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선교센터교회


안식일학교

경배와 찬양 다같이
찬       미 82장
시작기도 기도자
환       영 안교장
특별순서  
교과공부 각  반
헌금소개 사회자
축       도 담임목사

 

기억절 4기 2과 (일몰 : 5시 59분)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으냐''(요한복음 11:25,26).

 

10월 시무 안내
시       무 : 임영빈
헌금봉사 : 박다정 이한얼

 

다음 주 예배순서

금요일예배 안식일예배
날짜 기도 말씀 날짜 기도 말씀
4 최하린 소그룹 5 윤주형 권세진
11 김정현 소그룹 12 차민지 김주혁
18 김진겸 소그룹 19 김우진 김형준
25   성만찬 26 이상훈 권세진

 


안식일 예배

경배와찬양 다함께
등단 / 묵도 다함께
송        영 2장
기        원 설교자
찬        미 31장
대 표 기 도 차민지 청년
특 별 찬 양 기악 특창
설        교 김주혁 목사
찬        미 187장
개 인 기 도 다함께
헌        금 다함께
축        도 설교자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이사야 42:9)
 
"하늘의 위대한 사령관이신 예수님은 하늘 궁정을 버리고 저주로 마비되고 훼손된 세상에 오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인성의 팔로는 인류를 두르시고 당신의 신성의 팔로는 전능하신 분을 붙잡으시므로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과 연결되도록 하기 위하여 스스로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다." (마가복음 교과, 17)
 
"율법은 하나님의 위대한 도덕적 거울이다. 그는 자신의 말, 자신의 정신,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의 말씀과 배교해 보아야 한다."(목사에게 보내는 기별, 124-125)


캠퍼스 소식

◆ 경희, 고려대 캠퍼스 모임

 

◆ 과학기술, 광운대  캠퍼스 모임

 

◆ 화랑 캠퍼스 모임


광 고

 

  1. 환영합니다.
    기쁜 안식일을 맞이하여 예배에 참여하신 모든 성도님들을 환영합니다.
  2. 아침기도회
    매주 일요일 아침 7시
    장소 : 대학선교센터교회
  3. 10월 정기직원회
    일시 : 10월19일(안) 점심식사 후
  4. 성만찬예식
    일시 : 10월25일(금)
  5. 침례식
    일시 : 10월26일(안)
    대상자 : 김은비 김하온 김현준
  6. 글쓰기 세미나
    일시 : 10월26일(안) 오후2시
    강사 : 김범태 기자(재림신문 기자)
  7. 3040 야유회
    일시 : 10월19일(안) 오후

    장소 : 배봉산 내 어린이공원
    문의 : 3040회장 (이상우 집사) 
  8. 한강 하모니 걷기 대회
    일시 : 10월27일(일) 오후 1시
    장소 : 미사경정공원
    문의 : 부목

 

  • 다음 주 당번
    • 식사당번 : 여집사 2조
    • 청소당번 : 과학기술,광운대 캠모
  • 기도제목
    • 취업 준비생들을 위하여
    •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위하여
    • 성도님들의 생업을 위하여

주중 모임 안내

경희 중앙 캠퍼스 모임 수요일 오후 6:30 교회
화랑 캠퍼스 모임 목요일 오후 6:00 삼육대
졸업생 소그룹 화요일 오후 8:00 교회
장년 소그룹 화요일 오후 8:30 ZOOM

 


담임목사 권세진   부목사 김주혁   전도사 박창혁
수석장로 임동국   서기 문호준 전현주  재무 권욱민   
선교회장 윤민식  액트회장 윤애리   


헌금계좌 : 하나은행 144-890014-45304
(ACT교회)
주소 :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로1길 11
어린이청소년비전센터 1층

유튜브 청년반 학생반 블로그
 

 

 

'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월26일 주보  (4) 2024.10.26
10월19일 주보  (7) 2024.10.19
10월5일 주보  (2) 2024.10.05
9월21일 주보  (0) 2024.09.21
9월14일 주보  (1) 2024.09.13

