두 큰 위기를 섞어서 설명하시고 제자들이 스스로 그 뜻을 연구하도록 하셨다”(시대의 소망 3권, 97).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오시기 전에 있을 사건들에 대하여 우리에게 매우 분명하게 묘사해 주셨다.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앞서 예상되던 사건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께서 오시기 전에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는 사건들과 상황에 대하여 우리에게 예고해 주셨다.

 

본문연구

  1. 예수께서 다가오는 예루살렘의 멸망의 각 징조들을 당신의 재림 직전에 있을 유사한 사건의 유형으로써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아래에 적어보라.
    8절 ____________________
    9절 ____________________
    10절 ____________________
    11절 ____________________

  2. 예수님의 재림 전에 전 세계적인 의미 심장한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인가?
    ____________________

  3.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주목해 보아야 했던 임박한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특별한 징조는 무엇이었습니까?
    (막 13:14; 참고 마 24:15; 눅 21:20).
    ____________________

 

토의사항

  1.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재림의 징조는 무엇이며, 왜 그런지 이야기해 봅시다.

  2.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왜 끝까지 견디는 일이 필요한가?(마 24:13)
    우리는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가?(엡 2:8~10)

  3. 재림의 징조가 당신에게는 기쁜 소식입니까, 아니면 두려운 소식입니까?
    재림의 소식이 기쁘고 행복한 소식이 되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이야기 해 봅시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때에 관한 소식이 나쁜 소식이면서 동시에 좋은 소식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한편 그분을 따르는 자들은 사회적, 정치적 및 자연계에 있을 격변, 즉 모든 것이 궤도에서 이탈하고 과거의 안정성이 무너지는 대격변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이 담겨 있다. 그 기쁜 소식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기별이 모든 민족에게 선포된다는 것이다.


5. 예수께서가라사대. 아마 화요일 늦은 오후였을 것이다. 예수는 성전 뜰에서 가르치며 그날을 보냈고 유대 지도자들로부터 번갈아 가며 되풀이해서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성전을 떠난 후에 예수와 적어도 네 명의 제자들은 기드론 계곡쪽의 가파른 길을 내려가서 기드론 계곡 위로 솟은 해발 약 122미터의 감람산 비탈길을 올라갔다. 이 산은 성전보다 대략 91미터가 높기 때문에 그 산에서 성전과 도성을 조망할 수 있다.

 

미석과 헌물. 성전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자부심이었고 기쁨이었다. 요세푸스는 성전의 흰 돌 벽을 눈 덮인 산의 아름다움에 견주고(War v. 5, 6 [223]), 그 일부 돌들의 엄청난 크기를 20×2.1×2.7미터라고 밝힌다. 성전은 이제 근 50년에 걸쳐 건축이 진행되고 있었고(참조 요 2:20) 뜰과 건물 전체 공사는 AD 63년경성전이 티투스(Titus) 군대에 의해 완전히 멸망되기 7년 전까지도 완공되지 않았다.

 

6. 돌 하나도 돌 위에. 이 예언은 글자 그대로 AD 70, 예루살렘 멸망 때에 성취되었다.

 

무너뜨리우리라. 요세푸스(War vi. 4, 5~8 [249~270])는 성전의 파괴와, 성전을 구하기 위한 티투스의 노력들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뛰어난 건축물인 이 성전은 무궁토록 세파를 견뎌낼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예루살렘 성 자체는 사실 난공불락이었으나 예수는 무력에 의해 멸망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7. 어느 때에. 어리석게도 그들은 예수가 이제 얼마 못 가서 자신을 왕으로 선포할 것이며, 메시야로서 민족의 환호를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렇다면 성전의 멸망은 언제 이르러 올 것인가?

 

이런 일성전 파괴와 세상 끝에 있을 예수의 두 번째 오심을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사건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이런 사건들이 동시에 혹은 빠르게 연달아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승천하던 날에, 제자들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이까?”라고 묻자 예수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1:6, 7)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유대 민족이 예수를 거절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 그 민족도 버림당할 것임을 여전히 깨닫지 못했다. 장래 사건들에 대한 지식은 그당시에는 그들에게 너무 벅찼을 것이다. 예수가 자신의 임박한 고난과 죽으심과 관련하여 근 1 년간 제자들에게 베풀었던 그 반복된 가르침을 사실상 그들이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예고된 사건들은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거의 넘어선 것으로 입증되었다.

 

8. 미혹. 주의하라는 일차적인 이유는 미혹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다. 예수는 이런 저런 형태로 이 경고를 여러 번 반복하였다(참조 4~6, 11, 23, 36, 42~46).

 

내 이름으로. 즉 메시야로 자처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8절의 경고는 이러한 형태의 미혹에 넘어갈 가능성이 현저했던 시기인 예루살렘 멸망과 유대 민족의 멸망에 적용된다. 사도 시대에 많은 거짓 메시야들이 있었다. Jose- phus War vi. 5. 4 [312~315]를 참조하라. 후에(27) “우리 주께서 오해의 여지가 없는 언어로 자신의 두 번째 오심에 대하여 말씀하신다”(시대의 소망, 631).

 

9. 소문. 제자들은 AD 70년 이전에 전쟁이 일어날 때 놀라거나 불안해하지 말아야 했다.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전쟁이 있을 것이나 그것이 곧 있을 예수 재림의 징조는 아니었다.

 

. 이 강론에서 우리 주님은 한 민족으로서의 유대 민족의 마지막과 세상의 마지막을 다 내다보았다. 랍비들은 6~8절에 나오는 징조들이 메시야의 강림의 표적이며 속박으로부터 해방의 표라고 선언할 것이었으나 예수는 이런 것들을 그들의 멸망의 징조로 지적했다. 따라서 사도 시대의 전쟁과 전쟁의 소문들이 유대 민족의 종말을 예고하였던 것처럼 우리 시대의 국제적 혼란과 분쟁은 세상의 종말의 전조가 된다.

 

10. 민족이일어나겠고. 유대와 로마 작가들은 AD 31~70년의 기간을 대재난의 시기로 묘사한다.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있었던 사건들 속에서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시대의 소망, 628, 629,). 7절의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것이라는 예언 또한 일차적으로 동일한 기간을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예수는 그 당시의 정치적 분쟁과 기근과 지진을, 세상의 이 곧 있을 것이라는 징조로 여기지 말라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하게 경고했다(참조 3절 주석).

 

11. 기근. AD 44년경 유대에 있었던 극심한 기근이 행 11:28에 암시되어 있다. AD 41~54년에 이르는 글라우디오(Claudius) 치세 동안 모두 네 번의 대기근이 있었다.

 

지진. AD 31년과 70년 사이에 대지진이 잇따라 있었다. 이중 최악의 것은 그레데(46년 또는 47), 로마(51), 브루기아(60), 캄파니아(63)에서 있었다. 타키투스(Annals xvi. 10~13) 역시 65년의 극심한 허리케인과 폭풍들을 언급하고 있다.

 

12. 너희를넘겨 주며. 스데반(7:59, 60), 베드로와 요한(4:3~7, 21)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12:1~4)는 당국자들의 손에 의하여 고난을 당한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에 속한다. 바울은 벨릭스, 베스도, 아그립바, 가이사 앞에 출두했다(24~28). 13:9~12과 비교하라. 24:21, 22에서 그리스도는 특별히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 닥칠 핍박에 대하여 말한다.

 

14. 연구. 헬라어 프로멜레타오(promeletao-). “미리 연습하다.” 이것은 아마도 강사가 강연할 때에 익숙하게 하기 위하여 미리 반복하여 연습하는 일을 가리키는 것 같다. “임금들과 관장들앞에서 변명할 때에 제자들은 할 말을 기계처럼 외워서 하지 말 것이었다.

 

18. 머리털 하나도. 이 약속은 순교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편적인 보증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방금 전에 어떤 이들이 죽임을 당할 것을 말했기 때문이다(참조 16). 아마도 여기서 의미하는 내용은, 그리스도인들을 법정으로 끌어가는 관원들도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가 아니면 그들을 해할 능력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참조 요 19:11; 5:35~38).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의 말은 이 세상의 당면한 전망보다는 궁극적인 결과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고, 이 땅의 관원들은 다른 사람의 영원한 복지에 대하여 아무런 권세도 가지고 있지 못함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참조 마 10:28, 30 주석; 10:28, 29).

