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은혜의 해, 누가복음 연구 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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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4:14-22

[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진리가 그리스도의 시대에는 인기가 없었다. 진리는 현 시대에도 인기가 없다. 사단이 최초에 자고심을 일으키는 거짓말을 제시함으로 진리에 대한 염오를 사람에게 준 이래로, 진리는 인기가 없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지 아니한 이론과 교훈에 접촉하고 있지 않는가? 사람들은 마치 유대인들이 그들의 유전에 대하여 그리하였던 것처럼, 이런 이론과 교훈에 집요하게도 매달리고 있다”(시대의 소망, 1권, 242).

 

수님의 첫 설교(누가의 기록)는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아에 대해 예언한 말씀이었다.

 

본문연구 (참고: 시대의 소망 제 12-13장)

  1. 안식일에 회당에서(1419).
    예수께서 그의 고향 회당을 방문하신 것은 일련의 안식일 설교와 가르침이 끝난 후였다(14,15). 대체로, 예수님과 바울이 회당에 간 것은 안식일 준수를 시사한다. 예수님의 규례는 회당에 참석하는 것이었다(16).

  2. 예수님의 봉사에 권위를 준 것은 무엇인가?(4:14; 4:31, 32 비교).
    :
       예수께서는 설교하고 가르치시는 권리와, 기사를 행하시는 권능을 가지고 오셨다. 그분의 명성은 그 권능의 증거로부터 자라 나갔다. 그분은 권세와 단순성으로 말씀하셨다. “그분은 그들이 이해하기 좋게, 명백하고 단순하게 진리를 말씀하셨다. 그분의 언어는 단순하였다! 가장 가난한 자도, 무학자나 무식한 자도 그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본교 성경 주석, 51120).

  3. 요한복음 138절에서, 예수께서 봉사를 시작하실 때 처음으로 말씀하신,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이 말씀을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쓴 첫 말씀들과 비교하라(4:17; 1:14, 15; 4:17~21).
    :

       누가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전도하셨다고 말한다(4:43). 첫 세 복음서들 (마태, 마가, 누가)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비슷하게 말하기 때문에, 비록 독특한 부분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공관 (함께 본다) 복음서라고 한다. 누가가 나사렛의 설교를 기록한 것은 마태나 마가와 다르다. 요한의 복음은 대부분 공관 복음에 없는 것들이 많은데, 그것은 말씀하신 예수님에 관한 장엄하고 권위적인 진술로 시작된다.

  4. 누가가 예수님의 말씀 중에 나사렛 설교를 제일 처음 것으로 택한 의미가 무엇일까?(4:17~19; 61:1, 2; 19:10 비교)
    :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받으시는 해를 선포하셨다 (“주의 은혜의 해4:19). 그분께서는 중보의 혜택이 미치기를 기대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의 해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 속에 있다.

  5. 예수님께서는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 대한 교회와 각 교인의 책임이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4:17~19; 25:34~45 비교).
    :

가르치시매. 자적으로 그는 가르치기를 계속했다.”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가 진리를 나누어 줄 때 사용한 통상적인 방법이다. 오늘날에는 설교가 진리를 제시하는 좀 더 공식적인 방법이고 가르치는 것은 덜 공식적이다. 가르치는 것이 설교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가르칠 때는 청취자들이 참여하기 때문이고, 반면에 설교할 때는 청취자들이 주로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예수는 산상설교와 생명의 떡에 대한 설교 등과 같은 좀 더 공식적인 강론을 하곤 했다. 그러나 산상설교에서도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5:2)라고 기록되어 있다. 자신의 설교에 가르침의 특성까지 가미한 설교자는 복된 사람이다.

 

나사렛. 참조 4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이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공적 봉사를 위하여 AD 27년 가을 목공소를 떠난 이래 그가 한 첫 번째 나사렛 방문이었다(시대의 소망, 236). 이때는 아마도 AD 29년 늦은 봄이며 그의 공적 봉사의 거의 반이 지난 시기였을 것이다. 1년 후, 아마도 AD 30년 이른봄에 예수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시대의 소망, 241) 이 성읍을 방문했다. 첫 번째 방문은 16~30절에만 기록되어 있고, 두 번째 방문에 대해서는 막 6:1~6을 참조하라. 나사렛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 그리고 자매들이 살고 있었고, 따라서 바로 이 안식일에도 그들이 회당의 예배자들 사이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안식일에. 누가가 구체적으로 주일 중 일곱째 날(참조 23:56~24:1)로 밝힌 안식일에 예수가 성스러운 회당 예배에 규례대로참석했다는 그의 진술에는, 자신의 주인을 사랑하므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분명히 나타나 있다(참조 요 14:15; 벧전 2:21). 그리스도가 지상에 있을 때 개인적으로 유대인들이 지켰던 것과 동일한 날을 지켰다는 사실 역시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진 이후로나 창조 이후로 날짜가 잃어버린 바 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주인”(2:28)이다. 즉 그가 그날을 만들고(2:1~3; 참조 막 2:27) 그것을 자신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안식일 준수에 대한 그의 모본은 준수 시간이나 방법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온전한 귀감이다. 더욱이 현재의 1주일은 그리스도 시대로부터 단절 없이 연속돼 내려왔고, 따라서 오늘날 주일 중 일곱째 날을 준수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지켰던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이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수백만의 유대인들이 문명화된 세계 각처로 흩어졌으며, 따라서 그들 모두가 주일 중 일곱째 날을 헤아리는 일에 일제히 같은 실수를 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기 규례대로. 문자적으로 그에게 습관이 된 것에 따라.” 그리스도는 안식일에 정규적으로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습관이 있었다. 청년 시절에 바로 이 나사렛 회당에서 그는 선지자들의 글을 낭독하라는 요청을 받았고, 또한 친숙한 성경 지식으로 예배자들을 감동시키는 교훈을 끌어내 보였다(시대의 소망, 74). 예수는 유대와 갈릴리 회당에 사람들이 모였을 때를, 그들을 가르치는 기회로 이용한 것으로 보이며(참조 눅 4:15 주석; 4:23; 12:9; 13:54; 1:21; 6:2; 18:20 ), 후에 바울도 이방 나라에서 그렇게 했다(참조 13:14, 15, 42).

 

17. 이사야. 그리스도 당시에는 선지자들의 글을 읽고 설교하라는 부탁을 받은 사람이 어떤 부분을 읽을 것인지 선택할 수 있었다. 예수는 특별히 선지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요청했다(참조 4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드리거늘. 즉 성스러운 두루마리를 궤에서 꺼내 낭독할 사람에게 건네주고, 낭독이 끝나면 다시 궤에 넣는 일을 담당하는 집사 곧 핫잔(h.azzan)드리거늘.” 회당 예식에 따라 핫잔이 선지자들의 두루마리를 궤에서 취하여 덮개를 벗기고 그것을 펼쳐서 예수에게 전해 주었다. 예수가 백성들의 일상 언어를 구사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종교적 목적 외에는 거의 쓰지 않았던 히브리어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당시에 성경은 언제나 히브리어로 읽었다.

 

기록한 데. 누가가 인용한 구절은, 많은 고대 사본에 있는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라는 구절을 생략하고 사 58:6을 의역한 눌린 자를 자유케 하여라는 구절을 삽입한 것을 제외하고는 70인역의 사 61:1, 2 상단과 일치한다. 아마도 누가는 기록할 때 그 당시의 70인역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참조 3:36 주석). 성경의 여러 구절을 이런 식으로 함께 연결하는 것은 유대인의 흔한 관행이었다(참조 막 1:2 주석).

 

찾으시니. 예수는 자신이 읽고자 하는 구절이 나올 때까지 두루마리를 계속 펼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이미 지나간 부분을 감았다(참조 제1, 33[사해두루마리 이사야서]). 61:1, 2은 그 두루마리의 거의 끝 부분에 있었을 것이다.

 

내게 임하셨으니. 예수의 지상 봉사에 권능을 부여하기 위해 침례 시에 성령이 그에게 임했다(참조 눅 3:21, 22; 1:32; 10:38).

 

가난한 자에게. 가난한 자들은 흔히 파렴치한 관료, 사업가들 그리고 이웃들의 학대를 받았다. 더욱이, 일반적으로 가난의 고통은 하나님의 저주로 인한 것이며 그들의 불행한 상황은 그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간주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불쌍한 처지에 대하여 거의 동정심을 갖지 않았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예수의 각별한 사랑은, 침례자 요한이 감옥에서 고통받고 있을 때 그의 주의를 끌었던, 예수가 메시야라는 위대한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참조 마 11:5). 이 세상의 재물을 조금밖에 갖지 못한 사람들은 궁핍함과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을 자주 느끼며, 따라서 복음 설교를 쉬 받아들이는 일이 자주 있다. 예수의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는 구제를, 무지한 자에게는 빛을, 고통받는 자에게는 그 고통의 경감을, 죄의 노예들에게는 해방을 의미한다.

 

기름을 부으시고. 헬라어 크리오(chrio-). 이 단어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하는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유래했다(참조 마 1:1 주석). 이 구절을 메시야적 배경에 맞춰 다음과 같이 의역할 수 있다. “그가 나를 그리스도로 삼았다혹은 그가 나를 메시야로 삼았다”(참조 사 61:1 주석).

 

포로 된 자. 이것은 문자적 의미의 포로가 아니라, 몸과 마음과 영이(참조 롬 6:16) 사단의 포로가 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예수는 침례자 요한을 감옥에서 석방하지 않았다. 여기서 이 포로마귀의 올무에 걸려 그의 뜻을 좇는, 사단의 ”(참조 벧전 3:19)에서 고통당하는 영혼들을 말한다(참조 딤후 2:26).

 

눈먼 . 실제로 눈먼 사람들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눈먼 사람들도 포함한다(참조 마 15:14; 23:16~19, 26; 9:39~41).

 

눌린 . 여기에 인용된 구절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의미에서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58:6에서 압제당하는”(oppressed)으로 번역된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한 사 42:3에서는 상한”(bruised)이라는 말로 되어 있다. 42:4에는 이 단어가 낙담(discouraged)이라고 번역되었다. 예수는 죄의 무거운 짐과 랍비들이 유대인들에게 부과한 압제적인 규정들에서 사람들을 자유케 하기 위해 왔다(참조 마 23:4; 11:28~30).

 

19. 은혜의 해. 곧 복음의 시대. 영적 필요를 느끼는 자들(심령이 가난한 자들), 통회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마음이 상한 자들), 죄의 포로가 되어 영적인 사물에 눈먼 자들, 악한 자에게 상처받아 깨진 사람들이 죄로부터의 해방을 기대할 수 있는 시대를 말한다. “주의 은혜의 해는 노예들이 풀려나고, 빚이 청산되며, 양도된 땅이 본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희년을 연상케 한다(참조 레 25:10, 15, 24 주석).

여기서 예수는 사 61:1, 2 낭독을 마쳤다. 그는 다음 구절 즉 애국심이 강한 유대인들에게는 전체 구절의 절정인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이라는 구절을 읽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구원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며 징벌은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맹신했다(참조 시 79:6). ‘구원은 하나님께 대한 개인적인 순종의 문제가 아니라 국적의 문제다라는 유대인들의 개념 때문에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명의 진정한 본질에 대해 눈멀어 그를 거절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막강한 군대를 진두 지휘하는 권세 있는 왕으로 나타나 자신들의 대적을 무찌르고 온 세상을 이스라엘의 세력 아래로 이끌어 들일 메시야를 기대하였다(시대의 소망, 30, 236,).

이 근본적인 오해는, 유대인들이 고난받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들을 고의적으로 간과하고 재림의 영광을 가리키는 예언들을 잘못 적용한 사실에서 기인했다(시대의 소망, 30). 이렇듯 그들을 영적인 맹목으로 이끈 것은 교만과 편견 그리고 선입견이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65, 212, 212, 242). 그들은 한 사람에게 비치는 빛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빛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에 눈멀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예비되어 있다는 생각에 잠기기를 좋아했으며, 따라서 예수가 그런 말을 꺼내지도 않아서 놀랐을 것이다. 예수가 설교 중에 이방인들의 믿음을 칭찬하고 정작 유대인에게는 믿음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암시했을 때, 청중들은 미친 듯이 분노하고 포악해졌다(참조 25~29).

 

21. 말씀하시되. 예수는 일반에게 랍비 즉 선생으로 간주되었다(참조 요 1:38, 49; 3:2; 6:25). 특별히 나사렛이 그의 고향이며 어린 시절 바로 이 회당에서 성경을 읽었던 것을 감안할 때, 방문한 랍비로서 그가 설교를 부탁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참조 4:16 주석). 누가는 특별히 22절에 기록된 결과와 28, 29절의 과격한 반응을 불러일으킨 강론을 선별하여 그리스도가 이때 전달한 내용에 대한 개요를 제시하였음이 분명하다.

 

이 사람이아니냐. 헬라어에서 이 질문의 형태는 질문자가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의 질문은 의혹이 아니라 놀라움을 표현한 것이다. 여러 해에 걸쳐 예수를 알고 지냈기 때문에, 그들은 그가 자신들처럼 그렇게 결점 많은 사람은 아니겠지만 자신들과 같은 보통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자신들이 익히 알고 있는 그가 약속된 분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그들은 믿음의 결핍으로 당혹스럽게 되었다.

 

요셉의 아들. 예수는 일반적으로 요셉의 아들로 여겨졌다(참조 2:33, 41; 3:23 주석). 예수의 모친과 형제 자매들은 여전히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으며(참조 마 13:54~56; 시대의 소망, 236), 틀림없이 그들도 청중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자문하면서 시선을 자연스럽게 예수의 가족들이 있는 방향으로 돌렸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마리아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참조 2:34, 35, 51).

눅 4:1-13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10]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사단은 자기가 정복하지 못하면 정복당할 것을 알았다. 이 투쟁의 결과는 너무나 중대해서 그와 동맹한 천사들에게 위임할 수 없었다. 그가 직접 싸움을 싸워야 했다. . . .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이 투쟁이 그들 자신의 생애와 특별한 관계가 없는 것처럼 바라본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에 거의 관심이 없다. 그러나 모든 인류의 마음 가운데서 이 투쟁이 되풀이 된다. 그 누구도 사단의 공격을 받음 없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악의 대열을 떠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대항하신 유혹들은 우리가 막아 내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이 시험들은 그의 품성이 우리의 성품보다 뛰어나신 것만큼 더 극심하게 임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심히 무거운 죄 짐을 지시고 식욕과 세상에 대한 사랑과 참람으로 인도하는 과시를 사랑하는 시험에 대항하셨다. 이 시험들은 아담과 하와를 정복하였고, 우리들을 쉽게 정복하는 것들이다.”(소망, 116-117)

 

수님은 시험은 어떤 것이었으며,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본문연구 (참고: 시대의 소망 제 12-13장)

  1. 예수님이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은 무엇인가? 괄호 안에 성결절을 기입하여 보라.
    첫 번째 시험(         )                         두 번째 시험(          )                         세 번째 시험(          )
         마귀의 유혹(          )                          마귀의 유혹(          )                         마귀의 유혹(          )
         주님의 대응(          )                          주님의 대응(          )                         주님의 대응(          )
    요약: _______________________ 요약: _______________________ 요약
    : 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시험(temptation)”유혹의 의미이다.
    cf. 마귀의 유혹의 말의 길이에 비해 예수님의 대답은 언제나 단순하였다.
  2. 마귀가 침례직후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1) 광야로 가신 예수님을 시험한 까닭은 무엇 인가? , 이 때를 선택하였는가? (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금식과 기도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9:9을 읽어보라. 모세의 금식과 예수님 의 금식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cf. 40일을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않은예수님의 상태는 어떠했을까? (109:24)

  3. 시험(유혹)에 대한 예수님의 대처는 어떠했으며, 그분이 사용한 말씀은 어디로부터 인용 한 것인가?
    1) 4(8: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8(6: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12(
    6: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흥미롭게도 모두 신명기의 말씀을 암기해 내셨다. 신명기의 기록 목적과 주요 내용은 무엇이며(1:5), 말씀을 어떻게 간직할 것을 명령하였는가?(6:6-9)
    cf. 마귀도 말씀을 사용하였으나(6:13, 91:11-12) 왜곡된 문맥으로 사용하였다.

  4. 13절에서 마귀가 얼마 동안 떠나니라는 말은 어떤 것을 암시하는가?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우리가 당하는 시험과 유혹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승리는 모본이 되는가? (4:7)

 

토의사항    

  1.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시험은 결국 승리가 예정된 것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전 10:13을 참고하여 설명해 보라.

  2. 오늘날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장 큰 시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3. 예수님이 당하신 세가지 시험이 지금 우리가 격는 시험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얘기해 봅시다.

 

가는 예수님의 시험을 가장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분의 승리는 말씀이었다.


성령에게. 탄생할 때부터 예수는 성령의 인도와 지도 아래 있었으나(참조 마 3:16; 2:52 주석), 침례받을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풍성하게 임하여 위탁된 사명을 이룰 수 있도록 지혜와 기능을 부어 주셨다(10:38; 참조 행 1:8). 예수는 지상에 오시기 전에” “그 앞에 제시완전한 계획에 맞추어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한 걸음씩 인도받았다”(참조 시대의 소망, 147; 2:49 주석).

 

마귀. 헬라어 디아볼로스(diabolos)“~을 통하여란 뜻의 디아(dia)밀치다란 의미의 발로(ballo-)에서 왔으며, 이 단어의 형용사는 비방하는을 뜻하며, 명사는 비방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 단어에서 영어의 “devil”(마귀)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70인역에는 대적자란 뜻을 가진 히브리어 사탄(sat.an)이 디아볼로스로 번역돼 있다(참조 슥 3:1 주석). 디아볼로스가 사탄을 지칭할 때는 일반적으로 관사와 함께 나타난다(벧전 5:8은 예외임). 관사가 없는 경우에 그것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6:70; 딤전 3:11; 딤후 3:3; 2:3).

인격을 가진 마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비방하는 자란 뜻의 디아볼로스와 대적하는 자란 의미의 사탄이라는 단어 자체가 마귀가 인격적인 존재라는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는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10:18). 오직 인격적인 존재만이 예수의 시험받는 이야기에 나타난 마귀의 역할을 해낼 수가 있었으며(4:1, 5, 8, 11), 신약의 여러 기자들의 마귀에 관한 진술들을 해명할 수 있다(13:2; 2:14; 4:7; 요일 3:8; 9; 2:10; 20:2, 7~10).

 

시험을 받으러. 헬라어로 페이라조(peirazo-). “~하게 하다”(9:26; 16:7; 24:6 ), 선한 동기(6:6; 고후 13:5)에서 시험하다”, 악한 동기(19:3; 11:16), 특히 죄를 범하게 하려고 어떤 사람을 유혹한다는 의미에서 시험하다”(고전 7:5; 살전 3:5; 1:13)를 뜻한다. 여기서 페이라조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는 시험을 자초하거나 의식적으로 마귀의 시험의 땅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와 홀로 있기 위해, 자신 앞에 놓인 사업에 대해 명상하기 위해 광야로 물러났다.

예수는 인성을 취했으며, 그것과 함께 죄에 굴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함께 취했다(시대의 소망, 117). 그는 인간이면 누구나 당하는 인생의 위험을 겪고 또한 인간이면 누구나 해야 할 싸움을 실패와 영원한 손실의 위험을 무릅쓰고받아들여야 했다(시대의 소망, 49). 오직 그렇게 해야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는 말씀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가 신성을 가졌기 때문에 시험받을 수 없다면 이것은 연극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가 시험을 경험한 것은 인성을 통해서였다(참조 시대의 소망, 686). 만일 그가 당한 시험이 우리가 당하는 시험보다 조금이라도 약한 것이었다면 그는 우리를 도울 수 없을 것이다”(시대의 소망, 117). 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을 참조하라. 또한 /2/40e, 52; 1:14; 4:15 주석을 참조하라.

우리에게는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할수 있는 한 대표자가 아버지 앞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도록 명령받고 있다(4:15, 16). 예수는 인간이 무엇을 견딜 수 있는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으며, 각 개인이 견딜 수 있는 힘에 따라 시험하는 자의 세력을 조절하시며 피할 길을 주신다”(고전 10:13)고 약속했다. 그리스도가 시험의 광야에서 겪은 큰 싸움은 각 사람의 마음의 영토에서 반복되고 있다. 시험 곧 선이나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면 어떠한 성품의 발전도 없다. 우리가 유혹에 설 수 있는 능력은 유혹을 저항함으로써 생긴다.

 

네가 만일. 사단은 예수의 침례를 목격했으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하늘의 선포를 들었다(3:17; 참조 시대의 소망, 116, 119,). 적어도 예수의 겉모습은 그 선포의 진실성에 의문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는 너무도 창백하고 여위었으며, 지치고 굶주렸기 때문에(참조 시대의 소망, 137) 외모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네가 만일이라고 한 사단의 말은 예수에게 너는 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라고 질문하는 격이다. 에덴동산에 있던 하와로 하여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 명백하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 유혹자의 목적이었다. 그와 동일한 방법으로 사단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하게 드러난 진리들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남녀들에게 접근한다. 오직 그들의 믿음이 예수처럼 기록되었으되주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말씀에 굳게 선 자들만이 마귀의 계교에 대항하여 설 수 있을 것이다. 유혹은 항상 명백하게 알려진 진리에 도전한다. 또한 상황에 따라서는 원칙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제안한다.

 

하나님의 아들. 40일 전에 요단강에서 있었던 아버지의 말씀의 분명한 메아리(참조 3:17 주석). 사단은 자신이 하늘에서 쫓겨나기 전에 그렇게도 통렬히 비난했던 그분에게 거만하게 업신여기는 태도로 말했다. 사실상 당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보다는 마치 금방 죽음을 맞이할 인간처럼 보였다(시대의 소망, 118, 137,). 이때 사단이 했던 말은 조롱하던 유대 지도자들의 입을 통해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 다시 한 번 발해졌다(27:40). 참조 마 23; /1/35e; 1:1~3, 14 주석.

 

명하여. 예수는 공생애 기간 중에도 기적적인 능력을 보여 메시야임을 입증하라는 요구를 수시로 받았다(12:38; 16:1; 8:11, 12; 2:18; 6:30). 그러나 그는 그러한 도전이 있을 때 이적 행하기를 거절했다. 오히려 모든 이적들은 그가 돕기를 원하는 백성들의 특별한 필요를 채우기 위해 베풀어졌다. 사실, 천연계의 힘과 원소들은 그들의 창조주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다(8:26; 2:6~11 ). 그러나 예수는 우리에게는 소용도 없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해 하늘의 능력을 요청하지 않았다.

 

이 돌들. 아마도 사단은 예수의 발 밑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둥글넓적하게 생긴 동양 지역의 떡과 비슷한 돌들을 가리켰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단은 금단의 열매를 따서 하와의 손에 넣어 주었던 것처럼(부조와 선지자, 55), 돌 가운데 하나를 집어(참조 눅 4:3) 예수에게 주었을지도 모른다.

 

. 여기서 떡은 인간의 육체적 본성이 가진 물질적 필요를 대표한다. 떡은 생명에 대한 물질주의적 철학, 곧 인간의 생명은 자신의 소유가 된 풍부한 물질에 달려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오직 떡으로만 산다고 가정하는 철학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식욕에 호소하는 것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하는 토대가 되었던 것처럼, 사단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공격을 여는 토대가 되었다. 인간에게 닥쳐오는 많은 시험들이 이 부류에 해당한다. 첫 번째로, 사단은 인간의 육체적 본성에 대한 시험이 더 손쉽게 즉각적인 성공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두 번째로, 그는 육체적으로 쇠퇴하고 약한 곳에 유혹을 집중하는데, 육체적 본성과 감각을 통해서 전 존재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파멸을 피하기 위해서, 육체적 본성은 끊임없이 마음과 의지와 이성이라는 더 높은 힘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 육체는, 마음과 영혼이 계발되고 성품이 형성되는 매개체이다(치료봉사, 130). 이 시험을 더욱 사실적으로 만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음식을 만들어 배고픔을 채울 능력을 지녔다는 것에 있다.

이 시험은 그리스도에게 아버지의 뜻을 무시한 채 잘못된 방법으로 배고픔을 채우라는 사단의 제안에 있었다. 사단의 제안은, 전혀 배고픔으로 고통받을 필요가 없는데도 하나님이 그의 아들이 이것을 겪도록 내버려 두실 만큼 몰인정한 분이라고 암암리에 인식시키는 데 있었다.

 

사람이살 것이 아니요. 8:3에서 인용함.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1,500년 전에 모세에게 계시했던 진리이다. 시험이 지나갔을 때, 예수는 거의 죽음에 이른 것처럼 보였다(시대의 소망, 131). 사단은, 그리스도가 자신이 가려고 하는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예수는 대답을 통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죽는 것이 그것을 떠난 상태로 사는 것보다 더 낫다고 단언했다. 이런 형태의 시험을 통해 사단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순종하기를 갈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압력을 행사한다. “만을 의지하며 그것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결단코 진정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마침내는 죽을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 없는 은 죽음을 가져올 뿐 생명을 가져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첫 번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그리고 의심없이 굴복해야 함을 천명한다. 예수는 말씀이 지닌 구속력(拘束力)을 받아들이고, 물질적인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기를 거부한다. 영적인 것들은 초월적인 가치와 중요성을 가진다. 참조 마 6:24~34; 6:27 주석.

