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4:16-24

[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종교에 대하여 전연 무관심한 것같이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 마음에는 안식과 평화를 갈망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비록 저들이 매우 깊은 죄 가운데 빠졌다고 할지라도, 저희를 구원할 가능성은 있다” (실물교훈, 236).

 

하나님께서는 메시야의 그 큰 잔칫상 주위가 가득 채워지길 원하신다. 손님을 부르는 그 초청은 성공할 것이다.

 

본문연구

 

  1. 이 비유와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참조 마 22:1~14) 사이에는 어떤 유사점이 있으며,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알아보라.  


  2. 누가복음 14장 16~20절의 핑계들을 열거하라. 주님의 초청에 온전히 헌신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어떤 것들일까? 그리스도께서 언급하신 핑계들을 현대판 핑계로 만들어 적어보라.
    1. 18절
    2. 19절
    3. 20절
  3. 집주인이 원래 청하였던 사람들을 대신하여 잔치자리를 채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1절-23절

 

토의사항

  1. 오늘날 예수님의 초청을 거절하게 하는 우리의 핑계거리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2. 하나님께서 베푸신 하늘 잔치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3. 내가 받은 축복들 중에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겨저 감사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는지 얘기해 봅시다.

 

누가복음의 그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최우선으로 삼으셨다. 가난한 자, 절름발이, 소경, 병신들은 가진 게 없으므로 천국의 요구에 쉽게 반응할 수 있었다. 믿음으로 “예” 함으로, 가장 비천한 영혼도 왕의 식탁에 앉을 수 있다.

 

 

16. 큰 잔치.  예수는 여기서, 청중들에게 익히 알려진 큰 잔치의 상징을 통하여 하늘나라의 풍성한 축복을 설명했다. 
그는 바리새인의 의도(15절)를 반박하지 않고, 그 사람의 신실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사실, 그때 그 바리새인은 복음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 비유와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참조 마 22:1~14)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지만, 차이점 또한 많다. 두 비유가 주어진 배경 역시 확연히 다르다. 눅 14장의 비유는 바리새인의 집에서 주어진 반면, 마22:1의 비유는 예수를 체포하려는 시도와 관련하여 주어졌다(참조 마 21:46).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이것은 복음 잔치의 첫 번째 초청, 즉 구약 시대 내내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초청을 나타낸다. 특별히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보낸 하나님의 반복적인 호소를 가리킨다(참조 21~23절 주석).

 

 17. 종을 보내어. 특별한 의미에서 예수 역시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라고 보내진 “종”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오늘날에도 동방에서는 손님들에게 초청한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잔치를 시작하기 며칠 전에 사자(使者)를 파송하는 것이 관례이다. 손님이 초청받은 것을 잊었거나 참석할 시간을 알지 못할 경우에, 이로 인해 행사를 위해 준비하고 지정된 연회 장소까지 도착할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 서양보다는 달력이나 시계에 관심이 덜 한 동방에서는 그같이 생각나게 해주는 사람이 실제적으로 요긴한데, 그것은 주인이나 손님을 당황하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18. 다 일치하게. 초대받은 손님들이 친절한 주인을 욕보이기로 공모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세 명 이상이었지만(16절), 예수가 열거한 세 종류의 변명은 종이 찾아가는 곳마다 들었던 이야기들의 실례로 주어진 것 같다. 세 명 이상이 등장하는 상황에서 세 명만을 대표로 언급한 비슷한 예증에 대해서는 19:16~21을 참조하라.

 

사양하여. 손님으로 청함 받은 자들 중 누구도 사양할 합당한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 나름의 핑계를 고안해냈다. 물론 각 경우마다 진짜 이유는 청함 받은 자들이 다른 일에 더 많은 관심이 쏠려 있었다는 데 있었다. 다른 일이란 잔치에 참석하게 되면 일시적으로라도 제쳐놓아야 할 것이었다. 물론 그 변명들은 잔치를 베푼 사람의 환대와 호의에 대해 감사하지 않은 것을 의미했다. 복음 잔치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은 영원한 것들보다는 현세적인 이익에 더 많은 가치를 두었다(참조 마 6:33).
동방에서는, 불가피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흔히 친교를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어떤 아랍인들은 최초의 초청을 받아들인 후에 다시 알려주는 자(참조 17절 주석)의 초청을 거절하는 것을 선전포고로 여기기도 한다. 반면, 초청을 수락하고 잔치에 참석하는 것은 우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한다.

 

밭을 샀으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밭을 이미 사들였기 때문에 구실이 빈약하다. 매입한 사람은 분명히 거래를 매듭짓기 전에 땅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을 것이다.

 

 19. 소 다섯 겨리. 역시, 매입은 이미 이루어졌다. 그 사람은 거래가 얼마나 잘 이루어졌는지 시험해 보는 데 여념이 없었으며, 따라서 잔치에 참석하기를 진정으로 원했다면 그 일은  다음으로 쉽게 미룰 수도 있었을 것이다.

 

 20. 가지 못하겠노라. 세 번째 변명을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무례하게 보인다. 다른 이들은 정중한 척하면서 양해를 구한 반면, 그는 종에게 딱 잘라서 “가지 못하겠노라”라고 통고했다. 이 사람이 거절한 것은 아마도 결혼하고 첫해에 해당되는 사람에게는 정규적인 병역이나 시민의 의무 중 일정 부분을 면제해 준다는 사실에 근거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참조 신 24:5 주석). 그래서 그는 “가지 못하겠노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법이 정상적인 사회관계에서 그를 면제시켜 주지는 않았으며, 그렇게 핑계를 꾸며대는 어떠한 노력도 거짓 구실일 뿐이었다. 이 사람의 변명은 사실 처음 두 사람보다 나을 게 없었다.