 

20.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21:20). 예고된 그 사건은 AD 70, 즉 성전 경내에 이교 로마의 상징물이 세워졌던 때에 로마인들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것을 말한다. 바르 코케바(Bar Cocheba)가 일으킨 유대인들의 반란이 AD 135년에 진압되었을 때, 로마인들은 이전의 유대 성전 자리에 쥬피터(Jupiter Capito- linus)에게 바치는 신전을 세웠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도성에 들어가면 사형에 처해졌다.

 

21. 산으로 도망할지며. 히브리 사람들이 수 세기에 걸쳐 외국의 침략을 받았을 때 행하였던 방법이다(참조 삿 6:2; 삼상 13:6; 11:38). 요세푸스는 그 도성의 포위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과 그후에 백만 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죽었으며, 97,0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혀갔다고 말한다(War vi. 9. 3 [420]). 그런데 로마 군인들이 예기치 않게 예루살렘 포위망을 해제한 일시적인 휴전 기간 중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도망쳤는데 이들 중 아무도 생명을 잃지 않았다. 그들이 피신한 장소는 갈릴리 호수 남쪽으로 27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으로, 요단강 동편 구릉지대에 있는 한 도시인 펠라였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로마 군대 사령관 티투스는 하나님이 그렇게 되기를 뜻하지 않으셨더라면 자기 군대로도 공성병기로도 예루살렘의 성벽을 돌파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그 도성의 완강한 방어로 인하여 로마 군인들이 격분하여 마침내 성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의 복수심은 극에 달해 있었다.

 

21. 그때에. 즉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대 민족의 몰락 이후를 말한다. 유대 민족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 사이에 긴 흑암의 세기들 즉 그분의 교회를 피와 눈물과 고통으로 특징지은 세기들이놓여 있었다. 21절에서부터 예고되기 시작하는 징조는 오직 세상의 종말을 가리킨다(참조 시대의 소망, 630, 631,).

 

23. 큰 환난이. 교회에 대한 첫 번째 핍박은 유대 지도자들로부터 왔다. 잠시 후, 이방인들 역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고 3세기 가까이 교회는 이교 로마에 의해 간헐적으로 고난을 당하였다. 교황의 지상권과 핍박의 1260년이 538년에 시작되었다.

 

24. 밟히리라. AD 70년 이전에 로마의 지배하에 유대인들이 누렸던 것과 같은 자치권은 결코 회복되지 않을 것이었고, 그 운명의 해 이래로 예루살렘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이 이방인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AD 135년에 발생한 바르 코크바(Bar Cocheba)가 주도했던 항거의 결과로, 모든 유대인은 그 성읍에 들어가면 사형을 당하게 된다는 경고와 더불어 출입을 금지당했다. 성전은 AD 70년 이후에 영영 중건되지 못했다. 다른 민족들 가운데, 로마인, 사라센 사람들, 북 유럽 사람들, 투르크족, 십자군들 그리고 아랍인들이 그 도성과 이전의 성전 구역을 통치했다. 비록 최근에 이스라엘 신정부가 그 도성의 일부 통제권을 획득했을지라도, 구예루살렘은 여전히 유대인의 도성이 아니며, 이전의 성전 지역도 비유대인들의 수중에 남아 있다.

 

25. 일월성신.

. 여기에서 해가 어두워진다고 예고된 것은 큰 암흑일로 알려진 1780519일에 일어났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다시 오심을 고지하도록 정해진 해와 달과 별들의 징조 중 첫 번째 징조였다.

. 1780519일 밤에, 낮 동안 해가 그랬던 것처럼 달빛이 가려졌다.

별들. 역사상 가장 거대한 유성우라고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일이 18331113일에 성취되었다. 1780년과 1833년의 이 두 현상은 예수의 예언을 정확하게 성취시켰다. 왜냐하면 두 사건이 상세하게 설명된 그때(참조 앞글)에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들은 세부적인 사항에 가장 잘 부합되는 사건들이었다.

 

26. 사람들이생각하고. 문자적으로는 사람들이 두려움 때문에 숨을 거두다또는 사람들이 공포 때문에 기절하다.” 이 절의 뒷부분이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혼절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를 제시해 주는데, 그것은 하늘의 권능들이흔들리기 때문이다. 여기에 묘사된 장면은 일곱째 재앙 아래서 일어난다. 이 장면에서 악인들은 공포와 놀라움을 가지고 바라보면서, 산과 바위를 향해 저희 위에 떨어지기를 청한다(6:14~17).

누가복음 21:1-4
"[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막 12:41-44) "[41]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가난한 과부가 드린 적은 예물은 그녀의 생활비 전체였다. 그 여자는 그녀가 사랑하는 사업을 위하여 두 렙돈을 드리려고 그의 음식을 희생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하늘 아버지께서 그녀의 큰 필요를 간과하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고 믿음으로 그것을 드렸다. 구주의 칭찬을 받은 것은 이 이기심 없는 정신과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이었다.”(청지기, 176)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풍족한 중에서 바치므로 궁핍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사업을 위하여 어떤 것도 희생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음으로 원하는 것은 여전히 다 가지고 있다. 그들은 거리낌없고 즐거운 마음으로 바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인정하신다. 그분은 행동과 동기를 아시고 엄격히 주시하신다. 그들은 상급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처럼 후하게 바칠 수 없는 그대들은, 다른 어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바칠 수 없다고 해서 그대 자신을 변명해서는 안 된다. 그대가 할 수 있는 바를 하라. 없을지라도 살아갈 수 있는 어떤 물건들을 스스로 부인해 버리고,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희생하라. 과부처럼, 그대의 두 렙돈을 바치라. 그리하면, 그대는 풍족한 가운데서 바치는 모든 사람들보다 실지로 더 많은 것을 바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자아를 부인하는 것,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 진리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1증언, 177)

 
누가와 마가에 의해 기록된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예수님의 특별한 교훈을 말해주려고 하는 것이다. 헌금은 왜,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드리는 것일까?
 

본문연구

1. 본문을 마가복음 기록과 병행하여 자세히 살피고 각 절마다 관찰되는 것들을 적어보라.
   1절 _______________
   2절 _______________
   3절 _______________
   4절 _______________
 
2. 위에서 관찰된 것들을 이해하고 설명하여 보라.
    1)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헌금 넣는 것은 보신 것은 우연인가 아니면 의도적 이었는가?
    2) 과부의 헌금 “두 렙돈”은 어는 정도의 액수인가? (막 12:42 참고)
        cf) 두 렙돈=한 고드란트 (1 앗사리온=8 렙돈)
    3)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4) ‘풍족한 중에서’와 ‘구차한 중’에서는 어는 정도의 차이일까? (고후 8:20, 9:11 참조)
 
3. 아래 선지자의 글에서 관찰되는 것들은 무엇인지 서로 이야기 해 보라.

