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2:39-62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40]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41]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47]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와서

[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 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하고

[50]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55]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 한 비자가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8]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가로되 너도 그 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 한 시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가로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먼저 본문을 읽으면서 자세히 관찰하세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는 인간의 대리자로서 고통을 당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은 죄의 사악함의 공포아래 마음이 흔들리어 마침내 창백하고 떨리는 그의 입술에서 “오,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하는 고뇌에 찬 부르짖음이 흘러 나오게 하였다. 그러나 타락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으시다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 하셨다. 만약 하늘로부터 천사들이 와서 힘을 돕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의 인성은 두려운 죄의식 때문에 그때 거기에서 죽고 말았을 것이다.  
세상 죄의 통탄할만한 성질을 생각할 때에 그리스도는 아무도 없는 곳에 따로 떨어져 혼자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어둠의 주관자들이 거기 있어서 할 수 있는 대로 죄를 광범하고, 깊고, 두려운 모습으로 보이게 하였다. 사단은 하나님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하나님의 품성을 왜곡시키고 하늘 정부의 율법에 대한 불경과 멸시와 증오심을 나타냄으로써 죄악을 하늘에 사무치게 하였다. 그리고 속죄가 불가능하게 보일만큼 죄를 사악하게 보이게 하고 따라서 잃어버린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아들이 죄의 저주 아래서 압착, 분쇄되어 버릴만큼 죄를 크게 부풀리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다.

 

예수님의 고난은 겟세마네에서 시작되었다. 그분께서 그곳에서 참아내신 것은 대쟁투의 빛에 비추어 볼 때, 우주의 관객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본문연구

  1. 왜 예수님의 “땀이 땅에 떨어자는 핏방울 같이 되”도록 기도하셨는가? 예수께서 가능하면 벗어나게 되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셨던 잔은 무슨 잔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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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께서는“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맛보셨다”(시대의 소망 3권, 193).

  2. “그 잔”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은 무엇처럼 연상되는가?(시 11:6; 사 51:17). 그 시간에, 그리스도를 위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는가?(히 10:7,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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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시간 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새 언약의 잔을 나누셨다. 이제, 그분은 슬픔과 흑암의 쓴 잔을 맛보신다. 그러나 이 순간에 승리는 왔다. 

  3. 유다의 배반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며, 또한 흑암의 세력의 일이 되는가?(눅 22:42, 53; 요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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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베드로를 고소하는 소리 배경에, 사단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유다를 유혹하였고, 이제는 베드로에게 덫을 놓았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위하여 사단의 계교를 막으시겠다고 선언하셨다(32절).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방어가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를 보여 주는가?(행 5: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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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의사항

  1. 예수님이 받으신 잔이 내 삶의 변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베드로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베드로가 그의 그런 행동에도 불구하고 돌이킨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3. 나는 어떤 상황 하에서도 예수님과의 관계를 기꺼이 인정할 수 있을까? 자신의 결심을 이야기해 봅시다. 

“만일 베드로가 자기 주님을 위하여 싸우도록 부르심을 받았더라면 그는 용감한 군인이 되었을 것이나 조롱의 손가락이 그를 지적할 때에 그는 자신이 겁쟁이라는 것을 나타내었다. 그와 동시에 베드로의 시선도 주님께 이끌렸다. 그 부드러운 얼굴에서 그는 깊은 동정과 슬픔을 엿볼 수 있었을 뿐 분노의 그림자는 추호도 없었다. 
창백하고 고통에 차 있는 얼굴, 떨리는 입술, 동정과 용서하시는 정이 서린 모습은 화살처럼 그의 마음을 찔렀다”(시대의 소망 3권, 218,219).


39. 습관을 좇아. [겟세마네로 감]. 겟세마네. “기름 틀을 뜻하는 아람어에서 따온 이름. 명상과 기도 그리고 휴식을 위해 구주는 이곳에 자주 갔으며, 여기에서 종종 밤을 보냈다(22:39; 18:2; 시대의 소망, 685, 686,). 십중팔구 십자가에 달리기 전, 화요일과 수요일 밤에 그는 이곳으로 물러나 있었을 것이다(참조 마 21:17; 24:1, 3; 26:17, 18 주석; 21:37).

성경 시대에 이 동산이 어디에 있었는지 정확하지 않다. 이 조용한 장소는 아마도 성전에서 볼 때 기드론 골짜기 바로 건너편에 있으며, 도성에서 도보로 10분쯤 걸리는 곳에 있는 감람산의 아래쪽 경사지 어떤 곳에 있었을 것이다(참조 21:1; 26:30 주석). 오늘날 방문객들에게 일반적으로 가르쳐 주는 장소는, 그리스도 이후 3세기가 지난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 이전에는 찾을 수 없는 전승에 근거한 것이다. 여러 주석가와 팔레스타인을 여행한 사람들의 의견에 따르면, 본래의 겟세마네는 경사지의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참조 483.

 

41. 돌 던질 만큼. 누가만이 이런 내용을 언급한다. 누가는 그 거리가 돌 던질 만큼의 거리였다는 말을 첨가한다(22:41). 그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보고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천사를 보았고(22:43) 천사의 음성을 들었다(시대의 소망, 685, 694,).

 

42. 이 잔. 은 선하든 악하든 생애의 경험들을 나타내기 위해 흔히 쓰이는 성경적 표현이다.

 

그러나. 사단이 온갖 맹렬한 시험으로 예수의 영혼을 압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문이나 주저함 없이 아버지의 뜻에 순복했다. 그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복한 것은 우리가 따라가야 할 완전한 모본을 제시한다.

 

43. 사자가. 그는 여러 번 그리스도를 친히 수종들었던 가브리엘이다(참조 1:19 주석). 광야에서 예수가 사단을 대면한 끝 즈음에 겪은 경험과 비교해 보라(참조 마 4:11 주석).

 

힘을 돕더라. 예수가 세 번 기도한 후에,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길을 다 가기로 큰 결심을 한 다음,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의 고통을 맛보시, “예수께서는 약간 일으키셨던 그 몸을 죽어가는 사람처럼 땅위에 엎드리셨다”(시대의 소망, 693, 694,). 예수와 십자가 사이에 놓인 고통의 시간에 그에게 힘을 주고자 강한 천사가 왔으며, 힘을 얻은 후에 그의 얼굴에서는, “그분이 방금 당하신 고통의 흔적은 사라지고 고요하고 평안하게 일어나셨다”(시대의 소망, 694). 그런 모습으로 예수는 자기를 잡으러 온 폭도들을 만났다.

 

44. 애써.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갔을 때 그를 짓누른 그 심한 고민과 신비한 슬픔을 우리가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를 사로잡은 특별한 슬픔은 제자들을 당황하게 했다. 그들이 전에 결코 목격하지 못했던 격렬한 고민으로 괴로워하는 신-(神人), 곧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자(참조 마 1:1; 2:10; 1:35 주석)가 거기에 있었다. 그 고통은 부분적으로는 육체적인 것이었지만, 단지 세상 죄를 짊어진 자인 그리스도의 무한한 고통에 대한 눈에 보이는 반영에 불과했다.

 

45. 잠든 것을. 잠시 그들은 깨어 있어 그와 연합하여 기도했으나, 얼마 후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의 혼미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이 기도에 골몰했다면 혼미케 하는 잠을 떨쳐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47. 열둘 중에 하나인. 이 부가적인 표현은 틀림없이 유다의 배신적인 행위의 가증한 성격을 더욱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해 덧붙였을 것이다(참조 21, 23절 주석). 이 말은 그의 배신적인 행위의 가증함을 크게 부각시킨다.

 

유다. 그 배신자는 어디에서 예수를 찾을 수 있을지를 알았다(18:2). “묵상과 기도를 위해 그분이 자주 가는 한 곳에서 그를 잡기로 조치가 되어 있었는데, 겟세마네는 그가 그런 목적을 위해 자주 갔으며 때로는 밤을 보내기도 한 장소였다. 유다의 임무는, 예수가 조용하고 한적한 은둔처에 차단돼 있을 때 관원들을 인도하여 그를 가리켜 주는 일이었다(참조 행 1:16).

 

51. 이것까지 참으라.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가 제자들에게 이 말을 함으로써 일이 제 과정을 따르도록 내버려두라고 지시한 것인지, 아니면 힘이나 폭력 사용을 그치라고 그들에게 명한 것인지(참조 50) 혹은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말고의 귀를 고쳐주는 것을 막지 말라고 종용한 것인지 분명치 않다. 시대의 소망, 69에 따르면, 그는 자기를 꽉 잡고 있는 로마 병사들에게 말했다.

 

그 귀를 만져. 이것은 예수를 체포하러 온 자들에게 주어진 그의 신성에 대한 두 번째 증거였는데, 첫 번째 증거는 천사의 영광이 나타난 것이었다(참조 요 18:6 주석). 베드로의 성급한 행동이 즉시 무마되지 않았다면, 산헤드린과 빌라도 앞에서 예수와 제자들은 위험한 사람들이며, 국가에 위협적인 존재들이라는 증거로서 제시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당국자들은 치유의 이적이 행해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심문할 때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52.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 이 잡다한 무리들 가운데는 대제사장도 있었고, 여러 유대 지도자들도 동행했으며(참조 시대의 소망, 695, 696,), 바리새인들(18:3), 유대인들로 구성된 성전 치안관(18:12; 참조 시대의 소망, 696), 로마군의 분견대(참조 시대의 소망, 694, 695,)가 있었다. 그 밖에 건달패도 있었는데, 그들 중 어떤 자들은 틀림없이 깡패로서 흥분된 소요를 구경하기 위해 따라온 자들이었을 것이다(참조 시대의 소망, 696).

 

53. 성전에 있을 때어. 예수는 자신의 행동이, 무력과 폭력으로 체포해야 할 무자비한 악당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지적한다. 그는 남몰래 행동하지 않고 모두가 보는 데서 행동했다(참조 요 18:19~21). 그는 유대나 로마 당국에 대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비난을 받을 만한 구실을 주지 않았다.

 

너희 때요. 즉 그들이 예수에게 하려는 일이 허락된 라는 뜻이다. 마침내 예수가 악한 사람들과 악한 천사들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다.

 

어두움. 때는 밤이었고, 그들의 사악한 계획들을 실행하기에 적합한 시간이요, 최적의 시기였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을 덮은 영적인 흑암은 밤의 어두움보다 더 심했다. 이 악한 사람들은 제어받지 않고 마귀의 뜻을 이행하였으며, 마음속에 있던 증오심을 마음껏 발산하였다.

 

54. 예수를 잡아 끌고. [산헤드린 앞에서의 밤중 재판]. 누가는 심문과 베드로의 배반을 엄밀하게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기록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베드로가따라. 요한이 좇아간 것처럼(참조 요 18:15). 예수가 저항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확실해지는 순간 모든 제자가 그를 버렸다(26:56).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최소한 어느 정도의 평정을 되찾고 대제사장 관저까지 그 무리들을 따라갔다. 다른 이들은 용기가 부족했다.

 

멀찍이. 거리를 두고”(개정표준역). 베드로는 공개적으로 예수 편에 설 만큼 충분한 용기를 갖진 못했으나 그럭저럭 대부분의 동료 제자들보다는 좀 더 용기가 있음이 증명되었다.

 

56. 한 여종. 이 사람은 베드로가 들어오도록 허락해 준 여자 문지기였다(18:16, 17; 시대의 소망, 710, 711,).

 

57. 베드로가부인하여. 베드로는 불과 몇 시간 전에 주어진 예수의 경고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참조 31~35절 주석). 그는 남들이 자기를 몰라보길 바랐고, 심지어 예수를 험담하는 무리에 가담했다(참조 시대의 소망, 712). 이것은 베드로의 첫 번째 부인이었다. 기록이 지적하는 바에 의하면 세 번의 부인은 모두 오전 3시부터 5시 사이에 있었던, 산헤드린 앞에서의 첫 번째 심문 도중에 행해졌다. 예루살렘의 위도에 비춰 볼 때, 연중 이때쯤이면 4시경에 첫 새벽빛을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일출은 5시 반경에 있었을 것이다.

 

61. 베드로가생각나서. 베드로가, 예수가 처음에 다락방에서 말하고 또다시 겟세마네로 가는 도상에서 말한 그 경고(참조 34절 주석)를 완전히 잊어버렸음이 분명하다. 그의 과오의 뿌리는 자신감과 자랑에 있었다(35). 이제야 생각이 났으나 너무 늦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예수의 말을 성취시켰다. 겸손함과 선한 권고에 기꺼이 유의하려는 마음은 어리석은 과오를 막아 주는 최선의 방책이 된다.

 

62. 밖에 나가서. 두세 시간 전에 그가 들어왔던 뜰에서 밖으로 나갔다는 말이다. 22:61에 따르면, 베드로가 급히 떠나기 직전에 예수는 베드로 쪽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이리저리 방황하던 베드로는, 선생님이 불과 얼마 전에 엎드려 있던 바로 그 장소인 겟세마네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참조 시대의 소망, 713).

 

심히 통곡하니라. 눈물을 터뜨리다.” 만일 베드로가 저주하는 말을 한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린 만큼 깨어 기도하라”(41)는 예수의 권고에 진지하게 유념했다면 그는 결코 그런 말들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베드로는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겠지만, 구주의 사랑은 그에게 희망을 주었고 참담한 경험을 안전하게 통과하도록 해주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어두운 시간일지라도, 번민과 패배의 경험이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예수의 사랑의 빛이 힘을 주지 못하거나 구원할 수 없는 경우는 없다. 참조 시대의 소망, 382.

누가복음 22:14-34
[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7]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21]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23] 저희가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24]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34]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 먼저 본문을 읽으면서 자세히 관찰하세요.

 

“그리스도의 모본은 성만찬 예식에 사람들을 제외시키는 것을 금하신다. 공개된 죄로 인해 죄지은 자가 제외되는 것은 사실이다. 성령께서는 이것을 분명히 가르치신다(고전 5:11). 그러나 이 이상은 아무도 판단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이 경우에 참석시킬 것인가를 말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그 까닭은 누가 마음을 읽을 수 있겠는가? 누가 알곡에서 가라지를 골라낼 수 있겠는가?
신자들이 이 의식을 거행하려고 모일 때에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자들이 합께 참석한다. 회중 가운데는 유다와 같은 자도 있을 수 있다. 회중 가운데 마음으로는 진리와 거룩함의 종들이 아니지만 예식에 참석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올지 모른다. 그들을 금하지 말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다의 발을 씻기실 때에 참석하였던 증인들이 그 곳에도 참석한다. 인간 이상의 존재들의 안목이 그 장면을 보았다.
영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 유다의 발을 씻기신 분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에서 죄악의 오점(汚點)을 씻으시기를 열망하신다.
합당치 못한 어떤 사람이 참석하였다는 이유로 아무라도 참석을 거부하지 말 것이다. 모든 제자들은 공개적으로 참석하므로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증거하도록 요청을 받는다.”(시대의 소망, 656)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당신이 친히 세우신 의식을 시인하려고 그 곳에 계신다. 그분은 죄를 깨닫게 하고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려고 그 곳에 계신다. 죄를 뉘우치는 단 한번의 표정이나 생각일지라도 예수께서 주목하지 않으시는 일이 없다.
 

본문연구

  1. 주의 만찬은, 온 세대를 통하여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을 보존하고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눅 22:15~18; 출 1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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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찬의 식사는 겨우 네 절밖에 언급하지 않았지만(눅 22:17~20), 그 속에는 예수님의 희생이 상징되고, 구주 안에 있는 교제가 표현되며, 서로 그리스도를 나누어 먹고 새로워지며, 어린양의 잔칫상을 기대하며, 우리는 주님의 재림의 소망을 함께 간직한다. 상세한 것을 알기 위해서, 고린도전서 11장 23~26절에서 바울의 설명을 읽어라.
        
  2. 신자들이 자주 주님을 실망시키는 일은 무엇인가?(눅 22:24). 그러한 분쟁을 역전시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조치를 취하셨는가?(요 1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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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든지 이 예식을 바르게 거행할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서로 도우며 서로 축복하는 거룩한 교제에 들어가게 된다. 저들은 저희 생애를 무아적 봉사 사업에 바칠 것을 맹세한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 봉사하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저들의 일터는 주님이 가지셨던 그것처럼 넓다. … 다락방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성찬에 참여했던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봉사하기 위하여 나아갈 것이다”(시대의 소망 3권, 135).

  3. 유다와 베드로는 사단이 이기는 것을 비방하기 위해서 어떤 조처를 취할 수 있었는가?
    (눅 22:3~6, 31~34; 약 1:13~15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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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의사항

  1. 섬기는 자로서 나는 우리교회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함께 나누어 봅시다.

  2.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들로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 경험이 있습니까? 그것이 내게 어떤 축복이 되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3. 내 형제를 굳게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4. 주님이 우리 각자의 문제들과 시험들에 대하여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될 때 여러분은 얼마나 큰 위로를 받습니까? 

과거와 미래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시련 가운데서도 그분과 함께 견뎠다고 선언하셨다(눅 22:28). 그리스도께 헌신한 것은 보상을 받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승리의 삶을 통하여, 왕국의 선물이 그들에게 가능하게 해주셨다. 


14. . 이것은 7~13절이 관련된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는 때이다. 이때는 목요일 밤이었다. 예수가 정규적인 유월절 만찬이 진행되는 동안 그리스도인의 성만찬 예식을 제정했음을 주목하라. 이것은 12명이 함께 한자리에 모인 마지막 기회였음을 증거한다. 관례에 따르면, 유월절 식사 때는 최소 10명에서 30명 미만의 인원이 한자리에 참석해야만 했다. 이 모임에는 13명이 참석했다.

 

앉으사. 오히려 기대사.” 최초의 유월절 식사 때는 참여자들이 애굽에서 떠날 준비를 하고, 서서 식사를 했다. 그러나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후에는 그들이 더 이상 서지 않고, 앉거나 편히 기대었다. 최초의 유월절에 서서 식사한 자세가 그들이 급히 출발해야 할 것을 암시했다면, 이때의 기대어 누운 자세는 약속된 땅에서의 평안함과 안전함을 나타냈다.

 

15.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거듭하여 예수는 자기의 고난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했다. 종종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야의 고난에 대하여 말했다(참조 시 22; 53장 등). 예수는 우리 구원의 ”(참조 brews/2/10e)로서 인정되기 위하여 십자가로 가는 내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있을 수 없었다(참조 벧전 1:11). 겸손한 예수를 따라가는 자들로서, 그의 고난에 한 몫을 나누어 가지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이 유월절. 예수의 공중 봉사의 네 번째 유월절(참조 제9, 101, 143),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함께 지키는 세 번째 유월절이었다. 그러나 이전의 경우, 이 무리의 구성원으로서 그들 모두가 참여하지는 못했다. AD 28년과 29년의 유월절은, AD 29년 여름에 12명을 선정, 지명하기 전이었다. 이번에 예수와 열두 제자가 함께 지키는 유월절이야말로 진정한 유월절 만찬이었다.

 

원하고. 원하고 원하였노라라는 표현은 내가 심히 원하였노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특유의 관용구이다. 이와 유사한 관용적인 표현이 요 3:29(“크게 기뻐하나니”), 4:17(“위협하여”)을 포함하여 신약의 다른 곳에도 나온다. 이런 표현들은 70인역에 아주 흔하게 나온다. 이것은 배반당함과 심문,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기 전에 예수가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할 마지막 기회였다. 예수의 지상 봉사의 절정인 이것은 그가 사람들 가운데서 봉사하는 동안 늘 그의 심중에 있었다. 거의 1년 동안 예수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 때 일어날 이 사건들을 위해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준비시키고자 부지런히 애썼다(참조 마 16:21; 20:17 주석 등).

 

16. 이루기까지. 죄로부터의 최종적이고도 완전한 구원은 영광의 나라에서 있을 것인데, 그것에 관하여는 이미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말했다(참조 마 25:31 주석). 예수가 한 이 말은 아마도 어린양의 혼인만찬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참조 계 19:7~9),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는 사실을 기념하여 열리는 것이다(참조 1~6). 영원한 나라에서 구원받은 자들이 누리는 행복을 상징하는 엄숙한 종교 절기에 대한 해설은 1:15, 16 주석을 참조하라.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뜻깊은 마지막 유월절이었다.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가 임종하는 순간에 성전에 있던 휘장이 찢어진 일(참조 마 27:51 주석)은 유대 종교 체계의 상징이 폐기되었다는 하늘의 표징이었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것이 가리킨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기 생명을 주었기 때문이다(참조 골 2:17). 지금 예수는 과거의 죽은 상징물들을 자신의 몸과 자신이 흘릴 피의 살아 있는 상징물들로 대체하려 하고 있었다(참조 눅 22:19, 20; 시대의 소망, 652).

 

21. 나를 파는 자. 문자적으로는 팔고 있는 자.” 유다는 이미 유대 지도자들과 만나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줄 것을 합의했다(참조 마 26:14, 15 주석). 그 배반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손이. 누가는 주의 만찬에 관한 이야기를 배반자로서의 유다에 관한 이야기보다 먼저 말하는 데 비해, 마태와 마가는 이 순서를 바꾼다. 누가의 기록은 시간적인 순서를 따른다.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아마도 제자들의 모든 손이 상 위에있었을 것이다. 이 말은 유다를 배신자로서 밝히지는 않았고, 단순히 배신자가 식탁 주위에 기대어 있는 자들 가운데 한 사람임을 확인해 주었다.

 

24. 누가 크냐.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막 세우려 한다고 생각하는 나라에서 차지할 지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다툼. 문자적으로는 논쟁.” 이것은 싸우고자 하는 투쟁 정신과 열기를 암시한다. 이런 불화의 물 밑 조류는 유월절 식사 내내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이야기는 요한이 기록한 겸손 예식이 탄생하게 된 경위를 설명해 준다. 이제 곧 일어나려는 사건들을 생각해 볼 때, 제자들이 그리스도가 세우려고 온 것도 아닌 상상의 나라에서, 어느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에 대해 논란을 벌인 것은 비극적인 일이었다. 상대적으로 누가 크냐 하는 논란은 이전의 경우와 같이(참조 마 18:1; 20:21; 9:33~35; 9:46~48),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나라의 성격에 대한 제자들의 잘못된 개념 때문이었다.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부활 후까지 가지고 있던 잘못된 개념들, 그리고 메시야 나라의 성격에 관하여는 24:19 주석을 참조하라. 유다는 스스로 예수의 왼편에서, 요한은 예수의 오른편에서 영예로운 자리를 하나씩 차지했다(시대의 소망, 644).

 

26. 너희 중에 큰 자. 가장 위대한 사람은 가장 무아적으로 다른 이들을 섬길 것이다. 예수는 군림하는 대신 섬김이라는 관점에서 크게 되고자 하는 욕구를 승인한 것이 분명하다.

 

젊은 자. 동방인의 가정생활에서 동생은 형의 의견을 따르는 데 익숙해 있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큰 자에게 순복하는 자세를 가지라고 말했다.

 

27. 섬기는 자. 예수는 남을 위해 봉사하는 자신의 무아적인 모본을 지적한다. 인류의 육적·영적 필요를 위해 봉사하도록 그리스도를 고무시켰던 그 정신이, 그의 제자들이 될 모든 사람의 생애를 고무시켜야 할 것이다.

 

28. 항상. 이 말은 끈질기고 일관된 충성에 관한 개념을 나타낸다. 제자들은 분명한 결함들을 갖고 있었지만, 대체로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헌신에 비춰 볼 때 충성되었다.

 

29. 나도 너희에게 맡겨. 이것은 그들의 충성에 대한 보상이 될 것이었다.

 

31. 시몬아, 시몬아. 시몬을 거듭 부른 것은 예수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사단이청구하였으나. 사단은 이미 유다를 손아귀에 넣었다(참조 욥 1:12; 2:6).

 

너희를. 헬라어 본문에는 복수로 되어 있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은 모든 제자를 위한 것이다.