 

 21. 노하여. 종이 구차한 변명들을 하나씩 전하자 그 친절한 주인은 노를 발했다. 원래 그들은 모두 초청을 받아들였고, 주인은 그들의 수락을 믿고 잔치를 준비해 왔다. 그러나 준비가 완료되고 음식이 마련된 지금, 주인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작당한 것처럼 보인다(참조 18절 주석). 더군다나 그는 잔치를 준비하기 위해 상당한 비용을 지출했다.
틀림없이 하늘잔치를 준비하는 하나님은 사람이 노하는 것처럼 “노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잃어버린 인류에게 구원의 축복을 제공하기 위해 행한 모든 일에 비춰볼 때, 사람들이 그분의 의와 은혜를 받아들이라는 자비로운 초청을 경홀히 여기도록 하는 것은 그분의 자애로운 가슴을 몹시 아프게 할 수밖에 없다. 하늘의 모든 자원(資源)이 구속 사역을 위해 투자되었고, 따라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을 감사하며 받아들이는 것이다. 

 

빨리…나가서. 이것은 주인이 값비싸게 준비한 양식이 낭비되는 것을 보길 원치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자신의 절친한 친구들이 호의의 표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그는 기꺼이 낯선 사람들을 초청할 것이다. 이 조치는 예수가 이 비유를 들기 직전에 준 권면(참조 12~14절)과 조화되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가 지금 참석하고 있는 잔치의 손님들이 그 권면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 잔치에 동석한 사람 중 하나가 다른 주제로 돌리고자 했었다(참조 15절 주석).

 

거리와 골목. 복음의 초청은 여기서 “도시”의 거주자로 대표된 유대 민족에게 처음으로 주어졌다. 초청을 거절한 도시의 주도적인 시민들은 유대 지도자들이었는데, 그들 중 몇 사람은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열린 잔치에 예수와 함께 모여 있었다(참조 1절 주석). 초청을 거절한 손님들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특권층을 대표한다. 이제 이 자비로운 주인은 자신의 선택받은 친구들에게 돌아서서 “도시”의 낯선 자들, 곧 사회에서 무시와 멸시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향한다. 이들은 초대받은 손님들과 같은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고, 따라서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세리요 죄인으로서, 국가 종교 지도자들에게 버림받은 자들로 취급받았다. 그렇지만 그들도 복음에 굶주리고 목말라했다(참조 마 5:6 주석).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 흔히 유대인들은 인간이 물질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고통받는 것은 하나님에게 은총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겼으며, 따라서 이러한 계층은 동료 인간들에게 무시와 멸시를 받았다(참조 막 1:40; 2:10 주석). 
하나님이 그들을 버렸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사회도 그들을 폐인으로 여겼다. 이 비유에서 예수는 하나님이 그러한 사람들을 멸시한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고통이 자신들의 나쁜 행실이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생겼다 할지라도 동료 인간들에게 그들이 멸시받아서는 안 됨을 천명하고 있다. 여기서 가난에 찌들고 신체적으로 장애가 있는 자들은 일차적으로 도덕적, 영적으로 파산 상태에 있는 자들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들은 구원의 축복을 돌려 받기 위해 하나님께 드릴 만한 자신의 선행이 하나도 없다.

 

 22.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종은, 자비로운 주인이 자신의 연회장이 가득 차게 되기를 몹시 바라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위대한 복음의 잔치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땅을“헛되이”, 다시 말해 황무지로 창조하지 않고 행복한 인류의 영원한 처소로서 거기에 살도록 계획했다. 죄가 얼마 동안 이 목적이 성취되는 것을 미루었지만, 결국 성취될 것이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마다 복음 잔치에 참여하여 새롭게 될 세상에서 영원히 거할 기회를 부여받았다. 이 비유는, 어떤 사람이 거절한 똑같은 기회를 다른 사람은 열렬하게 받아들일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참조 계 3:11).

 

 23. 길과 산울가. 원래 복음 잔치에 초청받은 자들은 유대인들이었다(참조 16, 21절 주석).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부른 이유는, 그들을 동료 인간들보다 더 사랑하거나 더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맡겨진 신성한 특권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예수가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인 세리와 죄인과 교제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참조 막 2:15~17 주석), 이로 인해 유대 지도자들이 깜짝 놀랐다. 그는 갈릴리 봉사 기간 동안 이런 사람들, 즉 “거리와 골목”에 있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참조 14:21 주석). 그러나 AD 30년 봄, 갈릴리 사람들이 거절하자(참조 마 15:21; 요 6:66 주석), 예수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과 사마리아인을 위해서도 계속하여 봉사했다(참조 마 15:21 주석). 그러나 “길과 산울가”의 사람들에게 복음의 초청을 제공한 것은, 스데반을 돌로 쳐죽임으로 극에 달한, 복음의 초청에 대한 유대 국가의 최종적 거절 이후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것을 의미한다(참조 행 1:8). 
비유에서 “길과 산울가”는 “도성” 밖에 있으며, 따라서 비유대인 곧 이방인들을 대표하기에 적당하다(참조 14:21 주석). 사도들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다가 동포들의 반대에 직면하자 이방인에게로 관심을 돌렸다(행 13:46~48).