누가복음 15:11-32
[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비유에는 탕자의 잘못을 견책하거나 조소하는 장면이 전혀 없다...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을 기꺼이 받아주신다는, 이 얼마나 놀라운 보증인가!...그대는 자기 자신을 개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만큼 충분히 선한사람이 될 때까지 그리스도께 나갈 수 없다고 속삭이는 원수(마귀)의 말을 듣지 말라...일어나서 그대의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라 그리하면 그는 멀리까지 나와서 그대를 영접하실 것이다.”(실물교훈, 205)

 


연속된 세 개의 비유는 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마지막 세 번째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본문연구

1. 본문의 모든 등장인물들을 찾아 적어보고, 그 가운데서 주요 인물들을 구분하라.
등장인물
주요인물

2. 다음에서 이 비유의 제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무엇일까? 각자의 관점으로 이 비유의 제  목을 정하고 그 이유를 설명해보라.  
1) 잃은 아들의 비유
2) 두 아들의 비유
3) 아버지의 사랑
4) 기타 __________________
   cf. 이 비유는 눅 15장의 세 개의 비유 중 마지막 비유이다. 일반적으로 1)잃은 양의 비유 2)잃은 은전의 비유 3)탕자의 비유로 일컬어진다.
   cf.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와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을 떠나 곁길로 나간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동정에 넘치는 사랑을 분명하게 드러낸다.”(실물교훈, 198)

3.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간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돌아오게 되었는가?

4.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어떻게 취급하셨는가?

5. 첫째 아들에 관한 부분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
   cf. 아버지와 두 아들은 각각 누구를 의미(상징)하는가? (눅 11:1-2 참고)

“여기에 나오는 맏아들은 세리와 죄인으로 간주되던 사람들을 업신여기던 그리스도 당시의 회개하지 않는 유대인과 각 시대의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을 대표한다.”(실물교훈, 209)

 

토의사항

1. 하나님께 대하여 내가 가지고 있는 오해나 불만은 무엇인가? 부정적인 생각이 있다면 말  해보고 서로 이야기 해보자.

2. 자기의 고집대로 해서 잘못된 경험이 있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 일까요?

3. 신앙인으로서 나의 자세는 아들의 정신인가 종의 정신인가?(사랑인가, 의무감인가?)

4. 맏아들의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잘못되었다면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누가는 그 자신이 탕자와 같은 이방인이었다. 다른 복음서에 기록하지 않은 이 비유를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기쁨, 영혼에 대한 관심 등과 같은 것들을 깨달았음이 분명하다. 우리도 아버지가 베푸시는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


11. 어떤 사람. 예수의 모든 비유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고 볼 수 있는 이 비유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부분(11~24절)은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심정, 아들을 향한 그의 사랑 그리고 탕자가 돌아왔을 때의 기쁨을 강조하고 있다. 두 번째 부분(25~32절)은 아버지의 사랑과 기쁨에 분개한 큰아들과 같은 사람들에 대한 견책이다. 두 번째 부분은 아마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원망(참조 2절)에 대한 그리스도의 응답이었을 것이다. 잃은 양과 잃은 은전의 비유가 구원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면, 잃은 아들의 비유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고 그와 조화되게 행동하는 인간의 역할을 강조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완전히 곡해했다(참조 7절 주석).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대표하고, 맏아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대표한다.

12. 둘째. 통제에 진절머리가 나고, 아마도 자신의 이기적인 관심에만 몰두한 아버지에게 자신의 자유가 과도하게 속박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이 청년은 분명 무엇보다도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거나, 아니면 최소한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스스로 돌이켰”을 때(17절) 행동방식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을 보면, 그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에 대해서도, 아버지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불행한 것은,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사실과 아버지의 모든 결정과 요구사항이 결국 아들에게 최선이 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가 지혜롭고 이해심이 깊었으며 공정하고 자비로우며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음을 밝히 보여 준다. 한편, 경험이 미숙한 이 청년은 아무런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도 아들로서의 특권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명백한 권리로 여겼던 것 같다. 그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자신이 생각한 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집을 떠나 자신의 길을 가며 마음에 맞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가 선택한 행동은 제5계명을 직접적으로 위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분깃. 즉 재산 가운데 그의 몫. 당시의 유대문헌이 밝혀 주듯이, 아버지가 죽었을 때 상속 규정의 효력이 발생하도록 하기보다는 오히려 생전에 아들들에게 유산을 분배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에게 그렇게 할 의무는 전혀 없었다. 따라서 청년의 요구는 매우 온당치 못했다. 분명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불신이며,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철저하고도 결정적인 거부를 의미했다.