 

떡으로만. 인간은 동물 이상이다. 그의 가장 긴급한 필요는 육체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예수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18:36)고 확언한다. 그런데 예수는 모든 가능한 방법을 다 동원하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일의 중요성을 지지하면서도(25:31~46), 이것이 메시야인 그분에게 드리는 충성과 헌신을 대신할 수는 없음을 분명히 말했다(26:11). 사람이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6:8)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22:39). 그러나 그는 또한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6:8). 마귀에게 준 그리스도의 대답은 어떤 형태를 막론하고 생명에 관한 물질주의적 철학을 정죄한 것이다. 물질을 소유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며, 바람직한 인생의 목표는 더더욱 아니다

 

5. 순식간에. 헬라어 스티그메(stigme-). 문자적으로는 똑똑 두드리다”, 따라서 따끔하게 찌르다혹은 구멍을 내다를 뜻하는 스티조(stizo-)에서 파생했다. 스티그메는 어떤 시점을 의미한다. 아마도 잠깐 사이혹은 시계가 똑딱하는 순간일 것이다. 틴덜역에는 눈 깜짝할 사이로 되어 있다.

 

6.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이 일은 아담의 범죄로 이루어졌다. 타락 후에, 사단은 아담이 창조주에게 충성할 때는 이 세상에 대한 권한이 그에게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는 자신을 이 세상 임금으로 칭했다(시대의 소망, 114). 사단은 자신을 아담이 하늘에 있는 주권자요 대표로 선택했었다고 암시했다. 헬라어 본문에서 여기에 주어진 대명사들의 위치는 강조를 나타낸다. “네게 내가 줄 것이다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네가, 만일 네가 내게 절하면. 사단이 이렇게 제안할 때 강한 몸짓을 하는 것이 보이는 듯하다.

 

마귀가 ... 얼마동안 떠나니라. 영원히 떠난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4:13)이다. 유아 시절부터 그의 생애는 흑암의 권세에 대항하여 싸운 긴 투쟁의 생애였다”(시대의 소망, 71, 116,; 참조 눅 4:2 주석). 마귀는 그리스도를 시험했으나 억지로 죄를 범하게 할 수는 없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가장 강렬한 시험이라도 우리가 죄를 범하기로 동의하지 않는 한 또는 동의할 때까지 그것은 무력하다(참조 교회증언, V, 177). 우리가 마귀를 대적할 때 그는 우리를 피할 것이다(4:7). 그리스도는 전쟁의 승리자로 개선했고 마귀는 패배한 원수로 떠나갔다.

 

요한의 봉사와 예수님의 침례, 누가복음 연구 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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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3:1-22(23a)

[1]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3]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7] 요한이 침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10]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 세리들도 침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14]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

[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8] 또 기타 여러가지로 권하여 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19]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21] 백성이 다 침례를 받을새 예수도 침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23a]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심 세쯤 되시니라

 

 

“예수께서 침례를 받기 위해 오셨을 때에 요한은 전에 어떤 사람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품성의 순결성을 그에게서 보게 되었다. 그가 계신 그 자리는 분위기까지도 거룩하고 엄숙하였다. 요한은 요단강에서 자기 주위에 모여들었던 무리들 가운데서 범죄에 대한 험악한 이야기를 들었고 숱한 죄 짐에 눌린 사람들을 만난 적은 있었으나 그처럼 신령한 감화력을 나타내는 사람과 접촉해 본 적은 결코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다 메시야에 관하여 요한에게 계시된 것과 부합되었다.”(소망, 110)

 

수님의 구원의 사역은 기름부음으로 시작되었다. 그분에게 침례를 베푼 특권은 요한에게 주어졌다.

 

본문연구

  1. 1-2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각 누구이며 오늘날 어떤 지위에 비교될 수 있을까?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고위관직들의 이름을 나열한 후에 마지막으로 사가랴의 아들 요한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어떤 효과를 나타내 주고 있는가?

  2. 3-6절에서 요한의 사명 혹을 기별을 찾아 요약해 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7절에서 요한이 침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강하게 꾸짖었는 데, 그들이 누구였기에 그렇게 했는가?
    3:7 참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회개의 합당한 열매”(8)10-14절에서 사람들과 세리와 군병들에게 각각 어떻게 적용되는가?
    cf. 우리 각자에게는 어떻게 회개가 실천 될는지 이야기 해 보자.

  4. 누가가 21-23a절에 쓴 예수님 침례 받으신 기록이 갖는 중요한 의의는 무엇인가?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누가의 기록에는 마태(3:13-17)와 마가(1:9-11)의 기록에는 없는 침례받으실 당시의 예수님의 나이에 관한 언급이 있다.
    cf. 9:25절에 예언된 메시야(그리스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출현의 시기는 에스 라 7:11-26에 기록된 아닥사스다 왕의 중건령이 내린 BC 457년부터 69이레(483) 후인 AD 27년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BC 4년경이며, 누가는 “30세 즈음에침례를 받으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예언은 정확하게 30세의 해인 AD 27년에 기름부음 즉 침례 시에 성령이 부어진 사건으로 성취를 이룬 것이다.

 

토의사항    

  1. 요한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말씀”(2)이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 우리에게 임하도록 하는기 위한 준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2. 요한의 기별에 사람들이 반응한 것처럼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들은 지금 무엇을 하여야 할까요? 이야기해 보자.

 

가만이 예수님의 침례와 성령의 부어짐이 30세에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누가는 예수님에 관한 많은 자료들을 살피는 가운데, 구약의 예언들을 깨달았을 것이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벧후 1:19)

 

1. 디베료. 2:1에 나타난 아구스도를 제외하고, 사복음서 전반에 걸쳐 가이사에 대한 언급은 항상 디베료 가이사에게 적용된다. 그는 엄격한 규율, 관대한 세금제도 그리고 매우 효율적인 행정으로 알려졌다. 그는 무역과 교역을 장려했다. 갈릴리 호수는 그를 기념하여 디베랴 바다(6:1 )로 개명되었다.

 

열다섯 . 디베료의 통치 1년은 AD 14년 가을에 마쳐진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열다섯 해AD 27년 가을에 시작하여 AD 28년 가을까지 계속되었을 것이다. 시대의 소망, 233에 의하면 예수의 침례는 AD 27년 가을에 있었고, 따라서 디베료의 열다섯 해의 아주 이른 시기에 있었다.

 

본디오 빌라도. AD 6년에 있었던 아켈라오의 파면과 추방에 뒤이어 로마가 임명한 일련의 총독들 가운데 다섯 번째 사람. 빌라도는 AD 26년경에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Gratus)를 계승했지만 AD 36년경에 직권 남용의 이유로 디베료에 의하여 파면되었다. 참조 제9, 142, 148.

 

헤롯. 이 사람은 자기 아버지 헤롯 대왕이 갈릴리와 페래아(Peraea)의 분봉왕으로 임명한 헤롯 안티파스(참조 마 2:22 주석)이다. 그의 어머니는 사마리아인이었다. 이 사람은 이복 형제의 부인인 자신의 조카 헤로디아와 결혼한 헤롯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반대한 결합이었고 결국 안티파스는 이 때문에 침례자 요한에게 비난을 받았다(3:19, 20). 예수는 그의 성격을 저 여우라고 묘사하고(13:31, 32) 그의 악한 영향을 헤롯의 누룩”(8:15)으로 언급했는데, 그것은 적절한 표현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빌라도가 예수를 바로 이 헤롯 안티파스에게 보냈다(23:7~15). 그는 한낱 분봉왕에 불과했으나 실제적으로는 아버지 헤롯 대왕이 죽은 후부터 AD 39년에 폐위될 때까지 왕으로 통치했다(Josephus Anti- quities xvii. 11. 4; War ii. 6. 3 [94, 95]).

 

빌립. 헤롯 대왕의 아들인 헤롯 빌립(참조 제9, 51)으로, 아마도 헤롯 대왕의 아들들 가운데 가장 공정하고 현명한 사람이었을 것이다(Josephus Antiquities xvii. 4. 6). 그는 막 6:22~25에 기록된 사건이 있은 지 얼마 후에 헤로디아와 헤롯 빌립 세 사이에서 태어난 딸 살로메와 결혼했다(Josephus Antiquities xvii. 5, 4). 빌립은 헤롯 가문에서 처음으로 주화에 아구스도와 디베료의 형상을 새겨 넣은 사람이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우상숭배로 간주했지만, 다행히도 빌립의 신민들은 거의 전부가 이방인들이었다. 그는 헤르몬산 기슭에 디베료 가이사와 자신을 기념하여 그 이름에 따라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를 재건했다(Josephus Antiquities xviii. 2. 1; War ii. 9. 1 [168]). 그는 율리아 벳새다(Bethsaida Julias) 성읍을 재건했으며, 아구스도의 딸을 기념하여 그렇게 명명했다. 갈릴리 호수의 북단에 위치한 벳새다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빌립의 고향이다(참조 요 1:44; 12:21). 빌립은 BC 4년부터 AD 34년까지 37년을 통치했다.

 

빈 들. 공관복음서 모두 요한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잘 모이는 장소를 피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그가 광야에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마도 요한이 유년과 청년 시절 대부분을 보냈던 유대 광야에서 요한에게 임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가 설교를 시작하고 침례를 베푼 곳은 여리고 맞은편에 있는 페래아(Peraea)이다.

 

요한. 오직 누가만 요한을 사가랴의 아들로 지적한다. 요한은 아마도 자신의 사역을 AD 27년의 유월절 기간에 시작했을 것이다(참조 제9, 144).

 

죄 사함. 헬라어 아페시스(aphesis). 회개, 자백 그리고 용서는 침례보다 앞서며,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하는 일 곧 품성의 골짜기를 메우고 산들을 낮아지게 하는 일들을 이루기 위한 첫 번째 단계들이다(3:4, 5; 참조 마 3:6). 누가는 기타 신약의 모든 기자의 용례를 합한 것보다 더 자주 아페시스를 사용했다.

 

회개의 침례. 요한이 전파한 회개는 과거의 죄에 대한 자백 이상을 포함했다(참조 시 32:1). 그의 권면에 분명히 나타난 대로(3:9~14), “회개에는 성경에 이미 계시된 의의 원칙들을 실천하는 새로운 삶이 수반되어야 했다(참조 미 6:8).

 

자식들 (generation). 이 말은 특별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전달되었다. 요한이 자신의 설교에 사용한, 평범하고 일상적인 시골 장면들을 강조하는 생동감 넘치는 이미지는 구약의 요엘과 아모스 같은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들을 연상시킨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요한은 힘있는 전도자였다. 사람들에게 주의 오심을 준비하도록 하기 위한 요한의 호소가 있은 후에 그들은 그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물었다. 그 대답으로 요한은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죄를 각 개인이나 그룹들에게 지적해 주고 각 사람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요한은 선한 사람으로서 유대인들에게 인간 상호에 대한 의와 하나님께 대한 경건을 행하라고 명했으며 침례받기 위해 나아오라고 권면했다”(Antiquities xviii. 5. 2).

 

모든 사람들이. 요한의 사명은 수 세기 동안 잠자고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우고, 새날이 동터오고 있다는 희망으로 그들의 마음을 불타오르게 하고, 모든 시대의 소망인 오시는 분을 위하여 준비하도록 촉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과업에서 탁월한 성공을 거두었다. 사실, 요한은 유대 지도자들까지도 자극하여 그들이 그의 기별을 조사할 정도가 되었다(참조 요 1:19~25). “모든 사람들이요한에 대하여 알고 있었으며, 그에게 올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나아왔다.

 

혹 그리스도신가. 유대 지도자들은 종종 예수에게 메시야라는 증거로 이적을 요구했다(참조 마 12:38; 16:1 등 주석). 그러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10:41). 요한의 볼품없는 옷차림은 왕의 위엄을 닮은 데가 없었다. 사실 요한은, 선지자들이 말한 바 그리스도가 속할 유대 족속(참조 마 1:1 주석)이 아니라 레위 족속이었다(참조 1:5 주석).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가 그러한 주장을 개진하기만 한다면 메시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산헤드린 회원들조차도 그가 약속된 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참조 요 1:19~20). 유대 나라는 이보다 더 큰 찬사를 요한에게 돌릴 수 없었을 것이며, 그의 기별의 능력에 대하여 더 웅변적인 증거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요한의 선포는 너무나 효과적이어서 사람들이 그를 메시야로 오해할 정도였다!

 

요한을가두니라. 요한은 2년여 동안의 사역 후, AD 29년 이른봄에 투옥되었다(참조 제9, 142~144; 3:1 주석). 헤롯이 요한을 투옥했다는 사실은, 요한이 체포될 당시에 요단강의 페래아 쪽에서 설교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참조 3:3 주석).

헤롯에게는 요한이 무엇을 말하든지 사람들이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였으며, 따라서 그는 민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다(Antiquities xviii. 5. 2; 시대의 소망, 360). 요세푸스는 다른 곳에서 안티파스와 결혼한 헤로디아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요한의 투옥이 헤로디아의 문제와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Antiquities xviii. 5. 4). 그러므로 요세푸스는 헤롯이 요한을 투옥한 이유로 일반에게 알려진 사실을 기록했을 것이다. 헤롯이 유대인들 전체가 반대하는 헤로디아와의 개인적인 문제를 요한을 투옥한 이유로 공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참조 마 3:17 주석. 베자 사본(Codex Bezae)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여기서 누가는 예수의 참된 신성을 확언하지만 곧바로 그의 참된 인성을 증거한다(23~28).

 

삼십 세쯤. 누가는 예수가 침례받을 때의 정확한 나이를 밝히지 않고 다만 삼십 세쯤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누가의 언급과 관련지어 말한다면, 정확하게 30세보다 한두 살쯤 많거나 적을 수도 있다. 유대인들에게 30세는 일반적으로 한 사람이 완전한 성숙에 도달하는 시기라고 여겨지며, 따라서 공적인 삶의 책임을 짊어지기에 적합한 나이였다. 참조 제9, 141, 142.

예수의 탄생이 BC 5년 가을에 있었다면(참조 2:6, 8 주석), 유대인들의 계산법에 따라(참조 2:42 주석) 그의 서른 번째 해는 AD 25년 가을에 시작되어 AD 26년 가을에 마쳤을 것이다(참조 1절 주석). 이것은 예수가 30되었다는 누가의 대략적인 진술과,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해 알려진 모든 연대기적 자료들에 완전히 조화된다. 그러므로 누가는 여기서 정확한 연대기적 진술을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가 침례를 받고 그의 공적 봉사를 시작할 무렵 성숙한 나이였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예수님의 유소년기, 누가복음 연구 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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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21-40

[21]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22]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39]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그의 초기 생애에 관한 간단한 기록은 실로 의미 심장하다.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예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의 얼굴에서 비취는 햇빛 아래서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눅 2:52)셨다. 그는 정신이 민활하고 통찰력이 있었으며, 나이에 비하여 생각이 깊고 지혜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품성에는 균형잡힌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의 마음과 육체는 아이의 성장 법칙에 따라 점점 발육하였다.”(소망, 68)

 

수님의 성장기는 어떠했을까?

 

본문연구

  1. 누가는 예수의 성장기에 대하여 몇 세부터 몇 세까지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가?
    21, 22, 40-42, 5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결례(정결예식)의 날의 시기에 관하여는 레 12:2-6을 참고하여 계산해 보라.
    cf. 2:1-12에 기록된 동방박사들의 방문은 아직 베들레헴 탄생 시에 있던 일이다.
    cf. 유대에서는 12세가 되는 해를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분기점을 여겼다.

  2. 24절에서 예수의 부모가 비둘기로 봉헌 제물을 드린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2:8, 5:11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23절의 첫 태생의 의미를 출 13:2,12을 통해 설명해 보라.

  3. 25-35절에 나오는 시므온의 기록을 통하여 그가 평소에 드린 기도의 제목은 무엇이었을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4. 시므온과 여선지자 안나가 성령으로써 아기 예수에 대하여 한 말은 어떤 의미인가?
    29-32, 38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37절의 안나의 나이는 84세 혹은 100세 이상으로 계산된다.

 

토의사항    

  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성령에 감동된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3. 예수님의 성장기를 통하여 우리의 초,,고등학교 시절 가정과 학교와 교회에서의 교육은 어떠했는지 서로 이야기 해 보자.

 

가만이 예수님의 어린시절부터 청소년기에 관한 자세한 성장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30세 이후보다는 훨씬 적은 분량이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 가정에서의 교육, 그리고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의 사명을 확신하는 과정을 충분히 살펴 볼 수 있다.

“예수는 우리의 모본이시다. 예수의 유년 생애의 교훈은 주목하지 않고 지나치면서 그의 공생애 기간에 대하여 관심을 집중시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가 모든 유년들과 청소년들의 모본이 되신 곳은 바로 그의 가정 생활에서였다. 그가 자기를 낮추사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가 비록 비천한 처지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는 생애의 평범한 일들 가운데서 그의 하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높이고 영광 돌리기 위하여 생애하셨다.”(소망, 74)

22. 결례. 본문상의 증거는 그들의 결례”(제임스왕역에는 그녀의 결례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라는 독법을 지지한다. “그들의라는 단어는 예수와 마리아 또는 요셉과 마리아를 가리킬 것이다. 만일 그들의라는 단어가 예수를 포함한다면 성전에서의 그의 봉헌이 어떤 의미에서 마리아의 결례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처럼 보인다. 만일 요셉과 마리아의 결례로 본다면 어떤 의미로 요셉은 가정의 가장으로서 마리아가 결례 의식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책임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그들”(요셉을 포함한)이라는 대명사를 동일한 대상을 나타내기 위해 쓴 것으로 보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요셉과 마리아의 결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레위기의 규례에 의하면 사내아이를 낳은 어머니는 40일간, 여자아이를 낳은 어머니는 80일간 부정하다고 규정한다(참조 레 12). 이 기간에 여자는 집에 머물러 있어야 했으며 공적인 종교행사에 참석해서는 안 되었다. “결례가 필요한 사람은 아이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부정한 기간이 끝나고 어머니와 아들은 함께 성전으로 가야만 했는데, 어머니는 정결케 되는 의식을 위해, 아들은 봉헌을 위해 성전으로 나아왔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약 20리 떨어진 예루살렘까지 간 것은 이중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 방문은 분명 동방박사가 방문하기 전에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 이후에는 요셉과 마리아가 예루살렘을 방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은 동방박사의 방문 거의 직후에 애굽으로 가기 위해 베들레헴을 떠났다(참조 마 2:12~15).

 

23. 아기를 데리고. 모든 맏아들은 하나님께 봉헌해야 했다. 이것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맏아들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인정하고, 출애굽 당시에 초태생을 구원한 사건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행되었다(참조 출 13:2, 12; 3:12, 13 주석). 맏아들은 5세겔의 속전(贖錢)을 주고 도로 사야 했다(18:15, 16). 이 금액은 로마의 20데나리온쯤 되는데 노동자의 20일치 임금에 해당하였다.

 

24. 비둘기. 요셉과 마리아가 좀 더 부요했다면, 번제를 위해 새끼 양을 가져왔을 것이다(참조 레 12:6). 그들은 가난한 자의 제물인 두 마리의 비둘기를 가져왔다. 한 마리는 번제물로, 다른 한 마리는 속죄 제물로 가져왔다(참조 레 1:14; 5:7 주석; 12:8).

 

25. 이스라엘의 위로. 이 표현은 유대인의 일반적인 기도 형식의 한 부분이다. “내가 이스라엘의 위로를 볼 수 있습니까내가 메시야를 볼 때까지 살 수 있을까요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위로는 구세주에 대한 희망을 안위라고 표현한 구약의 여러 메시야 예언을 반영한다(참조 사 12:1; 40:1; 49:13; 51:3; 61:2; 66:13 ).

 

기다리는. 시므온은 분명히 사가랴와 엘리사벳(1:6, 67), 요셉(1:19), 마리아(1:28), 목자들(시대의 소망, 47), 안나(2:37), 동방박사(2:11; 시대의 소망, 59), 아리마대 요셉(15:43) 그리고 다른 몇몇 사람들(2:38)처럼 겸손하고 성경을 경건하게 연구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속했다. 하나님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이런 신실한 사람들에게 메시야의 출현을 알려 주었다(참조 히 9:28).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나타나심”(2:13)을 기다리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특권이다.

 

26. 죽지 아니하리라. 각 시대를 통하여 경건한 사람들은 구세주에 대한 소망의 성취를 볼 때까지 생존하고자 하는 희망을 소중히 간직해왔다. 하나님은 이 소망을 당신의 신실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밝히 타오르게 하고자 했는데, 그 이유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 소망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생애를 성별하도록 이끌기 때문이었다(참조 요일 3:2, 3). 그러나 시므온의 시대에 경건한 자들은 예언을 통해 자신들의 세대에 메시야를 볼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27. 성령의 감동으로들어가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25)하여 지금까지 하늘이 그의 길을 비춘 빛 가운데서 걸어왔고, 따라서 그의 눈은 더 큰 빛을 받기 위해 열려 있었다. 잠깐 동안 어린 예수를 자기 팔에 안았던 제사장과 비교할 때 시므온은 얼마나 다른가!(참조 시대의 소망, 52). 수많은 다른 동료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이 제사장도 성경에 계시된 원칙대로 살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참조 호 4:6) 성경을 연구했지만 허사였다(참조 시대의 소망, 30). 결과적으로 그 제사장은 생명의 빛인 분과 얼굴을 마주 대했지만 그의 영적인 눈은 완전히 멀어 있었다(참조 요 1:7~11). 이미 나타난 빛이 주는 유익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더 큰 빛을 위해 준비되지 못했다.

 

29.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시므온은 믿음으로 구약의 메시야 언약이 어린 예수를 통해 성취되는 것을 보았을 때 자기 마음의 소망이 실현되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예수 외에는 채울 수 없고 만족시킬 수 없는 공허함과 갈망이 있다. 우리도 시므온과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주의 그리스도를 볼 때까지는 쉴 수 없다. 시므온은 자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는 고대하던 분을 살아서 만났다. 그에게는 더 이상의 희망이나 요구가 없었으며, 따라서 그는 죽음이 가져다줄, 노고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준비가 되어 있다. 26절 주석을 참조하라.

 

기이히 여기더라. 단순히 놀랐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천사가 이미 요셉(1:20)과 마리아(1:26, 27)에게 동일한 기별을 가지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더욱이 엘리사벳이 영감받은 말로 명확하게 마리아에게 일러 주었다(41~45). 또한 요셉과 마리아는 목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2:20).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예수에게 부여한 특별한 임무가 영감의 기별에 의해 더욱 분명해짐에 따라, 아이 예수가 메시야라는 증거가 잇달아 나타남으로 그들의 놀라움은 증폭되었다. 또한 그들은 이 낯선 사람도 그 위대한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놀랐을 것이다.

 

35. . 헬라어 롬파이아(rhomphaia). 일반적으로 트라키아인의 장도(長刀)와 같은 큰칼을 말한다. 롬파이아는 로마인들의 단도(短刀)를 가리키는 신약의 흔한 단어인 마카이라(machaira)와 구별되어야 한다. 롬파이아는 70인역에 골리앗의 칼로 나온다. 아마도 롬파이아는 마카이라보다 더 무서운 무기로서 십자가 사건에서 마리아의 마음을 찌른 슬픔을 비유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것 같다(참조 요 19:25; 시대의 소망, 744, 752,). 신약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고통을 예시하는 이 표현은 사 52:14; 53:12의 예언을 반영하고 있다. 시므온의 신비스런 이 표현은 틀림없이 다가올 사건들에 대한 오싹하고 불길한 전조처럼 마리아의 생각을 스쳐갔을 것이다. 더욱이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이 말을 했다는 사실은, 요셉이 예수가 갈바리 십자가에 달릴 때 현장에 목격자로 있지 않을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다른 모든 유대인처럼, 마리아도 분명히 예수가 이 땅에서 다윗의 보좌에 앉아 영광스럽게 통치할 것이라고 기대했다(참조 1:32).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역시 이 기대를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그들의 기대는 십자가의 절망을 더욱 쓰라리게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써 마리아가 무엇을 예상해야 할 것인지를 미리 통고해 주신 것이다.

 

36. 안나. 헬라어 한나(Hanna). 히브리어 한나(H.annah, 참조 삼상 1:2 주석)에서 나온 말. 이 나이 많은 성도는 선지자학교의 설립자인 사무엘의 어머니와 이름이 같다. 안나가 계속적으로 성전에서 기거한 사실은 그녀가 하나님을 섬긴 사랑이 어떠했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안나처럼 미미한 인물에 관해서도 누가가 비교적 상세하게 전기적인 필치로 설명한 것은 누가의 기사가 지닌 역사적인 성격을 입증한다.

 

바라는사람. 이 수수께끼 같은 표현은 예언을 연구하여 때가 찬(4:4; 참조 눅 2:25 주석; 9:24~27; 시대의 소망, 34, 35,)을 알고 있는 소수의 진지한 무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말하니라. 헬라어 시제에 의하면 계속하여 말하다.” 안나는 지금까지 장차 강림할 메시야를 가리키는 예언을 했으나 이제 그녀는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메시야가 강림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었다.