“예수께서는 연보궤가 있는 마당에 계셨으며 거기서 저희 예물을 넣으려고 오는 사람들을 바라보셨다. 많은 부자들이 매우 자랑하는 태도로 많은 예물을 가지고 와서 드렸다. 예수께서는 슬픔으로 그들을 바라보셨으며 그들의 후한 예물에 대하여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얼마 후에 한 불쌍한 과부가 남들이 보는 것을 두려워하여 머뭇거리면서 가까이 나아오는 것을 보고 그리스도의 얼굴은 빛났다. 부요하고 거만한 자들이 그들의 예물을 넣으려고 옷자락을 질질 끌며 지나가는 것을 보자 그 여자는 감히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는 것처럼 뒤로 움츠렸다. 그러나 그 여자는 비록 그것이 적을지라도 그가 사랑하는 사업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고자 하였다. 그 여자는 수중에 있는 예물을 보았다.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예물에 비교하면 매우 적은 것이었으나 이것은 그의 소유의 전부였다. 자기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그 여자는 급히 두 렙돈을 놓고 빨리 돌아갔다. 그러나 이 일을 행하는 중에 그 여자는 자기를 주목하여 열심히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시선과 마주쳤다.”(소망, 614)

 

“주의 연보궤에 두 렙돈을 넣은 한 가난한 과부는 그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으나 그의 자아 희생적인 모본은 각 나라와 각 시대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계속 움직여 왔다. 그 모본은 하나님의 창고에 높은 자와 낮은 자, 부자와 가난한 자로부터 예물이 들어오게 해서, 그것으로 사명을 유지하며 병원을 세우며 주린 자들을 먹이며 벌거벗은 자를 입히며 병든 자를 고치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다. 많은 무리들이 이 여자의 이기심 없는 행위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았다. 그녀는 그녀의 감화가 이루어 놓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날에 보게 될 것이다.”(6증언, 310)

 

토의사항

  1. 헌금생활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이야기 해 봅시다. 헌금 생활을 통해 은혜 받은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 내게 맞는 적절한 헌금은 어느 정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3. (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위 말씀에 대해 논의 해 봅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일부러 연보궤를 주시하셨다. 참으로 주님을 기쁘게 한 것은 비록 적을지라도 믿음과 헌신으로 생활비 전부를 드리는 한 과부를 보신 것이었다. 그녀의 헌금은 당시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주님의 제자들을 위한 특별한 모본의 될 것을 주님은 아시고,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셨다.


41. 예수께서앉으사.
이 사건은 그날, 아마도 화요일 늦은 시간에 일어났을 것이다(참조 마 23:1, 38, 39 주석; 예수의 생애와 봉사, 도표 9). 예수는 국가 지도자들과의 길고도 신랄한 논쟁을 방금 승리로 마무리짓고 나서, 성전의 거룩한 경내를 영원히 떠나려 하고 있었다.
 
연보궤. 마가가 여기서 가리키는 것은 성전의 연보궤를 소장하고 보호하는 견고한 방(the strong room, 헌물방)이 아니라 여인의 뜰에 있는 헌금함이다.
 
대하여. 즉 “반대편에.” 그곳에서 그는 예배자들이 헌금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넣는데. “넣고 있었는데.” 분명히 부자들이 차례대로 지나가며 예물을 넣었다.
 
42. 가난한. 헬라어 프토코스(pto-chos). “극히 빈곤한 [자]” 즉 “아무것도 없는.” 누가는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생활을 하는 존재, 그래서 다음 끼에 먹을 것을 얻기 위하여 매일 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을 뜻하는 헬라어 페네스(pene-s)의 후기 시형(詩形)인 페니크로스(penichros)를 사용한다(참조 눅 21:2). 헬라어 페네스(pene-s)는, “생계를 위해서 노동함”이라는 동사 페노마이(penomai)에서 파생되었다. 아마도 예수는 이 과부의 마음가짐을 과부들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태도와 두드러진 대조로 부각시키려 했을 것이다. 이 과부의 빈곤은 이때 그곳에 있었던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 중 어떤 이의 탐욕에 기인된 일면이 있었을지도 모른다(참조 마 23:14 주석). 그리스도는 그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라고 말했다(12:40).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께 대한 넘치는 사랑으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은(44절) 과부가 있었다. 얼마나 대조적인가!
 
렙돈. 렙톤(lepton). 우리 돈 1원 가치도 안 되는 동전. 렙톤(lepton)은 당시 통용되던 가장 적은 단위의 유대 동전이었다.
 
고드란트. 코드란테스(kodrante-s). 두 렙돈과 같으며(참조 제10권, 참고 논문 “기독교 첫 세기의 유대인”), 그리스도 당시의 (노동자) 하루 품삯인 로마 데나리온의 64분의 1에 해당되었다(참조 마 20:2 주석). 과부의 헌금의 액면 가치가 적음을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이 헌금의 상대적 크기가 더 강조되어야 하지 않겠는가?(참조 44절 주석).
 
43. 제자들. 마가(참조 막 13:3)는 이 제자들을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으로 밝히고 있는데 이 네 명은 약 오 년 전에 갈릴리 호숫가에서 그물질하다 부름을 받았다(참조 눅 5:1~11 주석).
 
진실로. 헬라어 아멘(ame-n). 히브리어 아멘(’amen)에서 나왔음. “확고한”, “확립된”, “확실한”을 의미함. 히브리어 용법에서 아멘은 다른 사람의 말에 확실하고 강한 응답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민 5:22; 신 27:15, 16 등). 같은 용법이 신약으로 넘어왔다(고전 14:16). 아멘은 또한 신약에서 송영(doxology) 끝에 자주 나타난다(롬 1:25; 갈 1:5 등). 그러나 예수 자신의 말을 확증하고 강화하기 위해 그가 사용한 아멘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말 가운데 많은 부분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6:2, 5, 16; 등) 또는 요한복음에서처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요 3:3, 5, 11 등; 참조 마 1:51 주석)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즉 부자 헌납자들이 낸 것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이. 하늘의 판단으로는 가치가 있는 것은 정작 헌금의 양(量)이 아니라 그 일을 유발하는 동기다. 하늘의 관심은 그 헌금이 나타내는 사랑과 헌신의 분량에 있지, 돈의 가치에 있지 않다. 예수가 ‘포도원의 품꾼들’ 비유(참조 마 20:15 주석)에서 명백하게 예증한 바와 같이,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답하시는 유일한 근거이다. 이 과부에 대한 예수의 칭찬도 헌금을 드리게 한 마음가짐에 근거한 것이지, 액면가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44. 풍족. 헬라어 페릿슈마(perisseuma). “풍족”이란 뜻 외에도 “남은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과잉” 또는 “남아 도는 재산.” 부자는 잉여금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남아 돌아가는 재산 중 일부를 바쳤고, 바치기 위해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았다. 사랑과 헌신의 견지에서 그들의 헌금은 아무 가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헌금이 자기 희생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차한. 헬라어 휘스테레시스(hustere-sis). “부족함”, “가난”, “빈곤.”
 
자기 모든 소유. 최대한의 사랑과 헌신을 하나님께 드린 증거.
 
생활비. 헬라어 비오스(bios). “생계.” 조에(zoe-), “생명” 자체가 아님. 십중팔구 이 과부는 다음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처지였다.
 
 
재림교회 헌금 안내
 
십일조 : 수입의 십분의 1
기타헌금 :
종류 :
청지기헌금(월정헌금) : 교회운영을 위해 사용되는 헌금
도르가헌금 : 구제활동을 위한 헌금
설교예배헌금 : 첫째, 셋째, 넷째 안식일은 교회 경비 둘째,다섯째는 목적헌금
안식일학교헌금 : 세계선교를 위한 헌금
기타헌금 : 감사헌금, 투자헌금, 생일감사헌금, 등
특별헌금 : 특별한 목적을 위해 드리는 헌금 (건축헌금 등등)
 
기타헌금 책정의 적절한 제안
수입의 1/10 = 십일조
수입의 1/10 = 기타헌금 (합 수입의 2/10)
청지기헌금 : 60%
설교, 안교헌금 : 20%
도르가등 기타헌금 : 20%
 
예) 수입이 100만원인 경우
십일금 : 10만원
청지기헌금 : 6만원
설교, 안교 헌금 : 2만원 (매주 5,000원)
기타헌금 : 2만원 (도르가 1만원, 감사헌금 1만원)
 
 

 

누가복음 20:1-19

[1]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4]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5]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7] 대답하되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9]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1]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 다시 세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13]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14]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16]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17]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18]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19]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포도원의 비유는 유대 백성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도 교훈이 된다. 현세의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큰 특권과 축복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는 교회로부터 상당한 보답이 있기를 기대하신다. . .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매우 귀중하게 보신다. 그분은 외적인 훌륭함을 가지고 교회를 높이 평가하지 아니하시고, 세상과 구별되는 참된 경건성을 인하여 교회를 귀하게 여기신다. 그분은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속에서 자라나는 정도와 그들의 영적 경험의 진보에 따라서 교회를 평가하신다.”
(실물교훈, 296)

 

예루살렘으로의 입성과 성전정결의 사건(19)이 있은 직후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받았다. ‘무슨 권세로 . . .’ 바로 예수님의 권세에 관한 것이었다.

