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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 ... 명확한 전달
1. 주제의 명확성: 무엇에 관해 쓸지 분명하게 // 그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
- 독자를 이해
- 글의 방향성
- 집중력 유지
: 주제를 명확하게 드러내려면?
- ‘발문’ ‘서문’ ‘주제문’ // ‘소제목’
- 구체적이고 간결한 표현
- 일관된 내용 유지
2. 구조와 흐름: 서론, 본론, 결론 혹은 기승전결 등의 구조 // 논리적 연결
- 독자의 이해
- 주장 강화
- 독이성 & 몰입
: 글의 구조와 흐름이 논리적이고 유기적으로 이어지려면?
- 명확한 구조 설정
- 전환 구문 사용
- 아이디어의 순서 정리
- 리뷰와 수정
3. 독자 고려
4. 진솔함
: 사회복지법인 삼육재단 당진시협의회 주최로 2012년 당진시 승격과 삼육재단이 수탁하여 운영 중인 당진시건강가정센터, 다문화가족지원센터, 북부행복나눔복지센터가 있는데 삼육재단이 당진시와 인연을 맺은 지 5년이 되는 해에 삼육재단에서 당진시민들을 초청하여 수준 높은 문화공연을 통하여 삼육재단과 당진시 9개의 교회를 당진시에 알리는 좋은 기회로 삼기위해 공연을 기획하였습니다.
■ 신문기사: 뉴스를 문장으로 작성한 것
■ 기사의 구성 요소
- 제목
- 리드
- 본문
■ 신문기사의 종류
- 보도기사(스트레이트): 작성자의 주관을 배제하고 사실(육하원칙)이나 인용문 위주로 작성
문장구조는 주로 역피라미드형
- 의견기사(피처): 기자의 주관적인 해석과 주장을 담아 작성
문장구조는 주로 피라미드형
■ 신문기사의 문장구조
- 역피라미드형: 첫머리에 기사의 핵심인 리드를 먼저 제시한 다음, 본문에서 그에 대한 보충사항과 세부사항들을 중요도 순서대로 배열해 나가는 방식. 역피라미드형 기사는 리드에서 결론, 즉 가장 중요한 사실과 사건 개요 제시한다. 현재 – 과거 – 미래의 순으로 작성합니다.
- 피라미드형: 결론이 기사 맨 마지막에 오는 형태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건이나 주제에 관해 기사를 작성할 때 사건의 발단에서 시작해 시간적인 또는 논리적인 순서대로 서술해 나가면서 마지막에 결론을 맺는 구조
①누가 – 주최 / 주관
②언제 - 일시
③어디서 – 장소
④무엇을 - 행사명
⑤어떻게 – 프로그램 내용 및 현황
⑥왜 – 취지 . 목적
⑦특이사항 or 특장점
⑧예년과 달랐던 점
⑨내.외빈 말씀 요지
⑩참가자 수
⑪참가자 반응
⑫기대효과
⑬앞으로의 계획
| 경배와 찬양 | 다같이 |
| 찬 미 | 82장 |
| 시작기도 | 기도자 |
| 환 영 | 안교장 |
| 특별순서 | |
| 교과공부 | 각 반 |
| 헌금소개 | 사회자 |
| 축 도 | 담임목사 |
| 기억절 4기 4과 (일몰 : 5시 40분) |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3). |
| 10월 시무 안내 |
| 시 무 : 권욱민 헌금봉사 : 김진규 정찬우 |
다음 주 예배순서
| 금요일예배 | 안식일예배 | ||||
| 날짜 | 기도 | 말씀 | 날짜 | 기도 | 말씀 |
| 1 | 임경훈 | 소그룹 | 2 | 전현주 | 박창혁 |
| 8 | 고은채 | 소그룹 | 9 | 120주년 기념 예배 | |
| 15 | 김진수 | 임봉경 | 16 | 임동국 | 김형준 |
| 22 | 박인앙 | 소그룹 | 23 | 김성미 | 권세진 |
| 29 | 최형동 | 소그룹 | 30 | 허미라 | 김주혁 |
| 경배와찬양 | 다함께 |
| 등단 / 묵도 | 다함께 |
| 송 영 | 2장 |
| 기 원 | 설교자 |
| 찬 미 | 33장 |
| 대 표 기 도 | 이상훈 청년 |
| 특 별 찬 양 | |
| 설 교 | 권세진 목사 |
| 찬 미 | 670장 |
| 개 인 기 도 | 다함께 |
| 헌 금 | 다함께 |
| 축 도 | 설교자 |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이사야 42:9)
"믿음이라는 주제가 명사가 아닌 동사로 반복하여 사용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매우 능동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신념이 누적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며 우리의 매일의 삶을 통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그저 단순한 것이라면 마귀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야고보서는 말한다." (요한복음 교과, 44)
"율법은 하나님의 위대한 도덕적 거울이다. 그는 자신의 말, 자신의 정신,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의 말씀과 배교해 보아야 한다."(목사에게 보내는 기별, 124-125)
◆ 경희, 고려대 캠퍼스 모임

◆ 과학기술, 광운대 캠퍼스 모임

◆ 화랑 캠퍼스 모임

주중 모임 안내
| 경희 중앙 캠퍼스 모임 | 수요일 오후 6:30 교회 |
| 화랑 캠퍼스 모임 | 목요일 오후 6:00 삼육대 |
| 졸업생 소그룹 | 화요일 오후 8:00 교회 |
| 장년 소그룹 | 화요일 오후 8:30 ZOOM |
담임목사 권세진 부목사 김주혁 전도사 박창혁
수석장로 임동국 서기 문호준 전현주 재무 권욱민
선교회장 윤민식 액트회장 윤애리
헌금계좌 : 하나은행 144-890014-45304
(ACT교회)
주소 :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로1길 11
어린이청소년비전센터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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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튜브 | 청년반 | 학생반 | 블로그 |
1️⃣인물, 과자 맞추기
2️⃣컬링
3️⃣ccm맞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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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배와 찬양 | 다같이 |
| 찬 미 | 82장 |
| 시작기도 | 기도자 |
| 환 영 | 안교장 |
| 특별순서 | |
| 교과공부 | 각 반 |
| 헌금소개 | 사회자 |
| 축 도 | 담임목사 |
| 기억절 4기 3과 (일몰 : 5시 49분) |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1). |
| 10월 시무 안내 |
| 시 무 : 임영빈 헌금봉사 : 박다정 이한얼 |
다음 주 예배순서
| 금요일예배 | 안식일예배 | ||||
| 날짜 | 기도 | 말씀 | 날짜 | 기도 | 말씀 |
| 4 | 최하린 | 소그룹 | 5 | 윤주형 | 권세진 |
| 11 | 김정현 | 소그룹 | 12 | 차민지 | 김주혁 |
| 18 | 김진겸 | 소그룹 | 19 | 김우진 | 김형준 |
| 25 | 성만찬 | 26 | 이상훈 | 권세진 | |
| 경배와찬양 | 다함께 |
| 등단 / 묵도 | 다함께 |
| 송 영 | 2장 |
| 기 원 | 설교자 |
| 찬 미 | 32장 |
| 대 표 기 도 | 김우진 청년 |
| 특 별 찬 양 | |
| 설 교 | "스위트 스팟" 마16:15-17 김형준 목사 |
| 찬 미 | 456장 |
| 개 인 기 도 | 다함께 |
| 헌 금 | 다함께 |
| 축 도 | 설교자 |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이사야 42:9)
"믿음이라는 주제가 명사가 아닌 동사로 반복하여 사용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매우 능동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신념이 누적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며 우리의 매일의 삶을 통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그저 단순한 것이라면 마귀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야고보서는 말한다." (요한복음 교과, 44)
"율법은 하나님의 위대한 도덕적 거울이다. 그는 자신의 말, 자신의 정신,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의 말씀과 배교해 보아야 한다."(목사에게 보내는 기별, 124-125)
◆ 경희, 고려대 캠퍼스 모임

◆ 과학기술, 광운대 캠퍼스 모임

◆ 화랑 캠퍼스 모임

주중 모임 안내
| 경희 중앙 캠퍼스 모임 | 수요일 오후 6:30 교회 |
| 화랑 캠퍼스 모임 | 목요일 오후 6:00 삼육대 |
| 졸업생 소그룹 | 화요일 오후 8:00 교회 |
| 장년 소그룹 | 화요일 오후 8:30 ZOOM |
담임목사 권세진 부목사 김주혁 전도사 박창혁
수석장로 임동국 서기 문호준 전현주 재무 권욱민
선교회장 윤민식 액트회장 윤애리
헌금계좌 : 하나은행 144-890014-45304
(ACT교회)
주소 :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로1길 11
어린이청소년비전센터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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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합회 성경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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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세미나에 참가 신청하고, 추첨을 통해 특별한 경품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
경품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대표작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 지금 도전하세요!"