 

32. 내가기도하였노니. 주님이 우리 각자의 문제들과 시험들에 대하여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가! 이 대화가 있은 지 오래지 않아 예수는 음성을 높여 아버지께 기도하였다. 예수의 제자들 모두가 그 기도의 대상이었다(참조 요 17:2, 9, 15, 17).

 

. 너희라는 말과 대조적으로(참조 31절 주석), “는 단수형이며, 따라서 예수의 추종자들 각자, 여기서는 특히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개인적인 관심을 강조한다.

 

떨어지지. 헬라어 에클레이포(ekleipo-). “내버려 두다또는 저버리다.” 완전히 저버린다는 개념을 나타낸다. 영어의 “eclipse”([])은 에클레이포에서 유래했다.

 

돌이킨. 헬라어 에피스트레포(epistrepho-). “돌다또는 돌아오다따라서 개혁하다.” 예수는 베드로가 정말로 떨어져 나갈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다시 돌아설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부인한 결과로 베드로가 곧 겪게 될 쓰라린 경험은 동료 제자들도 분명히 알 수 있을 만큼 그에게 변화를 가져왔다.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진리를 위한 베드로의 담대함은 그의 회심이 철저했음을 증거하며, 그가 걸어온 봉사의 길은 예루살렘 안과 주변에 살던 신자들에게 힘과 용기가 되었음을 입증해 주었다(참조 행 2:14; 3:12~15; 4:8~13; 5:29~33 ).

 

34. 베드로야. 여기서 예수는 자기가 직접 지어준 베드로의 이름을 부른다.

누가복음 21:29-36
[29]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31]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3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 먼저 본문을 읽으면서 자세히 관찰하세요.

방탕함과 불경건한 향락으로 가득찬 세상에 심취되어 있으며 현세적 안전에 마비되어 있다. 사람들은 주의 오심을 멀리 지체시키고 있다. 저들은 경고를 비웃는다. 거만하게 자랑하기를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내일도 오늘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고 말한다(벧후 3:4; 사 56:12). 우리는 향락을 사랑하는데 더 깊이 빠져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라고 말씀하신다(계 16:15). 세상이 조롱하면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하고 묻는 바로 그때에 징조는 성취되고 있는 중이다. 저들이 “평화와 안전”을 부르짖을 때에 홀연히 멸망이 이른다. 진리를 경멸하고 거절하는 자가 건방지게 될 때에, 여러가지 영리적 방면에 있어서 원칙을 돌보지 않고 사업의 일과를 수행할 그때에, 학생이 그의 성경은 연구하지 않고 각 방면의 지식을 열심히 추구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는 도적과 같이 임하신다(소망 635). 

 

항상 하나님께서는 다가오는 심판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셨다. 저희 시대에 주신 하나님의 기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중에 믿음으로 행한 자들은 불순종하고 불신하는 자들에게 내린 심판을 면하였다.
 

본문연구

  1.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우리는 왜 예수께서 오실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습니까?(29~31절).
    그리스도의 재림의 정확한 때를 아는 것이 왜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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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우리가 눈을 뜬다면 천연계는 우리에게 재림을 경고해 준다. 봄에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여름이 오고 있음을 안다. 우리는 뜨거운 날이 정확히 언제 닥칠지는 모르지만 그날이 오리라는 것은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다. 엘렌 화잇도 봉사 기간에 재림의 시기를 정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보았다. 그녀는 재림신자들이 이러한 추측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가르쳤다.  
        
  2. 주께서는 당신께서 오시기 전에 당신의 자녀들이 각자 어떤 품성을 소유하게 되기를 바라시는가?(계 3:1~5,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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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그러나 이 문은 허술하게 이리 저리 밀리는 문이 아니다. 그것은 의심쩍은 사람은 들여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 앞에 있는 상급의 가치와 비례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천국 문은 돈이나 땅이나 지위를 가진 자에게 열리지 않고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소유한 자에게 열릴 것이다. 영생의 면류관은 고관이나 학식 있는 자가 얻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온유하고 겸손한 자 곧 하나님을 그들의 능력으로 삼은 자들이 이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그리스도인 선교봉사, 301).  

토의사항

  1. 요즘 이루어지고 있는 재림의 징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재림을 맞이 하기위해 내가 스스로 조심해야 하는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나에게 가장 큰 덫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3.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기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인지 각자 자신의 방법을 이야기해 봅시다. 

그리스도께서는 구름을 타고 큰 영광으로 오신다. 한 무리의 빛나는 천사들이 그를 옹위할 것이다. 그는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고 살아 있는 성도들을 변화시켜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하시려고 오실 것이다. 그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킨 자들을 높이고 저들을 그에게로 데려가시려고 오실 것이다. 그는 저들을 잊지도 않으실 것이요, 그의 약속도 잊지 않으실 것이다. 


29. 비유. 이 간단한 비유는 천연계에서 끌어낸예증에 바탕을 둔 것이다. 팔레스타인에는 무화과나무가 흔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 싹이 트는 것은 날씨가 따뜻해진다는 확실한 징조였다.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의 비유(13:6~9)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11:12~14, 20~26)를 비교해 보라.

 

모든 나무. 누가는 무화과나무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여기서 설명한 진리는 단지 무화과나무뿐만 아니라 모든 나무에 적용할 수 있음을 알려 준다.

 

31. 너희가보거든. 징조에 대한 개인적인 인식과 그것들의 의미에 대한 이해를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선지자들(참조 24절 주석)큰 표적과 기사, 예수가 언급한 참 징조들을 구별해야 한다. 그들은, 예수가 예고한 바 끝은 아직 아니지만(8) “재난의 시작”(6)을 가리키는 사건들과, 그의 다시 오심이 가까이 곧 문 앞에 이”(33)르렀음을 가리키는 징조의 차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일이. 이것은 30절 인자의 징조를 포함하지 않는데, 이것이 보일 즈음이면 예수가 단지 문 앞에 이른것이 아니라 이미 구름을 타고 오시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이란 표현은 특히 29절을 가리키며, 예수가 마지막 이전에 일어날 일로 언급한 다른 사건들과 징조들도 포함한다. 이런 것들에 대한 완전한 목록을 보려면 막 13장과 /21/1을 참조하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와 대조되는 영광의 나라이다(참조 마 4:17; 5:2).

 

32. 이 세대. 주석가들은 일반적으로 23:36이 세대라는 표현이 사도들의 세대를 가리킨다고 주장해왔다(참조 23:36 주석). 예수는 이 세대라는 표현을 이런 의미로 거듭해서 사용하였다(참조 11:16; 12:39, 41, 42, 45; 16:4; 17:17; 11:16 주석). AD 70년에 일어났던 예루살렘의 몰락에 관한 그리스도의 예언은 문자적으로 당시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 생전에 실현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34절의 이 세대라는 낱말은 오로지 세상 끝에 있을 인자의 오심만을 다루고 있는 27~51절의 문맥안에 놓여 있다(참조 시대의 소망, 633). 27~51절과 누가복음하늘과 땅에있는 징조”(21:25)에 언급된 징조들은 그리스도의 오시는 날이 아주 가까울 때 일어날 것이므로 마지막 징조들을 보게 될 그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그리스도의 오심과 세상의 끝)이 다 이루리라, 그분이 선언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를 따르는 자들이 그분이 다시 올 때를 정확히 알아야 함을 의도하였던 것은 아니다. 예고된 징조들은 그의 오심의 임박함은 증거했지만, 그분은 그 사건의 날과 그때아무도 모르나니”(24:36)라고 강조해서 선언하였다. “이 세대라는 표현을, 그분의 오심으로 종결될 시간을 추정하여 산정하기 위한 근거로 삼는 것은 그분의 교훈이 갖는 문자적인 면과 영적인 면을 다 어기는 것이다(참조 36, 42절 주석).

 

33. 천지. 대기권의 하늘과 땅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성경적 표현이다(참조 창 1:8; 벧후 3:5, 7, 10, 12, 13 ).

 

없어지겠으나. 이는 행성으로서의 지구의 존재가 없어지겠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오히려 대기권의 하늘과 땅의 표면이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에 관한 설명을 보려면 사 34:4; 벧후 3:7~13을 참조하라.

 

내 말. 참조 5:18 주석. 땅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의 정책은 변하지만, 하나님의 원칙이 영원히 굳게 서는 것은 하나님이 변역치 않는분이기 때문이다(3:6). 여기에서 예수는 미래에 관한 계시의 확실성을 강조하는데 특히 그의 오심과 세상의 끝에 관하여 그렇다(참조 24:3 주석).

 

34. 방탕함. 헬라어 크라이팔레(kraipale-). “취기또는 술로 인한 두통.” “머리를 뜻하는 크라스(kras)흔들다또는 주위로 던져 올리다라는 뜻의 팔로(pallo-)에서 유래되었다. 헬라의 의학자들은 크라이팔레를 폭음 후에 오는 구토증이나 혼수 상태에 적용하였다.

 

36. 능히 피하고. 효과적으로 피하다또는 피할 힘을 가지다라는 독법을 지지하는 중요한 본문상의 증거를 인용할 수 있다.

 

항상 기도하며. 특히 재림과 그 전에 있을 시험의 때를 고려해 볼 때 그러하다. 기도는 의무 이상의 것으로서 필수적이다. 예수는 여기에서, 기도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늘의 대리자들과 협력하고자 실제적인 노력을 경주하는 일을 배제하거나, 개인적인 책임을 소홀히 하면서까지 기도에 몰두하는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낙망치 말아야의 주석을 참조하라). 예수가 의미하는 내용은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응답이 지연될 때에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참조 7, 8). “항상기도한다는 말은 매일, 매 시간 하나님과 끊임없는 접촉 가운데 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비유들을 해석하는 원칙에 대해서는 제9, 113, 114을 참조하라. 예수의 기도생활에 관한 토론은 막 1:35; 3:13 주석을 참조하라. 이외에 예수가 제자들에게 준 기도에 관한 교훈은 11:1~9 주석을 참조하라. 또한 마 9:38에 언급된 그의 교훈과 비교해 보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주의하라깨어 있으라라는 경고는 이 장의 거듭되는 주제를 구성한다. 경성함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예수는 여섯 가지 비유를 말씀하였다: 여기에서는 한 절로 압축된다(24:42). 문지기 비유(13:34~37), 집주인의 비유(43, 44), 충성스러운 종과 불충성한 종의 비유(45~51), 열 처녀의 비유(25:1~13), 달란트의 비유(14~30), 양과 염소의 비유(31~46).

그리스도인들은 나태한 마음으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그들은 깨어 기다리며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자신들의 영혼을 정결케 하는 일에 부지런하고 또 남을 위하여 일하는 데에 열심을 내야 한다. “하나님의 날이 도래하기를 고대할 뿐 아니라 촉진시켜야”(시대의 소망, 633) 하는 것은 그들의 특권이다.

누가복음 21:5-28
[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7] 저희가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8]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9]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10]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11]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12]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13]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14]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16]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17]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20]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21]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찌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찌어다

[22]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23]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24]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25]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27]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8]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이르는 사건들과 당신의 재림 직전에 있을 사건들 사이의 어떤 유사성을 묘사하셨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의 재림의 큰 날을 따로 분리하여 제자들에게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는 이 두 사건을 섞어서 말씀하셨다. 만일 예수께서 당신이 보신대로의 장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제자들에게 공개하셨다면 저들은 그 광경에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저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는 두 큰 위기를 섞어서 설명하시고 제자들이 스스로 그 뜻을 연구하도록 하셨다”(시대의 소망 3권, 97).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오시기 전에 있을 사건들에 대하여 우리에게 매우 분명하게 묘사해 주셨다.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앞서 예상되던 사건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께서 오시기 전에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는 사건들과 상황에 대하여 우리에게 예고해 주셨다.

 

본문연구

  1. 예수께서 다가오는 예루살렘의 멸망의 각 징조들을 당신의 재림 직전에 있을 유사한 사건의 유형으로써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아래에 적어보라.
    8절 ____________________
    9절 ____________________
    10절 ____________________
    11절 ____________________

  2. 예수님의 재림 전에 전 세계적인 의미 심장한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인가?
    ____________________

  3.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주목해 보아야 했던 임박한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특별한 징조는 무엇이었습니까?
    (막 13:14; 참고 마 24:15; 눅 21:20).
    ____________________

 

토의사항

  1.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재림의 징조는 무엇이며, 왜 그런지 이야기해 봅시다.

  2.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왜 끝까지 견디는 일이 필요한가?(마 24:13)
    우리는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가?(엡 2:8~10)

  3. 재림의 징조가 당신에게는 기쁜 소식입니까, 아니면 두려운 소식입니까?
    재림의 소식이 기쁘고 행복한 소식이 되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이야기 해 봅시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때에 관한 소식이 나쁜 소식이면서 동시에 좋은 소식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한편 그분을 따르는 자들은 사회적, 정치적 및 자연계에 있을 격변, 즉 모든 것이 궤도에서 이탈하고 과거의 안정성이 무너지는 대격변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이 담겨 있다. 그 기쁜 소식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기별이 모든 민족에게 선포된다는 것이다.


5. 예수께서가라사대. 아마 화요일 늦은 오후였을 것이다. 예수는 성전 뜰에서 가르치며 그날을 보냈고 유대 지도자들로부터 번갈아 가며 되풀이해서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성전을 떠난 후에 예수와 적어도 네 명의 제자들은 기드론 계곡쪽의 가파른 길을 내려가서 기드론 계곡 위로 솟은 해발 약 122미터의 감람산 비탈길을 올라갔다. 이 산은 성전보다 대략 91미터가 높기 때문에 그 산에서 성전과 도성을 조망할 수 있다.

 

미석과 헌물. 성전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자부심이었고 기쁨이었다. 요세푸스는 성전의 흰 돌 벽을 눈 덮인 산의 아름다움에 견주고(War v. 5, 6 [223]), 그 일부 돌들의 엄청난 크기를 20×2.1×2.7미터라고 밝힌다. 성전은 이제 근 50년에 걸쳐 건축이 진행되고 있었고(참조 요 2:20) 뜰과 건물 전체 공사는 AD 63년경성전이 티투스(Titus) 군대에 의해 완전히 멸망되기 7년 전까지도 완공되지 않았다.

 

6. 돌 하나도 돌 위에. 이 예언은 글자 그대로 AD 70, 예루살렘 멸망 때에 성취되었다.

 

무너뜨리우리라. 요세푸스(War vi. 4, 5~8 [249~270])는 성전의 파괴와, 성전을 구하기 위한 티투스의 노력들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뛰어난 건축물인 이 성전은 무궁토록 세파를 견뎌낼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예루살렘 성 자체는 사실 난공불락이었으나 예수는 무력에 의해 멸망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7. 어느 때에. 어리석게도 그들은 예수가 이제 얼마 못 가서 자신을 왕으로 선포할 것이며, 메시야로서 민족의 환호를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렇다면 성전의 멸망은 언제 이르러 올 것인가?

 

이런 일성전 파괴와 세상 끝에 있을 예수의 두 번째 오심을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사건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이런 사건들이 동시에 혹은 빠르게 연달아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승천하던 날에, 제자들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이까?”라고 묻자 예수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1:6, 7)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유대 민족이 예수를 거절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 그 민족도 버림당할 것임을 여전히 깨닫지 못했다. 장래 사건들에 대한 지식은 그당시에는 그들에게 너무 벅찼을 것이다. 예수가 자신의 임박한 고난과 죽으심과 관련하여 근 1 년간 제자들에게 베풀었던 그 반복된 가르침을 사실상 그들이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예고된 사건들은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거의 넘어선 것으로 입증되었다.

 

8. 미혹. 주의하라는 일차적인 이유는 미혹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다. 예수는 이런 저런 형태로 이 경고를 여러 번 반복하였다(참조 4~6, 11, 23, 36, 42~46).

 

내 이름으로. 즉 메시야로 자처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8절의 경고는 이러한 형태의 미혹에 넘어갈 가능성이 현저했던 시기인 예루살렘 멸망과 유대 민족의 멸망에 적용된다. 사도 시대에 많은 거짓 메시야들이 있었다. Jose- phus War vi. 5. 4 [312~315]를 참조하라. 후에(27) “우리 주께서 오해의 여지가 없는 언어로 자신의 두 번째 오심에 대하여 말씀하신다”(시대의 소망, 631).

 

9. 소문. 제자들은 AD 70년 이전에 전쟁이 일어날 때 놀라거나 불안해하지 말아야 했다.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전쟁이 있을 것이나 그것이 곧 있을 예수 재림의 징조는 아니었다.

 

. 이 강론에서 우리 주님은 한 민족으로서의 유대 민족의 마지막과 세상의 마지막을 다 내다보았다. 랍비들은 6~8절에 나오는 징조들이 메시야의 강림의 표적이며 속박으로부터 해방의 표라고 선언할 것이었으나 예수는 이런 것들을 그들의 멸망의 징조로 지적했다. 따라서 사도 시대의 전쟁과 전쟁의 소문들이 유대 민족의 종말을 예고하였던 것처럼 우리 시대의 국제적 혼란과 분쟁은 세상의 종말의 전조가 된다.

 

10. 민족이일어나겠고. 유대와 로마 작가들은 AD 31~70년의 기간을 대재난의 시기로 묘사한다.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있었던 사건들 속에서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시대의 소망, 628, 629,). 7절의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것이라는 예언 또한 일차적으로 동일한 기간을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예수는 그 당시의 정치적 분쟁과 기근과 지진을, 세상의 이 곧 있을 것이라는 징조로 여기지 말라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하게 경고했다(참조 3절 주석).

 

11. 기근. AD 44년경 유대에 있었던 극심한 기근이 행 11:28에 암시되어 있다. AD 41~54년에 이르는 글라우디오(Claudius) 치세 동안 모두 네 번의 대기근이 있었다.

 

지진. AD 31년과 70년 사이에 대지진이 잇따라 있었다. 이중 최악의 것은 그레데(46년 또는 47), 로마(51), 브루기아(60), 캄파니아(63)에서 있었다. 타키투스(Annals xvi. 10~13) 역시 65년의 극심한 허리케인과 폭풍들을 언급하고 있다.

 

12. 너희를넘겨 주며. 스데반(7:59, 60), 베드로와 요한(4:3~7, 21)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12:1~4)는 당국자들의 손에 의하여 고난을 당한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에 속한다. 바울은 벨릭스, 베스도, 아그립바, 가이사 앞에 출두했다(24~28). 13:9~12과 비교하라. 24:21, 22에서 그리스도는 특별히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 닥칠 핍박에 대하여 말한다.

 

14. 연구. 헬라어 프로멜레타오(promeletao-). “미리 연습하다.” 이것은 아마도 강사가 강연할 때에 익숙하게 하기 위하여 미리 반복하여 연습하는 일을 가리키는 것 같다. “임금들과 관장들앞에서 변명할 때에 제자들은 할 말을 기계처럼 외워서 하지 말 것이었다.

 

18. 머리털 하나도. 이 약속은 순교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편적인 보증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방금 전에 어떤 이들이 죽임을 당할 것을 말했기 때문이다(참조 16). 아마도 여기서 의미하는 내용은, 그리스도인들을 법정으로 끌어가는 관원들도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가 아니면 그들을 해할 능력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참조 요 19:11; 5:35~38).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의 말은 이 세상의 당면한 전망보다는 궁극적인 결과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고, 이 땅의 관원들은 다른 사람의 영원한 복지에 대하여 아무런 권세도 가지고 있지 못함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참조 마 10:28, 30 주석; 10:28, 29).

 

20.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21:20). 예고된 그 사건은 AD 70, 즉 성전 경내에 이교 로마의 상징물이 세워졌던 때에 로마인들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것을 말한다. 바르 코케바(Bar Cocheba)가 일으킨 유대인들의 반란이 AD 135년에 진압되었을 때, 로마인들은 이전의 유대 성전 자리에 쥬피터(Jupiter Capito- linus)에게 바치는 신전을 세웠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도성에 들어가면 사형에 처해졌다.

 

21. 산으로 도망할지며. 히브리 사람들이 수 세기에 걸쳐 외국의 침략을 받았을 때 행하였던 방법이다(참조 삿 6:2; 삼상 13:6; 11:38). 요세푸스는 그 도성의 포위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과 그후에 백만 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죽었으며, 97,0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혀갔다고 말한다(War vi. 9. 3 [420]). 그런데 로마 군인들이 예기치 않게 예루살렘 포위망을 해제한 일시적인 휴전 기간 중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도망쳤는데 이들 중 아무도 생명을 잃지 않았다. 그들이 피신한 장소는 갈릴리 호수 남쪽으로 27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으로, 요단강 동편 구릉지대에 있는 한 도시인 펠라였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로마 군대 사령관 티투스는 하나님이 그렇게 되기를 뜻하지 않으셨더라면 자기 군대로도 공성병기로도 예루살렘의 성벽을 돌파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그 도성의 완강한 방어로 인하여 로마 군인들이 격분하여 마침내 성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의 복수심은 극에 달해 있었다.

 

21. 그때에. 즉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대 민족의 몰락 이후를 말한다. 유대 민족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 사이에 긴 흑암의 세기들 즉 그분의 교회를 피와 눈물과 고통으로 특징지은 세기들이놓여 있었다. 21절에서부터 예고되기 시작하는 징조는 오직 세상의 종말을 가리킨다(참조 시대의 소망, 630, 631,).

 

23. 큰 환난이. 교회에 대한 첫 번째 핍박은 유대 지도자들로부터 왔다. 잠시 후, 이방인들 역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고 3세기 가까이 교회는 이교 로마에 의해 간헐적으로 고난을 당하였다. 교황의 지상권과 핍박의 1260년이 538년에 시작되었다.

 

24. 밟히리라. AD 70년 이전에 로마의 지배하에 유대인들이 누렸던 것과 같은 자치권은 결코 회복되지 않을 것이었고, 그 운명의 해 이래로 예루살렘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이 이방인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AD 135년에 발생한 바르 코크바(Bar Cocheba)가 주도했던 항거의 결과로, 모든 유대인은 그 성읍에 들어가면 사형을 당하게 된다는 경고와 더불어 출입을 금지당했다. 성전은 AD 70년 이후에 영영 중건되지 못했다. 다른 민족들 가운데, 로마인, 사라센 사람들, 북 유럽 사람들, 투르크족, 십자군들 그리고 아랍인들이 그 도성과 이전의 성전 구역을 통치했다. 비록 최근에 이스라엘 신정부가 그 도성의 일부 통제권을 획득했을지라도, 구예루살렘은 여전히 유대인의 도성이 아니며, 이전의 성전 지역도 비유대인들의 수중에 남아 있다.

 

25. 일월성신.

. 여기에서 해가 어두워진다고 예고된 것은 큰 암흑일로 알려진 1780519일에 일어났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다시 오심을 고지하도록 정해진 해와 달과 별들의 징조 중 첫 번째 징조였다.

. 1780519일 밤에, 낮 동안 해가 그랬던 것처럼 달빛이 가려졌다.

별들. 역사상 가장 거대한 유성우라고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일이 18331113일에 성취되었다. 1780년과 1833년의 이 두 현상은 예수의 예언을 정확하게 성취시켰다. 왜냐하면 두 사건이 상세하게 설명된 그때(참조 앞글)에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들은 세부적인 사항에 가장 잘 부합되는 사건들이었다.

 

26. 사람들이생각하고. 문자적으로는 사람들이 두려움 때문에 숨을 거두다또는 사람들이 공포 때문에 기절하다.” 이 절의 뒷부분이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혼절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를 제시해 주는데, 그것은 하늘의 권능들이흔들리기 때문이다. 여기에 묘사된 장면은 일곱째 재앙 아래서 일어난다. 이 장면에서 악인들은 공포와 놀라움을 가지고 바라보면서, 산과 바위를 향해 저희 위에 떨어지기를 청한다(6:14~17).