 

 

본문연구

  1. 본문에서 예수님과 대화하는 주된 이들은 누구인가?
    1, 19절 _______________

  2. “권세”(authority)에 관한 도발적인 질문에 답하신 예수님의 응수는 어떤 의미에서 지혜로웠는가?
    1-8절 _______________

  3. 2절에 “이런 일”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말하는가?
    19:45-47 참고 _______________

  4. 9-19절은 “비유”이다. 예수님께서는 왜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시고 비유로서 말씀하셨는가?
    9-19절 _______________
    cf.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각 누구를 비유하는가?
    cf. 비유를 통하여 하신 대답은 어떤 점에서 지혜로운 것이었는가? (19)
    cf. 마태복음(21:23-27, 28-32)에 의하면 다른 비유([두 아들의 비유])도 말씀하셨다.

 

토의사항

  1.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생애에 어느 정도 관여하고 계시다고 생각하는지 얘기해 봅시다.
    내 인생에서 주님은 어느 정도의 권위를 가지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2.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원하시는 열매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열매를 맺히기 위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3. 내 인생의 문제에 있어서 결정적인 해결책을 예수님에게서 찾은 경험이 있다면 서로 나누어 봅시다.
    왜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해결책이라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요한과 비유를 통하여 자신의 권세를 설명하셨다.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 해도 유대의 지도자들은 믿지도 인정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들의 질문은 알고자 하는 동기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응수는 지혜로웠다. 요한의 권세만으로도 그들은 당황했으며, 비유를 통한 답변으로 그들은 물러갔다. 쟁쟁한 권세자들을 홀로 대하여 승리하신 예수님은 비록 설명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분명 특별한 권세가 있는 분임에 틀림없다.


1. 예수께서 성전에서. 이때는 AD 31년 유월절 전의 화요일로, 예수가 성전에서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베푼 때다. 지도자들이 가까이 왔을 때에는 이미 예수가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참조 눅 20:1).

 

대제사장들. 참조 2:4 주석. 서기관들 대다수가 바리새인인 것처럼 대제사장들중 많은 사람은 사두개인이었다. 마가(11:27)와 누가(20:1)는 이 사건의 기사에 서기관들을 포함시켰다.

 

장로들. 산헤드린은 이른 아침에 이미 회합을 갖고 예수에게 그의 자격에 대하여 묻기로 결정했다(시대의 소망, 593). 어쩌면 지금 그와 맞서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3년 반 전에 동일한 질문을 가지고 침례자 요한에게 파송되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참조 요 1:19 주석).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요한이 예수를 메시야로 선언하던 말을 들었을 것이다(참조 요 1:26, 27, 29).

 

2. 무슨 권세로. 첫 번째 성전 정결 때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가 가르칠 권한이 있음을 입증할 표적을 요구했다(참조 요 2:18). 그 이래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예수의 능력과 권세를 입증할 증거를 반복해서 요구하였다(참조 16:1 주석).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이 랍비의 승인 없이도 백성들을 가르칠 수 있음을 인정했으나,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았다는 증거를 보여 주기를 기대했다. 이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아내려고 이런 질문을 했다.

 

이런 일. 예수의 승리의 입성, 성전 정결 그리고 성전 뜰에서의 가르침을 말한다.

 

3. 나도너희에게 물으리니. 질문을 하면 이에 다른 질문을 내놓는 것으로 그 질문에 답하는 과정은 랍비의 논쟁에서 허용되었다. 역으로 하는 질문은 원질문에 대한 대답에 이르는 길을 보여 주기 위해 고안되었을 것이다.

 

한 말을. 실제로 예수는 그 문제를 회피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질문에 대한 그들의 대답에는 기본적으로 자신들이 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 도전에 응할 때 사용한 지혜와 노련함은 그의 신성에 대한 부가적인 증거였다.

 

4.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요한도 예수도 예루살렘당국자로부터 승인을 받지 않았다. 그들의 권세는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통치자들이 제기한 질문과 그에 대한 응답으로 한 그리스도의 질문은 주로 하나님의 신임을 평가할 자격 여부에 관한 것이었다.

 

5. 의논하여. 유대 지도자들은 난처해져서 서둘러 자기들끼리 의논하였다.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정직하게 고백하면 예수로부터 이런 대답이 나올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훨씬 복잡했다. 만약 그들이 요한의 신성한 자격을 인정한다면 나사렛 예수가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그의 기별의 핵심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참조 요 1:26, 27, 29). 그러므로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곧 예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

 

7. 알지 못하노라. 유대 지도자들은 요한이 선지자였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나 궁지를 모면하기 위해 모른다고 발?했다. 그럴지라도 그들은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의 질문에 대한 그들의 답변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예수에게 했던 처음 질문에 대답하라고 예수를 밀어 부치는 명분이 자연스럽게 철회되고 말았으며, 이는 그들이 계속해서 그 요구를 강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게다가 그들은 백성들의 존경심을 상실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잡기 위하여 교묘하게 쳐 놓은 그물에 걸려들어 꼼짝할 수 없었다. 예수는 예수의 신임을 평가할 자격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공언한 자들을 시험하였고 그들은 불쌍하게도 실패하였다. 그들은 사실상 나라의 영적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포기했다.

 

9. 포도원.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나라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이다. 그리스도가 지금 서 있는 바로 그 지점 가까이 성전 입구에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웅장한 포도나무가 있었다(Josephus Antiquities xv. 11. 3; 시대의 소망, 575; 참조 요 15:1 주석). 21:33의 말씀은 대부분 주님의 포도원에 대한 이사야의 비유에서 인용한 것이다(참조 사 5:1~7).

이 비유는 세상에 거룩한 품성의 열매(참조 21:34 주석)를 공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풍성한 축복을 강조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건강, 지성, 기능, 부유함과 품성면에서 이 땅 위의 가장 위대한 나라가 되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목적하신 영광을 나타내야 했다.

 

세로 주고. “임대해 주고.” 고대에는 농토에 대한 소작료를 현금(現金) 또는 현물(現物)로 갚았다. 현물의 경우, 수확의 일정량 즉 적정량을 협의하여 약정하였다. 이 비유에서 소작농들은 물납(物納) 소작인들이었으나 이 사실이 오늘날의 물납 소작인들이 안고 있는 어려움들을 그들도 똑같이 겪었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10. 소출. 이스라엘은 품성의 열매를 맺어야 했으며, 그리하여 세상에 하늘나라의 원칙을 드러내야 했다. 품성의 열매는 먼저 자신들의 생애 속에서 드러나야 했고 그런 다음 주변의 여러 나라 사람들의 생애 속에서 드러나야 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오늘날의 교회에게 큰 축복을 주셨고, 따라서 그분은 교회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보답이 있기를 기대하신다(참조 실물교훈, 296).

 

한 종을. 예수는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냈다고 말한다(참조 37). 제사장들은 특별한 의미에서 주의 포도원의 지명된 관리인들이었고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대표자들 즉 그의 종들이었다.

 

11. 종들을 보내니. 마태복음에서는 여러 무리의 종들을 말하는데 첫 번째로 보냄받은 무리 가운데 몇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참조 35, 36). 마가복음은 각 경우마다 한 명의 종을 보냈는데 몇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12:3~5)고 말한다. 누가복음 역시 경우마다 종 한 명씩을 보냈는데 종이 죽었다는 말은 없다(참조 눅 20:10~12). 종들의 수와 그들이 제각기 당한 운명은 분명히 비유의 근본적인 요소는 아니다. 바로 그날 조금 뒤에 예수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보낸 기별자들을 취급한 일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23:29~37). 여러 선지자가 당한 운명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을 위해서는 왕상 18:13; 22:24~27; 왕하 6:31; 대하 24:19~22; 36:15, 16; 9:26; 37:15; 7:52를 참조하라. 포도원의 소작농들은 세를 지불할 것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포도원 소유주를 대리하는 자들을 학대하고 또 자신들이 마치 정당한 주인인 양 행세함으로 포도원 소유주를 모욕하였다.

 

14. 이는 상속자니. 바울은 예수를 만유의 후사로 세우심을 받은 분으로 말하며(1:2), 예수를 받아들이는 자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로 말한다(8:17).