 

돌아가. 누가는 박사들의 방문과 애굽으로 피신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는데, 이 두 사건은 갈릴리로 돌아오기 전에 있었다(참조 마 2:1~23). 이와 같이 이야기의 상세한 전모를 다 기록하지 않고 생략한 경우가 행 9:26에 있는데, 여기서 누가는 사울이 즉시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간 것처럼 나타냈다. 그러나 갈 1:17, 18에 의하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전에 3년의 간격이 있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동방박사들의 방문이 성전에서 봉헌한 이후에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그 이유는 요셉이 이미 헤롯을 피해 애굽으로 도망하라는 경고를 받은 상태에서 마리아와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갔다는 것은 믿기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이 가족이 나사렛에 돌아왔을 때 헤롯은 이미 죽었고 아켈라오가 대신 통치하고 있었다(참조 마 2:19~23).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아켈라오는 BC 4년부터 AD 6년까지 재위하였으므로 이 기간 안에 나사렛으로 돌아왔음이 틀림없으며, 아마도 아켈라오의 통치가 시작된 직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40. 아기가 자라며. 51, 52절이 예수의 청년기와 장년 초기를 다루고 있듯이, 이 구절은 열두 살 때까지의 어린 시절을 다루고 있다(42).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품성의 발달은, 단 한번도 죄에 굴복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는, 보통의 과정을 따라 성장해갔다. 그는 보통 어린이나 청년들처럼, 가족사회 안에서 살았다. 어떤 결점도 그의 성장 과정을 훼손하지 않은 것 외에는, 이 기간에 체력과 지성, 영성과 사회성(참조 52절 주석)이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성장하였다. 마치 예수의 완전함이 그의 신성을 입증하듯 성장 과정은 그의 참된 인성을 입증한다.

 

예수의 탄생, 누가복음 연구 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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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1-20

[1]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18]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20]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cf) 가이사 아구스도(Augustus, BC 63. 9. 23-AD 14. 8. 19) - 로마의 초대 황제(BC 27-AD14).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

 

cf) 표적(標蹟)(12) - "sign". 한글성경에서는 이적, 표징, 징조 등으로 번역됨. ‘과녁을 뜻하는 표적이 아님.

 

 

“베들레헴의 이야기는 다함이 없는 주제이다. 그 속에는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롬 11:33)이 숨기어 있다. 우리는 하늘의 보좌를 구유와 바꾸시고 경배하는 천사들과의 교제를 외양간의 가축과 바꾸신 구주의 희생에 경탄한다. 사람의 자만심과 자부심은 그의 임재 앞에 견책을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놀라운 겸비의 시초에 지나지 않았다. 아담이 에덴에서 죄를 짓지 않았을 때에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취하는 것은 거의 무한한 굴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인류가 4천 년간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진 때에 인성을 취하셨다. 그는 아담의 모든 자녀들과 같이 유전 법칙이 끼쳐온 결과를 받으셨다. 이러한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는 예수의 육신의 조상들의 역사 가운데 드러나 있다. 그는 이러한 유전을 지니고 우리의 슬픔과 시험을 당하시고 우리에게 죄 없는 생애의 모본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소망, 48-49)

 

수님의 탄생(BC4)은 로마의 첫 황제의 통치(BC27-AD14)때에 있었다. 베들레헴, 구유, 목자들, 이와 같은 단어들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본문연구

  1. 10-11절에서 천사는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무엇이라고 외쳤는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13-14절에도 예수님의 탄생의 기쁨을 천사들이 노래하고 있다.

  2. 그리스도의 탄생의 장소가 베들레헴이 된 까닭은 무엇인가?
    3, 4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신약) 2:5-6, 7:42을 추가로 연구하라.
    cf. (구약) 5:2의 예언과 그리스도의 탄생과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3. 다윗의 족속’(후손)에 대한 분명한 근거 자료를 살펴보라.
    1) 1:1-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3:23-3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4. 아기 예수가 침대가 아닌 구유에 누인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12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토의사항    

  1. 탄생의 소식이 양을 지키던 목자들에게만 알려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목자들을 통하여 마리아는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cf. “유대나라의 제사장과 교사들은 각 시대를 통하여 가장 큰 사건이 이제 곧 일어나려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무의미한 기도를 외우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예배 의식을 거행하였으나 재물과 세상의 명예를 위하여 다투는 가운데 메시야의 나타나심을 위하여는 준비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무관심이 이스라엘 땅에 편만하였다. 이기심과 세상에 몰두한 심령들은 온 하늘을 진동시킨 기쁨에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자를 보고자 갈망하고 있었던 사람은 극소수였다. 이러한 자들에게 하늘의 천사들이 보내심을 받았다.”(소망, 44)

  2.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신 것, 연약한 아기로 태어나신 것,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되신 것을 성육신(成肉身)”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의 신비에 대한 각자의 생각들을 나누어 보라.

 

가는 예수님의 탄생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당시의 황제와 총독, 국가적 호적령 등의 역사적 사료와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와 구유 등의 매우 상세한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누가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그분의 탄생 당시의 상황에 매우 어두웠을 것이다.


1 가이사 아구스도(K* A, 카이사로스 아우구스투).카이사로스는 하나의 인명일 수도 있고 후대적 용법에서처럼 칭호일 수도 있다. 아구스도는 원래 라틴어인데 헬라어로는 보통 황제’(세바스토스, 25:21, 25)로 번역되며 여기서는 인명으로 사용되었다. 아구스도 황제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이다. 그는 B.C. 27-A.D. 14까지 로마의 황제로 있었고 그후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이저의 이름을 따라 가이우스 율리우스 시이저(Gaius Julius Caesar)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B.C. 27년에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위대하고 고귀하며 지극히 숭배받는이란 뜻)라는 칭호를 부여받으며 그후 그는 시이저 아우구스투스로 명명되고 최고의 권위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탁월한 통치 능력과 현명하고 훌륭한 정치 및 행정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점령지에 대한 정책의 일환(一環)으로 점령지의 지방 자치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기도 하며 점령지의 문화와 종교, 생활 풍습등을 인정해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 나라의 법률까지도 로마법에 비추어 무리가 크게 없는 한 인정해 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술. 문화. 건축 등을 장려하기도 했으며 그 자신이 또한 위대한 건축가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정책과 통치로 인해 전에 없이 오랜 세월동안 평화가 지속되었고 그는 자비로운 정치가’, ‘로마의 대부’(代父)로까지 불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최고 승원장(Pontifex Maximus) 또는 대제사장(Highest Priest)이란 칭호를 받아들여 모든 종교의 최고의 위치를 차지했다. 게다가 그는 피살(被殺)된 자신의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이저를 신격화하여 그를 기념하는 사원을 건립하여 그를 신으로 받들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그는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많은 죄를 범하기도 하였다. 한편 탁월한 정치 지도자이며 행정가인 그가 자기에게 속한 나라들이 무질서하다는 것을 알고는 로마에 속한 모든나라들로 하여금 인구 조사를 실시하도록 명령했다. 따라서 그는 인구조사의 실시로 말미암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 5:2의 예언을 성취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Hendriksen).

 

호적하라. 헬라어 아포그라포(apographo-). “기입하다”, “등재하다”, “등록하다또는 명부에 올리다”(참조 시대의 소망, 44). 아포그라포를 세금 징수를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은 적합하지 않고(제임스왕역(KJV)에는 “taxed”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인구 조사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고대의 인구 조사는 대체로 이름과 함께 재산의 등록을 포함하며, 일반적으로 재산세 부과를 위한 기초 자료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용어는 정확하게 과세를 가리키는 말로 보기는 어렵지만 그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로마인들 중에는 조상들이 살던 고향이 아닌, 자기가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호적해도 충분했던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대체로 로마의 호적은 도시에서 시행하는 것처럼 지방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시행하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갈리아(Gauls)에서는 부족별로 호적하였다. 애굽에까지 확대된 로마의 인구 조사 명령으로 백성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해야 했다(참조 참고 문헌 Caird, 265). 유대인에게 지파의 족보가 대단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헤롯 대왕이 자기 영토 내에서는 지파별로 호적하게 하는 것이 최상의 절차라고 결정했을 수 있다. 아무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언급은 로마 당국이 유대 지방의 호적령을 시행하기 위해 헤롯을 지명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되며, 또한 누가의 기록이 신빙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4 다윗의 집 족속 다윗의 동네로.은 단순한 문자적 의미보다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나타내어 민족’, ‘족속’, ‘나라등의 의미를 내포하며, ‘족속은 문자 그대로의 뜻을 나타내나 이 곳에서는 둘이 서로 동의어로 사용된 것 같다. 평행본문 마 1:6, 16에서도 요셉이 다윗의 후손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거니와 본 절에서 다윗의 집 혹은 다윗의 동네라는 말이 거듭 언급되는 것은, 예수께서 육신상으로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함과 아울러 다윗 왕가의 후손이자 만왕의 왕으로 오실 예수께서 일개초라한 시골민의 가정에서 태어남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내포한다. 삼상 20:6에서 베들레헴은 다윗 성이라 불리운다. 다윗은 약 천년전 이곳에서 태어났고, 그가 양떼를 돌보던(삼상 17:15) 곳도 이 마을 근처의 언덕이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7.2 km 떨어졌고 나사렛에서는 약 144 km 떰어진 곳이며 그것의 옛 이름은 에브라다이고 라헬이 장사된 곳이기도 하다(35:19). 이 마을 이름의 뜻은 떡집이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곳이 다윗이 자라난 곳이고 미 5:2에 나타난 대로 메시아가 출생한 곳이라는데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은 태어난 아기가 다윗성에서 난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구유. 아기 예수를 눕히기에 이보다 더 천한 곳은 찾을 수가 없었으므로 아무도 자신이 예수보다 경축을 덜 받으며 인생을 출발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세상의 부에서는 가난했으나(참조 24절 주석) 요셉과 마리아는 믿음에서는 부요하였다. 몇 세기 후에 생긴 전승은 베들레헴 근처의 한 동굴을 예수가 탄생한 장소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의 탄생지는 짐승들이 거하는” “보잘것없는 가옥이었다(시대의 소망, 44). 일반적으로 화가들이 예수 탄생에 관한 그림에 삽입한 소와 나귀는 사 1:3에서 연상한 것으로 생각된다.

 

8 목자들. [목자에게 알림, 2:8~20. 참조 제9, 128]. 단순하지만 신앙심 깊은 이 사람들은 약속된 메시야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그의 오심을 위해 기도하면서 그 밤에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참조 시대의 소망, 47). 그들은 분명 이스라엘의 위로”(25)를 기다리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2:38; 참조 마 1:18; 2:25, 26, 38 주석) 신실한 적은 무리 가운데 속하였다. 하나님은 늘 이런 사람들에게 빛과 진리를 나눠 준다.

오직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들만 배부를것을 기대할 수 있다. 오직 빛과 진리를 찾는 자만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참조 마 7:7; 9:28). 신분의 귀천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다만 마음속에 복스러운 소망”(2:13)을 간직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특권은 자신들의 책임에 충실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지나쳐 겸손하고 신앙심이 깊은 목자들에게로 돌아가고 말았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들과 랍비들까지도 천사들이 목자들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믿으려 하지 않았다. 목자들과는 달리 그들은 알아보기 위해 베들레헴에 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소식을 근거 없는 이야기로 간주하였다(참조 시대의 소망, 63).

 

19 지키어 생각하니라.지키어에 해당하는 쉬네테레이는 원형 쉰테레오의 미완료 시제로서 보호하다’,(기억으로) ‘간직하다의 뜻이며, ‘생각하니라에 해당하는 쉼발루사는 원형 쉼발로의 주격 분사 현재형으로 숙고하다’, ‘생각하다’, ‘만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서 마리아는 사건 전반을 기도하는 마음과 자세로 계속해서 생각하여 그 의미를 되새겼음을 알 수 있다. 예수 탄생을 전후하여 천사로부터 전해진 메시지들이나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사실 등은 마리아로 하여금 아기 예수의 신분과 사명에 대해 거듭 상고해 보게끔 하였을 것임에 분명하다.

 

20 목자가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하나님께라는 목적어를 받는 영광을 돌리다’(돝사조)라는 표현이 누가복음에 자주 쓰인다(5:25, 7:16, 13, 17:15, 18:43, 23:47). 그리고 본 절에서와 같이 어떤 이야기가 찬양으로 끝맺는 것은 누가복음의 특징중 하나이다(24:53). 목자들은 그들이 천사들로부터 들은 바와 실제로 본 것이 똑같음을 알고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린다. 사실 아기의 탄생 자체는 평범한 보통의 사건으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아기 예수는 그 비슷한 시간에 태어난 많은 아기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는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성육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예수의 탄생 예고, 누가복음 연구 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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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26-38

(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30)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 .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 5).
구주의 강림은 에덴에서 예언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이 약속을 처음으로 듣고 이 약속이 속히 성취되기를 고대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맏아들이 구주이기를 바라면서 그 아들을 기쁨으로 환영하였다. 그러나 이 약속의 성취는 지체되었다. 이 약속을 처음으로 받은 사람들은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에녹의 시대로부터 다시 이 약속은 족장들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반복되어, 그의 강림에 대한 소망이 소멸되지 않게 했지만 그는 오시지 않았다. 다니엘의 예언은 그의 강림의 시기를 계시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그 예언을 다 바로 해석한 것은 아니었다.”(소망, 31)

 

수님의 탄생을 알린 천사는 누구였는가? 예수님의 탄생은 꼭 그때여야만 했는가? 그분의 탄생은 왜 복음일까?

 

본문연구

  1. 26절의 여섯째 달의 기점은 언제인가? 천사 가브리엘의 역할은 무엇인가?
    36, 19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가브리엘은 구약에 2(8:16, 9:21), 신약에서는 누가복음에만 2회 언급되었다.
    cf. 예수님의 탄생이 침례요한의 출생시어야만 하는 까닭은 단 9:20-27에서 한 가브리엘 의 예언을 살펴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예수님의 탄생은 BC 4년이다.)

  2. 본문에서 예수님을 일컫는 표현이나 그분의 역할에 관한 말씀들을 찾아 말해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침례요한과 예수의 탄생 예언의 유사점을 찾아보라.(1)
         1) 13절과 31절      2) 15절과 32,35절      3) 19절과 26

  3. 37-38에서 마리아의 대답이 이전의 사가랴와 다른 점은 무엇이었는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토의사항    

  1. 마리아를 처녀로 표현한 의미는 무엇인가? 혹자들은 처녀"virgin"이 아닌 단순히 "young woman"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cf) 34절의 사내를 알지 못하니알다동사는 헬라어 ‘ginosko'이며, 1:25에서 는 동침하다로 번역되었다.

  2. 그대는 요셉과 마리아, 사가랴와 엘리사벳과 같은 특별한 선택을 기다리는가?

 

가는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 관한 것을 침례요한의 경우와 동일한 과정으로 기록하고 있다. , 하나님의 특별한 택하심과 성령에 의한 출생, 그리고 특별한 사명을 가진 생애임을 강조하는 듯하다.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여 동참한 요한의 부모와 예수의 부모들의 역할 또한 중요하였다.

 

<예수의 탄생과 십자가 죽으심을 때를 가리킨 가브리엘의 예언>
단9:24 - 70이레(예언상 490년)
단9:25 - 기산점:예루살렘 중건령(cf. 스7:11-26 아닥사스다 7년=BC457)
           - 7이레와 62이레(69이레) 후에 기름부은 왕이 일어남(침례)
           - 69이레(예언상 483년)이므로 BC457에서 483년 후는 AD27. 그리스도께서 침례받으심(BC4년 출생, 30세에 침례)
단9:26-27 - 69이레 후 한 이래(1주일)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함’
                 - AD27부터 AD34년의 중간인 AD34년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제사와 예물’ 즉 속죄제사가 폐함(마27:50-51)
요19:31 - “큰 날”(명절과 안식일이 중첩된 날)
요19:14 - ‘유월절 전날 예배일’에 죽으심
눅23;44-46 - ‘제9시’(오후3시경)에 운명하심 * 십자가상의 운명 - AD31년 니산월(1월) 14일) 오후 3시경

26 천사 가브리엘이 동네에 가서. 타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는 예수의 탄생과 유년 시절을 소개하기에 앞서 침례 요한의 출생과 유년시절을 병행하며 소개하는 치밀감을 보여준다. 이는 그가 예수와 관련된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음을 나타낸다. 이제 본 절로 부터는 예수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27 요셉이라 마리아라. 요셉과 마리아의 약혼은 천사가 나타날 때까지 잘 지켜지고 있었다. 유대 관습에 따르면 결혼하기 1년 전에 약혼한다. 샴마이(Shammai)학파는 약혼한 여인의 부정은 사형으로 처벌된다고 했다. 그리고 혼전의 성관계도 물론 용납되지 않았다. 또한 약혼 기간 내에 신랑이 사망할 경우 신부는 과부로 간주되기도 했다. 본 절과 29, 34절 등에서는 마리아의 처녀성이 거듭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강조는 약혼 이후에 마리아가 더욱 더 조신(操身)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였음을 부각시킴은 물론이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확증시키려는 의도를 나타낸다.

 

처녀. [, 파르데논] 이 단어는 원형이 파르데노스로서 미혼녀’, ‘소녀라는 뜻이다. 성경 외적 문헌에 의하면 이 말이 동정녀만을 뜻하지 않고 단지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단어로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후 문맥과 특히 34절에 수록된 마리아 자신의 고백으로 미루어 볼 때,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의 동정녀를 뜻한다.

 

31 예수라 하라.예수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의 뜻인 히브리어 예호수아의 헬라음으로서 이 이름은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다(24:13, 삼상 6:14, 왕하 23:8, 대하 31:15, 1:1, 3:8). 이 이름은 주후 2세기 초까지 흔하게 사용되었으나 2세기 이후부터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13:6, 4:11). 이는 아마도 의식적으로 그 이름의 사용을 꺼렸기 때문인 것같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내며 이 이름의 기독교적 의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한 마 1:21에서 잘 나타난다.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여타의 다른 인물들과 그분을 구별하기 위하여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21:11), ‘다윗의 자손’(27:37, 10:47-48, 18:5) 등의 문구를 덧붙여 사용하기도 했다.

 

그 조상 다윗의 위(). 당시의 대중적인 메시아 칭호는 다윗의 자손이었다. 예수의 호적상 아버지인 요셉의 족보를 더듬어 올라가면 예수는 다윗의 혈통임을 확인 할 수 있다(3:31). ‘에 해당하는 헬라어 드로논등받침이나 팔받침 또는 발등상을 갖춘 높은 의자를 가리킨다. 또 이 단어의 복수형은 왕이나 신의 권능을 의미할 수도 있다(1:16). 여기서 다윗의 위는 왕되신 메시아의 보좌를 상징하는 다윗 왕의 보좌를 가리킨다. 요컨데, 예수는 예언된 바 그대로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사(삼하 7:12-16, 89:29, 132:11, 9:7) 다윗 왕권을 통해 드러내 보이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신령한 뜻을 온전히 성취하신 것이다.

 

33 영원히(아이오나스).시대’, ‘영원등의 뜻인 아이온의 복수 목적격이다. 이 단어는 때때로 오래 전부터’(70), 혹은 창세 이후로를 뜻하기도 하나, 특정한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영원성과 결부된 문맥에서 잘 쓰인다(55, 6:51). 특히 이 단어는 복수형으로 사용될 때 영원성에 대한 암시를 두드러지게 나타낸다(6:13, 1:25, 13:8, 1:25, H. Sasse, TDNT. I, 197-209).

 

야곱의 집(오이콘 야콥).에 해당하는 오이콘오이코스의 단수 목적격으로서 ’, ‘가족’, ‘가문’, ‘종족의 뜻을 나타낸다. ‘야곱의 집이라는 표현은 행 7:46에도 나타나며 그 의미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나타내지만 더 정확히는 영적 이스라엘로(3:9, 10:10-13) 그리스도를 왕으로 받드는 모든 성도들을 의미한다는 견행에 많은 학자들이 공통된 입장을 취한다(Lenski, Geldenhuys, 이상근).

 

 

왕 노릇. 다윗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으로써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통치자가 된다는 의미이다(고전 15:25, 11:15).

 

그 나라(바실레이아스).왕국의 의미를 담고있는 이 단어는 때때로 왕권’, ‘왕정’, ‘통치등의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의와 사랑에 의해 통치되며 의와 평강과 희락(喜樂)으로 가득한(14:17) 하나님의 나라에 다름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관해서는 막 1:15의 주제 강해에서 다루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그리스도께 넘겨 주셨고(22:29), 우리를 그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1:13).

 

무궁하리라(우크 에스타이 텔로스).무궁을 나타내는 텔로스’, ‘목표’,’정지등의 뜻을 가지며,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우크와 함께 사용되어 정지되지 아니하리라또는 끝이 없으리라는 뜻을 나타낸다. ‘영원무궁을 연이어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의 영원성과 무한성을 강조하고 있다(45:6, 2:24, 7:14, 12:34, 11:15).

 

34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알지에 해당하는 기노스코은 히브리어에서 성적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 야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4:1, 19:8, 11:39). 이 동사는 현재 시상으로 사용되어서, 과거의 모든 행동을 포함한 현재의 상태를 나타낸다. NIV는 이 부분을 나는 처녀이니’(since I am a virgin)라고 번역한다. , 과거에나 지금 이 순간에나 아무 남자도 알지 못한 처녀임을 말해 준다(Liefeld). 그러나 이 구절을 놓고 로마 가톨릭이 마리아가 영원한 동정녀로서 지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에겐 육친(肉親)의 형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12:46, 3:31, 32).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의심하여 표적을 구한 사가랴와는 달리(18) 마리아는 표적을 구하지 않고 성취 방법을 묻는다(18절 주석 참조). 천사의 수태 고지(announcement)를 듣고서 처음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지만, 무소불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 믿음이 었었기에 이제 마리아는 천사의 전언(傳言)을 오히려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35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누가는 다시 성령을 언급하고 있는데, 1, 2장에서만도 여섯번 이상을 언급한다(41, 67, 80, 2:25, 26, 27). 유대인들은 모든 아이들이 출생하는 데는 세분히 동역자, 즉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요구된다고 생각하였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결코 아이를 출생할 수 없다고 믿은 것이다(Lenski, Barclay). 하지만 예수의 경우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셨다는 점에서 유일 무이한 기적이었다.

 

37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없느니라. ‘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마생생한 목소리로 말해진 것’, ‘말씀’, ‘진슬등의 뜻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동의어인 로고스에 비해 계속적인의미와 단일 개념을 강조한다. 한편 본 절은 창 18:14과 마 19:26에서도 나오는 내용으로서 천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로서 제시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이 행치 않으시겠느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리아의 이 고백은 엘리(삼상 3:18)나 다윗(삼하 7:25)의 전례를 연상시킨다(이상근). 마리아의 이 고백은 결코 가볍게 여겨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처녀 수태로 인해 파급될 문제는 엄청난 것이다. 요셉과의 파혼과 함께 부정한 여인으로 몰려 세인(世人)의 멸시와 지탄을 받아야 하고 자칫하면 돌에 맞아 죽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사의 마지막 말(37)이 마리아의 가슴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모든 일을 다 하나님이 처리하시리라는 굳센 믿음이 마리아의 심령을 사로잡았다.

침례요한의 탄생 예고, 누가복음 연구 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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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5-25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새

[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12]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13]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15]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17]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19]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20]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21]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의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기더니

[22] 그가 나와서 저희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 성소 안에서 이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형용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더니

[23]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24] 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가로되

[25]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요한은 여호와의 사자로서 나가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빛을 가져다 줄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사상에 새 방향을 제시해야 했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의 신성성을 인식시키고 하나님의 완전한 의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해야 했다. 그러한 기별자는 거룩해야 했다. 그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실 성전이 되어야 했다. 그는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건전한 체력과 정신적·영적 능력을 가져야 했다. 그러므로 그는 식욕과 정욕을 지배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광야의 바위나 산들처럼 주위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사람들 가운데 설 수 있도록 자기의 모든 능력들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하였다”(소망, 100)

 

가복음은 침례요한의 출생에 관한 예언으로 시작된다.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 보다 먼저 기록된 까닭은 무엇이며, 그의 출생에 관한 특별한 사실들은 무엇인가?

리들은 출생시에 어떤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을까?

 

본문연구

  1. 요한의 부모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아비야 반열”(5)에 대하여는 역대상 24:1-19을 참조하라.

  2. 장차 태어날 요한의 사명은 무엇이었는가?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포도주와 소주”(15)를 마시지 말라는 것의 의미를 민 6:1-3, 20-21, 13:7을 참고하여 설명해 보라
    cf.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17) - 4:5, 11:13-14을 참조하라.

  3. 20절에서 사가랴가 벙어리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하나님의 말씀에 조금도 의심없이 순종할 수 있는 비결은 없을까?