 

강권하여. 헬라어 아낭카조(anagkazo-). 힘이나 설득으로 “강요하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회심시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해도 됨을 정당화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는 무력에 호소하여 사람들이 당신을 강제로 믿도록 하지 않았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으며 사도 시대 교회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당신의 말씀을 그렇게 해석하게 할 의도가 전혀 없었음을 증명한다. 사실, 가르침과 모본을 통해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개인적으로나 또는 복음의 공적인 사신들로서 불평거리들을 가지고 논쟁하거나 보복하지 말라고 되풀이하여 권면했다.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핍박해서도 안 되었을뿐더러(9:54~56), 핍박을 온유하게 견뎌내야 했다.
 “강권하여 데려오라”라는 예수의 말씀은 단순히 초청의 긴급성과 하나님의 은혜의 강권하시는 힘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자비가 곧 강권하는 힘이 되어야 했다(참조 실물교훈, 235). 아낭카조는 예수가 그의 제자들을 배에 타라고 “재촉하셨던” 경우(마 14:22)를 언급할 때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가 염두에 두고 말한 끈질긴 호소, 그리고 과거 수 세기 동안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이 당연하다고 여겼고 오늘날에도 기회만 되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의존하려고 하는 물리적인 힘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잔치에 손님들을 데려오기 위해 어떤 경우에도 물리적인 완력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비유 자체가 증거한다. 만약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주인의 의도였다면, 그는 먼저 초대받은 손님들에게 무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복음 잔치의 초청에는 언제나 “원하는 자”라는 말이 수반된다(계 22:17). 이 비유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데려오기 위해서는 박해를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는 사상을 일절 인정하지 않는다. 종교 문제에 무력이나 박해를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마귀에게 부추김을 받은 방법이다.

 

내 집을 채우라. 참조 22절 주석. 주인은 “많은” 손님들을 초청했다(참조 16절). 더욱이 종이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갔지만 손님방을 채우기에 충분한 사람들을 찾을 수 없었다(참조 22절).

 

 24. 그 사람은 하나도…못하리라. 전에 청했던 손님들을 이렇듯 강하게 배제한 표현은 비유에 나타난 주인의 선언이며, 그렇다고 이것이 하늘나라가 누군가를 임의로 배제하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야기의 은혜로운 주인은 무례하게도 거절당한 처음 초청을 단순히 취소하는 것에 불과하다. 분명히 그의 집은 이제 “채워”(23절)졌고 더 이상 남은 자리가 없다. 그러나 하늘나라에는 들어가기를 원하는 모든 자를 위한 자리가 충분하다(참조 22절 주석).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하여 이 세상의 재물이 반드시 하늘나라와 모순된 것이라고는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물질에 대한 지나친 애정이 사람을 하늘에 가기 부적합하게 만들며 사실 하늘에 속한 것에 대한 갈망에서 멀어지게 한다고 가르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참조 마 6:19~24 주석). 지상의 재물을 모으거나 세상의 쾌락을 즐기는 일에 최우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그들의 애정을 하늘의 사물보다는 세상에 두고 있기 때문에 하늘에서 제외될 것이다(참조 마 6:25~34). 세상의 사물에 대한 탐욕은 결국 하늘의 것들에 대한 소망을 제거하며(참조 눅12:15~21 주석), 따라서 탐욕스런 사람들은 축적한 부를 나누어주라는 요청을 받을 때 “근심하며” 떠난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마 19:23) 것은 흔히 들어가고자 하는 충분한 열망이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즉 그들이 나중에 마음을 바꾸었을 경우에도. 구원은 하나님이 내민 초청과 그에 대한 인간의 수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가지 중에 하나만으로는 효력이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총을 경홀히 여긴 사람들이 너무 늦게, 즉 복음의 초청이 더 이상 발해지지 않을 때에야 마음을 바꾸려 할 가능성이 있음을 거듭거듭 보여 준다. 결국 그 초청이 철회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어떤 시간적인 한계를 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제외된 자들이 최종적인 결정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중에 마음을 바꾼다 해도 그 변화란 자신들에게 나타난 결과를 보면서 그릇된 선택을 했음을 깨달은 것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진실한 소망이 그들에게 갑자기 생겼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 먼저 본문을 읽으면서 자세히 관찰하세요.

 

누가복음 13:1~9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8]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훈을 말씀하실 때 심판의 경고와 자비의 초청을 연결시키셨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사람의 생명을 멸하려 함이 아니요 구원하려 함이라’(눅 9:56),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당신의 자비로운 사명과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과의 관계를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설명하셨다.”(실물, 212)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 대한 솔직한 이해가 필요하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그분의 품성을 품지 않으면 결국에는 그 이름을 잃게 될 것이다.

 

본문연구


1. 본문에서 갑작스런 죽음을 당한 두 부류의 사람들은 각각 어떤 경우인가?
    1) 1절 ________________________
    2) 4절 ________________________
   cf. “피를 제물에 섞었다”는 의미-갈릴리 사람들의 “해받음(2절) 즉, 제사를 드리는 중에 빌라도에 의해 학살당한 것을 의미한다. 다음을 읽어보라.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소동이 자주 일어났는데 빌라도는 이것을 폭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한 번은 그의 군대들이 성전 뜰 안까지 침입해 들어가 거기서 제물로 드릴 짐승을 잡고 있던 갈릴리인 순례자들을 죽인 일이 있었다.”(실물, 212-213)

 

2.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은 무엇이었으며,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는가? 
    2-5절 ________________________

3.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동일한 표현으로 반복된 말씀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말씀 중에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무엇인가?
    ________________________
   cf. 요 3:17을 읽고 대조되는 두 단어를 찾아보라.

