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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와 찬양 | 다같이 |
찬 미 | 82장 |
시작기도 | 기도자 |
환 영 | 안교장 |
특별순서 | |
교과공부 | 각 반 |
헌금소개 | 사회자 |
축 도 | 담임목사 |
기억절 4기 1과 (일몰 : 6시 9분) |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20:30-31). |
10월 시무 안내 |
시 무 : 임영빈 헌금봉사 : 박다정 이한얼 |
다음 주 예배순서
금요일예배 | 안식일예배 | ||||
날짜 | 기도 | 말씀 | 날짜 | 기도 | 말씀 |
4 | 권하린 | 소그룹 | 5 | 윤주형 | 권세진 |
11 | 김정현 | 소그룹 | 12 | 이상훈 | 김주혁 |
18 | 김진겸 | 소그룹 | 19 | 김우진 | 김형준 |
25 | 성만찬 | 26 | 차민지 | 권세진 |
경배와찬양 | 다함께 |
등단 / 묵도 | 다함께 |
송 영 | 2장 |
기 원 | 설교자 |
찬 미 | 29장 |
대 표 기 도 | 윤주형 청년 |
특 별 찬 양 | |
설 교 | 권세진 목사 |
찬 미 | 117장 |
개 인 기 도 | 다함께 |
헌 금 | 다함께 |
축 도 | 설교자 |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이사야 42:9)
"하늘의 위대한 사령관이신 예수님은 하늘 궁정을 버리고 저주로 마비되고 훼손된 세상에 오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인성의 팔로는 인류를 두르시고 당신의 신성의 팔로는 전능하신 분을 붙잡으시므로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과 연결되도록 하기 위하여 스스로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다." (마가복음 교과, 17)
"율법은 하나님의 위대한 도덕적 거울이다. 그는 자신의 말, 자신의 정신,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의 말씀과 배교해 보아야 한다."(목사에게 보내는 기별, 124-125)
◆ 경희, 고려대 캠퍼스 모임
◆ 과학기술, 광운대 캠퍼스 모임
◆ 화랑 캠퍼스 모임
주중 모임 안내
경희 중앙 캠퍼스 모임 | 수요일 오후 6:30 교회 |
화랑 캠퍼스 모임 | 목요일 오후 6:00 삼육대 |
졸업생 소그룹 | 화요일 오후 8:00 교회 |
장년 소그룹 | 화요일 오후 8:30 ZOOM |
담임목사 권세진 부목사 김주혁 전도사 박창혁
수석장로 임동국 서기 문호준 전현주 재무 권욱민
선교회장 윤민식 액트회장 윤애리
헌금계좌 : 하나은행 144-890014-45304
(ACT교회)
주소 :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로1길 11
어린이청소년비전센터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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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다시 읽기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징은 한마디로 피상성(皮相性)이다. 디지털로 이미지화한 가공된 현실의 세계 안에 사로잡혀, 진상이나 진리, 이상이나 의미 같은 것은 관심 밖이다. “텍스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외쳐대며 피상성 자체를 예찬하기까지 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 시대의 사람들은 참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과학적으로 실증될 수 있다고 떠벌리며,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인 것을,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눈앞에 이미지화한 것을, 입증되지 않은 것보다는 실험실에서 증명된 것을 추구한다. 다시 말해서 형이상학적 관념이나 이상적 이데아보다는 피부로 느껴지고 내 존재 속에서 꿈틀거리는 어떤 것을 원한다. 옛날에 그리스 철학자들이 운운하던 로고스(logos) 같은 개념과는 동떨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로고스는 서구 사상에서 “우주의 질서를 지배하는 어떤 원리나 보편적 이성” 등으로 이해되어왔다. 로고스는 감각적인 것보다는 이지적인 것,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것, 다시 말해서 시간적 및 공간적 실재보다는 영원한 불변의 진리 같은 것이며, 다양한 외피(外皮) 안에 내재(內在)하는 불변·동일의 본질을 말한다.