누가복음 18:1-8
[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기도는 어떤 문제에 대한 우리의 뜻을 받아들이도록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그분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는 구하기도 전에 우리의 필요를 알고, 더욱이 우리에게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도 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우리 자신의 가장 큰 필요가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자주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고 오히려 해가 되는 것들을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우리의 가장 큰 필요를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참조 실물교훈, 145). 기도는 우리의 의지와 삶을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게 할 것이다(참조 실물교훈, 143). 기도는 우리의 욕망을 훈련하기 위해 하나님이 정한 방법이다. 기도의 진정한 목적은 하나님 안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며, 이로써 하나님이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빌 2:13)”(성경주석, 눅 11:9)
18장의 불의한 재판관은 누구를 나타내는가?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는 세상 형편이나 권력을 나타내는가? 하나님을 타나내는가?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과 달리 어떻게 행하시는가?(눅 18:4, 8)
“이 충성된 소수의 열렬한 기도는 허사로 돌아가지 않는다. 주께서 보수자로서 나타나실 때에, 믿음을 순전히 지키고 세상에 물들지 않게 자신을 지킨 사람들의 보호자로서 임하실 것이다”(교회증언 5권, 210).
1. 항상 기도하고. 특히 재림과 그 전에 있을 시험의 때를 고려해 볼 때 그러하다. 기도는 의무 이상의 것으로서 필수적이다. 예수는 여기에서, 기도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늘의 대리자들과 협력하고자 실제적인 노력을 경주하는 일을 배제하거나, 개인적인 책임을 소홀히 하면서까지 기도에 몰두하는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낙망치 말아야”의 주석을 참조하라). 예수가 의미하는 내용은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응답이 지연될 때에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참조 7, 8절). “항상” 기도한다는 말은 매일, 매 시간 하나님과 끊임없는 접촉 가운데 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수의 기도생활에 관한 토론은 막 1:35; 3:13 주석을 참조하라. 이외에 예수가 제자들에게 준 기도에 관한 교훈은 11:1~9 주석을 참조하라. 또한 마 9:38에 언급된 그의 교훈과 비교해 보라.
낙망치 말아야. 즉 그들은 기도하기에 지치거나, 기도하려는 마음을 잃지 말도록 권고받았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교육을 받았다(참조 단 6:10 주석). 그중 두 번은 모든 이스라엘을 위해 아침과 저녁 제사가 드려지고 휘장 앞에서 향이 드려질 때(참조 1:9, 10), 곧 정규적인 조석 기도 시간이었다. 어떤 랍비들은 심지어 기도를 위해 정해진 시간 외에는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기까지 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 비유에서 졸라대는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을 지치게 했듯이,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번거롭게 하고 지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비유로. 이 비유는 17:20~37에 기록된 교훈을 말할 때에 함께 말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참조 20절 주석; 실물교훈 164, 165,). 이때는 아마도 AD 31년 3월경, 나사로를 살린 지 오래 지나지 않은(참조 11, 20절 주석), 마지막 유월절 수 주일 전쯤이었을 것이다. 장소는 아마도 페래아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앞에 나오는 어떤 교훈들은 직접적으로 바리새인들에게 말한 것이었으며(참조 20절 주석), 따라서 이때에도 여전히 그들은 참석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을 때, 바리새인들이 언제 그 나라가 나타날 것인가를 질문함으로써(17:20) 예수의 말을 중단시켰을 때, 그분은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었다(17:1; 참조 16:1). 아마도 이제 예수는 다시금 시선을 제자들에게 돌렸을 것이다. 사실상,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구체적으로 답변한(21절) 후에 예수는 이미 주의를 상당 부분 제자들에게로 돌렸다.
여기에서 열심히 기도하라는 권고는 재림 전에 있을 위기의 때에 관한 논란(17:22, 37)이 있은 직후에 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인데, 특히 그 위기는 택한 자라도 방황하게 만들 수 있다는 관점에서 말한 것이었다. 21:36에 나와 있는 비슷한 권고 역시 마찬가지이다(참조 막 13:33 주석).
[이런 목적을 위하여]. (「제임스왕역」에는 이 구절이 나타나 있음-역자 주). 이 비유는 그들이 당면해야 할 기만과, 그들이 받아야 할 박해를 전망해 볼 때 특히 말세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경험에 적용된다(실물교훈, 164).
2. 어떤 도시에…한 재판관이. 문자적으로는 “모 도시에 사는 모 재판관.” 예수는 이런 종류의 예화를 사용할 때 신중을 기했다. 그는 자기의 말을 듣는 자들이 이 비유를 어떤 특정한 재판관에게 적용시킬 수 없도록 확실히 했다. 예수의 원수들은 그가 정부를 헐뜯고 있다는 비난을 하기 위한 기회들을 찾고자 애쓰고 있었다(참조 마 22:34~40 주석).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분명히 이 재판관에게 자기 자신은 곧 법이었다. 그는 하나님이나 동료 인간들에 대한 어떠한 사랑도, 율법의 두 비문에 대한 존경심도 나타내지 않았다(참조 마 22:34~40 주석).
3. 한 과부. 고대 동방 사회에서 과부는 가장 무력한 사람이었는데, 특히 그녀의 권리를 옹호해 줄 아들이 없을 경우 그러했다. 분명히 이 과부에게는 자신을 보호해 줄 아들이 하나도 없었다. 더욱이 그 냉담한 재판관을 매수할 만한 것도 전혀 없었으며, 법에 호소할 비용조차 댈 수 없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과부의 재판장”으로 묘사한다(참조 시 68:5). 야고보는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의 표는,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 보”는 것이라고 제시한다(약 1:27).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예수가 선고한 화(禍) 중의 하나는, 그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기 때문에 내린 것이었다(참조 마 23:14; 욥 22:9 주석).
그에게 가서. 헬라어에 의하면, “그녀가 오기를 계속하매.”
원수. 헬라어 안티디코스(antidikos). 이 말은 흔히 소송에서 상대방을 가리키는 법적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대개는 피고를 가리켰으나 어떤 때는 원고를 가리켰다(참조 마 5:25 주석). 사단은 그리스도인의 안티디코스로 불린다(벧전 5:8; 참조 슥 3:1~4). 안티디코스는 「70인역」의 삼상 2:10; 에 8:1에도 나타난다.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혹은 “내게 공의를 베푸소서”(참조 실물교훈, 166). 과부에게는 남편이 남긴 재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그것을 남에게 저당잡혔으나 그들은 법이 조치하는 바에 따라 규정된 기간 내에 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참조 레 25:23~25 주석). 분명히 그 과부에게는 권리를 보살펴 줄 만한 사람이 없어서 전적으로 재판관의 정의감과 자비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는 정의롭거나 자비롭지 않았다. 그는 진정 하나님과 대조되는 사람이었으며, 사단의 성품을 반사하는 자였다.
4. 그가…듣지 아니하다가. 헬라어에 따르면, “그는 계속 거절했다.” 그는 그렇게 하기를 고집했다.
후에…생각하되. 그녀의 집요함은 재판관을 지치게 만들었다.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과부가 이용할 수 있는 무기는 오로지 집요하게 졸라대는 것이었다. 그녀의 극심한 궁핍은 재판관의 정의감이나 자비심을 자극하지 못했지만(참조 3절 주석), 그녀의 집요함은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데 효과적이었다. 재판관은 즉시로, 또한 별로 힘 들이지 않고 재판을 명할 수 있었지만, 그 일을 처리하지 않고는 못배길 때까지는 법을 시행하지 않았다.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참조 3절 주석. 정의감이나 과부의 무력함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성가신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그는 법을 존중하지 않았고, 고통이나 압제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관심했다.
나를 괴롭게 하리라. 문자적으로는 “내 눈 밑을 치다” 혹은 “때려서 상처를 입히다.” 그러므로 의미상으로는, “나를 때려 눕히다” 또는 “나를 녹초가 되게 하다”는 말이 되어, “내게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을 준다”는 뜻이 된다. 여기서는 상징적으로 “심히 괴롭게 한다”는 의미로 재판관이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
6. 불의한. 이 용어는 예수가 부정직한 청지기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한 것처럼, 여기서는 “불의한” 재판관에 대한 예수의 소견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참조 16:8 주석).
7. 밤낮 부르짖는. 즉 지속적으로 또는 끈질기게(참조 1절 주석). 요한이 본 “제단 아래” 있는 “영혼들”의 공의를 위한 부르짖음과 비교하라(계 6:9, 10).