 

토의사항    

  1. 하나님께서 예수의 초림을 예비하기 위하여 예언된 선지 엘리야의 역할을 위하여 요한을 선택하여 성령으로 출생케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6, 13, 25절 참조)

    "결혼 생활을 하면서 사가랴는 내내 아들을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사가랴와 그의 아내는 이제 늙었고 그때까지도 그들의 기도는 응답을 받지 못하였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하나님도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어 주시기로 정해 놓으신 때를 갖고 계셨다. 그리고 사가랴가 기도의 응답을 받았을 때는 희망이 전혀 없어 보이는 상황이었다. . . . 그 기도의 응답이 온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종의 기도를 잊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분이 가장 좋다고 여기시는 시간에 응답하시려고 그 기도를 그의 기록책에 기록해 두셨다. 표면적으로 볼 때에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그들의 희망을 땅에 묻어버렸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다. 사가랴는 실망의 긴 세월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이름이 가장 크게 영광 받으실 만한 때에 그들의 아들이 태어나게 하셨다. 크시고 무한하신 사랑의 마음은 참으로 부드럽고, 친절하시며, 참으로 사랑과 긍휼이 가득하지 않으신가! 하나님이 사가랴에게 주신 아들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업의 높은 위치를 점해야 할 사람이었다. 그로부터 하늘의 빛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비추어져야 하였다" - 원고 27, 1898

  2. 우리는 어떤 점에서 요한과 같이 특별한 선택을 받은 ‘나실인’인지 서로 이야기 합시다.

한은 특별한 출생의 비밀을 가진 자였다. 그런데, 그의 선택은 부모들에게 주어진 축복의 결과이기도 했다. 우리는 침례 요한의 출생에 관한 기록을 통하여 하나님과 누가가 의도한 교훈들을 배울 수 있다. 우리도 각자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음을 확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지 생각해 보자!


5 유대 왕 헤롯 때에. 헤롯은 유대인의 왕으로 보통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이라 하는데, 본문에서 헤롯 때에라 함은 곧 그의 통치 기간 중에라는 의미가 된다. 헤롯 대왕에 대해서는 마 2:1의 주석을 참고하라.

 

실로 이 시기는 종교적으로 타락한 시기였고 정치, 사회적으로 비극적이며 희망이 없는 시대였다. 이제 이러한 비극과 어두움을 버경으로, 누가는 새로운 희망의 빛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특별히 그는 말라기 선지가(B.C. 435-425 추정) 이후 400년동안 하나님의 계시의 중단으로 인한 영적 암흑기를 마감하는 위대한 여명기(黎明期)가 시작됨을 알리려 한다.

 

사가랴요 엘리사벳이라. 사가랴는 히브리 이름으로 보통 스가랴(Zechariah)라고 하며 유대인 사회에서 흔한 이름이다(왕하 14:29). 그 이름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편 엘리사벳(Elizabeth)내 하나님은 맹세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을 가지며 엘리세바와 동일 이름으로 여겨진다(6:23). 이들 부부는 모두 제사장 가문의 출신으로, 제사장 가문끼리 결혼을 한다는 것은 이중적인 영예로 여겨졌다(Geldenhuys). 본래 율법은 제사장이 이스라엘 태생의 처녀에게 결혼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21:14). 그러나 반드시 제사장 가문에서 아내를 취해야만 한다는 조항은 없다. 그럼에도 사가랴가 대제사장 가문(아론의 자손)의 처녀와 결혼했다는 것은 상당히 영광스럽고도 특기할 만한 일이라 할 것이다. 한편 엘키사벳이 이스라엘 최초의 대제사장인 아론의 아내 이름과 같다는 사실은(6:23) 매우 의미있는 일치로 본다.

 

7 엘리사벳이 … 무자(無子)하고. 유대인들은 자식을 하나님의 축복과 그 기업으로 믿고 있어 자식이 없는 것을 대단한 수치와, 하나님께 대한 죄의 형벌로 알았다(127:3). 또한 유대 랍비들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파문당할 수있는 7가지 유형을 기록한 목록 서두에서 유대인이면서 아내가 없고, 또 아내가 있으면서도 자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무자한 것은 합법적인 이혼 사유가 되었다(Barclay). 더구나 두 부부는 이미 나이가 많아 수태(受胎)의 가능성은 더욱 희박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 수태를 못하므로라는 표현 가운데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 카도티란 말은 신약 성경 중 본서 저자인 누가만 주로 사용하는 단어이다(2:45, 4:35). 카도티는 대략 때문에’, ‘ 만큼’, ‘왜냐하면등의 뜻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후기 헬라어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어쨌든 이러한 슬픔과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욱 빛나 보이는 것은 두 노부부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자세이다. 이들은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주어진 자신들의 위치에서 묵묵히 그 역할을 감당해 갔다. 결국 이 경건한 노부부는 구약의 예와 같이(17:16-17-사라, 삼상 1:5-11-한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된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이 얻은 아들이 메시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로 선택되는 영광까지 얻음으로써 지금까지 그 어떤 부모도 얻지 못한 큰 은혜를 덧입게 되었던 것이다.

 

제비를 뽑아(엘라케). 제사장들의 24반열 중 각 반열의 차례가 돌아오면 그 해당 반열의 제사장들은 제비를 뽑아 각각 수행해야 할 임무를 맡게 되었다. 한편 이 제비뽑기는 히브리어로 고랄이라 하는데,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특수한 표시를 한 물건을 땅에 던지거나 용기(容器)에서 뽑는 제비뽑기가 매우 유행하였다. 물론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 제비뽑기는 미신적 의미에서 이뤼진 것이라기 보다 항상 여호와 앞에서제비를 뽑는다는 신전 의식(Coram Deo)하에서 이뤼진 것이다(18:10-12, 18:6, 8). 구약에서는 여러 경우의 제비뽑기 사례가 등장하는데, 새로운 땅 분배시(26:55, 14:2), 죄인을 찾아낼 때(7:14, 삼상 14:42), 첫 번째 왕 선택시 (삼상 10:20,21), 성도의 일을 다스리는 자나 노래부르는 자 또는 문지기의 일을 맡을 자 등을 선택할 때 제비뽑기를 하였다. 그리고 신약에서도 제비뽑는 경우를 볼수 있는데 예수의 11제자가 맛디아를 가룟 유다대신에 제자로 선출할 때 등에서 나타난다(1:26). 여기서 보듯이 이 제비뽑기는 모든 의사결정의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시행되던 시기,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필요했던 경우에 한해서만 시행되어졌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인간들에게 알리시기 위해 제비뽑기를 부분적으로 허용하셨으며, 그 일의 배후에는 당신이 친히 섭리하셨으나(16:33) 특별 계시인 성경이 완성되고 성령의 적극적인 역사가 시행되는 오늘날에는 이 제비뽑기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여하튼 사가랴 당시에 제사장들은 제비뽑기를 통하여 대략 아침 일찍 제단과 불을 준비하고, 제물이나 성소의 기구들을 예비하며, 또 준비된 기구들로 분향하거나 제물을 드려 제사하는 일 등을 각각 분담받았다.

 

10 모든 백성은 기도하더니. 이 구절의 모든 백성에 대해 NIV운집한 경배자들’(all the assembled worshipers)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부분의 헬라어 원문은 라오스’(’백성’)이다. 따라서 정확한 의미 전달이 안 되고 있다. 예배자들만이 성소 밖에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기도한 것이다. 백성들은 기도하기 위해서 하루에 세번씩 성전뜰이나 성소 바깥뜰에서 모였다. 이들의 첫째와 섯째 모임 시간은 아침과 저녁 분향 시간과 일치하는 시간이었다(Geldenhuys). 한편 이 백성들 가운데 연로한 시므온(2:25)과 여선지자 안나(2:36)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 이 곳에 모인 백성들은 뒤에 21, 22절에 기록된 백성들과 일치한다(Liefeld).

 

 

 

11 주의 사자. 사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앙겔로스사자’, ‘천사’,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성경에는 곳에 따라 사자’(12:9, 2:13), 또는 천사’(24:36, 12:25, 8:38, 고전 4:9, 1:13, 14)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 곳 외에도 누가복음 전체를 통해서 천사에 관련된 기사는 매우 많이 등장한다(1:26, 2:9, 13, 21, 12:8, 15:10, 16:22, 22:43, 24:4, 23).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서도 이러한 특징들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10:4, 7, 12:8-10). 주의 사자가 사가랴에게 나타난 이 사건은 결국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의 시작이 된다.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실 구체적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13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간구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에시스는 일반적인 기도를 뜻하는 단어 프로슈케과 비교해 특별한 기도를 뜻한다. 따라서 사가랴는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들린지라에 해당하는 부분을 KJV는 현재형으로, NIV는 현재완료형으로 각각 표현하고 있다. 헬라어 원문 에이세쿠스데은 제1부정과거 직설법의 형태로 사용되었다. 이는 일종의 무시간적 부정과거의 형태로, 과거에도 들렸고 지금도 들린다는 의미이다(Robertson). 따라서 사가랴의 기도는 일회적이 아니고 지속적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제사장 사가랴가 성소안에서 무슨 기도를 드렸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손을 위하여 기도하였을 것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메시아의 강림을 위하여 기도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말에 사가랴가 반응한 것을 보면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엘렌 지 화잇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구주의 강림을 위하여 기도해 왔었다. 이제 그의 이러한 기도가 막 응답되려고 한다는 것을 발표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한 사자가 보냄을 받았다.” (시대의 소망, 97)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줌으로써 확신을 더해준다. 요한(요안넨)은 히브리어 예호하난과 같은 말로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시다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요난’(대상 3:24), ‘요아네스’(대하 28:12)등의 변형으로 히브리인들이 좋아하는 이름 중 하나이다. 성경적인 사고 방식에 의하면 이름이란 단순한 호칭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성(本性)과 인격까지 나타낸다. 다시말해 이름은 인격의 본질이자 내적 존재의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작명법(作名法)은 바벨론 유수기(幽囚期)를 전후허서 뚜렷한 차이점이 나타났다. 초기에는 아이의 타고난 특성에 따라 특징있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나 B.C. 5세기 이후부터 아이의 이름을 친척이나 특히 조부의 이름을 따르는 관습이 생겼다. 이러한 관습에 의해 과거 인물들의 이름이 다시 등장하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사람들의 이름도 따서 쓰게 되었다.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이 말을 통해 우리는 나실인에 대한 계율을 기억할 수 있다(6:3, 4). 요한은 평생 나실인으로 살아가며 자신의 기별과 일치하는 절제된 생활을 한다. 독한 술에 해당하는 시케라는 강한 독주 등을 말하며, 신약 성경에서는 본 구절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16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선지자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3:7, 10, 3:19, 9:13). 요한의 사역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회개의 사역이었다(Alford). 요한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를 연결하는 마지막 선지자이다. 요한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주께 돌아오게 하여 그의 뒤에 오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다. 그러므로 그는 일찍이 요한보다 더 큰 선지자가 없었다는 칭송을 듣게 된다. 요한은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었지만 선지자의 직무를 행하였다(3:3).

 

17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심령을 나타내는 프뉴마어떤 사람의 영혼을 지배하는 성질 또는 영향력, 어떤 능력이나 애정, 감정, 욕구 등의 근원등을 나타낸다. 그리고 능력을 나타내는 뒤나메이물려받은 힘’, 또는 사람이나 사물에 내재된 물리적 혹은 정신적 힘을 의미한다. 더러는 기적을 행할 때와 같은 놀라운 권능을 의미할 때도 있다. , 요한은 엘리야가 지녔던 기질이나 영향력, 그리고 엘리야가 하나님께 받은 능력같은 것을 가지고 사역을 할것이라는 말이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가 먼저 와서 주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40:1, 3:1-5, 4:5, 6). 이것은 말라기 선지자때부터 요한이 탄생할 때까지 약 400년 동안의 유대인들의 소망이기도 했다. 요한은 전생애가 엘리야와 너무도 비슷했다. 삶과 사역을 통해 그 유사성은 더욱 확연히 들어난다. 광야에서의 삶(털옷과 가죽띠를 두르고)이나 지위고하(地位高河)를 막론하고 회개를 선포한 사실(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벧에게 회개를 요청하고 탄압을 당했으며 요한은 헤롯과 헤로디아에게서 박해를 받는다) 등이 그러하다. 그렇다고 엘리야와 요한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아니며 엘리야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능력들과 갖은 사역의 성격과 내용에 있어서 바로 엘리야를 지칭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뒤에 그를 엘리야로 말씀하신다(17:12, 9:13).

 

주를 위하여 예비하리라. ‘백성이라는 헬라어 라오스은 공관 복음서에 49회나 사용되는데 그 중 누가복음에서 35회나 사용되고 있다. 누가는 이 단어를 무리’, ‘군중을 나타내는 오클로스과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21:26) 백성은 단순히 무리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세운 구별된 백성, 즉 이제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복음으로 하나가 된 이방인들까지도 포함하는 말이다(Liefeld). 여기서 요한의 사역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요한의 사역은 주를 위하여 예비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누가복음 서론, 누가복음 연구 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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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1-4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

 

그 시대에는 글을 쓰는 사람이 그의 원고를 누구에게 보내어서 검토를 하게하고 비판을 받는 것이 관례였다. 누가는 그가 신임하던 데오빌로를 택하여 이 중대한 일을 하게 하였다. 누가는 맨 먼저 누가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생애의 기록으로 데오빌로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 누가복음 역시도 그가 데오빌로에게 보낸 글이었다(행1:1-5인용). …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원고들과 책들로 보존되어야 했다(원고 40, 1903)

 

은 책 한 권이 있다. 그것만 공부하면 영어가 마스터 된다고 한다.

번 도전해 보겠는가?

 

본문연구

  1. 누가는 누구인가? 또 어떤 사람이었나?
    4:14, 딤후 4:11, 1:24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누가라는 이름은 라틴어 lukaus라는 말에서 유래했는데, 그 뜻은 빛을 전달함이다.

  2. 1절에서 이루어진 사실즉 이미 발생한 사실이나 그것에 관한 기록을 2절에서는 무엇 이라고 표현하는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2절에서 말씀”(.logos)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1:1-3, 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4절의 배운 바의 원어는 말씀과 동일한 "logos"이다.

  4. 저자인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하기 위하여 한 노력은 무엇이었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토의사항                                                 

  1. 1절에서 사실이란 표현은 왜 중요할까? 누가가 말하는 사실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 표 현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2. 누가의 모본처럼 우리도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노력들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 을지 서로 발표해보자.

 

가는 그의 복음서 기록 목적이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1:4)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그와 그의 복음서에 영감을 더하신 성령을 신뢰하면서 읽고 연구한다면,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될 것이다. 시도해 보겠는가?

 

“마태복음이 일차적으로 유대인 독자들을 위하여, 마가복음은 라틴어 배경을 가진 자들을 위하여 기록된 것으로 생각된다. 누가의 어투는 그가 당시의 교양 있고 교육 받은 사람들을 향하여 기록한 것임을 암시한다. 그는 분명히 당시의 문학적 양식에 익숙해 있던 지성과 교양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붙인 서문들, 여러 관리들의 재임 연도에 따라 사건들의 연대를 매긴 일, 그리고 그가 의존한 정보들의 출처의 사용 및 언급 방법 등에 의하여 분명하게 나타난다.”

1번 보충자료

유세비우스는 누가가 민족으로는 안디옥 사람이요, 직업은 의사였다고 기술하였다. 추측컨대, 그는 안디옥 출신이었으며, 어떤 이들은 그가 복음서를 기록한 곳도 그곳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다른 이들은 기록 장소가 로마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누가와 바울은 신약의 가장 많은 분량을 기록한 기고가(寄稿家)이다. 누가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전설에 의하면 그가 헬라에서 순교를 당할 때에 살아 있는 감람나무에 못박혀 죽었다고 한다. 4:11~14의 문맥에 의하면, 누가는 할례당 가운데 포함되지 않고, 이방인으로 알려진 사람들과 함께 명단에 올라 있으므로,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기독교의 기원과 초기 발전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는 한 작품의 제1부와 제2부로 간주될 수 있다. 사도행전의 서두(1:1)는 두 책의 저자가 동일인임을 명백하게 가리켜 보여 주고 있다. 문체와 어투도 현저한 동일성을 나타내고 있다. 두 책 모두 같은 사람인 데오빌로(참조 1:3 주석)에게 헌정(獻呈)되고 있다. 사도행전의 어떤 부분에서는 저자가 우리라는 인칭 대명사를 쓰고 있는데, 이는 그가 바울의 측근으로서 바울의 후기 봉사에 동참했음을 말해 준다. 드로아로부터 저자는 헬라 지방의 개척 전도 기간에 바울과 동행했고(16:10~18),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마지막 방문에도 동행했고(20:5~21:18), 로마로 가는 여행에도 동행한(27:1~18:16) 것으로 나타난다. 4:14과 몬 23, 24에서 바울의 동역자로서 누가는 그 편지들이 전달되는 자들에게 문안을 보낸다. 로마에서의 그의 마지막 투옥 기간이 끝날 무렵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오직 누가만이 나와 함께 있(딤후 4:11)고 했다. 그 사도의 다른 동역자들은 다른 교회들에 파견되었거나 그를 배반하여 떠나갔다. 그의 생애의 마지막 날들의 암운(暗雲) 가운데서, 바울은 사랑받는 의사와 같은 사람의 부드럽고도 유능한 봉사에 대해 한없는 감사를 느꼈음에 틀림이 없다. 바로 이 사람이 사도행전과 그의 이름이 붙어 있는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임이 틀림없어 보인다.”(성경주석, )

 

(4:14)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딤후 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1: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3번 보충자료

(1:1,2,3,14)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가능한 질문에 대한 답

 

2. 처음부터. 즉 예수의 공중 봉사가 시작될 때부터. 그러나 목격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침례자 요한과 예수의 유아기에 관계된 상황을 보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목격자. 헬라어 아우톱타이(autoptai). “자신의 눈으로 본 사람.” 요한은 자신을 목격자로 언급했다(1:14; 21:24; 요일 1:1, 2). 열두 사도, 70명의 제자 그리고 예수와 제자들을 따라다니며 섬기던 모든 여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처음부터목격자(eyewitness)였다. 반면 누가, 바울, 디모데는 귀로 들은 증인”(ear-witness)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예수의 생애와 봉사에 관한 그들의 지식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결함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들은 지식의 목격자일 뿐만 아니라 거룩한 계시의 가르침을 통해 받았기 때문에(고전 15:3~7; 1:11, 12) 그들의 증거의 가치를 조금도 감소시키지 않는다.

여기서 누가가 보여 준 겸손은 그의 이름이 붙은 복음서의 신빙성과 타당성을 뒷받침해 주는 탁월한 증거이다. 그는 정확한 진리를 진술하기 위해 조심하면서, 날조자들이 늘 그렇게 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이 목격자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사실 누가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봉사에 관한 자신의 이해가 본래 목격자들의 이야기에서 유래되었음을 분명하게 진술한다. 그러므로 누가의 경우 영감의 역할은 본래의 지식을 나누어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듣고 자신이 기록한 것의 정확성을 보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누가가 원자료(原資料)를 접했던 역사가인 것은 사실이나 그 이상으로 그는 영감받은 역사가였다.

 

내력. 헬라어 디에게시스(die-ge-sis). “사화”(史話). 두 개의 헬라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길을 인도한다”(lead the way through)라는 뜻이 있다.

 

저술하려고. 헬라어 아나탓소마이(anatas-somai). “편찬하다”, “정리하다”, “작문하다.” 이 말은 굳이 연대적인 배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헬라어 파쎄크세스(pathexe-s, 참조 3절 주석)와 비교해 보라. 이 용어들은 이전 복음서 기자들이 기록한 이야기들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부정확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붓을 든. 헬라어 에피케이레오(epicheireo-). 문자적으로 손을 대다를 뜻하고, 따라서 착수하다또는 시도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어떤 주석가들은 누가의 이 진술을, 그가 언급하고 있는 필자들이 성령의 인도 없이 자의로 기록했음을 암시하는 말로 이해한다. 그러나 파피루스에 나타난 에피케이레오의 용례들에 비춰볼 때, 분명 그런 결론은 부당하며 누가도 이전의 필자들에게 어떤 비난도 하지 않는다. 그들의 의도는 적절했으며, 따라서 누가와는 달리 전적으로 거룩한 영감을 받지는 못했지만 역사적 자료로서 그들의 기록을 배격해서는 안 된다. 누가는 이 필자들을 지지하는 관점에서 보고 있으며, 사실은 나도”(3)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을 그들과 같은 부류에 넣고 있다.

 

많은지라. 누가가 많은지라라는 언급에 마태와 마가를 포함시켰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볼 때 적어도 마가복음은 이미 기록되었고 마태복음도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많은지라라는 표현은 둘 이상을 뜻하므로 이 말에는 복음서 이외의 다른 기록된 역사가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누가가 오늘날 존재하는 외경 복음서를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은 그것들이 오랜 후에야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전 기록자들 중 얼마는 자신들이 기록한 것에 대한 목격자들이었으며, 열두 제자나 70인의 무리에 속할 수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참조 2절 주석).

 

3. 근원부터. 즉 예수의 생애의 근원부터.” 마치 탐험가처럼 누가는 사건의 흐름을 그 발단까지 추적해 올라가 그 흐름의 과정을 철저하게 따라 내려갔다. 따라서 누가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보다 훨씬 상세하게 예수의 탄생과 어린 시절의 배경을 제시한다. 음서에 언급된 예수 탄생 이전에 있었던 여섯 개의 사건 중 다섯 개를 누가가 기록하고 있다.

 

자세히 미루어 살핀.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뒤를 따라가다.”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한 두 번째 이유는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대한 자신의 깊은 연구에서 얻은 유익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누가는 근원부터 시작했으며 모든 것을 조사하였다. 그는 자기의 복음서 기록에서 예수의 이야기를 정확하고 철저하고 체계적으로 제시한다. 이는 진지한 학자들의 특징이다. 마태는 예수의 가르침을 강조하고 마가는 예수의 봉사에 나타난 사건들을 강조하는 반면, 누가는 어느 누구보다 이 두 가지 요소를 더욱 완전하고 체계적으로 결합시킨다. “그 모든 일을자세히 미루어 살핀다는 누가의 주장은 근거 없는 자랑이 아니다. 공관복음 이야기 179가지 중 43가지가 누가복음에만 나타난다.

 

데오빌로.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의 친구.” 데오빌로라는 이름이 어떤 사람을 지칭하기보다는 누가가 그리스도인 전체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했다는 보편적인 주장을 지지해 주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각하라는 호칭은 이 사람이 실제 인물이었음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데오빌로(Theophilus)는 그의 헬라식 이름이 시사하는 대로 개종한 이방인이었을 것이다.

 

각하. 흔히 정부의 고관에게 사용되는 호칭이다. 동일한 용어가 유대의 로마 총독들에게 사용되었다(23:26; 24:3; 26:25). 이렇게 초기에 정부 고위직에 있는 것이 확실한 인사가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차례대로. 헬라어 카쎄크세스(kathexes). “잇따라서또는 연속적으로”(참조 2절 주석). 마태는 예수의 강화(講話)들을 주로 주제별로 정리한 반면, 마가는 예수의 생애의 사건들을 종류대로 모아서 다뤘다. 마태와 마가는 전반적으로 연대순으로 배열했지만 연대적으로 순서를 맞추는 것이 그들의 주목적은 아니다. 그들은 여러 사건을 자신들의 복음서가 지향하는 목적에 조화되도록 재배열하였다. 반면에 누가는 좀 더 정확한 연대순을 따른다. 마태와 마가는 정확하게 연대순으로 배열하려고 하지 않았다.

 

좋은 줄 알았노니. 전에 많은사람이 쓴 이야기에는 빠져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사건들을 기록할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완전하고 정확하며 믿을 만한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기사를 기록하는 것이 누가에게 적절해 보였던 것 같다(참조 2절 주석). 이 말에는 적어도 어떤 성경 기자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영감의 기록을 준비한 방법이 나타나 있다. 성령에 의해 누가의 마음에 전달된 감동은 그에게 적절하고 바람직하게 보이는 어떤 행동 노선을 정하는 일에 영향을 주었다. 누가는 이방인을 그리스도교회 안으로 받아들이는 일의 여부를 숙의하던 예루살렘 총회에 관해 기록하면서 안디옥의 신자들에게 그들의 행동 노선이 가하다”(참조 행 15:25)고 쓴 사도들의 편지를 인용한다. 형제들이 함께 모여 논의했으나, 그들의 생각은 성령의 지도를 받았다. 따라서 그들은 성령과 우리는가한 줄 알았노니”(28)라고 확신 있게 설명했다. 누가복음도 마찬가지다. 성령이 누가에게 기록하도록 강권했지만, 기록할 때는 하나님의 지도를 받아 자유 의지를 가지고 기록하였다.

 

4. 배운 바. 이 단어는 데오빌로가 그때까지는 침례 전에 있었을지도 모르며 그가 구두 교육만 받았다는 사실을 나타낼 수 있다. 그는 누가가 가르쳐서 개종한 사람들 중 하나일 것이다. 아니면 누가가 기독교에 대한 그릇된 보도에 대처하기 위해 이것들을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다.