괴테의 수작 <파우스트>를 보면, 지식과 학문의 표상인 노학자(老學者) 파우스트는 요한복음의 번역에 착수하여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1:1)라는 첫 구절부터 “로고스”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할지를 놓고 마음을 끓인다. 그는 로고스라는 뜻깊은 단어를 처음엔 “의지”(will)라고 번역했다가 맘에 들지 않아, 다시 “힘”(power)이라고 개역했다. 그러나 세계를 존재케 한 더 근원적인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결국 로고스를 “행동”(action)이라고 번역했다. 함석헌 선생은 이 로고스를 “생각”이라고 번역했고, 우리말과 중국어 성경은 각각 “말씀” 과 “도(道)”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말하는 로고스는 이런 개념을 모두 포괄한다. 누군가 말했듯이, 로고스라는 우주적 원리 곧 참된 “도”가 머리로 들어오면 그것은 생각 또는 사상이 되고, 말로 나오면 언어가 되고, 그것이 말대로 실행되면 행동이 된다. 이것이 바로 “말씀”에 해당하는 구약의 히브리어 단어 다바르에 내포된 뜻이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기록한, 고도로 헬라화한 도시 에베소에서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나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아니라 이런 우주적인 로고스(“말씀”)로 제시한다. 요한복음에서 그가 말하는 이 로고스는 신이 인간으로 육화되었다는 성육신 교리를 심오하고도 장엄하게 펼쳐 보인다. 이 교리는 영원하신 분이 시간 속으로, 불멸의 신이 후패하는 인간의 육신 속으로, 창조의 말씀이 피조물의 영역으로 내려오시는 사건(1:1; 1:14), 곧 기독교의 시간성과 역사성과 현존성을 어떤 종교보다도 더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육신이 되신 이 로고스가 이 피상성의 시대가 진실로 찾는 그 무엇은 아닐까?
요한복음: “생명과 빛과 사랑”의 복음
신약에서 가장 나중에 기록되어 숙성된 요한의 복음은 한마디로 심오하다. 가장 자주 나오는 “알다”, “믿다”, “거하다”, “생명”, “빛”과 “어두움”, “진리”, “영광”, “세상”, “증거”, “말씀” 같은 범상하고 통속적인 그리스어 단어가 요한의 손길을 통해서 비상하고 심오한 신학을 표상하는 용어로 탈바꿈한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이적들”(miracles)도 요한의 복음에서는 의미심장한 신학적 뉘앙스를 가리키는 “표적들”(signs)이 되며, 그가 하셨던 말씀은 영원하신 창조의 로고스이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영원부터 선재하신 분의 “존재”(I AM, 23회 나타남)의 표현이자 구현이다.
물, 떡, 빛, 유한한 생명 등의 단순한 물질이 “생명의 물[생수]”(4:10), “생명의 떡”(6:35), “세상의 빛”(8:12), “부활이요 생명”(11:15)을 가리키는 “표적”으로 거듭남으로써 그 표적들은 예수를 증거하고, 그분은 다시 세상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킨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독수리 복음”이라 일컫는데, 날짐승의 수장인 독수리가 가장 높이 날며 태양을 직시하고도 현기증을 느끼지 않는 유일한 피조물인 것처럼, 이 복음서의 시야는 높고 넓으며 시각은 날카롭고 통찰력은 깊다.
이 복음서는 모든 것을 친히 본 목격자(19:35), 곧 생명의 말씀이신 로고스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았던 자(참조 요일 1:1), 예수의 품속에 기댔고(13:23), 예수의 십자가 아래 있었고(19:26), 예수의 빈 무덤을 보았고(20:2), 부활 후에 호숫가에서 예수와 함께했던(21:20-24) 그분의 사랑받는 제자[요한]에 의해 기록된 것이 분명하다. 그는 이 땅에서 예수와 만난 지 70년이 흐른 후, 오랜 명상과 숙고 끝에 이런 원숙하고 심오한 복음을 내놓은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품속을 경험한 독생하신 아들 하나님(1:18)에 관한 심오한 진리들을 그 아들의 따뜻한 품속을 경험했던 한 제자(13:23)가 기록했다는 점에서 이 복음서를 “품속의 복음”(Gospel of Bosom)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요한이 보고 만져 본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피곤을 느끼고(4:6) 번뇌하기도 하며(12:27;13:21), 사람의 죽음 앞에서 마음이 흔들려 눈물을 흘린다(11:33-35). 그뿐 아니라 그는 때로 마음을 바꾸기도 하고(7:1-10), 정치인, 소외당한 병자나 장애인, 그리고 여인들과도 진지한 대화를 나누지만(3:1-13; 4:7-26; 5:2-9 등), 반대자들과는 격한 논쟁을 벌인다(6:41-65;7:14-36; 8:12-58; 10:22-39). 심지어 성육하신 그 하나님은 초조해하고(2:4; 6:26; 8:25 등) 의혹을 표현하기도 하며(2:24-25), 사람들이 자신에게 반응을 보이기를 갈망한다(6:66-71). 그 영원한 생명(Life)인 로고스는 사람들의 빛(Light)이 되고(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사람들과 부대끼는 사랑(Love)의 화신(Incarnation)이 되었다(3:16).