누가복음 21:1-4
"[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막 12:41-44) "[41]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가난한 과부가 드린 적은 예물은 그녀의 생활비 전체였다. 그 여자는 그녀가 사랑하는 사업을 위하여 두 렙돈을 드리려고 그의 음식을 희생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하늘 아버지께서 그녀의 큰 필요를 간과하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고 믿음으로 그것을 드렸다. 구주의 칭찬을 받은 것은 이 이기심 없는 정신과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이었다.”(청지기, 176)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풍족한 중에서 바치므로 궁핍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사업을 위하여 어떤 것도 희생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음으로 원하는 것은 여전히 다 가지고 있다. 그들은 거리낌없고 즐거운 마음으로 바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인정하신다. 그분은 행동과 동기를 아시고 엄격히 주시하신다. 그들은 상급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처럼 후하게 바칠 수 없는 그대들은, 다른 어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바칠 수 없다고 해서 그대 자신을 변명해서는 안 된다. 그대가 할 수 있는 바를 하라. 없을지라도 살아갈 수 있는 어떤 물건들을 스스로 부인해 버리고,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희생하라. 과부처럼, 그대의 두 렙돈을 바치라. 그리하면, 그대는 풍족한 가운데서 바치는 모든 사람들보다 실지로 더 많은 것을 바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자아를 부인하는 것,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 진리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1증언, 177)

 
누가와 마가에 의해 기록된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예수님의 특별한 교훈을 말해주려고 하는 것이다. 헌금은 왜,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드리는 것일까?
 

본문연구

1. 본문을 마가복음 기록과 병행하여 자세히 살피고 각 절마다 관찰되는 것들을 적어보라.
   1절 _______________
   2절 _______________
   3절 _______________
   4절 _______________
 
2. 위에서 관찰된 것들을 이해하고 설명하여 보라.
    1)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헌금 넣는 것은 보신 것은 우연인가 아니면 의도적 이었는가?
    2) 과부의 헌금 “두 렙돈”은 어는 정도의 액수인가? (막 12:42 참고)
        cf) 두 렙돈=한 고드란트 (1 앗사리온=8 렙돈)
    3)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4) ‘풍족한 중에서’와 ‘구차한 중’에서는 어는 정도의 차이일까? (고후 8:20, 9:11 참조)
 
3. 아래 선지자의 글에서 관찰되는 것들은 무엇인지 서로 이야기 해 보라.

“예수께서는 연보궤가 있는 마당에 계셨으며 거기서 저희 예물을 넣으려고 오는 사람들을 바라보셨다. 많은 부자들이 매우 자랑하는 태도로 많은 예물을 가지고 와서 드렸다. 예수께서는 슬픔으로 그들을 바라보셨으며 그들의 후한 예물에 대하여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얼마 후에 한 불쌍한 과부가 남들이 보는 것을 두려워하여 머뭇거리면서 가까이 나아오는 것을 보고 그리스도의 얼굴은 빛났다. 부요하고 거만한 자들이 그들의 예물을 넣으려고 옷자락을 질질 끌며 지나가는 것을 보자 그 여자는 감히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는 것처럼 뒤로 움츠렸다. 그러나 그 여자는 비록 그것이 적을지라도 그가 사랑하는 사업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고자 하였다. 그 여자는 수중에 있는 예물을 보았다.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예물에 비교하면 매우 적은 것이었으나 이것은 그의 소유의 전부였다. 자기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그 여자는 급히 두 렙돈을 놓고 빨리 돌아갔다. 그러나 이 일을 행하는 중에 그 여자는 자기를 주목하여 열심히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시선과 마주쳤다.”(소망, 614)

 

“주의 연보궤에 두 렙돈을 넣은 한 가난한 과부는 그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으나 그의 자아 희생적인 모본은 각 나라와 각 시대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계속 움직여 왔다. 그 모본은 하나님의 창고에 높은 자와 낮은 자, 부자와 가난한 자로부터 예물이 들어오게 해서, 그것으로 사명을 유지하며 병원을 세우며 주린 자들을 먹이며 벌거벗은 자를 입히며 병든 자를 고치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다. 많은 무리들이 이 여자의 이기심 없는 행위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았다. 그녀는 그녀의 감화가 이루어 놓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날에 보게 될 것이다.”(6증언, 310)

 

토의사항

  1. 헌금생활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이야기 해 봅시다. 헌금 생활을 통해 은혜 받은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 내게 맞는 적절한 헌금은 어느 정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3. (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위 말씀에 대해 논의 해 봅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일부러 연보궤를 주시하셨다. 참으로 주님을 기쁘게 한 것은 비록 적을지라도 믿음과 헌신으로 생활비 전부를 드리는 한 과부를 보신 것이었다. 그녀의 헌금은 당시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주님의 제자들을 위한 특별한 모본의 될 것을 주님은 아시고,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셨다.


41. 예수께서앉으사.
이 사건은 그날, 아마도 화요일 늦은 시간에 일어났을 것이다(참조 마 23:1, 38, 39 주석; 예수의 생애와 봉사, 도표 9). 예수는 국가 지도자들과의 길고도 신랄한 논쟁을 방금 승리로 마무리짓고 나서, 성전의 거룩한 경내를 영원히 떠나려 하고 있었다.
 
연보궤. 마가가 여기서 가리키는 것은 성전의 연보궤를 소장하고 보호하는 견고한 방(the strong room, 헌물방)이 아니라 여인의 뜰에 있는 헌금함이다.
 
대하여. 즉 “반대편에.” 그곳에서 그는 예배자들이 헌금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넣는데. “넣고 있었는데.” 분명히 부자들이 차례대로 지나가며 예물을 넣었다.
 
42. 가난한. 헬라어 프토코스(pto-chos). “극히 빈곤한 [자]” 즉 “아무것도 없는.” 누가는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생활을 하는 존재, 그래서 다음 끼에 먹을 것을 얻기 위하여 매일 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을 뜻하는 헬라어 페네스(pene-s)의 후기 시형(詩形)인 페니크로스(penichros)를 사용한다(참조 눅 21:2). 헬라어 페네스(pene-s)는, “생계를 위해서 노동함”이라는 동사 페노마이(penomai)에서 파생되었다. 아마도 예수는 이 과부의 마음가짐을 과부들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태도와 두드러진 대조로 부각시키려 했을 것이다. 이 과부의 빈곤은 이때 그곳에 있었던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 중 어떤 이의 탐욕에 기인된 일면이 있었을지도 모른다(참조 마 23:14 주석). 그리스도는 그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라고 말했다(12:40).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께 대한 넘치는 사랑으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은(44절) 과부가 있었다. 얼마나 대조적인가!
 
렙돈. 렙톤(lepton). 우리 돈 1원 가치도 안 되는 동전. 렙톤(lepton)은 당시 통용되던 가장 적은 단위의 유대 동전이었다.
 
고드란트. 코드란테스(kodrante-s). 두 렙돈과 같으며(참조 제10권, 참고 논문 “기독교 첫 세기의 유대인”), 그리스도 당시의 (노동자) 하루 품삯인 로마 데나리온의 64분의 1에 해당되었다(참조 마 20:2 주석). 과부의 헌금의 액면 가치가 적음을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이 헌금의 상대적 크기가 더 강조되어야 하지 않겠는가?(참조 44절 주석).
 
43. 제자들. 마가(참조 막 13:3)는 이 제자들을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으로 밝히고 있는데 이 네 명은 약 오 년 전에 갈릴리 호숫가에서 그물질하다 부름을 받았다(참조 눅 5:1~11 주석).
 
진실로. 헬라어 아멘(ame-n). 히브리어 아멘(’amen)에서 나왔음. “확고한”, “확립된”, “확실한”을 의미함. 히브리어 용법에서 아멘은 다른 사람의 말에 확실하고 강한 응답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민 5:22; 신 27:15, 16 등). 같은 용법이 신약으로 넘어왔다(고전 14:16). 아멘은 또한 신약에서 송영(doxology) 끝에 자주 나타난다(롬 1:25; 갈 1:5 등). 그러나 예수 자신의 말을 확증하고 강화하기 위해 그가 사용한 아멘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말 가운데 많은 부분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6:2, 5, 16; 등) 또는 요한복음에서처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요 3:3, 5, 11 등; 참조 마 1:51 주석)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즉 부자 헌납자들이 낸 것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이. 하늘의 판단으로는 가치가 있는 것은 정작 헌금의 양(量)이 아니라 그 일을 유발하는 동기다. 하늘의 관심은 그 헌금이 나타내는 사랑과 헌신의 분량에 있지, 돈의 가치에 있지 않다. 예수가 ‘포도원의 품꾼들’ 비유(참조 마 20:15 주석)에서 명백하게 예증한 바와 같이,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답하시는 유일한 근거이다. 이 과부에 대한 예수의 칭찬도 헌금을 드리게 한 마음가짐에 근거한 것이지, 액면가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44. 풍족. 헬라어 페릿슈마(perisseuma). “풍족”이란 뜻 외에도 “남은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과잉” 또는 “남아 도는 재산.” 부자는 잉여금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남아 돌아가는 재산 중 일부를 바쳤고, 바치기 위해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았다. 사랑과 헌신의 견지에서 그들의 헌금은 아무 가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헌금이 자기 희생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차한. 헬라어 휘스테레시스(hustere-sis). “부족함”, “가난”, “빈곤.”
 
자기 모든 소유. 최대한의 사랑과 헌신을 하나님께 드린 증거.
 
생활비. 헬라어 비오스(bios). “생계.” 조에(zoe-), “생명” 자체가 아님. 십중팔구 이 과부는 다음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처지였다.
 
 
재림교회 헌금 안내
 
십일조 : 수입의 십분의 1
기타헌금 :
종류 :
청지기헌금(월정헌금) : 교회운영을 위해 사용되는 헌금
도르가헌금 : 구제활동을 위한 헌금
설교예배헌금 : 첫째, 셋째, 넷째 안식일은 교회 경비 둘째,다섯째는 목적헌금
안식일학교헌금 : 세계선교를 위한 헌금
기타헌금 : 감사헌금, 투자헌금, 생일감사헌금, 등
특별헌금 : 특별한 목적을 위해 드리는 헌금 (건축헌금 등등)
 
기타헌금 책정의 적절한 제안
수입의 1/10 = 십일조
수입의 1/10 = 기타헌금 (합 수입의 2/10)
청지기헌금 : 60%
설교, 안교헌금 : 20%
도르가등 기타헌금 : 20%
 
예) 수입이 100만원인 경우
십일금 : 10만원
청지기헌금 : 6만원
설교, 안교 헌금 : 2만원 (매주 5,000원)
기타헌금 : 2만원 (도르가 1만원, 감사헌금 1만원)
 
 

 

누가복음 20:1-19

[1]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4]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5]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7] 대답하되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9]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1]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 다시 세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13]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14]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16]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17]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18]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19]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포도원의 비유는 유대 백성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도 교훈이 된다. 현세의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큰 특권과 축복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는 교회로부터 상당한 보답이 있기를 기대하신다. . .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매우 귀중하게 보신다. 그분은 외적인 훌륭함을 가지고 교회를 높이 평가하지 아니하시고, 세상과 구별되는 참된 경건성을 인하여 교회를 귀하게 여기신다. 그분은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속에서 자라나는 정도와 그들의 영적 경험의 진보에 따라서 교회를 평가하신다.”
(실물교훈, 296)

 

예루살렘으로의 입성과 성전정결의 사건(19)이 있은 직후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받았다. ‘무슨 권세로 . . .’ 바로 예수님의 권세에 관한 것이었다.

 

 

본문연구

  1. 본문에서 예수님과 대화하는 주된 이들은 누구인가?
    1, 19절 _______________

  2. “권세”(authority)에 관한 도발적인 질문에 답하신 예수님의 응수는 어떤 의미에서 지혜로웠는가?
    1-8절 _______________

  3. 2절에 “이런 일”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말하는가?
    19:45-47 참고 _______________

  4. 9-19절은 “비유”이다. 예수님께서는 왜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시고 비유로서 말씀하셨는가?
    9-19절 _______________
    cf.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각 누구를 비유하는가?
    cf. 비유를 통하여 하신 대답은 어떤 점에서 지혜로운 것이었는가? (19)
    cf. 마태복음(21:23-27, 28-32)에 의하면 다른 비유([두 아들의 비유])도 말씀하셨다.

 

토의사항

  1.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생애에 어느 정도 관여하고 계시다고 생각하는지 얘기해 봅시다.
    내 인생에서 주님은 어느 정도의 권위를 가지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2.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원하시는 열매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열매를 맺히기 위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3. 내 인생의 문제에 있어서 결정적인 해결책을 예수님에게서 찾은 경험이 있다면 서로 나누어 봅시다.
    왜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해결책이라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요한과 비유를 통하여 자신의 권세를 설명하셨다.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 해도 유대의 지도자들은 믿지도 인정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들의 질문은 알고자 하는 동기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응수는 지혜로웠다. 요한의 권세만으로도 그들은 당황했으며, 비유를 통한 답변으로 그들은 물러갔다. 쟁쟁한 권세자들을 홀로 대하여 승리하신 예수님은 비록 설명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분명 특별한 권세가 있는 분임에 틀림없다.


1. 예수께서 성전에서. 이때는 AD 31년 유월절 전의 화요일로, 예수가 성전에서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베푼 때다. 지도자들이 가까이 왔을 때에는 이미 예수가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참조 눅 20:1).

 

대제사장들. 참조 2:4 주석. 서기관들 대다수가 바리새인인 것처럼 대제사장들중 많은 사람은 사두개인이었다. 마가(11:27)와 누가(20:1)는 이 사건의 기사에 서기관들을 포함시켰다.

 

장로들. 산헤드린은 이른 아침에 이미 회합을 갖고 예수에게 그의 자격에 대하여 묻기로 결정했다(시대의 소망, 593). 어쩌면 지금 그와 맞서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3년 반 전에 동일한 질문을 가지고 침례자 요한에게 파송되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참조 요 1:19 주석).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요한이 예수를 메시야로 선언하던 말을 들었을 것이다(참조 요 1:26, 27, 29).

 

2. 무슨 권세로. 첫 번째 성전 정결 때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가 가르칠 권한이 있음을 입증할 표적을 요구했다(참조 요 2:18). 그 이래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예수의 능력과 권세를 입증할 증거를 반복해서 요구하였다(참조 16:1 주석).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이 랍비의 승인 없이도 백성들을 가르칠 수 있음을 인정했으나,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았다는 증거를 보여 주기를 기대했다. 이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아내려고 이런 질문을 했다.

 

이런 일. 예수의 승리의 입성, 성전 정결 그리고 성전 뜰에서의 가르침을 말한다.

 

3. 나도너희에게 물으리니. 질문을 하면 이에 다른 질문을 내놓는 것으로 그 질문에 답하는 과정은 랍비의 논쟁에서 허용되었다. 역으로 하는 질문은 원질문에 대한 대답에 이르는 길을 보여 주기 위해 고안되었을 것이다.

 

한 말을. 실제로 예수는 그 문제를 회피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질문에 대한 그들의 대답에는 기본적으로 자신들이 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 도전에 응할 때 사용한 지혜와 노련함은 그의 신성에 대한 부가적인 증거였다.

 

4.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요한도 예수도 예루살렘당국자로부터 승인을 받지 않았다. 그들의 권세는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통치자들이 제기한 질문과 그에 대한 응답으로 한 그리스도의 질문은 주로 하나님의 신임을 평가할 자격 여부에 관한 것이었다.

 

5. 의논하여. 유대 지도자들은 난처해져서 서둘러 자기들끼리 의논하였다.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정직하게 고백하면 예수로부터 이런 대답이 나올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훨씬 복잡했다. 만약 그들이 요한의 신성한 자격을 인정한다면 나사렛 예수가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그의 기별의 핵심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참조 요 1:26, 27, 29). 그러므로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곧 예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

 

7. 알지 못하노라. 유대 지도자들은 요한이 선지자였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나 궁지를 모면하기 위해 모른다고 발?했다. 그럴지라도 그들은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의 질문에 대한 그들의 답변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예수에게 했던 처음 질문에 대답하라고 예수를 밀어 부치는 명분이 자연스럽게 철회되고 말았으며, 이는 그들이 계속해서 그 요구를 강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게다가 그들은 백성들의 존경심을 상실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잡기 위하여 교묘하게 쳐 놓은 그물에 걸려들어 꼼짝할 수 없었다. 예수는 예수의 신임을 평가할 자격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공언한 자들을 시험하였고 그들은 불쌍하게도 실패하였다. 그들은 사실상 나라의 영적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포기했다.

 

9. 포도원.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나라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이다. 그리스도가 지금 서 있는 바로 그 지점 가까이 성전 입구에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웅장한 포도나무가 있었다(Josephus Antiquities xv. 11. 3; 시대의 소망, 575; 참조 요 15:1 주석). 21:33의 말씀은 대부분 주님의 포도원에 대한 이사야의 비유에서 인용한 것이다(참조 사 5:1~7).

이 비유는 세상에 거룩한 품성의 열매(참조 21:34 주석)를 공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풍성한 축복을 강조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건강, 지성, 기능, 부유함과 품성면에서 이 땅 위의 가장 위대한 나라가 되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목적하신 영광을 나타내야 했다.

 

세로 주고. “임대해 주고.” 고대에는 농토에 대한 소작료를 현금(現金) 또는 현물(現物)로 갚았다. 현물의 경우, 수확의 일정량 즉 적정량을 협의하여 약정하였다. 이 비유에서 소작농들은 물납(物納) 소작인들이었으나 이 사실이 오늘날의 물납 소작인들이 안고 있는 어려움들을 그들도 똑같이 겪었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10. 소출. 이스라엘은 품성의 열매를 맺어야 했으며, 그리하여 세상에 하늘나라의 원칙을 드러내야 했다. 품성의 열매는 먼저 자신들의 생애 속에서 드러나야 했고 그런 다음 주변의 여러 나라 사람들의 생애 속에서 드러나야 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오늘날의 교회에게 큰 축복을 주셨고, 따라서 그분은 교회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보답이 있기를 기대하신다(참조 실물교훈, 296).

 

한 종을. 예수는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냈다고 말한다(참조 37). 제사장들은 특별한 의미에서 주의 포도원의 지명된 관리인들이었고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대표자들 즉 그의 종들이었다.

 

11. 종들을 보내니. 마태복음에서는 여러 무리의 종들을 말하는데 첫 번째로 보냄받은 무리 가운데 몇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참조 35, 36). 마가복음은 각 경우마다 한 명의 종을 보냈는데 몇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12:3~5)고 말한다. 누가복음 역시 경우마다 종 한 명씩을 보냈는데 종이 죽었다는 말은 없다(참조 눅 20:10~12). 종들의 수와 그들이 제각기 당한 운명은 분명히 비유의 근본적인 요소는 아니다. 바로 그날 조금 뒤에 예수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보낸 기별자들을 취급한 일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23:29~37). 여러 선지자가 당한 운명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을 위해서는 왕상 18:13; 22:24~27; 왕하 6:31; 대하 24:19~22; 36:15, 16; 9:26; 37:15; 7:52를 참조하라. 포도원의 소작농들은 세를 지불할 것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포도원 소유주를 대리하는 자들을 학대하고 또 자신들이 마치 정당한 주인인 양 행세함으로 포도원 소유주를 모욕하였다.

 

14. 이는 상속자니. 바울은 예수를 만유의 후사로 세우심을 받은 분으로 말하며(1:2), 예수를 받아들이는 자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로 말한다(8:17).

 

죽이고. 바로 이 시점은 산헤드린이 예수를 처치할 방법을 찾고 있던 때였다(참조 마 21:23 주석; 19:47). 그들은 최근 몇 달 동안 거듭해서 그의 봉사에 종지부를 찍게 할 방법을 찾기 위하여 모임을 가졌고(참조 19:3; 20:18 주석), 그중에서 가장 최근의 일은 지난 안식일과(참조 시대의 소망, 563, 564,), 바로 이 아침에 있었다(참조 21:23).

 

17. . 이것은 시 118:22, 23의 인용이며 70인역본문과 동일하다. 랍비들도 이 성경절이 메시야에 대한 것임을 인지하고 있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597). 개정표준역은 이런 대조를 부각시킨다: “건축들의 버린 바로 그 돌.”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으로서의 에 관하여는 16:18 주석을 참조하라. 버려진 모퉁잇돌의 배경을 이루는 역사적 경험에 관하여는 시대의 소망, 597, 598,을 참조하라.

 

모퉁이의 머릿돌. 모퉁잇돌은 모퉁이에서 만나는 두 벽을 연결시켜 주기 때문에 건축물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모퉁잇돌에 관한 기타 관련 구절을 보려면 행 4:11; 2:20; 벧전 2:7을 참조하고 시 118:22; 28:16 주석을 참조하라.

 

18. 이 돌 위에 떨어지는. , 그리스도께 복종한다는 뜻이다. 이는 유대 지도자들이 행하기를 거절한 바로 그 일이었다(참조 25, 27 주석).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 심판은 유대 민족과 그 민족의 고집스럽게 회개하지 않는 지도자들 위에 곧 떨어질 것이다.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헬라어 리크마오(likmao-). “(알곡에서 왕겨를) 키질하다”, “흩뿌리다또는 갈아서 산산조각을 내다.” 이 낱말들은 70인역의 단 2:44, 45의 사상을 강력하게 반영하는데, 여기에도 리크마오가 나온다(44). 무거운 물건이 떨어지면 그 어떤 것이든지 가루가 되고 파편들은 멀리 그리고 넓게 흩어진다. 이와 동일한 낱말이 70인역의 룻 3:2에도 사용되었다. “그를 갈아 가루로 만들다라는 표현은 이와 같이 그를 왕겨처럼 날려버리다혹은 그를 왕겨처럼 흩어 버리다로 번역될 수가 있다. 21:44의 생략을 지지하는 본문상의 증거를 제시할 수도 있다.

 

19. 알고. 이 적용은 너무나 명백해서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의심할 여지없이 유대 지도자들은 포도원에 관한 이사야의 비유(5:1~7)와 같은 구약의 구절들과 메시야를 ”(118:22, 23; 28:16 )로 언급한 다양한 구절들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잡고자. , 그를 체포하려고 한다는 뜻이다. 그들이 보는 바로는 예수가 자신들의 권위를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자신들의 음모를 실행에 옮기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대중은 이제 예수를 열렬하게 지지했다. 그가 유대 지도자들과 맞설 때마다,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이런 사악한 성직자들에 대하여 갖고 있던 존경심이 줄어들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누가복음 19:11-28

[11]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12]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4]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15]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16]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25]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26]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27]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모든 교인들은 그들이 소유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고 계발시키라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우리 모든 사람과 빈틈 없는 계산을 하신다. 계산하는 날이 올 때 충성된 청지기는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런 공적을 돌리지 않는다. 그는 “나의 돈”이라고 하지 않고 “주의 한 므나로 다른 므나를 남겼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맡겨진 선물이 없이는 아무것도 증가시킬 수 없었다는 것을 안다. 그는 자기의 청지기 직분을 충실히 이행한 것은 다만 자기의 의무를 다한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은 주님의 것이었고 또한 주의 능력으로 그것을 가지고 성공적으로 장사할 수 있었다. 오직 주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그는 위탁받은 자금이 없이는 영원히 파산자가 되었을 것임을 안다. (청지기, 111)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러 오자 예수님은 한 비유를 더하셨다. ‘왕위를 받아 오는 귀인에 관한 것이다. 이 비유는 어떤 의도와 의미가 있을지 살펴보자.

 

 

본문연구

  1. 1. 11절의 “이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가? 또 비유의 이유가 되는 “예루살렘”(11,28절) 입성 은 어떤 사건을 가리키고 있는가?
    1-10절 _______________
    35-44절 _______________
    cf. 왕인 되어 돌아온 귀인의 비유는 삭개오를 구원한 사실에 더하여 말씀하신 비유였으 며, 곧 예루살렘에 왕으로서 입성하시는 사건을 염두해 두고 하신 비유였다.