 

 4.  6-9절에 기록된 [무화과 나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신 것은 무엇인가? 아래의 질문들에 답해보라.
    ________________________
   1) “무화과 나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사5:7, 61:3)
   2) “열매가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사 5:2)
   3) “과원지기”는 누구의 역할을 말하는가?(사 27:3)
 

◈ 토의사항


1. 이 세상에 일어나는 재난과 사고와 질병 등의 이유는 무엇일까?
   cf. 최근에 이러나는 여러 가지 재난과 사고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2.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통과 죽음의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3.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어떻게 드러난다고 설명할 수 있는가?
   cf. 호 14:1-8을 함께 읽고, 하나님의 심정과 우리의 할 일을 이야기 해 보자.

 

인간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지만, 설명하지 못하는 고통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할 자유는 없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에 의해 심판되어질 것이다.

 


 

1. 그때 마침. 찍어 버리라. 문자적으로, 포도원의 포도나무 “중에서” “베어내 버려라.” 그때는 아마도 AD 30~31년 겨울이었을 것이다. 예수는 시대의 징조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도중이었다.

 

두어 사람이 …예수께 고하니. 이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이렇게 고하는 그들의 동기가 무 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들에게 어떤 저의(底意)가 있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는 듯 하다.

 

와서. 이 학살 사건은 금방 있었고(실물교훈 212, 213,), 따라서 그리스도에게 말한 이 사람들이 가장 먼저 그 소식을 전해왔을 것이다.

 

갈릴리 사람들. 요세푸스가 유대 지방에서 빌라도와 그 밖에 여러 행정관료들에 의해 저질러진 유사한 대학살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이 학살은 누가 외에 다른 어떤 기자도 언급하지 않는다. 빌라도는 몇 년 후인 AD 36년에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는 사마리아인들을 학살한 일로 가이사에게 소환되었다.


섞은 일. 그들은 희생제사를 드리는 바로 그 행위를 하는 도중에 학살되었다.


 2.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이 대답에는, 소식을 전한 자들과 예수 주위에 모여 있던 청중들이 어떤 면에서 이 학살을 목숨을 잃은 자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겼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참 욥 4:7; 8:4, 20; 22:5; 요 9:1, 2). 예수는 이러한 판단을 단호하게 부정하고 있다. 적당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수는 고난을 죄에 대한 형벌로 보는 통념을 배격했다. 사고나 불행을 “하나님의 행위”로 보려는 유혹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혹하고 잔인한 아버지로 생각하게 하려고 애쓰는 사단에게서 왔다.

 

 3. 회개치. 문자적으로는 “회개하라, 그리고 계속하여 회개하라.” 죄에 대한 형벌은 최후 심판의 큰 날에 받게 된다. 예수는 빌라도도 갈릴리 사람들도 정죄하지 않았다. 유대인 가운데 누구라도 예수가 빌라도의 잔혹함을 규탄해주기를 바랐다면, 그들은 실망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원하기만 하면, 겸비한 마음을 가지고 좀 더 완전하게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는 방법을 인생의 모든 경험에서 배울 수 있다. 절망이나 불행 그리고 재앙은 그것들을 목격하든지 경험하든지 겸손하고 수용적인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귀중한 교훈들을 가르쳐줄 수 있다.

 

 6. 이에 비유로. 예수의 가르침과 비유 해석 원칙에 대해서는 제9권, 113~119을 참조하라. 이 비유를 통해 예수는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의 관계를 보여 주고자 했다(실물교훈, 212). 또한 이 비유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인간들이 적시에 회개해야 할 필요와 관련하여 설명한다.

 

포도원. 팔레스타인의 농원에서는 오늘날에도 포도나무 사이에서 자라는 무화과나무를 흔히 볼 수 있다.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는, 하나님은 열매 맺지 않은 사람들도 사랑하지만 그분의 자비가 결국 끝날 수 있다는 진리를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 무화과나무가 만족스러운 실과를 맺지 못한다면 베어질 것이었다(참조 사 5:1~7). 일반적인 의미에서 무화과나무는 모든 개인을 나타내며, 특별한 의미에서는 유대 민족을 대표한다.

 

 7. 삼 년. 포도원 주인이 이 나무에서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 수령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이후로 3년이 흘렀다. 주인은 나무가 열매를 맺으려고만 했다면 충분히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찍어 버리라. 문자적으로, 포도원의 포도나무 “중에서” “베어내 버려라.”

 

땅만 버리느냐. 헬라어는 “또한”(also)이라는 단어를 추가하고 있다. 환언하면,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았으면 생산적으로 쓰일 땅도 차지하고 있었다. 유대민족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역할을 성취하는 일에 쓸모 없는 곳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계획을 수행하는 데도 장애물이 되었다(실물교훈, 215).

 

 8. 그대로 두소서. “삼 년”(7절)은 예수의 공생애에 포함된 처음 3년을 상징적으로 가리킨다는 주장이 있어 왔다. 이제 예수가 침례받은 후 3년이 흘러(참조 마 4:12 주석) 십자가 사건이 있으려면 불과 몇 개월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참조 13:1 주석) 이때는 “삼 년”이 지난 후에 온 은혜의 해였다. 하나님의 자비는 여전히 유대 민족이 회개하고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도록 기다리며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또 한 번의 기회가 마지막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경고는 자비를 연장하는 것과 관계돼 있었다.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틀림없이 “과원지기”(참조 7절 주석)는 적어도 포도원의 다른 나무들만큼 그 나무를 돌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무가 열매 맺도록 도우려는 그의 마지막 노력은 이전보다 훨씬 더 한 것처럼 보인다(참조 마 21:37 주석; 사 5:1~4).