아니하시겠느냐. 헬라어로 이런 질문에는 긍정적인 대답이 나와야 한다(참조 6:39 주석). 이 비유의 교훈은 불의한 청지기와 공의롭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성품 사이의 현격한 대조에 기초한다. 재판관이 이기적인 이유 때문에 결국에는 과부의 요청을 들어줄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더 기꺼이 응답해 주실 것인가! 이와 유사한 대조에 대해서는 마 15:26, 27 주석을 참조하라.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호소하여 좋은 결과를 가져 왔다면, 의로운 하나님에게 그러한 미덕을 나타낸다면 간과되거나 보상받지 못한 채 지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하나님은 항상 실제적으로는 “속히” 역사하고 계시지만, 때때로 “그의 택한 자”에게 응답을 지체하시는 듯이 보일 수도 있다(참조 합 1:2). 그분은 “택하신 자”를 위한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룰 군대(forces)를 가동시키는바, 이 군대는 그 결과가 분명하게 나타나기 오래 전에 가동될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은 때때로 당신의 “택한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는 일을 지체할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에게 회개할 시간과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박해받는 자들뿐만 아니라 박해하는 자들도 사랑하시며, 그분의 “약속은…더딘 것이 아니”며 “아무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신다(벧후 3:9). 더욱이 성품은 시련을 통하여 온전케 되며, 종종 하나님은 성품 발달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기 위하여 우리의 간구에 응답하기를 지체할 수도 있다(참조 시대의 소망, 200; 실물교훈 175, 177,). 또한 지체됨은 우리의 필요에 대한 절실한 마음을 강화시키기에 유익한데, 이러한 절실한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할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참조 실물교훈, 152). 부당하게 고통받는 “택하신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와 그런 여건들 속에서 그들이 취해야 할 태도에 관하여는 벧전 2:20~24을 참조하라.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말은 여기에 언급된 결론을 강조한다.
올 때에. 이것은, 이보다 약 6개월 전에 예수가 이미 간략하게 암시했던 사건인 재림에 관하여 처음으로 직접적인 언급을 한 내용 중 일부이다(참조 마 16:27). 이보다 약 1년 반 전에 말한 가라지의 비유는, “인자”가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하기 위해 천사들을 보내는 일에 대하여는 언급하지만(참조 마 24:31 주석), 이 땅으로 자기가 다시 올 것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참조 마 13:40~43; 눅 17:22~30).
어떤 비평적인 주석가들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이 말과, 그 앞에 나오는 비유 사이의 연관성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가 우연히 여기에 삽입한 이 말은 예수가 별도로 한 말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관점을 가진 자들은 예수가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실 때는 곧 “인자가 올 때”(7, 8절)라는, 그의 오심과 관련된 다른 성경절들 가운데 분명하게 기록된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참조 마 16:27; 계 22:12). 예수가 재판관으로 앉을 때는 바로 그때이다(마 25:34~36; 롬 2:16; 딤후 4:1, 8; 벧전 4:5; 계 19:11).
믿음을 보겠느냐. 문자적으로는 “그가 믿음을 찾을 것인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 상황들은, 악이 승리하고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이 고통을 당하고 원수들 앞에서 넘어지도록 내버려두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참조 각 시대의 대쟁투, 630). 이 비유를 말한 지 몇 주일 후에, 예수는 재림의 징조에 대하여 말하면서, 제자들은 저희를 극도로 시험할(22절) “큰 환난”을 겪어야만 한다고 가르쳤다(마 24:2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택하신 자”들은 “끝까지 견디”고 “구원을 얻”을 것이다(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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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11-17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구주께서 친히 사마리아를 방문하신 일과 후에 선한 사마리아인을 칭찬하신 일 그리고 열 사람의 병 고침을 받은 자 중에서 유독 감사에 넘치는 사마리아의 문둥병자만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와 감사를 드린 일 등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아주 의미 깊은 일이었다. 이 교훈은 제자들의 마음 깊이 스며들었다”(소망, 488)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죽어가던 이들이었다. 과거에는 천형병(天刑病)으로 불리어진 불치의 병을 앓던 이들이 희망을 갖게 된 것은 예수님을 만난 일이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문둥병자들의 마을에 들어가셨다.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전염성으로 인해 가족들과도 가까이 할 수 없는 그들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와 사랑을 느끼게 하였다. 질병의 고통과 외로움, 죽음의 운명뿐이었던 그들에게 희망의 기회가 나타난 것이었다. 죄인들을 찾아오신 그리스도. 모든 죄인들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신 그리스도. 그러나, 열 명 가운데 오직 믿음으로 보인 돌아온 한 명 만이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은 구원의 진리를 분명하게 깨닫게 해 준다.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문둥병자 열 명, 17:11~19. 참조 막 1:40~45 주석. 제9권, 137; 비유에 관하여는 113~ 119]. 여기 언급된 여행은 순회의 성격을 띤 것으로 보이며, 처음에는 사마리아를 지나, 다음에는 갈릴리 접경으로, 그 다음에는 아마도 요단강을 건너 페래아를 지나,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들의 주장대로 이 여행은 요 11:54에 언급된 것과 동일시 될 수 있는데, 예수와 제자들은 나사로를 다시 살린 후(53절)에 뒤따른 공공연한 적대감을 피하여 베다니와 예루살렘 지경 북쪽으로 물러갔다. 이 북쪽으로 가는 여행은 그들을 갈릴리 접경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떠나는 것이었으나, 결국 그 성읍과 십자가를 향해 돌아오게 될 마지막 순회여행을 하고 있었다. 또한 이 여행의 노정에 아마도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에 잠시 머물면서 시간을 할애하여 그곳 사람들을 위해 봉사했을 것이다. 이것은 페래아에서 보낸 짧은 기간 후에 있었고, 예수는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여리고와 베다니를 통과하였다.
사이로 지나가시다. 디아 메수(dia mesou), 즉 “~의 중간을 지나서”보다는 디아 메손(dia meson), 곧 “~사이[에 놓인 것]를 지나서” 독법을 지지하는 본문상의 증거를 인용할 수 있다. 누가는 여기서 예수가 이미 몇 주일 또는 수 개월 전에 출발하여 지나온(참조 마 19:1, 2 주석) 사마리아와 갈릴리를 통과한 여행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두 지역의 접경을 따라 여행한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12. 열 명. 문둥병자들은 마을 안에 있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가 마을로 들어가려고 할 때에 접근했다. 그들은 마을에서 상당히 떨어진 들판에 대충 지은 오두막집에서 함께 살았을지도 모른다. 문둥병의 속성이나 병자들에 대한 규제사항, 병자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 그 병에서 치료받은 자들에게 적용되는 의식적인 대책에 대하여는 예수가 처음으로 문둥병자 한 사람을 고친 사례를 기록한 막 1:40~45 주석을 참조하라.
유대인들은 통상적으로 문둥병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겼다(소경으로 태어나는 원인도 그렇다고 여겼다. 참조 요 9:2). 그들은 고대 이교사상을 흡수했다(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 받았다라는 의미로 보는 문둥병 같은 어떤 증상들을 열거해 놓은 구바벨론어로 기록된 Archiv fu..r Orientforshung에 나와 있는 징조 문서를 참조하라). 그러므로 그들은 고통을 경감시키거나 치료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 격리 수용외에는 문둥병을 위한 치료법을 알지 못했다(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격리 수용이 표준적인 절차로 도처에서 계속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새로운 약품이 나옴으로 외래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반드시 격리 수용을 할 필요는 없어졌다).
멀리 서서. 율법이 요구한 대로. 그들은 대로에서라도 다른 사람에게 접근하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이 문둥병자들은 막 1:40~45에 언급된 법보다는 격리법을 지키는 데 더 주의를 기울였다.
13. 선생님이여. 헬라어 에피스타테스(epistate-s,).
문자적으로 “[다른 사람의] 위에 서 있는 사람.” 따라서 “감독관” 혹은 “관리자”를 뜻한다. 누가는 예수를 가리키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한 유일한 공관복음서 기자이다. 누가와 그 밖의 기자들이 자주 사용한 더 일반적인 단어는 디다스칼로스(didaskalos)인데 문자적 의미는 “선생”이다(참조 요 1:32 주석). 사실 베드로는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그들이 고용한 사람들이 경영하는 고기잡이 사업의 “감독” 즉 에피스타테스였다(참조 막 3:16 주석).
14. 너희 몸을 보이라. 모세의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이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적어도 구약에서 다른 피부병들이 문둥병(leprosy)이란 말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검사자들이 치료 가능성 있는 종류의 질병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질병에서 회복된 자들은 재검과 정결의식, 아마도 확인증을 받은 후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참조 레 14장).
제사장에게서 그런 증명서를 받음으로써, 문둥병자는 확실한 기적이 일어났다는 공적인 인정을 얻게 된다(참조 시대의 소망, 265). 그 사람 자신은 일어난 일에 대한 산 증인이 된다. 많은 제사장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이런 저런 증거들에 의하여 설득되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266). 부활 후에 많은 제사장들이 그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였다(참조 행 6:7).
