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믿음, 봉사

 

누가복음 17:1-10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그대의 믿음이 자라기를 바라면 그대는 믿음을 말하고,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행하여야 한다. 그대가 이같이 살아있는 믿음을 활용할 때 그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강한 남녀로 자라날 것이다(원고 1, 1889).

 

1, 2절에서 예수는 다른 사람을 죄로 이끄는 것은 죄라고 말한다. 3, 4절에서 다른 이들이 잘못하였을 때 그들을 용서하는 것은 제자들의 의무라고 지적한다. 5, 6절은 복음의 원칙들을 실천하는 데 필수적인 믿음을 다루며, 7~10절은 복음의 원리들을 설명해 주는 비유로 구성된다. 

 

 

본문연구

  1. 하나님의 목적을 거스른 자들(남을 실족케 하는)은 결국 무슨 일을 당하게 되는가? (눅 17:1, 2; 롬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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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구절은 용서의 구절과 병행하여 죄의 형벌을 제거하며, 보증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에게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2. 죄지은 자가 죄책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회개할 기회를 갖도록, 우리는 그를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가? (눅 17:3, 4; 마 18:2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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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제자들이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하였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셨는가? (눅 17: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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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은 의무 이상을 하게 되는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슨 동기가 합당한가? (눅 17:7~10, 12:2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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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의사항

  1. 용서해준 경험과 용서 받은 경험을 통해 배운점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은 양이 아니라 질의 문제를 말씀하신 것이다. 양과 관계 없이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둘 중의 하나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3.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의무는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1. 예수께서이르시되. [용서, 믿음, 봉사, 17:1~10]. 다음 부분에 나오는 누가복음의 내용이 주어진 시간과 장소에 대하여는 언급된 것이 없다. 주제에 관한 한, 이전 장들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거의 없는 듯하다. 더욱이 이전에 말씀을 들었던 바리새인들(참조 16:14 주석), 17:1~19에서는 그곳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시금 이야기 속에 바리새인들이 소개되기(20) 전에 여행 기록이 나오므로(참조 17:11), 16장과 17장 사이에는 시간과 장소의 변화가 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17장의 기록을 볼 때, 예수는 이 여행에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지대를 거쳐, 결국 요단강을 건너 다시 페래아로 온 것으로 보인다(참조 17:11 주석; 9, 136).

1~10절에서 주신 교훈의 다양한 내용 사이에 분명한 연계성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누가가 서로 다른 때에 하신 말씀의 요점을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매우 그럴듯하며, 누가가 이곳에서 기록한 내용들은 여행 중에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들의 요점일 수 있다. 동시에 서로 다른 부분들 사이에 깔려 있는 연계성을 찾을 수도 있으나, 실제적으로 사상의 통일이 존재하는가의 여부에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실족. 헬라어 스칸달라(skandala). 문자적으로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경우들” “올가미를 놓다”, “함정에 빠지게 하다”, “걸려 넘어지게 하다.” 올가미를 움직이는 데 사용하는 막대기를 의미하는 스칸달론(skandalon)에서 파생함(참조 롬 11:9; 14:13; 요일 2:10; 2:14).

 

실족케 하는 것.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또는 죄짓게 하는) 어떤 것들을 의미한다(참조 5:29 주석).

 

없을 수 없으나. 즉 실족케 하는 일들이 필요하다혹은 불가피하다.” “실족케 하는 일들이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위해서는 필요치 않으나 인간이 처한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것이다(참조 시대의 소망, 438; 17:1).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즉 교훈과 모본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고 낙담시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

 

2. 이 작은 자 중 하나. 아마도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 있으므로 다른 제자들의 교만한 행동에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어떤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듯하다.

 

실족케 할진대. 헬라어 스칸달리조(skandalizo-). 문자적으로 덫을 놓다”(참조 5:29 주석). 여기서 예수는 근본적으로 형제들의 불화를 조장하는 것들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넘어지게 할 수 있는 어떠한 일도 하지 말 라고 권고한다(고전 8:9~13).

 

연자 맷돌. 헬라어 뮐로스 오니코스(mulos onikos)는 문자적으로 당나귀 맷돌인데, 이는 맷돌이 너무 커서 당나귀가 그것을 돌려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손으로 돌리는 작은 맷돌에 관해서는 24:41 주석을 참조하라.

 

3. 조심하라. 3, 4절에 대해서는 마 18:15~22 주석을 참조하라. 남을 용서해 주지 않는 것은 그들을 무분별하게 만들어 죄에 빠지도록 하는 방편이 된다. 17:1, 2은 다른 이들에게 우리가 죄를 짓는 문제와 상관되는 것이고, 3, 4절은 남이 우리에게 잘못했을 때의 우리 태도와 상관된다. 우리는 남을 실족케 하지 말아야 하며, 동시에 그들이 우리를 실족하게 할 때 자비를 나타내야 한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문맥상 예수가 언급하는 과실이 같은 종류의 것임이 분명하지만, 본문상의 증거는 이 단어들의 생략을 선호한다.

 

4. 일곱 번. 어떤 사람들은 암 1:3을 잘못 해석하여, 유대 랍비들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횟수를 세 번으로 제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께서 항상 서기관들보다 더 넓은 의미로 율법을 해석한다는 사실(참조 마 5:17, 18 주석)을 충분히 깨달은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권장하실 인내의 한계를 알기 원한다. 일곱 번은 일반적으로 완전을 나타내는 숫자이다(참조 실물교훈, 243). 그러나 사람을 일곱 번용서하고 그 이상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형식적인 용서가 될 것이다.

용서란, 하나님이나 인간 모두에게 단순한 사법적 행위 이상을 의미하며, 갈등이 있었던 곳에 평화의 회복을 의미한다(참조 롬 5:1). 또한 용서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 곧 죄를 지은 그 사람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포함된다.

 

5. 사도들. 누가가 의도적으로 열두 명을 사도들, 예수를 항상 따라다니던 사람들을 제자들”(참조 1)로 구분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5, 6절은 믿음의 능력과 관계가 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문맥상 이 요청은 눅 17:1~4에 나타난 경우가 아닌 다른 때에 주어졌을 수도 있다(참조 1절 주석). “사도들은 자기들이 어느 정도는 믿음을 가졌다고 느꼈으나, 그것으로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6. 믿음. 예수가 말하는 믿음의 소유는, 양이 아니라 질의 문제이다. 사람은 믿음을 갖든지 아니면 믿음이 없든지 둘 중 하나이다. 아주 적은 양의 믿음이라도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들을 이루기에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양이 아니라, 그 믿음의 진실성이다.

 

뽕나무. 헬라어 쉬카미노스(sukaminos). 검은 뽕나무. 어떤 사람들은 별개 뽕나무로 여기기도 하지만, 쉬카미노스는 흰 뽕나무의 이름 혹은 무화과나무(sycamore-fig tree)로 알려진 쉬코모레아(sukomorea)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쉬코모레아는 흔히 무화과나무”(sycomore, 그러나 개역한글판에는 뽕나무로 되어 있음역자 주)로 번역되었다(참조 암 7:14; 19:4 주석). 하지만 이 나무를 우리가 알고 있는 무화과나무(sycamore)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바다에 심기우라. 예수가 의도적으로 터무니없어 보이는 예증을 택했을 가능성이 있다. 분명 그분은 자신의 제자들이 이러한 마술적인 묘기를 행하기를 의도하지 않았다. 이 예증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간다는 예증과 흡사하다(참조 마 19:24 주석). 두 예증 다 문자적으로 이루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고, 따라서 예수도 제자들이 실제로 그런 시도를 해보기를 의도하지 않았다. 그의 이적들 중에도 이런 종류는 없었다.

 

7. 너희 중에. 이 짤막한 비유는 그 관계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5절에 기록된 요청에 대한 답으로써 말한 듯하다. 믿음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신들의 의무를 감당할 자질을 갖추게 한다(참조 10절 주석). 이 비유와 5절의 관계가 확실하지 않다면, 이 비유는 아마도 11절에 간략하게 언급된 여행의 어떤 시점에서 제자들에게 말한 것으로 보인다(참조 1절 주석).

 

밭을 갈거나. 아마도 그 주인의 집은 마을이나 읍내에 있었고, 그의 땅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것이다. 흔히 종들은 아침에 마을을 떠나 밭으로 일하러 가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참조 민 35:4; 2:3; 3:4; 4:1 주석).

 

. 헬라어 둘로스(doulos). “농노”(農奴) 또는 노예.”

 

. 헬라어 유쎄오스(eutheo-s). “당장혹은 즉시”(참조 막 1:10 주석). 옛날의 영어 관용 표현에서 “by and by”()즉시를 의미했으나, 지금은 정반대의 의미가 되었다. 여기에서 유쎄오스는, 동사 말하다보다는 오히려 동사 가다를 수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인이 곧 말하되가 아니라, “곧 와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8. 하지 않겠느냐. 헬라어에 따르면, 이 질문에서는 긍정적인 답변이 기대된다. 부정적인 답변이 기대되는 17:9과 비교하라.

 

9. 사례하겠느냐. 헬라어에 따르면, 이 질문에 대하여 여기서는 부정적인 답변이 기대된다. 긍정적인 답변이 기대되는 17:8과 비교하라.

 

10.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는 특별한 칭찬을 받을 자격이 없나이다.” 주인은 그들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았을 뿐이므로, 더 이상 언급할 가치가 없었다. 그는 종들에게 특별한 감사를 나타내야겠다고 느낄 만큼의 유익을 얻지 못했다. 그들은 삯을 받는 자들이었으며, 그들이 기대해야 할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가 그들에게 특별히 빚진 것은 없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할 권리가 있었고,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 우리가 그분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때에라도 그로 인해 그가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의무를 갖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참고 고통을 당한 모든 것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없”(고전 9:16)다고 말할 때 그는 진정한 봉사의 정신을 반영한다. 바울의 봉사는 주님께 대한 깊은 의무감에 의하여 자극된 것이었다. 복음을 전하면서 그는,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고 하면서 무거운 책임을 이행하고 있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누가복음 16:19-31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은 저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이 비유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부자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난한 자를 대비하여 묘사한 것이다.”(실물교훈, 260)

 

 

부자와 거지의 뒤바뀐 운명을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는 중요한 구원의 조건을 가르치셨다.

 

본문연구

  1. 비유에서 부자는 악한 사람인가? 선한 사람인가? 아니면 어떤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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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f. 이 비유는 자주 비성경적인 교리 즉 천당과 지옥의 공존을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되기 도 하는데, 비유는 상세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선택하신 이유를 다음의 인용문을 통해 이해하자.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입장에 서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죽는 날로부터 부활할 때까지 의식을 갖고 있다는 교리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 속에 많이 섞여 있었다. 구주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잘 아시고 그 중요한 진리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하여 이 비유를 그들의 선입주견에 따라 구성하셨다.”(실물교훈, 263)

    cf. 부자는 거지에게 베풀었고(21절), 형제들을 걱정하였다(27-28절). 그런데 왜 고통당 하는 음부에 가게 되었을까?

  2. 죽음 이후의 운명은 노력에 의해 바뀔 수 있는가? 아니면 바뀔 수 없는가?
    26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부자의 요청에 대한 답변이자 이 비유의 결론은 무엇인가?
    29-31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모세와 선지자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24:14; 28:23)
    cf. “죽은 자가 살아나서 권하여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계22:11)

    “율법과 선지자들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매개자들이다...만일 저희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다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증인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유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실물교훈, 265)

토의사항

  1. 비유를 통하여 배울 수 있었던 운명을 결정짓는 요소는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자.

  2. 나의 삶은 어떤 점에서 부자 혹은 나사로와 유사한가? 서로 나누어 보자.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 장면이 이 부자의 만년의 생애 가운데 묘사되었다...이와같은 길로 따라가는 자들이 많이 있다. 비록 그들이 침례 교인이기는 하나 거듭나지 못했다...하나님의 음성이 죽은 자를 깨우실 때에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 있을 때에 가졌던 것과 같은 식욕과 정욕, 좋아하고 싫어하는 습성을 그대로 가지고 무덤에서 나오게 된다. 모든 기회와 편의를 제공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재창조함을 받지 못한 자들을 재창조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적을 행하지 않으신다.”(상동, 211)

운명은 눈에 보이는 선행이나 죄악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또, 아무도 비록 기적적인 방법으로 설명한다 하여도 그것이 구원을 가져다 주지도 않는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았는지, 말씀을 생애의 기준으로 삼고 살았는지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운명은 죽음 후에 돌이킬 수 없으며, 죽을 때의 모습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19. 한 부자. 그 당시에 제자들(16:1)세리와 죄인들”(15:1) 또한 많은 군중이 참석해 있었지만, 특별히 이 비유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말한 것이 분명하다.

이 비유에서 예수는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참조 16:1~12)에서 제시한 교훈을 계속하고 있는데, 그것은 현세의 기회들을 선용함이 장래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 비유는 특별히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이었으나, 9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서 돌이켜 그곳에 참석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말했다. 그들에게는 빛이 충분히 있었고, 그들은 오랫동안 율법과 선지자의 교훈을 향유했고, 요한의 봉사 이래로 첨가된 복음의 빛은 그들의 것이었다(참조 16절 주석). 그때에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현세에서의 특권과 기회들의 선용 여부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주어졌다(참조 실물교훈, 260). 첫 번째로 한 부자는 이생의 기회들을 남용하는 모든 사람을 나타내는데, 총괄적인 의미에서, 그 부자처럼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있던 유대민족을 가리킨다(참조 실물교훈, 267). 이 비유는 두 가지 장면으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이생을 나타내고(19~22), 다른 하나는 내세를 나타낸다(23~31).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는 긍정적인 관점, 곧 미래를 위하여 준비한 사람의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한다. 동일한 문제에 대하여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부정적인 관점, 즉 그러한 준비에 실패한 사람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 부자는 구원이 성품보다는 오히려 아브라함의 후손 됨에 달렸다고 생각함으로써 잘못을 범하였다. 가장 중요한 해석 원칙 가운데 하나는, 상징적인 표현과 이야기일 경우 언급된 진리에 관한 성경의 문자적 진술에 의해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비유가, 직접적인 문맥이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일반적인 대의와는 모순되는 내용을 가르친다고 해석하려는 사람들조차도 이 비유의 세목들 중 많은 부분이 상징적임을 인정한다(참조 22~26절 주석).

그러므로 이렇게 자문해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왜 예수는 비유 가운데서, 성경 다른 곳에서나 특히 그의 실제적인 진술들 가운데서 분명하게 드러낸 것처럼, 진리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 상징적인 예화를 사용해야 했을까?” 그 답은, 예수가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중 가운데 다수는그렇게 믿을 만한 구약상의 아무런 근거도 없이죽음과 부활 사이의 존재에게 의식적인 상태가 주어진다는 가르침을 믿고 있었다(참조 실물교훈, 263). 구약에 나타나지 않는 이런 그릇된 신조가 출애굽 이후의 유대인 문서에 전반적으로 침투되었고, 여러 가지 다른 전통적인 신조들처럼 예수 당시 유대교 가르침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다(참조 막 7:7~13 주석). 이 비유에서, 예수는 청중들의 마음에 심어주고자 하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아주 분명하게 가르치기 위해 대중들의 신념을 사용한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앞에 나오는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에서(16:1~12), 비록 부정직한 청지기의 행위가 그 이야기의 주요 부분을 구성하고 있을지라도, 예수는 그 행위에 대하여 칭찬이나 시인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참조 8절 주석).

