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명의 문둥병자

 

누가복음 17:11-17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구주께서 친히 사마리아를 방문하신 일과 후에 선한 사마리아인을 칭찬하신 일 그리고 열 사람의 병 고침을 받은 자 중에서 유독 감사에 넘치는 사마리아의 문둥병자만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와 감사를 드린 일 등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아주 의미 깊은 일이었다. 이 교훈은 제자들의 마음 깊이 스며들었다”(소망, 488)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죽어가던 이들이었다. 과거에는 천형병(天刑病)으로 불리어진 불치의 병을 앓던 이들이 희망을 갖게 된 것은 예수님을 만난 일이었다. 

 

본문연구

  1. 예루살렘도 아니고 사마리아도 아닌 곳(11절), 열 명이나 되는 문둥병자들이 모여 있는 한 촌(12절)은 어떤 곳일까? 문둥병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가(12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문둥병: 오늘날 나병 혹은 한센병이라고 한다. 레 13,14장에 의하면 일반적인 문둥병, 문둥병으로 분류되는 피부병, 전염이 심한 악성 문둥병 모두를 포함한다. 성경에서는 문둥병의 치료를 “깨끗함을 받”(14절)는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문둥병의 증상이 외관상으로 피부나 몸에 보기 흉한 상태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cf. 나병촌에 들어가신 예수님을 본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도, 사마리아로부터도 격리 되었다. 질병의 고통과 더불어 사회적 외로움과 소망없는 인생의 날들을 지내고 있었다.

  2. 문둥병자들의 요청에 대하여 예수님은 어떠한 답변을 하셨는가? 
    13-14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cf. 레 13:9에는 문둥병자의 진찰과 확인은 제사장에게 보이는 것으로 되어있다.
        cf. 예수님의 지시에는 믿음이 요구되었다. 제사장에게 보이므로 문둥병이 확증될 수도있고, 깨끗해졌다는 확인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cf. 누가는 특별한 표현들을 사용하므로 의미있는 극적인 상황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들어가시니”, “멀리 서서”(12절), “가다가”(13절)
      
  3. 깨끗함(치료)을 받은 자와 구원을 받은 자는 각각 누구인가? 어떤 차이가 있는가? 
    14, 17, 19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토의사항

  1. 문둥병과 문둥병자를 각각 죄와 죄인에 비유한다면, 본문의 사건을 통해 죄인의 구원이 어떠한 과정에 의해 이루어지는지 설명해보자.

  2. 본문의 사건은 구원의 진리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절)고 하신 예수님의 선언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자.

  3. 본문의 사건에서 보여진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이야기 해보자.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문둥병자들의 마을에 들어가셨다.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전염성으로 인해 가족들과도 가까이 할 수 없는 그들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와 사랑을 느끼게 하였다. 질병의 고통과 외로움, 죽음의 운명뿐이었던 그들에게 희망의 기회가 나타난 것이었다. 죄인들을 찾아오신 그리스도. 모든 죄인들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신 그리스도. 그러나, 열 명 가운데 오직 믿음으로 보인 돌아온 한 명 만이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은 구원의 진리를 분명하게 깨닫게 해 준다.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문둥병자 열 명, 17:11~19. 참조 막 1:40~45 주석. 9, 137; 비유에 관하여는 113~ 119]. 여기 언급된 여행은 순회의 성격을 띤 것으로 보이며, 처음에는 사마리아를 지나, 다음에는 갈릴리 접경으로, 그 다음에는 아마도 요단강을 건너 페래아를 지나,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들의 주장대로 이 여행은 요 11:54에 언급된 것과 동일시 될 수 있는데, 예수와 제자들은 나사로를 다시 살린 후(53)에 뒤따른 공공연한 적대감을 피하여 베다니와 예루살렘 지경 북쪽으로 물러갔다. 이 북쪽으로 가는 여행은 그들을 갈릴리 접경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떠나는 것이었으나, 결국 그 성읍과 십자가를 향해 돌아오게 될 마지막 순회여행을 하고 있었다. 또한 이 여행의 노정에 아마도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에 잠시 머물면서 시간을 할애하여 그곳 사람들을 위해 봉사했을 것이다. 이것은 페래아에서 보낸 짧은 기간 후에 있었고, 예수는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여리고와 베다니를 통과하였다.

 

사이로 지나가시다. 디아 메수(dia mesou), “~의 중간을 지나서보다는 디아 메손(dia meson), “~사이[에 놓인 것]를 지나서독법을 지지하는 본문상의 증거를 인용할 수 있다. 누가는 여기서 예수가 이미 몇 주일 또는 수 개월 전에 출발하여 지나온(참조 마 19:1, 2 주석) 사마리아와 갈릴리를 통과한 여행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두 지역의 접경을 따라 여행한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12. 열 명. 문둥병자들은 마을 안에 있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가 마을로 들어가려고 할 때에 접근했다. 그들은 마을에서 상당히 떨어진 들판에 대충 지은 오두막집에서 함께 살았을지도 모른다. 문둥병의 속성이나 병자들에 대한 규제사항, 병자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 그 병에서 치료받은 자들에게 적용되는 의식적인 대책에 대하여는 예수가 처음으로 문둥병자 한 사람을 고친 사례를 기록한 막 1:40~45 주석을 참조하라.