로마서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를 설명한다면, 요한복음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생명(生命)을 드러낸다. 이런 진리는 요한복음에 “믿다”라는 단어가 98회나 나오고 생명과 관련된 단어들(“life, live”)이 55회 나오는 사실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사실 요한복음은 예수의 공식적 재판에 관한 기사를 포함시키지 않을뿐더러 증인도 없이 법적 절차를 밟지 않고 예수를 사형에 처한 일을 말하고 있지만(18:21),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을 놓고 갑론을박하는 재판정의 이미지가 요한복음 전체를 관류하고 있다. 요한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다양한 익명 또는 실명의 개인들(34명)을 증인으로 동원하여 성육하신 하나님에 관한 부정적 또는 긍정적 증언을 싣고 있다(참조 5:31; 8:13).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 1-5장은 개인들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6-10장은 그리스도가 자신에 관하여, 11-20장은 군중들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내놓은 증언들을 부각한다.
요한은 사람들이 성육하신 하나님을 믿도록 구체적으로 일곱 증인, 곧 아버지 하나님(5:34,37; 8:18), 아들 자신(8:14; 18:37), 성령(15:26; 16:14), 성경(5:39-46), 침례자 요한(1:7;5:35), 제자들(15:27; 19:35), 그리스도의 일들(5:35; 10:25)을 내세워 결정적으로 증언한다. 또 요한복음은 그분의 일곱 표적(1:19-12:50)과 십자가의 영광(13:1-20:31)을 보고 그분을 인간이 되신 하나님으로 영접하거나 거절하는 개인과 단체의 역사를 면면히 펼쳐 보이고 있다(참조 1:1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성육신의 신비>
“인성을 입으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명상할 때, 우리는 인간의 지성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끝없는 신비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더 경이롭게 보일 것이다. …신성과 인성이 신비스럽게 결합되고, 사람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셨다. 바로 이 연합 안에서 우리는 타락한 인류의 소망을 발견한다. 인성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곧 그 본체의 형상을 본다.” -싸인즈 오브 더 타임즈, 1896.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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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1-10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이 두 비유는 같지 않는 계급들을 대표한 것이다. 잃어버린 양은 자기가 잃어버림이 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 양은 목자와 양 무리에서 떨어져서 자신의 힘으로는 회복할 수 없다. 이 잃어버린 양은 저희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있음을 알면서 고민과 부끄러움과 심한 시험중에 싸여 있는 자들을 대표한다. 잃어버린 은전은 허물과 죄로 잃어버린 바 되었으나 저희의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줄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을 표상한다. 저들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졌으나 그것을 알지 못한다. 저희의 영혼이 위태한 가운데 있으나 저희는 거기에 대하여 의식이 없고 관심도 없다. 이 비유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하여 무관심한 태도를 가진 자라도 하나님의 동정의 사랑을 받을 대상자가 된다는 사실을 가르치셨다. 저들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찾아야 할 대상들이다."(화잇주석, 눅 15:8-10)
두 비유는 짝을 이루는 쌍둥이 비유로서 잃어버린 소유를 되찾기 위해 치른 고초와 그것들을 성공적으로 되찾았을 때 누린 기쁨을 강조한다. 첫 번째 비유는 목자의 관심을 강조하며, 따라서 하나님이 보는 영혼의 본질적인 가치를 강조한다. 두 번째 비유는 영혼의 가치를 다른 방식으로 예증한다.