 

죽이고. 바로 이 시점은 산헤드린이 예수를 처치할 방법을 찾고 있던 때였다(참조 마 21:23 주석; 19:47). 그들은 최근 몇 달 동안 거듭해서 그의 봉사에 종지부를 찍게 할 방법을 찾기 위하여 모임을 가졌고(참조 19:3; 20:18 주석), 그중에서 가장 최근의 일은 지난 안식일과(참조 시대의 소망, 563, 564,), 바로 이 아침에 있었다(참조 21:23).

 

17. . 이것은 시 118:22, 23의 인용이며 70인역본문과 동일하다. 랍비들도 이 성경절이 메시야에 대한 것임을 인지하고 있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597). 개정표준역은 이런 대조를 부각시킨다: “건축들의 버린 바로 그 돌.”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으로서의 에 관하여는 16:18 주석을 참조하라. 버려진 모퉁잇돌의 배경을 이루는 역사적 경험에 관하여는 시대의 소망, 597, 598,을 참조하라.

 

모퉁이의 머릿돌. 모퉁잇돌은 모퉁이에서 만나는 두 벽을 연결시켜 주기 때문에 건축물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모퉁잇돌에 관한 기타 관련 구절을 보려면 행 4:11; 2:20; 벧전 2:7을 참조하고 시 118:22; 28:16 주석을 참조하라.

 

18. 이 돌 위에 떨어지는. , 그리스도께 복종한다는 뜻이다. 이는 유대 지도자들이 행하기를 거절한 바로 그 일이었다(참조 25, 27 주석).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 심판은 유대 민족과 그 민족의 고집스럽게 회개하지 않는 지도자들 위에 곧 떨어질 것이다.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헬라어 리크마오(likmao-). “(알곡에서 왕겨를) 키질하다”, “흩뿌리다또는 갈아서 산산조각을 내다.” 이 낱말들은 70인역의 단 2:44, 45의 사상을 강력하게 반영하는데, 여기에도 리크마오가 나온다(44). 무거운 물건이 떨어지면 그 어떤 것이든지 가루가 되고 파편들은 멀리 그리고 넓게 흩어진다. 이와 동일한 낱말이 70인역의 룻 3:2에도 사용되었다. “그를 갈아 가루로 만들다라는 표현은 이와 같이 그를 왕겨처럼 날려버리다혹은 그를 왕겨처럼 흩어 버리다로 번역될 수가 있다. 21:44의 생략을 지지하는 본문상의 증거를 제시할 수도 있다.

 

19. 알고. 이 적용은 너무나 명백해서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의심할 여지없이 유대 지도자들은 포도원에 관한 이사야의 비유(5:1~7)와 같은 구약의 구절들과 메시야를 ”(118:22, 23; 28:16 )로 언급한 다양한 구절들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잡고자. , 그를 체포하려고 한다는 뜻이다. 그들이 보는 바로는 예수가 자신들의 권위를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자신들의 음모를 실행에 옮기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대중은 이제 예수를 열렬하게 지지했다. 그가 유대 지도자들과 맞설 때마다,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이런 사악한 성직자들에 대하여 갖고 있던 존경심이 줄어들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누가복음 19:11-28

[11]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12]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4]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15]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16]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25]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26]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27]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모든 교인들은 그들이 소유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고 계발시키라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우리 모든 사람과 빈틈 없는 계산을 하신다. 계산하는 날이 올 때 충성된 청지기는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런 공적을 돌리지 않는다. 그는 “나의 돈”이라고 하지 않고 “주의 한 므나로 다른 므나를 남겼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맡겨진 선물이 없이는 아무것도 증가시킬 수 없었다는 것을 안다. 그는 자기의 청지기 직분을 충실히 이행한 것은 다만 자기의 의무를 다한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은 주님의 것이었고 또한 주의 능력으로 그것을 가지고 성공적으로 장사할 수 있었다. 오직 주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그는 위탁받은 자금이 없이는 영원히 파산자가 되었을 것임을 안다. (청지기, 111)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러 오자 예수님은 한 비유를 더하셨다. ‘왕위를 받아 오는 귀인에 관한 것이다. 이 비유는 어떤 의도와 의미가 있을지 살펴보자.

 

 

본문연구

  1. 1. 11절의 “이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가? 또 비유의 이유가 되는 “예루살렘”(11,28절) 입성 은 어떤 사건을 가리키고 있는가?
    1-10절 _______________
    35-44절 _______________
    cf. 왕인 되어 돌아온 귀인의 비유는 삭개오를 구원한 사실에 더하여 말씀하신 비유였으 며, 곧 예루살렘에 왕으로서 입성하시는 사건을 염두해 두고 하신 비유였다.

  2. 12-27절에 기록된 비유를 요약하여 정리해 보라.
    1. 귀인을 나타내는 호칭들은 무엇인가?
    2. 귀인은 왜 잠시 떠났으며 종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종들은 각각 어떻게 했는가?
    4. 또, 백성들은 어떠했는가?
      cf. ‘1 므나’(minah)의 가치는 100 데나리온(노동자의 100일 품삯)이다.
      cf. 23절의 ‘은행’의 본래 뜻은 ‘탁자’(table), 즉 돈을 취급하던 이들이 앉아 있는 곳이다.
  3. 일부 백성들이 귀인의 왕됨을 원치 않은 까닭(14절)과 일부 종들이 주인이 준 므나를 그 냥 수건에 싸둔 까닭(19-20절)은 무엇일까?
    14, 21절 _______________
  4. 귀인을 미워한 백성들과 일하지 않은 종들의 주장은 옳은가 아니면 그릇되었는가?
    22-23절 _______________
    cf. 귀인은 결국 왕이 되었는가? (15절)
    cf. 귀인은 인정하지 않은 종들과 백성들의 결국은 어떻게 되었는가? (24,26,27절)
    cf. 주인에게 충성한 종들에게는 어떤 상이 주어졌는가? (24-26절)

 

토의사항

1. 그리스도께서 내게 맡기신 의무와 책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얘기해 봅시다.

 

2. 내가 받은 달란트를 최대한 사용하는데 가장 걸림돌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얘기해 봅시다.

 

3. 특히, 다시 오시는 만왕의 왕을 기다리는 종들로서 우리의 사명과 의미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자.

 

예수님은 비유에서 자신과 제자들, 그리고 당시의 유대인들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그들의 의무와 사명을 말씀하셨다. 주님을 믿는 것은 왕을 얻는 것이며, 주인께 충성하는 것은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요, 주님을 기다리며 맡은 바 자신의 일에 충실하는 것이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의 모습이어야 한다.


11.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귀인과 므나]. 이 말은 열 므나의 비유와 예수가 삭개오의 집에서 한 말을 밀접하게 관련시켜 준다(참조 9, 10). 그러므로 이 말씀은 아마도 여리고에 있는 삭개오의 집에서나, 그 근처 또는 조금 후에 여리고에서 24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베다니로 가는 길에 쉬기 위하여 머무는 사이에 주어졌을 수도 있다. 이때는 아마도 AD 31년 유월절 전 주일이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예수가 죽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고 수 차례에 걸쳐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제자들은 여전히 그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환호와 영접을 받아 다윗의 왕좌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거짓된 희망은, 누가 그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을 거듭하게 만들었다. 1년 전에 예수를 왕으로 세우려는 대중들의 시도가 갈릴리에서 있었다. 군중 심리는 그런 과정을 더욱더 선호했고, 그때에 제자들은 틀림없이 전에도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런 제안을 부추겼다. 그리스도의 목적에 대하여 잘못된 개념을 갖게 된 근거는 랍비들이 유포한 메시야에 관한 거짓된 희망이었는데, 그것은 구약의 메시야 예언들을 잘못 해석함으로써 비롯되었다.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 나라의 진정한 성격은, 3:2, 3; 4:17; 5:2 주석을 참조하고, 이에 대한 그릇된 개념은 4:19 주석을 참조하라. 그리스도가 가르친 모든 비유는 그의 나라와 관련된 어떤 특별한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주어졌다. 대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에 관한 것이었으나, 때로는 여기의 경우처럼 영광의 나라를 세우는 것과도 관련되었다.