나눠 주었더니. 아버지가 아들의 못마땅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 해도 합법적이고 타당했지만 허락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한 사실은 부모로서의 그의 판단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줄 뿐만 아니라, 아들의 어그러진 선택이 분명 아버지의 현명하지 못한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단서를 제공한다. 자신이 선택한 결과들을 경험을 통해 깨닫게 하기 위해 자기의 길을 가도록 묵인하는 것이 고집 센 자식을 위해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장자는 아버지의 재산 가운데 두 몫을 받았고, 아들 형제들은 각각 한 몫씩만 받게 되어 있었다(참조 신 21:17 주석). 장자에게 더 많은 몫이 주어진 것은 가족의 대표로서의 책임을 이행할 때 필요한 재원으로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아버지에게 아들이 둘밖에 없다면, 여기의 경우처럼(참조 11절) 차남은 아버지의 재산 중 3분의 1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에 재산 분배가 이루어진 경우에는, 재산은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는 손대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재산의 분할뿐만 아니라 그 몫을 실제로 요구했다. 이 이야기(참조 13절)에 나타난 것처럼, 그는 재산 중 자기 몫을 모두 현금이나 휴대하기 쉬운 귀중품으로 바꾼 것 같다.

13. 허랑방탕하여. 청년의 “생활”은 낭비벽이 심했거나 도덕적으로 방탕했을 것이다. 비유에서 맏아들은 동생의 “생활”에 대하여 도덕적으로 방탕한 점을 강조했다(참조 30절). 하지만 도덕적으로 방탕한 삶은 일반적으로 낭비벽도 포함한다. 청년이 상당히 많은 재산을 허비한 방식은 삶에 대한 그의 개념을 보여 준다.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사람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얻기 위해 세상으로 뛰어든다.

15.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돼지를 치는 것은 돼지를 부정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에게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아주 비참한 형태의 일자리였다. 이런 점에서, 그 청년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아마도 그는 그보다 나은 일자리를 잡을 자격도 갖추지 못했던 것 같다. 분명 그는 집에서도 유용한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시간을 선용하지도 않았고, “허랑방탕”(13절)함으로 이제 그는 사회의 낙오자로 남게 되었다.

16. 쥐엄 열매. 헬라어 케라티아(keratia). “작은 뿔들.” 케라티아는 꼬투리가 뿔 모양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케라테아(keratea, 캐롭[쥐엄], 개아카시아) 나무의 꼬투리를 묘사하는 말로 사용된다. 이 나무의 꼬투리는 침례자 요한이 먹은 음식의 일부였다는 전승에 입각하여 성(聖) 요한의 빵(St.-John’s-bread)으로 불리기도 했다(참조 마 3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당시의 유대 문헌에 나타나는 대로, 사람이 먹기 위해 씨는 꺼내 놓고 꼬투리는 보통 가축의 먹이로 사용되었다. 캐롭나무[쥐엄나무]는 팔레스타인에서 지금도 경작하고 있으며 미국으로도 전해졌다.

