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9:18-26
[18]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9] 대답하여 가로되 침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21] 경계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22]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그리스도가 이방인 지역으로 물러난 것은, 부분적으로는 그가 갈릴리에 있으면 조금의 쉴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첩자에게서 피하기 위함이며, 또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장차 곧 그의 짧은 봉사에 종지부를 찍게 할 위기의 시간들을 위해 그들을 준비시킬 기회를 얻기 위함이었다(시대의 소망, 411). 다음에 나오는 토론은 예수와 제자들이 여행하는 도중에(참조 막 8:27), 예수의 기도 기간 중 하나가 마쳐지는 때에 일어났음이 분명하다. 이 이야기에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세부 사항들은 헤르몬산 기슭의 어느 야외에서 예수와 제자들이 밤을 지냈을 것이라는 가능성과, 예수가 그곳에서 기도로 밤을 지샜거나 아침 일찍 일어나 제자들과 떨어져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특별한 기도의 시간을 보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는 이제 막 지상 봉사의 마지막 장면에 관해서 가르침을 시작하려고 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생각을 공개하는 데 필요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고 그분께서 나누어 주고자 하는 것들을 받을 준비가 되도록 기도했다(참조 시대의 소망, 411).
호수에서 폭풍과 투쟁한 후 모든 제자들은 그에게 경배하고(참조 14:33 주석), 갈릴리에서 겪은 그 위기 이후에 그들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을 고백했다(요 6:68, 69).
본문연구
- 사람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19절(마 16:13-14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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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이야기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20절의 베드로의 대답은 혼자만의 생각이었을까요 아니면 제자들 모두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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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이것은 베드로 혼자만의 견해가 아니라(시대의 소망, 412, 415,) 열두 제자의 대변자로서 말한 것이다(참조 요 6:69; 참조 마 14:28; 막 3:16 주석).
cf. 마 16:16-19 절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읽어보고 베드로에게 부탁하신 것이 무엇인지 말해 봅시다. -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경계하시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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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의사항
- 예수님이 나에게는 어떤 분이신지 얘기해 봅시다. 예수님은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말해 봅시다.
-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세상에서의 삶에서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말해 봅시다.
- 나를 부인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말해 봅시다.
- 내가 지어야할 나의 십자가에 대해 말해 봅시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것인지 토론해 봅시
18.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로 물러남; 위대한 신앙 고백]. 가이사랴 빌립보로 물러난 일은 아마도 AD 30년 여름에 일어났을 것이며 공생애에서 물러난 반 년 동안 예수는 주로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전념하였다. 그리스도의 봉사의 이 국면은 봄 유월절(요 6:66) 무렵 가버나움에서 거절당한 때부터 가을 초막절(참조 요 7:2 주석)까지 계속되었다. 예수는 유대 지도자들과 따라다니는 첩자들(막 7:1)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갈릴리 변방 너머 베니게와 데가볼리에서 이미 수 주일을 지냈다(마 15:21, 22; 막 7:31). 그러나 그가 갈릴리로 돌아오자마자 산헤드린에서 임무를 부여받은 첩자들이 예수에게 다시 도전했으며(16:1), 따라서 그는 갈릴리를 떠나 헤롯 빌립의 영토인 율리아 벳새다로 갔다(참조 막 8:22 주석; 222). 그 첩자들은 따라 오지 않았다. 예수와 제자들은 율리아 벳새다를 떠나서 북쪽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향하여 또다시 40킬로미터를 여행했다. 이 빌립보는 이두래의 수도이며 갈릴리의 분봉왕(참조 222) 헤롯 안티파스의 형제인 빌립의 관할 아래 있는 곳이었다. 원래는 파네아스(Paneas)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가이사랴 빌립보는 오늘날의 바니야스(Ba^niya^s)라는 동네와 동일시되어 왔다. 파네아스라는 이름은 양떼와 목초지와 숲의 헬라 신이며 목자와 사냥꾼의 수호신인 판(Pan)의 이름을 따라 지어졌다. 과거에 판 신에게 바쳐졌던, 파네아스(가이사랴 빌립보) 근처 가파른 절벽에 있는 석굴에는 1년 내내 마르지 않는 바니야스(Ba^niya^s)라는 샘이 있었으며, 그것은 요단강의 주요 수원지(水源池) 가운데 하나였다. 빌립이 파네아스를 재건하고 단장했으며, 자기 자신과 가이사 디베료 (Tiberius Caesar)의 이름을 따라 그곳을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명명했다(Josephus Antiqui- ties xviii. 2. 1; War ii. 9. 1 [168]).