 

자색. 헬라어 포르퓌라(porphura). “자색 천혹은 자주 빛 천으로 만든 옷.” 여기서는 아마도 값비싼 겉옷인 소매 없는 외투망토”(헬라어 히마티온[himation]; 참조 마 5:40 주석), 왕의 색인 자주색으로 물들인 옷을 가리키는 것 같다. 자색은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20. 나사로. 헬라어 라자로스(Lazaros).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의미의 흔한 히브리 이름인 엘라자르(’El‘azar)에서 유래함(참조 출 6:33 주석). 이름은 비유 가운데서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영적 상태에 가장 적합한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가 비유에 나오는 인물에게 이름을 붙인 유일한 기록인데, 이 경우에는 비유에 대화가 나타나기 때문에 취한 불가피한 절차였다(참조 16:23~31). 비록 몇 주일 후에 예수가 실제로 베다니의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켰을지라도(참조 요 11:1~46), 비유 속의 인물과 예수의 가장 위대한 이적의 대상이 된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대문에 누워. 부자에게는 나사로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는 기회가 계속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부자는 실제로 그 불쌍한 나사로를 학대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는 나사로가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결론지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의 태도는,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니이까”(4:9)라고 말할 때에 가인이 나타낸 태도와 흡사했다. 나사로와 그의 관계는 악행을 가한 사이가 아니라, 오히려 자비를 베풀지 않은 관계였다. 그는 자기 삶의 책임에 대하여 적극적인 태도가 아닌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는 동료 인간들을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율법의 둘째로 큰 계명의 진정한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다(참조 마 5:43; 22:39; 25:35~44 주석). 유대 민족처럼 이 부자는 적극적인 선을 행하지 않음으로써 적극적인 해를 입힌 죄를 지은 셈이었다. 하늘이 그에게 부여한 모든 혜택은 그 자신의 쾌락과 만족을 위해서만 사용되고 있었다(참조 실물교훈, 291).

 

21. 배불리려 하매. 그가 문 앞에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극심한 필요 가운데 있었고, 부자는 그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었다. 이야기 가운데는 나사로가 자기의 가난과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했다고 암시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 분명히 그는 욥처럼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모든 것을 참아냈다.

 

헌데를 핥더라. 이것이 그의 고통을 완화시켜 주었는지 아니면 더해 주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후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 만일 그렇다면 가난한 환자에게 이것은 극심한 고통이었다. 분명히 그는 이 반()야생적인 청소부 동물들이 자기 헌데를 핥지 못하도록 막을 수가 없었다(참조 마 7:6; 14:26 주석).

 

22. 천사들에게 받들려. 24:31과 비교하라. 16:25~31을 해석할 때 지침이 되는 원칙은 19절 주석을 참조하라. 이 비유의 목적은 현세의 기회들을 선용한 여부와 내세의 보상을 비교해 보기 위함임을 기억해야 한다. 운명은 죽을 때에 확정되기 때문에 내세에서 특권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현세에서 그것들을 선용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품. “낙원을 의미하는 전형적인 유대 관용어. 탈무드(K.iddushim 72a; in Soncino ed., 369)는 복받은 죽은 자의 거처를 아브라함의 무릎이라고 말한다. 다른 경우에 예수는 낙원을, “많은 사람이” “동서로부터이르러” “천국의 잔치에 아브라함과함께앉는 장소라고 말했다(참조 마 8:11; 14:15 주석).

예수가 아버지의 품에있다는 말에 대하여는, 1:18 주석을 참조하라. 만찬 때 남의 품에 기대어 쉬는 것에 대하여는 요 13:23 주석을 참조하라.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며(참조 요 8:39, 56), 실제로 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 대신에 아브라함을 바라보게 되었다(참조 눅 16:24 주석). 오늘날 때때로 베드로가 천국 문에서 기독교인들을 환영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듯이, 그들은 아브라함이 낙원에서 그의 자녀들을 환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23. 음부. 헬라어 하데스(hade-s). “무덤또는 죽음”(참조 마 11:23 주석). 하데스는 선하든 악하든 모든 사람이 부활 때까지 거하는 곳이다. 나사로도 실제로는 그곳에 있을 것이다.

 

고통. 헬라어 바사노이(basanoi). 질병(8:6)이나 바다의 풍랑에 밀려(14:24) 극심하게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그리고 괴로이노 젓는 제자들(6:48)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동사 바사니조(basanizo-)와 동계어이다. 그것은 또한 정서적인 고통(벧후 2:8)과 귀신들이 예수와 대면했을 때 두려움으로 괴로워한 것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8:29; 5:7; 8:28). 그러므로 바사노스(basanos, 바사노이의 단수형)는 심한 고통이나 불안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죽어서 고통을 당하는 장소로 가게 된다는 사상은,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9:5; 참조 시 146:4 주석)라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성경 말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예수도 친히 죽음을 잠에 비교했다(참조 요 11:11, 14). 이 비유에서, 예수가 사망 시에 악인들이 고통을 당하게 될 곳으로 데려감을 받는다고 가르쳤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그분이 다른 경우에 이 문제에 대하여 명백하게 가르친 것들이나 전반적인 성경의 가르침들과 모순된다. 죄인들이 불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곳은 게엔나 곧 지옥”(geenna, 참조 마 5:22 주석)이지 하데스(hade-s)가 아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하데스의 불꽃 가운데서 고민”(16:24)하는 것처럼 예수가 말한 것은 상징이므로 그의 말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비유들을 설명할 때 포함되어야 하는 해석의 원칙은 19절 주석을 참조하라.

 

아브라함과보고. 천국과 지옥이 서로 말할 수 있는 거리 안에 있어서 천국에 있는 자들이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도 그들의 고통을 경감시켜 줄 수 없고, 지옥에 있는 자들은 하늘에 있는 의인들의 복락을 바라본다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만일 이 비유를 실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틀림없이 그런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참조 19절 주석). 그러나 그것이 실제적인 것이라고 믿는 자들도 아브라함의 품은 단지 상징적 표현이며, 모든 성도가 실제로 그의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서둘러 부언할 것이다. 또한 그들은 여기에서 묘사된 하늘과 지옥 사이의 거리도 순전히 상징적인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 비유의 이 부분이나 저 부분이 분명히 상징적인 것이요 글자 그대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인정하는 순간, 그들은 전체적인 비유의 상징적인 성격을 인정하는 셈이다. 만일 그들이 그 비유 전체가 상징적인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떤 부분은 상징적인 것으로 보아야 하고, 다른 부분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는 그들의 결정은, 분명하게 정의된 한결같은 해석 원칙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들의 독단적인 선택의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24. 그 손가락 끝. 이 비유 가운데서 몸을 떠난 불멸의 영혼들에 관한 거짓 교리를 지지하는 내용을 찾고자 하는 자들은 오히려 여기에서 당황하게 하는 내용을 보게 된다. 몸을 떠난 영혼들도 손가락을 가지고 있다니! 나사로의 몸은 무덤에 있었으므로 그의 손가락도 무덤 속에 있었을 것이다. 육체를 떠난 한 영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손가락을 취하여 그것을 물에 담근 다음, 육체를 떠난 다른 영의 존재하지도 않는 혀에 댄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분명히, 예수는 현세와 내세 사이의 상관성에 관한 어떤 특별한 진리를 밝혀 주기 위하여 구상된 상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참조 19절 주석), 그의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의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 음부 가운데서 상징적으로 고통당하고 있던 부자에게, 고통을 조금이라도 경감시켜 주는 대책이 은혜롭게도 수용되었던가? 이제 부자는 예전에 나사로가 자기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음식을 갈구했던 것처럼 깨끗하고 시원한 물 한 방울을 바란다(참조 21절 주석). 만일 부자가 ”(23)”(24)를 가지고 있었고, 나사로도 손가락”(24)이 있었다면, 선인이나 악인이 죽을 때에 즉시 지체를 가진 실제적인 존재로서 그들의 보상을 받기 위해 간다는 가르침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비유 자체가 분명히 알려 주는 것은 그들은 죽자마자 저희의 보상을 받으러 가지 않았는데, 그들의 몸은 무덤에 있었고, 거기엔 불과 같은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참조 22절 주석).

 

25. 받았고. 그는 일생 동안 누구든지 소원할 만한 좋은 것들을 받았지만, 장래의 삶을 위한 준비는 하지 않았다. 그는 마 6:33의 원리를 반대로 적용하여먼저 이 모든 것을 구했으며, 나중에 하나님이 하늘을 더해 줄 모종의 방법을 찾게 되길 희망했다. 어리석은 부자의 경험(참조 12:16~21 주석)이나, 하늘에 보화를 쌓는 문제에 관한 예수의 교훈(참조 마 6:19~21 주석)과 비교해 보라. 부자는 얻고자 하는 보상을 모두 받았다(참조 마 6:2 주석). 하늘에 있는 계정은 그가 도덕적으로 파산 상태임을 보여 주었다. 그가 벌을 받은 것은 재물을 소유했기 때문이 아니라(참조 19절 주석), 그것을 오용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지적돼야 한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이나 동료 인간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는 대신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탕진했다(참조 마 19:21, 22; 25:25~30). 부하게 되는 것은 죄가 아닌데, 그 이유는 아브라함도 매우 부유했기 때문이다(참조 창 13:2). 이 비유 속의 부자는 단순히 그가 자기 재화를 사용한 방법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로 했다.

 

30.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부자는 자기가 아브라함보다 더 잘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아브라함의 결정에 대하여 항의한다. 분명히 그는 구약의 확신할 만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고, 그의 다섯 형제도 그럴 것이라고 의심한다. 오늘날 구약의 엄숙한 기별을 경솔하게 저버리는 자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가까이 했을지라도 그것에 의하여 유익을 받지 못했던 이 비유 속의 부자의 운명을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즉 죽은 자 가운데서 그들에게 가는 이가 있으면. 19절 주석에서 설명한 대로, 부자는 품성 형성과 동료 인간들에게 선을 행하기 위하여 현세가 제공하는 기회들을 활용하지 못한 사람들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로서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유대 나라를 가리킨다.

추가적인 증거를 요구한 점에서, 그 부자는 거듭거듭 표적을 요구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그리고 하는 일들은 진실한 동기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그의 신성을 확신시켜 주는 증거를 이루었다(참조 마 15:21; 16:1 주석). 그러나 예수가 그들에게 준 증거는 그들이 원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31. 듣지 아니하면. 참조 30절 주석.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영원한 진리의 분명한 진술에 의하여 감명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가장 큰 이적에 의해서도 더 나은 감동을 받지 못할 것이었다. 이 비유를 말한 지 몇 주일 후에 예수는 이제까지 그들이 보았던 것보다 더 큰 증거를 요구하는 유대 지도자들의 도전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나사로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를 죽음에서 부활시켰다. 그러나 바로 그 이적은 그 나라의 지도자들이 예수의 생명을 빼앗기 위해 음모를 강화하도록 이끌었다(참조 요 11:47~54 주석).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기들의 지지받을 수 없는 입장을 지키기 위하여 나사로를 없애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느꼈다(참조 요 12:9, 10; 시대의 소망, 588).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구약을 거부하는 자들은 더 큰, 심지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의 증언이라도 거부하리라고 한 예수의 말씀의 진실성을 글자 그대로 입증했다.

 

비록살아나는 자. 몇 주 후에 주님은 마치 이 비유 가운데서 부자가 요청한 내용을 당신을 헐뜯고자 하는 비평가들에게 성취시켜 보여 주려는 듯이 죽음에서 나사로를 일으켰다(참조 요 11:1 주석). 그러나 예수가 아버지 아브라함을 통해 부자에게 경고한 것처럼,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여전히 믿기를 거부했다. 실제로 그 이적은 그들로 하여금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단호하게 그를 죽일 음모를 꾸미도록 자극했다(11:47~54).

 
 

불의한 청지기

 

누가복음 16:1-13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세상 이욕에 밝은 주인은 자기를 속여 빼앗은 자의 꾀를 칭찬했다. 그러나 이 부자의 칭찬은 곧 하나님께서 하시는 칭찬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일반 대중이 잘 알고 있는 실례를 들어서 당신이 가르치고자 하시는 교훈을 설명하셨다. 그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해 줌으로써 그들 자신이 이롭게 될 수 있었다. 현세에서 하나님의 선물을 나누어 줌으로써만 그들은 영원을 위해 준비될 수 있었다.(실물, 367)

 

이 비유는 미래의 삶을 내다보는 관점에서 현재의 기회들을 이용하는 일을 다루고 있는데, 특히 현세에서 물질을 사용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본문연구

  1. 비유에 등장하는 청지기는 주인의 재물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문맥이 밝혀주듯이 이 이야기 중의 청지기는 신뢰를 받고 있었다. 그는 주인과 상의 없이도 주인을 위해 사고 팔고 계약할 법적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 “청지기”는 어떤 “청지기”들처럼 노예 우두머리가 아니라 자유인이었다. 그가 노예였다면 장차 다른 주인 밑에서 노예 생활을 할 것이고 청지기 직분에서 해임된 후의 생계 수단에 대하여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며, 더욱이 자신이 의도한 계획을 수행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을 것이다.(성경주석, 눅 16:1)

  2. 불의한 청지기는 궁지에 몰리게 되자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가?(눅 16:4~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궁한 때는 궁한 수단을 이용하게 된다. 청지기의 행동은, 비록 이자의 율법 안에서 취한 기술적인 것이었지만, 부정직한 것이었다. 모세의 율법을 따라, 그는 누적된 이자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기록에 의하면, 밀의 이자는 25 퍼센트, 기름은 100퍼센트였음을 알 수 있다. 청지기는 밀에 대해서는 20 퍼센트, 기름은 50 퍼센트를 깎아 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채무자들로부터 인정을 얻었고, 자기의 주인은 율법을 고수하는 엄한 유대인임이 드러나게 하였다. 

  3. 옳지 않은 청지기는 주인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가 칭찬을 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8-9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부자는 자기 청지기의 부정직함을 묵과하지 않았다. 그가 면직된 것은 바로 그 부정직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당한 일을 이루기 위해 사용했지만 이 꾀 많은 청지기의 지혜가 참으로 기특하고 그의 계획을 수행하는 데 기울인 치밀함은 더 고상한 목적을 이루는 일에도 본받을 만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부자는 자기 청지기의 영리함과 부지런함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경주석, 눅 16:8)

 

토의사항

  1. 비유를 통하여 배울 수 있었던 교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청지기를 “불의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천국을 구하는 사람들은, 비록 궁색한 방법이라고 하더라도, 은혜 안에서 성장하기 위한 모든 기회를 이용하는데 있어서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강구하는 데 주저해서는 안 된다(마 5:29,30참조).

 


 

1. 어떤 부자. 페래아 봉사에 관한 기록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이 비유도 누가 혼자서만 기록한다(참조 마 19:1, 2; 9:51 주석). 이 장의 첫 번째 비유는 분명히 제자들에게 말한 것으로 지혜로운 청지기 직분에 꼭 필요한 원칙, 곧 현세의 기회들을 사려 깊고 근면하게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설명해 준다.

첫 번째 비유에서 예수는 사람들에게 생각을 현세의 사물에서 영원한 사물로 돌리라고 요청한다(실물교훈, 366). 세리들 중에는 얼마 전에 이와 비슷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었는데(실물교훈, 368), 청중 가운데 있던 세리들은 예수의 예화를 들으면서 특별한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주석가들은 이 비유를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여기는데, 그것은 특히 이야기에 나오는 부정직한 청지기에게 칭찬이 주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참조 8). 이러한 어려움은 비유의 모든 세부적인 사항에까지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서, 예를 들자면 부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생각과 같다. 그러나 이 비유를 우화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비유를 해석할 때 기본 원칙은, 모든 세부 사항에서 어떤 특별한 의미를 찾고자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한 특정한 진리, 곧 그가 8~14절에서 지적하는 진리를 예증하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했다.