 

확실함. 헬라어 아스팔레이아(asphaleia). “비틀거리다”, “떨어지다를 뜻하는 스팔로(sphallo-)아니다를 뜻하는 부정접두어 아(a)가 결합된 단어로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사실들에는 확실함이 있으며, 따라서 이것들을 믿는 사람들은 견고하고 안전하여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알게 하려 함. 헬라어 에피기노스코(epi- gino-sko-). “충분히 알다.” 데오빌로는 이미 배운것들에 부가하여 충분한 지식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로마에서, 사도행전 연구 2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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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8:16-31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17]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18]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19]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20]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21]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22]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

[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29] (없음)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내용 요약

바울은 마침내 로마에 이릅니다. 소식을 듣고 마중 나온 형제들로 인해 바울은 담대한 마음을 얻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군인 한 명과 함께 따로 있게 됩니다.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해 자신이 쇠사슬에 매인 이유를 설명 하였습니다.또한 바울은 로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셋집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살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파합니다.

 

궁정의 관심이 그리스도교로 이끌린 것은 바울의 설교가 아닌, 그의 속박이었다. 그가 매우 많은 영혼들에게서 죄악의 노예 생활 가운데 붙들어 매여져 있는 속박을 끊어 준 것은 그가 포로 되어 있을 때였다.(행적464p)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남의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2. 당신은 일을 할 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중 어느 쪽을 더 비중 있게 생각하나요?

  3. 셋방에 살아 본 경험이 있습니까? 주로 그 공간에 자주 온 사람은 누구이며, 같이 무엇을 했나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바울이 죄수가 된 이유는 이스라엘의 소망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소망이란 무엇일까요?(20)

  2. 바울이 강론 한 2가지 무엇인가요?(23)

  3. 바울의 가르침에 대한 반응은 어떠하였나요. 16:15-16을 연관해보세요?(24)

  4. 1:828:26-28을 연계해서 사도행전을 정리해봅시다.

  5. 바울의 선교센터는 어디였는가? 로마에서 전도방법은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는가?(29-31)

28장 그 이후......                                                 

  1. 로마에서 재판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행적, 478)
    * 바울에 대한 비난은 지지를 받지 못하였고 네로는 일반의 기대와는 반대로, 그의 품성과도 전혀 모순되게 공의를 존중하여 죄수에게 무죄를 선언하였다. (행적, 478)

  2. 석방된 다음 바울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바울은 곧 로마를 떠났다. (A.D. 63) 만일 일년만 지체되었더라도 A.D. 64719일 네로가 로마시에 불지른 사건후의 대대적인 기독교 핍박으로 바울은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이 최후의 자유의 기간을 그는 부지런히 교회들 중에서 수고하는 일로 이용하였다.” (행적, 478)
    그는 이 기간동안 여러 지역들을 다시 여행하면서 교회들을 위해서 수고하였고 디도서, 디모데전후서 등의 목회서신들을 기록하였다.

  3. 바울은 왜 다시 투옥되었습니까? (딤후4:6)
    * 그러나 로마의 대 화재 이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대박해가 시작되고 그 핍박의 여파는 바울에게까지 덮쳐왔다. 바울은 다시 체포되었다.
    로마에 도착하자 바울은 침침한 토굴 속에 갇혔으며 생애가 마칠 때까지 거기 머물러야 하였다. 그 도시와 국가에 대한 가장 비열하고 가장 무서운 범죄 가운데 하나를 선동하였다는 고소를 당한 바울은 만민의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행적, 481)

  4. 바울의 마지막은 어떠했습니까? (딤후1:12)
    * A.D.35년 어느 날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거꾸러진 후 그는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고 십자가만 말하여 살아왔다. 그는 불덩어리였다. 견딜 수 없는 뜨거운 복음의 불덩어리였다. 그는 로마시민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형벌대신 칼로 목베임을 당하였다.

 

* “사도는 불확실이나 두려움으로서가 아니요 즐거운 희망과 사모하는 기대를 가지고 위대한 내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순교의 장소에 설 때에 형리의 검이나 곧 그의 피를 받을 땅을 보지 아니하고 그 여름날의 조용하고 푸른 하늘을 통하여 영원하신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았다.” (행적, 502)

사도행전을 마친 것을 축하합니다. 이제는 여러분의 사도행전 29장을 써보세요!!!


16. 로마에 들어가니.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을 읽는 독자는 바울이 로마에서 겪은 일을 좀 더 완전하게 기술하였기를 간절히 바란다. 누가가 추가 사항을 덧붙여, 바울의 도착을 기점으로 또 다른 책을 기술하려고 했던 것 같다.

자기를 지키는. 자기를 감시하는. 그 군인은 바울과 자신의 손목을 묶은 쇠사슬에 함께 매여 있었을 것이다(참조 20). 로마에 투옥되어 있는 동안 기록한 편지서에서 바울은 이 쇠사슬을 자주 언급한다(6:20; 1:7, 13, 14, 16; 4:3, 18; 참조 행 28:20). 사도 바울과 쇠사슬로 묶여 지내는 이방인 군인에게 어떤 영향이 미쳤을까? 우리 중 한 사람과 그렇게 쇠사슬로 묶여진 이방인이라면 어떤 영향을 받을까? 경비병이 자주 바뀌었을 것이므로 투옥돼 있는 이태 동안 바울의 생애가 경비병들의 전 군단에 널리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참조 빌 1:13 주석).

따로 있게. 투옥될 때 바울에게 베풀어진 배려는, 바울이 로마에 도착할 당시에도 계속 그를 지키고 있던 백부장 율리오의 덕분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멜리데 섬에 성공적으로 비상 상륙을 하는 데 큰 역할을 수행했으며, 따라서 이는 다른 증거들과 더불어 지혜와 영적 능력이 두드러진 그의 고매한 인격에 백부장이 호감과 감사의 마음을 갖도록 했다. 이것은 분명 베스도로부터 온 사건 진술서와 함께 바울에 대한 보고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17. 사흘 후에. 바울은 우선 다른 곳에서 만나 이미 알고 있던 그리스도인들과 재회하고 로마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친구도 사귀었음이 분명하다. 그 후에 그는 비그리스도인인 로마의 유대인을 만나고자 했다.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 바울의 규칙은 언제나 첫째는 유대인에게요였다(1:16; 2:9; 참조 행 13:5, 14, 46; 17:1, 2, 10; 18:4 ). 그는 그가 어떻게 로마로 오게 되었는지 직접적인 설명을 하기 위해 유대인 장로들을 초청한다. 모든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하라는 글라우디오의 칙령(18:2)이 해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성배척. 바울이 당면했던 어려움은 비시디아 안디옥(13:50), 루스드라(14:19), 데살로니가(17:5~8), 베뢰아(17:13, 14) 그리고 고린도(18:12~17)에서처럼 언제나 유대인들 때문에 생겼다.

조상의 규모. 바울은 그가 가르치는 바가 진정으로 유대교의 진리를 올바르게 해석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믿었다(참조 23:1, 6; 24:14~16; 26:5~7). 스데반에게 돌려진 비난과 비교하라(6:13, 14).

일이 없는데. 바울은 이미 예루살렘과 가이사랴에서 했던 무죄에 대한 해명을 반복한다.

죄수로 내어 준바. 바울은 예루살렘 폭동(21:27~36)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고, 굴욕적이고 낙담되는 결과만을 지적하였다. 지난 이태 이상 동안 그는 로마인의 죄수로 속박되어 있었다. 그는 유대인 때문에 구속되었으며, 그들의 지속적인 고소 때문에 죄수로 있었다.

 

18. 나를놓으려 하였으나. 나를 자유롭게 하다.” 25:25; 26:32과 비교하라. 만약 벨릭스가 희망한 대로 뇌물을 주었다면, 그 부패한 총독은 틀림없이 바울을 석방했을 것이다(24:26). 바울 앞에 서 있던 모든 관리와 수비대 대장들은 그의 무죄를 확신했다.

 

19. 송사하려는 . 바울은 유대 민족을 사랑했으며(참조 롬 9:1~3; 10:1), 그들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그 사랑이 감소하지 않았다. 그가 당한 부당한 대접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인들을 비난하지도 않았고 고소한 적도 없다. 그가 가이사에게 호소한 이유는 로마나 다른 곳에 있는 유대인에게 어려움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20. 너희를청하였노니. 바울은 회당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유대인들을 찾아갈 수 없었으나, 습관대로 우선 그들과 이해의 기초를 쌓고자 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오라고 초청한 것이다(참조 17절 주석).

이스라엘의 소망. 즉 메시야에 대한 기대. 바울은 예수가 이 기대의 완전한 성취라고 믿었다. 그의 믿음은 모든 유대인들도 가졌던 믿음이다. 그들의 그 믿음을 나사렛 예수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바울에게 유일한 관건이었다.

이 쇠사슬에 매인 바. 그가 구속된 것은 사실상 유대교에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소망을 포기하기보다 속박당하기를 선택했다.

 

21.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한 이후 가이사랴를 떠난 어떤 배도 그가 로마에 도착하기 이전에 로마에 도착할 가능성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에 대한 선입견에 물들지 않았다. 누가는 바울이 로마에서 보낸 이태(30) 동안 바울을 대적하는 편지가 예루살렘에서 왔다거나 유대인 지도자들이 그를 대적하여 취했음직한 다른 조치(참조 사도행적, 453)가 있었다는 암시를 하지 않는다.

 

22. 우리가듣고자 하노니. 이 허심탄회한 고백은 매우 진지했던 것 같다. 로마의 유대인들은 바울과 그의 기별을 조금밖에 듣지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좀 더 듣기를 바랐다.

반대를 받는 . 유대인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좋지 않은 평판이 나돌고 있었다. 타키투스는 이 새로운 분파에 대해 가장 심하게 비난하는 기록을 남겼으며(Annals xv. 44), 수에토니우스(Nero xvi. 2)도 그와 동일하게 정죄하였다. 유스티노스 마르튀로스(AD 165년 사망)는 유대인의 자료(Dialogue With Trypho 17)에서 나온 것이 분명한, 그리스도인을 대적하는 비방에 대하여 말한다. 아마도 로마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연관된 여러 상황과 그들의 악한 성향에 대한 소문뿐만 아니라 놀라운 수적 증가에 대해서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의 유대인들은 그렇게 철저히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편견을 갖게 할 만한 것을 아무것도 듣지 못했으므로 바울에게 좀 더 듣고 싶어했다.

우리가 . 로마에는 이미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참조 15절 주석), 그들을 통하여 제한된 지식이 그곳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전해졌음이 분명하다. 또한 유대에서 돌아온 순례자들이 전한 소식 또는 적어도 소문들이 나돌고 있었을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유대인들 중 어떤 이들은 완고하게 복음에 저항했고 어떤 이들은 진리의 말을 좀 더 갈망했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이유들로 유대인들은 하루 종일 남아 있었다.

강론하여. 바울은 속박되어 있었으나 여전히 유대인 청중들에게 전도할 수 있었다. 이것은 스데반이 제시한 것(7:2~53)과 비시디아 안디옥(13:14~41)에서 바울 자신이 한 설교(13:14~41)에 견줄 만한, 신중하게 연구한 신학적 발표였을 것이다.

증거하고. 그는 예수 안에서 체현된 메시야 소망과 그리스도의 재림의 확실성을 증거하였다.

 

24. 믿는 사람도 있고. 바울의 전도에 대한 통상적인 반응이다(참조 14:4; 17:4; 19:9). 사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 전도자의 경험이다. 각자의 양심은 자유롭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믿는 사람들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음을 인해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25. 맞지 아니하여. 어떤 이들은 사두개인에게, 어떤 이들은 바리새인에게 더 호감을 가졌다(참조 23:6~10).

너희 조상들에게.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조상들을 따르기로 확정했다. 바울은 여기서 그 동일한 조상들이 그들이 지금 나타내고 있는 불신을 책망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라고 촉구한다(참조 눅 16:31; 8:39, 56 주석).

 

26. 일렀으되. 바울은 예수가 유대인을 꾸짖기 위해 직접 사용한(13:14; 4:12; 8:10; 12:40) 6:9을 인용한다.

들어도. 구약의 이 성경절에 대한 설명을 보려면 사 6:9, 10; 7:21~27의 주석을 참조하라.

 

27. 돌아와. 문자적으로 다시 돈다”(참조 마 3:2; 2:38; 3:19, 20 주석).

 

28. 하나님의 이 구원을.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구원(참조 마 1:21 주석).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바울은 특별히 듣기를거절한 유대인(참조 24~26절 주석)들에게 말한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거절하자 바울은 이방인에게로 향했다.

 

30. 온 이태. 누가가 이 두 해 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하고 싶지 않았거나 이 일에 성령의 지도가 없었던 것 같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보완하기 위하여 세 번째 책을 쓸 계획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두 해에 대한 유일한 정보는 일반적으로 이 기간에 로마에서 써 보낸 것으로 생각되는 소위 네 권의 옥중서신 즉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에서 얻을 수 있다. 우리는 바울이 심리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 투옥의 부담에 눌렸음을 안다(3:1; 4:1; 1:16; 4:18; 1, 9, 10). 그는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염려했다(2:23, 24). 에베소에 편지를 전달한 두기고(6:21)와 빌립보(1:1), 골로새(1:1) 그리고 개종한 노예 주인 빌레몬(1)에게 보내는 편지에 바울과 함께 그 이름이 나오는 디모데와 아울러 누가와 아리스다고(27:2)도 그와 함께 있었다. 에바브로 디도는 빌립보에서 바울에게 물질적 도움이 될 것들을 가져왔다(4:18). 주인 빌레몬에게서 도망친 오네시모는 로마에 있는 동안 바울을 알게 되었다(4:9; 10). 바나바의 친척 마가, 유스도라 불린 개심자 예수, 골로새에서 온 에바브라도 바울과 함께 있었다(4:10~12). 데마도 거기에 있었다(4:14; 참조 딤후 4:10). 바울은 비록 죄수였으나 이 두 해 동안 복음에 대한 그의 증거는 매우 효과적이어서 투옥의 끝이 가까워 올 즈음에 그는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1:12)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자기 셋집. 바울이 더 이상 개인적 비용을 손수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에 로마의 친구들이나 다른 곳, 특히 빌립보(4:18)에서 재정적 도움이 왔을 것이다.

오는 사람을 다. 바울은 자유롭게 교제하였다.

담대. 문자적으로 거리낌없음”, “두려움 없는 확신”, “용기 충천.”

 

31. 하나님 나라. 초기부터 그리스도교 기별에는 천국,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념이 있었다(3:2; 1:14).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 이것이 바울의 모든 대화의 중심 영역이었다.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황제, 호민관, 경비병은 물론 유대인도 바울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 전도자는 구금되어 있었으나 복음 기별은 그렇지 않았다.

이로써 초기교회의 성경 역사가 끝난다. 누가가 그 외에 더 기록했다고 해도 현존하지 않으며, 바울의 석방 이후와 두 번째 투옥과 죽음에 대해서는 목회서신이라 불리는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승에서 약간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항해, 사도행전 연구 2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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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7:1-25

[1]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2]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3]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기를 허락하더니

[4]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5]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러

[6]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7]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8]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

[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4]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15]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20]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3]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내용 요약

백부장 율리오가 바울과 죄수들을 데리고 이달리야로 떠납니다. 그레데를 지나 미항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항해하기에 위험한 시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바울이 항해를 말리지만,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 말을 믿고 뵈닉스에서 겨울을 지낼 작정으로 미항을 떠납니다.

광풍이 크게 일어 사공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구원의 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배만 손상되고 아무도 생명에는 손상이 없으리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에게 말해 준 것입니다. 바울이 사람들에게 안심하라고 하며,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이탈리아로 가는 길고도 지루한 항해 동안 사슬에 매인 죄수로서 그에게 주어진 괴로운 경험을 견디어야만 하였다. 한 가지 사실이 그의 고난을 크게 경감시켰는데 그것은 그가 누가와 아리스다고를 동반하도록 허락을 받은 것이었다. (행적439p)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힘든 일이 있을 때, 항상 옆에 있는 친구가 있나요?

  2. 나는 내가 아는 지식과 내가 습득한 경험 중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입니까?

  3. 왜 인생을 항해에 비유할까요?

  4. 순풍이 불 것이라고 판단하고 안일하게 일을 진행하다가 광풍을 만난 때가 있나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바울이 죄수로서 로마로 가는 항로에, 함께 함으로 힘이 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사람은 바울에게 어떤 사람이었나요?(2)

  2.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왜 더 믿었을까요?(11)

  3. 바울의 말대로 항해가 불가능해지자 사람들은 바울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요?(13-20)

  4. 어려운 상황에서 바울이 안심하라고 담대히 증거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21-25)

 

생각해봅시다.                                                 

  1. 주님의 말씀으로 권면하는 사람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2. 위기에 직면했을 때, 내가 취하는 우선순위는?(ex 재물, 인맥, 기도등등)

  3. 위기에 직면했을 때.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이며,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사도는 그 자신이 비록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가장 어두운 시간에 희망의 말을 하였고 모든 위급한 경우에 도움의 손이 되었다.(행적442p)

아리스다고. 바울의 여행 동료. 그는 에베소에서 바울과 함께 있었고(19:29), 후에 마게도냐와 헬라에서도 함께 있었다(20:4). 로마에서의 첫 투옥 때도 바울과 함께 있었다(4:10; 24).

함께하니라. 이 말은, 아리스다고와 기자인 누가가 바울과 동행하였음을 암시한다. 로마의 법은 로마 시민이 죄수로 여행할 때에 노예 한 명과 개인 의사 한 명을 동반하도록 했다. 아마도 아리스다고는 바울의 종으로, 누가는 그의 의사로 동행했던 것 같다.

 

5. 길리기아바다를. 길리기아와 밤빌리아의 [해안에서] 떨어진 바다”.

무라. 해안에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미로스 강변에 세워진 성이다. 오늘날 터키인들은 이곳을 뎀브레(Dembre)라고 부른다. 이 항구는 팔레스타인에서 로마로 가는 배들의 일반적인 기항지는 아니었다. 한 고대의 명각은 무라를 곡물을 저장하는 장소로 언급하는데, 알렉산드리아에서 오는 배들이 이곳에 곡물을 풀도록 항로가 정해졌을 것이다(38). 애굽은 로마제국의 곡창지대였다.

 

6. 알렉산드리아 . 무라는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직항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미항. 이 항구 도시는 어느 문헌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여전히 동일한 이름을 간직하고 있다. 이 도시는 그레데의 남쪽 해안, 즉 섬의 남쪽 해안의 주요한 갑인 마탈라 곶의 동쪽 약 8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리메네스 칼리(Limenes Kali)로 알려져 있다.

라새아. 이 도시의 옛터가 미항의 동쪽 수 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9. 여러 날이 걸려. 순풍을 기다리며 어떻게 할지 의논하느라고 걸린 시간이다.

금식하는 절기. 유대 성력으로 일곱 번째 달인 티쉬리월(참조 Josephus Antiquities iii. 10. 3 [240]) 열 번째 날에 지킨 대속죄일이다. 때는 10월 하순경이었으며 심한 폭풍이 예상되었다.

 

10. 내가 보니. 헬라어 쎄오레오(theo-reo-). “식별하다”(참조 요 4:19).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에 대한 바울의 인식은 반드시 초자연적인 통찰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경험이 많은 여행자로서 자신의 관찰과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예언자로 말하고 있지 않다. 그가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생명에도 타격이 있을 것이라고 두려워했던 일이 후에 일어나지 않았음을 주목하라(27:44).

타격과 많은 손해. 손상과 많은 손실.” 이렇게 기탄없이 충고하는 것으로 보아, 바울은 배를 맡고 있는 자들의 존경을 받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이미 여러 번 지중해와 에게 해를 여행하였다. 이 특정한 항해가 있기 몇 해 전에 그는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고후 11:25)라고 기록하였다. 바울의 여행과 멜리데 섬에서 일어난 파선에 대한 설명을 보려면 이 장 끝에 있는 추가적 설명을 참조하라.

 

11. 선장. 헬라어 퀴베르네테스(kuberne-te-s). “키잡이”, “선장즉 항해의 책임을 맡은 자이다. 백부장은 당연히 이곳저곳을 순회하는 유대인 랍비보다 전문 항해인의 판단을 더 선호했다.

선주. 로마로 보내는 애굽산 밀(38)인 화물도 그의 소유일 것이다. 이 주요 산물은 알렉산드리아와 로마 사이의 수익이 높은 활발한 무역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참조 5절 주석).

뵈닉스. 일반적으로, 그레데 남쪽 해안에 있으며 연중무휴로 개항하는 최상의 항구 뤼트로(Lutro)로 생각된다. 이 항구는 헬라의 지리학자 스트라본(Geography x. 4. 3)에 의해 언급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외국으로 가는 배의 중개상이 바다에서 보호해 준 것에 대한 감사제로 세라피스와 유피테르에게 바친 서판이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문자적으로 남서와 북서를 내려다보는.” 뤼트로 항구는 동쪽을 향하고 있어서 배를 탄 사람이 항구로 들어갈 때에는 서쪽을 보게 되어 있다. 뤼트로 항구를 형성하는 갑()의 다른 쪽은 덜 안전한 피네카(Phineka) 항구인데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13. 남풍. 선장이 북풍(7, 8)을 피하려고 지금까지 그레데 남쪽으로 항로를 잡았던 것으로 보아, 남풍이 순하게 분 것은 기후가 완전히 바뀌었음을 나타낸다.

득의한 . 오랫동안 기후가 바뀌기를 기다렸음을 보여 준다.

닻을 감아. 닻을 올려.”

가까이 하고. 헬라어 앗손(asson). “더 가까이.” 오래 전에는 어떤 장소의 이름으로 생각되었으나 지금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더 가까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지명은 확인된 바가 없다. 서쪽으로 약 64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뵈닉스에 도달하기까지 해안으로부터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선장의 목적이었다.

 

14. 유라굴로. 헬라어 유로클뤼돈(eurokludo-n). “동풍“[] 파도거센 물을 의미하는 두 단어에서 유래했다. 그러므로 유로클뤼돈은 큰 파도를 일으키는 동풍을 지칭한다. 그러나 유라퀼론(eurakulo-n)이라는 독법을 지지하는 중요한 본문상의 증거(참조 20)를 제시할 수도 있다. 앞부분이 헬라어이고 뒷부분이 라틴어인 이 혼성어는 동북동풍을 가리킨다.

(). 헬라어 튀포니코스(tupho-nikos). 자연의 폭풍우의 힘, 특히 맹렬한 바람의 화신인 튀폰(Typhon) 신의 이름에서 유래한 형용사이다. 바람의 빠른 변화는 이것이 거센 폭풍우였음을 나타낸다.

대작하니. 문자적으로 그것으로부터 파도가 치다.” 이것은 산이 많은 그레데 섬에서부터파도가 치다라는 의미이다. 갑자기 부드러운 남풍이 강한 북풍으로 바뀌었고, 이 때문에 배는 남쪽 가우다라는 섬(16)쪽으로 떠밀려갔다.

15. 배가 밀려. 마탈라 곶의 동쪽 연안에 가까이 붙어 항해할 때는 배가 변화무쌍한 바람으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뵈닉스로 가는 길에 트인 만()을 가로지르기 시작하자 맹렬한 북동풍이 강력한 위세로 배를 남서쪽 가우다 방향으로 몰아갔다.

바람을 맞추어. 바람을 마주 대할 수 없음을 말한다.

 

16. 가우다. 이 섬의 오늘날 명칭은 곳조(Gozzo) 또는 가우도(Gaudo)이다. 프톨레마이오스(Geography iii. 15. 8)는 이 섬을 클라우도스(Claudos)라고 불렀다. 이 아주 작은 섬은 마탈라 곶[] 남서쪽 72.5킬로미터 지점에 있는데 마탈라 곶 부근에서 북동풍이 배를 급습하였다.

간신히 거루를 잡아. 이 옛스러운 관용구는 우리가 간신히 [구조용] 보트(혹은 작은 배)를 제어할 수 있었다라는 의미다. 이 작은 비상용 보트는 대개 밧줄로 매어 둔다. 파도가 거센 바다에서 순식간에 보트에 물이 차고 다루기 어렵게 되었을 것이다. 선원들은 보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배 위로 끌어올리려 하였다.

스르디스. 헬라어 쉬르티스(surtis). (제임스왕역에는 유사”[流砂] 의미하는 “quicksands”로 되어 있음역자 주) 아프리카 대륙 북부 해안으로 만입(灣入)되어 있는 큰 만()의 동쪽 부분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오늘날에는 같은 만의 서쪽 부분인 소() 스르디스와 구별하기 위해 대() 스르디스로 불린다. 대 스르디스와 소 스르디스 모두 수심이 얕으며 모래톱 즉 유사를 숨기고 있는데, 항해가 시작된 이래 셀 수 없는 배의 묘지가 되었다. 바울의 배는 바람에 의해서 대 스르디스 방향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루칸(The Civil War ix. 303~310)과 밀턴(Paradise Lost ii. 939)을 참조하라.