  2. 12-27절에 기록된 비유를 요약하여 정리해 보라.
    1. 귀인을 나타내는 호칭들은 무엇인가?
    2. 귀인은 왜 잠시 떠났으며 종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종들은 각각 어떻게 했는가?
    4. 또, 백성들은 어떠했는가?
      cf. ‘1 므나’(minah)의 가치는 100 데나리온(노동자의 100일 품삯)이다.
      cf. 23절의 ‘은행’의 본래 뜻은 ‘탁자’(table), 즉 돈을 취급하던 이들이 앉아 있는 곳이다.
  3. 일부 백성들이 귀인의 왕됨을 원치 않은 까닭(14절)과 일부 종들이 주인이 준 므나를 그 냥 수건에 싸둔 까닭(19-20절)은 무엇일까?
    14, 21절 _______________
  4. 귀인을 미워한 백성들과 일하지 않은 종들의 주장은 옳은가 아니면 그릇되었는가?
    22-23절 _______________
    cf. 귀인은 결국 왕이 되었는가? (15절)
    cf. 귀인은 인정하지 않은 종들과 백성들의 결국은 어떻게 되었는가? (24,26,27절)
    cf. 주인에게 충성한 종들에게는 어떤 상이 주어졌는가? (24-26절)

 

토의사항

1. 그리스도께서 내게 맡기신 의무와 책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얘기해 봅시다.

 

2. 내가 받은 달란트를 최대한 사용하는데 가장 걸림돌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얘기해 봅시다.

 

3. 특히, 다시 오시는 만왕의 왕을 기다리는 종들로서 우리의 사명과 의미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자.

 

예수님은 비유에서 자신과 제자들, 그리고 당시의 유대인들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그들의 의무와 사명을 말씀하셨다. 주님을 믿는 것은 왕을 얻는 것이며, 주인께 충성하는 것은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요, 주님을 기다리며 맡은 바 자신의 일에 충실하는 것이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의 모습이어야 한다.


11.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귀인과 므나]. 이 말은 열 므나의 비유와 예수가 삭개오의 집에서 한 말을 밀접하게 관련시켜 준다(참조 9, 10). 그러므로 이 말씀은 아마도 여리고에 있는 삭개오의 집에서나, 그 근처 또는 조금 후에 여리고에서 24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베다니로 가는 길에 쉬기 위하여 머무는 사이에 주어졌을 수도 있다. 이때는 아마도 AD 31년 유월절 전 주일이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예수가 죽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고 수 차례에 걸쳐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제자들은 여전히 그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환호와 영접을 받아 다윗의 왕좌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거짓된 희망은, 누가 그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을 거듭하게 만들었다. 1년 전에 예수를 왕으로 세우려는 대중들의 시도가 갈릴리에서 있었다. 군중 심리는 그런 과정을 더욱더 선호했고, 그때에 제자들은 틀림없이 전에도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런 제안을 부추겼다. 그리스도의 목적에 대하여 잘못된 개념을 갖게 된 근거는 랍비들이 유포한 메시야에 관한 거짓된 희망이었는데, 그것은 구약의 메시야 예언들을 잘못 해석함으로써 비롯되었다.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 나라의 진정한 성격은, 3:2, 3; 4:17; 5:2 주석을 참조하고, 이에 대한 그릇된 개념은 4:19 주석을 참조하라. 그리스도가 가르친 모든 비유는 그의 나라와 관련된 어떤 특별한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주어졌다. 대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에 관한 것이었으나, 때로는 여기의 경우처럼 영광의 나라를 세우는 것과도 관련되었다.

 

당장에 나타날 줄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매 발걸음은 제자들의 흥분을 증가시켰다. 그들은 이제 그곳에서 2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 아마도 그들은 자기들이 나라를 취하여 이스라엘의 보좌 위에 주님을 앉히고자 예루살렘을 향해 승리의 행진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가 최근에 했던 여러 가지 말은 그런 일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라고 해석했다(참조 18:31 주석).

 

생각함이러라. 예수의 제자들과 함께 그들의 동포들이 일반적으로 똑같이 간직해 온 메시야 왕국에 대한 그릇된 개념이 이 비유를 이야기하도록 계기를 마련했다. 제자들은 그 나라가 다가오는 유월절 기간 중에 세워질 것이라고 확신하며 기대했다. 유월절은 애굽으로부터의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념했으며, 다른 어떤 민족적인 절기보다도 더 히브리 민족의 탄생을 드러내 주었다.

 

12. 어떤 귀인이. 분명히 예수는 여기서 자기 자신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열 므나 비유라고 알려진 이 비유와 마 25:14~30에 기록된 달란트 비유 사이에는 뚜렷한 유사점이 있다. 그와 동시에 거기에는 현저한 차이점도 있다. 어떤 이들은 두 비유가 본래는 같은 이야기였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는데, 그 비유 자체와 비유들이 주어진 상황의 차이는 성경 기록자들의 영감성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없도록 만든다(참조 마 25:14 주석). 두 비유의 유사점에 대하여는 달란트 비유에 관한 주석을 참조하라(25:14~30). 누가복음을 해설하는 이곳에서는 주로 열 므나 비유와 달란트 비유 사이의 서로 다른 국면들을 다루게 된다.

 

먼 나라로 갈 때에. 예수는 이 비유를 청중들이 아주 잘 아는 역사적인 사건들에 기초했을 가능성이 크다(참조 15:4 주석). 그 가능성 있는 이야기로서 제시되는 첫 번째 사례는, BC 40년에 헤롯 대왕이 안티고누스(Antigonus)의 주장을 반대하고 자신이 유대 왕으로 임명받기 위해 로마로 간 여행이다. 로마 원로원은 안티고누스의 주장을 묵살하고 헤롯을 왕으로 승인했다. 하지만 이 비유와 더 유사한 역사적인 근거는 두 번째 사례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헤롯 대제의 아들인 아르켈라우스(Archelaus)가 자기 아버지의 유업으로 유대 나라를 얻고자 승인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간 일이다. 왕의 칭호를 받을 수 있는 그의 권리는 가이사 아구스도(Augustus Caesar)에 의하여 거부되었다.

 

13. 그 종 열을. 또는 그의 열 명의 종들.” 여기서 종들, 그리스도가 먼 나라에 가고 없는 동안 이 땅에서 그의 사업을 위탁받은 제자들과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참조 마 16:19 주석). “이라는 숫자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데, 흔히 예수가 어림수로 사용하였다(참조 15:8 주석).

 

므나. 헬라어 므나이(mnai). 히브리어 마네(maneh) 미나”(참조 제2, 106, 108)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그리스도 당시에 1므나는 100드라크마에 해당하는 은 한 달란트의 60분의 1, 곧 금형 11.46온스 즉 356.4그램이었다(참조 15:8 주석). 물론 그만한 양의 은()은 지금보다 훨씬 구매력이 컸는데, 한 므나는 100명의 임금(賃金)에 해당되었다(참조 마 20:2 주석). 종들은 각각 한 므나를 받았다.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달란트와 비교해 보라(참조 마 25:15 주석).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여기의 장사하라는 말은 상업을 하라는 의미이다(참조 겔 27:9, 16, 19, 21, 22; 19:15). 10달러 37센트라는 액수는 귀인종들중 한 사람에게 자본금으로 맡기기에는 너무도 적은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그 주인도 돌아왔을 때 그것을 지극히 작은 것”(19:17)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나중에 더욱 중요한 책임을 맡긴다는 목적으로 각 종들의 능력을 시험하는 수단이었다. “내가 돌아오기까지라는 말은 귀인이 정해지지 않은 기간에 나가 있을 것이 예상되었음을 암시한다. 이 말을 통해 예수는 자기 역시 충성스러운 자들에게 상을 주기 위하여 돌아오기 전에 상당 기간 함께 있지 못할 것임을 암시한다.

 

14. 우리는원치 아니하노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들이 빌라도 앞에서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19:15)라고 선언했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를 완전히 거절했다.

 

15. 저희를 부르니. 주인이 그들을 부른 목적은 재정 보고를 받기 위함이었다고 마태는 부언한다.

귀인은 자기의 재산 관리자로서 종들이 그들의 역량을 어떻게 발휘했는가를 알고자 했으며, 각자가 보여 준 역량에 따라서 책임을 맡길 계획을 세웠다.

 

16. 그 첫째가. 25:20과 비교하라. 같지 않은 결과에 대한 성공도의 표본으로서 10명의 종 가운데 3명의 경험만을 여기에서 언급한다. 그 첫 번째 종은 보고할 내용이 많았고, 둘째는 보고할 자료가 다소 있었으며, 셋째는 보고할 것이 없었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처음부터 세 사람만 나오며, 세 사람 모두 결산 보고를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문자적으로는 추가로 열 므나를 벌었다.” 따라서 추가로 열 므나를 얻었다는 뜻이다. 그 수익은 투자 금액의 1,000퍼센트였다. 즉 자본금은 100일분 임금이었으나, 수익금은 1,000일분 임금이었다. 이 첫 번째 종은 이제 총 11므나를 가졌으며, 그것은 3년 반의 품삯이 넘는 것이었다(참조 13절 주석). 첫 번째 종은 투자 사업에 비상한 솜씨를 드러냈으며, 이것은 주인에 대한 헌신과 그의 근면성, 성실함을 반영했다.

17. 착한 종이여. 달란트 비유 가운데서 종은 착할 뿐만 아니라 충성된자라는 말을 들었다(참조 마 25:21). 아마도 어떤 의도된 차이점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이곳의 주인은 즉시 첫 번째 종에게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했다고 칭찬을 하기 때문이다. 해설은 마 25:21 주석을 참조하라.

 

열 고을 권세. 첫 번째 종의 경영 수완은 그가 주인의 나라에서 작은 지역 사무를 감당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었다. 그는 퇴직하여 연금을 받거나 물질적인 보상을 받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가 받은 보상은 더 큰 책임과 더 높은 지위,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더 높은 계급으로의 승진이었다. 그는 시험에서 탁월한 성공을 거두었다(참조 마 25:21; 19:13 주석).

 

18. 다섯 므나. 500퍼센트의 이익(참조 17절 주석). 두 번째 종은 이제 도합 여섯 므나 즉 600일분, 대략 2년치의 임금을 가지고 있다.

 

21. 내가 무서워함이라. 이 종이 갖고 있는 두려움의 근본 원인은 자기 주인에 대한 잘못된 태도에 있었는데, 주인은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을 하나도 용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종은 분명히 게을렀다. “귀인이 그에게 주었던 시험은, 그가 그것을 기회로 삼아 노력했다면 그런 특성들을 극복하도록 이끌어 주었을 것이다.

 

두지 않은 것. 실제로 종은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어쨌든 당신은 내가 버는 것이라면 모두 가질 것이고, 나는 애써 보아야 보상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힘써 노력해 본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첫 번째와 두 번째 종에게 주어진 보상은 잘못이 셋째 종에게 있으며 그의 주인에게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22. 악한 종아. 그는 주인의 신임을 저버리고 주어진 성공의 기회를 소홀히 했다. 저희에게 위탁된 달란트를 가지고 아무런 일도 이루지 않는 자들은 하늘이 보기에 악한자들이며, 악인의 삯을 거두게 될 것이 확실하다. 달란트 비유에서 세 번째 종은 악하고 게으른종이라는 책망을 듣는다(.

 

네 말로. 더 이상의 사실 조사가 필요 없었다. 세 번째 종은 전혀 신임할 수 없음을 입증했다. 저희가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해 남을 비난하는 자들은 이로써 품성에 결함이 있음을 분명히 공표하는 셈이다. 그들은 어떤 종류의 중요한 책임도 맡길 수 없음을 분명히 드러내 준다.

 

너는알았느냐. 종의 실패는 무지 때문이 아니라 게으름 때문이었다. 그 자신이 더 잘 알았다. 그는 주인이 자기에게 제공해 준 기회를 어떻게 이용했는지 철저하게 밝힐 줄을 알면서도 왜 그 기회를 이용하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분명히 그의 능력과 상관되는 것이었다. 그의 잘못은 바로 여기에 있다.

 

23. 그러면 어찌하여. 그는 자기 주인이 돌아오면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비록 일하기를 원치 않았지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은 돈이 자기 대신 일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돈을 가지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면 그는 왜 우선적으로 그 돈을 받았는가? 그 돈은 그것을 가지고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다른 종에게 주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은행. 헬라어 트라페자(trapeza). “탁자.” 여기서는 환전상(換錢商)의 탁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은행을 뜻한다(참조 마 21:12; 11:15; 12:15). 영어의 “bank”(은행)라는 단어도 비슷한 어원을 가지고 있는데, 이태리어의 방카(banca)에서 유래되었으며 의자”, “탁자또는 계산대를 뜻한다. 종의 입장에서는 성읍 내의 돈놀이하는 사람에게 돈을 맡기는 것이 더 수월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나 게으른 자로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가 고의적으로 주인에게서 정당한 이익을 탈취할 계획을 세운 것처럼 보이게 한다.

 

24. 곁에 섰는 자들. 아마도 종들 이외에 그 귀인을 수종드는 자들인 것 같다. 윗사람 옆이나 앞에 서다라는 말은, 그를 섬긴다는 의미이다(참조 단 1:19 주석; 왕상 10:8).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활용하지 않은 달란트는 첫 번째 종에게 주어졌는데, 그것은 보상으로서가 아니라 그가 그것을 가지고 다른 자들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남길 것이라는 증거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귀인이 볼 때, 자기 돈이나 사업을 주어진 기회를 가장 잘 이용할 사람의 손에 맡기는 일은, 쉽게 말해서 잘하는 장사였다. 그 첫 번째 종은 이제 12므나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현재 두 번째 종이 가진 것의 갑절이 된다. (주인)은 원금이나 이자를 돌려 달라고 하지 않고 이 사람들의 손에 맡겨 계속 사업을 하거나 활용하도록 한 것 같다(참조 마 25:28).

 

25. 저희가 가로되. 그에게 항의하는 저희가 귀인을 수종드는 자들(참조 24절 주석)인지, 아니면 비유를 말하는 예수에게 항의하는 자들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후자의 경우라면 25절 전체는 삽입 구절의 성격을 지닌다.

 

26.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여기서 게으른 종은 단순히 자기에게 위탁되었던 자본금을 빼앗긴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게으른 종이 심한 형벌을 받는다(참조 마 25:30 주석).

 

28. 앞서서 [올라]가시더라. 즉 요단 골짜기에 있는 여리고에서 올라갔다(참조 11절 주석). 예루살렘까지는 24킬로미터쯤 되는데, 그들은 1,005미터 높이를 올라간 셈이다(참조 10:30 주석). 누가의 이야기 내용이 갑자기 이곳에서 바뀌는 이유는 여리고에서 있었던 사건들(1~28)과 승리의 입성(29~44) 사이에 약간의 시간 간격을 주기 위한 것 같다.

 

누가복음 19:1-10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사람이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서 영접할 때 구원이 그 영혼에게 이르는 것이다. 삭개오는 다만 지나가는 손님처럼 그의 집에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의 성전에 거하는 분으로서 그를 영접하였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삭개오를 죄인이라고 비난하였고 그리스도가 그의 손님이 되는 것을 불평하였으나 주께서는 그를 아브라함의 아들로 인정하셨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갈 3:7)알 것이기 때문이다(소망 556).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삭개오의 첫 응답은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동정하는 데서 나타났다(소망 552, 554, 555).

 

본문연구

1. 젊은 부자 관원(18:18~24)과 삭개오(19:1~10)의 이야기를 비교하기 위하여, 아래 빈칸을 채워 봅시다.

비교 관원 삭개오
직업 공회의원  
영성   구함
호소 나를 따르라  
반응   열렬함
결과    

 

 

2. 삭게오는 예수님에 대하여 왜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요?(참조 마 3:2; 1:28;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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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침례자 요한의 초기 사업은 베다바라(베다니)에서 이루어졌는데, 아마도 여리고 근처의 요단강 동편에서 하는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삭개오는 군중들과 함께 갔을 것이다(시대의 소망, 553). 요한에게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물었던 세리들 중에 삭개오도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볼 수 있다.

 

 

3. 예수님께서 삭게오의 이름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참조 요 1:4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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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의사항

1. 과거의 신앙 경험중에 변화의 필요성을 가장 크게 느낀적은 언제인지 얘기해 봅시다.

 

2. 지금 복음의 원칙 중에 실천으로 옮기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애기해 봅시다.

 

3. 예수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임으로 인해 내 생애에 일어난 윤리적 도덕적 변화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개혁이 따르지 않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의는 자복하지 않고 버리지 않은 죄를 덮는 가면이 아니다. 품성을 변화시키고 행동을 제어함이 생애의 원칙이다. 거룩함이란 하나님께 전체를 바치는 것이며 마음 속에 있는 하늘의 원칙에 마음과 생애를 완전히 복종시키는 것이다.


1. 들어 지나가시더라. 이때는 AD 31년 유월절 한 주일 전이었고,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즉 그들은 유월절을 지키려고 페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마지막으로 머무는 곳 중의 하나인 여리고에 이르렀다.

요단강 건너편의 가장 중요한 건널목은 여리고 동편으로 약 8킬로미터 되는 곳에 있다. 그 도시는 요단 계곡의 서쪽 변두리, 서쪽에 솟아 있는 산기슭의 작은 언덕 바로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참조 눅 10:30 주석). 신약 시대의 여리고는 구약 시대의 여리고의 폐허에서 약 1.6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헤롯 대왕이 이 도시를 미화시켰고, 겨울 궁전을 그곳에 두었다. 여리고는 그 근방에 있는 온천으로 유명해졌으며, 헤롯 대왕이 불치의 병을 앓고 있을 동안 병이 낫기를 바라서 그곳에 갔었다. 비록 이것이 예수가 여리고를 방문했다는 유일한 기록이지만, 예수는 절기에 참석하러 가는 종전의 여행길에도 이 도시를 방문하였고, 페래아로부터 나사로를 살리러 가는 길에도 분명히 이곳을 거쳐갔다고 생각할 여지가 충분하다.

 

2. 삭개오. 헬라어 작카이오스(Zakchaios). “순결한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작카이(Zakkai)에서 유래하였다. 작카이(Zakkai, “삭개”)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이 구약에 언급되었다(참조 스 2:9; 7:14). 현대의 어떤 주석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야기는 마태를 부른 이야기의 다른 판이라고 간주할 만한 근거가 없는데, 그것은 특별히 누가가 마태를 부른 사건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참조 5:27~32). 삭개오는 분명히 유대인이었다(참조 19:9). 따라서 구경꾼들은 그가 죄인이라는 이유에서 예수가 그와 교제하는 것에 대하여 항의했다.

 

세리장. 헬라어 아르키텔로네스(architelo--ne-s). “세리장을 뜻하는 복합어. 삭개오는 오늘날의 세무 감독관 또는 세금 징수원이다. 분명히 그는 동쪽에서 요단강을 건너는 모든 교통의 관문으로서 유대의 중요한 국경 도시인 여리고에서 세금 징수를 책임진 부유한 세무 공무원이었다. 여리고 동편에 있는 개울은 갈릴리 호수와 사해 사이에 위치했는데, 이것은 봄철에도 요단강을 건널 수 있는 중요한 세 지점 가운데 하나였다고 전해진다. 전도자 누가는 세리들에 대하여 언급할 때, 매번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이런 자들에 대하여 호의적으로 말하고 있는바, 이것은 예수를 가난한 자, 압제당하는 자,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의 친구로서 강조하는 그의 특성과 조화를 이룬다.

 

부자라. 세리들은 로마의 권세를 등에 업고 대개 법이 요구하는 액수보다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였다(3:12 주석).

 

3. 어떠한 사람인가.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인물인지를 보고, 거리에서 그를 에워싸고 있는 군중으로부터 따로 접견하기를 희망했다는 뜻이다.

 

보고자 하되. 아마도 삭개오는 얼마 동안 예수를 볼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것이다. 침례자 요한의 초기 사업은 베다바라(베다니)에서 이루어졌는데, 아마도 여리고 근처의 요단강 동편에서(참조 마 3:2; 1:28 주석) 하는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삭개오는 군중들과 함께 갔을 것이다(시대의 소망, 553). 요한에게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참조 3:12)라고 물었던 세리들 중에 삭개오도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볼 수 있다. 비록 그때 진정으로 회심하지는 않았지만 삭개오는 요한의 기별에 감명을 받았고, 요한의 말은 그의 마음속에서 누룩처럼 역사하기 시작했다(시대의 소망, 553). 이때보다 앞서 삭개오는 예수에 대하여 들었고, 잘못을 자백하고 배상하는 일을 시작하였다(시대의 소망, 553, 555,). 그는 굶주린 심령으로 예수를 뵙고 생명의 길에 대하여 좀 더 완전하게 배울 기회를 갖고자 갈망하고 있었다. 그는 레 25:17, 35~37(참조 19:8 주석)에서 발견할 수 있는 원칙들과 조화되게 행동함으로써, 이미 복음의 원칙을 삶에서 어느 정도 실천하고 있었다. 마태의 경험과 비교하라(참조 막 2:13, 14 주석).

 

할 수 없어. 남자가 양팔을 뻗으면 벽과 벽이 닿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 고대 도시의 좁은 거리는 삭개오의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4. 앞으로 달려가. 삭개오는 예수가 여리고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553). 유월절에 참석하기 위하여 그 도시를 통과하는 사람들의 무리들 때문에 세리장인 삭개오는(참조 2절 주석) 평소보다 더 분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모습을 먼발치에서라도 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뒤로 하였다.

 

뽕나무. 헬라어 쉬코모레아(sukomorea). 무화과나무(sycamore-fig tree). 이 나무는 흰 뽕나무 또는 무화과 뽕나무라고도 불린다. 쉬코모레아라는 이름은 무화과를 가리키는 쉬콘(sukon)뽕나무를 일컫는 모레아(morea)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그 잎사귀는 뽕나무 잎과 열매는 무화과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나뭇가지가 낮게 드리워져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이런 나무들은 고대 도시의 좁은 거리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었지만, 성읍의 문을 지나 길가에는 흔하게 있었다(참조 막 10:46 주석). 참조 암 7:14; 17:6 주석.

올라가니. 이것은 삭개오처럼 좋은 옷을 입은 신사에게 다소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이었다. 그는 그토록 뵙기 원했던 예수의 지나가는 모습이라도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보다는 별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것을 기꺼이 감수했다. 삭개오가 올라간 그 나무는 도시의 좁은 거리에서 자라던 것(참조 19:3 주석)이었다기보다는, 성읍의 서쪽 외곽지역에 있었던 것 같다(참조 막 10:46 주석).

 

5.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 말은 낮에 취하는 약간 긴 휴식이나 밤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을 가리킬 수 있다. 이것은 예수가 남의 집에 머물겠다고 자청한 유일한 기록이다. 삭개오와 같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라면 분명히 손님을 접대할 만한 충분한 시설이 있었을 것이고, 삭개오는 예상치 못했던 손님들이 오더라도 당황하지 않을 것을 예수는 알았다. 우리는 예수가 어떻게 삭개오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 만큼 그를 알았는지 들은 바가 없다. 물론 구경꾼들이 알려 주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1:47에서 예증된 바와 같이 초자연적으로 얻게 된 지식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예수는 자기가 환영만 받지 않을 것임을 아셨는바, 삭개오는 예수를 보고자”(19:3) 하여 기회를 심히 갈망해 왔고, 자신의 집에서 이 위대한 교사를 접대하게 된 특권을 크게 영광으로 여기고 기뻐하였을 것이 틀림없다. 예수는 이 모든 것을 알았고, 나라(왕국)의 도()를 그에게 가르치려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세리의 집으로 갔다(시대의 소망, 556).

 

6. 즐거워하며. 헬라어 카이로(chairo-). 문자적으로는 기뻐함”(참조 1:28 주석).

 

7. 수군거려. 헬라어 디아공귀조(dia- gogguzo-). 공귀조(gogguzo-)의 강조 형태로서 원망하여라고도 번역되었다(참조 마 20:11; 5:30 주석). 무리들 가운데는 삭개오나 그의 대리인들에게 실제적으로 늑탈당한 사람이 있었으므로, 삭개오 때문에 예수를 도적으로 간주하는 시민이 많았을 것이다.

 

8. 서서. 분명히 삭개오는 예수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을 것이며, 군중들의 성난 항의를 듣자(7) 자기를 욕하는 자들에게 얼굴을 향하고 예수에게 말했을 것이다.