 

허비한다. 헬라어에 의하면, 그 청지기는 그때까지도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조직적으로 주인의 소유를 도적질하고 있다는 고소를 당하였으며(참조 실물교훈 336, 337,), 그가 청지기 직분에 대하여 셈을 할 기회를 갖기 전에(2) 해고될 수 있을 만큼 그 고소는 충분한 물적 증거가 드러난 것처럼 보였다. 청지기의 약삭빠름(4~8)은 그가 자기의 이익을 돌봐야 할 때 아주 영리하게 행하였음을 암시해 주긴 하지만, 허비는 어느 정도 그의 무능함과 게으름 때문에 생긴 것일 수도 있다.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분명히 그 청지기는 죄가 있었고, 자신의 결백함을 드러낼 수 없음을 알았다. 그가 청지기 직분을 정직하게 이행했다면 고발당했을 때 그가 행한 것과 같은 약삭빠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꾀로 살아왔고 이제 자신을 위한 안락한 삶을 계속할 수 있는 더 영리한 계획을 꾸몄다. 그 청지기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에 불확실한 미래를 위하여 준비하는 수단으로서 자기의 현재의 권위 있는 지위를 이용할 것이었다.

 

5. 낱낱이 불러다가. 혹은 그의 주인의 채무자들을 하나씩 불러”(개정표준역).

그 청지기는 자기의 계획을 조직적이고도 부지런하게 수행하였다. 만일 그가 자신의 이익을 촉진하기 위하여 행하였던 근면함과 노련함을 자기 주인의 이익을 촉진하기 위하여 사용했다면 그는 실패자가 아닌 성공자가 되었을 것이다. 보디발 집안의 한 종으로서, 요셉은 그러한 품성의 특성들을 나타냈고, 따라서 주인에게 귀히 여김을 받았다(참조 창 39:1~6). 주인의 이익을 자신의 것처럼 증진시킴으로써 요셉은 보디발 가문의 청지기로 승진하였다.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그 청지기는 무능력하거나 게을렀기 때문에 이전 거래에 대하여 불완전한 기록을 가졌든지, 아니면 전혀 기록을 갖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 주인의 상품을 구입한 자들과 쉽게 공모하여 주인을 속이고, 주인의 돈을 가로채 자기와 구매자들이 이익을 챙기도록 할 수 있었을 것이다.

 

6. . 헬라어 바토이(batoi). 10.4갤런 즉 39.4리터에 해당하는 용적. 히브리어 바트(bat)에서 유래함. 그러므로 100“은 대략 1,040갤런(39.4헥토리터)으로 퍽 많은 부채이다.

 

7. . 히브리어 코르(kor)에서 유래한 헬라어 코로이(koroi). 코로이는 14.92부셜 즉 525리터에 해당하며, 코르와는 용적이 다르다. 그러므로 100“은 또 다른 큰 빚으로서 1,492부셜 즉 525헥토리터이다.

 

8. 주인이칭찬하였으니.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이 말은 누가가 부가한 편집자 주()가 아니라 예수의 비유의 일부였다. 그러므로 칭찬의 말을 한 사람은 1절에 나오는 부자이다. 예수가 자기 주인을 속이고자 하는 부정직한 청지기의 계획에 대하여 부적당한 칭찬을 하였다는 생각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다(참조 실물교훈, 367). 이 청지기에 대한 예수의 평가는 불의한 청지기라는 말 속에 드러난다. 하지만 이 칭찬이 비유의 절정을 이루기 때문에 예수는 청지기에 대한 그 부자의 칭찬 가운데서 제자들과 듣고 있던 청중들에게 교훈이 될 유용한 가르침을 찾은 것이 분명하다. 그 이야기 자체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밝혀준다.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이것은 자기 이익의 관점에서 장래에 자기에게 빚을 갚아야 할 일단의 친구들을 만듦으로써 그렇게 했다는 뜻이다. “지혜롭게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니모스(phronimo-s)인데, 이 단어는 형용사 형태인 프로니모스(phronimos)와 함께 마음을 뜻하는 프렌(phre-n)에서 파생했다(참조 마 7:24; 10:16). 청지기는 머리를 썼다.” 그는 자신의 장래를 위하여 영리하고 약삭빠르게 계획함으로써 통찰력을 발휘했다. 근본적으로 그의 지혜예리함은 지속되는 현재의 기회를 끈기 있게 사용한 데에 있었다. 만일 청지기가 자기 주인의 채무자들과 마지막 결정을 하면서 이전에 사업을 수행할 때처럼 꾸물거렸다면, 그는 자기의 간사한 계획을 성공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빛의 아들들. 예수도 하나님의 아들”(5:9; 20:36; 11:52), “천국의 아들들”(8:12; 13:38), “너희 아버지의 아들”(5:45)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들은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하늘나라를 저희 삶의 우선으로 삼는 자들을 가리켰다(참조 마 6:33 주석).

더 지혜로움이니라. 오로지 이생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당신을 섬기기로 택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것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준비하는 것보다도, 세상이 주는 것을 추구하는 데 더 큰 열심을 나타내곤 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동료들을 섬길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보다도, 어떻게 우리 자신을 섬길 수 있는지에 대하여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약점이다(참조 실물교훈, 370). 그리스도인은 열심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이 좋지만 그의 열성은 지식을 좇는것이어야 한다(10:2). 그는 구별되는 자가 되기 위하여 가치에 대한 올바른 감각이 있어야 한다(참조 마 6:23~34 주석).

 

9. 친구를 사귀라. 여기에서 예수는, 유대민족의 지도자로서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선민들에게 부여한 진리와 축복의 청지기들인, 그 자리에 참석한(참조 14) 바리새인들(참조 실물교훈, 369)에게 말했다. 하늘의 청지기인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늘이 그들에게 위탁한 재물을 낭비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머지않아 그들의 청지기 직분을 셈하라는 부름을 받게 될 것이었다.

예수는 하늘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암시하지 않는다. 그가 주목을 끌고자 하는 진리는, 우리의 영원한 복리를 위해서 현재의 기회들을 선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이생에서 우리의 수중에 들어오는 물질적인 소유의 청지기에 불과하며 하나님이 그것들을 우리에게 위탁한 것은 충성스러운 청지기 직분의 원리들을 배우도록 하기 위함이다. 현세에서 우리가 소유하는 모든 것은 실제적으로 남의 것즉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의 이 아니다(16:12; 참조 고전 6:19). 우리는 우리에게 위탁된 물질들을 동료 인간들의 필요(참조 잠 19:17; 19:21; 25:31~46; 12:33)와 복음의 전진(참조 고전 9:13; 고후 9:6, 7)을 위하여 사용함으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익을 증진시켜야 한다.

 

없어질 때에. 본문상의 증거는 그것이 없어질 때”(when it fails)라는 독법을 지지한다(개역한글판에는 네가혹은 그것이라는 주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제임스왕역에는 네가 없어질 때”[when ye fail]로 되어 있음역자 주). “네가 없어질 때라는 번역은 네가 죽을 때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번역이 요구하는 것처럼, 사람이 죽을 때에 영원한 거처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재림 시에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가르친다(참조 요 14:3). “그것이 없어질 때[불의의 재물]이 없어질 때를 의미한다. 청지기는 수입원이 끊겼을 때(16:3) 비로소 미래를 생각했다(4). 이 비유가 강조하는 바는, 청지기가 그 직분을 이해하지 못했다거나 그의 죽음이 아니고, 개인적인 수입의 손실 문제를 해결하는 그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문맥과 취지는 그것이 없어질 때로 이해하기를 요구한다. “그것의 선행사는 이고, “그들의 선행사는 친구들이다.

 

10. 지극히 작은 것. 이 말에는 재물(또는 부)지극히 작은 것혹은 작은 것이라는 뜻이 내포돼 있다. 다시 한 번, 예수는 청지기의 부정직함을 칭찬하지 않았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참조 8절 주석). 제자들이나 청중 가운데 어떤 이들이 이 비유를 다소간 부정직함에 대한 구실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는 여기에서 분명하게 자기의 제자가 되려는 모든 사람이 철저한 정직성과 근면함의 특징을 가져야 한다는 심오한 진리를 언급한다. 미드라쉬(Rabbah, 3:1, Soncino ed., 49)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람을 작은 일로 시험해 보기까지는 큰 것을 주지 않으며, 시험해 본 다음에야 큰 일을 맡긴다고 하였다. 그 다음에, 미드라쉬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한 것으로 추정되는 말씀을 예로 들어 기록한다. “네가 네 양을 돌보는 일에 신임할 만하였으니 와서 나의 양을 돌보라.”

 

11. 참된 것. 즉 영적인 부요함”(참조 약 2:5).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6:27)는 그리스도의 권고와 비교하라. 페래아 봉사 조금 전에 예수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12:21)한 대신 자신들을 위하여 보화를 쌓는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12. 남의 것. 이생에서 한 사람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들 가운데 하나는, 그가 소유하게 되는 모든 돈과 물질이 자기의 지혜와 솜씨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빌렸다는 사실이다. 여호와는 엄숙하게 이 치명적인 기만에 대하여 경고했고 재물 얻을 능을 사람들에게 주신 분이 하나님임을 상기시켰다(참조 신 8:18 주석).

이러한 원리에 관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교훈들에서 유익을 얻지 못한 것이 한 국가로서 이스라엘이 실패하게 된 큰 원인이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 그분의 자비에서 오는 생애의 좋은 것들을 감사하지 않을 때, 그들은 생각이 허망하여지며또한 그들의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1:21)진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청지기일 따름이다.

 

너희의 것. 여기에서 예수는 영생과 그것에 수반되는 축복이나 기쁨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언급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8:17)이다.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보좌에 앉을 때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는 은혜로운 초청을 모든 신실한 자들에게 할 것이다(25:34).

 

13. 집 하인이없나니. 참조 마 6:24 주석. “하인이란 이 단어를 제외하고는 여기에서 한 예수의 말은 마 6:24의 내용과 동일하다. 그러나 이 단어는 비유에서의 하인”, 곧 청지기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이 문맥에는 적합하다. 예수의 이전 가르침 중 많은 부분이 페래아 봉사 기간에 반복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시대의 소망, 488). 많은 비평가가 주장하는 것처럼 누가와 마태가 그들의 복음서 내용 가운데 잘못된 위치에 이 말씀을 삽입했다고 추정할 명확한 이유가 없다.

 
 
 
 
 

누가복음 15:11-32
[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비유에는 탕자의 잘못을 견책하거나 조소하는 장면이 전혀 없다...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을 기꺼이 받아주신다는, 이 얼마나 놀라운 보증인가!...그대는 자기 자신을 개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만큼 충분히 선한사람이 될 때까지 그리스도께 나갈 수 없다고 속삭이는 원수(마귀)의 말을 듣지 말라...일어나서 그대의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라 그리하면 그는 멀리까지 나와서 그대를 영접하실 것이다.”(실물교훈, 205)

 


연속된 세 개의 비유는 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마지막 세 번째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본문연구

1. 본문의 모든 등장인물들을 찾아 적어보고, 그 가운데서 주요 인물들을 구분하라.
등장인물
주요인물

2. 다음에서 이 비유의 제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무엇일까? 각자의 관점으로 이 비유의 제  목을 정하고 그 이유를 설명해보라.  
1) 잃은 아들의 비유
2) 두 아들의 비유
3) 아버지의 사랑
4) 기타 __________________
   cf. 이 비유는 눅 15장의 세 개의 비유 중 마지막 비유이다. 일반적으로 1)잃은 양의 비유 2)잃은 은전의 비유 3)탕자의 비유로 일컬어진다.
   cf.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와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을 떠나 곁길로 나간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동정에 넘치는 사랑을 분명하게 드러낸다.”(실물교훈, 198)

3.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간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돌아오게 되었는가?

4.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어떻게 취급하셨는가?

5. 첫째 아들에 관한 부분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
   cf. 아버지와 두 아들은 각각 누구를 의미(상징)하는가? (눅 11:1-2 참고)

“여기에 나오는 맏아들은 세리와 죄인으로 간주되던 사람들을 업신여기던 그리스도 당시의 회개하지 않는 유대인과 각 시대의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을 대표한다.”(실물교훈, 209)

 

토의사항

1. 하나님께 대하여 내가 가지고 있는 오해나 불만은 무엇인가? 부정적인 생각이 있다면 말  해보고 서로 이야기 해보자.

2. 자기의 고집대로 해서 잘못된 경험이 있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 일까요?

3. 신앙인으로서 나의 자세는 아들의 정신인가 종의 정신인가?(사랑인가, 의무감인가?)

4. 맏아들의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잘못되었다면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누가는 그 자신이 탕자와 같은 이방인이었다. 다른 복음서에 기록하지 않은 이 비유를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기쁨, 영혼에 대한 관심 등과 같은 것들을 깨달았음이 분명하다. 우리도 아버지가 베푸시는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


11. 어떤 사람. 예수의 모든 비유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고 볼 수 있는 이 비유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부분(11~24절)은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심정, 아들을 향한 그의 사랑 그리고 탕자가 돌아왔을 때의 기쁨을 강조하고 있다. 두 번째 부분(25~32절)은 아버지의 사랑과 기쁨에 분개한 큰아들과 같은 사람들에 대한 견책이다. 두 번째 부분은 아마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원망(참조 2절)에 대한 그리스도의 응답이었을 것이다. 잃은 양과 잃은 은전의 비유가 구원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면, 잃은 아들의 비유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고 그와 조화되게 행동하는 인간의 역할을 강조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완전히 곡해했다(참조 7절 주석).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대표하고, 맏아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대표한다.

12. 둘째. 통제에 진절머리가 나고, 아마도 자신의 이기적인 관심에만 몰두한 아버지에게 자신의 자유가 과도하게 속박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이 청년은 분명 무엇보다도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거나, 아니면 최소한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스스로 돌이켰”을 때(17절) 행동방식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을 보면, 그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에 대해서도, 아버지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불행한 것은,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사실과 아버지의 모든 결정과 요구사항이 결국 아들에게 최선이 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가 지혜롭고 이해심이 깊었으며 공정하고 자비로우며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음을 밝히 보여 준다. 한편, 경험이 미숙한 이 청년은 아무런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도 아들로서의 특권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명백한 권리로 여겼던 것 같다. 그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자신이 생각한 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집을 떠나 자신의 길을 가며 마음에 맞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가 선택한 행동은 제5계명을 직접적으로 위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분깃. 즉 재산 가운데 그의 몫. 당시의 유대문헌이 밝혀 주듯이, 아버지가 죽었을 때 상속 규정의 효력이 발생하도록 하기보다는 오히려 생전에 아들들에게 유산을 분배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에게 그렇게 할 의무는 전혀 없었다. 따라서 청년의 요구는 매우 온당치 못했다. 분명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불신이며,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철저하고도 결정적인 거부를 의미했다.

나눠 주었더니. 아버지가 아들의 못마땅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 해도 합법적이고 타당했지만 허락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한 사실은 부모로서의 그의 판단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줄 뿐만 아니라, 아들의 어그러진 선택이 분명 아버지의 현명하지 못한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단서를 제공한다. 자신이 선택한 결과들을 경험을 통해 깨닫게 하기 위해 자기의 길을 가도록 묵인하는 것이 고집 센 자식을 위해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장자는 아버지의 재산 가운데 두 몫을 받았고, 아들 형제들은 각각 한 몫씩만 받게 되어 있었다(참조 신 21:17 주석). 장자에게 더 많은 몫이 주어진 것은 가족의 대표로서의 책임을 이행할 때 필요한 재원으로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아버지에게 아들이 둘밖에 없다면, 여기의 경우처럼(참조 11절) 차남은 아버지의 재산 중 3분의 1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에 재산 분배가 이루어진 경우에는, 재산은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는 손대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재산의 분할뿐만 아니라 그 몫을 실제로 요구했다. 이 이야기(참조 13절)에 나타난 것처럼, 그는 재산 중 자기 몫을 모두 현금이나 휴대하기 쉬운 귀중품으로 바꾼 것 같다.