17. 스스로 돌이켜. 어떤 사람들은 죽음이 바로 눈앞에 엄습할 때까지도 진지한 생각 없이 삶의 조류에 휩쓸려 정처 없이 떠도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청년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살아왔으나, 이제 자신이 처한 절박한 필요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로지 물질적 차원에서만 그럭저럭 살아가는 사람들은 물질적인 궁핍과 욕망, 그리고 고통이 아니고는 인생의 교훈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이 청년은 말하자면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지금 다시 돌아왔다. 그는 새로운 경험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였고 지금껏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분명히 깨닫기 시작했다.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노예”가 아니라 “품꾼”이라는 점을 주목하라. 아마도 청년은 과거에 아버지의 품꾼들을 멸시하고, 어쩌면 학대한 적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아버지의 집에 있는 “품꾼”의 처지가 몹시 부러워 보였다. 사실 그는 “노예”나 다름없었고, 더구나 굶주리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깨닫지 못했지만 사실 그가 떠벌리던 자유는 최악의 형태의 속박이었음이 입증되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철학에 따라 꼴지어진 삶의 극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은 그의 어리석음이 낳은 결과이다. 아버지의 인생철학의 지혜가 지금은 그에게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18. 내가 일어나. 아마도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일어나.” 그는 불행과 황폐의 불길한 징후로 인생의 하늘을 뒤덮은 무기력과 절망에서 일어났다. 지금까지 그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의 본질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 없었다. 아버지의 공정함을 생각하고는 그가 품꾼들을 대한 것처럼 자신을 대할 것이라는 옹색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

20. 이에 일어나서…돌아가니라. 탕자는 지체 없이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결심하자마자 바로 실행했다. 비유에서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일에 주도권을 쥔 사람은 아들이다. 화해를 이루게 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라기보다는 아들의 선택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견지에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여기서 개인을 처음으로 이끈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며 각자가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화해를 이루는 첫 계단이라고 가르쳤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근거 없는 결론이다. 이러한 결론은 그리스도의 비유를 해석하는 기본적인 원칙들에 위배된다. 더욱이 잃은 양과 잃은 은전의 비유에서, 예수는 여기서 제시된 진리, 곧 구원과 화해를 이루는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설명했다. 또한 평범한 인간 관계에 기초된 비유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관한 모든 면모를 완전하게 반영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세상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선물로 준 것은 아들에 대한 인간의 믿음(요 3:16)이 있기 전이었고, 성경은 심지어 인간의 마음속에 의를 행하고자 하는 소망도 하나님이 불어넣었다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아버지가 저를 보고. 예수는,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아버지는 아들의 성격과 기질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재산의 분깃을 나누어 주었을 때나 그에게 작별을 고할 때에도 그의 모험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분명 아버지는 아들이 조만간 스스로 돌이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참조 17절 주석). 아들이 누더기를 걸치고 멀리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를 알아보았다. 예수는 11~19절에서 둘째 아들의 품성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했지만, 20~24절에서는 청중들에게 아버지의 성품을 나타내 보였다.

22. 옷. 헬라어 스톨레(stole-). 남성들의 헐거운 겉옷으로 발까지 내려오며, 보통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입었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바로 그를 종으로서가 아니라 아들로서 받아들였다. 맨 먼저 그는 아들의 누더기를 가리고 심지어 집안의 종들에게도 누더기 같은 옷을 입은 난처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자신의 외투를 벗어 아들에게 덮어 주었다(참조 실물교훈 203, 204,). 주인이 아들을 반갑게 맞이하려고 밖으로 달려갔을 때 종들이 동행하지 않았던 것 같으며, 따라서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라”는 명령은 아버지와 아들이 집에 가까이 갔을 때 내렸다.

가락지. 아버지가 여전히 그를 아들로 인정한다는 또 다른 징표. 이것은 아마도 도장이 새겨진 반지였을 것이고(참조 에 3:10; 8:2), 만약 그렇다면 그것을 그의 손가락에 끼운다는 것은 그의 신분이 가족의 일원으로 회복되었음을 훨씬 분명하게 가리킬 것이다. 청년은 틀림없이 전에 끼고 있던 가락지를 오래 전에 팔았거나 전당 잡혔을 것이다.

신. 문자적으로 “샌들”(참조 마 3:11 주석). 종들은 보통 맨발로 다녔다. “신발”은 아버지가 회개한 탕자를 종이 아닌 아들로 받아들였다는 또 하나의 표시였다. 제일 좋은 옷, 반지 그리고 신발은 필수품이 아니라 특별한 은총의 표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필요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영예롭게 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가슴 벅찬 사랑과 기쁨의 증거를 나타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는 자신에게 몰려드는 죄인들을 환영한 일이 정당함을 증명했고(참조 1절 주석), 그렇게 행동하는 예수에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했다(참조 2절 주석).