 

 9.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if it bear fruit, well). 「제임스왕역」에 이탤릭체로 되어 있는 “well”은 첨가된 단어이다. 헬라어는 사상의 갑작스런 단절을 나타내는 보기 드문 표현법인 돈절법(頓節法, aposiopesis)을 사용하고 있다. 시험의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한 것이 없다.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누가복음 12:35-48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42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45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 먼저 본문을 읽으면서 자세히 관찰하세요.

 

그분은 우리를 청지기로 삼으셨다. 믿음과 사랑으로 드린 우리의 가장 작은 헌물과 가장 비천한 봉사는, 영혼을 구원하여 주님을 섬기고 그분의 영광을 증진시키기 위한 헌신의 예물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관심과 번영은 모든 관심사를 능가하여야 한다. 쾌락과 이기적 관심을 생애의 주된 목적으로 삼는 자들은 충성스러 운 청지기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기 위하여 자아를 부인하고, 자신과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봉사 사업에 드리는 자들은 이기적인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행복을 발견한다.”(1보감 377)

 

깨어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고유한 특성 곧 세상과 분리된 것을 나타내야 한다. 우리가 깨어 있는 것을 통해 우리는 세상에서 참으로 순례자며 나그네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본문연구

  1. 누가복음 12장 35~40절은 인자의 임함이 늦어질 것임을 가정하고 있다. 우리는 기다리는 시기에 살고 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살아갈 길을 어떻게 가르쳐 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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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예비”하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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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현대 교회에 있어서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교회는 어떻게 세상을 향해 책임감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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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교회에서 책임을 가진 사람들-목사, 교회 직원 등등-에게 특히 적용된다. 권세 (44절)는 계산하는 날에 책임(42, 43절)과 변명을 요구한다. 넓은 의미로, 그것은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에게 해당된다.

 

토의사항

  1. 깨어서 기다린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이야기 해 봅시다.

  2. 세상에서 내게 맡겨진 일들을 하면서 사는 삶과 깨어 주인을 기다리는 삶을 어떻게 조화 시키는 것이 옳은 것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3. 예수님의 재림의 기별을 먼저 받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보여주어야 하는 삶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우리의 진정한 위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 는 그리스도께 고용된 종으로서의 우리의 의무에 대해 올바른 관점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분은 당신의 고난의 생애와 흘리신 피로써 우리에게 삯을 미리 지불하심으로 당신 자 신을 섬기도록 우리를 붙들어 매셨다. 우리가 가진 모든 좋은 것들은 우리 주님께로부터 빌린 것들이다.”(화잇주석, 눅 12:42)
 
“나는 세상의 근심에 씌여 있는 애착과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의 재물을 늘여 가면서 우리는 구주께서 명령하신 깨어 기다리는 위치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보았다. 천 사는 말하였다. “그들은 세상하나만 얻을 수 있다. 하늘 보화를 얻으려는 그들은 세상의 것을 희생해야 한다. 그들은 두 세계를 다 얻을 수 없다.” 나는 사단의 속이는 덫을 빠져나오기 위해서 깨어 기다리는 일에 신실한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게 되었다. 그는 깨어 기다려야 할 사람들을 세상을 향해 한 발 전진하도록 유도하라. 그들은 앞으로 전진할 의향은 없지만 그 한 발을 뗀 만큼 예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 발을 떼기가 쉬워 진다. 그리하여 한발 한발 세상을 향해 가게 된다. 결국은 그들과 세상의 차이는 신앙 고백 즉 명목만 남게 된다. 그들은 그들의 거룩하며 고유한 성격을 잃어버리고, 결국에는 그들과 그들 주위에 있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차이점이라는 것은 그들이 신앙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점밖에 없을 것이다.”(2증언, 193)

“세째 천사의 기별을 믿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경솔함과 농담과 경박한 행동으로 흔히 하나님의 사업에 손해를 준다. 나는 이 같은 악이 우리의 대열에 편만해 있는 것을 보았다. 주 님 앞에 겸손해져야 한다. 하나님께 속한 이스라엘은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야 한다.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사람에게 칭찬받기를 하나님께 불쾌히 여김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천사는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대들을 심판하 고 연약한 그대들의 생명의 줄을 끊어 버리심으로 심판을 위한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무방비 상태로 무덤에 내려가지 않도록 그대들의 마음을 정돈하라. 그대들이 하나님과 즉시 화평의 관계를 이루지 않고 그대 자신을 세상과 분리시키지 않으면서 무덤속에 침실을 마련하 게 된다면, 그대들의 마음은 더욱 굳어지고, 그대들은 거짓된 도움 곧 가상적인 준비에 의존 하게 되고, 그대들의 잘못을 너무 늦게 발견함으로 건전한 기초 위에 세워진 소망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나는 안식일 준수자라고 공언하는 자들 중 어떤 사람들이 연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를 꾸미기 위한 유행을 이것저것 연구함으로써 차라리 내어 버리는 것만 못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대 자신을 세상 사람들과 같은 모양으로 보이게 하고 할 수 있는 대로 아름답게 하고자 애쓰고 있을 때, 바로 그 육체가 며칠이 못 가서 벌레의 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대들이 그 육체를 그대들의 취향에 맞게, 또한 눈 을 즐겁게 하도록 꾸미고 있는 동안, 그대는 사실상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는 셈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대의 허무하고 악한 교만을 미워하시고, 그대를 부패와 부정(不淨)이 가득한 회칠 한 무덤으로 보신다.”(1증언, 133-134)


35. 허리에 띠를 띠고.  즉 행동할 준비를 갖추고(참조 시 65:6 주석). 깨어 있으라는 것은 이 간단한 비유의 요지다. 예수는 여기서 처음으로 재림에 관하여 공개적으로 가르친다. 그의 지상봉사의 끝이 눈앞에 임박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승천 그리고 권능과 영광 가운데 있을 재림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키고자 했다. 이 비유는 주인의 다시 오심을 바라보고 바르게 살아가는 삶을 강조한다.