쫓겨가더니. 하루나 이틀이면 북동풍은 배를 서남서쪽 스르디스로 몰아갈 것이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선원들은 폭풍이 부는 악천후에 앞서 배에 장비를 갖추었으며 뱃머리를 바람받이로 돌려서 배를 세우고 우현으로 바람을 받으며 범주(帆走)했다. 그렇게 하면 배의 이물이 거의 북쪽을 향하고 북동풍은 배의 우현을 치게 되어, 배는 주로 옆으로 밀려 서북서쪽을 향해 가게 된다. 가우다에서 멜리데까지는 약 760킬로미터이다.

19. 기구. 참조 17. 배에서 제거할 수 있는 모든 장비, 특히 갑판 위에 있던 것들을 모두 바다에 던졌다.

저희 손으로. 문자적으로 자신의 손들곧 선원들의 손으로. 장비는 물에 떠내려가거나 바람에 휩쓸려 간 것이 아니라, 심사숙고 끝에 바다에 버린 것이다.

20. 여러 날 동안. 사건의 추이가 분명해지기까지 거의 두 주가 지났다(27).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나침반이 발명되기 전에 폭풍이 이는 바다를 항해하는 자들은 방향을 정하고 위치를 알기 위해 낮에는 해를, 밤에는 별을 관찰하는 일에 의존하였다. 27절을 볼 때 항해사들은 배의 운항 위치를 알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길을 잃은 것이다.

21.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선원의 형편을 말한 것이지만 헬라어 본문에 명백히 나타난 것처럼 대개의 선객들도 그랬을 것이다. 폭풍이 몰아치는 동안 배를 운항하는 어려움과 흥분으로 인해 규칙적인 식사 준비나 식사를 하기가 어려웠다. 많은 사람들이 뱃멀미를 했을 것이다.

바울이서서. 미항에 있을 때 바울의 충고가 거절된 이후 바울과 그의 일행은 선장과 선원들이 자기들 생각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내 말을 듣고. “내가 이럴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라는 바울의 말은 비난이나 불쾌한 잔소리가 아니라 항해사들을 설득하여 그가 이제 말하고자 하는 것에 주목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약 그의 충고(10)를 따랐다면, 지난 며칠간의 위험과 두려움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제 바울의 충고를 귀담아 들을 것이었다.

22. 안심하라. 또는 용기를 내라”, “마음을 다잡아라.”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바울이 한 용기의 말과 여망이 다”(20) 없어질 것이라고 한 그들의 말을 대조해 보라. 16:33; 23:11과 비교해 보라. 바울의 태도와 어조는 용기를 주는 그의 훈계와 조화를 이루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불안한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한다.

23. 나의 속한 바. 종교는 개인적인 일 곧 개인적인 헌신으로, 인격적인 하나님에게 드리는 개인적인 경배와 봉사이다. 바울은 거의 파선 지경에 처한 배에 함께 타고 있는, 두려워 떠는 이방인들에게 공감을 주는 증언을 한다. 바울은 배에 타고 있는 자들을 위해 이제 곧 개입하려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데, 그것은 상호 협력하는 봉사를 통하여 그분은 바울에게 속하고 바울은 그분께 속했기 때문이다. 바울 자신도 봉사의 멍에를 멨으며, 자신과 함께 멍에를 멘 예수와 친밀한 교제를 나눠왔다(참조 마 11:28~30; 1:9; 딤후 1:3, 12).

사자. 문자적으로 한 천사.”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천사의 개입에 대해서는 행 5:19; 8:26; 12:7; 1:13, 14을 참조하라.

내 곁에 서서. 바울은 천사가 예루살렘의 감방으로 그를 방문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때 천사는 그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23:11).

24. 두려워 말라. 하늘의 방문자들이 얼마나 자주 이 말을 가지고 사람들을 찾아왔는가(참조 눅 1:13, 30; 2:10; 1:17).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이 약속(23:11)이 처음 주어진 이후 사도를 지탱해 온 그 약속을 새로이 한 것으로, 바울은 시련을 안전하게 통과하여 마침내 로마에 도착할 것이었다.

네게 주셨다.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그에게 허락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위기의 때에 바울은 자주 기도했음에 틀림없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이제 그들과 함께 여행하는 이 사람이 보통 죄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바울과 그의 그리스도인 동료들은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고후 2:16; 참조 창 18:23~32; 5:13)임이 입증되었다.

25. 나는하나님을 믿노라. 상황이 위험해지고 희망이 없어질수록 바울의 믿음은 강해졌다. 배의 견고성이나 선장과 선원의 기술에 대한 신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참조 20).

아그립바 왕 앞에서, 사도행전 연구 2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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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6:18-32

[16]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18]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19]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20]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22]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27]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30]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31]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32]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내용 요약

유대인의 풍속을 아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바울은, 바리새인인 자신이 하나님이 유대인의 조상에게 하신 약속을 바라기에 심문받는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원래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해 성도를 옥에 가두고 박해했으며 그 일로 다메섹까지 갔으나 거기서 자신이 핍박하는 예수를 만나고 복음 전하는 자가 된 것을 증언합니다.

 

온 무리는 놀라운 경험에 대한 바울의 말에 넋을 잃고 귀를 기울렸다. 사도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사람 중에 아무도 그의 성실을 의심할 수 없었다. (행적438p)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증거할 때, 가장 좋아하는 주제는 무엇인가요?

  2. 자신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이란?

  3. 주님의 사업에 몰두한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께 받은 사명은 무엇입니까?(16-18)

  2. 바울이 복음을 전한 대상과 장소 그리고 전한 내용은 무엇입니까?(19-20)

  3.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도우심이란 무엇인가요?(22-23)

  4. 복음을 듣는 모두가 자신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는 바울의 말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24-29)

  5. 바울이 무죄함에도 풀려나지 못한 데에는 어떤 이유들이 있나요?(30-32)

 

생각해봅시다.                                                 

  1. 주님의 사업을 위해서 시간을 투자하려고 할 때, 방해되는 요소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2. 예수님을 믿는 것과 다른 종교를 믿는 것에는 어떤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고전 1:23-24, 개정)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아그립바는 깊은 감동을 받아 한동안 그의 회중들과 그의 직위의 위엄을 잊어버렸다......그러나 아그립바는 제공된 은혜를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속주의 십자가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였다.(행적438p)

16. 네가 나를 본 일. 바울은 실제로 주님을 보았다(22:17, 18; 고전 9:1; 15:8). 바울이 사도직을 주장하는 것은 이 직접적인 사명 부여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개인적인 경험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진정 부활했음을 알았다(참조 갈 1:15~18; 딤전 2:7). 참 증인은 자신이 증언하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이 있어야 한다.

내가나타날 일. 그리스도는 바울을 지도하고 간섭하기 위하여 반복하여 나타났다(참조 행 18:9, 10; 22:17~21; 23:11; 고전 11:23; 고후 12:1~5). 바울은 부활한 주님을 목격하였으며 부활의 진리를 개인적인 경험을 통하여 알았다.

너로 사환을 삼으려 함이니. 참조 9:10, 15 주석. 하나님은 다메섹의 아나니아를 통하여 바울을 가르친다.

 

17. 내가보내어. 대명사 내가는 강조형이다. 다른 이가 아닌 예수가 친히 바울에게 사도직을 부여한다.

너를 구원하여. 이 일과 다른 경험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이전 진술(9:22)에는 언급되지 않았다. 이것은 주님이 바울을 위험에서 구해내겠다는 약속이라기보다는 위험의 순간에 그와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말한다.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참조 눅 4:18 주석. 그의 사명이 성공적으로 완수되리라는 약속이다. 바울은 마귀가 사람들의 영적 눈을 멀게 했다는 것을 알았다(1:20~32; 고후 4:4). 예수가 그에게 말하던 바로 그때도 바울은 육체적 눈멂으로 괴로움을 당했다. 눈이 열려야 할 필요성을 그가 얼마나 더 절실히 느낄 수 있었겠는가!

사단의 권세. 사단은 모든 사람을 죄로 이끌었다. 실로 그는 죄의 창시자이다. 그리스도의 뛰어난 능력만이 사람을 그의 마수에서 놓이게 할 수 있다.

돌아가게 하고. 또는 그들이 돌아갈 수 있도록.” 눈이 열리자 그들은 그들이 여행하고 있는 길 끝에 있는 확실한 죽음을 볼 수 있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들은 돌이켜야 했다.

죄사함.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자신들의 죄를 제거할 수 없었다. 복음을 통해 그들은 죄의 면제 즉 죄를 떨쳐버리는 좋은 소식(1:7~9; 벧전 2:24)을 접하게 되었다.

믿어 거룩케 된. 바울은 성도들이 통과해야 할 품성 변화의 과정인 성화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성화는 칭의를 통해 죄책으로부터 즉시 자유로워지는 것(4:8) 위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전이라는 목표를 향해 마음과 생애를 반복하여 지속적으로 바치는 일을 더한다. 그것은 필생의 사업이다”(참조 사도행적, 560 ~562; 5:48 주석). 모든 그리스도인이 해야 했던 것처럼 바울은 지속적인 헌신,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면서 나아가는 일을 경험하고 있었다(참조 빌 3:12~14; 8:1~4 주석).

기업. 일시적인 세상의 헛됨, 사악함 가운데서 늙어 가는 대신에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벧전 1:4)을 전하고자 하였다.

 

19. 하늘에서 보이신 것. 참조 9:3~7 주석. 이것은 꿈이 아니었다. 사울은 문자 그대로 다메섹 도상에서 주를 만났으며 어떤 면에서 육적으로 그분을 알았던 자들보다 더욱 개인적으로 알게 되었다. 바울에게 이 계시는 살아 있는 실재로 남았다. 바울은 그가 의뢰한 자를 알았다(딤후 1:12).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바울은 가시채를 뒷발질하”(참조 14절 주석)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가 그에게 허락한 계시에 응하여 완전히 굴복하였다. 그의 헌신은 완전하여 일단 의무의 길이 명백해지자 그 이후 결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주님이 원하는 바를 알고자 하였으며 안 후에는 그것을 행하였다(참조 16:6~12). 그의 평생을 통해 유일한 질문은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22:10)였다. 그는 여전히 순종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 있었으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강권하였다(고후 5:14).

 

20. 다메섹에있는 사람과. 바울은 개종할 때 있었던 곳, 교회에 심각한 상해를 가하고자 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즉시 일하기 시작하였다(참조 9:19~22 주석).

예루살렘에. 바울은 약 3년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1:18). 거기서 목숨을 걸고 매우 담대하게 증거하였으므로 유대인들, 특히 헬라파 유대인들(참조 6:1; 14:1 주석)은 격노하였다(9:29).

유대 온 땅. 유대 모든 지역. 예루살렘으로 향한 몇 번의 여행 중 한 번 혹은 그 이상 유대 지역에서 전도했을 것이나(참조 행 11:29, 30; 12:25; 15:3, 4; 18:22; 21:8~15; 1:22), 바울이 유대 전도를 언제 수행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방인. 바울의 이방인 선교는 약 9년 혹은 10년 후에 수리아 안디옥에서 시작되었다(11:25, 26; 13:1~4).

회개하고. 헬라어 메타노에오(metanoeo-). “[사람의] 마음을 바꾸다”(참조 마 3:2; 3:19~21 주석).

일을 행하라. 참조 마 3:8 주석. 바울은 여기서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의해 성취되는 삶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행함을 주장한다. 어떤 행위를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참된 의는 생애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에 상응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행위를 자동적으로 행하게 한다는 뜻으로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혜를 통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3:21, 22, 27; 2:5~8)의 영광스러운 사실을 바울보다 더 강조한 전도자는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구원의 값없는 선물에 대하여 언급할 때마다 여기서와 같이 그에 따르는 선한 행위에 대해서도 강조하였다(참조 롬 8:1~4). 믿음의 사람은 율법을 세우는데(3:31), 이는 그가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2:10)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참된 의가 존재할 때 그 의는 선한 행위로 입증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참조 약 2:14~24).

선전하므로. 문자적으로 선언하였다또는 공고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 전도자 곧 그분의 좋은 소식을 전달하는 자였다.

22. 하나님의 도우심. 참조 21:31, 32; 23:11, 12, 30 주석. 인간의 눈에는 바울을 구조한 자들이 루시아와 그의 군병들로 보였으나, 바울은 하나님이 그 도움을 베풀었음을 알았다(참조 23:11).

증거하는 . 참조 9:15; 26:1 주석.

선지자들과 모세. 구약(참조 눅 24:44 주석)을 가리킨다. 바울은 반복하여 성경에 대한 그의 신뢰와 충성을 확언한다(참조 24:14 주석). 예수 안에서 성취된 메시야에 대한 예언들은 구약 전반에 산재해 있다.

 

23. 그리스도. 문자적으로 그 그리스도”(참조 마 1:1 주석).

고난을 받으실 . 그리스도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이 바로 유대인들과 바울 사이의 논쟁점이었다. 메시야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고난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메시야를 위한 여지는 없으므로 메시야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야 할 이유도 없었다(참조 6절 주석). 여기서 바울의 진술은 엠마오로 가던 예수의 진술과 거의 동일하다(참조 눅 24:25~27 주석).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항상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다(고전 1:23). 참조 13:27~37 주석.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그리스도는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 15:20)이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1:18)이다. 또한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죽은 자가 살아날 것이라고 최초로 선포한 자였다(5:21~29; 11:23~26). 시간적으로는,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일어난 자는 아니다. 그 점에서는 모세가 먼저이다(9:28~30; 9). 그리스도는 탁월함에서 그리고 생명의 창조자로서(1:15, 16; 3:4) “먼저이다. 죽음을 정복한 후(2:24; 1:18) 예수는 그와 그의 능력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보증하였다. 그의 부활은 의인들이 모두 겪게 될 부활에 대한 보증이었다(고전 15:12~22).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딤후 1:10) 자는 그이다.

이스라엘.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2:32)이라고 불렀다.

이방인들. 이들은 하늘이 바울을 선택하여 진리의 빛을 선포하도록 한 대상들이다(참조 9:15 주석).

빛을 선전하시리라. 또는 빛을 선포하다.” 구주에 대한 인간의 필요만큼이나 오래된 복음은 그의 죽음과 부활의 빛 가운데서 새로운 능력으로 선포된다. 참조 요 1:4~9 주석.

24. 베스도가가로되. 그는 들은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거나 귀담아 들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는 큰 소리로 이의를 제기했다. 십자가에 대한 설교는 세상에 맞추어진 귀에는 미련한 것으로 들린다(고전 1:23).

미쳤도다. 베스도는 고결한 주제에 대한 바울의 강박 관념이 그의 정신에 영향을 미쳤다고 진심으로 믿었을 것이다. 아그립바의 경우 하고자 했다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 로마인인 베스도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25. 각하. 흔히 사용되는 경의의 호칭으로, 베스도의 고위 관직에 적합하다(참조 눅 1:3; 23:26; 24:3 주석).

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진술의 역사적 정확성을 인정할 것을 호소한다.

담대히 말하노니. 이 장에 기록된 바울의 개종에 대한 내용은 9장과 22장의 동일한 내용의 설명보다 더욱 자세하다. 바울은 담대히 말했는데 이는 아그립바 왕이 박식한 청중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것이 팔레스타인에서 갖는 마지막 발언 기회일 수도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 자신과 그의 말을 듣는 자들 모두에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이 일에 하나라도. 예수의 생애와 봉사, 죽음과 부활, 오순절의 경험, 베드로와 요한 및 다른 사도들이 행한 이적들, 바울의 놀라운 개종, 복음의 전파에 뒤따른 주목할 만한 결과들이다.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바리새인들은 온 세상이예수를 좇는도다”(12:19)라고 불평했으며, 유대인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치안관들에게 사도들이 천하를 어지럽게 한”(17:6)다고 말했다. 복음 선포에 따르는 논쟁은 물론 복음에 대한 관심과 흥분은 바울이 말해온 바를 확증해 준다.

27. 믿으시나이까. 아마도 그는 유대인으로서 선지자를 믿었을 것이다. 선지자들은 예수에 대하여 바울이 말한 모든 것을 예언하였다. 참조 22절 주석.

아나이다. 눈치 없이 아그립바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기를 바라면서 바울은 그의 대답을 기대한다. 아그립바는 바울이 말한 모든 것이 진실임을 인식하였으나 지식과 확신이 그의 행동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참조 마 7:21~27 주석).

28. 적은 말로. 헬라어 엔 올리고(en oligo-). 문자적으로 적은 것으로.” “적은 [시간] 안에일 가능성이 있다. 이 구절의 원문이 모호하기 때문에 다양한 번역과 해석상의 시도가 있다. 주석자들은 일반적으로 아그립바가 26, 27절의 바울의 진지한 호소를 경시하는 양 빈정대면서 말한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렇다면 그가 빈정댄 것은 진정한 감정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참조 사도행적, 438). 흔히 깊은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아그립바처럼 무관심한 척 말하며 행동하곤 하는데, 특히 믿지 않는 동료들 앞에서 그렇게 한다. 깊은 확신을 받았는데도 아그립바 왕은 총독의 재판정에 모인 자들에게, 일개 죄수가 짧은 시간 안에 간단한 설명으로 왕을 개종시킬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순진한 사람으로 바울을 여긴다는 인상을 주기 원했던 것 같다.

29. 적으나 많으나. 아그립바의 호통에 비추어보면 적은”(28)을 가리킨다. 바울이 증거한 것이 적든 많든 왕처럼 식견이 넓은 유대인에게 호소하기에는 충분하다.

당신뿐 아니라. 전혀 위축되지 않고 바울은 계속 호소한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손짓하면서 바울은 그가 묶여 있는 쇠사슬을 상기한다.

30. 왕과일어나서. 회견은 바울의 뛰어나고 간결한 제시와 진지한 청원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결과 없이 끝났다. 바울의 실망이 얼마나 컸는지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31. 서로 말하되. 바울의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사형할 만한 행사가 없다. 바울이 미쳤다는 말을 들었지만(24, 25), 위험한 인물은 아니었다. 베스도와 아그립바는, 바울이 진지하고 견문이 넓으며 하나님을 위한 열정으로 불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베스도의 재판, 사도행전 연구 2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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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5

[1]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2]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3]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4]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 않아 떠나갈 것을 말하고

[5] 또 이르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 하니라

[6]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7]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8]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9]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10]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 대

[12]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13]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14]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17]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18]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20]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내용 요약

베스도가 가이사랴에서 바울을 재판합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고소했지만 그 죄에 대한 증거를 대지 못합니다.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으려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심문받겠는지 묻자,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다며 가이사에게 상소하겠다고 합니다.

 

베스도는 가이사랴에서 바울에게 공정한 심판을 베풀고자 하는 그의 목적을 고수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섭리로 베스도의 결정을 지배하셔서 사도의 생명이 연장될 수 있도록 하셨다.(행적429p)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그리스도인으로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그 억울함을 어떻게 풀어나가는 것이 좋을까요?

  2. 뜻하지 않게 계획이 바뀌어 당황스럽고, 불평스러웠던 적이 있으면 이야기 해 봅시다. 계획이 바뀐 것이 결국은 좋았나요? 그렇지 않았나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베스도가 부임하고 유대인들이 바울을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25:1-3)

  2. 바울이 로마(가이사의 법정)로 가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25:9~12)

  3. 바울이 고발당하는 이유는 법적 문제입니까? 신앙적 문제입니까?(25:18-19)
    신앙적 문제와 사회적인 문제가 겹쳤을 때,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 것이 좋을까요?

 

생각해봅시다.                                                 

  1. 내가 계획한 일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더 기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2. 신앙적 위기의 때를 위하여 우리는 어떠한 준비를 하고 사는가?

  3. 어떤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인간의 노력 사이에 어떠한 균형이 필요할까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임박한 위기를 위하여 준비하기를 갈망하신다. 준비되었거나 이니 되었거나 간에 그들은 모두 위기를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애를 하나님의 표준에 일치하게 한 자들만이 그 시험과 시련의 때에 굳게 설 것이다. (행적432p)

2. 대제사장. 본문상의 증거(참조 20)우두머리 제사장들이라는 독법을 증거한다. 당시 대제사장은 얼마 전 아그립바 세가 임명한 이스마엘이었다(Josephus Antiquities xx. 8. 8). 바울을 고소하는 자들은 베스도가 유대인의 사건들의 진상을 파악할 시간을 갖기 전에 그를 이용하고자 했다.

높은 사람들. 지도자들”, “주요한 사람들.” 가장 부요하고 유명한 유대인은 의회의 의원이었으며 대부분이 사두개인이었다. 그들이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주로 바울의 혐의를 씌우는 일에 앞장선 것으로 보인다(참조 행 23:6~9; 11:46 주석).

3. 호의로. 사두개인들은 바울에 대한 고소를 특별히 다루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유대 민족 지도층에 속해 있었으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 백성의 지도자로서의 명예와 성실성은 이들이 바울을 다루는 일에 달려 있었다. 그들은 바울에 대한 적대감으로 스스로 어려운 입장에 빠뜨렸다. 유대인들이 요구한 호의”(카리스[charis])는 바울을 그들의 법정으로 소환하도록 공식 명령을 내려달라는 제안이었다.

매복하였다가. 바울을 해하려고 품었던 이전의 음모(참조 23:12~15 주석)를 포기하지 않았다. 유대인의 여론과 관습법은 종교적 규정을 위반한 범죄자에게 직접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승인하고 있었다(참조 Mishnah Sanhedrin 9. 6, Soncino ed. of the Talmud, 542). 아마도 2년 전 어떤 광신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의회 의원 가운데 일부는 이미 맹세했을 것이다.

미구에. 10일 후.

나와 함께 내려가서. 유대인 대표자들은 로마의 총독과 함께 여행하기에 손색이 없는 자들이어야 했다. 베스도는 이 지도적 위치에 있는 유대인들을 존중했으며 동시에 바울의 송사사건의 중대성을 인정했다. 바울을 대적하는 유대인 지도자들의 열심은 전에 있었던 심문(24:1, 27) 이후에도 여전히 식지 않았다.

7. 내려온 유대인들. 유력한 자들과 영향력 있는 자들을 대표로 요청했던 베스도의 요구는 충족되었으며(5) 유대인 지도자들은 바울이 심문을 받으러 소환되었을 때 그곳에 임석했다.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송사하되. 이태 동안(24:27) 유대인들은 바울에 관한 온갖 종류의 보고와 소문을 모으는 데 바빴다. 아마도 이제 그를 대적할 수 있는 좀 더 강력한 사례를 확보하고 있을 것이다. 이 상세한 기소장 사본이 후에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전달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참조 28:21).

8. 변명하여. 문자적으로 방어하여.” 아마도 바울은 사소한 혐의(7)에는 자세히 대답하지 않고, 만약 그렇게 인정되면 로마 법정이 그에게 불리하게 판결을 내릴 것들에 대해서만 답변했던 것 같다. 곧 성전을 더럽히고, 유대인의 율법을 모독했다는 혐의와, 선동적인 폭동에 가담했다는 혐의이다. 로마는 그러한 일에 주목했으며 베스도는 바울에게 로마의 권위에 대한 반란죄가 있는 것으로 오판하도록 유도 될 수 있었다. 누가는 이 세 항목에 대한 바울의 변명을 기록한다.

율법이나. 유대인 지도자들은 할례가 단지 상징적인 행위(참조 롬 2:23~29)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알았으며 이것이 율법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라고 이해했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를 이렇게 비난했었다(참조 마 5:17; 2:16; 7:1~5 주석). 유대인들은 이전에 예수를 비난했던 것처럼(5:16~18) 안식일 문제로 바울을 비난하지는 않았다.

성전이나. 이방인을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는 이전의 고소(21:27, 28)가 심문 과정에서 재검토되었을 이다.

가이사에게나. 바울이 가이사에게저촉되는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면 그 어떤 로마 법정도 그에게 유죄를 선고하지 않을 것이다. 피상적인 고소 내용에 반하여 바울의 솔직한 변명은 유능하고 정직한 행정가인 베스도에게 틀림없이 감명을 끼쳤을 것이다(참조 제10, 81).

9. 마음(을 얻고자 하여). 호의”(참조 24:27 주석). 처음에 베스도는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소환해 달라는 유대인의 요구를 거절했다(25:3, 4). 바울이 받는 혐의 때문에 적대적 영향을 받았든지 안 받았든지, 적어도 베스도는 바울에 대한 유대인의 격렬한 감정을 이전보다 더 인식하게 되었다. 그가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두말할 필요 없이 그의 성공적인 통치에 이바지할 것이었다.

네가올라가서. 바울에게 씌워진 혐의는 로마법이 아니라 유대법에 관한 것이 분명했으므로 베스도는 유대인의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그 문제를 조사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 생각했다.

내 앞에서. 심문하는 자리에 베스도가 임석한다는 것은 바울이 아직도 로마인에 의한 구류와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이 재판 절차를 관장하며 베스도는 흥미를 가진 관찰자의 역할 쪽으로 기울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제안이 비록 시험적으로 이송의 의향을 묻긴 하였지만 그가 바울을 유대 법정에 이송한 것은 아니었다. 이 제안은 사실상 바울이 가이사에대한 어떠한 죄목에서도 무죄하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었다. 숙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혐의란 유대인의 율법과 관습에 대한 것이었다. 로마의 대리인으로서 베스도는 이 소송건에 더 이상 직접적인 흥미가 없었으나, 새로 부임한 지역 지도자들의 환심을 사려는 바람으로 기꺼이 그들의 소원에 가능한 한 최대한도로 부응하고자 하였다. 이 제안은 실제적으로 바울이 어떤 명백한 행위나 그러한 행위를 하려는 의도를 가져서 유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단지 정치적 편법이었다.