 

내 소유의 절반을. 삭개오가 부당하게 모은 재물을 기꺼이 거저 나누어 주려는 마음은, 그가 회심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최선의 증거들 중의 하나였다. “개혁을 이루지 않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시대의 소망, 555). 기꺼이, 자원하는 삭개오의 행동과 심지어 그렇게 하도록 요청을 받았지만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주기 거절했던 젊은 부자 관원의 행동을 비교해 보라(참조 마 19:21, 22 주석). 삭개오의 경험은 부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증거이다(참조 마 19:23~26 주석).

 

가난한 자들. 유대인들 사이에서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은 경건과 실천적인 믿음생활을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돌보는 데 대하여 구체적인 지침을 주었다.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삭개오는 이미 부당하게 얻은 소득을 배상하기 시작했다(참조 3절 주석). 이제 그는 부정하게 획득한 모든 것을 돌려주기 위해 철저하고도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이것은 군중들 중에 그를 극심하게 비난한 사람들, 제사장, 서기관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성전에서 하는 상행위는 예배하러 오는 모든 사람을 사취할 수 있는 기회를 그들에게도 무한정 제공했다(참조 마 21:12 주석).

 

사 배나 갚겠나이다. 자발적으로 배상할 때, 모세의 법은 단지 취한 금액에 오 분의 일을 추가하라고 요구했다(참조 레 6:5; 5:7). 4배의 배상은 재물을 잃어버린 후에 의도적으로 약탈한 행위에 대한 극단적인 형벌 중 하나였다(참조 삼하 12:6 주석; 22:1). 보통 원래의 소유물이나 돈을 배상할 수 있을 경우, 갚아야 할 액수는 취한 것의 갑절이었다(22:4, 7). 삭개오가 배상하기로 약속한 금액은 그가 마음의 변화를 경험했다는 최선의 증거였다.

 

9. 오늘. 아마도 그의 삶에 일어난 변화를 감안하여 볼 때, 삭개오의 자백과 약속(8)에 반영된 그의 결심을 고려하여 한 말로 보인다.

 

이 집에. 삭개오의 결심으로 혜택을 받게 된 그의 가족.

 

이 사람도. 참조 13:16. 유대 사회는 삭개오를 명사들의 명부에서 삭제하고 죄인으로 낙인찍었고(참조 19:7), 따라서 삭개오는 유대인들이 선조 아브라함의 모든 혈통적 자손들에게는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보상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예수는 지금 삭개오의 이름이 하나님의 은총의 명부에 기재된 것을 알린다.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후손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한 유대인들의 개념을 보려면 마 3:9; 9:39 주석을 참조하라.

 

10. 잃어버린 자. 참조 마 1:21 주석. “잃어버린 것”(that which was lost)이라는 구절(제임스왕역)은 모든 죄인을 의미하는 잃어버린 자들이라는 표현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예수는 인류 전체뿐만 아니라, 자기 죄로 인해 잃어버림을 받은 모든 자를 회복하려고 오셨다. 이 세상은 다시금 에덴의 아름다움을 회복하여 죄 없는 인류가 살 것이며, “만유를 회복하실 때(3:21) 모든 잃어버린것이 회복될 것이다.

 
 
 
 

누가복음 18:35-43

[35]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38]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그는 참으로 간절하고 열렬한 마음으로 “주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부르짖었다. 사람들이 그를 잠잠하게 하려 했지만 그는 더욱 격렬하게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외쳤다. 예수님은 이 호소를 들으셨다. 이 사람의 끈질긴 믿음은 보상을 받았다. 육체의 시력이 회복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이해의 눈도 열렸다.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구속주를 보았고, 의의 태양빛은 그의 영혼 속으로 빛을 비추어 주었다. 소경 바디매오같이 그리스도의 필요를 느끼고 그가 한 것같이 열렬하고 단호하게 부르짖는 사람들은 모두 다 그들이 갈망하는 축복을 받는다.”(화잇주석, 막 10:46-52)

 

여기에 예수님을 만나서 고침을 받고 구원을 받은 또 한 사람, 소경이 있다. 여리고에서 있었던 놀라운 예수님의 이적을 살펴보자.

 

본문연구

 

  1. 본문의 ‘소경’(맹인)의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처지였는가? 
    막 10:46, 마 20:30 _______________

    cf.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 소경은 두 사람이었다. 마가와 누가의 기록과 관련시켜 생각하면 아마도 부자 모두 소경이었던 것 같다. 가족은 모두 떠나고 소경 두 부자만 이 구걸하면서 불행한 인생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cf. 오늘날 우리 주변의 맹인들은 어떤 생활을 하는가? 내가 만약 볼 수 없다면 어떨까?

  2.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고 소경은 ‘다윗의 자손 예수’의 이름을 거듭 부르며 간청하였 다. 이 두 이름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2:23, 1:45,46 _______________  
    마 22:42, 막 12:35 _______________
    cf. 본문의 39절을 읽고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을 부르며 간청하는 상황에 대하여 생각해보라.

  3. 예수께서 소경을 부르셔서 하신 말씀을 무엇이었으며, 소경은 어떻게 대답하였는가?
    40-41절 _______________
    cf. 소경이 보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죄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신다면, 무엇이라 대답할까?

    cf. “소경된 자는 앞을 보지 못하므로 어디를 가나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흑암으로 둘러싸여 있는 세 상을 더듬으며 생활하는 소경을 보고 불쌍히 여기며 동정할 줄 모르는 사람은 참으로 무정한 인간이 다. 이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써 누그러져야 한다.” ─ 교회증언3권, 521.

  4. 다시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이었으며, 소경은 어떻게 되었는가?
    42-43절 _______________

 

토의사항

  1. 예수님께 나아가기에 더 유리한 사람들이 있을가요? 어떤 환경이 더 유리한 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cf. “시력을 가진 많은 무리들이 왔다 갔다 하였지만 그들은 예수를 보고 싶은 마음은 별로 크게 갖지 않았 다. 믿음으로 그분을 한번만 보아도 그분의 사랑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며, 그들은 그의 은혜의 축복을 받을 것이련만 그들은 그들의 영혼의 가난한 것과 병든 것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필요를 느끼지 못 하였다. 그러나 가난하고 눈먼 그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밖에 없는 그의 희망은 예수 안에 있었 다.”(화잇주석, 10:46-52)

  2. 우리의 바램을 이루기 위한 끈질김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 해 봅시다.

  3. 예수님께서 내 인생의 조력자로서 어떤 역할을 하고 계신지 이야기해 봅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길이었다(31). 전에 일부러 나병촌에 가신 것처럼, 그를 기다리는 영혼들을 위해 이번에는 여리고에 들르신 것이다. 그곳에서 만난 소경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은 그의 간절한 소망과 열성적인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시력과 구원을 주셨다.


35.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즉 그들은 유월절을 지키려고 페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마지막으로 머무는 곳 중의 하나인 여리고에 이르렀다(참조 마 20:17; 21:1 주석).

요단강 건너편의 가장 중요한 건널목은 여리고 동편으로 약 8킬로미터 되는 곳에 있다. 그 도시는 요단 계곡의 서쪽 변두리, 서쪽에 솟아 있는 산기슭의 작은 언덕 바로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참조 눅 10:30 주석). 신약 시대의 여리고는 구약 시대의 여리고의 폐허에서 약 1.6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헤롯 대왕이 이 도시를 미화시켰고, 겨울 궁전을 그곳에 두었다. 여리고는 그 근방에 있는 온천으로 유명해졌으며, 헤롯 대왕이 불치의 병을 앓고 있을 동안 병이 낫기를 바라서 그곳에 갔었다. 비록 이것이 예수가 여리고를 방문했다는 유일한 기록이지만, 예수는 절기에 참석하러 가는 종전의 여행길에도 이 도시를 방문하였고, 페래아로부터 나사로를 살리러 가는 길에도 분명히 이곳을 거쳐갔다고 생각할 여지가 충분하다.

마태(20:29)와 마가는 예수와 열두 제자가 도시를 떠날 때에 이 사건(예수가 소경을 고쳐 준 일역자 주)이 있었다고 동의하는 데 반하여, 누가는 그들이 여리고에 가까이 올 때의 일로 기록한다(참조 눅 18:35). 이 표면상의 차이를 조화시키려는 시도로 다양한 의견들이 제출되었다.

어떤 이는 제안하기를 “~으로 가까이 오다”(18:35)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의 보편적인 뜻이 다시 오다또는 가까이 오다이긴 하지만, 누가는 단순히 이 사건 당시에 예수는 여리고 근교에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 것으로 본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신()여리고와 1.6킬로미터 북쪽에 있는 구()여리고 중간에서 이 거지를 만났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설명에는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난해점이 있다. 첫째로는 당시에 구여리고는 폐허였으며, 누가가 가까이에 있는 같은 이름의 현존하는 도시를 무시하고, 고대의 폐허 무더기를 여리고라 불렀다고 생각하기에는 무리한 상상력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신약 시대의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갈 때 구약 시대의 여리고를 지나지 않고, 오히려 와디 켈트(Wadi Qelt.)를 따라 산속으로 올라가는, 서쪽 기슭의 언덕으로 간다는 점이다(참조 눅 10:35 주석).

아마도 다음의 설명이 더 타당할 것이다. 누가는 삭개오의 이야기를 바디매오의 치유에 관한 보고 바로 다음에 기록한다(참조 눅 10:35~19:10). 분명히 삭개오와 바디매오는 둘 다 여리고에 살았고, 예수가 한 사람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사람을 만났다. 누가복음에 있는 이야기의 순서에 따르면, 예수는 소경을 치유한 후에 세리의 집에 손님으로 있었다. 아마도 틀림없이 삭개오는 그 도시의 길거리에서는 예수를 만나볼 수 없었으므로 군중들보다 앞서 뛰어가 기어 올라갈 적당한 나무를 찾아야 했고, 그곳은 아마도 도시의 외곽지대였을 것이며(참조 눅 19:4 주석), 그곳에서 그는 예수가 오기를 기다렸다. 19:1에 의하면 예수는 삭개오를 만나기 전에 여리고를 통과하였다. 삭개오를 만나, 예수는 그의 집에서 남은 하루를 지내기 위해 그와 함께 되돌아갔다. 그리고 예수가 도시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이 소경은 예수의 주의를 끄는 데 성공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누가가 예수가 도시로 들어가고 있었다고 말한 것도 맞고 또 마태와 마가가 그가 그곳을 떠날 때라고 한 것도 역시 맞는 말이 된다.

 

한 소경(바디매오). 이 이름은 아람어 바르-티마이(Bar-T.im’ai)에서 유래한 것으로 마가는 독자를 위하여 번역해 준다. 마태는 두 소경에 대하여 말한다(참조 마 20:30). 마가가 그들 중 한 사람에 관해서만 언급한 이유는 그 한 사람에 관한 어떤 사실이 독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사가 될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참조 5:2 주석). 어쩌면 바디매오는 후에 예수의 추종자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3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2를 참조하라.. 헬라어 호도스(hodos). “”, “작은 길또는 도로”(참조 11:4 주석). 거지들은 아마 틀림없이 도시 대문 바로 바깥쪽에 앉아 있고, 그곳을 지나가는 행인들이 그들에게 동냥을 주었을 것이다.

 

36. 듣고. 군중들은 계속해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다. 거지는 어느 구경꾼들이 예수가 이 특별한 무리들 속에 있다고 말하는 것을 엿들었다.

 

38. 다윗의 자손. 이 정확한 메시야적 칭호(Messianic title)를 사용한 것은 그가 예수를 약속된 자로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참조 마 1:1; 9:27 주석).

 

39. 앞서 가는 자들이. 혹은 앞에 있는 사람들.” 이 말은 예수와 함께 여행하면서 무리를 지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대형에 관한 흥미로운 측면을 제공해 준다. “앞서 가는 자들은 예수의 일행들 중 일부였고, 단지 예수 주위에 항상 몰려들었던 호기심을 가진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이나 우연히 예수와 같은 방향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던 순례자들은 아니었다.

 

꾸짖어. 또는 비난하여.” 그들은 분명히 유대인이나 로마의 관원들이 그(예수)를 체포할 구실로 삼을 것 같은 공적 행사를 막으려 한 것이다. 19:1, 3; 20:18 주석을 참조하라.

 

잠잠하라. 문자적으로는 조용하라.”

 

더욱 심히 소리질러. 바디매오는 이것이 예수의 손에서 고침을 받을 유일한 기회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의 계속적인 외침은 예수의 능력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41. 무엇을원하느냐. 소경이 시력이 회복되기를 구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여느 때처럼 예수는 필요에 대한 인식과 믿음의 증거로 탄원자가 구체적으로 요청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예수가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은 바디매오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이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이 이 이적의 중요한 의의(意義)를 좀 더 잘 이해하기를 원했다(참조 5:32, 34 주석).

 

보기를. 문자적으로 내 시력의 회복을.” 헬라어는 바디매오가 소경으로 출생한 것이 아니라 출생 후에 소경이 되었음을 분명하게 해준다.

 

42.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즉 너를 치료하였다.

 

43. 예수를좇으니. 고침을 받은 자들이 예수에게 남고자 하는 바람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의 요청을 참고하라(참조 5:18~20 주석). 예수가 삭개오의 집으로 가고 있었는지(참조 10:46 주석) 또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백성이 다. 누가는 여기에서 마태나 마가가 언급하지 않은 내용, 곧 이적을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에 대하여 부언한다. 종종 예수의 권능을 마귀의 역사로 돌렸던 유대 지도자들(참조 마 12:24 주석)과는 대조적으로, 일반 백성들은 그들의 지각이 편견에 의하여 어두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의 능력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렸다.

 

“46-52 눈이 있어도 아무것도 보지 못함(20:30-34; 18:35-43)죄인이 구주의 필요를 느낄 때만이 그의 마음이 그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을 좇아가게 된다. 예수께서 사람들 중에 행하셨을 때에 의원을 필요로 했던 사람은 병든 자들이었다. 가난하고 병들고, 고난을 당하는 자들이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위로와 도움을 받기 위하여 그를 좇았다. 소경 바디매오는 길 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기다리며 예수를 만나고자 하였다. 시력을 가진 많은 무리들이 왔다 갔다 하였지만 그들은 예수를 보고싶은 마음은 별로 크게 갖지 않았다. 믿음으로 그분을 한번만 보아도 그분의 사랑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며, 그들은 그의 은혜의 축복을 받을 것이련만 그들은 그들의 영혼의 가난한 것과 병든 것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그러나 가난하고 눈먼 그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밖에 없는 그의 희망은 예수 안에 있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기다리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그는 이 무슨 일이냐?”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물었다. 곁에 섰던 자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하였다. 그는 참으로 간절하고 열렬한 마음으로 주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부르짖었다. 사람들이 그를 잠잠하게 하려 했지만 그는 더욱 격렬하게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외쳤다. 예수님은 이 호소를 들으셨다. 이 사람의 끈질긴 믿음은 보상을 받았다. 육체의 시력이 회복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이해의 눈도 열렸다.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구속주를 보았고, 의의 태양빛은 그의 영혼 속으로 빛을 비추어 주었다. 소경 바디매오같이 그리스도의 필요를 느끼고 그가 한 것같이 열렬하고 단호하게 부르짖는 사람들은 모두 다 그들이 갈망하는 축복을 받는다.

고통과 고난에 잠긴 자들이 그리스도를 찾아 구하여 그분을 조력자로 모실 때 그들은 그분의 품성에서 비쳐 나오는 거룩함의 미와 완전에 매혹된다. 허식을 피하신 그분의 단순한 차림새와 겸손한 생활은 그들에게 그분이 마른 땅에서 올라오는 연한 순같다는 인상을 준다(리뷰 1887. 3. 15).”(화잇주석, 10:46-52)

 

 

누가복음 18:18-30
[18]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24]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산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25]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26]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27]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28]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청년을 취급하심에 있어 한 실물교훈을 나타내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종들이 따라야 할 행위의 규범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의 법률을 순종한다는 것은 다만 법문이 요구하는 순종 뿐만 아니라 그것이 실생애로 옮겨지고 품성으로 예증될 수 있는 순종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의 신하가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품성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표준을 세우셨다. 그리스도와 동역자가 될 수 있는 자만이, “주여 나의 모든 소유와 나 전체까지도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정을 받을 것이다. 하늘을 소망함이 무엇을 의미하며 조건들 때문에 소망을 버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든 사람들은 숙고해야 한다. (소망 521).

 

그리스도의 말씀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수 24:15)는 바로 그 초청을 법관에게 주신 것이었다. 선택은 그에게 달려 있었다.

 

본문연구

  1. 젊은 부자 관원은 계명들을 지켰는가? 왜 예수께서는 그에게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서 당신의 제자가 되라고 하셨는가?(마 19:16~22)
    위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때 다음 내용을 살펴 보라.
    *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갈 2:16; 엡 2:8~10)
    * 구원의 경험은 구원받은 자의 생애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마 19:17; 롬 3:31, 8:3,4과 비교)
    * 젊은 부자 관원은 구원의 경험을 가졌는가? 그는 어떻게 계명들을 지켰는가?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대로 지켰는가 아니면 그가 이해하는 대로만 지켰는가?

  2. 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마 19:23)운가? 부자를 위한 구원의 방법과 가난한 자를 위한 구원의 방법이 다른가?

    cf. 제자들은 부(富)가 하나님의 은총의 표라는 일반적인 신념을 받아들였다. 만일 부자가 하늘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면(즉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가 어렵다면), 그 밖에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늘에 들어갈 소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함을 지적하셨다. 어떤 것을 하나님보다도 더 사랑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그처럼 자애로우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이기적인 영혼에게는 고역이 될 것이다. 가난한 사람도 부자와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것에 몰두할 수 있다. 중요한 요소는 내적 태도이다.

  3. 젊은 부자 법관에 관한 이야기(막 10:17~22; 참고 마 19:16~22; 눅 18:18~23)에서 얻을 영적 교훈은 무엇입니까?

 

토의사항

  1. 젊은 부자 법관에게 하신 예수님의 요구는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까? 즉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유는 무엇입니까?

  2. 모든 소유를 팔고 나를 좇으라는 명령은 오늘날 나에게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까요?

  3. 나의 봉사의 주요 동기는 무엇인가?  비록 이차적인 동기로써 보상을 기대한다고 할지라도, 봉사를 위한 나의 주요 동기는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   

구주께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도록 맡기신 사업을 우리와 나누시기를 제의하신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재산을 사용하여 세상에 있는 그의 사업을 발전시킬 것을 제의하신다. 이런 방법으로만이 구세주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법관의 재산은 그가 충실한 청지기임을 입증할 수 있도록 그에게 위탁되었던 바 그는 이 소유물을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축복이 되도록 분배해야 할 것이었다(소망 521).

18.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그는 보통 “젊은 부자 관원”이라 불리는데, 이 이름은 공관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종합해서 지은 것이다. 마태는 “청년”이라고 했으며(19:20), 누가는 “큰 부자”, “관원”(눅 18:18, 23)이라 불렀다. 그는 스스로 양심적이고,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다. “관원”으로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었으며, “유대에서 존경받는 의회”의 일원이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518, 520,). 그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산헤드린 회원이었는지, 예루살렘 산헤드린 본부의 일원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젊은 부자 관원은 예수가 도시를 막 떠나려고 할 때 다가와서 말을 건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젊은이가 “달려”왔다는 것은 청년의 열정을 나타내며, 그가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그의 신실함을 보여 준다. 그의 태도는 얼마전에 예수를 “시험”하러 왔던 바리새인의 태도와 극명하게 대조되었다(참조 19:3). 
이 이야기와 제자들에게 준 교훈(23~30절)은 첫째로, 하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 요구되는 자기희생의 중요성과 둘째로, 돈을 사랑하는 것의 위험함을 가르쳐 준다.

무엇을 하여야. 이 질문은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를 “영생”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여권으로 생각하는 바리새인의 전형적인 개념을 보여 주고 있다(참조 17절 주석). 젊은 부자 관원은 꼼꼼하게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요구들을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준행하였으며(실물교훈, 391), 틀림없이 랍비가 요구하는 모든 것들을 준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삶 속에 여전히 부족함이 있음을 의식했다. 그는 예수를 극진히 존경했고, 제자가 되려고 진지하게 생각했다(시대의 소망, 518). 이전에 “어떤 율법사”가 던졌던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눅 10:25 주석을 참조하라.

19.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분명히 그 젊은이가 예수에게 말한 방법은 아주 특별하였다(참조 요 3:2). 랍비 문헌에는, 랍비들을 “선하다”고 말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미쉬나에는 하나님은 “선하시며 선을 베푸시는 분”으로 언급되어 있다. 공적으로 신뢰를 받는 그 청년의 인생과 지위(참조 19:16 주석)는 그가 아무런 생각 없이 무심코 예수를 “선한 선생”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가 그렇게 부른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예수는 그러한 이유에 대한 공적인 진술을 그로부터 이끌어 내기를 원했다.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는 예수의 설명은 그 청년으로 하여금 그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분명히 깨닫도록 돕기 위함이었다. 예수는 청년의 진실함과 명민함을 알았으며, 그것에 대한 더 명확한 진술을 이끌어 냄으로 그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기를 원하였다.

20. 계명을. 헬라어 엔톨라이(entolai). “교훈”, “지시”, “책임” 혹은 “명령”을 의미한다. 엔톨라이는 율법을 뜻하는 헬라어 노모스(nomos)에 의해 사람에게 부과된 세부적이며 개인적인 요구 혹은 명령을 의미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품성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며, 그분의 성품은 “사랑”이라는 한 단어에 요약되어 있다(요일 4:7~12). 우리가 그분의 품성 곧 “사랑”을 나타내려 한다면,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며 우리의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묻는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산상 설교(참조 5:17~48)에서 설명하고 강조한 십계명(참조 출 20:3~17) 가운데서 그 대답을 주신다. 모세가 기록한 구약의 모든 시민법과 신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은 십계명에 제시된 신성한 요구들을 해명하여 일상 생애의 실제적인 문제들에 적용한다. 청년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공언했으나, 예수가 말씀한 대로 그 사랑의 진정한 증거는 그가 이웃들을 대하는 방법에서 나타나야 한다(참조 요일 4:20). 예수는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라”(요 14:15)고 말씀했다.
비록 청년은 아직도 깨닫지 못했으나, 이러한 행위에 대한 명령들은 그의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가리켰다. 그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지켰다”고 생각했다. 그는 율법의 자구(字句)는 그대로 준수했으나 그 정신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그 원칙들과 조화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예수는 율법의 원칙들은 삶의 실제적 관계 가운데서 철저하게 적용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그 청년이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고자 하였다.

21. 다 지키었나이다. 분명히 이 청년은 그 자신과 완전함 사이는 불과 한걸음 차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가 열심히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키기는 했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음을 느꼈다. 그는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의 삶은 순결하고 정직하고 진실하였다. 그러나 이웃을 향한 그의 태도는 본질적으로 소극적이었다. 그는 이웃의 물건을 훔치지 않았으며,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거나 그들의 아내나 소유를 탐하지도 않았다. 십계명의 문장들이 부정적인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정신은 긍정적인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의 이웃들에 대한 미움이나 질투를 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복음은 마치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들을 돕고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이 청년의 마음속에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결여되어 있었으며(참조 시대의 소망, 519), 이러한 사랑 없이 그가 “모든 것”을 준수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22. 한가지 부족한 것. 예수는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란 질문을 통하여 그 청년이 말하려는 진정한 의도를 헤아렸다. 완전[“온전”]은 그 청년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온전함이란 행함으로(참조 갈 2:21; 히 7:11) 성취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만약 그 청년이 온전함을 성취하기를 원한다면 어떤 공로를 행함으로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지 말아야만 한다. 그는 마음과 삶이 완전히 변화되는 경험을 해야만 한다. 그의 정신이 완전히 변하고 목적이 바뀌어야만 한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그의 품성 가운데 한 가지 심각한 결점, 곧 이기심이 남아 있었다. 그것만 없었더라면 그의 품성은 매력적인 것이 되었을 것이다. 영혼을 시들게 하는 이기주의의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 젊은 부자 관원은 온전을 향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 이기주의라는 병은 사람마다 다르며, 따라서 그 처방약도 마찬가지로 각각 다르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주를 따르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 주는 그를 따르는 길에 배와 그물이 방해거리가 된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팔도록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부름을 받았을 때 그를 따르기 위해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렸다”(참조 눅 5:11 주석).
그리스도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그에게 합당치 아니하다(참조 10:37, 38 주석). 제자 됨의 좁은 길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세상의 의무들조차도 둘째 자리에 놓아야 한다(참조 눅 9:61, 62 주석).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참조 빌 3:7~10)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경험을 했다. 하늘의 보화를 소유하기 위해서 혹은 극히 값진 진주를 얻기 위해서(참조 13:44~46 주석) 사람들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그 젊은 부자 관원이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이것이 그의 십자가였으나, 그는 그것을 지기를 거절했다.