무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는 제자들의 생각을 메시야인 자신에게로 돌림으로써 장차 다가올 자신의 수난에 대해 대화의 문을 열었다. 이 질문은 그가 전에 결코 직접적으로 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갈바리의 대속적인 희생의 의미를 생각하기 앞서 그를 메시야로 깨닫는 것이 필요했다. 만약 그를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참조 요 3:2 주석)이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고대의 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만 이해한다면(참조 16:14 주석), 그의 죽음은 다른 어떤 위대하고 선한 사람의 죽음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대속적인 차원이 아닌 하나의 모본이 될 것이며 그 안에는 속죄하는 능력이 없을 것이다. 갈바리의 십자가에서 구원을 찾는 자는 반드시 십자가에 달린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구세주, 메시야, 그리스도임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십자가를 올바른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사렛 예수의 메시야 됨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 물론 예수는 백성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자신이 장차 세울 왕국(참조 눅 4:19 주석)의 성격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생각도 알고 있었다. 그가 이 질문을 제자들에게 한 이유는 그 다음 질문을 위하여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함이었다. 곧 그들은 스스로 그에 대한 생각(16:15)에 이르러야만 했다. 제자들의 믿음은 다른 동포들의 온전치 못한 신앙과 대조할 때 훨씬 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들은 주님과 한동안 밀접한 교제를 나눴음이 분명하다.
19. 대답하여 가로되 제자들은 예수에 관해서 들은 네 가지 견해를 언급한다. 그러나 이 네 가지 견해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그들 모두 예수를 위대한 인간으로는 인정하지만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니고데모가 바로 여기에 해당되었다(참조 요 3:2 주석).
20.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헬라어 문장 구조는 “너희”를 강조한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와 제자들이 나눈 비슷한 대화는 요 6:66~69을 참조하라. 제자들은 1년 이상 예수와 끊임없는 교분을 가졌으며 그들 중 몇 사람은 2년 이상 교제했으므로 다른 어떤 사람보다 예수의 신성에 관한 더 많은 증거들을 관찰할 기회를 가졌다(참조 요 1:1~3). 이제 예수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믿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에 대한 이해력이 아직 완전하지 못했지만 안드레와 빌립과 나다나엘은 처음부터 예수가 메시야임을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참조 요 1:40~49; 시대의 소망, 141). 호수에서 폭풍과 투쟁한 후 모든 제자들은 그에게 경배하고(참조 14:33), 갈릴리에서 겪은 그 위기 이후에 그들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을 고백했다(요 6:68, 69).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는 1:1 주석을 참조하라.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예언된 메시야(참조 16:13, 14 주석)일 것이라는 생각을 거절했지만 제자들은 아직도 그에게 충실했다. 그들은 이해했지만 그 안에 포함된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물론 후에는 이해하였다(참조 눅 24:25~34). 그들이 믿음으로 이 근본적인 진리를 파악하고 굳게 붙들지 않는다면 메시야가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막다른 순간에 “제자들이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였다”(26:56). 그런데도 예수는 미래 교회의 희망의 기초를 이 소수의 증인들 위에 세우고 있었다. 제자들조차도 그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이 숭엄한 진리를 믿을 것이라는 무슨 희망이 있었겠는가? 참조 요 1:11, 12 주석.
예수는 단순히 위대하고 선량한 사람이었거나 아마도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최고의 인간이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라는 가정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했으며, 그를 따르는 자들도 이러한 믿음에 동의하기를 바랐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든지 그렇지 않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만약 아니라면, 그는 역사상 가장 큰 사기꾼이요 협잡꾼이다. 예수가 세상의 구세주가 아닌데도 세상의 구세주로 선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여기라고 촉구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존경은 고사하고 칭찬받을 가치도 없다. 나사렛 예수는 그리스도,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아니면 역사상 가장 큰 사기꾼이었을 것이다.