본문연구
1. 세리와 죄인들의 반응과 달리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은 왜 예수님께 원망을 했는가?(눅 15: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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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두 비유에서, 목자와 여인을 통해 하나님의 품성의 어떠한 면들이 나타났는가? (눅 15: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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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두 비유가 가지고 있는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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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두 비유와 연관시켜 생각해 볼 때 초기교회의 구성원들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었는가? (고전 1: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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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의사항
“은혜는 은혜받기에 합당치 못한 인간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태도이다. 우리가 은혜를 찾는 것이 아니고 은혜가 우리를 찾아 왔다. 우리가 은혜를 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에서가 아니고 전혀 가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유일의 이유는 우리에게 그 자비가 크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화잇주석, 눅 15:8-10)
1. 모든 세리와 죄인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은 각각 뚜렷하게 구분되는 두 계층으로 볼 수 있다. 때때로 하나의 집단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아마도 “죄인들”에는 창기, 간부(姦夫), 그 밖에 율법을 공공연하게 위반하며 사는 자들뿐만 아니라 랍비들의 전통에 나와 있는 규정에 따라 의를 추구하려는 시늉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엄격한 바리새인들은 또한 랍비들에게 교육받을 특권을 누리지 못한 평민들, 즉 암메 하아레츠(‘amme ha-ares., 문자적으로 “땅의 백성들”)를 존경받을 가치도 없는 “죄인들”로 여겼다. 바리새인이라는 이름 자체가 일반 민중보다 우월한 집단의 일원임을 나타내며, 보통 백성들보다 더 의롭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모든”이라는 말은 예수가 이 지역에서 봉사하는 동안에 가는 곳마다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지역의 “세리들”과 “죄인들”이 몰려들었다는 사실을 나타낼 수 있다. 이러한 관심의 표현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더욱 화나게 했는데, 그들이 이 계층을 멸시함으로 이들이 자기들에게 등을 돌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사회에서 멸시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한 것과 그들의 반응이 종교지도자들을 초조하게 했다(참조 실물교훈, 186).
가까이 나아오니. 본 장에 나오는 비유들이 누가복음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제외하고는 그것들이 주어진 시간이나 장소를 가리키는 표시가 없다. 9:51~19:28은 아마도 AD 30년 늦가을부터 31년 초봄에 있었던 페래아 봉사와 관계된 사건들을 기록한 것 같다. 최소한 15장의 처음 두 비유와 어쩌면 셋째 비유도 페래아의 목초지(실물교훈, 186)에서 동일한 경우에 주어졌다(실물교훈, 192). 이제 십자가 사건이 있기까지는 2개월쯤 남아 있었다. 이 비유들에서 예수는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설명했다.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1절의 “세리와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별도의 두 계층으로 여겨졌다. 이때 여기에 참석한 비평가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나중에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였다.
원망하여. 헬라어 디아공귀조(diagogguzo-). 역시 “원망하다”로 번역된 공귀조(gogguzo-)의 강조형태. 이중 몇 사람은 예수가 가는 곳마다 미행하고 듣고 감시하여 보고하도록 하기 위해 산헤드린이 파견한 염탐꾼들이었다. 자신들을 의의 전형(典型)으로 여긴 자들이 예수의 면전에서 불편함을 느낀 반면, 의에 대해 아무런 주장도 하지 않았던 자들이 구세주를 가깝게 느꼈다는 것은 패러독스(paradox)이다(실물교훈, 186). 틀림없이 이러한 차이를 만든 것은 전자의 위선과 후자의 가식 없음이었다(참조 눅 18:9~14). 전자는 예수가 베푸는 축복의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후자는 그 필요를 깨닫고 그것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전자는 자신의 의에 만족했고, 후자는 자신에게 내세울 만한 의가 없음을 알았다. 우리가 예수 앞에서 어떻게 느끼는지를 자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죄인을 영접하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죄인들이라고 여긴 사람들을 거절했으나 예수는 환영했다. 이전 경우에도 예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회개시키러 왔다’는 선언으로써 이 비난에 응수했다(참조 막 2:17 주석). 여기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그런 사람들과 교제하고자 한 것은 죄인들의 생활 방식이 그에게 맞았기 때문이라고 넌지시 비추었다. 예수가 죄는 미워했으나 죄인을 사랑한 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죄를 품고 있으면서도 죄인을 증오했다. 예수가 죄인들을 “사랑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비판자들은, 예수가 “죄인들”이 범한 죄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자 했다(참조 15:1 주석). 예수는 고위계층에게 버림받은 이 사람들보다 사회적으로 우월하다는 인상을 전혀 풍기지 않았다. 그는 종교지도자들보다는 “죄인들”과 교제하기를 더 좋아한 것처럼 보였다. 예수는 이 “죄인들”에게는 격려하는 말만 했고, 독선적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책망과 정죄하는 말만 했다(참 막 3:4; 눅 14:4 주석; 눅 14:3~6, 11). 예수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에 대한 유대 지도자들이 불평한 다른 언급을 보려면 눅 7:34, 37을 참조하라.