재판 자리. 법정.” 바울은 법률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편견만을 주장하는 성급한 동족의 변덕스러운 증오보다는 비교적 공정한 로마의 법을 선호하였다.

당신도 잘 아시는 바에. 바울은 9절의 제안이 베스도가 유대인을 달래려고 한 것이었음을 안다.

유대인들에게. 바울은 모든 혐의를 한마디로 부인했다. 그는 유대인의 신체, 재산, 인격 또는 종교를 전혀 침해하지 않았다.

11. 만일. 문자적으로 만약 진정이라면.” 바울은 이미 유대인들에 대한 어떤 범죄도 부인했으므로 베스도는 그를 유대 법정에 보내겠다는 제안을 통하여 그가 로마법으로는 무죄하다는 것을 암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범죄에 대해 유죄라는 의혹이 있다면, 바울은 로마법으로 재판을 받도록 로마 시민으로서의 특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문자적으로 나는 죽음을 모면하고자 청원하지 않는다.”(비교 Josephus Life 29). 바울은 그 선고가 무엇이든 간에 공의로운 재판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한다.

내어 줄 수. 헬라어 카리조마이(charizo- mai). “호의를 베풀다”, “만족시키다.” 바울은 단지 유대인들에게 유리하도록 그를 고소하는 자들에게 자신이 인계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바울은 베스도가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는 것을 알았다. 바울은 고소자들을 기쁘게 하고 그의 생명을 취하려는 악한 계획이 성취되는 일을 더 쉽게 할 뿐인 로마 시민권 포기를 거절하였다. 그는 산헤드린에서 그에게 공의나 자비를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바울은 자신의 권리(참조 22:25~29 주석)에 대한 또 다른 주장으로 청원을 끝냈다. 로마에서 그에게 어떤 판결을 내린다 해도 그것을 감수하며, 증거에 근거하여 결정하는 로마 황제의 공정성에 운명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 비록 구속된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그는 로마를 방문하려는 목적을 오랫동안 염두에 두고 있었다(1:9~12; 15:23, 24). 제국의 하급 법정에서 올라오는 모든 상소는 마지막 법정인 황제에게 올라갔다.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교는 로마법상 인정받은 지위를 향유하지 못하였으며, 인정받지 못한 종교를 믿거나 전파하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다. 처음에 로마는 그리스도교가 인정을 받은 유대교의 일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을 용인했다. 유대인들이 바울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소송을 강하게 밀어붙임으로 마침내 이 특권마저 박탈당하고 로마법 아래서 그들의 지위가 법적으로 지지받을 수 없는 상태로 되었다.

바울은 가이사에게 호소함으로써 정체되어 있는 자신의 소송 사건에 대한 결정을 얻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그리스도교가 자체의 권리를 가진 합법적인 종교라는 얼마간의 인정도 받을 작정이었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이로 인해 십자가 사신들은 어디로 가든지 좀 더 자유로우며 선교지역에서의 반대를 좀 더 쉽게 극복하게 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있는 동안에라도 황제의 궁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방해를 받지 않았고 적어도 가이사집 사람 중”(4:22) 몇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 다른 그리스도인 일꾼들로 하여금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참조 빌 1:12~14) 하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황제가 그리스도교 전도자들 중의 으뜸 인물을 무죄 방면하는 칙령을 내렸다는 사실이 알려질 때, 제국 전역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아주 자유로울 것이었다. 그러므로 황제가 바울을 무죄 방면하는 것은 복음 전파를 공식적으로 허락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것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12. 배석자들. 헬라어 쉼불리온(sum- boulion). 총독의 자문위원단.” 누가가 유대인 의회인 산헤드린에 대해 말할 때는 일관되게 쉬네드리온(sunedrion)이라는 단어만을 사용한다(5:21; 6:12; 22:30; 23:1; 24:20 ). 가이사에게 호소하는 일은 자동적으로 허락되지 않았고 자문회의에서 바울이 로마 시민이므로 그의 호소를 거절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아그립바왕. 헤롯 아그립바 세이다. 그는 헤롯 아그립바 (그의 죽음이 12:20~23에 묘사되어 있음)의 아들이며 헤롯 대왕의 증손자이다(참조 제9, 50, 148; 10, 78). 자기 자매 드루실라(참조 24:24 주석)처럼 이 군주도 헤롯 대왕의 유대인 아내인 마리암네의 후손인 까닭에 유대인이었다. 아그립바 세는 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AD 44; Jose- phus Antiquities xix. 9. 2) 팔레스타인의 왕위를 계승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되었으나, 직후에 한 숙부가 죽자 남부 레바논 칼키스(Chalcis)의 통치권을 얻음으로 위안받았다(ibid. xx. 5. 2). 후에 아그립바는 왕이라는 칭호와 함께 이전에 빌립과 리사니아스의 통치하에 있던 북방의 영지를 받았다(ibid. 7. 1). 그 후에 네로가 다른 도시들을 주었다. AD 68~73년에 있었던 유대 전쟁에서 아그립바는 그가 반란을 포기하도록 애쓰던 유대인들을 대적해서 로마의 편을 들었다(Josephus War ii. 16. 4[345~401]). 그는 은퇴하여 AD 100년에 로마에서 죽었다. 베스도는 자연히 바울의 사건을 취급하는 일에 관하여 아그립바 세에게 충고를 구하게 되었다. 아그립바는 성전 보물을 관리했으며 대제사장을 임명하는 특권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면에서 로마 총독의 종교적 동료였으며 이 사건에 대해 실질적으로 충고할 수 있는 위치였다.

버니게. 버니게는 아그립바 세의 장녀이며 아그립바 세의 누이이자 벨릭스의 아내인 드루실라와 자매이다. 처음에 그녀는 아그립바 세가 그 뒤를 이은(참조 제9, 148), 칼키스의 왕이자 숙부인 헤롯과 결혼했다(참조 제9, 51). 유대와 로마의 저술가들은 버니게와 그녀의 남자 형제 아그립바 세와의 관계를 죄악적으로 묘사한다. 후에 그녀는 길리기아의 왕 폴레모와 결혼했으나 곧 폴레모를 떠나 로마로 가서 아그립바 세와 함께 지냈다. 나중에는 티투스 황제의 정부가 되었으나, 원로원에서 그녀와 결별하기를 강요했을 때 티투스는 몹시 슬퍼했다(Suetonius Titus vii. 2; Tacitus History ii. 81; Josephus Anti- quities xx. 7. 3).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환영을 목적으로 새 총독을 방문한 아그립바 세의 첫 번째 예방(禮訪)이었다. 물론 아그립바 세는 로마의 분봉왕이었다.

16. 기회. 헬라어 토포스(topos). 문자적으로 장소이며 기회를 의미한다(참조 롬 15:23). 베스도는 바울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기로 결심했다.

내어 주는 것. 헬라어 카리조마이(charizo- mai, 참조 11절 주석). 로마의 관리는 단지 호의의 차원에서 고소당한 사람이 징벌받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 줄 수 없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리스도에게 바로 그런 식으로 행하였다. 베스도에 대한 기록은 빌라도보다는 더 명예롭다.

20. 내가의심이 있어서. 베스도는 자신이 유대인의 믿음과 관습에 무지하다고 고백한다. 유대교의 본부인 예루살렘에서 종교적 사건에 대한 사실(참조 9절 주석)을 확인하는 것이 아마 더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거절했다(참조 10절 주석). 바울이 로마로 간다면 베스도가 그의 사건 보고서를 보내야 했으며, 견문이 넓은 유대인인 아그립바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아내는 일에 총독을 거들 수 있었다. 또한 아그립바에게 한 이 요청은 앞으로 아그립바와의 관계에서 베스도에게 유용한 아첨이 함축된 것이었다.

판결. 헬라어 디아그노시스(diagno-sis). 문자적으로 완전히 알기.” 철저한 조사를 나타낸다.

가이사. 당시 황제 네로(AD 54~68).

가이사랴에서의 재판, 사도행전 연구 2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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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4

[1]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

[2]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3]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4]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6]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6하반-8상반 없음)

[7] (없음)

[8]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9]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10]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

[11]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안 되었고

[12] 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13] 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14]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15]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16]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17]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18]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19] 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20]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21]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22]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23]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

[24]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26]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27]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내용 요약

바울이 총독에게 변명합니다. 예루살렘에 온 지 12일밖에 안 되었고, 성전에서 변론도 하지 않았으며, 결례를 행했을 뿐 소동 없이 있었고,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고 말합니다. 벨릭스는 천부장이 오면 처결하겠다 하고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줍니다.

 

로마 총독에게는 사실과 공의에 대한 단순한 진술보다 아첨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라고 판단한 교활한 변사는 벨릭스를 칭찬하는 그의 연설을 시작하였습니다...바울에 대하여 정죄를 얻어내고자 하는 그의 갈망은 진리에 대한 애착심보다 더 강하였다.(행적 419p)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아첨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나요? 아첨해야한다면 그 범위는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요?

  2. 본인의 신앙고백을 누구에게 해 본 적이 있는가요? 그 신앙고백의 주된 내용은 무엇인가요?

  3. 떳떳하고 정직한 행동이 감동을 줍니까?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더둘로와 바울의 변호에 시작점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24:3,11)
                                                                                      
  2. 바울을 고소 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3가지를 말해봅시다.(24:5~6)
    ①                                         ②                                                ③
  3. 바울의 신앙고백 3가지는 무엇입니까? 3가지를 말해봅시다.(24:14~15)
    ①                                         ②                                                ③
  4. 바울의 거리낌 없는 행동에 대하여 이야기해 봅시다.(24:16-21)
  5.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도는 무엇이었습니까? 이 도를 듣고 벨릭스의 이중적 행동은 무엇인가요?(24:24~27)
    (16:13, 개정)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생각해봅시다.                                                 

  1. 벨릭스의 결정이 바울에게는 득이 되는 점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24:22-23)

  2. 신앙 때문에 비난 받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나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3.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때때로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 있나요?

 

바울은 어떠한 죄도 범하지 아니하였고 자유를 얻기 위하여 몸을 굽혀 악을 행하고자 하지도 아니하였다. 더욱이 그는 그와 같은 보석금을 지불하기에는 너무나 가난하였고 비록 그렇게 할 생각이 있었다고 하였을지라도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가 회개시킨 사람들의 동정과 관대한 행위에 호소하고자 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또한 그가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느꼈으며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하고자 하지 아니하였다.(행적 427p)

1. 변사. 헬라어 레토르(rhe-to-r). “연사”, “웅변가.” 레토르는 변호사 혹은 전문적인 탄원자였다. 이 명칭은 한 번도 신약에서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혹은 기별자”(헬라어 케뤽스[ke-rux], 딤전 1:7)라는 뜻으로 사용되지 않았고, 우리의 대언자”(헬라어 파라클레토스[parakle-tos], 요일 2:1; 참조 마 5:4 주석) 그리스도에게도 사용되지 않았다.

송사하여 가로되. 과도한 아첨으로 시작하기는 했지만, 더둘로의 변론은 고소의 말이었다. 이렇게 아첨으로 변론을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참조 Cicero De Oratore ii. 80). 의심할 바 없이 그 변론에 대한 누가의 보고(2~8)는 간략한 요약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단지 연절의 핵심적인 요점만 보존되어 있다.

태평. 문자적으로 많은 평화.” 이 유대 역사의 황혼기에 팔레스타인은 평화라고는 누려 보지 못했다. 반란은 표면 아래에서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고, 그로부터 7, 8년쯤 후에는 공공연한 반란으로 터져 나왔다(참조 제10, 79~83). 그 땅이 누린 평화는 무력과 군대에 의해 강요된 로마식의 평화였다. 벨릭스는 반복해서 정치적 메시야들을 억압했으며 로마의 권위에 대항하는 초기 단계의 반란 배후를 분쇄했다(참조 Josephus Antiquities xx. 8. 6, 7; War ii. 13. 2[253]).

개량된 것(제임스왕역에서는 “worthy deeds”[훌륭한 일들라는 표현으로 더둘로의 아첨을 나타내고 있음역자 주). 타키투스에 의하면(Annals xii. 54) 벨릭스는 팔레스타인 산적들의 활동을 눈감아 주는 대가로 상당한 수입이 있었다. 벨릭스가 약탈을 징벌하는 경우는 오로지 자신의 부를 증가시키려는 목적을 이루려고 할 때뿐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잘못된 행정 때문에 벨릭스는 바울이 수감되어 있는 동안 로마로 소환되었다.

4. 괴롭게 아니하려. 헬라어 엥콥토(egkopto-). “방해하다”, “지체시키다.” 더둘로는 벨릭스가 평화를 유지하고 개혁을 추진하는 일(참조 3절 주석)로 바빠서, 지금 당면한 것과 같은 대수롭지 않은 문제는 돌볼 시간이 없을 것이라고 체면을 세워 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더둘로는 자기의 의뢰인들에게 유리한 결정을 신속하게 내려 달라는 소원을 암시한다.

관용. 헬라어 에피에이케이아(epieikeia). “온화함”, “공정함”, “부드러움”(참조 고후 10:1). 여기에는 배려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더둘로는 법정 분위기를 아첨으로 채움으로써 이 소송의 진실에 대한 벨릭스의 시각을 흐리게 한다.

염병. 헬라어 로이모스(loimos). “해충”, “천재.” 문자적으로 역병.” 마카베오110:61에서 로이모스는 범죄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소요케 하는 자. 선동자.” 로마법에 정면으로 저촉되게 함으로써 고소자들이 바울에게 씌우려는 중한 죄목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보기에 염병이었으나 로마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벨릭스는 반란 선동자들을 가혹하게 다룬다고 알려져 있었고(참조 2절 주석), 만약 더둘로가 이 주장을 그에게 확실히 납득시킬 수 있다면 바울의 운명은 끝날 것이었다. 빌라도 앞에서 주님이 쓰셨던 혐의와 비교해 보라(참조 눅 23:2 주석).

나사렛. 신약에서 여기서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었는데, 틀림없이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말한다. 2, 3세기에 나사렛인들이라고 불린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으나 여기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스도인들을 그렇게 불렀다(참조 제10, 61, 62). 나사렛 거주자인 예수에게 나사렛 사람이라는 단어가 적용된 마 2:23을 참조하라. 이 단어와 나실인(6:2; 2:23)이라는 용어는 어떤 연관성도 없으며 준수하다”, “지키다”, “간직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나차르(nas.ar)와 연관되었다는 어떤 증거도 제시할 수 없다.

괴수. 헬라어 프로토스타테스(pro-tostate-s). “앞줄에 선 자”, “선두그러므로 지도자.” 투키디데스의 History v. 71에서는 우익(右翼)의 프로토스타테스는 전진하거나 공격할 때 따라야 할 방향을 책임지고 있다고 밝힌다. 여기에서는 은유적으로 사용된 단어이다.

열이틀. 포함 계산법에 의하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이후 전 기간은 14일로 보이며 다음과 같이 계수된다. 1, 예루살렘 도착과 형제들의 환영(21:17). 2,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만남(18~25). 3~7(대략적임, 참조 사도행적, 406), 결례의 기간인 7일 중 5(26, 27). 7(대략적임), 유대인의 습격을 받았으나 루시아가 구해 줌(27~33). 8,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바울이 변론함(22:30~ 23:11). 9,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가 꾸며지고 폭로되었으며(12~22), 바울이 안디바드리를 통과하는 길로 가이사랴로 출발함(31). 10,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벨릭스 앞에 출두함(32, 33). 10~14, 24:15.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날과 벨릭스 앞에서 재판받는 날을 제외하고 그 중간의 12일만 언급했을 가능성이 있다.

조상의 하나님. 바울은 나사렛 사람이 됨으로 이스라엘의 신앙을 떠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아직도 그는 동일한 하나님을 경배한다. 그는 자신이 이단임을 부인한다.

섬기고. 바울은 나사렛 사람들”(5)를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당시 로마나 유대의 법에 나사렛 사람 또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금하는 법은 없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판결받도록 요청한 것이 아니었다.

율법. 문자적으로 율법에 의해”(참조 눅 24:44 주석). 여기서 선지자들과 함께 사용된 율법은 오경(Pentateuch) 곧 모세의 다섯 책을 가리키는 전문적인 용어이다. 율법과 선지자들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의 세 부분 중 두 부분이며 여기서는 사실상 구약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율법은 참된 길을 지적해 주었으며 선지자들은 그 율법을 예증하고 확대했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믿는다. 그는 이단이 아니다. 바울은 유대교의 최고 권위인 구약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믿음과 행위를 전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다 믿으며. 바울은 유대인의 성경인 구약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했을 뿐 아니라 동일한 하나님을 섬겼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약이 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는 거짓에 대항하여 논쟁한다. 바울처럼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은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는 바울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참조 눅 24:27 주석).

악인. 바울의 주장은 의인, 곧 의로운 자만 부활하는 것(고전 15:51~54; 살전 4:16)이 아니라 불의한 자도 부활한다는 것(참조 단 12:2)이었다. 그 상급이 서로 별개인 것처럼(2:5~10), 두 부활은 각각 다른 범주에서 일어날 것이다. 요한은 두 부활이 1,000년 간격을 두고 따로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20:3~10). 바울이 언급한 악인의 부활은 벨릭스의 양심을 일깨웠다(참조 23:24; 24:2 주석).

양심.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인 양심은 바울에게 가장 중요했다(딤전 1:5; 3:9; 9:14). 다시금 그는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양심이 깨끗했다고 주장한다(23:1; 참조 롬 9:1; 딤후 1:3; 13:18).

거리낌이 없기를. 헬라어 아프로스코포스(aproskopos). 문자적으로 대항하여 칠 것이 없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그가 행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박해자였을 때도 양심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26:9, 10; 참조 요 16:2). 그러므로 그의 삶은 밝은 양심을 갖는 것이 양심적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예증으로 보여 준다. 양심은 그것이 이미 아무리 선하다해도 하나님의 음성(30:21)과 그의 말씀(8:19, 20; 딤후 3:15~17; 참조 마 24:21~27)에 늘 주의해야만 한다.

구제할 것.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목적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의 귀환은 하나님과 동족에 봉사하려는 확고한 목적과 조화되는 것이었다(참조 16절 주석). 그는 자신의 민족에게 해를 끼치려 함이 아니라 유익을 주기 위해 돌아왔다(11:29, 30; 20:35; 15:25~27; 고전 16:1~4; 고후 8:1~4).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체포되었을 때 바울은 소동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필요한 희생제물을 준비하고 있었다(참조 사도행적, 406).

모임도 없고. 바울의 유일한 동료는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그와 함께한 네 사람뿐이었다(18:18; 21:23, 24). 이것을 선동적인 행동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 근거는 없었다(24:5).

23. 지키되. 헬라어 테레오(te-reo-). “시중들다”, “지키다”, “간직하다.” 이 동사는 빈틈없는 구류보다는 안전하게 지킴을 암시한다. 벨릭스는 바울에게 호의를 가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한편으로는 깨우침받은 양심 때문이고(참조 14~16, 24, 25) 한편으로는 뇌물을 바랐기 때문이다(26).

자유를 주며. 일반 죄수가 누릴 수 없는 특권이다(참조 23:16, 17 주석). 그는 구류되어 있었으나 일반 감옥의 불편함을 겪지 않았다.

친구. 헬라어 이디오이(idioi). “그 자신의 [친척이나 가까운 친구]”(참조 요 1:11 주석). 이들 중에는 아마도 빌립(21:8)과 가이사랴 부근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포함되었으며 예루살렘까지 바울과 동행했던(17) 누가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드루실라. 벨릭스의 두 번째 아내이다. 그녀는 이전의 유대 왕가인 하스몬가() 출신 마리암네와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세의 딸이었다. 따라서 헤롯 아그립바 세는 드루실라의 남자 형제였고 버니게는 자매였다(참조 제9, 51). 드루실라는 벨릭스와 결혼하려고 유대교로 개종했던 첫 남편 에메사 왕 아지쥐스와 헤어졌다(Josephus Anti- quities xx. 7. 1, 2). 당시 그는 약 22세였다. 그의 아버지가 야고보를 죽였을 때 그는 여섯 살이었으며(12:1, 2) 그 비극적인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베드로가 감옥에서 벗어난 사실(3~19)과 그의 아버지가 불행하게 죽은 사실(21~23)도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드루실라의 복잡한 결혼 관계는 그가 유대인의 규정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드루실라는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죽이려고 하는 사람인 바울을 보고 그의 말을 듣고 싶어했을 것이다.

바울을 불러. 벨릭스의 의도는 좀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드루실과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리고 바울로 하여금 돈을 대가로 그를 풀어 줄 의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25. . 헬라어 디카이오쉬네(dikaiosune-, 참조 롬 1:17 주석). 바울은 하나님과 동료 인간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와 행동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단어로 누가는 바울이 해설한 율법과 복음의 위대한 진리를 요약하고 있다(참조 미 6:8; 22:36~40 주석). 자신의 행위를 돌아볼 때(참조 24:2 주석) 벨릭스의 양심은 틀림없이 불안 속에 동요되었다. 바울이 강론할 때 벨릭스 자신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는 것을 상상하고 떤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절제. 헬라어 엥크라테이아(egkrateia). “자아 조절즉 식욕과 정욕을 통제(참조 갈 5:23 주석). 이러한 성품은 지도자에게 특히 중요하며 바울은 벨릭스에게 이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설명했다.

심판. 헬라어 크리마(krima). 판결(참조 요 9:39 주석). 여기서는 마지막 심판을 가리킨다. 벨릭스는 지금 재판관으로 앉아 있다. 그러나 심판 때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피고로 설 것이다. 벨릭스의 강탈성, 잔인성 그리고 방탕함(Tacitus Annals xii. 54; History v. 9)에 대한 바울의 기별은 매우 적절했다. 바울은 벨릭스의 품성을 알았으며 그에게 필요한 것을 강조하도록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 바울은 단순히 윤리적인 교사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의와 절제의 좋은 점과 실용성에 관한 추상적 논의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그의 말은 매우 실제적이었으며 참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벨릭스와 그의 아내를 초대하는 하늘의 초청이었다.

두려워하여. 헬라어 엠포보스(emphobos). “겁에 질리다”, “놀라다.” 육체가 아니라 마음의 동요를 의미한다. 성령이 총독의 괴로운 양심에 역사하고 있었으며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16:8) 그를 책망했다. 귀신들처럼 벨릭스도 믿고 떨었다(2:19). 그를 놓아주는 대가로 뇌물을 바라면서 바울에게 공의를 행하기를 거절하고 있던 총독은 우주의 법정에서 그의 행위에 답변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떨었다.

틈이 있으면. 벨릭스는 개인적 결단을 유보함으로써 양심의 호소를 가라앉혔다. 그는 성령의 요청을 공공연히 거절하지는 않았으나 바른 결정 앞에서 우유부단했으며, 고통스럽지만 그 자신의 문제들을 바로잡는 일을 미루기로 결심했다. 흔히 반갑지 않은 이 일을 위한 가장 좋은 은 언제나 지금이지만, 죄에 눌린 양심을 가진 사람에게 지금은 언제나 가장 불편하고 성가신 시간이다.

26. 받을까. 주어질까가 더 낫다. 만약 바울이 유대인의 지도자들의 반대를 그렇게 심하게 일으킬 만큼 중요하다면, 그를 놓아주는 것은 상당한 뇌물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벨릭스는 생각했다. 바울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선물을 가져왔으므로(17) 벨릭스는 바울에게 석방을 위해 돈을 지불할 부요한 친구들이 있다고 결론지었을 것이다. 벨릭스는 바울을 방문하도록 허락한(23) 친구들 중에 그렇게 할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울을 죽이려는 간계, 사도행전 연구 23-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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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3:12-30

[12]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13]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더라

[14]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15]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 척하면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

[16] 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내에 들어가 바울에게 알린지라

[17] 바울이 한 백부장을 청하여 이르되 이 청년을 천부장에게로 인도하라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 하니

[18] 천부장에게로 데리고 가서 이르되 죄수 바울이 나를 불러 이 청년이 당신께 할 말이 있다 하여 데리고 가기를 청하더이다 하매

[19] 천부장이 그의 손을 잡고 물러가서 조용히 묻되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20] 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21] 당신은 그들의 청함을 따르지 마옵소서 그들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여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니

[22] 이에 천부장이 청년을 보내며 경계하되 이 일을 내게 알렸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고

[23]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기병 칠십 명과 창병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24]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25] 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26]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

[27]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28]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고자 하여 그들의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29]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30] 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려 주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고발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에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였더라

 

내용 요약

유대인 사십여 명이 바울을 죽이기로 동맹하고 공회로 오는 바울을 죽이려 준비합니다. 바울의 생질이 이를 듣고 바울에게 알리니 바울이 한 백부장을 청해 생질을 천부장에게로 인도하도록 합니다. 천부장은 유대인들의 공모를 전해 듣고 그 청년에게 입단속을 시킵니다.