38. 이경. 대략 오후 9시와 자정 사이(참조 마 14:25 주석). 삼경. 대략 자정부터 오전 3시까지.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여느 때처럼, 베드로는 자칭 열두 제자의 대변인으로 활동한다(참조 마 14:28; 16:16; 17:14 주석).

모든 사람에게. 열두 제자와 무리들이 함께 있었다(참조 1절 주석). 따라서 베드로는, 깨어 있으라는 예수의 권고가 “주인”의 “종”으로서 특별히 제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전반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인지 의아해한 것 같다.

42.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 이것은 깨어 예비하는 일의 중요성을 보여 주기 위하여 주어 진 여섯 개의 예증 가운데 두 번째 예증이다.
 
그 집 종들을 맡아. 이 비유는 특별히 “믿음의 권속”(갈 6:10; 참조 엡 2:19)의 종교적, 영 적 지도자들에게 적용되는데, 그들의 의무는 구성원들의 필요를 공급하고 그리스도의 오심 이 임박했음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을 교훈과 모본으로써 증거하는 것이다.

때를 따라 양식을. “제때에 양식을”(「개정표준역」).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벧전 5:2)고 깨어 준비하는 일의 본이 되는 것(3절)은 목자의 의무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양떼를 셈하라 고 요구할 것이고, 따라서 목자들은 각기 맡겨진 책임을 신실하게 수행해야 한다(참조 겔 34:2~10).

43. 복이 있으리로다. 즉 “행복하리로다”(참조 5:3 주석).

44. 그 모든 소유를. 즉 그는 더 큰 책임을 맡게 될 것이다(참조 24:21 주석). 보디발 집에 서의 요셉의 경험과 비교해 보라(참조 창 39:3~6).

45. 마음에 생각하기를. 그 “악한 종”은 주인이 더디 올 것이라는 믿음을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의 생활방식으로 주인을 배반하고 있다. 그는 주인이 곧 돌아오리라고 믿는 것처럼 행동하지는 않는다.

주인이 더디 오리라. 그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의 실제성을 부인하는 “기롱하는 자”는 아니었다(벧후 3:4). 그는 믿는 체한다. 사실 그는 “믿음의 권속”들에게 주의 다시 오심을 준 비하도록 도와줄 영적인 양식을 공급할 책임을 져왔다(참조 24:45 주석). 그러나 그의 말에는 확신이 없다. 그는 진정으로 하지 않았다. 그의 삶과 일은 주가 곧 오신다는 것을 진정으 로 믿는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는다. 위기의 때에 그는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민 16:48) 서지 않는다.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봉사하지도 않으며, 또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딤후 4:2)지도 않고 오히려 자기 교인들의 “가려운 귀”에 부응하도록 기별을 조절한다 (3절). 그는 “그리스도의 강림이 임박했다는 기별도 사람들에게 그들이 세상일에 너무 골몰 하고 있음을 깨우치기 위하여 주어진”(실물교훈, 228) 것임을 잊고 있다.

노비를 때리며. 자신을 돌보는 것을 주업으로 삼고 자기 양들에게는 무자비하여 그 무리를 흩어버리는 목자들에 대한 에스겔의 통렬한 비난과 비교해 보라(겔 34:2~10).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하나님은,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은 진리와 의무에 대한 지식으로 사람의 책임을 평가한다.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단순히 말만 하는 단순한 공언은 무가치하다. 하나님을 아는 체하지만, 아직 그의 계명을 불순종하는 자는 그 겉모습의 어떠함과 관계 없이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요일 2:4).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때 그 뜻을 행하는 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수반하나, 혹 그 행함이 가식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는 말은 진실이다. 그러나 진지하고 열렬한 믿음이 수반되지 않은 행함 역시 죽은 것이라는 것도 진실이다 (히 11:6).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자들에게는 그 책임이 지워지지 않는다(눅 12:47, 48). 그러나 마음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그들 자신이 선택한 길을 고집한 자들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으며(요 15:22), 참람될 위험이 있다.

48. 알지 못하고  빛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기준과 진리와 빛의 지식이 풍부한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기준은 전혀 다르다. 어떤 단계의 의는 그리스도교계 사람들이 행한 일일 때는 하나님께서 별로 만족히 여기시지 않지만 이방 나라 사람들이 행한 일일 때는 만족히 여기시고 받으신다. 그분은 많이 주시지 않은 곳에는 많이 요구하시지도 않으신다 (원고 130, 1899)

 
 
 
 

재물에 대한 가르침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3]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6]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 먼저 본문을 읽으면서 자세히 관찰하세요.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자신을 하나님의 지도에 맡기며 안전한 길로 인도해 주시도록 구하게 된다.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면서 스스로 택한 길을 가고자 결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실 그분의 손을 기다리며,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사 30:21)고 하시는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산상보훈, 117-118)

 

시대를 무론하고 재물에 대한 탐심은 사람들을 지배해 오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소유에 대하여 어떠한 권면을 주시는지 살펴보자.