3. 이 비유. 예수는 또 다른 경우와 목적을 위해 또 다른 유사한 비유(참조 마 18:12~14)를 주었다. 페래아 봉사 기간에 예수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과 사회에서 멸시받는 계층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것으로 보이며(참조 14:21 주석), 이 기간에 그의 가르침은 대부분 그들을 염두에 두고 주어졌다. 15장의 비유들은 사람들이 흔히 멸시하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관심,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하나님의 노력, 그리고 그들이 그분의 호소에 응답할 때 느끼는 그분의 기쁨을 강조한다. 주목해야 할 점은, 세 비유가 죄와 구원 문제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보여 주며 어느 것도 그 자체로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각 비유에서 잃어버린 것이 발견되고 회복된다. 각 경우에서 예수는 죄인들을 향한 자신의 태도와 그들을 위해 기울인 노력을 해명하고 있다. 처음 두 비유는 짝을 이루는 쌍둥이 비유로서 잃어버린 소유를 되찾기 위해 치른 고초와 그것들을 성공적으로 되찾았을 때 누린 기쁨을 강조한다. 첫 번째 비유는 목자의 관심을 강조하며, 따라서 하나님이 보는 영혼의 본질적인 가치를 강조한다. 두 번째 비유는 영혼의 가치를 다른 방식으로 예증한다. 세 번째 비유는 탕자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하는 과정을 예증하며 강조한다. 예수는 이 경우처럼 종종 비유를 사용하여 질문이나 비판에 대답했다.
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페래아의 고지에서 양을 치는 것은 흔한 직업이었고, 따라서 여기에 참석한 청중 가운데 많은 사람이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섰던 때를 상기했을 것이다. 예수가 들려준 비유들은 대부분 청중들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지식에 기초하였다(참조 제9권, 113).
그중에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잃은 것이 비교적 작은 문제로 보일지 모르나, 양 무리의 주인에게는 하나를 잃은 것도 중대한 관심사였다(참조 요 10:11). 동방의 목자는 일반적으로 모든 양을 개별적으로 알았고, 단순히 무리 중 한 마리 양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양 하나 하나의 유익을 위해서도 보살폈다. 그뿐 아니라, 양 한 마리의 손실로도 수입에 상당한 차질이 생길 수 있었다. 비유에서 양이 잃어버린 바 되었다는 사실은 양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에서 기인하였고, 따라서 일단 길을 잃으면 돌아갈 길을 찾는 데는 완전히 무력한 것으로 보였다. 양은 잃어버린 바 된 것을 깨달았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였다. 여기서 길 잃은 한 마리 양은 한 사람의 죄인과 잃어버린 바 된 세상을 모두 대표한다(실물교훈, 190).
이 비유는 예수가 범죄한 이 세상을 위하여 죽은 것처럼(참조 눅 15:7 주석), 단 한 명의 죄인만 있었다 해도 그를 위해 목숨을 바쳤을 것임을 가르친다(참조 요 3:16 주석).
들. 헬라어 에레모스(ere-mos). “사막”, “광야.” 에레모스가 형용사로 쓰이면 “황폐한”, “고독한” 또는 “외로운”을 뜻한다. 이 단어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지역(참조 1:80 주석)을 가리키며, 따라서 보통 경작되지 않거나 경작할 수도 없는 땅, 곧 “황야”라는 뜻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일반적인 목초지, 구릉지, 고지의 계곡, 페래아의 협곡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들”은 아마도 각별하게 위험한 장소는 아니며, 따라서 아흔아홉 마리 양을 “들”에 두었다는 말이 소홀함이나 무심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태가 기록한 비유에는 목자가 양을, 문자적으로 “산에”(참조 마 18:12 주석) 남겨두었다고 되어 있다.
그 잃은 것을…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비유에 나타난 것과 달리 목자가 양을 찾아다니지 않았다면, 양은 아마 잃어버린 채로 방치되었을 것이다. 잃은 양을 찾아 양떼와 우리 안으로 들이기 위해서는 목자가 솔선해야 한다. 구원의 효력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찾는 데 있다. 우리 스스로 그분을 찾도록 내버려졌다면 그분을 발견하지 못한 채 영원토록 찾아 헤매야 했을지도 모른다. 기독교 신앙을 단지 하나님을 찾기 위한 인간의 시도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생각은 인간을 찾는 하나님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요점을 완전히 놓쳐버리는 것이다(참조 요 3:16 주석; 마 1:21; 대하 16:9).