 

사르밧 과부와 수리아의 나아만은 모든 일에 저희가 받은 빛을 따라 살았으므로 그들은 당신을 배반하고 편의와 세상 명예를 위하여 원칙을 희생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보다 더욱 의롭다 함을 받았다.(행적 417p)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자신의 신앙이 위기에 처했을 때, 사람을 통하여 자신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한 적이 있다면 나누어보아요.

  2.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말이 나의 삶에 적용된 적이 있나요?

  3. 나는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인가요?
    (법을 잘 지키는 것과 믿음과 상관이 있다면?)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바울을 죽이기로 결의한 유대인들이 잘못된 이유는 무엇인가요?(23:12,13)
                                                                                      
  2. 바울을 어떤 식으로 죽이려고 하고 있나요?(23:14,15)
                                                                                      
  3. 바울 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동원된 것은?(23:16-24)

  4. 죄수 바울을 천부장이 총독 벨릭스에게 편지로 어떻게 추천하였나요?(23:26-30)
                                                                                                                                                                      

 

생각해봅시다.                                                 

  1.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2. 하나님이 모든 환경과 사람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백성을 도우신다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나요?

  3. 우리 가운데 주어진 축복의 상황을 자신의 편의와 생각을 바꾸기 싫어서 거절하는 경우를 이야기해봅시다.

 

만일 교회의 지도자들이 사도에 대한 그들의 신랄한 감정을 완전히 버리고 사도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나님의 특별하신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 받아들였다면 주께서는 그를 그들 중에 아껴 두셨을 것이다...하나님의 은혜로 마련된 것들을 감사하고 선용하기를 게을리함으로 교회는 많은 축복을 상실하였다.(행적 417p)

12.맹세하되. 헬라어 아나쎄마티조(anathe- matizo-). “저주하다”, “저주받았다고 선언하다”, “[만약 맹세가 성취되지 않는다면] 저주 아래 묶는다.” 이들은 목적을 성취하지 못할 경우 하늘의 가장 엄한 형벌을 받겠다고 자청하였다. 히브리어 하람(h.aram)과 비교해 보라(참조 삼상 15:3 주석).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이러한 맹세를 통하여 자칭 암살자들은 바울을 속히 죽이고자 하는 열성과 결심을 나타냈다.

13. 사십 여 명. 이 광신적인 무리의 규모는 바울의 목숨이 극도로 위험에 처해 있음을 뜻한다.

14. 대제사장들. 음모자들이나 대제사장들이 바리새인(참조 6~9절 주석)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그들은 모두 광신적이었다. 그 나라의 지도자들은 목적을 달성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사악한 사람과도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5. 공회. 산헤드린. 이와 같은 음모에 의존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산헤드린은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다(참조 요 18:31; 7:58 주석). (2) 그렇게 할 수 있을지라도 로마 시민인 바울에게는 사법권이 전혀 미칠 수 없었다. (3) 혹시 사법권이 미칠 수 있었다 해도 이제는 바리새인들의 영향력이 바울에게 평결을 내리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그들은 바울이 결코 공회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산헤드린 회원 중 어느 누구에게도 공모했다는 혐의를 받게 하지 않게 하려고 한 것처럼 보인다. 그의 암살을 광신자들의 소행으로 돌릴 계획이다. 이 음모자 40명은 틀림없이 광신적인 자객들즉 시카리이(Sicarii, 참조 21:38 주석)였을 것이다. 복음서에서와 마찬가지로, 누가는 복음 전파 시에 발생한 어려움의 책임이 주로 로마인들이 아닌 유대인들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참조 눅 23:2, 4, 14, 22). 요세푸스는 헤롯에 대한, 이와 유사한 유대인들의 음모를 기록했으며(Antiquities xv. 8. 1~4),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음모가 있었다(7:19; 8:40; 10:39).

필론은 배교자 암살에 관해 이렇게 옹호했다. “정의에 대한 열성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범법자를 법정이나 의회 혹은 법무관 앞에 데려오지 않고 지체 없이 즉석에서 형벌을 가하도록 허락하며,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감정을 완전히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악에 대한 미움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경한 자들 위에 자비 없는 형벌을 가하게 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한 기회가 왔을 때 그들은 스스로 자문관, 배심원, 치안관, 의회 의원, 원고, 증인, , 백성 나아가 사실상 모든 권한을 가진 존재라 생각하면서 두려워하거나 지장을 받을 필요 없이 그들의 종교가 전혀 침해받지 않도록 옹호해야 한다”(The Special Laws i. 9. 55; Loeb ed., vol. 7, 131).

16. 바울의 생질. 예루살렘에 있는 바울의 친척에 대한 유일한 언급이다. 로마에 그의 친척이 있었으며(16:7, 11), 고린도에도 분명히 있었다(21). 바울이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참조 22:3 주석) 바울의 생질도 예루살렘에서 공부하고 있었다는 견해가 있다. 그의 여형제나 생질이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영문에 들어가. 무엇보다도 그 사도는 보호 차원에서 구금되어 있었으므로 그의 친구들을 접견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로마의 법은 세 종류의 구금을 규정하였다. (1) 일반인을 공공의 감옥에 구금하는 것, (2) 고위직 인사를 공판일에 출두시킬 책임을 진 재판관이나 원로원 의원의 개인 구금에 맡기는 것, (3) 생명을 걸고 죄수를 지킬 책임을 진 군병이, 대개는 자신의 왼손과 죄수의 오른손을 사슬로 묶어 두는 군사 구금. 바울은 군사 구금에 처해 있었다(참조 18절 주석).

17. 바울이청하여. 그는 하나님과 그의 인도를 믿고 있었지만(참조 11절 주석) 한가로이 앉아 있지 않았다. 그는 생질을 통해 이르러 온 기별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인식했으며 이 임박한 위험을 피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그의 믿음과 일치함을 알았다.

18. 죄수. 헬라어 데스미오스(desmios). “묶인 ()”, “포로”, “죄수.” 대개 군사 구금하에 있는 죄수는 그를 지키는 군병과 묶여 있었으나(참조 21:33; 23:16 주석), 이 단어가 반드시 바울이 사슬에 매여 있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19. 그 손을 잡고. 그 생질의 통보를 더욱 은밀하게 듣고 자유롭게 이야기하도록 격려하기 위함이다. 그는 고소를 당한 로마 시민의 밀사로서 루시아에게 왔다. 분명히 그 천부장은 바울을 고소한 자들보다는 바울을 더 배려해 주었다(참조 26~33). 로마인들은 관례에 따라 유대인들보다 더욱 사려 깊고 공정하게 바울을 취급했다.

20. 유대인들. 유대 지도자들이 작당하여 음모를 꾸몄으므로 유대 민족이 관련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21.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심문하려는 장소로(참조 15) 루시아가 바울을 내려 보내는 데 동의하기를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22. 이에 천부장이. 바울이 로마 시민이었고, 유대인들이 그를 부당하게 고소한 것으로 보였으며, 유대인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고, 바울에 대한 공정한 심문을 보증하려는 루시아의 시도를 그들이 분명히 회피하려고 했기 때문에, 천부장은 바울에게 더욱 호의를 갖고 그를 보호하기로 더욱 결심하게 되었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만약 루시아에게 그들의 음모가 드러났다는 것을 유대인들이 알아채면 바울을 보호하려는 루시아의 노력은 좌절될지 모른다. 또한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밀고자는 침묵해야 했다.

제삼시에. 오후 9시나 10시경이다(참조 2:15; 3:1 주석).

23. 가이사랴까지. 팔레스타인 내의 로마 정부 소재지이며 속주 재정관이나 총독의 일상 거주지이다(참조 8:40; 10:1 주석). 육로로 100여 킬로미터 거리였다.

보병 이백 명. 소환된 백부장 두 명에게 각각 100명씩 속한 보병은 바울을 보호할 임무를 맡았다.

창군. 헬라어 덱시올라보이(dexiolaboi). 문자적으로 오른쪽[]으로 잡은 자들.” 불가타역에는 덱시올라보이가 란체아리이(lancearii) 창기병들로 번역되어 있다. “창군”, 창기병들이 의미하는 바는 일반적으로 창을 오른손에 든다는 사실에서 기인되었다. 단 한 명의 죄수를 폭력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470이나 되는 큰 병력을 배치한다는 것은 유대의 소란스러운 상태, 예루살렘 주둔군의 위력, 루시아가 바울의 신변을 보호하는 데 부여한 중요성을 입증하고 있다. 루시아는 유대인들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또한 만군의 여호와(참조 왕하 6:17; 6:22; 26:53)가 보낸 많은 천사가 틀림없이 대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24. 벨릭스. 벨릭스의 임기는 AD 52년경부터 AD 60년경까지이다. 타키투스(Annals xii. 54; Loeb ed., vol. 3, 393)는 벨릭스가 배경을 믿고 모든 범죄를 경미하게 여겼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의 형제가 글라디오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에토니우스(Lives of the Caesars v. 28)는 벨릭스를 계속하여 세 번 결혼한, 세 아내의 남편으로 묘사한다. 이들 중 하나가 헤롯 아그립바 세의 딸로 헤롯 대왕과 마카베오의 후손인(참조 24:24) 드루실라였다. 벨릭스는, 로마에 대한 유대인의 초기 반란과 그의 잘못된 행정에도 불구하고 유대에서 상당한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참조 24:1, Tacitus Annals xii. 54).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로마의 시민임을 주장하는 죄수의 안전, 백부장들과 군병들의 목숨 그리고 로마 군대의 치안 유지 능력 등 이 모든 것이 예루살렘으로부터 가이사랴로 바울을 호송하는 일에 달려 있었다.

짐승을 준비하라. 이 짐승들은 모든 무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바울 그리고 아마도 단 한 지휘관들을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로마 시민으로서 보호받는 죄수 신분으로, 바울은 보통 유대인이나 일반 죄수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특권을 받았다. 분명히 그런 호송은 바울이 그간의 여행에서 흔히 누려 보지 못한 호사였다.

25. 아래와 같이. 문자적으로 이와 같은 모양으로”, 즉 다음과 같은 형태로. 누가가 기록한 편지는 원문과 글자 그대로 똑같지는 않지만 매우 흡사했을 것이다. 그것은 요지를 담고 있다.

편지. 21:15, 18에서 누가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바울 일행에 자신을 포함시킨다. 그 편지는 아마도 공식 통용어인 라틴어로 쓰였을 것이며, 누가가 여기에 제시한 것은 헬라어로 쓰인 편지이다.

26. 각하. 이 단어와 문안이라는 단어는 당시 고급 헬라어의 문학적 용례를 반영하고 있다(참조 눅 1:3 주석; 1:1; 15:23; 1:1).

27. 사람. 헬라어 아네르(ane-r). 여자와 구별되는 남자.” 바울이 로마 시민으로 밝혀졌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말은 어느 정도 존경을 내포하는 것 같다.

죽게 된 것을. 문자적으로 죽임을 당하려 할 때.” 편지에는 바울을 공격하게 한 종교적 논쟁의 세부적인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아마도 루시아가 그런 문제에 관해 무지했거나, 이 내용이 벨릭스 앞에서 진술될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참조 30).

들어 알고. 알고”, “정보를 받고.” 루시아는 바울이 로마인인 줄을 알고 자신이 바울을 구했다고 벨릭스가 생각하도록 진술을 꾸몄다. 이것은 물론 사실과 달랐다(참조 22:25~29).

구원하여다가. 즉 바울이 처음으로 공격받았을 때(21:32).

28. 알고자 하여. 루시아는 채찍질을 하여 원하는 정보를 얻고자 했으나(참조 22:24), 바울은 로마 시민임을 주장하여 그 처지에서 벗어났다(25).

29. 저희 율법 문제에 관한 것. 성전의 규정(참조 21:18 주석)과 신학적 질문(23:6)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문제들은 평화를 교란시킬지 모른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루시아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로 보이지 않았다.

사건. 로마의 법률에는 그러한 종교적 사건에 대한 아무런 조항이 없었다. 바울이 가이사랴와 이후 로마에서 너그러운 대우를 받았던 데는 루시아의 우호적인 보고가 한몫했을 것이 틀림없다.

30. . 즉시. 루시아는 죄수를 벨릭스에게 보냄으로써 총독의 우월한 지위와 유대인의 관습에 대한 그의 더 폭넓은 지식에 넌지시 경의를 표하고 있다.

공회 앞에 선 바울, 사도행전 연구 23-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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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2:30-23:11

[30]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23: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3]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4]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5]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6]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10]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내용 요약

공회에서 바울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으며 바리새인인 자신이 부활 때문에 심문받는다고 외칩니다. 그러자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두개인과 있다고 믿는 바리새인 사이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다시 영내로 들어간 바울에게 주님은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도는 이제 그가 회개하기 전 자신이 회원이었던 바로 그 법정에서 심문을 받아야 하였다. 그가 유대 관원들 앞에 섰을 때 그의 태도는 침착하였고 그의 용모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나타내었다. (행적 411p)

 

 

아이스브레이크를  위한 질문

  1.  잘못된 권위에 항의해 본 적이 있나요?

  2. 심히 두려워했던 경험이 있으면 나누어보아요.

  3. 누군가에게 확실한 약속의 보증을 받은 경험이 있나요? 그리고 그 약속 받은 것에 대한 실행결과는 어떠했나요?

 

본문을 더욱 자세히

  1.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무엇일까요?(23:1)
                                                                                      
  2. 바울이 대제사장을 회칠한 담이라고 비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23:3)
                                                                                      
  3. 바리새인이 바울을 지지한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무엇입니까?(23:6-9)

  4. 권위자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23:4-5)

  5. 바울 곁에 계신 주님께서 바울에게 명하시고 지지하신 내용은 무엇입니까?(23:11)
                                                                                                                                                                      

 

생각해봅시다.                                                 

  1. 나의 곁에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주님을 나는 느끼고 살아가고 있나요?

  2. 내 속에 "회칠한 담"과 같은 것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3. 신앙으로 인하여 양심에 꺼리는 일들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4. 나는 예수님의 지지를 받고 살아가고 있나요?

 

이 어두움의 시간에 주께서는 당신의 종에 대하여 무관심하지 아니하셨다. 주께서는 바울을 성전 마당에서 잔인한 군중으로부터 보호하셨고,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그와 함께 하셨고, 영문에서도 그와 함께 하셨으며 지도를 구하는 사도의 열렬한 기도에 응답하셔서 친히 당신의 충실한 증인에게 나타나셨다.(행적 413p)

30. 알고자 하여. 알기를 희망하여.” 로마 장교인 주의 깊은 그 천부장은 문제의 뿌리에 접근하여 유대인들이 왜 그렇게 바울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열망하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온 공회. 즉 산헤드린. 루시아는 그것이 유대 종교에 관한 문제임을 알았다. 산헤드린이 모였던 회의실에 대해서는 마 27:2 주석을 참조하라.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즉 안토니아 요새의 망대로부터(참조 24; 21:34 주석). 로마 호위병이 동행하여 바울의 개인적인 안전을 보증하였다.

 

1. 주목하여. 헬라어 아테니조(atenizo-). “눈을 고정시키다”, “지속적으로 보다”, “진지하게 바라보다라는 의미이다(참조 행 13:9 주석; 1:10; 7:55; 4:20; 22:56). 누가는 진지하게 말하려는 사람의 얼굴 표정을 묘사하기 위하여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하였다. 바울이 유대인 최고 집단을 4반세기 만에 보는 표정을 묘사하는 일에 이 단어가 적절하게 사용되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구성원들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나 어떤 얼굴은 바울이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참조 23:5 주석).

 

양심을 따라. 누가 이런 주장을 하든 이것은 매우 포괄적인 주장이다. 유대화주의자들(Judaizers)과 그 희생자들과의 더불어 여러해 논쟁을 한 후의 바울의 이러한 주장은 자신의 행동 노선에 관한 그의 확신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의 행동은 모두 하나님의 뜻과 율법과 선지자를 따른 것이었다(참조 24:14; 28:17). 바울이 옳다면 그를 비난하는 자들은 분명 잘못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양심에 대하여 자주 언급한다(24:16; 2:15; 13:5; 고전 10:25; 딤전 1:5; 딤후 1:3).

 

2. 아나니아. 칼키스(Chalcis)의 왕 헤롯이 대제사장으로 임명한 네베대우스의 아들(Josephus Antiquities xx. 5. 2).

치라. 1절에 나타난 바울의 양심 선언은 산헤드린의 위선 혐의를 고발하는 것과 같았다. 만약 바울의 행동이 양심적이었다면 산헤드린 공회의 행동은 분명히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왕상 22:24; 26:67; 22:63, 64과 비교하라.

 

3. 회칠한 담이여. “외식하는자를 지칭하는 말이다(참조 마 23:27). 회칠한 담과 같이, 재판을 맡아 고위직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은 지위를 나타내는 외적 장식물을 달고 있을지 모르나 지도자로서 마땅히 그래야 할 만큼 의롭지도 사려 깊지도 않았다.

하나님이치시리로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성급하게 말했으며 5절에는 사과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본다. 공격을 받았을 때에도 예수는 잠잠했다(26:63; 벧전 2:23). 그러나 바울이 영감을 받아 말하면서 상대가 대제사장인 줄 모른 채 그의 운명을 예언했을 가능성도 있다(참조 5). 아나니아는 7, 8년 후인 AD 66년에(Josephus War ii. 17. 6, 9) 아마도 시카리이(Sicarii)들이 암살했을 것이다(참조 21:38 주석; 10, 80, 84). 28:15~17과 비교하라.

네가앉아서. 대명사 네가는 헬라어 원문에서 강조하는 의미로 쓰였다. 그 의미는 위선으로 회칠한 담인 그대가 어떻게 다른 사람 위에 재판관으로 앉을 수 있는가?”이다.

율법대로.율법에 따라라는 의미이며, 여기서 율법은 유대인의 율법이다.

율법을 어기고. 치는 일은 유대인의 법에 허용되어 있었으나, 정당한 재판 절차를 거쳐 고발을 당한 자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후에만 가능했다(25:1, 2; 참조 요 7:51). 전 산헤드린 회원으로서(참조 사도행적, 112, 410,) 바울은 율법과 적절한 재판 절차를 알고 있었으며 율법의 정당한 절차를 누릴 권리를 주장했다 (5, 539을 비교하라).

 

4. 하나님의 대제사장. 종교적으로나 민사상으로 유대인 최고의 공직자인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여겨졌다. 구약에서 사사를 간혹 엘로힘(’elohim), 즉 문자적으로 신들이라고 불렀다(참조 시 82:1 주석; 1, 150, 151).

 

5. 나는알지 못하였노라. 참조 3:17. 바울의 진술은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1) 시력 장애(참조 9:8, 18 주석) 때문에 바울은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 (2) 바울은 그를 치라고 명령한 사람이 대제사장이었는지 몰랐다. (3) 대제사장이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는지 미심쩍어하며 반어적으로 말함으로 아나니아가 차지하고 있는 지위와 권한에 바울이 간접적으로 도전했다. (4) 말한 사람이 대제사장 아나니아인 줄은 알았지만 말하기 전에 미처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이중 첫 번째 설명이 가장 가능성 있어 보인다. 두 번째 설명도 바울의 시력에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 두 가지는 바울의 성격이나 그가 처한 상황의 심각성에 어울리지 않는다.

 

비방치 말라. 바울은 인간 재판장을 언급할 때 히브리어 엘로힘(’elohim)을 사용하는 출 22:28을 인용하고 있다(참조 23:4 주석).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70인역에서 인용하고 있으나 바울은 분명히 이 구절을 히브리어로 인용했다. 이 시점에서 바울의 진실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복음의 일꾼들은 설령 위정자들이 권위를 남용한다 해도 그들을 인정하고 합당한 명예를 돌려야 한다.

 

6. 바울이알고. 한때 산헤드린 회원이었던 바울은 당연히 그들 중 얼마는 사두개인이요 얼마는 바리새인인 것을 알았다. 아마도 그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어느 파에 속했는지도 알았을 것이다.

 

나는 바리새인이요. 바리새인에 대하여는 5:34 주석과 제9, 56~58을 참조하라. 헬라어 본문에서 대명사 는 강조적으로 쓰인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은 아직도 자신이 바리새인이라고 주장한다. 바리새인 니고데모도 주의 추종자였다(3:1; 사도행적, 104, 105,).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많은 바리새인이 회심했다(참조 행 15:5). 성경을 연구하는 어떤 이들은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 대다수가 바리새인이었다고 제시한다. 예수와 바리새인의 가르침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어떤 이들은 예수가 바리새인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인과 바리새인은 모두 영감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했으며, 세속으로부터 분리와 의를 강조했고 부활과 미래의 삶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리스도인이 바리새인과 다른 점은 주로 의를 얻는 방법에 있다(참조 마 5:20; 7:5~13; 18:9~14; 2:16~21 주석). 그러므로 바울은 정직하게 나는 바리새인이요”.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반드시 바리새파의 모든 믿음과 행습에 동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7. 다툼. 바울이 심리 초기에 이렇게 선언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산헤드린 앞에서 공정한 청문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그들이 그에게 판결을 내릴 자격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했다. 그는 그를 재판하는 자들이 서로 대립하게 함으로써(7) 그 재판에 종지부를 찍었다. 선택된 주제인 부활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이었으며(참조 고전 15:12~23), 바울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기에 거의 확실한 것이었다(참조 마 22:23~33 주석).

나누이니. 헬라어 스키조(schizo-). “찢다”, “산산이 쪼개다”, “[조각으로] 나누다.” 분리, 분열, 분파 등을 뜻하는 영어 “schism”은 헬라어 스키조의 명사형인 스키스마(schisma)에서 유래했다.

 

8. 사두개인. 사두개인에 대하여는 4:1 주석; 5, 51, 52을 참조하라. 그들은 모세오경의 권위는 인정했으나, 선지자들의 글에 대해서는 권위를 보류했고, 구약의 문학적 부분과 전승의 권위를 모두 거부했다. 그들은 천사를 하늘 영광의 현시(顯示)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했으며 내세의 삶을 부인했다. 그러므로 바리새파는 유대인의 스도이고(스토아)그리고 사두개파는 유대인의 에비구레오(에피쿠로스)라고 칭해졌는데 이는 넓은 의미에서 사실이다(참조 17:18 주석).

 

9. 훤화. 헬라어 크라우게(krauge-). “부르짖음”, “떠들썩함.” 침착하고 유식한 산헤드린 회원들도 변덕스럽고 무식한 폭도들처럼 이성을 잃고 흥분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참조 22:22, 23).

 

서기관. 본문상의 증거는(참조 20) “서기관들 중의 얼마는으로 읽는 것을 증거한다. 바리새인들의 모든 서기관이 참석한 것은 아니다.

다투어. 헬라어 디아마코마이(diamacho-mai). “격렬하게 다투다.”

 

악한 것이 없도다. 주에 대한 빌라도의 결정(18:38; 19:4, 6)과 비교해 보라. 각 경우에 유대교의 최고 법정은 의로운 사람을 맹목적으로 죽이려고 했다.

 

영이나 혹 천사가. 사두개인은 이 둘 가운데 어느것도 믿지 않았다. 아마도 여기서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본 이상(22:6~10)이나 성전에서 경험했던 비몽사몽”(22:17~21)을 언급한 것 같다. 바울의 증언은 허지로 돌아가지 않았다. 여기에 나타난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이전에 가말리엘이 보인 태도(5:33~40)를 상기시킨다.

 

10. 천부장. 헬라어 킬리아르코스(chili- archos). 공공 질서뿐만 아니라 로마 시민의 안전에도 관심이 있는 천부장 루시아가 임석했던 것으로 보인다(참조 22:30).

찢겨질까 하여. 바울의 신변을 확보하려는 사두개인들과 보호하려는 바리새인들 사이에 몸싸움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군사를 명하여. 루시아의 천부장 직위(참조 22:24 주석; 18:12; 21:31, 32)로 볼 때 그 수비대는 약 1,000명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이는 원군 보병대의 최대 병력이었다. 킬리아르코스는 그만한 규모의 군대를 지휘했다(참조 21:31; 27:1 주석). 바울은 안전을 위하여 안토니아 요새로 호송되었다(참조 22:24 주석).

 

11.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 존재는 분명히 그리스도 자신이었다(참조 9:5, 6; 22:17~21) 전망은 어두웠고 바울은 그리스도가 재판받을 때 유대인들의 소원에 응했던 빌라도의 비굴한 묵인을 기억했다. 이 중요한 시점에서 하나님의 보증은 바울에게 의미가 컸으며 향후 있을 수 년 동안의 재판을 감당할 용기를 주었다.

 

담대하라. 바울은 지난 이틀 동안에 일어난 사건을 되돌아보았다.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일어날 일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주어진 경고(20:22, 23)를 무릅쓰고 예루살렘을 방문하려고 했던 그의 단호한 목적(20:24)이나, 결례(潔禮)에 다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참여하는 것에 동의했던 일(21:20~28) 그리고 산헤드린 앞에서 그의 행동(23:1~10)이 과연 지혜로웠는가 등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미래로 생각을 돌렸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한 그의 사명은 끝난 것인가?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려는 그의 소망은 좌절되었는가?(19:21; 1:13). 그가 기도를 통해 마음을 쏟아 낼 때, 주께서 위로와 보증을 가지고 몸소 나타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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