 

본문연구

 

1. 예수님의 비유와 가르침은 각각 누구에게 하신 것인지 찾아 적어보라.

    1) 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15, 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22, 3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13절의 무리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1), 반면, 32절의 적은 무리는 그와 대조되는 듯하다.

   cf. 일반적인 사람들, 탐심이 많은 특정한 사람, 그리스도인들에게 재물에 대한 가르침은 차이가 있는가?

 

2. 본문에서 재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각자 찾아서 발표하고 설명해 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15, 21, 23, 29, 31, 34절 등이 아닐까?

 

3.  본문의 말씀들을 참고하여 다음 질문들에 대한 적절한 답이나 설명을 적어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재물은 최고의 가치를 갖고 있는가? (15)

   2) 재물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태도는 무엇인가? (34, 18-19, 29-30)

   3) 탐심을 물리치고 하나님게 대하여 부요케 되는 한 가지 방법은 무엇인가? (21, 33)

  cf. 자신과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봉사 사업에 드리는 자들은

        이기적인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행복을 발견한다.(화잇주석, 12:42)

 

 

토의사항

 

1. 재물에 대한 각자의 가치기준과 생각들을 이야기 해 보자. 

 

2. 그리스도인은 물질만능주의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일에 어떤 자세를 취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3. 16~21절에 있는 비유에 나온 부자는 왜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가진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4.  그리스도인과 부자에 대해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지 서로 나누어 봅시다. 

 

우리는 재물을 넘어선 인생의 참된 가치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 재물 자체보다 그것을 주신 분에 대한 인정과 감사, 그리고 재물의 올바른 사용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13. 한 사람. 즉 예수를 대접한 바리새인(참조 11:37)의 집 밖 거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무리 가운데 한 사람(참조 1). 예수에게 말을 건넨 이 사람은, 주님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단호하게 꾸짖는 것과 정사 잡은 자들 앞에 출두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자들에게 권면하는 것을 들었다. 이 사람은, 예수가 동일하게 대담한 권위로 자신의 형에게 말한다면 그 말을 감히 거역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 사람은 천국복음을 자신의 이기적인 관심을 발전시키는 수단 이상으로 생각지 않았다.

 

유업을나누게. 상속에 관한 모세의 율법에 따라, 형이 아버지의 유산의 두 몫을 받았고 남은 형제들은 각각 한 몫씩 받았다(참조 신 21:17 주석). 아마도 이 경우에 예수에게 호소하고 법적으로 할당된 두 배의 몫을 형이 취하는 것을 반대한 이는 동생이었을 것이다.

 

14.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 예수가 와서 선포한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었다(참조 요 18:36). 사회적 정의를 이루는 일이 중요하지만 그는 제자들에게 그 일을 위탁하지 않았고, 어떤 경우에도 인간들 사이에서 법적 판결을 내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참조 요 8:3~11). 구약의 선지자들( 6:8 )과 마찬가지로, 예수도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에 적용해야 할 원칙들은 분명하게 말했지만(참조 마 5:38~47; 6:14, 15; 7:1~6, 12; 22:39 주석), 사회정의를 집행하는 일은 정당하게 임명된 국가 위정자들에게 위탁했다. 예수는 이러한 원칙에서 벗어난 적이 없으며, 따라서 그의 이름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자들은 다른 점에서뿐만 아니라 이점에서도 그의 모본을 잘 따를 것이다(실물교훈, 254).

 

15. 탐심. 헬라어 플레오넥시아(pleonexia, 참조 막 7:22 주석). 탐심은 삶에 관련된 물질적인 소유들, 특히 다른 이들에게 속한 소유에 대한 부당한 애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예수에게 말을 건넨 그 사람은 물질이 더 필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에서 탐심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되면 그에게 부()가 그리 큰 관심사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마음 속에 더 이상 탐심이 없다면, 해결할 분쟁도 없을 것이다. 늘 그렇듯이, 예수는 문제의 뿌리에 접근했고 미구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유사한 문제들을 막을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그는 오늘날 소위 사회복음(social gospel)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임시변통의 치료약을 천거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높은 임금(賃金)이나 더 큰 수익(收益)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생필품들을 더하시리라는 충만한 확신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도록 이끌어주는 마음과 정신의 변화가 필요하다(참조 마 6:33).

 

소유의 넉넉한 데.  물질주의는 오늘날 세계의 많은 주된 문제들의 뿌리다. 그것은 대부분의 정치 및 경제 철학에 기초를 제공하며, 따라서 인류에게 재앙을 몰고 오는 대부분의 계층 및 국가 간 투쟁에 원인을 제공한다. 우리의 소유에 대한 불만족은 자신 스스로 정직하게 애쓰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소유의 일부나 전부를 포기하도록 강요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확보하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탐심은 세상이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의 원인이다.