6. 나와 함께 즐기자. 이 가련한 짐승도 감사히 여겼을 것이지만 양의 기쁨보다 목자의 기쁨이 무한히 컸다.
7.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로 하여금 단 한 명의 죄인을 위해서라도 위대한 희생을 치르도록 이끌었을 것이다(실물교훈 187, 196,; 참조 요 3:16 주석). 여기의 “죄인”과 1절의 “죄인들” 사이에 있는 미묘한 연관성을 주목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회개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롬 5:8)도 그 사랑은 우리의 것이었다. 우리를 회개로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길이 참으심에 나타난 “선하심”이다(롬 2:4; 참조 빌 2:13).
하늘에서는…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신성한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여러 가지 다른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러한 방식으로 자주 사용되는 단어가 “하늘”이다(참조 12:20 주석). 랍비들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먼저 사랑하고 관심을 기울이기 전에 그들이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십중팔구 사단이 그들에게 불어넣은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순종하는 자들에게만 애정과 축복을 베풀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것들을 거두어 가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는 탕자의 비유(11~32)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설명하고자 한다. 사실, 세상을 위한 예수의 사명의 모든 목적은, 그가 아버지를 나타내 보이기 위해 왔다고 한 진술(참조 마 1:23 주석)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10)라는 표현과 비교해 보라.
의인 (just persons). 이 표현은 여기에 나타나 보이는 대로 옳다. 그렇지만 사실 예수는 여기서 풍자적으로 말한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의로운 상태에 있다고 자랑하였고(18:11, 12), 따라서 예수가 “의인들”을 언급했을 때 당연히 자신들은 그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참조 요 3:4 주석). 말하자면, 여기서 논지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예수는 그들의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의롭다면, 바로 그러한 사실에 의거하여 그들이 경건한 체 하면서 멸시한 “죄인들”은 예수가 베푸는 사랑과 돌보심을 필요로 하는 자들임이 입증되었다. 따라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비판적인 태도는 부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예수가 비슷한 경우에 제시한 또 다른 대답에 대해서는 눅 5:31, 32을 참조하라.
8. 어느 여자가. 이 비유를 하게 된 배경과 잃은 양 및 잃은 아들의 비유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3, 4절 주석을 참조하라. 분명히 잃은 양의 비유가 남자 청중에게 전달된 것이라면, 이 비유는 특별히 여자 청중을 위해 주어졌을 것이다. 예수는 특히 여자들의 흥미를 끄는 예증을 자주 사용하였다. 잃은 양의 비유에서, 주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양에 대한 동정심과 함께 자신의 재정적 이득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동정적인 요인이 없다. 은전을 잃어버린 것은 그녀 자신의 부주의함 때문이었고, 그것을 되찾고자 하는 그녀의 바람은 전적으로 그것에 대한 그녀의 개인적인 관심에 기초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길을 잃어버린 책임이 양에게 있었다. 그러나 은전은 자신이 잃어버린바 된 것에 대한 책임이 없다. 이 비유는 영혼의 본질적인 가치, 그리고 하나님이 볼 때 잃어버린 죄인의 가치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분이 “부지런히 찾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드라크마. 헬라어 드라크마이(drachmai). 그리스도 당시의 헬라식 1드라크메(drachme-)는 은(銀) 3.56그램(0.1145온스)이었으므로, 농사꾼의 하루 품삯인 로마식 1데나리온과 거의 비슷했다. 10이라는 수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10은 어림수로 종종 나타난다(삼상 1:8; 전 7:19; 사 5:10; 암 6:9). 예수도 여러 비유에 이 수를 사용했다(참 마 25:1, 28; 눅 19:13, 16, 17). 열 개의 은전은 여자의 결혼지참금 중 일부였을지도 모르며, 따라서 그 여자의 예금으로 볼 수 있다. 아마도 그 여자가 집을 청소하면서 그것들을 옮기거나 살펴보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를 잃으면. 그녀의 부주의가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은전은 자기가 잃어버린 바 된 것을 몰랐다. 양처럼 산에서나 탕자처럼 “먼 나라”에서가 아니고 집안에서 잃어버린 바 되었다.