25. 맏아들. 비유에 나타난 대로는 둘째 아들에 대해서 더 이상 직접 언급돼지 않는다. 이제 그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둘째 아들과 관련된 비유의 교훈-하늘이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에게 베푸는 은혜로운 환영-은 명료하다. 이제까지는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에게 보인 우호적인 태도의 정당성을 입증했다(참조 2절 주석). 비유의 나머지 부분(25~32절)은 동생에 대한 형의 태도에 나타난 것처럼 “죄인들”에 대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태도(참조 2절 주석)를 다루고 있다. 비유의 이 부분은 예수가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대했던 방법에 대해 “원망하던” 독선적인 위선자들을 질책하는 말이다(2절).

밭에 있다가. 그는 충실한 아들이 그렇듯 일하고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늘 아버지가 충실한 아들들에게 베풀 상급을 바라면서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의무감과 행함으로 의를 얻으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진정한 순종 대신에 인간의 전통을 철저하게 고수하는 모조품 신앙을 드리면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삼상 15:22; 참조 마 7:21~27 주석)라는 사무엘의 말씀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풍류. 헬라어 쉼포니아(sumpho-nia). 문자적으로는 “제창”(齊唱). 영어 단어 “sym- phony”(교향곡)가 이 단어에서 나왔다. 쉼포니아는 여러 가지 악기, 제창(齊唱) 혹은 백파이프를 닮은 악기(참조 단 3:5 주석)를 지칭한다. 아마도 이 잔치에는 유급 연예인(演藝人)들도 데려다 놓았을 것이다. 분명히 아버지는 오랫동안 잃었던 아들의 귀환을 당당하게 축하할 기회를 만들어 아들의 회복된 상황을 온 마을에 증명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29. 내가…아버지를 섬겨. 문제는 맏아들이 아들로서보다는 오히려 종의 정신으로 일했다는 데 있다. 그는 재산을 벌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재산을 법적으로 요구했고, 그는 자신이 맏아들로서 누릴 권리로 생각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분노를 느꼈다(28절).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없더니. 헬라어는 “내게”를 강조한다. 형이 깨달았든지 그렇지 않았든지 그는 동생에게 베풀어진 배려를 시기하고 있었으며, 아마도 이 모든 배려가 자신의 것이었어야 했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그는 “살진 송아지”는 고사하고 “염소 새끼” 한 마리로도 보상받지 못했다고 불평하였다. 틀림없이 그의 마음속에는, 동생을 복권(復權)시킨 것은 지금은 합법적으로 맏아들의 소유(참조 12절 주석)로 되어 있는 재산의 분깃을 아버지가 난봉꾼인 동생에게 줄 수도 있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형은 여기서 심지어 살진 송아지도 법적으로 자기 것이었다는 사실과 아버지는 그것을 포함하여 다른 어떤 재산의 일부라도 자신의 동의 없이는 사용할 권리가 없음을 암시한 것 같다.

31.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항상” 함께 있지는 않았고, 따라서 특별히 잔치를 배설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과 우리에서 벗어나지 않은 양들에 대한 목자의 느낌을 비교해 보라(참조 4, 7절 주석). 아버지가 잔치를 베푼 적은 없었지만 맏아들을 향한 그의 한결같은 사랑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가 “살림”을 분배하여 둘째 아들에게 분깃을 할당할 때, 그는 또한 장자에게 배당된 두 배의 분깃을 맏아들에게 양도하였다(참조 12절 주석). 아버지가 인색했다는 주장은(29절)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이제 재산은 맏아들의 것이고, 그가 원하기만 하면 벗들과 “즐길 수” 있었다. 또한 아버지는 동생의 귀환으로 그의 권리가 결코 침해받지 않을 것임을 맏아들에게 보증한다. 바로 이것이 그를 괴롭혔다면, 그는 그런 걱정들을 접어두고 축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 아버지는 차근차근 맏아들의 주장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동생을 환영하는 데 참여하라고 권유한다(참조 28절 주석).