문둥병자에게 법의 요구를 따르라고 한 예수의 가르침은 그가 모세의 법에 반대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그는 친히 “율법 아래”(참조 마 23:2, 3 주석; 갈 4:4)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서기관들이 모세의 법 주위에 세운 전통-하나님이 모세에게 준 문자와 정신을 다 무효케 만드는 전통-에는 강렬한 반대를 표현하였다(참조 마 15:3; 막 7:8, 9; 시대의 소망, 395~398). 문둥병자를 제사장들에게 보냄으로써, 그리스도는 전에 친히 모세에게 주었던 자신의 율법에 대한 인정을 그들과 백성들에게 보여 주고자 목적하신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함으로 그는 율법의 공식적 수호자들인 제사장들이 한 거짓 비난을 반증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그들 중에 마음이 정직한 자들은 예수가 모세의 법에 불충성한다는 비난이 거짓됨을 알고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는 데로 인도될 것이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265).
저희가 가다가. 치료는 믿음의 행위에 따른 조건부적인 것이었다. 치료는 그들이 예수 곁에 머무는 한 받을 수 없었고, 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나아갈 때에만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이 예수를 떠날 때까지는 문둥병이 낫지 않았다. 그들이 “깨끗하다”는 선언을 받게 될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기 전에 치료의 가시적인 증거를 기다렸다면 그들은 결코 고침을 받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실제로 고침을 받기 전에, 이미 고침을 받은 것처럼 믿음으로 행동하는 일이 그들에겐 필수적이었다. 믿음 가운데 주님께로 오지 않는 자들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기대할 필요가 없다(약 1:7; 참조 히 11:6). 순종 없이는 믿음도 없는바, “행함이 없는 믿음은…죽은 것”이기 때문이다(참조 약 2:17~20).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요구 사항대로 행동하지만, 믿음 없이는 순종이 불가능하고 무익하다. 그 둘은 상대 없이 홀로 존재할 수 없다(참조 약 2:17).
15. 그중에 하나가. 한 사람, 오직 한 사람이었다(참조 17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를 혐오스러운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었음을 깨달았을 때, “그중에 하나가” 먼저 해야 할 일, 곧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 사마리아인은 복음서 기록 가운데서 은혜에 감사하는 최고의 모범 인물로 나타난다.
16. 발 아래 엎드리어.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간구하거나 감사하는 전형적인 동방인의 자세이다(참조 에 3:2 주석).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다른 아홉 명은 저희가 아브라함의 자손들로서 고침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자기에게 갑자기, 예기치 않게 주어진 치료의 축복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하늘이 그에게 내려준 은사에 대하여 감사했다. 받은 축복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잊어버리는 자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하여 진정으로 감사하지 않는 자들은 그분을 완전히 잊어버릴 중대한 위험 가운데 있다(참조 롬 1:21, 22).
17.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좋은 것들에 대하여 감사하는지가 그분에게 중요하다는 증거가 여기에 있다. 그 아홉 명은 크게 감사해야만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 그들은 어떠한 감사도 표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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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1-10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그대의 믿음이 자라기를 바라면 그대는 믿음을 말하고,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행하여야 한다. 그대가 이같이 살아있는 믿음을 활용할 때 그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강한 남녀로 자라날 것이다(원고 1, 1889).
1, 2절에서 예수는 다른 사람을 죄로 이끄는 것은 죄라고 말한다. 3, 4절에서 다른 이들이 잘못하였을 때 그들을 용서하는 것은 제자들의 의무라고 지적한다. 5, 6절은 복음의 원칙들을 실천하는 데 필수적인 믿음을 다루며, 7~10절은 복음의 원리들을 설명해 주는 비유로 구성된다.
1. 예수께서…이르시되. [용서, 믿음, 봉사, 눅 17:1~10]. 다음 부분에 나오는 누가복음의 내용이 주어진 시간과 장소에 대하여는 언급된 것이 없다. 주제에 관한 한, 이전 장들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거의 없는 듯하다. 더욱이 이전에 말씀을 들었던 바리새인들(참조 16:14 주석)은, 17:1~19에서는 그곳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시금 이야기 속에 바리새인들이 소개되기(20절) 전에 여행 기록이 나오므로(참조 17:11), 16장과 17장 사이에는 시간과 장소의 변화가 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17장의 기록을 볼 때, 예수는 이 여행에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지대를 거쳐, 결국 요단강을 건너 다시 페래아로 온 것으로 보인다(참조 17:11 주석; 제9권, 136).
1~10절에서 주신 교훈의 다양한 내용 사이에 분명한 연계성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누가가 서로 다른 때에 하신 말씀의 요점을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매우 그럴듯하며, 누가가 이곳에서 기록한 내용들은 여행 중에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들의 요점일 수 있다. 동시에 서로 다른 부분들 사이에 깔려 있는 연계성을 찾을 수도 있으나, 실제적으로 사상의 통일이 존재하는가의 여부에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실족. 헬라어 스칸달라(skandala). 문자적으로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경우들” “올가미를 놓다”, “함정에 빠지게 하다”, “걸려 넘어지게 하다.” 올가미를 움직이는 데 사용하는 막대기를 의미하는 스칸달론(skandalon)에서 파생함(참조 롬 11:9; 14:13; 요일 2:10; 계 2:14).
실족케 하는 것.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또는 죄짓게 하는) 어떤 것들을 의미한다(참조 5:29 주석).
없을 수 없으나. 즉 실족케 하는 일들이 “필요하다” 혹은 “불가피하다.” “실족케 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위해서는 “필요”치 않으나 인간이 처한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것이다(참조 시대의 소망, 438; 눅 17:1).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즉 교훈과 모본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고 낙담시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
2. 이 작은 자 중 하나. 아마도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 있으므로 다른 제자들의 교만한 행동에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어떤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듯하다.
실족케 할진대. 헬라어 스칸달리조(skandalizo-). 문자적으로 “덫을 놓다”(참조 5:29 주석). 여기서 예수는 근본적으로 형제들의 불화를 조장하는 것들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넘어지게 할 수 있는 어떠한 일도 하지 말 라고 권고한다(고전 8:9~13).
연자 맷돌. 헬라어 뮐로스 오니코스(mulos onikos)는 문자적으로 “당나귀 맷돌”인데, 이는 맷돌이 너무 커서 당나귀가 그것을 돌려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손으로 돌리는 작은 맷돌에 관해서는 24:41 주석을 참조하라.
3. 조심하라. 3, 4절에 대해서는 마 18:15~22 주석을 참조하라. 남을 용서해 주지 않는 것은 그들을 무분별하게 만들어 죄에 빠지도록 하는 방편이 된다. 17:1, 2은 다른 이들에게 우리가 죄를 짓는 문제와 상관되는 것이고, 3, 4절은 남이 우리에게 잘못했을 때의 우리 태도와 상관된다. 우리는 남을 실족케 하지 말아야 하며, 동시에 그들이 우리를 실족하게 할 때 자비를 나타내야 한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문맥상 예수가 언급하는 과실이 같은 종류의 것임이 분명하지만, 본문상의 증거는 이 단어들의 생략을 선호한다.
4. 일곱 번. 어떤 사람들은 암 1:3을 잘못 해석하여, 유대 랍비들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횟수를 세 번으로 제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께서 항상 서기관들보다 더 넓은 의미로 율법을 해석한다는 사실(참조 마 5:17, 18 주석)을 충분히 깨달은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권장하실 인내의 한계를 알기 원한다. 일곱 번은 일반적으로 완전을 나타내는 숫자이다(참조 실물교훈, 243). 그러나 사람을 “일곱 번” 용서하고 그 이상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형식적인 용서가 될 것이다.
용서란, 하나님이나 인간 모두에게 단순한 사법적 행위 이상을 의미하며, 갈등이 있었던 곳에 평화의 회복을 의미한다(참조 롬 5:1). 또한 용서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 곧 죄를 지은 그 사람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포함된다.
5. 사도들. 누가가 의도적으로 열두 명을 “사도들”로, 예수를 항상 따라다니던 사람들을 “제자들”(참조 1절)로 구분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5, 6절은 믿음의 능력과 관계가 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문맥상 이 요청은 눅 17:1~4에 나타난 경우가 아닌 다른 때에 주어졌을 수도 있다(참조 1절 주석). “사도들”은 자기들이 어느 정도는 믿음을 가졌다고 느꼈으나, 그것으로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6. 믿음. 예수가 말하는 믿음의 소유는, 양이 아니라 질의 문제이다. 사람은 믿음을 갖든지 아니면 믿음이 없든지 둘 중 하나이다. 아주 적은 양의 믿음이라도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들을 이루기에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양이 아니라, 그 믿음의 진실성이다.