등불. 일반적으로 동방의 주택은 방이 하나밖에 없었으며, 출입문이나 작은 격자 창문들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자연 채광(採光)이 될 수 없었다. 낮이라고 해도 그런 물건을 찾기 위해서는 그 여자에게 인공적인 빛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집을 쓸며.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동방 주택들은, 특히 시골 지역과 촌락의 경우 흙바닥으로 되어 있다. 이런 “바닥”으로 된 어두운 방안에서는 동전을 잃어버리기가 십상이지만 다시 찾기는 어려웠다. 아마도 부지런히 찾아야 동전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9. 나와 함께 즐기자. 기쁨을 다른 사람과 나누면 그것을 나눠 준 사람의 마음속에서 증강된다. 되찾을 가망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던 가치 있는 물건을 다시 찾은 경험을 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 여자의 기쁨을 이해할 수 있다(참조 롬 12:15). 그러나 세상이 주는 어떤 기쁨도 잃어버린 죄인을 찾아 예수에게 데려올 때 얻는 기쁨과는 비견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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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 범위
요 21; 요 11:9, 10; 요 8:42-44; 요 4:46-54; 딤후 2. 3:16; 요 15:1-11
♣ 학습목표
제 1과 길을 보여주는 표적들 https://act.kr/40
제 2과 신성의 증거들 https://act.kr/41
제 3과 배경이야기: 서론 https://act.kr/42
제 4과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말하는 증인들 https://act.kr/43
제 5과 사마리아인의 증언 https://act.kr/44
제 6과 예수에 대한 더 많은 증언들 https://act.kr/45
제 7과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https://act.kr/46
제 8과 구약 예언의 성취 https://act.kr/47
제 9과 생명의 근원 https://act.kr/48
제 10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https://act.kr/49
제 11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https://act.kr/50
제 12과 영광의 때: 십자가와 부활 https://act.kr/51
제 13과 맺음말: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 https://act.kr/52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재림교회의 시각 (2) | 2024.1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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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다시 읽기 - 임봉경 (5) | 2024.10.05 |
제 12과 영광의 때: 십자가와 부활 (0) | 2024.09.28 |
제 11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0) | 2024.09.28 |
제 10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0) | 2024.09.28 |
● 연구 범위
요 18:33-19:5; 요 19:17-22; 요 19:25-27; 눅 2:34, 35; 요 20:1-18; 고전 15: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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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과 맺음말: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 https://act.kr/52
요한복음 다시 읽기 - 임봉경 (5) | 2024.1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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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과 맺음말: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 (0) | 2024.0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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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과 생명의 근원 (0) | 2024.09.28 |
● 연구 범위
요 14:10, 24; 창 3:7-9; 요 16:27, 28; 요 16:7-11; 요 17: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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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4; 10:10; 1:12, 13; 6:61-68; 민 13:23-33; 마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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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 범위
요 5:17, 20, 36-40, 46, 47; 13:18; 17:12; 렘 2:13; 슥 9:9; 요 8: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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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과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0) | 2024.09.28 |
제 6과 예수에 대한 더 많은 증언들 (0) | 2024.09.28 |
제 5과 사마리아인의 증언 (0) | 2024.09.28 |
● 연구 범위
요 8:54-58, 창 12:3, 롬 4:1-5, 요 12:1-8, 19:4-22, 20:19-31, 단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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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과 생명의 근원 (0) | 2024.0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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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과 구약 예언의 성취 (0) | 2024.09.28 |
제 6과 예수에 대한 더 많은 증언들 (0) | 2024.09.28 |
제 5과 사마리아인의 증언 (0) | 2024.09.28 |
제 4과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말하는 증인들 (0) | 2024.09.28 |
● 연구 범위
요 3:25-36, 1:32-36, 단 7:18, 요 6:51-71, 5:36-38, 7:3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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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과 길을 보여주는 표적들 https://act.kr/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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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과 생명의 근원 https://act.kr/48
제 10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https://act.kr/49
제 11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https://act.kr/50
제 12과 영광의 때: 십자가와 부활 https://act.kr/51
제 13과 맺음말: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 https://act.kr/52
제 8과 구약 예언의 성취 (0) | 2024.0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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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과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0) | 2024.09.28 |
제 5과 사마리아인의 증언 (0) | 2024.09.28 |
제 4과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말하는 증인들 (0) | 2024.09.28 |
제 3과 배경이야기: 서론 (0) | 2024.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