13. 허랑방탕하여. 청년의 “생활”은 낭비벽이 심했거나 도덕적으로 방탕했을 것이다. 비유에서 맏아들은 동생의 “생활”에 대하여 도덕적으로 방탕한 점을 강조했다(참조 30절). 하지만 도덕적으로 방탕한 삶은 일반적으로 낭비벽도 포함한다. 청년이 상당히 많은 재산을 허비한 방식은 삶에 대한 그의 개념을 보여 준다.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사람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얻기 위해 세상으로 뛰어든다.

15.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돼지를 치는 것은 돼지를 부정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에게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아주 비참한 형태의 일자리였다. 이런 점에서, 그 청년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아마도 그는 그보다 나은 일자리를 잡을 자격도 갖추지 못했던 것 같다. 분명 그는 집에서도 유용한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시간을 선용하지도 않았고, “허랑방탕”(13절)함으로 이제 그는 사회의 낙오자로 남게 되었다.

16. 쥐엄 열매. 헬라어 케라티아(keratia). “작은 뿔들.” 케라티아는 꼬투리가 뿔 모양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케라테아(keratea, 캐롭[쥐엄], 개아카시아) 나무의 꼬투리를 묘사하는 말로 사용된다. 이 나무의 꼬투리는 침례자 요한이 먹은 음식의 일부였다는 전승에 입각하여 성(聖) 요한의 빵(St.-John’s-bread)으로 불리기도 했다(참조 마 3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당시의 유대 문헌에 나타나는 대로, 사람이 먹기 위해 씨는 꺼내 놓고 꼬투리는 보통 가축의 먹이로 사용되었다. 캐롭나무[쥐엄나무]는 팔레스타인에서 지금도 경작하고 있으며 미국으로도 전해졌다.

17. 스스로 돌이켜. 어떤 사람들은 죽음이 바로 눈앞에 엄습할 때까지도 진지한 생각 없이 삶의 조류에 휩쓸려 정처 없이 떠도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청년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살아왔으나, 이제 자신이 처한 절박한 필요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로지 물질적 차원에서만 그럭저럭 살아가는 사람들은 물질적인 궁핍과 욕망, 그리고 고통이 아니고는 인생의 교훈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이 청년은 말하자면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지금 다시 돌아왔다. 그는 새로운 경험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였고 지금껏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분명히 깨닫기 시작했다.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노예”가 아니라 “품꾼”이라는 점을 주목하라. 아마도 청년은 과거에 아버지의 품꾼들을 멸시하고, 어쩌면 학대한 적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아버지의 집에 있는 “품꾼”의 처지가 몹시 부러워 보였다. 사실 그는 “노예”나 다름없었고, 더구나 굶주리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깨닫지 못했지만 사실 그가 떠벌리던 자유는 최악의 형태의 속박이었음이 입증되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철학에 따라 꼴지어진 삶의 극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은 그의 어리석음이 낳은 결과이다. 아버지의 인생철학의 지혜가 지금은 그에게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18. 내가 일어나. 아마도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일어나.” 그는 불행과 황폐의 불길한 징후로 인생의 하늘을 뒤덮은 무기력과 절망에서 일어났다. 지금까지 그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의 본질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 없었다. 아버지의 공정함을 생각하고는 그가 품꾼들을 대한 것처럼 자신을 대할 것이라는 옹색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

20. 이에 일어나서…돌아가니라. 탕자는 지체 없이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결심하자마자 바로 실행했다. 비유에서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일에 주도권을 쥔 사람은 아들이다. 화해를 이루게 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라기보다는 아들의 선택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견지에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여기서 개인을 처음으로 이끈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며 각자가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화해를 이루는 첫 계단이라고 가르쳤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근거 없는 결론이다. 이러한 결론은 그리스도의 비유를 해석하는 기본적인 원칙들에 위배된다. 더욱이 잃은 양과 잃은 은전의 비유에서, 예수는 여기서 제시된 진리, 곧 구원과 화해를 이루는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설명했다. 또한 평범한 인간 관계에 기초된 비유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관한 모든 면모를 완전하게 반영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세상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선물로 준 것은 아들에 대한 인간의 믿음(요 3:16)이 있기 전이었고, 성경은 심지어 인간의 마음속에 의를 행하고자 하는 소망도 하나님이 불어넣었다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아버지가 저를 보고. 예수는,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아버지는 아들의 성격과 기질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재산의 분깃을 나누어 주었을 때나 그에게 작별을 고할 때에도 그의 모험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분명 아버지는 아들이 조만간 스스로 돌이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참조 17절 주석). 아들이 누더기를 걸치고 멀리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를 알아보았다. 예수는 11~19절에서 둘째 아들의 품성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했지만, 20~24절에서는 청중들에게 아버지의 성품을 나타내 보였다.

22. 옷. 헬라어 스톨레(stole-). 남성들의 헐거운 겉옷으로 발까지 내려오며, 보통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입었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바로 그를 종으로서가 아니라 아들로서 받아들였다. 맨 먼저 그는 아들의 누더기를 가리고 심지어 집안의 종들에게도 누더기 같은 옷을 입은 난처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자신의 외투를 벗어 아들에게 덮어 주었다(참조 실물교훈 203, 204,). 주인이 아들을 반갑게 맞이하려고 밖으로 달려갔을 때 종들이 동행하지 않았던 것 같으며, 따라서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라”는 명령은 아버지와 아들이 집에 가까이 갔을 때 내렸다.

가락지. 아버지가 여전히 그를 아들로 인정한다는 또 다른 징표. 이것은 아마도 도장이 새겨진 반지였을 것이고(참조 에 3:10; 8:2), 만약 그렇다면 그것을 그의 손가락에 끼운다는 것은 그의 신분이 가족의 일원으로 회복되었음을 훨씬 분명하게 가리킬 것이다. 청년은 틀림없이 전에 끼고 있던 가락지를 오래 전에 팔았거나 전당 잡혔을 것이다.

신. 문자적으로 “샌들”(참조 마 3:11 주석). 종들은 보통 맨발로 다녔다. “신발”은 아버지가 회개한 탕자를 종이 아닌 아들로 받아들였다는 또 하나의 표시였다. 제일 좋은 옷, 반지 그리고 신발은 필수품이 아니라 특별한 은총의 표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필요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영예롭게 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가슴 벅찬 사랑과 기쁨의 증거를 나타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는 자신에게 몰려드는 죄인들을 환영한 일이 정당함을 증명했고(참조 1절 주석), 그렇게 행동하는 예수에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했다(참조 2절 주석).

25. 맏아들. 비유에 나타난 대로는 둘째 아들에 대해서 더 이상 직접 언급돼지 않는다. 이제 그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둘째 아들과 관련된 비유의 교훈-하늘이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에게 베푸는 은혜로운 환영-은 명료하다. 이제까지는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에게 보인 우호적인 태도의 정당성을 입증했다(참조 2절 주석). 비유의 나머지 부분(25~32절)은 동생에 대한 형의 태도에 나타난 것처럼 “죄인들”에 대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태도(참조 2절 주석)를 다루고 있다. 비유의 이 부분은 예수가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대했던 방법에 대해 “원망하던” 독선적인 위선자들을 질책하는 말이다(2절).

밭에 있다가. 그는 충실한 아들이 그렇듯 일하고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늘 아버지가 충실한 아들들에게 베풀 상급을 바라면서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의무감과 행함으로 의를 얻으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진정한 순종 대신에 인간의 전통을 철저하게 고수하는 모조품 신앙을 드리면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삼상 15:22; 참조 마 7:21~27 주석)라는 사무엘의 말씀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풍류. 헬라어 쉼포니아(sumpho-nia). 문자적으로는 “제창”(齊唱). 영어 단어 “sym- phony”(교향곡)가 이 단어에서 나왔다. 쉼포니아는 여러 가지 악기, 제창(齊唱) 혹은 백파이프를 닮은 악기(참조 단 3:5 주석)를 지칭한다. 아마도 이 잔치에는 유급 연예인(演藝人)들도 데려다 놓았을 것이다. 분명히 아버지는 오랫동안 잃었던 아들의 귀환을 당당하게 축하할 기회를 만들어 아들의 회복된 상황을 온 마을에 증명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29. 내가…아버지를 섬겨. 문제는 맏아들이 아들로서보다는 오히려 종의 정신으로 일했다는 데 있다. 그는 재산을 벌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재산을 법적으로 요구했고, 그는 자신이 맏아들로서 누릴 권리로 생각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분노를 느꼈다(28절).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없더니. 헬라어는 “내게”를 강조한다. 형이 깨달았든지 그렇지 않았든지 그는 동생에게 베풀어진 배려를 시기하고 있었으며, 아마도 이 모든 배려가 자신의 것이었어야 했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그는 “살진 송아지”는 고사하고 “염소 새끼” 한 마리로도 보상받지 못했다고 불평하였다. 틀림없이 그의 마음속에는, 동생을 복권(復權)시킨 것은 지금은 합법적으로 맏아들의 소유(참조 12절 주석)로 되어 있는 재산의 분깃을 아버지가 난봉꾼인 동생에게 줄 수도 있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형은 여기서 심지어 살진 송아지도 법적으로 자기 것이었다는 사실과 아버지는 그것을 포함하여 다른 어떤 재산의 일부라도 자신의 동의 없이는 사용할 권리가 없음을 암시한 것 같다.

31.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항상” 함께 있지는 않았고, 따라서 특별히 잔치를 배설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과 우리에서 벗어나지 않은 양들에 대한 목자의 느낌을 비교해 보라(참조 4, 7절 주석). 아버지가 잔치를 베푼 적은 없었지만 맏아들을 향한 그의 한결같은 사랑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가 “살림”을 분배하여 둘째 아들에게 분깃을 할당할 때, 그는 또한 장자에게 배당된 두 배의 분깃을 맏아들에게 양도하였다(참조 12절 주석). 아버지가 인색했다는 주장은(29절)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이제 재산은 맏아들의 것이고, 그가 원하기만 하면 벗들과 “즐길 수” 있었다. 또한 아버지는 동생의 귀환으로 그의 권리가 결코 침해받지 않을 것임을 맏아들에게 보증한다. 바로 이것이 그를 괴롭혔다면, 그는 그런 걱정들을 접어두고 축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 아버지는 차근차근 맏아들의 주장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동생을 환영하는 데 참여하라고 권유한다(참조 28절 주석).

32. 마땅하다. 작은 아들은 그런 영접을 받을 자격이 없었지만, 아버지는 그 아들을 환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단언한다. 잔치는 공로 때문에 베푼 것이 아니라 단순히 아버지의 기쁨의 표현이고, 따라서 형이 이 기쁨에 동참하는 것 또한 “마땅한” 일이었다. 예수는, 이것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죄인들에게 취해야 할 태도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잃었던 작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이 맏아들에 대한 사랑을 결코 감소시키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사랑은 그들의 명백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 모두를 포용하였다. 다행히도 하늘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가 그것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근거하지 않는다.

 

누가복음 15:1-10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이 두 비유는 같지 않는 계급들을 대표한 것이다. 잃어버린 양은 자기가 잃어버림이 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 양은 목자와 양 무리에서 떨어져서 자신의 힘으로는 회복할 수 없다. 이 잃어버린 양은 저희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있음을 알면서 고민과 부끄러움과 심한 시험중에 싸여 있는 자들을 대표한다. 잃어버린 은전은 허물과 죄로 잃어버린 바 되었으나 저희의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줄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을 표상한다. 저들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졌으나 그것을 알지 못한다. 저희의 영혼이 위태한 가운데 있으나 저희는 거기에 대하여 의식이 없고 관심도 없다. 이 비유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하여 무관심한 태도를 가진 자라도 하나님의 동정의 사랑을 받을 대상자가 된다는 사실을 가르치셨다. 저들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찾아야 할 대상들이다."(화잇주석, 눅 15:8-10)

 
두 비유는 짝을 이루는 쌍둥이 비유로서 잃어버린 소유를 되찾기 위해 치른 고초와 그것들을 성공적으로 되찾았을 때 누린 기쁨을 강조한다. 첫 번째 비유는 목자의 관심을 강조하며, 따라서 하나님이 보는 영혼의 본질적인 가치를 강조한다. 두 번째 비유는 영혼의 가치를 다른 방식으로 예증한다.
 
 
본문연구

1. 세리와 죄인들의 반응과 달리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은 왜 예수님께 원망을 했는가?(눅 15: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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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두 비유에서, 목자와 여인을 통해 하나님의 품성의 어떠한 면들이 나타났는가? (눅 15: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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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두 비유가 가지고 있는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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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두 비유와 연관시켜 생각해 볼 때 초기교회의 구성원들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었는가? (고전 1: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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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의사항

  1.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떻게 찾아오셨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여러분은 자신의 가치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이 정말 가치 있다고 느낀적은 언제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3. 내가 찾아야 할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서로 이야기 해 봅시다.

 
“은혜는 은혜받기에 합당치 못한 인간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태도이다. 우리가 은혜를 찾는 것이 아니고 은혜가 우리를 찾아 왔다. 우리가 은혜를 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에서가 아니고 전혀 가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유일의 이유는 우리에게 그 자비가 크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화잇주석, 눅 15:8-10)
 


1. 모든 세리와 죄인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은 각각 뚜렷하게 구분되는 두 계층으로 볼 수 있다. 때때로 하나의 집단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아마도 “죄인들”에는 창기, 간부(姦夫), 그 밖에 율법을 공공연하게 위반하며 사는 자들뿐만 아니라 랍비들의 전통에 나와 있는 규정에 따라 의를 추구하려는 시늉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엄격한 바리새인들은 또한 랍비들에게 교육받을 특권을 누리지 못한 평민들, 즉 암메 하아레츠(‘amme ha-ares., 문자적으로 “땅의 백성들”)를 존경받을 가치도 없는 “죄인들”로 여겼다. 바리새인이라는 이름 자체가 일반 민중보다 우월한 집단의 일원임을 나타내며, 보통 백성들보다 더 의롭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모든”이라는 말은 예수가 이 지역에서 봉사하는 동안에 가는 곳마다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지역의 “세리들”과 “죄인들”이 몰려들었다는 사실을 나타낼 수 있다. 이러한 관심의 표현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더욱 화나게 했는데, 그들이 이 계층을 멸시함으로 이들이 자기들에게 등을 돌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사회에서 멸시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한 것과 그들의 반응이 종교지도자들을 초조하게 했다(참조 실물교훈, 186).

가까이 나아오니. 본 장에 나오는 비유들이 누가복음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제외하고는 그것들이 주어진 시간이나 장소를 가리키는 표시가 없다. 9:51~19:28은 아마도 AD 30년 늦가을부터 31년 초봄에 있었던 페래아 봉사와 관계된 사건들을 기록한 것 같다. 최소한 15장의 처음 두 비유와 어쩌면 셋째 비유도 페래아의 목초지(실물교훈, 186)에서 동일한 경우에 주어졌다(실물교훈, 192). 이제 십자가 사건이 있기까지는 2개월쯤 남아 있었다. 이 비유들에서 예수는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설명했다.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1절의 “세리와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별도의 두 계층으로 여겨졌다. 이때 여기에 참석한 비평가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나중에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였다.
 