뽕나무. 헬라어 쉬카미노스(sukaminos). 검은 뽕나무. 어떤 사람들은 별개 뽕나무로 여기기도 하지만, 쉬카미노스는 흰 뽕나무의 이름 혹은 무화과나무(sycamore-fig tree)로 알려진 쉬코모레아(sukomorea)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쉬코모레아는 흔히 “무화과나무”(sycomore, 그러나 「개역한글판」에는 “뽕나무”로 되어 있음-역자 주)로 번역되었다(참조 암 7:14; 눅 19:4 주석). 하지만 이 나무를 우리가 알고 있는 무화과나무(sycamore)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바다에 심기우라. 예수가 의도적으로 터무니없어 보이는 예증을 택했을 가능성이 있다. 분명 그분은 자신의 제자들이 이러한 마술적인 묘기를 행하기를 의도하지 않았다. 이 예증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간다”는 예증과 흡사하다(참조 마 19:24 주석). 두 예증 다 문자적으로 이루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고, 따라서 예수도 제자들이 실제로 그런 시도를 해보기를 의도하지 않았다. 그의 이적들 중에도 이런 종류는 없었다.
7. 너희 중에. 이 짤막한 비유는 그 관계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5절에 기록된 요청에 대한 답으로써 말한 듯하다. 믿음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신들의 의무를 감당할 자질을 갖추게 한다(참조 10절 주석). 이 비유와 5절의 관계가 확실하지 않다면, 이 비유는 아마도 11절에 간략하게 언급된 여행의 어떤 시점에서 제자들에게 말한 것으로 보인다(참조 1절 주석).
밭을 갈거나. 아마도 그 주인의 집은 마을이나 읍내에 있었고, 그의 땅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것이다. 흔히 “종들”은 아침에 마을을 떠나 밭으로 일하러 가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참조 민 35:4; 룻 2:3; 3:4; 4:1 주석).
종. 헬라어 둘로스(doulos). “농노”(農奴) 또는 “노예.”
곧. 헬라어 유쎄오스(eutheo-s). “당장” 혹은 “즉시”(참조 막 1:10 주석). 옛날의 영어 관용 표현에서 “by and by”(곧)는 “즉시”를 의미했으나, 지금은 정반대의 의미가 되었다. 여기에서 유쎄오스는, 동사 “말하다”보다는 오히려 동사 “가다”를 수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인이 “곧 말하되”가 아니라, “곧 와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8. 하지 않겠느냐. 헬라어에 따르면, 이 질문에서는 긍정적인 답변이 기대된다. 부정적인 답변이 기대되는 17:9과 비교하라.
9. 사례하겠느냐. 헬라어에 따르면, 이 질문에 대하여 여기서는 부정적인 답변이 기대된다. 긍정적인 답변이 기대되는 17:8과 비교하라.
10.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즉 “우리는 특별한 칭찬을 받을 자격이 없나이다.” 주인은 그들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았을 뿐이므로, 더 이상 언급할 가치가 없었다. 그는 종들에게 특별한 감사를 나타내야겠다고 느낄 만큼의 유익을 얻지 못했다. 그들은 삯을 받는 자들이었으며, 그들이 기대해야 할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가 그들에게 특별히 빚진 것은 없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할 권리가 있었고,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 우리가 그분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때에라도 그로 인해 그가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의무를 갖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참고 고통을 당한 모든 것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없”(고전 9:16)다고 말할 때 그는 진정한 봉사의 정신을 반영한다. 바울의 봉사는 주님께 대한 깊은 의무감에 의하여 자극된 것이었다. 복음을 전하면서 그는,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고 하면서 무거운 책임을 이행하고 있었다.
| 항상 기도해야 하는 이유 - 누가복음 연구31 (3) | 2024.10.14 |
|---|---|
| 열 명의 문둥병자 - 누가복음 연구30 (7) | 2024.10.14 |
|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누가복음 연구28 (2) | 2024.10.14 |
| 불의한 청지기 - 누가복음 연구27 (4) | 2024.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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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6:19-31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은 저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이 비유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부자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난한 자를 대비하여 묘사한 것이다.”(실물교훈, 260)
부자와 거지의 뒤바뀐 운명을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는 중요한 구원의 조건을 가르치셨다.
운명은 눈에 보이는 선행이나 죄악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또, 아무도 비록 기적적인 방법으로 설명한다 하여도 그것이 구원을 가져다 주지도 않는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았는지, 말씀을 생애의 기준으로 삼고 살았는지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운명은 죽음 후에 돌이킬 수 없으며, 죽을 때의 모습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19. 한 부자. 그 당시에 제자들(16:1)과 “세리와 죄인들”(15:1) 또한 많은 군중이 참석해 있었지만, 특별히 이 비유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말한 것이 분명하다.
이 비유에서 예수는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참조 16:1~12)에서 제시한 교훈을 계속하고 있는데, 그것은 현세의 기회들을 선용함이 장래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 비유는 특별히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이었으나, 9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서 돌이켜 그곳에 참석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말했다. 그들에게는 빛이 충분히 있었고, 그들은 오랫동안 “율법과 선지자”의 교훈을 향유했고, 요한의 봉사 이래로 첨가된 복음의 빛은 그들의 것이었다(참조 16절 주석). 그때에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현세에서의 특권과 기회들의 선용 여부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주어졌다(참조 실물교훈, 260). 첫 번째로 “한 부자”는 이생의 기회들을 남용하는 모든 사람을 나타내는데, 총괄적인 의미에서, 그 부자처럼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있던 유대민족을 가리킨다(참조 실물교훈, 267). 이 비유는 두 가지 장면으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이생을 나타내고(19~22절), 다른 하나는 내세를 나타낸다(23~31절).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는 긍정적인 관점, 곧 미래를 위하여 준비한 사람의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한다. 동일한 문제에 대하여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부정적인 관점, 즉 그러한 준비에 실패한 사람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 부자는 구원이 성품보다는 오히려 아브라함의 후손 됨에 달렸다고 생각함으로써 잘못을 범하였다. 가장 중요한 해석 원칙 가운데 하나는, 상징적인 표현과 이야기일 경우 언급된 진리에 관한 성경의 문자적 진술에 의해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비유가, 직접적인 문맥이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일반적인 대의와는 모순되는 내용을 가르친다고 해석하려는 사람들조차도 이 비유의 세목들 중 많은 부분이 상징적임을 인정한다(참조 22~26절 주석).
그러므로 이렇게 자문해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왜 예수는 비유 가운데서, 성경 다른 곳에서나 특히 그의 실제적인 진술들 가운데서 분명하게 드러낸 것처럼, 진리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 상징적인 예화를 사용해야 했을까?” 그 답은, 예수가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중 가운데 다수는-그렇게 믿을 만한 구약상의 아무런 근거도 없이-죽음과 부활 사이의 존재에게 의식적인 상태가 주어진다는 가르침을 믿고 있었다(참조 실물교훈, 263). 구약에 나타나지 않는 이런 그릇된 신조가 출애굽 이후의 유대인 문서에 전반적으로 침투되었고, 여러 가지 다른 전통적인 신조들처럼 예수 당시 유대교 가르침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다(참조 막 7:7~13 주석). 이 비유에서, 예수는 청중들의 마음에 심어주고자 하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아주 분명하게 가르치기 위해 대중들의 신념을 사용한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앞에 나오는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에서(16:1~12), 비록 부정직한 청지기의 행위가 그 이야기의 주요 부분을 구성하고 있을지라도, 예수는 그 행위에 대하여 칭찬이나 시인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참조 8절 주석).
자색. 헬라어 포르퓌라(porphura). “자색 천” 혹은 “자주 빛 천으로 만든 옷.” 여기서는 아마도 값비싼 겉옷인 “소매 없는 외투” 즉 “망토”(헬라어 히마티온[himation]; 참조 마 5:40 주석)로, 왕의 색인 자주색으로 물들인 옷을 가리키는 것 같다. 자색은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20. 나사로. 헬라어 라자로스(Lazaros).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의미의 흔한 히브리 이름인 엘라자르(’El‘azar)에서 유래함(참조 출 6:33 주석). 이름은 비유 가운데서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영적 상태에 가장 적합한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가 비유에 나오는 인물에게 이름을 붙인 유일한 기록인데, 이 경우에는 비유에 대화가 나타나기 때문에 취한 불가피한 절차였다(참조 16:23~31). 비록 몇 주일 후에 예수가 실제로 베다니의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켰을지라도(참조 요 11:1~46), 비유 속의 인물과 예수의 가장 위대한 이적의 대상이 된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대문에 누워. 부자에게는 나사로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는 기회가 계속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부자는 실제로 그 불쌍한 나사로를 학대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는 나사로가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결론지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의 태도는,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라고 말할 때에 가인이 나타낸 태도와 흡사했다. 나사로와 그의 관계는 악행을 가한 사이가 아니라, 오히려 자비를 베풀지 않은 관계였다. 그는 자기 삶의 책임에 대하여 적극적인 태도가 아닌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는 동료 인간들을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율법의 “둘째”로 큰 계명의 진정한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다(참조 마 5:43; 22:39; 25:35~44 주석). 유대 민족처럼 이 부자는 적극적인 선을 행하지 않음으로써 적극적인 해를 입힌 죄를 지은 셈이었다. 하늘이 그에게 부여한 모든 혜택은 그 자신의 쾌락과 만족을 위해서만 사용되고 있었다(참조 실물교훈, 291).