32. 마땅하다. 작은 아들은 그런 영접을 받을 자격이 없었지만, 아버지는 그 아들을 환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단언한다. 잔치는 공로 때문에 베푼 것이 아니라 단순히 아버지의 기쁨의 표현이고, 따라서 형이 이 기쁨에 동참하는 것 또한 “마땅한” 일이었다. 예수는, 이것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죄인들에게 취해야 할 태도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잃었던 작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이 맏아들에 대한 사랑을 결코 감소시키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사랑은 그들의 명백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 모두를 포용하였다. 다행히도 하늘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가 그것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근거하지 않는다.

 

2021

대학선교센터교회


안식일학교

경배와 찬양 다같이
찬       미 82장
시작기도 기도자
환       영 안교장
특별순서  
교과공부 각  반
헌금소개 사회자
축       도 담임목사

 

기억절 4기 1과 (일몰 : 6시 9분)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20:30-31).

 

10월 시무 안내
시       무 : 임영빈
헌금봉사 : 박다정 이한얼

 

다음 주 예배순서

금요일예배 안식일예배
날짜 기도 말씀 날짜 기도 말씀
4 권하린 소그룹 5 윤주형 권세진
11 김정현 소그룹 12 이상훈 김주혁
18 김진겸 소그룹 19 김우진 김형준
25   성만찬 26 차민지 권세진

 


안식일 예배

경배와찬양 다함께
등단 / 묵도 다함께
송        영 2장
기        원 설교자
찬        미 29장
대 표 기 도 윤주형 청년
특 별 찬 양  
설        교 권세진 목사
찬        미 117장
개 인 기 도 다함께
헌        금 다함께
축        도 설교자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이사야 42:9)
 
"하늘의 위대한 사령관이신 예수님은 하늘 궁정을 버리고 저주로 마비되고 훼손된 세상에 오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인성의 팔로는 인류를 두르시고 당신의 신성의 팔로는 전능하신 분을 붙잡으시므로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과 연결되도록 하기 위하여 스스로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다." (마가복음 교과, 17)
 
"율법은 하나님의 위대한 도덕적 거울이다. 그는 자신의 말, 자신의 정신,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의 말씀과 배교해 보아야 한다."(목사에게 보내는 기별, 124-125)


캠퍼스 소식

◆ 경희, 고려대 캠퍼스 모임

◆ 과학기술, 광운대  캠퍼스 모임

◆ 화랑 캠퍼스 모임


광 고

 

  1. 환영합니다.
    기쁜 안식일을 맞이하여 예배에 참여하신 모든 성도님들을 환영합니다.
  2. 아침기도회
    매주 일요일 아침 7시
    장소 : 대학선교센터교회
  3. 장년 선교회 산행
    일시 : 10월9일(수)
    장소 : 대관령 or 평창
    문의 : 선교회장(윤민식 장로)
  4. 3040 야유회
    일시 : 10월19일 안식일 오후
    장소 : 배봉산 내 어린이공원
    문의 : 3040회장(이상우 집사)
  5. 한강 하모니 걷기 대회
    일시 : 10월27일(일) 오후 1시
    장소 : 미사경정공원
    문의 : 부목사

 

  • 다음 주 당번
    • 식사당번 : 여집사 2조
    • 청소당번 : 과학기술,광운대 캠모
  • 기도제목
    • 취업 준비생들을 위하여
    •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위하여
    • 성도님들의 생업을 위하여

주중 모임 안내

경희 중앙 캠퍼스 모임 수요일 오후 6:30 교회
화랑 캠퍼스 모임 목요일 오후 6:00 삼육대
졸업생 소그룹 화요일 오후 8:00 교회
장년 소그룹 화요일 오후 8:30 ZOOM

 


담임목사 권세진   부목사 김주혁   전도사 박창혁
수석장로 임동국   서기 문호준 전현주  재무 권욱민   
선교회장 윤민식  액트회장 윤애리   


헌금계좌 : 하나은행 144-890014-45304
(ACT교회)
주소 :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로1길 11
어린이청소년비전센터 1층