원망하여. 헬라어 디아공귀조(diagogguzo-). 역시 “원망하다”로 번역된 공귀조(gogguzo-)의 강조형태. 이중 몇 사람은 예수가 가는 곳마다 미행하고 듣고 감시하여 보고하도록 하기 위해 산헤드린이 파견한 염탐꾼들이었다. 자신들을 의의 전형(典型)으로 여긴 자들이 예수의 면전에서 불편함을 느낀 반면, 의에 대해 아무런 주장도 하지 않았던 자들이 구세주를 가깝게 느꼈다는 것은 패러독스(paradox)이다(실물교훈, 186). 틀림없이 이러한 차이를 만든 것은 전자의 위선과 후자의 가식 없음이었다(참조 눅 18:9~14). 전자는 예수가 베푸는 축복의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후자는 그 필요를 깨닫고 그것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전자는 자신의 의에 만족했고, 후자는 자신에게 내세울 만한 의가 없음을 알았다. 우리가 예수 앞에서 어떻게 느끼는지를 자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죄인을 영접하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죄인들이라고 여긴 사람들을 거절했으나 예수는 환영했다. 이전 경우에도 예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회개시키러 왔다’는 선언으로써 이 비난에 응수했다(참조 막 2:17 주석). 여기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그런 사람들과 교제하고자 한 것은 죄인들의 생활 방식이 그에게 맞았기 때문이라고 넌지시 비추었다. 예수가 죄는 미워했으나 죄인을 사랑한 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죄를 품고 있으면서도 죄인을 증오했다. 예수가 죄인들을 “사랑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비판자들은, 예수가 “죄인들”이 범한 죄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자 했다(참조 15:1 주석). 예수는 고위계층에게 버림받은 이 사람들보다 사회적으로 우월하다는 인상을 전혀 풍기지 않았다. 그는 종교지도자들보다는 “죄인들”과 교제하기를 더 좋아한 것처럼 보였다. 예수는 이 “죄인들”에게는 격려하는 말만 했고, 독선적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책망과 정죄하는 말만 했다(참 막 3:4; 눅 14:4 주석; 눅 14:3~6, 11). 예수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에 대한 유대 지도자들이 불평한 다른 언급을 보려면 눅 7:34, 37을 참조하라. 
 
3. 이 비유. 예수는 또 다른 경우와 목적을 위해 또 다른 유사한 비유(참조 마 18:12~14)를 주었다. 페래아 봉사 기간에 예수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과 사회에서 멸시받는 계층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것으로 보이며(참조 14:21 주석), 이 기간에 그의 가르침은 대부분 그들을 염두에 두고 주어졌다. 15장의 비유들은 사람들이 흔히 멸시하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관심,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하나님의 노력, 그리고 그들이 그분의 호소에 응답할 때 느끼는 그분의 기쁨을 강조한다. 주목해야 할 점은, 세 비유가 죄와 구원 문제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보여 주며 어느 것도 그 자체로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각 비유에서 잃어버린 것이 발견되고 회복된다. 각 경우에서 예수는 죄인들을 향한 자신의 태도와 그들을 위해 기울인 노력을 해명하고 있다. 처음 두 비유는 짝을 이루는 쌍둥이 비유로서 잃어버린 소유를 되찾기 위해 치른 고초와 그것들을 성공적으로 되찾았을 때 누린 기쁨을 강조한다. 첫 번째 비유는 목자의 관심을 강조하며, 따라서 하나님이 보는 영혼의 본질적인 가치를 강조한다. 두 번째 비유는 영혼의 가치를 다른 방식으로 예증한다. 세 번째 비유는 탕자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하는 과정을 예증하며 강조한다. 예수는 이 경우처럼 종종 비유를 사용하여 질문이나 비판에 대답했다. 
 
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페래아의 고지에서 양을 치는 것은 흔한 직업이었고, 따라서 여기에 참석한 청중 가운데 많은 사람이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섰던 때를 상기했을 것이다. 예수가 들려준 비유들은 대부분 청중들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지식에 기초하였다(참조 제9권, 113).
 
그중에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잃은 것이 비교적 작은 문제로 보일지 모르나, 양 무리의 주인에게는 하나를 잃은 것도 중대한 관심사였다(참조 요 10:11). 동방의 목자는 일반적으로 모든 양을 개별적으로 알았고, 단순히 무리 중 한 마리 양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양 하나 하나의 유익을 위해서도 보살폈다. 그뿐 아니라, 양 한 마리의 손실로도 수입에 상당한 차질이 생길 수 있었다. 비유에서 양이 잃어버린 바 되었다는 사실은 양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에서 기인하였고, 따라서 일단 길을 잃으면 돌아갈 길을 찾는 데는 완전히 무력한 것으로 보였다. 양은 잃어버린 바 된 것을 깨달았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였다. 여기서 길 잃은 한 마리 양은 한 사람의 죄인과 잃어버린 바 된 세상을 모두 대표한다(실물교훈, 190). 
이 비유는 예수가 범죄한 이 세상을 위하여 죽은 것처럼(참조 눅 15:7 주석), 단 한 명의 죄인만 있었다 해도 그를 위해 목숨을 바쳤을 것임을 가르친다(참조 요 3:16 주석).
 
들. 헬라어 에레모스(ere-mos). “사막”, “광야.” 에레모스가 형용사로 쓰이면 “황폐한”, “고독한” 또는 “외로운”을 뜻한다. 이 단어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지역(참조 1:80 주석)을 가리키며, 따라서 보통 경작되지 않거나 경작할 수도 없는 땅, 곧 “황야”라는 뜻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일반적인 목초지, 구릉지, 고지의 계곡, 페래아의 협곡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들”은 아마도 각별하게 위험한 장소는 아니며, 따라서 아흔아홉 마리 양을 “들”에 두었다는 말이 소홀함이나 무심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태가 기록한 비유에는 목자가 양을, 문자적으로 “산에”(참조 마 18:12 주석) 남겨두었다고 되어 있다. 
 
그 잃은 것을…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비유에 나타난 것과 달리 목자가 양을 찾아다니지 않았다면, 양은 아마 잃어버린 채로 방치되었을 것이다. 잃은 양을 찾아 양떼와 우리 안으로 들이기 위해서는 목자가 솔선해야 한다. 구원의 효력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찾는 데 있다. 우리 스스로 그분을 찾도록 내버려졌다면 그분을 발견하지 못한 채 영원토록 찾아 헤매야 했을지도 모른다. 기독교 신앙을 단지 하나님을 찾기 위한 인간의 시도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생각은 인간을 찾는 하나님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요점을 완전히 놓쳐버리는 것이다(참조 요 3:16 주석; 마 1:21; 대하 16:9).
 
6. 나와 함께 즐기자. 이 가련한 짐승도 감사히 여겼을 것이지만 양의 기쁨보다 목자의 기쁨이 무한히 컸다. 
 
7.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로 하여금 단 한 명의 죄인을 위해서라도 위대한 희생을 치르도록 이끌었을 것이다(실물교훈 187, 196,; 참조 요 3:16 주석). 여기의 “죄인”과 1절의 “죄인들” 사이에 있는 미묘한 연관성을 주목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회개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롬 5:8)도 그 사랑은 우리의 것이었다. 우리를 회개로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길이 참으심에 나타난 “선하심”이다(롬 2:4; 참조 빌 2:13).
 
하늘에서는…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신성한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여러 가지 다른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러한 방식으로 자주 사용되는 단어가 “하늘”이다(참조 12:20 주석). 랍비들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먼저 사랑하고 관심을 기울이기 전에 그들이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십중팔구 사단이 그들에게 불어넣은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순종하는 자들에게만 애정과 축복을 베풀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것들을 거두어 가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는 탕자의 비유(11~32)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설명하고자 한다. 사실, 세상을 위한 예수의 사명의 모든 목적은, 그가 아버지를 나타내 보이기 위해 왔다고 한 진술(참조 마 1:23 주석)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10)라는 표현과 비교해 보라. 
 
의인 (just persons). 이 표현은 여기에 나타나 보이는 대로 옳다. 그렇지만 사실 예수는 여기서 풍자적으로 말한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의로운 상태에 있다고 자랑하였고(18:11, 12), 따라서 예수가 “의인들”을 언급했을 때 당연히 자신들은 그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참조 요 3:4 주석). 말하자면, 여기서 논지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예수는 그들의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의롭다면, 바로 그러한 사실에 의거하여 그들이 경건한 체 하면서 멸시한 “죄인들”은 예수가 베푸는 사랑과 돌보심을 필요로 하는 자들임이 입증되었다. 따라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비판적인 태도는 부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예수가 비슷한 경우에 제시한 또 다른 대답에 대해서는 눅 5:31, 32을 참조하라. 
 
8. 어느 여자가. 이 비유를 하게 된 배경과 잃은 양 및 잃은 아들의 비유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3, 4절 주석을 참조하라. 분명히 잃은 양의 비유가 남자 청중에게 전달된 것이라면, 이 비유는 특별히 여자 청중을 위해 주어졌을 것이다. 예수는 특히 여자들의 흥미를 끄는 예증을 자주 사용하였다. 잃은 양의 비유에서, 주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양에 대한 동정심과 함께 자신의 재정적 이득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동정적인 요인이 없다. 은전을 잃어버린 것은 그녀 자신의 부주의함 때문이었고, 그것을 되찾고자 하는 그녀의 바람은 전적으로 그것에 대한 그녀의 개인적인 관심에 기초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길을 잃어버린 책임이 양에게 있었다. 그러나 은전은 자신이 잃어버린바 된 것에 대한 책임이 없다. 이 비유는 영혼의 본질적인 가치, 그리고 하나님이 볼 때 잃어버린 죄인의 가치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분이 “부지런히 찾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드라크마. 헬라어 드라크마이(drachmai). 그리스도 당시의 헬라식 1드라크메(drachme-)는 은(銀) 3.56그램(0.1145온스)이었으므로, 농사꾼의 하루 품삯인 로마식 1데나리온과 거의 비슷했다. 10이라는 수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10은 어림수로 종종 나타난다(삼상 1:8; 전 7:19; 사 5:10; 암 6:9). 예수도 여러 비유에 이 수를 사용했다(참 마 25:1, 28; 눅 19:13, 16, 17). 열 개의 은전은 여자의 결혼지참금 중 일부였을지도 모르며, 따라서 그 여자의 예금으로 볼 수 있다. 아마도 그 여자가 집을 청소하면서 그것들을 옮기거나 살펴보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를 잃으면. 그녀의 부주의가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은전은 자기가 잃어버린 바 된 것을 몰랐다. 양처럼 산에서나 탕자처럼 “먼 나라”에서가 아니고 집안에서 잃어버린 바 되었다. 
 
등불. 일반적으로 동방의 주택은 방이 하나밖에 없었으며, 출입문이나 작은 격자 창문들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자연 채광(採光)이 될 수 없었다. 낮이라고 해도 그런 물건을 찾기 위해서는 그 여자에게 인공적인 빛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집을 쓸며.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동방 주택들은, 특히 시골 지역과 촌락의 경우 흙바닥으로 되어 있다. 이런 “바닥”으로 된 어두운 방안에서는 동전을 잃어버리기가 십상이지만 다시 찾기는 어려웠다. 아마도 부지런히 찾아야 동전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9. 나와 함께 즐기자. 기쁨을 다른 사람과 나누면 그것을 나눠 준 사람의 마음속에서 증강된다. 되찾을 가망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던 가치 있는 물건을 다시 찾은 경험을 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 여자의 기쁨을 이해할 수 있다(참조 롬 12:15). 그러나 세상이 주는 어떤 기쁨도 잃어버린 죄인을 찾아 예수에게 데려올 때 얻는 기쁨과는 비견될 수 없다.

 
 

누가복음 14:25~35

[2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찐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찌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 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하시니라

 

“누가 마음을 지배하는가? 우리의 생각이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가 누구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하는가? 우리의 가장 열정적인 애정과 우리의 최대의 정력을 누가 지배하고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면 우리의 생각은 그에게 있을 것이요 그를 생각함이 우리의 가장 즐거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소유와 우리의 몸을 그에게 바치게 될 것이다.”
(정로의 계단, 58)

 

제자는 처음에는 선생보다 못하지만, 후에는 선생처럼, 혹은 그 이상의 성장을 이룬다. 물론 모든 제자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성공하는 제자가 되는 조건은 무엇일까?

 

본문연구

 

1. 본문의 주제를 말해주면서 가장 많이 기록된 표현은 무엇인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본문에 나오는 다음의 사람들은 어떤 차이점을 갖는지 이야기해보자. 
        1) “허다한 무리”(25절)
        2) “내게 오는 자”(26절)
        3) “나의 제자”(27절)


2. 제자가 되는 세 가지의 조건은 무엇인지 찾아보고 서로 의견을 나누어 보라. 
   1) 26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27절(막 8:3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33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제자됨의 대가(代價)를 이해하도록 말씀하신 비유는 어떤점을 강조하고 있는가?
   28-32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4. 34-35절은 본문의 결론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cf. “소금”과 그 “맛”이 의미하는 것은 “헌신의 정신”이다(SDABC vol.5 812).
        “소금”에 대한 이해를 위해 욥 6:6, 마 5:13, 레 2:13을 읽어라.   
   cf.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는 예수께서 자주 사용하신 표현이다. 주로 비유이 결론에서 말씀하셨다. 제자 중에 사도 요한이 동일한 표현은 상당히 많이 사용하였다(계 2:7,11,17,29; 3:6,13,22). 그가 받은 계시와 예언의 결론을 위해 사용하였다. 이 표현은 듣는 자들에게 좌우간의 선택을 위한 도전과 호소이다. 
 

토의사항


1. 나는 주님의 제자인가? 그렇다면 그분의 제자로서 내가 치루어야할 대가는 무엇일까 생각해 봅시다. 


2. 하늘 왕국의 초청이 내 삶에 최고의 우선순위를 차지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 봅시다.

 

3. 제자로서 자신의 지난 행동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제자의 성공은 스승에게 얼마나 순종하였는가에 달려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였기 때문에 ‘제자’라 불리기를 바랐으나, 예수님의 제자 개념은 일반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과 같이 되는 것, 하나님의 것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2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제자 됨의 대가]. 이 부분의 권면이 주어진 때와 장소와 배경에 관하여는 확실한 기록이 없다. 아마도 때는 대략 AD 31년 초, 장소는 페래아였을 것이다(참조 1절 주석). 무리들은 갈릴리 봉사 기간에서처럼 이번에도 예수에게 몰려들었다. 예수의 봉사가 종국으로 치닫는 지금, 무리들의 마음속에는 그가 로마에 대항하여 반기를 들고 자신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선포하려 한다는 확신이 증폭되는 듯이 보인다(참조 마 19:1, 2). 틀림없이 많은 이들이 진실한 동기를 가지고 그를 따랐다고 볼 수도 있지만, 아마도 대다수는 호기심이나 이기적인 동기로 따랐을 것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하루는 군중들이 예수를 좇아오자 멈추어 서서 그들의 얼굴을 주시하면서 26~35절에 기록된 원칙들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주님을 따랐던 자들 중 다수가 그의 봉사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물이 되었다. 예수는 그들이 하고 있는 행동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모두에게 요청했다.

 

26. 무릇 내게 오는 자.
예수는 다음 네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1)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필요하다. 26, 27절. 
(2) 제자 됨의 대가를 주의 깊이 헤아려 보아야 한다. 28~32절. 
(3) 모든 개인적인 야망과 세상의 재물을 희생 제단에 내려놓아야 한다. 33절. 
(4) 그 희생 정신이 영구히 유지되어야 한다. 34, 35절.

 

자기 부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이 단어의 성경 용례를 살펴보면, 여기서는 일반적인 의미인 “미워하다”라는 뜻이 아님이 분명하다. 성경에서 “미워하다”는 단순히 전형적인 동방식 과장법의 하나로 “덜 사랑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신 21:15~17). 이 사실은 예수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 10:37)라고 말한 평행 구절에 명확하게 나타난다. 이 인상적인 과장법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는 천국이 그의 모든 삶에서 첫째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또한 물질적인 소유와 관련하여, 중요한 원칙은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첫째로 여기느냐 하는 문제이다(참조 마 6:19~34 주석).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나의 제자가 될 수 없고.”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헌신적인 봉사보다 우선하는 개인적 관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요구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언제든지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왕국의 초청이 우선 순위를 차지해야 한다. 예수를 위한 봉사에는 전적으로 그리고 영구적으로 자아를 부인하는 일이 요구된다. 26, 27절에 대해서는 마 10:37, 38 주석을 참조하라.

