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2:39-62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40]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41]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47]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와서
[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 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하고
[50]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55]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 한 비자가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8]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가로되 너도 그 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 한 시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가로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먼저 본문을 읽으면서 자세히 관찰하세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는 인간의 대리자로서 고통을 당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은 죄의 사악함의 공포아래 마음이 흔들리어 마침내 창백하고 떨리는 그의 입술에서 “오,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하는 고뇌에 찬 부르짖음이 흘러 나오게 하였다. 그러나 타락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으시다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 하셨다. 만약 하늘로부터 천사들이 와서 힘을 돕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의 인성은 두려운 죄의식 때문에 그때 거기에서 죽고 말았을 것이다.
세상 죄의 통탄할만한 성질을 생각할 때에 그리스도는 아무도 없는 곳에 따로 떨어져 혼자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어둠의 주관자들이 거기 있어서 할 수 있는 대로 죄를 광범하고, 깊고, 두려운 모습으로 보이게 하였다. 사단은 하나님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하나님의 품성을 왜곡시키고 하늘 정부의 율법에 대한 불경과 멸시와 증오심을 나타냄으로써 죄악을 하늘에 사무치게 하였다. 그리고 속죄가 불가능하게 보일만큼 죄를 사악하게 보이게 하고 따라서 잃어버린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아들이 죄의 저주 아래서 압착, 분쇄되어 버릴만큼 죄를 크게 부풀리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다.
예수님의 고난은 겟세마네에서 시작되었다. 그분께서 그곳에서 참아내신 것은 대쟁투의 빛에 비추어 볼 때, 우주의 관객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본문연구
- 왜 예수님의 “땀이 땅에 떨어자는 핏방울 같이 되”도록 기도하셨는가? 예수께서 가능하면 벗어나게 되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셨던 잔은 무슨 잔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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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께서는“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맛보셨다”(시대의 소망 3권, 193).
- “그 잔”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은 무엇처럼 연상되는가?(시 11:6; 사 51:17). 그 시간에, 그리스도를 위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는가?(히 10:7,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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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새 언약의 잔을 나누셨다. 이제, 그분은 슬픔과 흑암의 쓴 잔을 맛보신다. 그러나 이 순간에 승리는 왔다.
- 유다의 배반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며, 또한 흑암의 세력의 일이 되는가?(눅 22:42, 53; 요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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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를 고소하는 소리 배경에, 사단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유다를 유혹하였고, 이제는 베드로에게 덫을 놓았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위하여 사단의 계교를 막으시겠다고 선언하셨다(32절).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방어가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를 보여 주는가?(행 5: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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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의사항
- 예수님이 받으신 잔이 내 삶의 변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 베드로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베드로가 그의 그런 행동에도 불구하고 돌이킨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 나는 어떤 상황 하에서도 예수님과의 관계를 기꺼이 인정할 수 있을까? 자신의 결심을 이야기해 봅시다.
“만일 베드로가 자기 주님을 위하여 싸우도록 부르심을 받았더라면 그는 용감한 군인이 되었을 것이나 조롱의 손가락이 그를 지적할 때에 그는 자신이 겁쟁이라는 것을 나타내었다. 그와 동시에 베드로의 시선도 주님께 이끌렸다. 그 부드러운 얼굴에서 그는 깊은 동정과 슬픔을 엿볼 수 있었을 뿐 분노의 그림자는 추호도 없었다.
창백하고 고통에 차 있는 얼굴, 떨리는 입술, 동정과 용서하시는 정이 서린 모습은 화살처럼 그의 마음을 찔렀다”(시대의 소망 3권, 218,219).
39. 습관을 좇아. [겟세마네로 감]. 겟세마네. “기름 틀”을 뜻하는 아람어에서 따온 이름. 명상과 기도 그리고 휴식을 위해 구주는 이곳에 자주 갔으며, 여기에서 종종 밤을 보냈다(눅 22:39; 요 18:2; 시대의 소망, 685, 686,). 십중팔구 십자가에 달리기 전, 화요일과 수요일 밤에 그는 이곳으로 물러나 있었을 것이다(참조 마 21:17; 24:1, 3; 26:17, 18 주석; 눅 21:37).
성경 시대에 이 동산이 어디에 있었는지 정확하지 않다. 이 조용한 장소는 아마도 성전에서 볼 때 기드론 골짜기 바로 건너편에 있으며, 도성에서 도보로 10분쯤 걸리는 곳에 있는 감람산의 아래쪽 경사지 어떤 곳에 있었을 것이다(참조 21:1; 26:30 주석). 오늘날 방문객들에게 일반적으로 가르쳐 주는 장소는, 그리스도 이후 3세기가 지난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 이전에는 찾을 수 없는 전승에 근거한 것이다. 여러 주석가와 팔레스타인을 여행한 사람들의 의견에 따르면, 본래의 겟세마네는 경사지의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참조 483.