유튜브 청년반 학생반 블로그

 

 
 
 
 
 
 
 
 
 
 
 
 
 
 
 
 

'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월19일 주보  (7) 2024.10.19
10월12일 주보  (1) 2024.10.12
9월21일 주보  (0) 2024.09.21
9월14일 주보  (1) 2024.09.13
9월7일 주보  (4) 2024.09.07

요한복음 다시 읽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징은 한마디로 피상성(皮相性)이다. 디지털로 이미지화한 가공된 현실의 세계 안에 사로잡혀, 진상이나 진리, 이상이나 의미 같은 것은 관심 밖이다. “텍스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외쳐대며 피상성 자체를 예찬하기까지 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 시대의 사람들은 참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과학적으로 실증될 수 있다고 떠벌리며,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인 것을,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눈앞에 이미지화한 것을, 입증되지 않은 것보다는 실험실에서 증명된 것을 추구한다. 다시 말해서 형이상학적 관념이나 이상적 이데아보다는 피부로 느껴지고 내 존재 속에서 꿈틀거리는 어떤 것을 원한다. 옛날에 그리스 철학자들이 운운하던 로고스(logos) 같은 개념과는 동떨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로고스는 서구 사상에서 “우주의 질서를 지배하는 어떤 원리나 보편적 이성” 등으로 이해되어왔다. 로고스는 감각적인 것보다는 이지적인 것,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것, 다시 말해서 시간적 및 공간적 실재보다는 영원한 불변의 진리 같은 것이며, 다양한 외피(外皮) 안에 내재(內在)하는 불변·동일의 본질을 말한다.

   괴테의 수작 <파우스트>를 보면, 지식과 학문의 표상인 노학자(老學者) 파우스트는 요한복음의 번역에 착수하여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1:1)라는 첫 구절부터 “로고스”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할지를 놓고 마음을 끓인다. 그는 로고스라는 뜻깊은 단어를 처음엔 “의지”(will)라고 번역했다가 맘에 들지 않아, 다시 “힘”(power)이라고 개역했다. 그러나 세계를 존재케 한 더 근원적인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결국 로고스를 “행동”(action)이라고 번역했다. 함석헌 선생은 이 로고스를 “생각”이라고 번역했고, 우리말과 중국어 성경은 각각 “말씀” 과 “도(道)”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말하는 로고스는 이런 개념을 모두 포괄한다. 누군가 말했듯이, 로고스라는 우주적 원리 곧 참된 “도”가 머리로 들어오면 그것은 생각 또는 사상이 되고, 말로 나오면 언어가 되고, 그것이 말대로 실행되면 행동이 된다. 이것이 바로 “말씀”에 해당하는 구약의 히브리어 단어 다바르에 내포된 뜻이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기록한, 고도로 헬라화한 도시 에베소에서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나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아니라 이런 우주적인 로고스(“말씀”)로 제시한다. 요한복음에서 그가 말하는 이 로고스는 신이 인간으로 육화되었다는 성육신 교리를 심오하고도 장엄하게 펼쳐 보인다. 이 교리는 영원하신 분이 시간 속으로, 불멸의 신이 후패하는 인간의 육신 속으로, 창조의 말씀이 피조물의 영역으로 내려오시는 사건(1:1; 1:14), 곧 기독교의 시간성과 역사성과 현존성을 어떤 종교보다도 더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육신이 되신 이 로고스가 이 피상성의 시대가 진실로 찾는 그 무엇은 아닐까?

 

요한복음: “생명과 빛과 사랑”의 복음
   신약에서 가장 나중에 기록되어 숙성된 요한의 복음은 한마디로 심오하다. 가장 자주 나오는 “알다”, “믿다”, “거하다”, “생명”, “빛”과 “어두움”, “진리”, “영광”, “세상”, “증거”, “말씀” 같은 범상하고 통속적인 그리스어 단어가 요한의 손길을 통해서 비상하고 심오한 신학을 표상하는 용어로 탈바꿈한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이적들”(miracles)도 요한의 복음에서는 의미심장한 신학적 뉘앙스를 가리키는 “표적들”(signs)이 되며, 그가 하셨던 말씀은 영원하신 창조의 로고스이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영원부터 선재하신 분의 “존재”(I AM, 23회 나타남)의 표현이자 구현이다.