 

27.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형은 아마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팔레스타인에 도입했을 것이다(Josephus Antiquities xii . 5 . 4 [256]).
로마인들에게 십자가의 죽음은 노예나 가장 흉악한 범죄로 정죄된 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렇게 죽도록 선고받은 자는 사회로부터 혐오와 저주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자는 보통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나아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른다는 것은, 친구나 친척들,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불평이나 후회 없이 인내와 겸손으로 견디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들과 “화평”을 기대했던 바로 그 사람들의 손에 들려진 핍박의 “칼”(참조 34~37절)도 견디는 것이다. 이 원칙은 그리스도가 여러 경우에 반복했다(참조 마 16:24; 막 8:34; 눅 9:23; 14:27).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그의 십자가를 지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가장 높은 특권을 가진다. 그 어떤 사람에게도 이보다 더 큰 영예가 이르러 올 수 없다(시대의 소망, 224, 225,).

 

28. 너희 중에 누가.
 28~32절에 있는 두 비유는 제자의 책임을 경홀히 여기는 것에 대한 경고로 구성돼 있다. 처음에 잔치의 초청을 받아들였던 손님들은 다른 관심이 생겼을 때 결국 마음을 바꿨는데, 그들이 초청을 처음 받았을 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응했기 때문이다. 다음의 두 비유는 특히 그러한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망대. 
“망대”는 크고 값비싼 건물(참조 13:4)이거나 나뭇가지 등으로 간단하게 만든 구조물일 수도 있다(참조 마 21:33). 여기서는 분명히 크고 값비싼 건물을 가리킨다. 아마도 이때 예수가 가르치고 있던 마을에는 비유 가운데서 말한 것과 같은 배경을 지닌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완성할 수 없는 어떤 일을 시작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러한 계획은 응분의 보상을 가져오지도 못하고 시간과 힘만 빼앗는다. 제자 됨의 “대가”는 개인적인 야심과 세속적 관심에 대한 완전하고도 영구적인 포기이다. 끝까지 가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차라리 출발하지 않는 편이 낫다.

 

29. 비웃어. 
장래를 내다보지 못하면 실패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낭패가 초래된다.


31. 어느 임금. 
이 비유의 의미와 그것이 전체 이야기와 갖는 관계에 대해서는 28절 주석을 참조하라. 
앞의 예증은 상인들의 세계로부터 왔고 이것은 정치 세계로부터 왔지만 같은 진리를 설명한다.

 

이만. 
10,000명을 가진 임금에게는 이것이 열세로 보이겠지만, 다른 요소들이 적의 수적 우세를 상쇄시키고 승리할 가망을 줄 수도 있다.

 

33. 이와 같이.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비유를 통해 가르치고자 하는 교훈을 명확하게 진술한다. 
제자 되는 일에는 천국을 위한 봉사를 방해할 수도 있는 삶의 모든 것-계획, 야망, 친구, 친척, 소유, 부(富) 등-을 제단에 완전히 내려놓는 것이 필요하다(참조 9:61, 62). 사도 바울이 바로 이런 경험을 치렀다(참조 빌 3:8~10).

 

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34, 35절에 대해서는 마 5:13 주석; 막 9:50을 참조하라. 여기서 소금의 맛은 헌신의 정신을 대표한다. 예수는, 이런 헌신하는 정신 없이 제자가 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라고 천명했다.

 

35.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방금 언급된 중요한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자주 사용한 엄숙한 권고이다(참조 마 13:9, 43; 눅 14:35 등; 계 2:7, 11). 일반적인 의미에서 귀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아마도 여기서 그리스도가 우선적으로 말하는 것은, 마음이 진실하여 그리스도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그로 인해 분별력을 갖게 되는 영적인 주의력이다(참조 사 6:9, 10).

 

누가복음 14:16-24

[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종교에 대하여 전연 무관심한 것같이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 마음에는 안식과 평화를 갈망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비록 저들이 매우 깊은 죄 가운데 빠졌다고 할지라도, 저희를 구원할 가능성은 있다” (실물교훈, 236).

 

하나님께서는 메시야의 그 큰 잔칫상 주위가 가득 채워지길 원하신다. 손님을 부르는 그 초청은 성공할 것이다.

 

본문연구

 

  1. 이 비유와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참조 마 22:1~14) 사이에는 어떤 유사점이 있으며,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알아보라.  


  2. 누가복음 14장 16~20절의 핑계들을 열거하라. 주님의 초청에 온전히 헌신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어떤 것들일까? 그리스도께서 언급하신 핑계들을 현대판 핑계로 만들어 적어보라.
    1. 18절
    2. 19절
    3. 20절
  3. 집주인이 원래 청하였던 사람들을 대신하여 잔치자리를 채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1절-23절

 

토의사항

  1. 오늘날 예수님의 초청을 거절하게 하는 우리의 핑계거리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2. 하나님께서 베푸신 하늘 잔치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3. 내가 받은 축복들 중에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겨저 감사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는지 얘기해 봅시다.

 

누가복음의 그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최우선으로 삼으셨다. 가난한 자, 절름발이, 소경, 병신들은 가진 게 없으므로 천국의 요구에 쉽게 반응할 수 있었다. 믿음으로 “예” 함으로, 가장 비천한 영혼도 왕의 식탁에 앉을 수 있다.

 

 

16. 큰 잔치.  예수는 여기서, 청중들에게 익히 알려진 큰 잔치의 상징을 통하여 하늘나라의 풍성한 축복을 설명했다. 
그는 바리새인의 의도(15절)를 반박하지 않고, 그 사람의 신실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사실, 그때 그 바리새인은 복음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 비유와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참조 마 22:1~14)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지만, 차이점 또한 많다. 두 비유가 주어진 배경 역시 확연히 다르다. 눅 14장의 비유는 바리새인의 집에서 주어진 반면, 마22:1의 비유는 예수를 체포하려는 시도와 관련하여 주어졌다(참조 마 21:46).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이것은 복음 잔치의 첫 번째 초청, 즉 구약 시대 내내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초청을 나타낸다. 특별히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보낸 하나님의 반복적인 호소를 가리킨다(참조 21~23절 주석).

 

 17. 종을 보내어. 특별한 의미에서 예수 역시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라고 보내진 “종”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오늘날에도 동방에서는 손님들에게 초청한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잔치를 시작하기 며칠 전에 사자(使者)를 파송하는 것이 관례이다. 손님이 초청받은 것을 잊었거나 참석할 시간을 알지 못할 경우에, 이로 인해 행사를 위해 준비하고 지정된 연회 장소까지 도착할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 서양보다는 달력이나 시계에 관심이 덜 한 동방에서는 그같이 생각나게 해주는 사람이 실제적으로 요긴한데, 그것은 주인이나 손님을 당황하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18. 다 일치하게. 초대받은 손님들이 친절한 주인을 욕보이기로 공모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세 명 이상이었지만(16절), 예수가 열거한 세 종류의 변명은 종이 찾아가는 곳마다 들었던 이야기들의 실례로 주어진 것 같다. 세 명 이상이 등장하는 상황에서 세 명만을 대표로 언급한 비슷한 예증에 대해서는 19:16~21을 참조하라.

 

사양하여. 손님으로 청함 받은 자들 중 누구도 사양할 합당한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 나름의 핑계를 고안해냈다. 물론 각 경우마다 진짜 이유는 청함 받은 자들이 다른 일에 더 많은 관심이 쏠려 있었다는 데 있었다. 다른 일이란 잔치에 참석하게 되면 일시적으로라도 제쳐놓아야 할 것이었다. 물론 그 변명들은 잔치를 베푼 사람의 환대와 호의에 대해 감사하지 않은 것을 의미했다. 복음 잔치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은 영원한 것들보다는 현세적인 이익에 더 많은 가치를 두었다(참조 마 6:33).
동방에서는, 불가피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흔히 친교를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어떤 아랍인들은 최초의 초청을 받아들인 후에 다시 알려주는 자(참조 17절 주석)의 초청을 거절하는 것을 선전포고로 여기기도 한다. 반면, 초청을 수락하고 잔치에 참석하는 것은 우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한다.

 

밭을 샀으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밭을 이미 사들였기 때문에 구실이 빈약하다. 매입한 사람은 분명히 거래를 매듭짓기 전에 땅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을 것이다.

 

 19. 소 다섯 겨리. 역시, 매입은 이미 이루어졌다. 그 사람은 거래가 얼마나 잘 이루어졌는지 시험해 보는 데 여념이 없었으며, 따라서 잔치에 참석하기를 진정으로 원했다면 그 일은  다음으로 쉽게 미룰 수도 있었을 것이다.

 

 20. 가지 못하겠노라. 세 번째 변명을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무례하게 보인다. 다른 이들은 정중한 척하면서 양해를 구한 반면, 그는 종에게 딱 잘라서 “가지 못하겠노라”라고 통고했다. 이 사람이 거절한 것은 아마도 결혼하고 첫해에 해당되는 사람에게는 정규적인 병역이나 시민의 의무 중 일정 부분을 면제해 준다는 사실에 근거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참조 신 24:5 주석). 그래서 그는 “가지 못하겠노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법이 정상적인 사회관계에서 그를 면제시켜 주지는 않았으며, 그렇게 핑계를 꾸며대는 어떠한 노력도 거짓 구실일 뿐이었다. 이 사람의 변명은 사실 처음 두 사람보다 나을 게 없었다.

 

 21. 노하여. 종이 구차한 변명들을 하나씩 전하자 그 친절한 주인은 노를 발했다. 원래 그들은 모두 초청을 받아들였고, 주인은 그들의 수락을 믿고 잔치를 준비해 왔다. 그러나 준비가 완료되고 음식이 마련된 지금, 주인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작당한 것처럼 보인다(참조 18절 주석). 더군다나 그는 잔치를 준비하기 위해 상당한 비용을 지출했다.
틀림없이 하늘잔치를 준비하는 하나님은 사람이 노하는 것처럼 “노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잃어버린 인류에게 구원의 축복을 제공하기 위해 행한 모든 일에 비춰볼 때, 사람들이 그분의 의와 은혜를 받아들이라는 자비로운 초청을 경홀히 여기도록 하는 것은 그분의 자애로운 가슴을 몹시 아프게 할 수밖에 없다. 하늘의 모든 자원(資源)이 구속 사역을 위해 투자되었고, 따라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을 감사하며 받아들이는 것이다. 

 

빨리…나가서. 이것은 주인이 값비싸게 준비한 양식이 낭비되는 것을 보길 원치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자신의 절친한 친구들이 호의의 표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그는 기꺼이 낯선 사람들을 초청할 것이다. 이 조치는 예수가 이 비유를 들기 직전에 준 권면(참조 12~14절)과 조화되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가 지금 참석하고 있는 잔치의 손님들이 그 권면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 잔치에 동석한 사람 중 하나가 다른 주제로 돌리고자 했었다(참조 15절 주석).

 

거리와 골목. 복음의 초청은 여기서 “도시”의 거주자로 대표된 유대 민족에게 처음으로 주어졌다. 초청을 거절한 도시의 주도적인 시민들은 유대 지도자들이었는데, 그들 중 몇 사람은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열린 잔치에 예수와 함께 모여 있었다(참조 1절 주석). 초청을 거절한 손님들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특권층을 대표한다. 이제 이 자비로운 주인은 자신의 선택받은 친구들에게 돌아서서 “도시”의 낯선 자들, 곧 사회에서 무시와 멸시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향한다. 이들은 초대받은 손님들과 같은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고, 따라서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세리요 죄인으로서, 국가 종교 지도자들에게 버림받은 자들로 취급받았다. 그렇지만 그들도 복음에 굶주리고 목말라했다(참조 마 5:6 주석).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 흔히 유대인들은 인간이 물질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고통받는 것은 하나님에게 은총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겼으며, 따라서 이러한 계층은 동료 인간들에게 무시와 멸시를 받았다(참조 막 1:40; 2:10 주석). 
하나님이 그들을 버렸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사회도 그들을 폐인으로 여겼다. 이 비유에서 예수는 하나님이 그러한 사람들을 멸시한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고통이 자신들의 나쁜 행실이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생겼다 할지라도 동료 인간들에게 그들이 멸시받아서는 안 됨을 천명하고 있다. 여기서 가난에 찌들고 신체적으로 장애가 있는 자들은 일차적으로 도덕적, 영적으로 파산 상태에 있는 자들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들은 구원의 축복을 돌려 받기 위해 하나님께 드릴 만한 자신의 선행이 하나도 없다.

 

 22.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종은, 자비로운 주인이 자신의 연회장이 가득 차게 되기를 몹시 바라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위대한 복음의 잔치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땅을“헛되이”, 다시 말해 황무지로 창조하지 않고 행복한 인류의 영원한 처소로서 거기에 살도록 계획했다. 죄가 얼마 동안 이 목적이 성취되는 것을 미루었지만, 결국 성취될 것이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마다 복음 잔치에 참여하여 새롭게 될 세상에서 영원히 거할 기회를 부여받았다. 이 비유는, 어떤 사람이 거절한 똑같은 기회를 다른 사람은 열렬하게 받아들일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참조 계 3:11).

 

 23. 길과 산울가. 원래 복음 잔치에 초청받은 자들은 유대인들이었다(참조 16, 21절 주석).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부른 이유는, 그들을 동료 인간들보다 더 사랑하거나 더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맡겨진 신성한 특권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예수가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인 세리와 죄인과 교제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참조 막 2:15~17 주석), 이로 인해 유대 지도자들이 깜짝 놀랐다. 그는 갈릴리 봉사 기간 동안 이런 사람들, 즉 “거리와 골목”에 있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참조 14:21 주석). 그러나 AD 30년 봄, 갈릴리 사람들이 거절하자(참조 마 15:21; 요 6:66 주석), 예수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과 사마리아인을 위해서도 계속하여 봉사했다(참조 마 15:21 주석). 그러나 “길과 산울가”의 사람들에게 복음의 초청을 제공한 것은, 스데반을 돌로 쳐죽임으로 극에 달한, 복음의 초청에 대한 유대 국가의 최종적 거절 이후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것을 의미한다(참조 행 1:8). 
비유에서 “길과 산울가”는 “도성” 밖에 있으며, 따라서 비유대인 곧 이방인들을 대표하기에 적당하다(참조 14:21 주석). 사도들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다가 동포들의 반대에 직면하자 이방인에게로 관심을 돌렸다(행 13:46~48).

 

강권하여. 헬라어 아낭카조(anagkazo-). 힘이나 설득으로 “강요하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회심시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해도 됨을 정당화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는 무력에 호소하여 사람들이 당신을 강제로 믿도록 하지 않았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으며 사도 시대 교회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당신의 말씀을 그렇게 해석하게 할 의도가 전혀 없었음을 증명한다. 사실, 가르침과 모본을 통해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개인적으로나 또는 복음의 공적인 사신들로서 불평거리들을 가지고 논쟁하거나 보복하지 말라고 되풀이하여 권면했다.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핍박해서도 안 되었을뿐더러(9:54~56), 핍박을 온유하게 견뎌내야 했다.
 “강권하여 데려오라”라는 예수의 말씀은 단순히 초청의 긴급성과 하나님의 은혜의 강권하시는 힘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자비가 곧 강권하는 힘이 되어야 했다(참조 실물교훈, 235). 아낭카조는 예수가 그의 제자들을 배에 타라고 “재촉하셨던” 경우(마 14:22)를 언급할 때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가 염두에 두고 말한 끈질긴 호소, 그리고 과거 수 세기 동안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이 당연하다고 여겼고 오늘날에도 기회만 되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의존하려고 하는 물리적인 힘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잔치에 손님들을 데려오기 위해 어떤 경우에도 물리적인 완력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비유 자체가 증거한다. 만약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주인의 의도였다면, 그는 먼저 초대받은 손님들에게 무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복음 잔치의 초청에는 언제나 “원하는 자”라는 말이 수반된다(계 22:17). 이 비유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데려오기 위해서는 박해를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는 사상을 일절 인정하지 않는다. 종교 문제에 무력이나 박해를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마귀에게 부추김을 받은 방법이다.