하늘에서 보화가. 참조 6:19~21 주석. 예수는 그 청년으로 하여금 세상 것과 하늘의 보화 사이의 선택 앞에 서게 하였다. 그러나 그 청년은 양자를 모두 원했다. 그는 모두를 가질 수 없음을 발견하고 “근심하여 돌아”(19:22)갔다. 하나님과 물질(참조 6:24 주석)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것은 그에게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발견이었다.

23. 큰 부자인 고로. 그가 가진 재물은 그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우상이었으며, 그는 이 재물의 성전에 온 마음의 경배와 헌신을 쏟아 붓기로 선택했다. 예수가 가진 것을 모두 팔라고 제안한 것은 그가 섬기는 재물 신(神)의 손아귀에서 그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야말로 하늘을 얻을 수 있는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520). 그는 많은 재물을 소유했으나, 그것들을 올바르게 다스릴 하늘의 지혜가 없다면 그것은 축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저주가 될 것이다. 결국에 그는 가진 것마저도 잃게 될 것이다(참조 25:28~30 주석).

근심하하더라. 문자적으로 “슬퍼하며” 혹은 “애통하며.” 주님을 따르는 데 희생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크게 실망했다. 그가 예수에게 단숨에 달려왔던 기쁨은 침울함과 슬픔으로 변했다(참조 16절 주석). 그 청년이 찾으러 와서 치러야 했던 “영생”(16절)을 위한 대가는 그가 기꺼이 지불하려는 것보다 훨씬 값비싼 것이었다.

24. 재물이 있는 자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은 부유함 때문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태도 때문이다(참조 눅 12:15, 21 주석). 아브라함에게는 “육축과 은금이 풍부했”으나(창 13:2) 그는 “하나님의 친구”였다(약 2:23). 그 청년에게 예수가 제시한 “생명에 들어”(19:17)가는 “문”은 너무나도 “좁”았으며, 앞으로 걸어 가야 할 그 “길”도 “협착”하였다(참조 7:13, 14 주석). 여기에서 제자들은 마음이 물질에 고정되어 있는 자들이 “하늘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힘든지에 대한 실례를 목격했다. 사단이 얼마나 많은 정직한 자들을 재물의 올가미로 이 땅에 성공적으로 묶어 놓고 있는지 알 수 없다.

25. 약대. 예수는 26절에서도 분명히 말하는 바와 같이 인간의 불가능성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진리는 사람들이나 심지어는 제자들이 믿었던 것과 정확하게 상반되는 것이었다. 바리새인들은 물질적 부(富)를 신의 은총의 증거라고 생각하고 또한 그렇게 가르쳤다. 예수가 이번에는 특별히 돈을 사랑함으로 정복당한 유다를 마음에 두고 말했다. 유다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그 젊은 부자 관원의 문제와 일치했다.

바늘귀. “바늘귀”가, 성의 큰 문이 닫힐 때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큰 성문 틈을 잘라 만든 협소한 통로를 가리킨다고 하는 설명은 예수 이후 여러 세기가 지나서야 생겼다. 그러므로 이러한 설명은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좋은 것처럼 보이나 타당한 근거가 없다. 예수는 인간의 불가능(26절)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예수가 불가능하다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을 가능하게 하려는 설명을 고안해 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부자가…것보다. 참조 눅 12:15, 21 주석. 다행스럽게도 마태는 보통 부자들과는 달리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재물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다른 부자 세리 삭개오도 그의 애정을 재물로부터 예수께로 옮겼다.

26.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하늘 왕국의 속성에 대하여 그리고 재물을 신의 은총의 표로 여기는 그릇된 개념을 가진 제자들이 예수의 이런 단호한 선언 앞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러한 명예와 영향력과 부가 신의 은총의 표징이 아니라면, 이러한 것도 없는 사람은 하늘에 들어가기가 더 불가능할 것이라고 제자들은 생각했다.

27. 할 수 없는 것을. “사람으로는” 불가능하나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하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마음속에 있는 재물에 대한 애정의 속박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수단이 그에게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누구든지 자신의 노력을 근거로 구원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만이 재물을 사랑하는 강한 애착으로부터 부자들을 구원할 수 있으며, “얽매이기 쉬운” 특정한 죄들에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참조 히 12:1).
즉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참조 빌 4:13). 오직 인간의 생애 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만이 하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 요구되는 품성의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다.

28.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베드로가 과장되게 말한 것이 아니다(참조 눅 5:11 주석). 제자들은 젊은 부자 관원 앞에 놓였던(참조 19:21 주석) 그러한 요구를 기본적으로 이행했다. 제자들은 그 청년이 하기를 원치 않았던 것들을 행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가 말한 그 온전함을 향하여 잘 나아가고 있었던 것인가? 그들은 과연 “생명에 들어”가기 위해(17절) 적합했는가?

29. 집이나.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집과 가족을 버렸다(참조 5:11 주석). 이것은 그들의 가족을 궁핍한 상태로 방치해 두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를 첫 번째 목표로 삼았음을 뜻한다. 바로 전에 예수는 더 강한 어조로 제자에게 요구되는 이 조건을 말씀했다(참조 눅 14:26 주석).

30. 여러 배를. 욥 42:10; 눅 18:30과 비교하라. 예수는 여기에서 분명히 비유적으로 말한다. 이 일이 있기 약 1년 반 전에 예수는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그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말했다(참조 12:46~50).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받는 “백 배”(「제임스왕역」에는 백 배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란, 그리스도인 교제의 기쁨과 하나님을 섬김으로 오는 더 진실하고도 깊은 만족에 있다. 바울은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 6:10)에 대해서 말한다.

영생을. 참조 요 3:16; 6:27 주석. 사람이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보상으로 받게 될 것이다(고후 4:17). 마찬가지로, 예수도 구원의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했다(빌 2:6~8).

 
 
 
 
 

항상 기도해야 하는 이유

 

누가복음 18:1-8
[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기도는 어떤 문제에 대한 우리의 뜻을 받아들이도록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그분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는 구하기도 전에 우리의 필요를 알고, 더욱이 우리에게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도 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우리 자신의 가장 큰 필요가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자주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고 오히려 해가 되는 것들을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우리의 가장 큰 필요를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참조 실물교훈, 145). 기도는 우리의 의지와 삶을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게 할 것이다(참조 실물교훈, 143). 기도는 우리의 욕망을 훈련하기 위해 하나님이 정한 방법이다. 기도의 진정한 목적은 하나님 안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며, 이로써 하나님이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빌 2:13)”(성경주석, 눅 11:9)

 

 

18장의 불의한 재판관은 누구를 나타내는가?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는 세상 형편이나 권력을 나타내는가? 하나님을 타나내는가?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과 달리 어떻게 행하시는가?(눅 18:4, 8)

본문연구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준 기도에 관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눅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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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자들은 예수가 기도할 때 마치 친구가 친구에게 하듯 하늘 아버지와 친밀하게 교통하는 것을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의 기도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기도와 달랐고, 사실 그들이 들어왔던 어떤 기도와도 달랐다. 틀에 박힌 말들로 하나님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비인격적인 분처럼 생각하고 드린 형식적인 기도에는 기도의 특징이 되어야 할 진실성과 생명력이 결핍되어 있다. 제자들은 예수가 기도한 것처럼 기도할 수만 있다면, 제자들로서 그들 자신의 능력이 크게 증대될 것이라고 생각했다.”(성경주석, 눅 11:1)

  2. 이 비유는 기도의 끈질김이 필요함을 어떻게 가르치는가? (눅 18:1,5,7,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를 괴롭게” (5절) 한다는 표현은 헬라어로 “수치를 준다”는 뜻이다. 재판관은 과부가 성가시게 하는 것이 화가 나고, 자기의 명성에 먹칠할까 두려워하였다. 한 가지 문제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성품이다. 의로운 자와 자비로운 하나님, 불의한 재판관 사이에는 큰 차이가 나타나 보인다. 만일, 불의한 재판관이 끈질긴 간구에 녹았다면, 분명히 의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은 자녀들의 필요에 훨씬 더 잘 응답하실 것이다. 그들이 그분의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보호 없이 살지 않는다. 그들은 종말에 옹호를 받을 것이다(단 7:21, 22).    

  3.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는 특별히 어느 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권고라 할수 있습니까? (눅 17:22~3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기에서 열심히 기도하라는 권고는 재림 전에 있을 위기의 때에 관한 논란(17:22, 37)이 있은 직후에 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인데, 특히 그 위기는 택한 자라도 방황하게 만들 수 있다는 관점에서 말한 것이었다.”(성경주석, 눅 18:1)

 

 

토의사항

  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 끊임없는 기도에도 불구하고 문제해결의 기미가 도무지 보이지 않을 때 여러분은 그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 나가시겠습니까?

  3. 개인적으로 기도의 가장 큰 유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충성된 소수의 열렬한 기도는 허사로 돌아가지 않는다. 주께서 보수자로서 나타나실 때에, 믿음을 순전히 지키고 세상에 물들지 않게 자신을 지킨 사람들의 보호자로서 임하실 것이다”(교회증언 5권, 210).


1. 항상 기도하고. 특히 재림과 그 전에 있을 시험의 때를 고려해 볼 때 그러하다. 기도는 의무 이상의 것으로서 필수적이다. 예수는 여기에서, 기도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늘의 대리자들과 협력하고자 실제적인 노력을 경주하는 일을 배제하거나, 개인적인 책임을 소홀히 하면서까지 기도에 몰두하는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낙망치 말아야의 주석을 참조하라). 예수가 의미하는 내용은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응답이 지연될 때에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참조 7, 8). “항상기도한다는 말은 매일, 매 시간 하나님과 끊임없는 접촉 가운데 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수의 기도생활에 관한 토론은 막 1:35; 3:13 주석을 참조하라. 이외에 예수가 제자들에게 준 기도에 관한 교훈은 11:1~9 주석을 참조하라. 또한 마 9:38에 언급된 그의 교훈과 비교해 보라.

 

낙망치 말아야. 즉 그들은 기도하기에 지치거나, 기도하려는 마음을 잃지 말도록 권고받았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교육을 받았다(참조 단 6:10 주석). 그중 두 번은 모든 이스라엘을 위해 아침과 저녁 제사가 드려지고 휘장 앞에서 향이 드려질 때(참조 1:9, 10), 곧 정규적인 조석 기도 시간이었다. 어떤 랍비들은 심지어 기도를 위해 정해진 시간 외에는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기까지 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 비유에서 졸라대는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을 지치게 했듯이,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번거롭게 하고 지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비유로. 이 비유는 17:20~37에 기록된 교훈을 말할 때에 함께 말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참조 20절 주석; 실물교훈 164, 165,). 이때는 아마도 AD 313월경, 나사로를 살린 지 오래 지나지 않은(참조 11, 20절 주석), 마지막 유월절 수 주일 전쯤이었을 것이다. 장소는 아마도 페래아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앞에 나오는 어떤 교훈들은 직접적으로 바리새인들에게 말한 것이었으며(참조 20절 주석), 따라서 이때에도 여전히 그들은 참석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을 때, 바리새인들이 언제 그 나라가 나타날 것인가를 질문함으로써(17:20) 예수의 말을 중단시켰을 때, 그분은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었다(17:1; 참조 16:1). 아마도 이제 예수는 다시금 시선을 제자들에게 돌렸을 것이다. 사실상,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구체적으로 답변한(21) 후에 예수는 이미 주의를 상당 부분 제자들에게로 돌렸다.

여기에서 열심히 기도하라는 권고는 재림 전에 있을 위기의 때에 관한 논란(17:22, 37)이 있은 직후에 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인데, 특히 그 위기는 택한 자라도 방황하게 만들 수 있다는 관점에서 말한 것이었다. 21:36에 나와 있는 비슷한 권고 역시 마찬가지이다(참조 막 13:33 주석).

 

[이런 목적을 위하여]. (제임스왕역에는 이 구절이 나타나 있음역자 주). 이 비유는 그들이 당면해야 할 기만과, 그들이 받아야 할 박해를 전망해 볼 때 특히 말세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경험에 적용된다(실물교훈, 164).

 

2. 어떤 도시에한 재판관이. 문자적으로는 모 도시에 사는 모 재판관.” 예수는 이런 종류의 예화를 사용할 때 신중을 기했다. 그는 자기의 말을 듣는 자들이 이 비유를 어떤 특정한 재판관에게 적용시킬 수 없도록 확실히 했다. 예수의 원수들은 그가 정부를 헐뜯고 있다는 비난을 하기 위한 기회들을 찾고자 애쓰고 있었다(참조 마 22:34~40 주석).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분명히 이 재판관에게 자기 자신은 곧 법이었다. 그는 하나님이나 동료 인간들에 대한 어떠한 사랑도, 율법의 두 비문에 대한 존경심도 나타내지 않았다(참조 마 22:34~40 주석).

 

3. 한 과부. 고대 동방 사회에서 과부는 가장 무력한 사람이었는데, 특히 그녀의 권리를 옹호해 줄 아들이 없을 경우 그러했다. 분명히 이 과부에게는 자신을 보호해 줄 아들이 하나도 없었다. 더욱이 그 냉담한 재판관을 매수할 만한 것도 전혀 없었으며, 법에 호소할 비용조차 댈 수 없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과부의 재판장으로 묘사한다(참조 시 68:5). 야고보는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의 표는,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 보는 것이라고 제시한다(1:27).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예수가 선고한 화() 중의 하나는, 그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기 때문에 내린 것이었다(참조 마 23:14; 22:9 주석).

 

그에게 가서. 헬라어에 의하면, “그녀가 오기를 계속하매.”

 

원수. 헬라어 안티디코스(antidikos). 이 말은 흔히 소송에서 상대방을 가리키는 법적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대개는 피고를 가리켰으나 어떤 때는 원고를 가리켰다(참조 마 5:25 주석). 사단은 그리스도인의 안티디코스로 불린다(벧전 5:8; 참조 슥 3:1~4). 안티디코스는 70인역의 삼상 2:10; 8:1에도 나타난다.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혹은 내게 공의를 베푸소서”(참조 실물교훈, 166). 과부에게는 남편이 남긴 재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그것을 남에게 저당잡혔으나 그들은 법이 조치하는 바에 따라 규정된 기간 내에 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참조 레 25:23~25 주석). 분명히 그 과부에게는 권리를 보살펴 줄 만한 사람이 없어서 전적으로 재판관의 정의감과 자비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는 정의롭거나 자비롭지 않았다. 그는 진정 하나님과 대조되는 사람이었으며, 사단의 성품을 반사하는 자였다.

 

4. 그가듣지 아니하다가. 헬라어에 따르면, “그는 계속 거절했다.” 그는 그렇게 하기를 고집했다.

 

후에생각하되. 그녀의 집요함은 재판관을 지치게 만들었다.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과부가 이용할 수 있는 무기는 오로지 집요하게 졸라대는 것이었다. 그녀의 극심한 궁핍은 재판관의 정의감이나 자비심을 자극하지 못했지만(참조 3절 주석), 그녀의 집요함은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데 효과적이었다. 재판관은 즉시로, 또한 별로 힘 들이지 않고 재판을 명할 수 있었지만, 그 일을 처리하지 않고는 못배길 때까지는 법을 시행하지 않았다.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참조 3절 주석. 정의감이나 과부의 무력함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성가신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그는 법을 존중하지 않았고, 고통이나 압제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관심했다.

 

나를 괴롭게 하리라. 문자적으로는 내 눈 밑을 치다혹은 때려서 상처를 입히다.” 그러므로 의미상으로는, “나를 때려 눕히다또는 나를 녹초가 되게 하다는 말이 되어, “내게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을 준다는 뜻이 된다. 여기서는 상징적으로 심히 괴롭게 한다는 의미로 재판관이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

 

6. 불의한. 이 용어는 예수가 부정직한 청지기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한 것처럼, 여기서는 불의한재판관에 대한 예수의 소견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참조 16:8 주석).

 

7. 밤낮 부르짖는. 즉 지속적으로 또는 끈질기게(참조 1절 주석). 요한이 본 제단 아래있는 영혼들의 공의를 위한 부르짖음과 비교하라(6:9, 10).

 

아니하시겠느냐. 헬라어로 이런 질문에는 긍정적인 대답이 나와야 한다(참조 6:39 주석). 이 비유의 교훈은 불의한 청지기와 공의롭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성품 사이의 현격한 대조에 기초한다. 재판관이 이기적인 이유 때문에 결국에는 과부의 요청을 들어줄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더 기꺼이 응답해 주실 것인가! 이와 유사한 대조에 대해서는 마 15:26, 27 주석을 참조하라.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호소하여 좋은 결과를 가져 왔다면, 의로운 하나님에게 그러한 미덕을 나타낸다면 간과되거나 보상받지 못한 채 지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하나님은 항상 실제적으로는 속히역사하고 계시지만, 때때로 그의 택한 자에게 응답을 지체하시는 듯이 보일 수도 있다(참조 합 1:2). 그분은 택하신 자를 위한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룰 군대(forces)를 가동시키는바, 이 군대는 그 결과가 분명하게 나타나기 오래 전에 가동될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은 때때로 당신의 택한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는 일을 지체할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에게 회개할 시간과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박해받는 자들뿐만 아니라 박해하는 자들도 사랑하시며, 그분의 약속은더딘 것이 아니아무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신다(벧후 3:9). 더욱이 성품은 시련을 통하여 온전케 되며, 종종 하나님은 성품 발달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기 위하여 우리의 간구에 응답하기를 지체할 수도 있다(참조 시대의 소망, 200; 실물교훈 175, 177,). 또한 지체됨은 우리의 필요에 대한 절실한 마음을 강화시키기에 유익한데, 이러한 절실한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할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참조 실물교훈, 152). 부당하게 고통받는 택하신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와 그런 여건들 속에서 그들이 취해야 할 태도에 관하여는 벧전 2:20~24을 참조하라.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말은 여기에 언급된 결론을 강조한다.

 

올 때에. 이것은, 이보다 약 6개월 전에 예수가 이미 간략하게 암시했던 사건인 재림에 관하여 처음으로 직접적인 언급을 한 내용 중 일부이다(참조 마 16:27). 이보다 약 1년 반 전에 말한 가라지의 비유는, “인자가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하기 위해 천사들을 보내는 일에 대하여는 언급하지만(참조 마 24:31 주석), 이 땅으로 자기가 다시 올 것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참조 마 13:40~43; 17:22~30).

어떤 비평적인 주석가들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이 말과, 그 앞에 나오는 비유 사이의 연관성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가 우연히 여기에 삽입한 이 말은 예수가 별도로 한 말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관점을 가진 자들은 예수가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실 때는 곧 인자가 올 때”(7, 8)라는, 그의 오심과 관련된 다른 성경절들 가운데 분명하게 기록된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참조 마 16:27; 22:12). 예수가 재판관으로 앉을 때는 바로 그때이다(25:34~36; 2:16; 딤후 4:1, 8; 벧전 4:5; 19:11).

 

믿음을 보겠느냐. 문자적으로는 그가 믿음을 찾을 것인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 상황들은, 악이 승리하고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이 고통을 당하고 원수들 앞에서 넘어지도록 내버려두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참조 각 시대의 대쟁투, 630). 이 비유를 말한 지 몇 주일 후에, 예수는 재림의 징조에 대하여 말하면서, 제자들은 저희를 극도로 시험할(22) “큰 환난을 겪어야만 한다고 가르쳤다(24:2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택하신 자들은 끝까지 견디구원을 얻을 것이다(13).

열 명의 문둥병자

 

누가복음 17:11-17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구주께서 친히 사마리아를 방문하신 일과 후에 선한 사마리아인을 칭찬하신 일 그리고 열 사람의 병 고침을 받은 자 중에서 유독 감사에 넘치는 사마리아의 문둥병자만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와 감사를 드린 일 등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아주 의미 깊은 일이었다. 이 교훈은 제자들의 마음 깊이 스며들었다”(소망, 488)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죽어가던 이들이었다. 과거에는 천형병(天刑病)으로 불리어진 불치의 병을 앓던 이들이 희망을 갖게 된 것은 예수님을 만난 일이었다. 

 

본문연구

  1. 예루살렘도 아니고 사마리아도 아닌 곳(11절), 열 명이나 되는 문둥병자들이 모여 있는 한 촌(12절)은 어떤 곳일까? 문둥병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가(12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문둥병: 오늘날 나병 혹은 한센병이라고 한다. 레 13,14장에 의하면 일반적인 문둥병, 문둥병으로 분류되는 피부병, 전염이 심한 악성 문둥병 모두를 포함한다. 성경에서는 문둥병의 치료를 “깨끗함을 받”(14절)는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문둥병의 증상이 외관상으로 피부나 몸에 보기 흉한 상태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cf. 나병촌에 들어가신 예수님을 본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도, 사마리아로부터도 격리 되었다. 질병의 고통과 더불어 사회적 외로움과 소망없는 인생의 날들을 지내고 있었다.

  2. 문둥병자들의 요청에 대하여 예수님은 어떠한 답변을 하셨는가? 
    13-14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레 13:9에는 문둥병자의 진찰과 확인은 제사장에게 보이는 것으로 되어있다.
        cf. 예수님의 지시에는 믿음이 요구되었다. 제사장에게 보이므로 문둥병이 확증될 수도있고, 깨끗해졌다는 확인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cf. 누가는 특별한 표현들을 사용하므로 의미있는 극적인 상황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들어가시니”, “멀리 서서”(12절), “가다가”(13절)
      
  3. 깨끗함(치료)을 받은 자와 구원을 받은 자는 각각 누구인가? 어떤 차이가 있는가? 
    14, 17, 19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토의사항

  1. 문둥병과 문둥병자를 각각 죄와 죄인에 비유한다면, 본문의 사건을 통해 죄인의 구원이 어떠한 과정에 의해 이루어지는지 설명해보자.

  2. 본문의 사건은 구원의 진리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절)고 하신 예수님의 선언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자.

  3. 본문의 사건에서 보여진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이야기 해보자.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문둥병자들의 마을에 들어가셨다.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전염성으로 인해 가족들과도 가까이 할 수 없는 그들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와 사랑을 느끼게 하였다. 질병의 고통과 외로움, 죽음의 운명뿐이었던 그들에게 희망의 기회가 나타난 것이었다. 죄인들을 찾아오신 그리스도. 모든 죄인들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신 그리스도. 그러나, 열 명 가운데 오직 믿음으로 보인 돌아온 한 명 만이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은 구원의 진리를 분명하게 깨닫게 해 준다.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문둥병자 열 명, 17:11~19. 참조 막 1:40~45 주석. 9, 137; 비유에 관하여는 113~ 119]. 여기 언급된 여행은 순회의 성격을 띤 것으로 보이며, 처음에는 사마리아를 지나, 다음에는 갈릴리 접경으로, 그 다음에는 아마도 요단강을 건너 페래아를 지나,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들의 주장대로 이 여행은 요 11:54에 언급된 것과 동일시 될 수 있는데, 예수와 제자들은 나사로를 다시 살린 후(53)에 뒤따른 공공연한 적대감을 피하여 베다니와 예루살렘 지경 북쪽으로 물러갔다. 이 북쪽으로 가는 여행은 그들을 갈릴리 접경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떠나는 것이었으나, 결국 그 성읍과 십자가를 향해 돌아오게 될 마지막 순회여행을 하고 있었다. 또한 이 여행의 노정에 아마도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에 잠시 머물면서 시간을 할애하여 그곳 사람들을 위해 봉사했을 것이다. 이것은 페래아에서 보낸 짧은 기간 후에 있었고, 예수는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여리고와 베다니를 통과하였다.