 

당장에 나타날 줄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매 발걸음은 제자들의 흥분을 증가시켰다. 그들은 이제 그곳에서 2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 아마도 그들은 자기들이 나라를 취하여 이스라엘의 보좌 위에 주님을 앉히고자 예루살렘을 향해 승리의 행진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가 최근에 했던 여러 가지 말은 그런 일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라고 해석했다(참조 18:31 주석).

 

생각함이러라. 예수의 제자들과 함께 그들의 동포들이 일반적으로 똑같이 간직해 온 메시야 왕국에 대한 그릇된 개념이 이 비유를 이야기하도록 계기를 마련했다. 제자들은 그 나라가 다가오는 유월절 기간 중에 세워질 것이라고 확신하며 기대했다. 유월절은 애굽으로부터의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념했으며, 다른 어떤 민족적인 절기보다도 더 히브리 민족의 탄생을 드러내 주었다.

 

12. 어떤 귀인이. 분명히 예수는 여기서 자기 자신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열 므나 비유라고 알려진 이 비유와 마 25:14~30에 기록된 달란트 비유 사이에는 뚜렷한 유사점이 있다. 그와 동시에 거기에는 현저한 차이점도 있다. 어떤 이들은 두 비유가 본래는 같은 이야기였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는데, 그 비유 자체와 비유들이 주어진 상황의 차이는 성경 기록자들의 영감성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없도록 만든다(참조 마 25:14 주석). 두 비유의 유사점에 대하여는 달란트 비유에 관한 주석을 참조하라(25:14~30). 누가복음을 해설하는 이곳에서는 주로 열 므나 비유와 달란트 비유 사이의 서로 다른 국면들을 다루게 된다.

 

먼 나라로 갈 때에. 예수는 이 비유를 청중들이 아주 잘 아는 역사적인 사건들에 기초했을 가능성이 크다(참조 15:4 주석). 그 가능성 있는 이야기로서 제시되는 첫 번째 사례는, BC 40년에 헤롯 대왕이 안티고누스(Antigonus)의 주장을 반대하고 자신이 유대 왕으로 임명받기 위해 로마로 간 여행이다. 로마 원로원은 안티고누스의 주장을 묵살하고 헤롯을 왕으로 승인했다. 하지만 이 비유와 더 유사한 역사적인 근거는 두 번째 사례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헤롯 대제의 아들인 아르켈라우스(Archelaus)가 자기 아버지의 유업으로 유대 나라를 얻고자 승인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간 일이다. 왕의 칭호를 받을 수 있는 그의 권리는 가이사 아구스도(Augustus Caesar)에 의하여 거부되었다.

 

13. 그 종 열을. 또는 그의 열 명의 종들.” 여기서 종들, 그리스도가 먼 나라에 가고 없는 동안 이 땅에서 그의 사업을 위탁받은 제자들과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참조 마 16:19 주석). “이라는 숫자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데, 흔히 예수가 어림수로 사용하였다(참조 15:8 주석).

 

므나. 헬라어 므나이(mnai). 히브리어 마네(maneh) 미나”(참조 제2, 106, 108)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그리스도 당시에 1므나는 100드라크마에 해당하는 은 한 달란트의 60분의 1, 곧 금형 11.46온스 즉 356.4그램이었다(참조 15:8 주석). 물론 그만한 양의 은()은 지금보다 훨씬 구매력이 컸는데, 한 므나는 100명의 임금(賃金)에 해당되었다(참조 마 20:2 주석). 종들은 각각 한 므나를 받았다.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달란트와 비교해 보라(참조 마 25:15 주석).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여기의 장사하라는 말은 상업을 하라는 의미이다(참조 겔 27:9, 16, 19, 21, 22; 19:15). 10달러 37센트라는 액수는 귀인종들중 한 사람에게 자본금으로 맡기기에는 너무도 적은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그 주인도 돌아왔을 때 그것을 지극히 작은 것”(19:17)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나중에 더욱 중요한 책임을 맡긴다는 목적으로 각 종들의 능력을 시험하는 수단이었다. “내가 돌아오기까지라는 말은 귀인이 정해지지 않은 기간에 나가 있을 것이 예상되었음을 암시한다. 이 말을 통해 예수는 자기 역시 충성스러운 자들에게 상을 주기 위하여 돌아오기 전에 상당 기간 함께 있지 못할 것임을 암시한다.

 

14. 우리는원치 아니하노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들이 빌라도 앞에서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19:15)라고 선언했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를 완전히 거절했다.

 

15. 저희를 부르니. 주인이 그들을 부른 목적은 재정 보고를 받기 위함이었다고 마태는 부언한다.

귀인은 자기의 재산 관리자로서 종들이 그들의 역량을 어떻게 발휘했는가를 알고자 했으며, 각자가 보여 준 역량에 따라서 책임을 맡길 계획을 세웠다.

 

16. 그 첫째가. 25:20과 비교하라. 같지 않은 결과에 대한 성공도의 표본으로서 10명의 종 가운데 3명의 경험만을 여기에서 언급한다. 그 첫 번째 종은 보고할 내용이 많았고, 둘째는 보고할 자료가 다소 있었으며, 셋째는 보고할 것이 없었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처음부터 세 사람만 나오며, 세 사람 모두 결산 보고를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문자적으로는 추가로 열 므나를 벌었다.” 따라서 추가로 열 므나를 얻었다는 뜻이다. 그 수익은 투자 금액의 1,000퍼센트였다. 즉 자본금은 100일분 임금이었으나, 수익금은 1,000일분 임금이었다. 이 첫 번째 종은 이제 총 11므나를 가졌으며, 그것은 3년 반의 품삯이 넘는 것이었다(참조 13절 주석). 첫 번째 종은 투자 사업에 비상한 솜씨를 드러냈으며, 이것은 주인에 대한 헌신과 그의 근면성, 성실함을 반영했다.

17. 착한 종이여. 달란트 비유 가운데서 종은 착할 뿐만 아니라 충성된자라는 말을 들었다(참조 마 25:21). 아마도 어떤 의도된 차이점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이곳의 주인은 즉시 첫 번째 종에게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했다고 칭찬을 하기 때문이다. 해설은 마 25:21 주석을 참조하라.

 

열 고을 권세. 첫 번째 종의 경영 수완은 그가 주인의 나라에서 작은 지역 사무를 감당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었다. 그는 퇴직하여 연금을 받거나 물질적인 보상을 받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가 받은 보상은 더 큰 책임과 더 높은 지위,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더 높은 계급으로의 승진이었다. 그는 시험에서 탁월한 성공을 거두었다(참조 마 25:21; 19:13 주석).

 

18. 다섯 므나. 500퍼센트의 이익(참조 17절 주석). 두 번째 종은 이제 도합 여섯 므나 즉 600일분, 대략 2년치의 임금을 가지고 있다.

 

21. 내가 무서워함이라. 이 종이 갖고 있는 두려움의 근본 원인은 자기 주인에 대한 잘못된 태도에 있었는데, 주인은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을 하나도 용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종은 분명히 게을렀다. “귀인이 그에게 주었던 시험은, 그가 그것을 기회로 삼아 노력했다면 그런 특성들을 극복하도록 이끌어 주었을 것이다.

 

두지 않은 것. 실제로 종은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어쨌든 당신은 내가 버는 것이라면 모두 가질 것이고, 나는 애써 보아야 보상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힘써 노력해 본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첫 번째와 두 번째 종에게 주어진 보상은 잘못이 셋째 종에게 있으며 그의 주인에게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22. 악한 종아. 그는 주인의 신임을 저버리고 주어진 성공의 기회를 소홀히 했다. 저희에게 위탁된 달란트를 가지고 아무런 일도 이루지 않는 자들은 하늘이 보기에 악한자들이며, 악인의 삯을 거두게 될 것이 확실하다. 달란트 비유에서 세 번째 종은 악하고 게으른종이라는 책망을 듣는다(.

 

네 말로. 더 이상의 사실 조사가 필요 없었다. 세 번째 종은 전혀 신임할 수 없음을 입증했다. 저희가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해 남을 비난하는 자들은 이로써 품성에 결함이 있음을 분명히 공표하는 셈이다. 그들은 어떤 종류의 중요한 책임도 맡길 수 없음을 분명히 드러내 준다.