유대인들은 통상적으로 문둥병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겼다(소경으로 태어나는 원인도 그렇다고 여겼다. 참조 요 9:2). 그들은 고대 이교사상을 흡수했다(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 받았다라는 의미로 보는 문둥병 같은 어떤 증상들을 열거해 놓은 구바벨론어로 기록된 Archiv fu..r Orientforshung에 나와 있는 징조 문서를 참조하라). 그러므로 그들은 고통을 경감시키거나 치료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 격리 수용외에는 문둥병을 위한 치료법을 알지 못했다(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격리 수용이 표준적인 절차로 도처에서 계속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새로운 약품이 나옴으로 외래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반드시 격리 수용을 할 필요는 없어졌다).

 

 

멀리 서서. 율법이 요구한 대로. 그들은 대로에서라도 다른 사람에게 접근하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이 문둥병자들은 막 1:40~45에 언급된 법보다는 격리법을 지키는 데 더 주의를 기울였다.

 

13. 선생님이여. 헬라어 에피스타테스(epistate-s,).

문자적으로 “[다른 사람의] 위에 서 있는 사람.” 따라서 감독관혹은 관리자를 뜻한다. 누가는 예수를 가리키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한 유일한 공관복음서 기자이다. 누가와 그 밖의 기자들이 자주 사용한 더 일반적인 단어는 디다스칼로스(didaskalos)인데 문자적 의미는 선생이다(참조 요 1:32 주석). 사실 베드로는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그들이 고용한 사람들이 경영하는 고기잡이 사업의 감독즉 에피스타테스였다(참조 막 3:16 주석).

 

 

14. 너희 몸을 보이라. 모세의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이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적어도 구약에서 다른 피부병들이 문둥병(leprosy)이란 말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검사자들이 치료 가능성 있는 종류의 질병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질병에서 회복된 자들은 재검과 정결의식, 아마도 확인증을 받은 후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참조 레 14).

제사장에게서 그런 증명서를 받음으로써, 문둥병자는 확실한 기적이 일어났다는 공적인 인정을 얻게 된다(참조 시대의 소망, 265). 그 사람 자신은 일어난 일에 대한 산 증인이 된다. 많은 제사장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이런 저런 증거들에 의하여 설득되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266). 부활 후에 많은 제사장들이 그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였다(참조 행 6:7).

문둥병자에게 법의 요구를 따르라고 한 예수의 가르침은 그가 모세의 법에 반대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그는 친히 율법 아래”(참조 마 23:2, 3 주석; 4:4)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서기관들이 모세의 법 주위에 세운 전통하나님이 모세에게 준 문자와 정신을 다 무효케 만드는 전통에는 강렬한 반대를 표현하였다(참조 마 15:3; 7:8, 9; 시대의 소망, 395~398). 문둥병자를 제사장들에게 보냄으로써, 그리스도는 전에 친히 모세에게 주었던 자신의 율법에 대한 인정을 그들과 백성들에게 보여 주고자 목적하신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함으로 그는 율법의 공식적 수호자들인 제사장들이 한 거짓 비난을 반증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그들 중에 마음이 정직한 자들은 예수가 모세의 법에 불충성한다는 비난이 거짓됨을 알고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는 데로 인도될 것이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265).

 

저희가 가다가. 치료는 믿음의 행위에 따른 조건부적인 것이었다. 치료는 그들이 예수 곁에 머무는 한 받을 수 없었고, 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나아갈 때에만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이 예수를 떠날 때까지는 문둥병이 낫지 않았다. 그들이 깨끗하다는 선언을 받게 될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기 전에 치료의 가시적인 증거를 기다렸다면 그들은 결코 고침을 받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실제로 고침을 받기 전에, 이미 고침을 받은 것처럼 믿음으로 행동하는 일이 그들에겐 필수적이었다. 믿음 가운데 주님께로 오지 않는 자들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기대할 필요가 없다(1:7; 참조 히 11:6). 순종 없이는 믿음도 없는바, “행함이 없는 믿음은죽은 것이기 때문이다(참조 약 2:17~20).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요구 사항대로 행동하지만, 믿음 없이는 순종이 불가능하고 무익하다. 그 둘은 상대 없이 홀로 존재할 수 없다(참조 약 2:17).

 

15. 그중에 하나가. 한 사람, 오직 한 사람이었다(참조 17).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를 혐오스러운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었음을 깨달았을 때, “그중에 하나가먼저 해야 할 일, 곧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 사마리아인은 복음서 기록 가운데서 은혜에 감사하는 최고의 모범 인물로 나타난다.

 

16. 발 아래 엎드리어.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간구하거나 감사하는 전형적인 동방인의 자세이다(참조 에 3:2 주석).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다른 아홉 명은 저희가 아브라함의 자손들로서 고침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자기에게 갑자기, 예기치 않게 주어진 치료의 축복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하늘이 그에게 내려준 은사에 대하여 감사했다. 받은 축복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잊어버리는 자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하여 진정으로 감사하지 않는 자들은 그분을 완전히 잊어버릴 중대한 위험 가운데 있다(참조 롬 1:21, 22).

 

17.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좋은 것들에 대하여 감사하는지가 그분에게 중요하다는 증거가 여기에 있다. 그 아홉 명은 크게 감사해야만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 그들은 어떠한 감사도 표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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