 

사이로 지나가시다. 디아 메수(dia mesou), “~의 중간을 지나서보다는 디아 메손(dia meson), “~사이[에 놓인 것]를 지나서독법을 지지하는 본문상의 증거를 인용할 수 있다. 누가는 여기서 예수가 이미 몇 주일 또는 수 개월 전에 출발하여 지나온(참조 마 19:1, 2 주석) 사마리아와 갈릴리를 통과한 여행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두 지역의 접경을 따라 여행한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12. 열 명. 문둥병자들은 마을 안에 있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가 마을로 들어가려고 할 때에 접근했다. 그들은 마을에서 상당히 떨어진 들판에 대충 지은 오두막집에서 함께 살았을지도 모른다. 문둥병의 속성이나 병자들에 대한 규제사항, 병자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 그 병에서 치료받은 자들에게 적용되는 의식적인 대책에 대하여는 예수가 처음으로 문둥병자 한 사람을 고친 사례를 기록한 막 1:40~45 주석을 참조하라.

유대인들은 통상적으로 문둥병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겼다(소경으로 태어나는 원인도 그렇다고 여겼다. 참조 요 9:2). 그들은 고대 이교사상을 흡수했다(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 받았다라는 의미로 보는 문둥병 같은 어떤 증상들을 열거해 놓은 구바벨론어로 기록된 Archiv fu..r Orientforshung에 나와 있는 징조 문서를 참조하라). 그러므로 그들은 고통을 경감시키거나 치료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 격리 수용외에는 문둥병을 위한 치료법을 알지 못했다(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격리 수용이 표준적인 절차로 도처에서 계속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새로운 약품이 나옴으로 외래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반드시 격리 수용을 할 필요는 없어졌다).

 

 

멀리 서서. 율법이 요구한 대로. 그들은 대로에서라도 다른 사람에게 접근하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이 문둥병자들은 막 1:40~45에 언급된 법보다는 격리법을 지키는 데 더 주의를 기울였다.

 

13. 선생님이여. 헬라어 에피스타테스(epistate-s,).

문자적으로 “[다른 사람의] 위에 서 있는 사람.” 따라서 감독관혹은 관리자를 뜻한다. 누가는 예수를 가리키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한 유일한 공관복음서 기자이다. 누가와 그 밖의 기자들이 자주 사용한 더 일반적인 단어는 디다스칼로스(didaskalos)인데 문자적 의미는 선생이다(참조 요 1:32 주석). 사실 베드로는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그들이 고용한 사람들이 경영하는 고기잡이 사업의 감독즉 에피스타테스였다(참조 막 3:16 주석).

 

 

14. 너희 몸을 보이라. 모세의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이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적어도 구약에서 다른 피부병들이 문둥병(leprosy)이란 말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검사자들이 치료 가능성 있는 종류의 질병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질병에서 회복된 자들은 재검과 정결의식, 아마도 확인증을 받은 후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참조 레 14).

제사장에게서 그런 증명서를 받음으로써, 문둥병자는 확실한 기적이 일어났다는 공적인 인정을 얻게 된다(참조 시대의 소망, 265). 그 사람 자신은 일어난 일에 대한 산 증인이 된다. 많은 제사장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이런 저런 증거들에 의하여 설득되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266). 부활 후에 많은 제사장들이 그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였다(참조 행 6:7).

문둥병자에게 법의 요구를 따르라고 한 예수의 가르침은 그가 모세의 법에 반대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그는 친히 율법 아래”(참조 마 23:2, 3 주석; 4:4)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서기관들이 모세의 법 주위에 세운 전통하나님이 모세에게 준 문자와 정신을 다 무효케 만드는 전통에는 강렬한 반대를 표현하였다(참조 마 15:3; 7:8, 9; 시대의 소망, 395~398). 문둥병자를 제사장들에게 보냄으로써, 그리스도는 전에 친히 모세에게 주었던 자신의 율법에 대한 인정을 그들과 백성들에게 보여 주고자 목적하신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함으로 그는 율법의 공식적 수호자들인 제사장들이 한 거짓 비난을 반증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그들 중에 마음이 정직한 자들은 예수가 모세의 법에 불충성한다는 비난이 거짓됨을 알고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는 데로 인도될 것이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265).

 

저희가 가다가. 치료는 믿음의 행위에 따른 조건부적인 것이었다. 치료는 그들이 예수 곁에 머무는 한 받을 수 없었고, 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나아갈 때에만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이 예수를 떠날 때까지는 문둥병이 낫지 않았다. 그들이 깨끗하다는 선언을 받게 될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기 전에 치료의 가시적인 증거를 기다렸다면 그들은 결코 고침을 받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실제로 고침을 받기 전에, 이미 고침을 받은 것처럼 믿음으로 행동하는 일이 그들에겐 필수적이었다. 믿음 가운데 주님께로 오지 않는 자들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기대할 필요가 없다(1:7; 참조 히 11:6). 순종 없이는 믿음도 없는바, “행함이 없는 믿음은죽은 것이기 때문이다(참조 약 2:17~20).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요구 사항대로 행동하지만, 믿음 없이는 순종이 불가능하고 무익하다. 그 둘은 상대 없이 홀로 존재할 수 없다(참조 약 2:17).

 

15. 그중에 하나가. 한 사람, 오직 한 사람이었다(참조 17).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를 혐오스러운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었음을 깨달았을 때, “그중에 하나가먼저 해야 할 일, 곧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 사마리아인은 복음서 기록 가운데서 은혜에 감사하는 최고의 모범 인물로 나타난다.

 

16. 발 아래 엎드리어.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간구하거나 감사하는 전형적인 동방인의 자세이다(참조 에 3:2 주석).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다른 아홉 명은 저희가 아브라함의 자손들로서 고침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자기에게 갑자기, 예기치 않게 주어진 치료의 축복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하늘이 그에게 내려준 은사에 대하여 감사했다. 받은 축복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잊어버리는 자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하여 진정으로 감사하지 않는 자들은 그분을 완전히 잊어버릴 중대한 위험 가운데 있다(참조 롬 1:21, 22).

 

17.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좋은 것들에 대하여 감사하는지가 그분에게 중요하다는 증거가 여기에 있다. 그 아홉 명은 크게 감사해야만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 그들은 어떠한 감사도 표현하지 않았다.

 

용서, 믿음, 봉사

 

누가복음 17:1-10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그대의 믿음이 자라기를 바라면 그대는 믿음을 말하고,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행하여야 한다. 그대가 이같이 살아있는 믿음을 활용할 때 그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강한 남녀로 자라날 것이다(원고 1, 1889).

 

1, 2절에서 예수는 다른 사람을 죄로 이끄는 것은 죄라고 말한다. 3, 4절에서 다른 이들이 잘못하였을 때 그들을 용서하는 것은 제자들의 의무라고 지적한다. 5, 6절은 복음의 원칙들을 실천하는 데 필수적인 믿음을 다루며, 7~10절은 복음의 원리들을 설명해 주는 비유로 구성된다. 

 

 

본문연구

  1. 하나님의 목적을 거스른 자들(남을 실족케 하는)은 결국 무슨 일을 당하게 되는가? (눅 17:1, 2; 롬 6: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 구절은 용서의 구절과 병행하여 죄의 형벌을 제거하며, 보증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에게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2. 죄지은 자가 죄책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회개할 기회를 갖도록, 우리는 그를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가? (눅 17:3, 4; 마 18:2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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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제자들이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하였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셨는가? (눅 17: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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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은 의무 이상을 하게 되는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슨 동기가 합당한가? (눅 17:7~10, 12:29~3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토의사항

  1. 용서해준 경험과 용서 받은 경험을 통해 배운점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은 양이 아니라 질의 문제를 말씀하신 것이다. 양과 관계 없이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둘 중의 하나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3.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의무는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1. 예수께서이르시되. [용서, 믿음, 봉사, 17:1~10]. 다음 부분에 나오는 누가복음의 내용이 주어진 시간과 장소에 대하여는 언급된 것이 없다. 주제에 관한 한, 이전 장들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거의 없는 듯하다. 더욱이 이전에 말씀을 들었던 바리새인들(참조 16:14 주석), 17:1~19에서는 그곳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시금 이야기 속에 바리새인들이 소개되기(20) 전에 여행 기록이 나오므로(참조 17:11), 16장과 17장 사이에는 시간과 장소의 변화가 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17장의 기록을 볼 때, 예수는 이 여행에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지대를 거쳐, 결국 요단강을 건너 다시 페래아로 온 것으로 보인다(참조 17:11 주석; 9, 136).

1~10절에서 주신 교훈의 다양한 내용 사이에 분명한 연계성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누가가 서로 다른 때에 하신 말씀의 요점을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매우 그럴듯하며, 누가가 이곳에서 기록한 내용들은 여행 중에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들의 요점일 수 있다. 동시에 서로 다른 부분들 사이에 깔려 있는 연계성을 찾을 수도 있으나, 실제적으로 사상의 통일이 존재하는가의 여부에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실족. 헬라어 스칸달라(skandala). 문자적으로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경우들” “올가미를 놓다”, “함정에 빠지게 하다”, “걸려 넘어지게 하다.” 올가미를 움직이는 데 사용하는 막대기를 의미하는 스칸달론(skandalon)에서 파생함(참조 롬 11:9; 14:13; 요일 2:10; 2:14).

 

실족케 하는 것.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또는 죄짓게 하는) 어떤 것들을 의미한다(참조 5:29 주석).

 

없을 수 없으나. 즉 실족케 하는 일들이 필요하다혹은 불가피하다.” “실족케 하는 일들이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위해서는 필요치 않으나 인간이 처한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것이다(참조 시대의 소망, 438; 17:1).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즉 교훈과 모본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고 낙담시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

 

2. 이 작은 자 중 하나. 아마도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 있으므로 다른 제자들의 교만한 행동에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어떤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듯하다.

 

실족케 할진대. 헬라어 스칸달리조(skandalizo-). 문자적으로 덫을 놓다”(참조 5:29 주석). 여기서 예수는 근본적으로 형제들의 불화를 조장하는 것들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넘어지게 할 수 있는 어떠한 일도 하지 말 라고 권고한다(고전 8:9~13).

 

연자 맷돌. 헬라어 뮐로스 오니코스(mulos onikos)는 문자적으로 당나귀 맷돌인데, 이는 맷돌이 너무 커서 당나귀가 그것을 돌려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손으로 돌리는 작은 맷돌에 관해서는 24:41 주석을 참조하라.

 

3. 조심하라. 3, 4절에 대해서는 마 18:15~22 주석을 참조하라. 남을 용서해 주지 않는 것은 그들을 무분별하게 만들어 죄에 빠지도록 하는 방편이 된다. 17:1, 2은 다른 이들에게 우리가 죄를 짓는 문제와 상관되는 것이고, 3, 4절은 남이 우리에게 잘못했을 때의 우리 태도와 상관된다. 우리는 남을 실족케 하지 말아야 하며, 동시에 그들이 우리를 실족하게 할 때 자비를 나타내야 한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문맥상 예수가 언급하는 과실이 같은 종류의 것임이 분명하지만, 본문상의 증거는 이 단어들의 생략을 선호한다.

 

4. 일곱 번. 어떤 사람들은 암 1:3을 잘못 해석하여, 유대 랍비들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횟수를 세 번으로 제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께서 항상 서기관들보다 더 넓은 의미로 율법을 해석한다는 사실(참조 마 5:17, 18 주석)을 충분히 깨달은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권장하실 인내의 한계를 알기 원한다. 일곱 번은 일반적으로 완전을 나타내는 숫자이다(참조 실물교훈, 243). 그러나 사람을 일곱 번용서하고 그 이상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형식적인 용서가 될 것이다.

용서란, 하나님이나 인간 모두에게 단순한 사법적 행위 이상을 의미하며, 갈등이 있었던 곳에 평화의 회복을 의미한다(참조 롬 5:1). 또한 용서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 곧 죄를 지은 그 사람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포함된다.

 

5. 사도들. 누가가 의도적으로 열두 명을 사도들, 예수를 항상 따라다니던 사람들을 제자들”(참조 1)로 구분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5, 6절은 믿음의 능력과 관계가 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문맥상 이 요청은 눅 17:1~4에 나타난 경우가 아닌 다른 때에 주어졌을 수도 있다(참조 1절 주석). “사도들은 자기들이 어느 정도는 믿음을 가졌다고 느꼈으나, 그것으로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6. 믿음. 예수가 말하는 믿음의 소유는, 양이 아니라 질의 문제이다. 사람은 믿음을 갖든지 아니면 믿음이 없든지 둘 중 하나이다. 아주 적은 양의 믿음이라도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들을 이루기에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양이 아니라, 그 믿음의 진실성이다.

 

뽕나무. 헬라어 쉬카미노스(sukaminos). 검은 뽕나무. 어떤 사람들은 별개 뽕나무로 여기기도 하지만, 쉬카미노스는 흰 뽕나무의 이름 혹은 무화과나무(sycamore-fig tree)로 알려진 쉬코모레아(sukomorea)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쉬코모레아는 흔히 무화과나무”(sycomore, 그러나 개역한글판에는 뽕나무로 되어 있음역자 주)로 번역되었다(참조 암 7:14; 19:4 주석). 하지만 이 나무를 우리가 알고 있는 무화과나무(sycamore)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바다에 심기우라. 예수가 의도적으로 터무니없어 보이는 예증을 택했을 가능성이 있다. 분명 그분은 자신의 제자들이 이러한 마술적인 묘기를 행하기를 의도하지 않았다. 이 예증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간다는 예증과 흡사하다(참조 마 19:24 주석). 두 예증 다 문자적으로 이루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고, 따라서 예수도 제자들이 실제로 그런 시도를 해보기를 의도하지 않았다. 그의 이적들 중에도 이런 종류는 없었다.

 

7. 너희 중에. 이 짤막한 비유는 그 관계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5절에 기록된 요청에 대한 답으로써 말한 듯하다. 믿음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신들의 의무를 감당할 자질을 갖추게 한다(참조 10절 주석). 이 비유와 5절의 관계가 확실하지 않다면, 이 비유는 아마도 11절에 간략하게 언급된 여행의 어떤 시점에서 제자들에게 말한 것으로 보인다(참조 1절 주석).

 

밭을 갈거나. 아마도 그 주인의 집은 마을이나 읍내에 있었고, 그의 땅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것이다. 흔히 종들은 아침에 마을을 떠나 밭으로 일하러 가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참조 민 35:4; 2:3; 3:4; 4:1 주석).

 

. 헬라어 둘로스(doulos). “농노”(農奴) 또는 노예.”

 

. 헬라어 유쎄오스(eutheo-s). “당장혹은 즉시”(참조 막 1:10 주석). 옛날의 영어 관용 표현에서 “by and by”()즉시를 의미했으나, 지금은 정반대의 의미가 되었다. 여기에서 유쎄오스는, 동사 말하다보다는 오히려 동사 가다를 수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인이 곧 말하되가 아니라, “곧 와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8. 하지 않겠느냐. 헬라어에 따르면, 이 질문에서는 긍정적인 답변이 기대된다. 부정적인 답변이 기대되는 17:9과 비교하라.

 

9. 사례하겠느냐. 헬라어에 따르면, 이 질문에 대하여 여기서는 부정적인 답변이 기대된다. 긍정적인 답변이 기대되는 17:8과 비교하라.

 

10.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는 특별한 칭찬을 받을 자격이 없나이다.” 주인은 그들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았을 뿐이므로, 더 이상 언급할 가치가 없었다. 그는 종들에게 특별한 감사를 나타내야겠다고 느낄 만큼의 유익을 얻지 못했다. 그들은 삯을 받는 자들이었으며, 그들이 기대해야 할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가 그들에게 특별히 빚진 것은 없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할 권리가 있었고,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 우리가 그분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때에라도 그로 인해 그가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의무를 갖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참고 고통을 당한 모든 것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없”(고전 9:16)다고 말할 때 그는 진정한 봉사의 정신을 반영한다. 바울의 봉사는 주님께 대한 깊은 의무감에 의하여 자극된 것이었다. 복음을 전하면서 그는,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고 하면서 무거운 책임을 이행하고 있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누가복음 16:19-31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은 저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이 비유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부자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난한 자를 대비하여 묘사한 것이다.”(실물교훈, 260)

 

 

부자와 거지의 뒤바뀐 운명을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는 중요한 구원의 조건을 가르치셨다.

 

본문연구

  1. 비유에서 부자는 악한 사람인가? 선한 사람인가? 아니면 어떤 사람인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이 비유는 자주 비성경적인 교리 즉 천당과 지옥의 공존을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되기 도 하는데, 비유는 상세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선택하신 이유를 다음의 인용문을 통해 이해하자.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입장에 서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죽는 날로부터 부활할 때까지 의식을 갖고 있다는 교리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 속에 많이 섞여 있었다. 구주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잘 아시고 그 중요한 진리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하여 이 비유를 그들의 선입주견에 따라 구성하셨다.”(실물교훈, 263)

    cf. 부자는 거지에게 베풀었고(21절), 형제들을 걱정하였다(27-28절). 그런데 왜 고통당 하는 음부에 가게 되었을까?

  2. 죽음 이후의 운명은 노력에 의해 바뀔 수 있는가? 아니면 바뀔 수 없는가?
    26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부자의 요청에 대한 답변이자 이 비유의 결론은 무엇인가?
    29-31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모세와 선지자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24:14; 28:23)
    cf. “죽은 자가 살아나서 권하여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계22:11)

    “율법과 선지자들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매개자들이다...만일 저희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다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증인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유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실물교훈, 265)

토의사항

  1. 비유를 통하여 배울 수 있었던 운명을 결정짓는 요소는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자.

  2. 나의 삶은 어떤 점에서 부자 혹은 나사로와 유사한가? 서로 나누어 보자.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 장면이 이 부자의 만년의 생애 가운데 묘사되었다...이와같은 길로 따라가는 자들이 많이 있다. 비록 그들이 침례 교인이기는 하나 거듭나지 못했다...하나님의 음성이 죽은 자를 깨우실 때에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 있을 때에 가졌던 것과 같은 식욕과 정욕, 좋아하고 싫어하는 습성을 그대로 가지고 무덤에서 나오게 된다. 모든 기회와 편의를 제공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재창조함을 받지 못한 자들을 재창조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적을 행하지 않으신다.”(상동, 211)

운명은 눈에 보이는 선행이나 죄악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또, 아무도 비록 기적적인 방법으로 설명한다 하여도 그것이 구원을 가져다 주지도 않는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았는지, 말씀을 생애의 기준으로 삼고 살았는지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운명은 죽음 후에 돌이킬 수 없으며, 죽을 때의 모습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19. 한 부자. 그 당시에 제자들(16:1)세리와 죄인들”(15:1) 또한 많은 군중이 참석해 있었지만, 특별히 이 비유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말한 것이 분명하다.

이 비유에서 예수는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참조 16:1~12)에서 제시한 교훈을 계속하고 있는데, 그것은 현세의 기회들을 선용함이 장래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 비유는 특별히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이었으나, 9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서 돌이켜 그곳에 참석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말했다. 그들에게는 빛이 충분히 있었고, 그들은 오랫동안 율법과 선지자의 교훈을 향유했고, 요한의 봉사 이래로 첨가된 복음의 빛은 그들의 것이었다(참조 16절 주석). 그때에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현세에서의 특권과 기회들의 선용 여부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주어졌다(참조 실물교훈, 260). 첫 번째로 한 부자는 이생의 기회들을 남용하는 모든 사람을 나타내는데, 총괄적인 의미에서, 그 부자처럼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있던 유대민족을 가리킨다(참조 실물교훈, 267). 이 비유는 두 가지 장면으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이생을 나타내고(19~22), 다른 하나는 내세를 나타낸다(23~31).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는 긍정적인 관점, 곧 미래를 위하여 준비한 사람의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한다. 동일한 문제에 대하여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부정적인 관점, 즉 그러한 준비에 실패한 사람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 부자는 구원이 성품보다는 오히려 아브라함의 후손 됨에 달렸다고 생각함으로써 잘못을 범하였다. 가장 중요한 해석 원칙 가운데 하나는, 상징적인 표현과 이야기일 경우 언급된 진리에 관한 성경의 문자적 진술에 의해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비유가, 직접적인 문맥이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일반적인 대의와는 모순되는 내용을 가르친다고 해석하려는 사람들조차도 이 비유의 세목들 중 많은 부분이 상징적임을 인정한다(참조 22~26절 주석).

그러므로 이렇게 자문해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왜 예수는 비유 가운데서, 성경 다른 곳에서나 특히 그의 실제적인 진술들 가운데서 분명하게 드러낸 것처럼, 진리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 상징적인 예화를 사용해야 했을까?” 그 답은, 예수가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중 가운데 다수는그렇게 믿을 만한 구약상의 아무런 근거도 없이죽음과 부활 사이의 존재에게 의식적인 상태가 주어진다는 가르침을 믿고 있었다(참조 실물교훈, 263). 구약에 나타나지 않는 이런 그릇된 신조가 출애굽 이후의 유대인 문서에 전반적으로 침투되었고, 여러 가지 다른 전통적인 신조들처럼 예수 당시 유대교 가르침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다(참조 막 7:7~13 주석). 이 비유에서, 예수는 청중들의 마음에 심어주고자 하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아주 분명하게 가르치기 위해 대중들의 신념을 사용한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앞에 나오는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에서(16:1~12), 비록 부정직한 청지기의 행위가 그 이야기의 주요 부분을 구성하고 있을지라도, 예수는 그 행위에 대하여 칭찬이나 시인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참조 8절 주석).

 

자색. 헬라어 포르퓌라(porphura). “자색 천혹은 자주 빛 천으로 만든 옷.” 여기서는 아마도 값비싼 겉옷인 소매 없는 외투망토”(헬라어 히마티온[himation]; 참조 마 5:40 주석), 왕의 색인 자주색으로 물들인 옷을 가리키는 것 같다. 자색은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20. 나사로. 헬라어 라자로스(Lazaros).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의미의 흔한 히브리 이름인 엘라자르(’El‘azar)에서 유래함(참조 출 6:33 주석). 이름은 비유 가운데서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영적 상태에 가장 적합한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가 비유에 나오는 인물에게 이름을 붙인 유일한 기록인데, 이 경우에는 비유에 대화가 나타나기 때문에 취한 불가피한 절차였다(참조 16:23~31). 비록 몇 주일 후에 예수가 실제로 베다니의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켰을지라도(참조 요 11:1~46), 비유 속의 인물과 예수의 가장 위대한 이적의 대상이 된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대문에 누워. 부자에게는 나사로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는 기회가 계속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부자는 실제로 그 불쌍한 나사로를 학대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는 나사로가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결론지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의 태도는,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니이까”(4:9)라고 말할 때에 가인이 나타낸 태도와 흡사했다. 나사로와 그의 관계는 악행을 가한 사이가 아니라, 오히려 자비를 베풀지 않은 관계였다. 그는 자기 삶의 책임에 대하여 적극적인 태도가 아닌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는 동료 인간들을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율법의 둘째로 큰 계명의 진정한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다(참조 마 5:43; 22:39; 25:35~44 주석). 유대 민족처럼 이 부자는 적극적인 선을 행하지 않음으로써 적극적인 해를 입힌 죄를 지은 셈이었다. 하늘이 그에게 부여한 모든 혜택은 그 자신의 쾌락과 만족을 위해서만 사용되고 있었다(참조 실물교훈, 291).