41. 돌 던질 만큼. 누가만이 이런 내용을 언급한다. 누가는 그 거리가 돌 던질 만큼의 거리였다는 말을 첨가한다(눅 22:41). 그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보고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천사를 보았고(눅 22:43) 천사의 음성을 들었다(시대의 소망, 685, 694,).
42. 이 잔. “잔”은 선하든 악하든 생애의 경험들을 나타내기 위해 흔히 쓰이는 성경적 표현이다.
그러나. 사단이 온갖 맹렬한 시험으로 예수의 영혼을 압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문이나 주저함 없이 아버지의 뜻에 순복했다. 그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복한 것은 우리가 따라가야 할 완전한 모본을 제시한다.
43. 사자가. 그는 여러 번 그리스도를 친히 수종들었던 가브리엘이다(참조 1:19 주석). 광야에서 예수가 사단을 대면한 끝 즈음에 겪은 경험과 비교해 보라(참조 마 4:11 주석).
힘을 돕더라. 예수가 세 번 기도한 후에,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길을 다 가기로 큰 결심을 한 다음,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의 고통을 맛보시”고, “예수께서는 약간 일으키셨던 그 몸을 죽어가는 사람처럼 땅위에 엎드리셨다”(시대의 소망, 693, 694,). 예수와 십자가 사이에 놓인 고통의 시간에 그에게 힘을 주고자 강한 천사가 왔으며, 힘을 얻은 후에 그의 얼굴에서는, “그분이 방금 당하신 고통의 흔적”은 사라지고 “고요하고 평안하게 일어나셨다”(시대의 소망, 694). 그런 모습으로 예수는 자기를 잡으러 온 폭도들을 만났다.
44. 애써.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갔을 때 그를 짓누른 그 심한 고민과 신비한 슬픔을 우리가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를 사로잡은 특별한 슬픔은 제자들을 당황하게 했다. 그들이 전에 결코 목격하지 못했던 격렬한 고민으로 괴로워하는 신-인(神人), 곧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자(참조 마 1:1; 막 2:10; 눅 1:35 주석)가 거기에 있었다. 그 고통은 부분적으로는 육체적인 것이었지만, 단지 세상 죄를 짊어진 자인 그리스도의 무한한 고통에 대한 눈에 보이는 반영에 불과했다.
45. 잠든 것을. 잠시 그들은 깨어 있어 그와 연합하여 기도했으나, 얼마 후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의 혼미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이 기도에 골몰했다면 혼미케 하는 잠을 떨쳐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47. 열둘 중에 하나인. 이 부가적인 표현은 틀림없이 유다의 배신적인 행위의 가증한 성격을 더욱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해 덧붙였을 것이다(참조 21, 23절 주석). 이 말은 그의 배신적인 행위의 가증함을 크게 부각시킨다.
유다. 그 배신자는 어디에서 예수를 찾을 수 있을지를 알았다(요 18:2). “묵상과 기도를 위해 그분이 자주 가는 한 곳”에서 그를 잡기로 조치가 되어 있었는데, 겟세마네는 그가 그런 목적을 위해 자주 갔으며 때로는 밤을 보내기도 한 장소였다. 유다의 임무는, 예수가 조용하고 한적한 은둔처에 차단돼 있을 때 관원들을 인도하여 그를 가리켜 주는 일이었다(참조 행 1:16).
51. 이것까지 참으라.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가 제자들에게 이 말을 함으로써 일이 제 과정을 따르도록 내버려두라고 지시한 것인지, 아니면 힘이나 폭력 사용을 그치라고 그들에게 명한 것인지(참조 50절) 혹은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말고의 귀를 고쳐주는 것을 막지 말라고 종용한 것인지 분명치 않다. 시대의 소망, 69에 따르면, 그는 자기를 꽉 잡고 있는 로마 병사들에게 말했다.
