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다시 읽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징은 한마디로 피상성(皮相性)이다. 디지털로 이미지화한 가공된 현실의 세계 안에 사로잡혀, 진상이나 진리, 이상이나 의미 같은 것은 관심 밖이다. “텍스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외쳐대며 피상성 자체를 예찬하기까지 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 시대의 사람들은 참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과학적으로 실증될 수 있다고 떠벌리며,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인 것을,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눈앞에 이미지화한 것을, 입증되지 않은 것보다는 실험실에서 증명된 것을 추구한다. 다시 말해서 형이상학적 관념이나 이상적 이데아보다는 피부로 느껴지고 내 존재 속에서 꿈틀거리는 어떤 것을 원한다. 옛날에 그리스 철학자들이 운운하던 로고스(logos) 같은 개념과는 동떨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로고스는 서구 사상에서 “우주의 질서를 지배하는 어떤 원리나 보편적 이성” 등으로 이해되어왔다. 로고스는 감각적인 것보다는 이지적인 것,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것, 다시 말해서 시간적 및 공간적 실재보다는 영원한 불변의 진리 같은 것이며, 다양한 외피(外皮) 안에 내재(內在)하는 불변·동일의 본질을 말한다.
괴테의 수작 <파우스트>를 보면, 지식과 학문의 표상인 노학자(老學者) 파우스트는 요한복음의 번역에 착수하여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1:1)라는 첫 구절부터 “로고스”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할지를 놓고 마음을 끓인다. 그는 로고스라는 뜻깊은 단어를 처음엔 “의지”(will)라고 번역했다가 맘에 들지 않아, 다시 “힘”(power)이라고 개역했다. 그러나 세계를 존재케 한 더 근원적인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결국 로고스를 “행동”(action)이라고 번역했다. 함석헌 선생은 이 로고스를 “생각”이라고 번역했고, 우리말과 중국어 성경은 각각 “말씀” 과 “도(道)”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말하는 로고스는 이런 개념을 모두 포괄한다. 누군가 말했듯이, 로고스라는 우주적 원리 곧 참된 “도”가 머리로 들어오면 그것은 생각 또는 사상이 되고, 말로 나오면 언어가 되고, 그것이 말대로 실행되면 행동이 된다. 이것이 바로 “말씀”에 해당하는 구약의 히브리어 단어 다바르에 내포된 뜻이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기록한, 고도로 헬라화한 도시 에베소에서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나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아니라 이런 우주적인 로고스(“말씀”)로 제시한다. 요한복음에서 그가 말하는 이 로고스는 신이 인간으로 육화되었다는 성육신 교리를 심오하고도 장엄하게 펼쳐 보인다. 이 교리는 영원하신 분이 시간 속으로, 불멸의 신이 후패하는 인간의 육신 속으로, 창조의 말씀이 피조물의 영역으로 내려오시는 사건(1:1; 1:14), 곧 기독교의 시간성과 역사성과 현존성을 어떤 종교보다도 더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육신이 되신 이 로고스가 이 피상성의 시대가 진실로 찾는 그 무엇은 아닐까?
요한복음: “생명과 빛과 사랑”의 복음
신약에서 가장 나중에 기록되어 숙성된 요한의 복음은 한마디로 심오하다. 가장 자주 나오는 “알다”, “믿다”, “거하다”, “생명”, “빛”과 “어두움”, “진리”, “영광”, “세상”, “증거”, “말씀” 같은 범상하고 통속적인 그리스어 단어가 요한의 손길을 통해서 비상하고 심오한 신학을 표상하는 용어로 탈바꿈한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이적들”(miracles)도 요한의 복음에서는 의미심장한 신학적 뉘앙스를 가리키는 “표적들”(signs)이 되며, 그가 하셨던 말씀은 영원하신 창조의 로고스이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영원부터 선재하신 분의 “존재”(I AM, 23회 나타남)의 표현이자 구현이다.
물, 떡, 빛, 유한한 생명 등의 단순한 물질이 “생명의 물[생수]”(4:10), “생명의 떡”(6:35), “세상의 빛”(8:12), “부활이요 생명”(11:15)을 가리키는 “표적”으로 거듭남으로써 그 표적들은 예수를 증거하고, 그분은 다시 세상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킨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독수리 복음”이라 일컫는데, 날짐승의 수장인 독수리가 가장 높이 날며 태양을 직시하고도 현기증을 느끼지 않는 유일한 피조물인 것처럼, 이 복음서의 시야는 높고 넓으며 시각은 날카롭고 통찰력은 깊다.