21. 배불리려 하매. 그가 문 앞에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극심한 필요 가운데 있었고, 부자는 그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었다. 이야기 가운데는 나사로가 자기의 가난과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했다고 암시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 분명히 그는 욥처럼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모든 것을 참아냈다.
헌데를 핥더라. 이것이 그의 고통을 완화시켜 주었는지 아니면 더해 주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후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 만일 그렇다면 가난한 환자에게 이것은 극심한 고통이었다. 분명히 그는 이 반(半)야생적인 청소부 동물들이 자기 헌데를 핥지 못하도록 막을 수가 없었다(참조 마 7:6; 14:26 주석).
22. 천사들에게 받들려. 마 24:31과 비교하라. 16:25~31을 해석할 때 지침이 되는 원칙은 19절 주석을 참조하라. 이 비유의 목적은 현세의 기회들을 선용한 여부와 내세의 보상을 비교해 보기 위함임을 기억해야 한다. 운명은 죽을 때에 확정되기 때문에 내세에서 특권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현세에서 그것들을 선용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품. “낙원”을 의미하는 전형적인 유대 관용어. 탈무드(K.iddushim 72a; in Soncino ed., 369)는 복받은 죽은 자의 거처를 “아브라함의 무릎”이라고 말한다. 다른 경우에 예수는 낙원을, “많은 사람이” “동서로부터…이르러” “천국”의 잔치에 “아브라함과…함께” 앉는 장소라고 말했다(참조 마 8:11; 눅 14:15 주석).
예수가 “아버지의 품에” 있다는 말에 대하여는, 요 1:18 주석을 참조하라. 만찬 때 남의 “품에 기대”어 쉬는 것에 대하여는 요 13:23 주석을 참조하라.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며(참조 요 8:39, 56), 실제로 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 대신에 아브라함을 바라보게 되었다(참조 눅 16:24 주석). 오늘날 때때로 베드로가 천국 문에서 기독교인들을 환영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듯이, 그들은 아브라함이 낙원에서 그의 자녀들을 환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23. 음부. 헬라어 하데스(hade-s). “무덤” 또는 “죽음”(참조 마 11:23 주석). 하데스는 선하든 악하든 모든 사람이 부활 때까지 거하는 곳이다. 나사로도 실제로는 그곳에 있을 것이다.
고통. 헬라어 바사노이(basanoi). 질병(마 8:6)이나 바다의 풍랑에 밀려(마 14:24) 극심하게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그리고 “괴로이” 노 젓는 제자들(막 6:48)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동사 바사니조(basanizo-)와 동계어이다. 그것은 또한 정서적인 고통(벧후 2:8)과 귀신들이 예수와 대면했을 때 두려움으로 “괴로워”한 것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마 8:29; 막 5:7; 눅 8:28). 그러므로 바사노스(basanos, 바사노이의 단수형)는 심한 고통이나 불안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죽어서 “고통”을 당하는 장소로 가게 된다는 사상은,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전 9:5; 참조 시 146:4 주석)라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성경 말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예수도 친히 죽음을 잠에 비교했다(참조 요 11:11, 14). 이 비유에서, 예수가 사망 시에 악인들이 “고통”을 당하게 될 곳으로 데려감을 받는다고 가르쳤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그분이 다른 경우에 이 문제에 대하여 명백하게 가르친 것들이나 전반적인 성경의 가르침들과 모순된다. 죄인들이 불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곳은 게엔나 곧 “지옥”(geenna, 참조 마 5:22 주석)이지 하데스(hade-s)가 아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하데스의 “불꽃 가운데서 고민”(16:24)하는 것처럼 예수가 말한 것은 상징이므로 그의 말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비유들을 설명할 때 포함되어야 하는 해석의 원칙은 19절 주석을 참조하라.
아브라함과…보고. 천국과 지옥이 서로 말할 수 있는 거리 안에 있어서 천국에 있는 자들이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도 그들의 고통을 경감시켜 줄 수 없고, 지옥에 있는 자들은 하늘에 있는 의인들의 복락을 바라본다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만일 이 비유를 실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틀림없이 그런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참조 19절 주석). 그러나 그것이 실제적인 것이라고 믿는 자들도 “아브라함의 품”은 단지 상징적 표현이며, 모든 성도가 실제로 그의 “품”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서둘러 부언할 것이다. 또한 그들은 여기에서 묘사된 하늘과 지옥 사이의 거리도 순전히 상징적인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 비유의 이 부분이나 저 부분이 분명히 상징적인 것이요 글자 그대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인정하는 순간, 그들은 전체적인 비유의 상징적인 성격을 인정하는 셈이다. 만일 그들이 그 비유 전체가 상징적인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떤 부분은 상징적인 것으로 보아야 하고, 다른 부분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는 그들의 결정은, 분명하게 정의된 한결같은 해석 원칙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들의 독단적인 선택의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24. 그 손가락 끝. 이 비유 가운데서 몸을 떠난 불멸의 영혼들에 관한 거짓 교리를 지지하는 내용을 찾고자 하는 자들은 오히려 여기에서 당황하게 하는 내용을 보게 된다. 몸을 떠난 영혼들도 “손가락”을 가지고 있다니! 나사로의 몸은 무덤에 있었으므로 그의 손가락도 무덤 속에 있었을 것이다. 육체를 떠난 한 영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손가락을 취하여 그것을 물에 담근 다음, 육체를 떠난 다른 영의 존재하지도 않는 혀에 댄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분명히, 예수는 현세와 내세 사이의 상관성에 관한 어떤 특별한 진리를 밝혀 주기 위하여 구상된 상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참조 19절 주석), 그의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의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 음부 가운데서 상징적으로 고통당하고 있던 부자에게,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경감시켜 주는 대책이 은혜롭게도 수용되었던가? 이제 부자는 예전에 나사로가 자기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음식을 갈구했던 것처럼 깨끗하고 시원한 물 한 방울을 바란다(참조 21절 주석). 만일 부자가 “눈”(23절)과 “혀”(24절)를 가지고 있었고, 나사로도 “손가락”(24절)이 있었다면, 선인이나 악인이 죽을 때에 즉시 지체를 가진 실제적인 존재로서 그들의 보상을 받기 위해 간다는 가르침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비유 자체가 분명히 알려 주는 것은 그들은 죽자마자 저희의 보상을 받으러 가지 않았는데, 그들의 몸은 무덤에 있었고, 거기엔 불과 같은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참조 22절 주석).
25. 받았고. 그는 일생 동안 누구든지 소원할 만한 좋은 것들을 받았지만, 장래의 삶을 위한 준비는 하지 않았다. 그는 마 6:33의 원리를 반대로 적용하여-먼저 “이 모든 것”을 구했으며, 나중에 하나님이 하늘을 더해 줄 모종의 방법을 찾게 되길 희망했다. 어리석은 부자의 경험(참조 12:16~21 주석)이나, 하늘에 보화를 쌓는 문제에 관한 예수의 교훈(참조 마 6:19~21 주석)과 비교해 보라. 부자는 얻고자 하는 보상을 모두 받았다(참조 마 6:2 주석). 하늘에 있는 계정은 그가 도덕적으로 파산 상태임을 보여 주었다. 그가 벌을 받은 것은 재물을 소유했기 때문이 아니라(참조 19절 주석), 그것을 오용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지적돼야 한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이나 동료 인간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는 대신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탕진했다(참조 마 19:21, 22; 25:25~30). 부하게 되는 것은 죄가 아닌데, 그 이유는 아브라함도 매우 부유했기 때문이다(참조 창 13:2). 이 비유 속의 부자는 단순히 그가 자기 재화를 사용한 방법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로 했다.
30.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부자는 자기가 아브라함보다 더 잘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아브라함의 결정에 대하여 항의한다. 분명히 그는 구약의 확신할 만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고, 그의 다섯 형제도 그럴 것이라고 의심한다. 오늘날 구약의 엄숙한 기별을 경솔하게 저버리는 자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가까이 했을지라도 그것에 의하여 유익을 받지 못했던 이 비유 속의 부자의 운명을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즉 죽은 자 가운데서 그들에게 가는 이가 있으면. 19절 주석에서 설명한 대로, 부자는 품성 형성과 동료 인간들에게 선을 행하기 위하여 현세가 제공하는 기회들을 활용하지 못한 사람들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로서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유대 나라를 가리킨다.