그 귀를 만져. 이것은 예수를 체포하러 온 자들에게 주어진 그의 신성에 대한 두 번째 증거였는데, 첫 번째 증거는 천사의 영광이 나타난 것이었다(참조 요 18:6 주석). 베드로의 성급한 행동이 즉시 무마되지 않았다면, 산헤드린과 빌라도 앞에서 예수와 제자들은 위험한 사람들이며, 국가에 위협적인 존재들이라는 증거로서 제시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당국자들은 치유의 이적이 행해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심문할 때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52.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 이 잡다한 무리들 가운데는 대제사장도 있었고, 여러 유대 지도자들도 동행했으며(참조 시대의 소망, 695, 696,), 바리새인들(요 18:3), 유대인들로 구성된 성전 치안관(요 18:12; 참조 시대의 소망, 696), 로마군의 분견대(참조 시대의 소망, 694, 695,)가 있었다. 그 밖에 건달패도 있었는데, 그들 중 어떤 자들은 틀림없이 깡패로서 흥분된 소요를 구경하기 위해 따라온 자들이었을 것이다(참조 시대의 소망, 696).
53. 성전에 있을 때어. 예수는 자신의 행동이, 무력과 폭력으로 체포해야 할 무자비한 악당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지적한다. 그는 남몰래 행동하지 않고 모두가 보는 데서 행동했다(참조 요 18:19~21). 그는 유대나 로마 당국에 대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비난을 받을 만한 구실을 주지 않았다.
너희 때요. 즉 그들이 예수에게 하려는 일이 허락된 “때”라는 뜻이다. 마침내 예수가 악한 사람들과 악한 천사들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다.
어두움. 때는 밤이었고, 그들의 사악한 계획들을 실행하기에 적합한 시간이요, 최적의 시기였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을 덮은 영적인 흑암은 밤의 어두움보다 더 심했다. 이 악한 사람들은 제어받지 않고 마귀의 뜻을 이행하였으며, 마음속에 있던 증오심을 마음껏 발산하였다.
54. 예수를 잡아 끌고. [산헤드린 앞에서의 밤중 재판]. 누가는 심문과 베드로의 배반을 엄밀하게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기록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베드로가…따라. 요한이 좇아간 것처럼(참조 요 18:15). 예수가 저항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확실해지는 순간 모든 제자가 그를 버렸다(26:56).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최소한 어느 정도의 평정을 되찾고 대제사장 관저까지 그 무리들을 따라갔다. 다른 이들은 용기가 부족했다.
멀찍이. “거리를 두고”(「개정표준역」). 베드로는 공개적으로 예수 편에 설 만큼 충분한 용기를 갖진 못했으나 그럭저럭 대부분의 동료 제자들보다는 좀 더 용기가 있음이 증명되었다.
56. 한 여종. 이 사람은 베드로가 들어오도록 허락해 준 여자 문지기였다(요 18:16, 17; 시대의 소망, 710, 711,).
57. 베드로가…부인하여. 베드로는 불과 몇 시간 전에 주어진 예수의 경고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참조 31~35절 주석). 그는 남들이 자기를 몰라보길 바랐고, 심지어 예수를 험담하는 무리에 가담했다(참조 시대의 소망, 712). 이것은 베드로의 첫 번째 부인이었다. 기록이 지적하는 바에 의하면 세 번의 부인은 모두 오전 3시부터 5시 사이에 있었던, 산헤드린 앞에서의 첫 번째 심문 도중에 행해졌다. 예루살렘의 위도에 비춰 볼 때, 연중 이때쯤이면 4시경에 첫 새벽빛을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일출은 5시 반경에 있었을 것이다.
61. 베드로가…생각나서. 베드로가, 예수가 처음에 다락방에서 말하고 또다시 겟세마네로 가는 도상에서 말한 그 경고(참조 34절 주석)를 완전히 잊어버렸음이 분명하다. 그의 과오의 뿌리는 자신감과 자랑에 있었다(35절). 이제야 생각이 났으나 너무 늦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예수의 말을 성취시켰다. 겸손함과 선한 권고에 기꺼이 유의하려는 마음은 어리석은 과오를 막아 주는 최선의 방책이 된다.
62. 밖에 나가서. 두세 시간 전에 그가 들어왔던 뜰에서 밖으로 나갔다는 말이다. 눅 22:61에 따르면, 베드로가 급히 떠나기 직전에 예수는 베드로 쪽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이리저리 방황하던 베드로는, 선생님이 불과 얼마 전에 엎드려 있던 바로 그 장소인 겟세마네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참조 시대의 소망, 713).
심히 통곡하니라. “눈물을 터뜨리다.” 만일 베드로가 저주하는 말을 한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린 만큼 “깨어 기도하라”(41절)는 예수의 권고에 진지하게 유념했다면 그는 결코 그런 말들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베드로는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겠지만, 구주의 사랑은 그에게 희망을 주었고 참담한 경험을 안전하게 통과하도록 해주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어두운 시간일지라도, 번민과 패배의 경험이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예수의 사랑의 빛이 힘을 주지 못하거나 구원할 수 없는 경우는 없다. 참조 시대의 소망, 3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