 

21. 배불리려 하매. 그가 문 앞에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극심한 필요 가운데 있었고, 부자는 그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었다. 이야기 가운데는 나사로가 자기의 가난과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했다고 암시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 분명히 그는 욥처럼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모든 것을 참아냈다.

 

헌데를 핥더라. 이것이 그의 고통을 완화시켜 주었는지 아니면 더해 주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후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 만일 그렇다면 가난한 환자에게 이것은 극심한 고통이었다. 분명히 그는 이 반()야생적인 청소부 동물들이 자기 헌데를 핥지 못하도록 막을 수가 없었다(참조 마 7:6; 14:26 주석).

 

22. 천사들에게 받들려. 24:31과 비교하라. 16:25~31을 해석할 때 지침이 되는 원칙은 19절 주석을 참조하라. 이 비유의 목적은 현세의 기회들을 선용한 여부와 내세의 보상을 비교해 보기 위함임을 기억해야 한다. 운명은 죽을 때에 확정되기 때문에 내세에서 특권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현세에서 그것들을 선용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품. “낙원을 의미하는 전형적인 유대 관용어. 탈무드(K.iddushim 72a; in Soncino ed., 369)는 복받은 죽은 자의 거처를 아브라함의 무릎이라고 말한다. 다른 경우에 예수는 낙원을, “많은 사람이” “동서로부터이르러” “천국의 잔치에 아브라함과함께앉는 장소라고 말했다(참조 마 8:11; 14:15 주석).

예수가 아버지의 품에있다는 말에 대하여는, 1:18 주석을 참조하라. 만찬 때 남의 품에 기대어 쉬는 것에 대하여는 요 13:23 주석을 참조하라.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며(참조 요 8:39, 56), 실제로 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 대신에 아브라함을 바라보게 되었다(참조 눅 16:24 주석). 오늘날 때때로 베드로가 천국 문에서 기독교인들을 환영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듯이, 그들은 아브라함이 낙원에서 그의 자녀들을 환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23. 음부. 헬라어 하데스(hade-s). “무덤또는 죽음”(참조 마 11:23 주석). 하데스는 선하든 악하든 모든 사람이 부활 때까지 거하는 곳이다. 나사로도 실제로는 그곳에 있을 것이다.

 

고통. 헬라어 바사노이(basanoi). 질병(8:6)이나 바다의 풍랑에 밀려(14:24) 극심하게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그리고 괴로이노 젓는 제자들(6:48)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동사 바사니조(basanizo-)와 동계어이다. 그것은 또한 정서적인 고통(벧후 2:8)과 귀신들이 예수와 대면했을 때 두려움으로 괴로워한 것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8:29; 5:7; 8:28). 그러므로 바사노스(basanos, 바사노이의 단수형)는 심한 고통이나 불안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죽어서 고통을 당하는 장소로 가게 된다는 사상은,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9:5; 참조 시 146:4 주석)라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성경 말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예수도 친히 죽음을 잠에 비교했다(참조 요 11:11, 14). 이 비유에서, 예수가 사망 시에 악인들이 고통을 당하게 될 곳으로 데려감을 받는다고 가르쳤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그분이 다른 경우에 이 문제에 대하여 명백하게 가르친 것들이나 전반적인 성경의 가르침들과 모순된다. 죄인들이 불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곳은 게엔나 곧 지옥”(geenna, 참조 마 5:22 주석)이지 하데스(hade-s)가 아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하데스의 불꽃 가운데서 고민”(16:24)하는 것처럼 예수가 말한 것은 상징이므로 그의 말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비유들을 설명할 때 포함되어야 하는 해석의 원칙은 19절 주석을 참조하라.

 

아브라함과보고. 천국과 지옥이 서로 말할 수 있는 거리 안에 있어서 천국에 있는 자들이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도 그들의 고통을 경감시켜 줄 수 없고, 지옥에 있는 자들은 하늘에 있는 의인들의 복락을 바라본다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만일 이 비유를 실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틀림없이 그런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참조 19절 주석). 그러나 그것이 실제적인 것이라고 믿는 자들도 아브라함의 품은 단지 상징적 표현이며, 모든 성도가 실제로 그의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서둘러 부언할 것이다. 또한 그들은 여기에서 묘사된 하늘과 지옥 사이의 거리도 순전히 상징적인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 비유의 이 부분이나 저 부분이 분명히 상징적인 것이요 글자 그대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인정하는 순간, 그들은 전체적인 비유의 상징적인 성격을 인정하는 셈이다. 만일 그들이 그 비유 전체가 상징적인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떤 부분은 상징적인 것으로 보아야 하고, 다른 부분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는 그들의 결정은, 분명하게 정의된 한결같은 해석 원칙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들의 독단적인 선택의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24. 그 손가락 끝. 이 비유 가운데서 몸을 떠난 불멸의 영혼들에 관한 거짓 교리를 지지하는 내용을 찾고자 하는 자들은 오히려 여기에서 당황하게 하는 내용을 보게 된다. 몸을 떠난 영혼들도 손가락을 가지고 있다니! 나사로의 몸은 무덤에 있었으므로 그의 손가락도 무덤 속에 있었을 것이다. 육체를 떠난 한 영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손가락을 취하여 그것을 물에 담근 다음, 육체를 떠난 다른 영의 존재하지도 않는 혀에 댄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분명히, 예수는 현세와 내세 사이의 상관성에 관한 어떤 특별한 진리를 밝혀 주기 위하여 구상된 상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참조 19절 주석), 그의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의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 음부 가운데서 상징적으로 고통당하고 있던 부자에게, 고통을 조금이라도 경감시켜 주는 대책이 은혜롭게도 수용되었던가? 이제 부자는 예전에 나사로가 자기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음식을 갈구했던 것처럼 깨끗하고 시원한 물 한 방울을 바란다(참조 21절 주석). 만일 부자가 ”(23)”(24)를 가지고 있었고, 나사로도 손가락”(24)이 있었다면, 선인이나 악인이 죽을 때에 즉시 지체를 가진 실제적인 존재로서 그들의 보상을 받기 위해 간다는 가르침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비유 자체가 분명히 알려 주는 것은 그들은 죽자마자 저희의 보상을 받으러 가지 않았는데, 그들의 몸은 무덤에 있었고, 거기엔 불과 같은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참조 22절 주석).

 

25. 받았고. 그는 일생 동안 누구든지 소원할 만한 좋은 것들을 받았지만, 장래의 삶을 위한 준비는 하지 않았다. 그는 마 6:33의 원리를 반대로 적용하여먼저 이 모든 것을 구했으며, 나중에 하나님이 하늘을 더해 줄 모종의 방법을 찾게 되길 희망했다. 어리석은 부자의 경험(참조 12:16~21 주석)이나, 하늘에 보화를 쌓는 문제에 관한 예수의 교훈(참조 마 6:19~21 주석)과 비교해 보라. 부자는 얻고자 하는 보상을 모두 받았다(참조 마 6:2 주석). 하늘에 있는 계정은 그가 도덕적으로 파산 상태임을 보여 주었다. 그가 벌을 받은 것은 재물을 소유했기 때문이 아니라(참조 19절 주석), 그것을 오용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지적돼야 한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이나 동료 인간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는 대신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탕진했다(참조 마 19:21, 22; 25:25~30). 부하게 되는 것은 죄가 아닌데, 그 이유는 아브라함도 매우 부유했기 때문이다(참조 창 13:2). 이 비유 속의 부자는 단순히 그가 자기 재화를 사용한 방법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로 했다.

 

30.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부자는 자기가 아브라함보다 더 잘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아브라함의 결정에 대하여 항의한다. 분명히 그는 구약의 확신할 만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고, 그의 다섯 형제도 그럴 것이라고 의심한다. 오늘날 구약의 엄숙한 기별을 경솔하게 저버리는 자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가까이 했을지라도 그것에 의하여 유익을 받지 못했던 이 비유 속의 부자의 운명을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즉 죽은 자 가운데서 그들에게 가는 이가 있으면. 19절 주석에서 설명한 대로, 부자는 품성 형성과 동료 인간들에게 선을 행하기 위하여 현세가 제공하는 기회들을 활용하지 못한 사람들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로서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유대 나라를 가리킨다.

추가적인 증거를 요구한 점에서, 그 부자는 거듭거듭 표적을 요구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그리고 하는 일들은 진실한 동기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그의 신성을 확신시켜 주는 증거를 이루었다(참조 마 15:21; 16:1 주석). 그러나 예수가 그들에게 준 증거는 그들이 원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31. 듣지 아니하면. 참조 30절 주석.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영원한 진리의 분명한 진술에 의하여 감명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가장 큰 이적에 의해서도 더 나은 감동을 받지 못할 것이었다. 이 비유를 말한 지 몇 주일 후에 예수는 이제까지 그들이 보았던 것보다 더 큰 증거를 요구하는 유대 지도자들의 도전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나사로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를 죽음에서 부활시켰다. 그러나 바로 그 이적은 그 나라의 지도자들이 예수의 생명을 빼앗기 위해 음모를 강화하도록 이끌었다(참조 요 11:47~54 주석).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기들의 지지받을 수 없는 입장을 지키기 위하여 나사로를 없애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느꼈다(참조 요 12:9, 10; 시대의 소망, 588).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구약을 거부하는 자들은 더 큰, 심지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의 증언이라도 거부하리라고 한 예수의 말씀의 진실성을 글자 그대로 입증했다.

 

비록살아나는 자. 몇 주 후에 주님은 마치 이 비유 가운데서 부자가 요청한 내용을 당신을 헐뜯고자 하는 비평가들에게 성취시켜 보여 주려는 듯이 죽음에서 나사로를 일으켰다(참조 요 11:1 주석). 그러나 예수가 아버지 아브라함을 통해 부자에게 경고한 것처럼,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여전히 믿기를 거부했다. 실제로 그 이적은 그들로 하여금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단호하게 그를 죽일 음모를 꾸미도록 자극했다(11:47~54).

 
 

불의한 청지기

 

누가복음 16:1-13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세상 이욕에 밝은 주인은 자기를 속여 빼앗은 자의 꾀를 칭찬했다. 그러나 이 부자의 칭찬은 곧 하나님께서 하시는 칭찬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일반 대중이 잘 알고 있는 실례를 들어서 당신이 가르치고자 하시는 교훈을 설명하셨다. 그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해 줌으로써 그들 자신이 이롭게 될 수 있었다. 현세에서 하나님의 선물을 나누어 줌으로써만 그들은 영원을 위해 준비될 수 있었다.(실물, 367)

 

이 비유는 미래의 삶을 내다보는 관점에서 현재의 기회들을 이용하는 일을 다루고 있는데, 특히 현세에서 물질을 사용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본문연구

  1. 비유에 등장하는 청지기는 주인의 재물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문맥이 밝혀주듯이 이 이야기 중의 청지기는 신뢰를 받고 있었다. 그는 주인과 상의 없이도 주인을 위해 사고 팔고 계약할 법적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 “청지기”는 어떤 “청지기”들처럼 노예 우두머리가 아니라 자유인이었다. 그가 노예였다면 장차 다른 주인 밑에서 노예 생활을 할 것이고 청지기 직분에서 해임된 후의 생계 수단에 대하여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며, 더욱이 자신이 의도한 계획을 수행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을 것이다.(성경주석, 눅 16:1)

  2. 불의한 청지기는 궁지에 몰리게 되자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가?(눅 16:4~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궁한 때는 궁한 수단을 이용하게 된다. 청지기의 행동은, 비록 이자의 율법 안에서 취한 기술적인 것이었지만, 부정직한 것이었다. 모세의 율법을 따라, 그는 누적된 이자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기록에 의하면, 밀의 이자는 25 퍼센트, 기름은 100퍼센트였음을 알 수 있다. 청지기는 밀에 대해서는 20 퍼센트, 기름은 50 퍼센트를 깎아 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채무자들로부터 인정을 얻었고, 자기의 주인은 율법을 고수하는 엄한 유대인임이 드러나게 하였다. 

  3. 옳지 않은 청지기는 주인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가 칭찬을 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8-9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부자는 자기 청지기의 부정직함을 묵과하지 않았다. 그가 면직된 것은 바로 그 부정직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당한 일을 이루기 위해 사용했지만 이 꾀 많은 청지기의 지혜가 참으로 기특하고 그의 계획을 수행하는 데 기울인 치밀함은 더 고상한 목적을 이루는 일에도 본받을 만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부자는 자기 청지기의 영리함과 부지런함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경주석, 눅 16:8)

 

토의사항

  1. 비유를 통하여 배울 수 있었던 교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청지기를 “불의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천국을 구하는 사람들은, 비록 궁색한 방법이라고 하더라도, 은혜 안에서 성장하기 위한 모든 기회를 이용하는데 있어서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강구하는 데 주저해서는 안 된다(마 5:29,30참조).

 


 

1. 어떤 부자. 페래아 봉사에 관한 기록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이 비유도 누가 혼자서만 기록한다(참조 마 19:1, 2; 9:51 주석). 이 장의 첫 번째 비유는 분명히 제자들에게 말한 것으로 지혜로운 청지기 직분에 꼭 필요한 원칙, 곧 현세의 기회들을 사려 깊고 근면하게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설명해 준다.

첫 번째 비유에서 예수는 사람들에게 생각을 현세의 사물에서 영원한 사물로 돌리라고 요청한다(실물교훈, 366). 세리들 중에는 얼마 전에 이와 비슷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었는데(실물교훈, 368), 청중 가운데 있던 세리들은 예수의 예화를 들으면서 특별한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주석가들은 이 비유를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여기는데, 그것은 특히 이야기에 나오는 부정직한 청지기에게 칭찬이 주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참조 8). 이러한 어려움은 비유의 모든 세부적인 사항에까지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서, 예를 들자면 부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생각과 같다. 그러나 이 비유를 우화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비유를 해석할 때 기본 원칙은, 모든 세부 사항에서 어떤 특별한 의미를 찾고자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한 특정한 진리, 곧 그가 8~14절에서 지적하는 진리를 예증하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했다.

 

허비한다. 헬라어에 의하면, 그 청지기는 그때까지도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조직적으로 주인의 소유를 도적질하고 있다는 고소를 당하였으며(참조 실물교훈 336, 337,), 그가 청지기 직분에 대하여 셈을 할 기회를 갖기 전에(2) 해고될 수 있을 만큼 그 고소는 충분한 물적 증거가 드러난 것처럼 보였다. 청지기의 약삭빠름(4~8)은 그가 자기의 이익을 돌봐야 할 때 아주 영리하게 행하였음을 암시해 주긴 하지만, 허비는 어느 정도 그의 무능함과 게으름 때문에 생긴 것일 수도 있다.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분명히 그 청지기는 죄가 있었고, 자신의 결백함을 드러낼 수 없음을 알았다. 그가 청지기 직분을 정직하게 이행했다면 고발당했을 때 그가 행한 것과 같은 약삭빠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꾀로 살아왔고 이제 자신을 위한 안락한 삶을 계속할 수 있는 더 영리한 계획을 꾸몄다. 그 청지기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에 불확실한 미래를 위하여 준비하는 수단으로서 자기의 현재의 권위 있는 지위를 이용할 것이었다.

 

5. 낱낱이 불러다가. 혹은 그의 주인의 채무자들을 하나씩 불러”(개정표준역).

그 청지기는 자기의 계획을 조직적이고도 부지런하게 수행하였다. 만일 그가 자신의 이익을 촉진하기 위하여 행하였던 근면함과 노련함을 자기 주인의 이익을 촉진하기 위하여 사용했다면 그는 실패자가 아닌 성공자가 되었을 것이다. 보디발 집안의 한 종으로서, 요셉은 그러한 품성의 특성들을 나타냈고, 따라서 주인에게 귀히 여김을 받았다(참조 창 39:1~6). 주인의 이익을 자신의 것처럼 증진시킴으로써 요셉은 보디발 가문의 청지기로 승진하였다.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그 청지기는 무능력하거나 게을렀기 때문에 이전 거래에 대하여 불완전한 기록을 가졌든지, 아니면 전혀 기록을 갖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 주인의 상품을 구입한 자들과 쉽게 공모하여 주인을 속이고, 주인의 돈을 가로채 자기와 구매자들이 이익을 챙기도록 할 수 있었을 것이다.

 

6. . 헬라어 바토이(batoi). 10.4갤런 즉 39.4리터에 해당하는 용적. 히브리어 바트(bat)에서 유래함. 그러므로 100“은 대략 1,040갤런(39.4헥토리터)으로 퍽 많은 부채이다.

 

7. . 히브리어 코르(kor)에서 유래한 헬라어 코로이(koroi). 코로이는 14.92부셜 즉 525리터에 해당하며, 코르와는 용적이 다르다. 그러므로 100“은 또 다른 큰 빚으로서 1,492부셜 즉 525헥토리터이다.

 

8. 주인이칭찬하였으니.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이 말은 누가가 부가한 편집자 주()가 아니라 예수의 비유의 일부였다. 그러므로 칭찬의 말을 한 사람은 1절에 나오는 부자이다. 예수가 자기 주인을 속이고자 하는 부정직한 청지기의 계획에 대하여 부적당한 칭찬을 하였다는 생각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다(참조 실물교훈, 367). 이 청지기에 대한 예수의 평가는 불의한 청지기라는 말 속에 드러난다. 하지만 이 칭찬이 비유의 절정을 이루기 때문에 예수는 청지기에 대한 그 부자의 칭찬 가운데서 제자들과 듣고 있던 청중들에게 교훈이 될 유용한 가르침을 찾은 것이 분명하다. 그 이야기 자체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밝혀준다.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이것은 자기 이익의 관점에서 장래에 자기에게 빚을 갚아야 할 일단의 친구들을 만듦으로써 그렇게 했다는 뜻이다. “지혜롭게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니모스(phronimo-s)인데, 이 단어는 형용사 형태인 프로니모스(phronimos)와 함께 마음을 뜻하는 프렌(phre-n)에서 파생했다(참조 마 7:24; 10:16). 청지기는 머리를 썼다.” 그는 자신의 장래를 위하여 영리하고 약삭빠르게 계획함으로써 통찰력을 발휘했다. 근본적으로 그의 지혜예리함은 지속되는 현재의 기회를 끈기 있게 사용한 데에 있었다. 만일 청지기가 자기 주인의 채무자들과 마지막 결정을 하면서 이전에 사업을 수행할 때처럼 꾸물거렸다면, 그는 자기의 간사한 계획을 성공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빛의 아들들. 예수도 하나님의 아들”(5:9; 20:36; 11:52), “천국의 아들들”(8:12; 13:38), “너희 아버지의 아들”(5:45)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들은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하늘나라를 저희 삶의 우선으로 삼는 자들을 가리켰다(참조 마 6:33 주석).

더 지혜로움이니라. 오로지 이생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당신을 섬기기로 택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것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준비하는 것보다도, 세상이 주는 것을 추구하는 데 더 큰 열심을 나타내곤 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동료들을 섬길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보다도, 어떻게 우리 자신을 섬길 수 있는지에 대하여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약점이다(참조 실물교훈, 370). 그리스도인은 열심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이 좋지만 그의 열성은 지식을 좇는것이어야 한다(10:2). 그는 구별되는 자가 되기 위하여 가치에 대한 올바른 감각이 있어야 한다(참조 마 6:23~34 주석).

 

9. 친구를 사귀라. 여기에서 예수는, 유대민족의 지도자로서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선민들에게 부여한 진리와 축복의 청지기들인, 그 자리에 참석한(참조 14) 바리새인들(참조 실물교훈, 369)에게 말했다. 하늘의 청지기인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늘이 그들에게 위탁한 재물을 낭비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머지않아 그들의 청지기 직분을 셈하라는 부름을 받게 될 것이었다.

예수는 하늘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암시하지 않는다. 그가 주목을 끌고자 하는 진리는, 우리의 영원한 복리를 위해서 현재의 기회들을 선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이생에서 우리의 수중에 들어오는 물질적인 소유의 청지기에 불과하며 하나님이 그것들을 우리에게 위탁한 것은 충성스러운 청지기 직분의 원리들을 배우도록 하기 위함이다. 현세에서 우리가 소유하는 모든 것은 실제적으로 남의 것즉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의 이 아니다(16:12; 참조 고전 6:19). 우리는 우리에게 위탁된 물질들을 동료 인간들의 필요(참조 잠 19:17; 19:21; 25:31~46; 12:33)와 복음의 전진(참조 고전 9:13; 고후 9:6, 7)을 위하여 사용함으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익을 증진시켜야 한다.

 

없어질 때에. 본문상의 증거는 그것이 없어질 때”(when it fails)라는 독법을 지지한다(개역한글판에는 네가혹은 그것이라는 주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제임스왕역에는 네가 없어질 때”[when ye fail]로 되어 있음역자 주). “네가 없어질 때라는 번역은 네가 죽을 때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번역이 요구하는 것처럼, 사람이 죽을 때에 영원한 거처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재림 시에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가르친다(참조 요 14:3). “그것이 없어질 때[불의의 재물]이 없어질 때를 의미한다. 청지기는 수입원이 끊겼을 때(16:3) 비로소 미래를 생각했다(4). 이 비유가 강조하는 바는, 청지기가 그 직분을 이해하지 못했다거나 그의 죽음이 아니고, 개인적인 수입의 손실 문제를 해결하는 그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문맥과 취지는 그것이 없어질 때로 이해하기를 요구한다. “그것의 선행사는 이고, “그들의 선행사는 친구들이다.

 

10. 지극히 작은 것. 이 말에는 재물(또는 부)지극히 작은 것혹은 작은 것이라는 뜻이 내포돼 있다. 다시 한 번, 예수는 청지기의 부정직함을 칭찬하지 않았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참조 8절 주석). 제자들이나 청중 가운데 어떤 이들이 이 비유를 다소간 부정직함에 대한 구실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는 여기에서 분명하게 자기의 제자가 되려는 모든 사람이 철저한 정직성과 근면함의 특징을 가져야 한다는 심오한 진리를 언급한다. 미드라쉬(Rabbah, 3:1, Soncino ed., 49)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람을 작은 일로 시험해 보기까지는 큰 것을 주지 않으며, 시험해 본 다음에야 큰 일을 맡긴다고 하였다. 그 다음에, 미드라쉬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한 것으로 추정되는 말씀을 예로 들어 기록한다. “네가 네 양을 돌보는 일에 신임할 만하였으니 와서 나의 양을 돌보라.”

 

11. 참된 것. 즉 영적인 부요함”(참조 약 2:5).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6:27)는 그리스도의 권고와 비교하라. 페래아 봉사 조금 전에 예수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12:21)한 대신 자신들을 위하여 보화를 쌓는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12. 남의 것. 이생에서 한 사람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들 가운데 하나는, 그가 소유하게 되는 모든 돈과 물질이 자기의 지혜와 솜씨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빌렸다는 사실이다. 여호와는 엄숙하게 이 치명적인 기만에 대하여 경고했고 재물 얻을 능을 사람들에게 주신 분이 하나님임을 상기시켰다(참조 신 8:18 주석).

이러한 원리에 관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교훈들에서 유익을 얻지 못한 것이 한 국가로서 이스라엘이 실패하게 된 큰 원인이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 그분의 자비에서 오는 생애의 좋은 것들을 감사하지 않을 때, 그들은 생각이 허망하여지며또한 그들의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1:21)진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청지기일 따름이다.

 

너희의 것. 여기에서 예수는 영생과 그것에 수반되는 축복이나 기쁨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언급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8:17)이다.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보좌에 앉을 때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는 은혜로운 초청을 모든 신실한 자들에게 할 것이다(25:34).

 

13. 집 하인이없나니. 참조 마 6:24 주석. “하인이란 이 단어를 제외하고는 여기에서 한 예수의 말은 마 6:24의 내용과 동일하다. 그러나 이 단어는 비유에서의 하인”, 곧 청지기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이 문맥에는 적합하다. 예수의 이전 가르침 중 많은 부분이 페래아 봉사 기간에 반복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시대의 소망, 488). 많은 비평가가 주장하는 것처럼 누가와 마태가 그들의 복음서 내용 가운데 잘못된 위치에 이 말씀을 삽입했다고 추정할 명확한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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