추가적인 증거를 요구한 점에서, 그 부자는 거듭거듭 “표적”을 요구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그리고 하는 일들은 진실한 동기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그의 신성을 확신시켜 주는 증거를 이루었다(참조 마 15:21; 16:1 주석). 그러나 예수가 그들에게 준 증거는 그들이 원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31. 듣지 아니하면. 참조 30절 주석.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영원한 진리의 분명한 진술에 의하여 감명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가장 큰 이적에 의해서도 더 나은 감동을 받지 못할 것이었다. 이 비유를 말한 지 몇 주일 후에 예수는 이제까지 그들이 보았던 것보다 더 큰 증거를 요구하는 유대 지도자들의 도전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나사로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를 죽음에서 부활시켰다. 그러나 바로 그 이적은 그 나라의 지도자들이 예수의 생명을 빼앗기 위해 음모를 강화하도록 이끌었다(참조 요 11:47~54 주석).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기들의 지지받을 수 없는 입장을 지키기 위하여 나사로를 없애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느꼈다(참조 요 12:9, 10; 시대의 소망, 588).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구약을 거부하는 자들은 “더 큰” 빛, 심지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의 증언이라도 거부하리라고 한 예수의 말씀의 진실성을 글자 그대로 입증했다.
비록…살아나는 자. 몇 주 후에 주님은 마치 이 비유 가운데서 부자가 요청한 내용을 당신을 헐뜯고자 하는 비평가들에게 성취시켜 보여 주려는 듯이 죽음에서 나사로를 일으켰다(참조 요 11:1 주석). 그러나 예수가 “아버지 아브라함”을 통해 부자에게 경고한 것처럼,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여전히 믿기를 거부했다. 실제로 그 이적은 그들로 하여금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단호하게 그를 죽일 음모를 꾸미도록 자극했다(요 11:47~54).
| 열 명의 문둥병자 - 누가복음 연구30 (7) | 2024.10.14 |
|---|---|
| 용서, 믿음, 봉사 - 누가복음 연구29 (0) | 2024.10.14 |
| 불의한 청지기 - 누가복음 연구27 (4) | 2024.10.14 |
| 세 번째 비유 - 누가복음 연구 26 (0) | 2024.10.11 |
| 잃은자를 찾음 - 누가복음 연구25 (2) | 2024.10.03 |
누가복음 16:1-13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세상 이욕에 밝은 주인은 자기를 속여 빼앗은 자의 꾀를 칭찬했다. 그러나 이 부자의 칭찬은 곧 하나님께서 하시는 칭찬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일반 대중이 잘 알고 있는 실례를 들어서 당신이 가르치고자 하시는 교훈을 설명하셨다. 그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해 줌으로써 그들 자신이 이롭게 될 수 있었다. 현세에서 하나님의 선물을 나누어 줌으로써만 그들은 영원을 위해 준비될 수 있었다.(실물, 367)
이 비유는 미래의 삶을 내다보는 관점에서 현재의 기회들을 이용하는 일을 다루고 있는데, 특히 현세에서 물질을 사용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 청지기를 “불의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천국을 구하는 사람들은, 비록 궁색한 방법이라고 하더라도, 은혜 안에서 성장하기 위한 모든 기회를 이용하는데 있어서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강구하는 데 주저해서는 안 된다(마 5:29,30참조).
1. 어떤 부자. 페래아 봉사에 관한 기록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이 비유도 누가 혼자서만 기록한다(참조 마 19:1, 2; 눅 9:51 주석). 이 장의 첫 번째 비유는 분명히 제자들에게 말한 것으로 지혜로운 청지기 직분에 꼭 필요한 원칙, 곧 현세의 기회들을 사려 깊고 근면하게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설명해 준다.
첫 번째 비유에서 예수는 사람들에게 생각을 현세의 사물에서 영원한 사물로 돌리라고 요청한다(실물교훈, 366). 세리들 중에는 얼마 전에 이와 비슷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었는데(실물교훈, 368), 청중 가운데 있던 세리들은 예수의 예화를 들으면서 특별한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주석가들은 이 비유를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여기는데, 그것은 특히 이야기에 나오는 부정직한 청지기에게 칭찬이 주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참조 8절). 이러한 어려움은 비유의 모든 세부적인 사항에까지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서, 예를 들자면 “부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생각과 같다. 그러나 이 비유를 우화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비유를 해석할 때 기본 원칙은, 모든 세부 사항에서 어떤 특별한 의미를 찾고자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한 특정한 진리, 곧 그가 8~14절에서 지적하는 진리를 예증하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했다.
허비한다. 헬라어에 의하면, 그 청지기는 그때까지도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조직적으로 주인의 소유를 도적질하고 있다는 고소를 당하였으며(참조 실물교훈 336, 337,), 그가 청지기 직분에 대하여 셈을 할 기회를 갖기 전에(2절) 해고될 수 있을 만큼 그 고소는 충분한 물적 증거가 드러난 것처럼 보였다. 청지기의 약삭빠름(4~8절)은 그가 자기의 이익을 돌봐야 할 때 아주 영리하게 행하였음을 암시해 주긴 하지만, 그 “허비”는 어느 정도 그의 무능함과 게으름 때문에 생긴 것일 수도 있다.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분명히 그 청지기는 죄가 있었고, 자신의 결백함을 드러낼 수 없음을 알았다. 그가 청지기 직분을 정직하게 이행했다면 고발당했을 때 그가 행한 것과 같은 약삭빠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꾀로 살아왔고 이제 자신을 위한 안락한 삶을 계속할 수 있는 더 영리한 계획을 꾸몄다. 그 청지기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에 불확실한 미래를 위하여 준비하는 수단으로서 자기의 현재의 권위 있는 지위를 이용할 것이었다.
5. 낱낱이 불러다가. 혹은 “그의 주인의 채무자들을 하나씩 불러”(「개정표준역」).
그 청지기는 자기의 계획을 조직적이고도 부지런하게 수행하였다. 만일 그가 자신의 이익을 촉진하기 위하여 행하였던 근면함과 노련함을 자기 주인의 이익을 촉진하기 위하여 사용했다면 그는 실패자가 아닌 성공자가 되었을 것이다. 보디발 집안의 한 종으로서, 요셉은 그러한 품성의 특성들을 나타냈고, 따라서 주인에게 귀히 여김을 받았다(참조 창 39:1~6). 주인의 이익을 자신의 것처럼 증진시킴으로써 요셉은 보디발 가문의 청지기로 승진하였다.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그 청지기는 무능력하거나 게을렀기 때문에 이전 거래에 대하여 불완전한 기록을 가졌든지, 아니면 전혀 기록을 갖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 주인의 상품을 구입한 자들과 쉽게 공모하여 주인을 속이고, 주인의 돈을 가로채 자기와 구매자들이 이익을 챙기도록 할 수 있었을 것이다.
6. 말. 헬라어 바토이(batoi). 약 10.4갤런 즉 39.4리터에 해당하는 용적. 히브리어 바트(bat)에서 유래함. 그러므로 100“말”은 대략 1,040갤런(39.4헥토리터)으로 퍽 많은 부채이다.
7. 석. 히브리어 코르(kor)에서 유래한 헬라어 코로이(koroi). 코로이는 14.92부셜 즉 525리터에 해당하며, 코르와는 용적이 다르다. 그러므로 100“석”은 또 다른 큰 빚으로서 1,492부셜 즉 525헥토리터이다.
8. 주인이…칭찬하였으니.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이 말은 누가가 부가한 편집자 주(註)가 아니라 예수의 비유의 일부였다. 그러므로 칭찬의 말을 한 사람은 1절에 나오는 “부자”이다. 예수가 자기 주인을 속이고자 하는 부정직한 청지기의 계획에 대하여 부적당한 칭찬을 하였다는 생각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다(참조 실물교훈, 367). 이 청지기에 대한 예수의 평가는 “불의한 청지기”라는 말 속에 드러난다. 하지만 이 칭찬이 비유의 절정을 이루기 때문에 예수는 청지기에 대한 그 부자의 칭찬 가운데서 제자들과 듣고 있던 청중들에게 교훈이 될 유용한 가르침을 찾은 것이 분명하다. 그 이야기 자체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밝혀준다.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이것은 자기 이익의 관점에서 장래에 자기에게 빚을 갚아야 할 일단의 친구들을 만듦으로써 그렇게 했다는 뜻이다. “지혜롭게”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니모스(phronimo-s)인데, 이 단어는 형용사 형태인 프로니모스(phronimos)와 함께 “마음”을 뜻하는 프렌(phre-n)에서 파생했다(참조 마 7:24; 10:16). 청지기는 “머리를 썼다.” 그는 자신의 장래를 위하여 영리하고 약삭빠르게 계획함으로써 통찰력을 발휘했다. 근본적으로 그의 “지혜”나 “예리함”은 지속되는 현재의 기회를 끈기 있게 사용한 데에 있었다. 만일 청지기가 자기 주인의 채무자들과 마지막 결정을 하면서 이전에 사업을 수행할 때처럼 꾸물거렸다면, 그는 자기의 간사한 계획을 성공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빛의 아들들. 예수도 “하나님의 아들”(마 5:9; 눅 20:36; 요 11:52), “천국의 아들들”(마 8:12; 13:38), “너희 아버지의 아들”(마 5:45)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들은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하늘나라를 저희 삶의 우선으로 삼는 자들을 가리켰다(참조 마 6:33 주석).