 

너는알았느냐. 종의 실패는 무지 때문이 아니라 게으름 때문이었다. 그 자신이 더 잘 알았다. 그는 주인이 자기에게 제공해 준 기회를 어떻게 이용했는지 철저하게 밝힐 줄을 알면서도 왜 그 기회를 이용하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분명히 그의 능력과 상관되는 것이었다. 그의 잘못은 바로 여기에 있다.

 

23. 그러면 어찌하여. 그는 자기 주인이 돌아오면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비록 일하기를 원치 않았지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은 돈이 자기 대신 일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돈을 가지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면 그는 왜 우선적으로 그 돈을 받았는가? 그 돈은 그것을 가지고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다른 종에게 주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은행. 헬라어 트라페자(trapeza). “탁자.” 여기서는 환전상(換錢商)의 탁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은행을 뜻한다(참조 마 21:12; 11:15; 12:15). 영어의 “bank”(은행)라는 단어도 비슷한 어원을 가지고 있는데, 이태리어의 방카(banca)에서 유래되었으며 의자”, “탁자또는 계산대를 뜻한다. 종의 입장에서는 성읍 내의 돈놀이하는 사람에게 돈을 맡기는 것이 더 수월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나 게으른 자로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가 고의적으로 주인에게서 정당한 이익을 탈취할 계획을 세운 것처럼 보이게 한다.

 

24. 곁에 섰는 자들. 아마도 종들 이외에 그 귀인을 수종드는 자들인 것 같다. 윗사람 옆이나 앞에 서다라는 말은, 그를 섬긴다는 의미이다(참조 단 1:19 주석; 왕상 10:8).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활용하지 않은 달란트는 첫 번째 종에게 주어졌는데, 그것은 보상으로서가 아니라 그가 그것을 가지고 다른 자들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남길 것이라는 증거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귀인이 볼 때, 자기 돈이나 사업을 주어진 기회를 가장 잘 이용할 사람의 손에 맡기는 일은, 쉽게 말해서 잘하는 장사였다. 그 첫 번째 종은 이제 12므나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현재 두 번째 종이 가진 것의 갑절이 된다. (주인)은 원금이나 이자를 돌려 달라고 하지 않고 이 사람들의 손에 맡겨 계속 사업을 하거나 활용하도록 한 것 같다(참조 마 25:28).

 

25. 저희가 가로되. 그에게 항의하는 저희가 귀인을 수종드는 자들(참조 24절 주석)인지, 아니면 비유를 말하는 예수에게 항의하는 자들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후자의 경우라면 25절 전체는 삽입 구절의 성격을 지닌다.

 

26.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여기서 게으른 종은 단순히 자기에게 위탁되었던 자본금을 빼앗긴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게으른 종이 심한 형벌을 받는다(참조 마 25:30 주석).

 

28. 앞서서 [올라]가시더라. 즉 요단 골짜기에 있는 여리고에서 올라갔다(참조 11절 주석). 예루살렘까지는 24킬로미터쯤 되는데, 그들은 1,005미터 높이를 올라간 셈이다(참조 10:30 주석). 누가의 이야기 내용이 갑자기 이곳에서 바뀌는 이유는 여리고에서 있었던 사건들(1~28)과 승리의 입성(29~44) 사이에 약간의 시간 간격을 주기 위한 것 같다.

 

누가복음 19:1-10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사람이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서 영접할 때 구원이 그 영혼에게 이르는 것이다. 삭개오는 다만 지나가는 손님처럼 그의 집에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의 성전에 거하는 분으로서 그를 영접하였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삭개오를 죄인이라고 비난하였고 그리스도가 그의 손님이 되는 것을 불평하였으나 주께서는 그를 아브라함의 아들로 인정하셨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갈 3:7)알 것이기 때문이다(소망 556).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삭개오의 첫 응답은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동정하는 데서 나타났다(소망 552, 554, 555).

 

본문연구

1. 젊은 부자 관원(18:18~24)과 삭개오(19:1~10)의 이야기를 비교하기 위하여, 아래 빈칸을 채워 봅시다.

비교 관원 삭개오
직업 공회의원  
영성   구함
호소 나를 따르라  
반응   열렬함
결과    

 

 

2. 삭게오는 예수님에 대하여 왜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요?(참조 마 3:2; 1:28;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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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침례자 요한의 초기 사업은 베다바라(베다니)에서 이루어졌는데, 아마도 여리고 근처의 요단강 동편에서 하는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삭개오는 군중들과 함께 갔을 것이다(시대의 소망, 553). 요한에게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물었던 세리들 중에 삭개오도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볼 수 있다.

 

 

3. 예수님께서 삭게오의 이름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참조 요 1:4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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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의사항

1. 과거의 신앙 경험중에 변화의 필요성을 가장 크게 느낀적은 언제인지 얘기해 봅시다.

 

2. 지금 복음의 원칙 중에 실천으로 옮기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애기해 봅시다.

 

3. 예수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임으로 인해 내 생애에 일어난 윤리적 도덕적 변화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개혁이 따르지 않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의는 자복하지 않고 버리지 않은 죄를 덮는 가면이 아니다. 품성을 변화시키고 행동을 제어함이 생애의 원칙이다. 거룩함이란 하나님께 전체를 바치는 것이며 마음 속에 있는 하늘의 원칙에 마음과 생애를 완전히 복종시키는 것이다.


1. 들어 지나가시더라. 이때는 AD 31년 유월절 한 주일 전이었고,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즉 그들은 유월절을 지키려고 페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마지막으로 머무는 곳 중의 하나인 여리고에 이르렀다.

요단강 건너편의 가장 중요한 건널목은 여리고 동편으로 약 8킬로미터 되는 곳에 있다. 그 도시는 요단 계곡의 서쪽 변두리, 서쪽에 솟아 있는 산기슭의 작은 언덕 바로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참조 눅 10:30 주석). 신약 시대의 여리고는 구약 시대의 여리고의 폐허에서 약 1.6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헤롯 대왕이 이 도시를 미화시켰고, 겨울 궁전을 그곳에 두었다. 여리고는 그 근방에 있는 온천으로 유명해졌으며, 헤롯 대왕이 불치의 병을 앓고 있을 동안 병이 낫기를 바라서 그곳에 갔었다. 비록 이것이 예수가 여리고를 방문했다는 유일한 기록이지만, 예수는 절기에 참석하러 가는 종전의 여행길에도 이 도시를 방문하였고, 페래아로부터 나사로를 살리러 가는 길에도 분명히 이곳을 거쳐갔다고 생각할 여지가 충분하다.

 

2. 삭개오. 헬라어 작카이오스(Zakchaios). “순결한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작카이(Zakkai)에서 유래하였다. 작카이(Zakkai, “삭개”)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이 구약에 언급되었다(참조 스 2:9; 7:14). 현대의 어떤 주석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야기는 마태를 부른 이야기의 다른 판이라고 간주할 만한 근거가 없는데, 그것은 특별히 누가가 마태를 부른 사건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참조 5:27~32). 삭개오는 분명히 유대인이었다(참조 19:9). 따라서 구경꾼들은 그가 죄인이라는 이유에서 예수가 그와 교제하는 것에 대하여 항의했다.

 

세리장. 헬라어 아르키텔로네스(architelo--ne-s). “세리장을 뜻하는 복합어. 삭개오는 오늘날의 세무 감독관 또는 세금 징수원이다. 분명히 그는 동쪽에서 요단강을 건너는 모든 교통의 관문으로서 유대의 중요한 국경 도시인 여리고에서 세금 징수를 책임진 부유한 세무 공무원이었다. 여리고 동편에 있는 개울은 갈릴리 호수와 사해 사이에 위치했는데, 이것은 봄철에도 요단강을 건널 수 있는 중요한 세 지점 가운데 하나였다고 전해진다. 전도자 누가는 세리들에 대하여 언급할 때, 매번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이런 자들에 대하여 호의적으로 말하고 있는바, 이것은 예수를 가난한 자, 압제당하는 자,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의 친구로서 강조하는 그의 특성과 조화를 이룬다.