이 복음서는 모든 것을 친히 본 목격자(19:35), 곧 생명의 말씀이신 로고스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았던 자(참조 요일 1:1), 예수의 품속에 기댔고(13:23), 예수의 십자가 아래 있었고(19:26), 예수의 빈 무덤을 보았고(20:2), 부활 후에 호숫가에서 예수와 함께했던(21:20-24) 그분의 사랑받는 제자[요한]에 의해 기록된 것이 분명하다. 그는 이 땅에서 예수와 만난 지 70년이 흐른 후, 오랜 명상과 숙고 끝에 이런 원숙하고 심오한 복음을 내놓은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품속을 경험한 독생하신 아들 하나님(1:18)에 관한 심오한 진리들을 그 아들의 따뜻한 품속을 경험했던 한 제자(13:23)가 기록했다는 점에서 이 복음서를 “품속의 복음”(Gospel of Bosom)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요한이 보고 만져 본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피곤을 느끼고(4:6) 번뇌하기도 하며(12:27;13:21), 사람의 죽음 앞에서 마음이 흔들려 눈물을 흘린다(11:33-35). 그뿐 아니라 그는 때로 마음을 바꾸기도 하고(7:1-10), 정치인, 소외당한 병자나 장애인, 그리고 여인들과도 진지한 대화를 나누지만(3:1-13; 4:7-26; 5:2-9 등), 반대자들과는 격한 논쟁을 벌인다(6:41-65;7:14-36; 8:12-58; 10:22-39). 심지어 성육하신 그 하나님은 초조해하고(2:4; 6:26; 8:25 등) 의혹을 표현하기도 하며(2:24-25), 사람들이 자신에게 반응을 보이기를 갈망한다(6:66-71). 그 영원한 생명(Life)인 로고스는 사람들의 빛(Light)이 되고(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사람들과 부대끼는 사랑(Love)의 화신(Incarnation)이 되었다(3:16).
로마서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를 설명한다면, 요한복음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생명(生命)을 드러낸다. 이런 진리는 요한복음에 “믿다”라는 단어가 98회나 나오고 생명과 관련된 단어들(“life, live”)이 55회 나오는 사실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사실 요한복음은 예수의 공식적 재판에 관한 기사를 포함시키지 않을뿐더러 증인도 없이 법적 절차를 밟지 않고 예수를 사형에 처한 일을 말하고 있지만(18:21),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을 놓고 갑론을박하는 재판정의 이미지가 요한복음 전체를 관류하고 있다. 요한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다양한 익명 또는 실명의 개인들(34명)을 증인으로 동원하여 성육하신 하나님에 관한 부정적 또는 긍정적 증언을 싣고 있다(참조 5:31; 8:13).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 1-5장은 개인들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6-10장은 그리스도가 자신에 관하여, 11-20장은 군중들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내놓은 증언들을 부각한다.
요한은 사람들이 성육하신 하나님을 믿도록 구체적으로 일곱 증인, 곧 아버지 하나님(5:34,37; 8:18), 아들 자신(8:14; 18:37), 성령(15:26; 16:14), 성경(5:39-46), 침례자 요한(1:7;5:35), 제자들(15:27; 19:35), 그리스도의 일들(5:35; 10:25)을 내세워 결정적으로 증언한다. 또 요한복음은 그분의 일곱 표적(1:19-12:50)과 십자가의 영광(13:1-20:31)을 보고 그분을 인간이 되신 하나님으로 영접하거나 거절하는 개인과 단체의 역사를 면면히 펼쳐 보이고 있다(참조 1:1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성육신의 신비>
“인성을 입으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명상할 때, 우리는 인간의 지성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끝없는 신비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더 경이롭게 보일 것이다. …신성과 인성이 신비스럽게 결합되고, 사람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셨다. 바로 이 연합 안에서 우리는 타락한 인류의 소망을 발견한다. 인성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곧 그 본체의 형상을 본다.” -싸인즈 오브 더 타임즈, 1896.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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