더 지혜로움이니라. 오로지 이생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당신을 섬기기로 택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것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준비하는 것보다도, 세상이 주는 것을 추구하는 데 더 큰 열심을 나타내곤 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동료들을 섬길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보다도, 어떻게 우리 자신을 섬길 수 있는지에 대하여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약점이다(참조 실물교훈, 370). 그리스도인은 “열심”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이 좋지만 그의 열성은 “지식을 좇는” 것이어야 한다(롬 10:2). 그는 구별되는 자가 되기 위하여 가치에 대한 올바른 감각이 있어야 한다(참조 마 6:23~34 주석).
9. 친구를 사귀라. 여기에서 예수는, 유대민족의 지도자로서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선민들에게 부여한 진리와 축복의 청지기들인, 그 자리에 참석한(참조 14절) 바리새인들(참조 실물교훈, 369)에게 말했다. 하늘의 청지기인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늘이 그들에게 위탁한 “재물”을 낭비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머지않아 그들의 청지기 직분을 “셈하라”는 부름을 받게 될 것이었다.
예수는 하늘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암시하지 않는다. 그가 주목을 끌고자 하는 진리는, 우리의 영원한 복리를 위해서 현재의 기회들을 선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이생에서 우리의 수중에 들어오는 물질적인 소유의 청지기에 불과하며 하나님이 그것들을 우리에게 위탁한 것은 충성스러운 청지기 직분의 원리들을 배우도록 하기 위함이다. 현세에서 우리가 소유하는 모든 것은 실제적으로 “남의 것” 즉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의 “것”이 아니다(눅 16:12; 참조 고전 6:19). 우리는 우리에게 위탁된 물질들을 동료 인간들의 필요(참조 잠 19:17; 마 19:21; 25:31~46; 눅 12:33)와 복음의 전진(참조 고전 9:13; 고후 9:6, 7)을 위하여 사용함으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익을 증진시켜야 한다.
없어질 때에. 본문상의 증거는 “그것이 없어질 때”(when it fails)라는 독법을 지지한다(「개역한글판」에는 “네가” 혹은 “그것이”라는 주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제임스왕역」에는 “네가 없어질 때”[when ye fail]로 되어 있음-역자 주). “네가 없어질 때”라는 번역은 “네가 죽을 때”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번역이 요구하는 것처럼, 사람이 죽을 때에 영원한 거처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재림 시에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가르친다(참조 요 14:3). “그것이 없어질 때”란 “돈[불의의 재물]이 없어질 때”를 의미한다. 청지기는 수입원이 끊겼을 때(16:3) 비로소 미래를 생각했다(4절). 이 비유가 강조하는 바는, 청지기가 그 직분을 이해하지 못했다거나 그의 죽음이 아니고, 개인적인 수입의 손실 문제를 해결하는 그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문맥과 취지는 “그것이 없어질 때”로 이해하기를 요구한다. “그것”의 선행사는 “돈”이고, “그들”의 선행사는 “친구들”이다.
10. 지극히 작은 것. 이 말에는 재물(또는 부)은 “지극히 작은 것” 혹은 “작은 것”이라는 뜻이 내포돼 있다. 다시 한 번, 예수는 청지기의 부정직함을 칭찬하지 않았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참조 8절 주석). 제자들이나 청중 가운데 어떤 이들이 이 비유를 다소간 부정직함에 대한 구실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는 여기에서 분명하게 자기의 제자가 되려는 모든 사람이 철저한 정직성과 근면함의 특징을 가져야 한다는 심오한 진리를 언급한다. 미드라쉬(Rabbah, 출 3:1, Soncino ed., 49)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람을 작은 일로 시험해 보기까지는 큰 것을 주지 않으며, 시험해 본 다음에야 큰 일을 맡긴다고 하였다. 그 다음에, 미드라쉬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한 것으로 추정되는 말씀을 예로 들어 기록한다. “네가 네 양을 돌보는 일에 신임할 만하였으니 와서 나의 양을 돌보라.”
11. 참된 것. 즉 영적인 “부요함”(참조 약 2:5).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는 그리스도의 권고와 비교하라. 페래아 봉사 조금 전에 예수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12:21)한 대신 자신들을 위하여 보화를 쌓는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12. 남의 것. 이생에서 한 사람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들 가운데 하나는, 그가 소유하게 되는 모든 돈과 물질이 자기의 지혜와 솜씨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빌렸다는 사실이다. 여호와는 엄숙하게 이 치명적인 기만에 대하여 경고했고 “재물 얻을 능”을 사람들에게 주신 분이 하나님임을 상기시켰다(참조 신 8:18 주석).
이러한 원리에 관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교훈들에서 유익을 얻지 못한 것이 한 국가로서 이스라엘이 실패하게 된 큰 원인이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 그분의 자비에서 오는 생애의 좋은 것들을 감사하지 않을 때, 그들은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또한 그들의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롬 1:21)진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청지기일 따름이다.
너희의 것. 여기에서 예수는 영생과 그것에 수반되는 축복이나 기쁨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언급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롬 8:17)이다.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보좌에 앉을 때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는 은혜로운 초청을 모든 신실한 자들에게 할 것이다(마 25:34).
13. 집 하인이…없나니. 참조 마 6:24 주석. “하인”이란 이 단어를 제외하고는 여기에서 한 예수의 말은 마 6:24의 내용과 동일하다. 그러나 이 단어는 비유에서의 “하인”, 곧 청지기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이 문맥에는 적합하다. 예수의 이전 가르침 중 많은 부분이 페래아 봉사 기간에 반복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시대의 소망, 488). 많은 비평가가 주장하는 것처럼 누가와 마태가 그들의 복음서 내용 가운데 잘못된 위치에 이 말씀을 삽입했다고 추정할 명확한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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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 특창 (0) | 2024.08.03 |
| 경배와 찬양 | 다같이 |
| 찬 미 | 82장 |
| 시작기도 | 기도자 |
| 환 영 | 안교장 |
| 특별순서 | |
| 교과공부 | 각 반 |
| 헌금소개 | 사회자 |
| 축 도 | 담임목사 |
| 기억절 4기 2과 (일몰 : 5시 59분) |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으냐''(요한복음 11:25,26). |
| 10월 시무 안내 |
| 시 무 : 임영빈 헌금봉사 : 박다정 이한얼 |
다음 주 예배순서
| 금요일예배 | 안식일예배 | ||||
| 날짜 | 기도 | 말씀 | 날짜 | 기도 | 말씀 |
| 4 | 최하린 | 소그룹 | 5 | 윤주형 | 권세진 |
| 11 | 김정현 | 소그룹 | 12 | 차민지 | 김주혁 |
| 18 | 김진겸 | 소그룹 | 19 | 김우진 | 김형준 |
| 25 | 성만찬 | 26 | 이상훈 | 권세진 | |
| 경배와찬양 | 다함께 |
| 등단 / 묵도 | 다함께 |
| 송 영 | 2장 |
| 기 원 | 설교자 |
| 찬 미 | 31장 |
| 대 표 기 도 | 차민지 청년 |
| 특 별 찬 양 | 기악 특창 |
| 설 교 | 김주혁 목사 |
| 찬 미 | 187장 |
| 개 인 기 도 | 다함께 |
| 헌 금 | 다함께 |
| 축 도 | 설교자 |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이사야 42:9)
"하늘의 위대한 사령관이신 예수님은 하늘 궁정을 버리고 저주로 마비되고 훼손된 세상에 오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인성의 팔로는 인류를 두르시고 당신의 신성의 팔로는 전능하신 분을 붙잡으시므로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과 연결되도록 하기 위하여 스스로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다." (마가복음 교과, 17)
"율법은 하나님의 위대한 도덕적 거울이다. 그는 자신의 말, 자신의 정신,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의 말씀과 배교해 보아야 한다."(목사에게 보내는 기별, 124-125)
◆ 경희, 고려대 캠퍼스 모임

◆ 과학기술, 광운대 캠퍼스 모임

◆ 화랑 캠퍼스 모임

주중 모임 안내
| 경희 중앙 캠퍼스 모임 | 수요일 오후 6:30 교회 |
| 화랑 캠퍼스 모임 | 목요일 오후 6:00 삼육대 |
| 졸업생 소그룹 | 화요일 오후 8:00 교회 |
| 장년 소그룹 | 화요일 오후 8:30 ZOOM |
담임목사 권세진 부목사 김주혁 전도사 박창혁
수석장로 임동국 서기 문호준 전현주 재무 권욱민
선교회장 윤민식 액트회장 윤애리
헌금계좌 : 하나은행 144-890014-45304
(ACT교회)
주소 :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로1길 11
어린이청소년비전센터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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