 

부자라. 세리들은 로마의 권세를 등에 업고 대개 법이 요구하는 액수보다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였다(3:12 주석).

 

3. 어떠한 사람인가.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인물인지를 보고, 거리에서 그를 에워싸고 있는 군중으로부터 따로 접견하기를 희망했다는 뜻이다.

 

보고자 하되. 아마도 삭개오는 얼마 동안 예수를 볼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것이다. 침례자 요한의 초기 사업은 베다바라(베다니)에서 이루어졌는데, 아마도 여리고 근처의 요단강 동편에서(참조 마 3:2; 1:28 주석) 하는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삭개오는 군중들과 함께 갔을 것이다(시대의 소망, 553). 요한에게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참조 3:12)라고 물었던 세리들 중에 삭개오도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볼 수 있다. 비록 그때 진정으로 회심하지는 않았지만 삭개오는 요한의 기별에 감명을 받았고, 요한의 말은 그의 마음속에서 누룩처럼 역사하기 시작했다(시대의 소망, 553). 이때보다 앞서 삭개오는 예수에 대하여 들었고, 잘못을 자백하고 배상하는 일을 시작하였다(시대의 소망, 553, 555,). 그는 굶주린 심령으로 예수를 뵙고 생명의 길에 대하여 좀 더 완전하게 배울 기회를 갖고자 갈망하고 있었다. 그는 레 25:17, 35~37(참조 19:8 주석)에서 발견할 수 있는 원칙들과 조화되게 행동함으로써, 이미 복음의 원칙을 삶에서 어느 정도 실천하고 있었다. 마태의 경험과 비교하라(참조 막 2:13, 14 주석).

 

할 수 없어. 남자가 양팔을 뻗으면 벽과 벽이 닿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 고대 도시의 좁은 거리는 삭개오의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4. 앞으로 달려가. 삭개오는 예수가 여리고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553). 유월절에 참석하기 위하여 그 도시를 통과하는 사람들의 무리들 때문에 세리장인 삭개오는(참조 2절 주석) 평소보다 더 분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모습을 먼발치에서라도 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뒤로 하였다.

 

뽕나무. 헬라어 쉬코모레아(sukomorea). 무화과나무(sycamore-fig tree). 이 나무는 흰 뽕나무 또는 무화과 뽕나무라고도 불린다. 쉬코모레아라는 이름은 무화과를 가리키는 쉬콘(sukon)뽕나무를 일컫는 모레아(morea)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그 잎사귀는 뽕나무 잎과 열매는 무화과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나뭇가지가 낮게 드리워져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이런 나무들은 고대 도시의 좁은 거리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었지만, 성읍의 문을 지나 길가에는 흔하게 있었다(참조 막 10:46 주석). 참조 암 7:14; 17:6 주석.

올라가니. 이것은 삭개오처럼 좋은 옷을 입은 신사에게 다소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이었다. 그는 그토록 뵙기 원했던 예수의 지나가는 모습이라도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보다는 별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것을 기꺼이 감수했다. 삭개오가 올라간 그 나무는 도시의 좁은 거리에서 자라던 것(참조 19:3 주석)이었다기보다는, 성읍의 서쪽 외곽지역에 있었던 것 같다(참조 막 10:46 주석).

 

5.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 말은 낮에 취하는 약간 긴 휴식이나 밤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을 가리킬 수 있다. 이것은 예수가 남의 집에 머물겠다고 자청한 유일한 기록이다. 삭개오와 같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라면 분명히 손님을 접대할 만한 충분한 시설이 있었을 것이고, 삭개오는 예상치 못했던 손님들이 오더라도 당황하지 않을 것을 예수는 알았다. 우리는 예수가 어떻게 삭개오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 만큼 그를 알았는지 들은 바가 없다. 물론 구경꾼들이 알려 주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1:47에서 예증된 바와 같이 초자연적으로 얻게 된 지식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예수는 자기가 환영만 받지 않을 것임을 아셨는바, 삭개오는 예수를 보고자”(19:3) 하여 기회를 심히 갈망해 왔고, 자신의 집에서 이 위대한 교사를 접대하게 된 특권을 크게 영광으로 여기고 기뻐하였을 것이 틀림없다. 예수는 이 모든 것을 알았고, 나라(왕국)의 도()를 그에게 가르치려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세리의 집으로 갔다(시대의 소망, 556).

 

6. 즐거워하며. 헬라어 카이로(chairo-). 문자적으로는 기뻐함”(참조 1:28 주석).

 

7. 수군거려. 헬라어 디아공귀조(dia- gogguzo-). 공귀조(gogguzo-)의 강조 형태로서 원망하여라고도 번역되었다(참조 마 20:11; 5:30 주석). 무리들 가운데는 삭개오나 그의 대리인들에게 실제적으로 늑탈당한 사람이 있었으므로, 삭개오 때문에 예수를 도적으로 간주하는 시민이 많았을 것이다.

 

8. 서서. 분명히 삭개오는 예수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을 것이며, 군중들의 성난 항의를 듣자(7) 자기를 욕하는 자들에게 얼굴을 향하고 예수에게 말했을 것이다.

 

내 소유의 절반을. 삭개오가 부당하게 모은 재물을 기꺼이 거저 나누어 주려는 마음은, 그가 회심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최선의 증거들 중의 하나였다. “개혁을 이루지 않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시대의 소망, 555). 기꺼이, 자원하는 삭개오의 행동과 심지어 그렇게 하도록 요청을 받았지만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주기 거절했던 젊은 부자 관원의 행동을 비교해 보라(참조 마 19:21, 22 주석). 삭개오의 경험은 부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증거이다(참조 마 19:23~26 주석).

 

가난한 자들. 유대인들 사이에서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은 경건과 실천적인 믿음생활을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돌보는 데 대하여 구체적인 지침을 주었다.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삭개오는 이미 부당하게 얻은 소득을 배상하기 시작했다(참조 3절 주석). 이제 그는 부정하게 획득한 모든 것을 돌려주기 위해 철저하고도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이것은 군중들 중에 그를 극심하게 비난한 사람들, 제사장, 서기관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성전에서 하는 상행위는 예배하러 오는 모든 사람을 사취할 수 있는 기회를 그들에게도 무한정 제공했다(참조 마 21:12 주석).

 

사 배나 갚겠나이다. 자발적으로 배상할 때, 모세의 법은 단지 취한 금액에 오 분의 일을 추가하라고 요구했다(참조 레 6:5; 5:7). 4배의 배상은 재물을 잃어버린 후에 의도적으로 약탈한 행위에 대한 극단적인 형벌 중 하나였다(참조 삼하 12:6 주석; 22:1). 보통 원래의 소유물이나 돈을 배상할 수 있을 경우, 갚아야 할 액수는 취한 것의 갑절이었다(22:4, 7). 삭개오가 배상하기로 약속한 금액은 그가 마음의 변화를 경험했다는 최선의 증거였다.

 

9. 오늘. 아마도 그의 삶에 일어난 변화를 감안하여 볼 때, 삭개오의 자백과 약속(8)에 반영된 그의 결심을 고려하여 한 말로 보인다.

 

이 집에. 삭개오의 결심으로 혜택을 받게 된 그의 가족.

 

이 사람도. 참조 13:16. 유대 사회는 삭개오를 명사들의 명부에서 삭제하고 죄인으로 낙인찍었고(참조 19:7), 따라서 삭개오는 유대인들이 선조 아브라함의 모든 혈통적 자손들에게는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보상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예수는 지금 삭개오의 이름이 하나님의 은총의 명부에 기재된 것을 알린다.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후손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한 유대인들의 개념을 보려면 마 3:9; 9:39 주석을 참조하라.

 

10. 잃어버린 자. 참조 마 1:21 주석. “잃어버린 것”(that which was lost)이라는 구절(제임스왕역)은 모든 죄인을 의미하는 잃어버린 자들이라는 표현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예수는 인류 전체뿐만 아니라, 자기 죄로 인해 잃어버림을 받은 모든 자를 회복하려고 오셨다. 이 세상은 다시금 에덴의 아름다움을 회복하여 죄 없는 인류가 살 것이며, “만유를 회복하실 때(3:21) 모든 잃어버린것이 회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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