예수에게 형의 행동을 심판하는 역할을 해달라고 호소했던 사람의 요청은, 어떤 기업가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많은 이윤을 움켜쥐려는 정신 그리고 몇몇 노동자들이 생산성에 공헌한 자신의 가치나 고용주의 지불능력에 아랑곳하지 않고 항상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하는 것과 동일한 정신에 의해 촉발되었다. 이는 나라의 어떤 법률이 다른 집단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는 상관도 하지 않은 채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법률제정을 이끌려는 이익집단이 가지는 정신이며, 국민들의 염원과 최대 관심사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국정만을 관철하려는 국가를 이끄는 정신이다. 또한 자주 결손 가정, 청소년 범죄 그리고 그밖에 수많은 범죄들을 양산(量産)하게 하는 정신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모든 자들에게 진정한 시각으로 이생의 물질적 소유를 바라보고 이것들을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에 종속시키라고 요청한다(참조 마 6:24~34; 6:27 주석).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견해와는 달리, 더 많은 물질이 반드시 더 많은 행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행복은 물질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정신에 달려 있다(참조 전 2:1~11 주석).

 

16. . 사람이 땅에 씨를 묻고 최선을 다해 돌보지만 씨가 자라도록 하는 분은 하나님이다. 사람이 성장 과정에 기여할 수는 있지만, 자라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다(참조 고전 3:6, 7). 하나님은 햇빛과 비를 주며(참조 마 5:45 주석), 결실기(結實期)를 허락함으로 인간의 수고를 축복한다(참조 행 14:17).

이스라엘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은 재물 얻을 능력을 사람에게 주신 분이 당신임을 잊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준 것에 대해 자신에게 영예를 돌리는 경향이 있어서,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8:17)라고 말하기 십상이다. 이것은 치명적 기만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생각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어두워질 것이다(참조 롬 1:21). 그는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하나님 보기에 우준(愚蠢)하게 된다(참조 롬 1:22). 만약 그가 그러한 길을 고집한다면 마침내 완전히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물질적인 행복과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참조 롬 1:23~32). 그는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게 된다(딤후 3:4).

 

17. 둘 곳이 없으니. 쌓아 둘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풍족하게 베푼 물질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이기적인 관심이 동료 인간들의 필요에 대해 눈멀게 했다(참조 16:19~31 주석).

 

18. 내 모든 곡식. 그의 소유욕을 나타내는 표현에 주목하라. 내 곡식들, 내 곳간, 내 물건, 내 영혼(참조 호 2:5). 그의 생각은 모두 자신에 관한 것뿐이었다. 분명히 그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19:17)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생각하고 계획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이 보기에 지각이 없는 자이다(참조 11:40 주석). 천국 복음의 목적은 사람들의 생각을 자아에게서 돌려 위로 하나님을 향하게 하고, 밖으로 동료 인간들을 향하게 하는 것이다.

 

22. 염려하지 말라.  예수는 여기서 금욕주의를 천거하거나, 가난을 장려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근면하고 자산 있는 사람보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주의한 사람을 가납한다고 단언하지 않는다. 예수는 사적인 일과 사업적인 일을 경영할 때 신중한 태도를 취하라고 충고했다. 그가 정죄하는 것은 삶에서 물질적인 것, 특히 생활에 필요한 것 이상의 물질들에 대하여 염려하는 습성이다. 그는 어느 방향이든 무절제로 이끌어 가는 욕망을 정죄한다. 그리스도인은 사물의 비교 가치에 대한 식별력을 소유할 것이며, 따라서 그의 관심은 그 가치에 비례할 것이다. 그는 재물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재물은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한 수단임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삶의 최고 목적을 재물을 축적하는 데 두지 않을 것이다.

 

23. 음식.  예수는 훨씬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중요한 것은 생명 자체라고 말한다. 음식도 중요하지만 음식 자체가 목적은 아니며 그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음식과 의복을 얻는 것을 자신의 주요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 것이다. 우리는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먹는다(참조 막 2:27).

 

28. 너희일까보냐. 생명을 주신 그분은 분명 음식과 의복이라는 더 작은 선물도 주실 것이다. 그분은 자신이 부여한 생명을 보존하는 일에 변덕스럽게 관심도 갖지 않고 방관만 하고 서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분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온당하다.

 

30. 세상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일은 천국 시민들에게 적절하지 않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이나 다름없는 것들을 얻기 위해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버린다는 것은 온당치 않다(30).

 

31. 너희는 먼저구하라.  인간의 삶의 위대한 목적은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하는 것이다( 17:27). 대부분의 사람들은 썩는 양식을 위하여( 6:27),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를 물( 4:13)을 위하여 일하는 데 몰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한다( 55:2). 우리는 매우 자주, 하나님이 관대하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 여정 끝에 7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영원한 왕국을 더해줄 것이라는 헛된 희망으로 이 모든 (물질적인) 것들을 인생의 주요 목적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첫째 일을 첫째로 삼기를 바라며, 덜 중요한 것과 덜 가치 있는 것은 필요에 따라 각 사람에게 공급될 것이라고 보증한다.  

 

그의 나라 모든 시대를 통해 이 세상 왕국이 결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 될 것이라는 약속( 11:15), 은혜의 왕국 시민들이 거룩한 생애를 살며(요일 3:2, 3) 그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자기를 희생하도록 고무시켰다(참조 행 20:24; 딤후 4:6~8). 모든 시대의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정신 속에서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 2:13)이 항상 최고 우선적인 자리를 차지했으며 그들이 더욱 거룩한 생애를 살도록 북돋았다.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을 떠나 그의 왕국의 시민이 되지 않는다면, 안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염려에 대한 최상의 치료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몫을 충실히 이행한다면, 천국을 우리의 사상과 생애에서 첫째로 삼는다면 하나님은 삶의 여정에서 우리를 돌보아 주실 것이다. 그는 자비롭게도 우리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실 것이며(참조 17절 주석), 우리의 경험의 잔은 좋은 것으로 넘칠 것이다(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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