21.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예수는 봉사의 마지막 순간 즉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이 있기까지는 자신이 메시야임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기를 피했다. 그분은 결코 자신이 메시야라고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메시야로 널리 알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막 1:24, 25) 거듭해서 악한 영들에게 자신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참조 막 1:24, 25, 34; 3:11, 12; 눅 4:34, 35, 41)로 부르지 말라고 명한 것으로 보인다. 열두 제자들은 갈릴리를 여행하는 도중에 예수가 메시야인지 아닌지에 관한 문제를 거론하지 말아야 했다. 왜냐하면 일반에 퍼져 있는 메시야에 관한 잘못된 개념이 복음의 선포와 영접을 좌절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시대의 소망, 30, 414, 414, 415; 참조 눅 4:19 주석). 예수의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마 21:5, 5; 요 6:15) 때 나타난 것처럼, 사람들이 이러한 선포를 정치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
22. 가라사대 ... 하시고 예수가 여기서 처음으로 소개하는 그의 임박한 고난과 죽음과 부활(참조 13절 주석)의 주제에 적합한 서론부였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예수는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자신이 메시야임을 거론하지 않았으며, 또한 메시야로서 세상 죄를 위해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사실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이 있기 적어도 2년 전, 첫 번째 성전 정결 시에 그가 수수께끼 같은 표현으로 자신의 죽음을 암시한 것은 사실이다(참조 요 2:19 주석). 그리고 사적이긴 하지만 니고데모에게도 자신의 죽음의 성격(참조 요 3:14)과 사실성을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제부터 예수가 이 문제를 제자들과 거듭 논했는데, 그것은 그의 왕국과 메시야(참조 16:22)에 관해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잘못된 개념에서 제자들의 마음을 떼어놓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때 그들이, 메시야는 고난을 당하고 죽어야 한다(참조 16:22)는 생각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한 것은, 그리스도가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품고 있는 그들의 마음을 깨우치기 위해 겪은 곤란을 잘 나타낸다. 예수는 거듭거듭(17:22, 23; 20:17~19) 그 일에 대해 그들과 이야기했다. 그러나 막상 때가 이르렀을 때 나타난 그들의 실망은, 예수가 지금 그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 가르침을 위해서 그들에게 열중했던 것이 부분적인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장로들. 이것은 아마도 이 세 부류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진 산헤드린회였을 것이다. 산헤드린은 71명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최고의 입법, 사법부이다.
많은 고난을. 이것은 구약에 예언되어 있다(참조 시 22:1, 7, 8, 15~18; 사 53:3~10 등). 예수의 고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이며 사람들의 구세주라는 관점으로 볼 때만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그는 메시야였기 때문에 고난을 당해야 했다.
죽임을 당하고. 예수가 거듭거듭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분명하게 말했지만 제자들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으며, 그들이 믿기를 원하는 것들은 맹목적으로 믿기로 선택하고 그들의 선입견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쳐 버렸다(참조 시대의 소망, 30).
23. 아무든지…거든. 예수는 이제 모든 제자들에게 말한다(참조 9:23). 마가(막 8:34)는 그의 제자들 외에 다른 사람들-아마도 그를 믿고자 찾아온 지역 사람들, 갈릴리에서 그가 행한 놀라운 기적들에 대해 모두 다 들은 사람들-도 있었다고 부언한다. 16:24에 나타난 사상에 대해서는 10:38, 39 주석을 참조하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을 포기하고.” 자신의 의지를 그리스도에게 굴복시키고 이제부터는 자신보다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라는 의미.
자기 십자가를 지고. 제자에게 수반되는 책임을 짊어져야 하며, 그때에 요구되는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을 말한다. 죄인을 처형할 때 사용하는 십자가는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인의 형틀이었다(참조 10:38 주석). 그러나 당시에는 팔레스타인에서도 십자가의 처형이 잘 알려져 있었다.
십자가형으로 사형을 언도받은 죄인은 실제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갔거나, 적어도 십자가의 가로 막대기를 사형장까지 메고 갔다. 아마도 예수는 바로 이것을 언급한 것 같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언급한 문맥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제자로서 만나게 될 장애물이나 사소한 어려움이라기보다는 죽음 자체에 직면했을 때 준비가 필요함을 말한 것이다(참조 16:21, 22). 다른 곳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위탁된 봉사의 삶에 헌신할 때 그들이 자신들의 십자가를 “매일”(참조 눅 9:23) 져야 한다는 사상을 덧붙여 제시했다. 만약 사람들이 예수를 미워한다면 그들은 그분의 대표자들인 제자 역시 미워할 것이다
나를 좇을 것이니라.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들은 먼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계획과 개인적인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그런 다음 그가 의무로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이든 기꺼이 짊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한다(벧전 2:21).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가 그의 생애를 본받아 살며, 그가 보여 준 대로 하나님과 우리의 동료 인간들을 섬기는 것을 말한다(요일 2:6).
26 영광으로…올 때.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을 버린 자들은 이 세상 끝에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돌아올 때 그들의 생명을 얻을 보증을 받는다(고전 15:51~55). 바로 그때 각인은 저마다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를 위하여 생명을 버린 그리스도인들이다. 인기 있는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죽을 때 희생에 대한 “상급”이 주어진다면 여기서 그리스도가 구체적으로 천명한, 세상 마지막에 그가 영광 중에 올 때 이러한 상급이 주어진다는 말씀은 이상한 것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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