 

내 집을 채우라. 참조 22절 주석. 주인은 “많은” 손님들을 초청했다(참조 16절). 더욱이 종이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갔지만 손님방을 채우기에 충분한 사람들을 찾을 수 없었다(참조 22절).

 

 24. 그 사람은 하나도…못하리라. 전에 청했던 손님들을 이렇듯 강하게 배제한 표현은 비유에 나타난 주인의 선언이며, 그렇다고 이것이 하늘나라가 누군가를 임의로 배제하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야기의 은혜로운 주인은 무례하게도 거절당한 처음 초청을 단순히 취소하는 것에 불과하다. 분명히 그의 집은 이제 “채워”(23절)졌고 더 이상 남은 자리가 없다. 그러나 하늘나라에는 들어가기를 원하는 모든 자를 위한 자리가 충분하다(참조 22절 주석).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하여 이 세상의 재물이 반드시 하늘나라와 모순된 것이라고는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물질에 대한 지나친 애정이 사람을 하늘에 가기 부적합하게 만들며 사실 하늘에 속한 것에 대한 갈망에서 멀어지게 한다고 가르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참조 마 6:19~24 주석). 지상의 재물을 모으거나 세상의 쾌락을 즐기는 일에 최우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그들의 애정을 하늘의 사물보다는 세상에 두고 있기 때문에 하늘에서 제외될 것이다(참조 마 6:25~34). 세상의 사물에 대한 탐욕은 결국 하늘의 것들에 대한 소망을 제거하며(참조 눅12:15~21 주석), 따라서 탐욕스런 사람들은 축적한 부를 나누어주라는 요청을 받을 때 “근심하며” 떠난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마 19:23) 것은 흔히 들어가고자 하는 충분한 열망이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즉 그들이 나중에 마음을 바꾸었을 경우에도. 구원은 하나님이 내민 초청과 그에 대한 인간의 수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가지 중에 하나만으로는 효력이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총을 경홀히 여긴 사람들이 너무 늦게, 즉 복음의 초청이 더 이상 발해지지 않을 때에야 마음을 바꾸려 할 가능성이 있음을 거듭거듭 보여 준다. 결국 그 초청이 철회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어떤 시간적인 한계를 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제외된 자들이 최종적인 결정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중에 마음을 바꾼다 해도 그 변화란 자신들에게 나타난 결과를 보면서 그릇된 선택을 했음을 깨달은 것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진실한 소망이 그들에게 갑자기 생겼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 먼저 본문을 읽으면서 자세히 관찰하세요.

 

누가복음 13:1~9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8]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훈을 말씀하실 때 심판의 경고와 자비의 초청을 연결시키셨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사람의 생명을 멸하려 함이 아니요 구원하려 함이라’(눅 9:56),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당신의 자비로운 사명과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과의 관계를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설명하셨다.”(실물, 212)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 대한 솔직한 이해가 필요하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그분의 품성을 품지 않으면 결국에는 그 이름을 잃게 될 것이다.

 

본문연구


1. 본문에서 갑작스런 죽음을 당한 두 부류의 사람들은 각각 어떤 경우인가?
    1) 1절 ________________________
    2) 4절 ________________________
   cf. “피를 제물에 섞었다”는 의미-갈릴리 사람들의 “해받음(2절) 즉, 제사를 드리는 중에 빌라도에 의해 학살당한 것을 의미한다. 다음을 읽어보라.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소동이 자주 일어났는데 빌라도는 이것을 폭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한 번은 그의 군대들이 성전 뜰 안까지 침입해 들어가 거기서 제물로 드릴 짐승을 잡고 있던 갈릴리인 순례자들을 죽인 일이 있었다.”(실물, 212-213)

 

2.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은 무엇이었으며,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는가? 
    2-5절 ________________________

3.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동일한 표현으로 반복된 말씀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말씀 중에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무엇인가?
    ________________________
   cf. 요 3:17을 읽고 대조되는 두 단어를 찾아보라.

 

 4.  6-9절에 기록된 [무화과 나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신 것은 무엇인가? 아래의 질문들에 답해보라.
    ________________________
   1) “무화과 나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사5:7, 61:3)
   2) “열매가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사 5:2)
   3) “과원지기”는 누구의 역할을 말하는가?(사 27:3)
 

◈ 토의사항


1. 이 세상에 일어나는 재난과 사고와 질병 등의 이유는 무엇일까?
   cf. 최근에 이러나는 여러 가지 재난과 사고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2.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통과 죽음의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3.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어떻게 드러난다고 설명할 수 있는가?
   cf. 호 14:1-8을 함께 읽고, 하나님의 심정과 우리의 할 일을 이야기 해 보자.

 

인간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지만, 설명하지 못하는 고통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할 자유는 없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에 의해 심판되어질 것이다.

 


 

1. 그때 마침. 찍어 버리라. 문자적으로, 포도원의 포도나무 “중에서” “베어내 버려라.” 그때는 아마도 AD 30~31년 겨울이었을 것이다. 예수는 시대의 징조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도중이었다.

 

두어 사람이 …예수께 고하니. 이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이렇게 고하는 그들의 동기가 무 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들에게 어떤 저의(底意)가 있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는 듯 하다.

 

와서. 이 학살 사건은 금방 있었고(실물교훈 212, 213,), 따라서 그리스도에게 말한 이 사람들이 가장 먼저 그 소식을 전해왔을 것이다.

 

갈릴리 사람들. 요세푸스가 유대 지방에서 빌라도와 그 밖에 여러 행정관료들에 의해 저질러진 유사한 대학살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이 학살은 누가 외에 다른 어떤 기자도 언급하지 않는다. 빌라도는 몇 년 후인 AD 36년에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는 사마리아인들을 학살한 일로 가이사에게 소환되었다.


섞은 일. 그들은 희생제사를 드리는 바로 그 행위를 하는 도중에 학살되었다.


 2.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이 대답에는, 소식을 전한 자들과 예수 주위에 모여 있던 청중들이 어떤 면에서 이 학살을 목숨을 잃은 자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겼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참 욥 4:7; 8:4, 20; 22:5; 요 9:1, 2). 예수는 이러한 판단을 단호하게 부정하고 있다. 적당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수는 고난을 죄에 대한 형벌로 보는 통념을 배격했다. 사고나 불행을 “하나님의 행위”로 보려는 유혹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혹하고 잔인한 아버지로 생각하게 하려고 애쓰는 사단에게서 왔다.

 

 3. 회개치. 문자적으로는 “회개하라, 그리고 계속하여 회개하라.” 죄에 대한 형벌은 최후 심판의 큰 날에 받게 된다. 예수는 빌라도도 갈릴리 사람들도 정죄하지 않았다. 유대인 가운데 누구라도 예수가 빌라도의 잔혹함을 규탄해주기를 바랐다면, 그들은 실망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원하기만 하면, 겸비한 마음을 가지고 좀 더 완전하게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는 방법을 인생의 모든 경험에서 배울 수 있다. 절망이나 불행 그리고 재앙은 그것들을 목격하든지 경험하든지 겸손하고 수용적인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귀중한 교훈들을 가르쳐줄 수 있다.

 

 6. 이에 비유로. 예수의 가르침과 비유 해석 원칙에 대해서는 제9권, 113~119을 참조하라. 이 비유를 통해 예수는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의 관계를 보여 주고자 했다(실물교훈, 212). 또한 이 비유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인간들이 적시에 회개해야 할 필요와 관련하여 설명한다.

 

포도원. 팔레스타인의 농원에서는 오늘날에도 포도나무 사이에서 자라는 무화과나무를 흔히 볼 수 있다.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는, 하나님은 열매 맺지 않은 사람들도 사랑하지만 그분의 자비가 결국 끝날 수 있다는 진리를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 무화과나무가 만족스러운 실과를 맺지 못한다면 베어질 것이었다(참조 사 5:1~7). 일반적인 의미에서 무화과나무는 모든 개인을 나타내며, 특별한 의미에서는 유대 민족을 대표한다.

 

 7. 삼 년. 포도원 주인이 이 나무에서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 수령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이후로 3년이 흘렀다. 주인은 나무가 열매를 맺으려고만 했다면 충분히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찍어 버리라. 문자적으로, 포도원의 포도나무 “중에서” “베어내 버려라.”

 

땅만 버리느냐. 헬라어는 “또한”(also)이라는 단어를 추가하고 있다. 환언하면,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았으면 생산적으로 쓰일 땅도 차지하고 있었다. 유대민족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역할을 성취하는 일에 쓸모 없는 곳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계획을 수행하는 데도 장애물이 되었다(실물교훈, 215).

 

 8. 그대로 두소서. “삼 년”(7절)은 예수의 공생애에 포함된 처음 3년을 상징적으로 가리킨다는 주장이 있어 왔다. 이제 예수가 침례받은 후 3년이 흘러(참조 마 4:12 주석) 십자가 사건이 있으려면 불과 몇 개월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참조 13:1 주석) 이때는 “삼 년”이 지난 후에 온 은혜의 해였다. 하나님의 자비는 여전히 유대 민족이 회개하고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도록 기다리며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또 한 번의 기회가 마지막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경고는 자비를 연장하는 것과 관계돼 있었다.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틀림없이 “과원지기”(참조 7절 주석)는 적어도 포도원의 다른 나무들만큼 그 나무를 돌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무가 열매 맺도록 도우려는 그의 마지막 노력은 이전보다 훨씬 더 한 것처럼 보인다(참조 마 21:37 주석; 사 5:1~4).

 

 9.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if it bear fruit, well). 「제임스왕역」에 이탤릭체로 되어 있는 “well”은 첨가된 단어이다. 헬라어는 사상의 갑작스런 단절을 나타내는 보기 드문 표현법인 돈절법(頓節法, aposiopesis)을 사용하고 있다. 시험의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한 것이 없다.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누가복음 12:35-48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42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45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 먼저 본문을 읽으면서 자세히 관찰하세요.

 

그분은 우리를 청지기로 삼으셨다. 믿음과 사랑으로 드린 우리의 가장 작은 헌물과 가장 비천한 봉사는, 영혼을 구원하여 주님을 섬기고 그분의 영광을 증진시키기 위한 헌신의 예물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관심과 번영은 모든 관심사를 능가하여야 한다. 쾌락과 이기적 관심을 생애의 주된 목적으로 삼는 자들은 충성스러 운 청지기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기 위하여 자아를 부인하고, 자신과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봉사 사업에 드리는 자들은 이기적인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행복을 발견한다.”(1보감 377)

 

깨어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고유한 특성 곧 세상과 분리된 것을 나타내야 한다. 우리가 깨어 있는 것을 통해 우리는 세상에서 참으로 순례자며 나그네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본문연구

  1. 누가복음 12장 35~40절은 인자의 임함이 늦어질 것임을 가정하고 있다. 우리는 기다리는 시기에 살고 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살아갈 길을 어떻게 가르쳐 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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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예비”하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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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현대 교회에 있어서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교회는 어떻게 세상을 향해 책임감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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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교회에서 책임을 가진 사람들-목사, 교회 직원 등등-에게 특히 적용된다. 권세 (44절)는 계산하는 날에 책임(42, 43절)과 변명을 요구한다. 넓은 의미로, 그것은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에게 해당된다.

 

토의사항

  1. 깨어서 기다린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이야기 해 봅시다.

  2. 세상에서 내게 맡겨진 일들을 하면서 사는 삶과 깨어 주인을 기다리는 삶을 어떻게 조화 시키는 것이 옳은 것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3. 예수님의 재림의 기별을 먼저 받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보여주어야 하는 삶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우리의 진정한 위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 는 그리스도께 고용된 종으로서의 우리의 의무에 대해 올바른 관점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분은 당신의 고난의 생애와 흘리신 피로써 우리에게 삯을 미리 지불하심으로 당신 자 신을 섬기도록 우리를 붙들어 매셨다. 우리가 가진 모든 좋은 것들은 우리 주님께로부터 빌린 것들이다.”(화잇주석, 눅 12:42)
 
“나는 세상의 근심에 씌여 있는 애착과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의 재물을 늘여 가면서 우리는 구주께서 명령하신 깨어 기다리는 위치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보았다. 천 사는 말하였다. “그들은 세상하나만 얻을 수 있다. 하늘 보화를 얻으려는 그들은 세상의 것을 희생해야 한다. 그들은 두 세계를 다 얻을 수 없다.” 나는 사단의 속이는 덫을 빠져나오기 위해서 깨어 기다리는 일에 신실한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게 되었다. 그는 깨어 기다려야 할 사람들을 세상을 향해 한 발 전진하도록 유도하라. 그들은 앞으로 전진할 의향은 없지만 그 한 발을 뗀 만큼 예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 발을 떼기가 쉬워 진다. 그리하여 한발 한발 세상을 향해 가게 된다. 결국은 그들과 세상의 차이는 신앙 고백 즉 명목만 남게 된다. 그들은 그들의 거룩하며 고유한 성격을 잃어버리고, 결국에는 그들과 그들 주위에 있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차이점이라는 것은 그들이 신앙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점밖에 없을 것이다.”(2증언, 193)

“세째 천사의 기별을 믿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경솔함과 농담과 경박한 행동으로 흔히 하나님의 사업에 손해를 준다. 나는 이 같은 악이 우리의 대열에 편만해 있는 것을 보았다. 주 님 앞에 겸손해져야 한다. 하나님께 속한 이스라엘은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야 한다.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사람에게 칭찬받기를 하나님께 불쾌히 여김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천사는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대들을 심판하 고 연약한 그대들의 생명의 줄을 끊어 버리심으로 심판을 위한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무방비 상태로 무덤에 내려가지 않도록 그대들의 마음을 정돈하라. 그대들이 하나님과 즉시 화평의 관계를 이루지 않고 그대 자신을 세상과 분리시키지 않으면서 무덤속에 침실을 마련하 게 된다면, 그대들의 마음은 더욱 굳어지고, 그대들은 거짓된 도움 곧 가상적인 준비에 의존 하게 되고, 그대들의 잘못을 너무 늦게 발견함으로 건전한 기초 위에 세워진 소망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나는 안식일 준수자라고 공언하는 자들 중 어떤 사람들이 연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를 꾸미기 위한 유행을 이것저것 연구함으로써 차라리 내어 버리는 것만 못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대 자신을 세상 사람들과 같은 모양으로 보이게 하고 할 수 있는 대로 아름답게 하고자 애쓰고 있을 때, 바로 그 육체가 며칠이 못 가서 벌레의 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대들이 그 육체를 그대들의 취향에 맞게, 또한 눈 을 즐겁게 하도록 꾸미고 있는 동안, 그대는 사실상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는 셈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대의 허무하고 악한 교만을 미워하시고, 그대를 부패와 부정(不淨)이 가득한 회칠 한 무덤으로 보신다.”(1증언, 133-134)


35. 허리에 띠를 띠고.  즉 행동할 준비를 갖추고(참조 시 65:6 주석). 깨어 있으라는 것은 이 간단한 비유의 요지다. 예수는 여기서 처음으로 재림에 관하여 공개적으로 가르친다. 그의 지상봉사의 끝이 눈앞에 임박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승천 그리고 권능과 영광 가운데 있을 재림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키고자 했다. 이 비유는 주인의 다시 오심을 바라보고 바르게 살아가는 삶을 강조한다.

38. 이경. 대략 오후 9시와 자정 사이(참조 마 14:25 주석). 삼경. 대략 자정부터 오전 3시까지.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여느 때처럼, 베드로는 자칭 열두 제자의 대변인으로 활동한다(참조 마 14:28; 16:16; 17:14 주석).

모든 사람에게. 열두 제자와 무리들이 함께 있었다(참조 1절 주석). 따라서 베드로는, 깨어 있으라는 예수의 권고가 “주인”의 “종”으로서 특별히 제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전반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인지 의아해한 것 같다.

42.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 이것은 깨어 예비하는 일의 중요성을 보여 주기 위하여 주어 진 여섯 개의 예증 가운데 두 번째 예증이다.
 
그 집 종들을 맡아. 이 비유는 특별히 “믿음의 권속”(갈 6:10; 참조 엡 2:19)의 종교적, 영 적 지도자들에게 적용되는데, 그들의 의무는 구성원들의 필요를 공급하고 그리스도의 오심 이 임박했음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을 교훈과 모본으로써 증거하는 것이다.

때를 따라 양식을. “제때에 양식을”(「개정표준역」).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벧전 5:2)고 깨어 준비하는 일의 본이 되는 것(3절)은 목자의 의무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양떼를 셈하라 고 요구할 것이고, 따라서 목자들은 각기 맡겨진 책임을 신실하게 수행해야 한다(참조 겔 34:2~10).

43. 복이 있으리로다. 즉 “행복하리로다”(참조 5:3 주석).

44. 그 모든 소유를. 즉 그는 더 큰 책임을 맡게 될 것이다(참조 24:21 주석). 보디발 집에 서의 요셉의 경험과 비교해 보라(참조 창 39:3~6).

45. 마음에 생각하기를. 그 “악한 종”은 주인이 더디 올 것이라는 믿음을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의 생활방식으로 주인을 배반하고 있다. 그는 주인이 곧 돌아오리라고 믿는 것처럼 행동하지는 않는다.

주인이 더디 오리라. 그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의 실제성을 부인하는 “기롱하는 자”는 아니었다(벧후 3:4). 그는 믿는 체한다. 사실 그는 “믿음의 권속”들에게 주의 다시 오심을 준 비하도록 도와줄 영적인 양식을 공급할 책임을 져왔다(참조 24:45 주석). 그러나 그의 말에는 확신이 없다. 그는 진정으로 하지 않았다. 그의 삶과 일은 주가 곧 오신다는 것을 진정으 로 믿는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는다. 위기의 때에 그는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민 16:48) 서지 않는다.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봉사하지도 않으며, 또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딤후 4:2)지도 않고 오히려 자기 교인들의 “가려운 귀”에 부응하도록 기별을 조절한다 (3절). 그는 “그리스도의 강림이 임박했다는 기별도 사람들에게 그들이 세상일에 너무 골몰 하고 있음을 깨우치기 위하여 주어진”(실물교훈, 228) 것임을 잊고 있다.

노비를 때리며. 자신을 돌보는 것을 주업으로 삼고 자기 양들에게는 무자비하여 그 무리를 흩어버리는 목자들에 대한 에스겔의 통렬한 비난과 비교해 보라(겔 34:2~10).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하나님은,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은 진리와 의무에 대한 지식으로 사람의 책임을 평가한다.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단순히 말만 하는 단순한 공언은 무가치하다. 하나님을 아는 체하지만, 아직 그의 계명을 불순종하는 자는 그 겉모습의 어떠함과 관계 없이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요일 2:4).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때 그 뜻을 행하는 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수반하나, 혹 그 행함이 가식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는 말은 진실이다. 그러나 진지하고 열렬한 믿음이 수반되지 않은 행함 역시 죽은 것이라는 것도 진실이다 (히 11:6).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자들에게는 그 책임이 지워지지 않는다(눅 12:47, 48). 그러나 마음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그들 자신이 선택한 길을 고집한 자들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으며(요 15:22), 참람될 위험이 있다.

48. 알지 못하고  빛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기준과 진리와 빛의 지식이 풍부한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기준은 전혀 다르다. 어떤 단계의 의는 그리스도교계 사람들이 행한 일일 때는 하나님께서 별로 만족히 여기시지 않지만 이방 나라 사람들이 행한 일일 때는 만족히 여기시고 받으신다. 그분은 많이 주시지 않은 곳에는 많이 요구하시지도 않으신다 (원고 130, 1899)

 
 
 
 

재물에 대한 가르침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3]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6]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 먼저 본문을 읽으면서 자세히 관찰하세요.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자신을 하나님의 지도에 맡기며 안전한 길로 인도해 주시도록 구하게 된다.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면서 스스로 택한 길을 가고자 결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실 그분의 손을 기다리며,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사 30:21)고 하시는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산상보훈, 117-118)

 

시대를 무론하고 재물에 대한 탐심은 사람들을 지배해 오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소유에 대하여 어떠한 권면을 주시는지 살펴보자.

 

본문연구

 

1. 예수님의 비유와 가르침은 각각 누구에게 하신 것인지 찾아 적어보라.

    1) 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15, 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22, 3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13절의 무리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1), 반면, 32절의 적은 무리는 그와 대조되는 듯하다.

   cf. 일반적인 사람들, 탐심이 많은 특정한 사람, 그리스도인들에게 재물에 대한 가르침은 차이가 있는가?

 

2. 본문에서 재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각자 찾아서 발표하고 설명해 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15, 21, 23, 29, 31, 34절 등이 아닐까?

 

3.  본문의 말씀들을 참고하여 다음 질문들에 대한 적절한 답이나 설명을 적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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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재물은 최고의 가치를 갖고 있는가? (15)

   2) 재물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태도는 무엇인가? (34, 18-19, 29-30)

   3) 탐심을 물리치고 하나님게 대하여 부요케 되는 한 가지 방법은 무엇인가? (21, 33)

  cf. 자신과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봉사 사업에 드리는 자들은

        이기적인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행복을 발견한다.(화잇주석, 12:42)

 

 

토의사항

 

1. 재물에 대한 각자의 가치기준과 생각들을 이야기 해 보자. 

 

2. 그리스도인은 물질만능주의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일에 어떤 자세를 취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3. 16~21절에 있는 비유에 나온 부자는 왜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가진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4.  그리스도인과 부자에 대해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지 서로 나누어 봅시다. 

 

우리는 재물을 넘어선 인생의 참된 가치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 재물 자체보다 그것을 주신 분에 대한 인정과 감사, 그리고 재물의 올바른 사용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13. 한 사람. 즉 예수를 대접한 바리새인(참조 11:37)의 집 밖 거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무리 가운데 한 사람(참조 1). 예수에게 말을 건넨 이 사람은, 주님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단호하게 꾸짖는 것과 정사 잡은 자들 앞에 출두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자들에게 권면하는 것을 들었다. 이 사람은, 예수가 동일하게 대담한 권위로 자신의 형에게 말한다면 그 말을 감히 거역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 사람은 천국복음을 자신의 이기적인 관심을 발전시키는 수단 이상으로 생각지 않았다.

 

유업을나누게. 상속에 관한 모세의 율법에 따라, 형이 아버지의 유산의 두 몫을 받았고 남은 형제들은 각각 한 몫씩 받았다(참조 신 21:17 주석). 아마도 이 경우에 예수에게 호소하고 법적으로 할당된 두 배의 몫을 형이 취하는 것을 반대한 이는 동생이었을 것이다.

 

14.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 예수가 와서 선포한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었다(참조 요 18:36). 사회적 정의를 이루는 일이 중요하지만 그는 제자들에게 그 일을 위탁하지 않았고, 어떤 경우에도 인간들 사이에서 법적 판결을 내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참조 요 8:3~11). 구약의 선지자들( 6:8 )과 마찬가지로, 예수도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에 적용해야 할 원칙들은 분명하게 말했지만(참조 마 5:38~47; 6:14, 15; 7:1~6, 12; 22:39 주석), 사회정의를 집행하는 일은 정당하게 임명된 국가 위정자들에게 위탁했다. 예수는 이러한 원칙에서 벗어난 적이 없으며, 따라서 그의 이름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자들은 다른 점에서뿐만 아니라 이점에서도 그의 모본을 잘 따를 것이다(실물교훈, 254).

 

15. 탐심. 헬라어 플레오넥시아(pleonexia, 참조 막 7:22 주석). 탐심은 삶에 관련된 물질적인 소유들, 특히 다른 이들에게 속한 소유에 대한 부당한 애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예수에게 말을 건넨 그 사람은 물질이 더 필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에서 탐심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되면 그에게 부()가 그리 큰 관심사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마음 속에 더 이상 탐심이 없다면, 해결할 분쟁도 없을 것이다. 늘 그렇듯이, 예수는 문제의 뿌리에 접근했고 미구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유사한 문제들을 막을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그는 오늘날 소위 사회복음(social gospel)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임시변통의 치료약을 천거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높은 임금(賃金)이나 더 큰 수익(收益)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생필품들을 더하시리라는 충만한 확신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도록 이끌어주는 마음과 정신의 변화가 필요하다(참조 마 6:33).

 

소유의 넉넉한 데.  물질주의는 오늘날 세계의 많은 주된 문제들의 뿌리다. 그것은 대부분의 정치 및 경제 철학에 기초를 제공하며, 따라서 인류에게 재앙을 몰고 오는 대부분의 계층 및 국가 간 투쟁에 원인을 제공한다. 우리의 소유에 대한 불만족은 자신 스스로 정직하게 애쓰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소유의 일부나 전부를 포기하도록 강요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확보하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탐심은 세상이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의 원인이다.

예수에게 형의 행동을 심판하는 역할을 해달라고 호소했던 사람의 요청은, 어떤 기업가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많은 이윤을 움켜쥐려는 정신 그리고 몇몇 노동자들이 생산성에 공헌한 자신의 가치나 고용주의 지불능력에 아랑곳하지 않고 항상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하는 것과 동일한 정신에 의해 촉발되었다. 이는 나라의 어떤 법률이 다른 집단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는 상관도 하지 않은 채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법률제정을 이끌려는 이익집단이 가지는 정신이며, 국민들의 염원과 최대 관심사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국정만을 관철하려는 국가를 이끄는 정신이다. 또한 자주 결손 가정, 청소년 범죄 그리고 그밖에 수많은 범죄들을 양산(量産)하게 하는 정신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모든 자들에게 진정한 시각으로 이생의 물질적 소유를 바라보고 이것들을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에 종속시키라고 요청한다(참조 마 6:24~34; 6:27 주석).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견해와는 달리, 더 많은 물질이 반드시 더 많은 행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행복은 물질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정신에 달려 있다(참조 전 2:1~11 주석).

 

16. . 사람이 땅에 씨를 묻고 최선을 다해 돌보지만 씨가 자라도록 하는 분은 하나님이다. 사람이 성장 과정에 기여할 수는 있지만, 자라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다(참조 고전 3:6, 7). 하나님은 햇빛과 비를 주며(참조 마 5:45 주석), 결실기(結實期)를 허락함으로 인간의 수고를 축복한다(참조 행 14:17).

이스라엘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은 재물 얻을 능력을 사람에게 주신 분이 당신임을 잊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준 것에 대해 자신에게 영예를 돌리는 경향이 있어서,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8:17)라고 말하기 십상이다. 이것은 치명적 기만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생각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어두워질 것이다(참조 롬 1:21). 그는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하나님 보기에 우준(愚蠢)하게 된다(참조 롬 1:22). 만약 그가 그러한 길을 고집한다면 마침내 완전히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물질적인 행복과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참조 롬 1:23~32). 그는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게 된다(딤후 3:4).

 

17. 둘 곳이 없으니. 쌓아 둘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풍족하게 베푼 물질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이기적인 관심이 동료 인간들의 필요에 대해 눈멀게 했다(참조 16:19~31 주석).

 

18. 내 모든 곡식. 그의 소유욕을 나타내는 표현에 주목하라. 내 곡식들, 내 곳간, 내 물건, 내 영혼(참조 호 2:5). 그의 생각은 모두 자신에 관한 것뿐이었다. 분명히 그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19:17)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생각하고 계획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이 보기에 지각이 없는 자이다(참조 11:40 주석). 천국 복음의 목적은 사람들의 생각을 자아에게서 돌려 위로 하나님을 향하게 하고, 밖으로 동료 인간들을 향하게 하는 것이다.

 

22. 염려하지 말라.  예수는 여기서 금욕주의를 천거하거나, 가난을 장려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근면하고 자산 있는 사람보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주의한 사람을 가납한다고 단언하지 않는다. 예수는 사적인 일과 사업적인 일을 경영할 때 신중한 태도를 취하라고 충고했다. 그가 정죄하는 것은 삶에서 물질적인 것, 특히 생활에 필요한 것 이상의 물질들에 대하여 염려하는 습성이다. 그는 어느 방향이든 무절제로 이끌어 가는 욕망을 정죄한다. 그리스도인은 사물의 비교 가치에 대한 식별력을 소유할 것이며, 따라서 그의 관심은 그 가치에 비례할 것이다. 그는 재물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재물은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한 수단임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삶의 최고 목적을 재물을 축적하는 데 두지 않을 것이다.

 

23. 음식.  예수는 훨씬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중요한 것은 생명 자체라고 말한다. 음식도 중요하지만 음식 자체가 목적은 아니며 그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음식과 의복을 얻는 것을 자신의 주요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 것이다. 우리는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먹는다(참조 막 2:27).

 

28. 너희일까보냐. 생명을 주신 그분은 분명 음식과 의복이라는 더 작은 선물도 주실 것이다. 그분은 자신이 부여한 생명을 보존하는 일에 변덕스럽게 관심도 갖지 않고 방관만 하고 서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분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온당하다.

 

30. 세상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일은 천국 시민들에게 적절하지 않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이나 다름없는 것들을 얻기 위해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버린다는 것은 온당치 않다(30).

 

31. 너희는 먼저구하라.  인간의 삶의 위대한 목적은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하는 것이다( 17:27). 대부분의 사람들은 썩는 양식을 위하여( 6:27),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를 물( 4:13)을 위하여 일하는 데 몰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한다( 55:2). 우리는 매우 자주, 하나님이 관대하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 여정 끝에 7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영원한 왕국을 더해줄 것이라는 헛된 희망으로 이 모든 (물질적인) 것들을 인생의 주요 목적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첫째 일을 첫째로 삼기를 바라며, 덜 중요한 것과 덜 가치 있는 것은 필요에 따라 각 사람에게 공급될 것이라고 보증한다.  

 

그의 나라 모든 시대를 통해 이 세상 왕국이 결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 될 것이라는 약속( 11:15), 은혜의 왕국 시민들이 거룩한 생애를 살며(요일 3:2, 3) 그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자기를 희생하도록 고무시켰다(참조 행 20:24; 딤후 4:6~8). 모든 시대의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정신 속에서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 2:13)이 항상 최고 우선적인 자리를 차지했으며 그들이 더욱 거룩한 생애를 살도록 북돋았다.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을 떠나 그의 왕국의 시민이 되지 않는다면, 안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염려에 대한 최상의 치료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몫을 충실히 이행한다면, 천국을 우리의 사상과 생애에서 첫째로 삼는다면 하나님은 삶의 여정에서 우리를 돌보아 주실 것이다. 그는 자비롭게도 우리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실 것이며(참조 17절 주석), 우리의 경험의 잔은 좋은 것으로 넘칠 것이다(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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