   물, 떡, 빛, 유한한 생명 등의 단순한 물질이 “생명의 물[생수]”(4:10), “생명의 떡”(6:35), “세상의 빛”(8:12), “부활이요 생명”(11:15)을 가리키는 “표적”으로 거듭남으로써 그 표적들은 예수를 증거하고, 그분은 다시 세상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킨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독수리 복음”이라 일컫는데, 날짐승의 수장인 독수리가 가장 높이 날며 태양을 직시하고도 현기증을 느끼지 않는 유일한 피조물인 것처럼, 이 복음서의 시야는 높고 넓으며 시각은 날카롭고 통찰력은 깊다.

   이 복음서는 모든 것을 친히 본 목격자(19:35), 곧 생명의 말씀이신 로고스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았던 자(참조 요일 1:1), 예수의 품속에 기댔고(13:23), 예수의 십자가 아래 있었고(19:26), 예수의 빈 무덤을 보았고(20:2), 부활 후에 호숫가에서 예수와 함께했던(21:20-24) 그분의 사랑받는 제자[요한]에 의해 기록된 것이 분명하다. 그는 이 땅에서 예수와 만난 지 70년이 흐른 후, 오랜 명상과 숙고 끝에 이런 원숙하고 심오한 복음을 내놓은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품속을 경험한 독생하신 아들 하나님(1:18)에 관한 심오한 진리들을 그 아들의 따뜻한 품속을 경험했던 한 제자(13:23)가 기록했다는 점에서 이 복음서를 “품속의 복음”(Gospel of Bosom)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요한이 보고 만져 본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피곤을 느끼고(4:6) 번뇌하기도 하며(12:27;13:21), 사람의 죽음 앞에서 마음이 흔들려 눈물을 흘린다(11:33-35). 그뿐 아니라 그는 때로 마음을 바꾸기도 하고(7:1-10), 정치인, 소외당한 병자나 장애인, 그리고 여인들과도 진지한 대화를 나누지만(3:1-13; 4:7-26; 5:2-9 등), 반대자들과는 격한 논쟁을 벌인다(6:41-65;7:14-36; 8:12-58; 10:22-39). 심지어 성육하신 그 하나님은 초조해하고(2:4; 6:26; 8:25 등) 의혹을 표현하기도 하며(2:24-25), 사람들이 자신에게 반응을 보이기를 갈망한다(6:66-71). 그 영원한 생명(Life)인 로고스는 사람들의 빛(Light)이 되고(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사람들과 부대끼는 사랑(Love)의 화신(Incarnation)이 되었다(3:16).

   로마서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를 설명한다면, 요한복음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생명(生命)을 드러낸다. 이런 진리는 요한복음에 “믿다”라는 단어가 98회나 나오고 생명과 관련된 단어들(“life, live”)이 55회 나오는 사실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사실 요한복음은 예수의 공식적 재판에 관한 기사를 포함시키지 않을뿐더러 증인도 없이 법적 절차를 밟지 않고 예수를 사형에 처한 일을 말하고 있지만(18:21),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을 놓고 갑론을박하는 재판정의 이미지가 요한복음 전체를 관류하고 있다. 요한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다양한 익명 또는 실명의 개인들(34명)을 증인으로 동원하여 성육하신 하나님에 관한 부정적 또는 긍정적 증언을 싣고 있다(참조 5:31; 8:13).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 1-5장은 개인들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6-10장은 그리스도가 자신에 관하여, 11-20장은 군중들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내놓은 증언들을 부각한다. 

   요한은 사람들이 성육하신 하나님을 믿도록 구체적으로 일곱 증인, 곧 아버지 하나님(5:34,37; 8:18), 아들 자신(8:14; 18:37), 성령(15:26; 16:14), 성경(5:39-46), 침례자 요한(1:7;5:35), 제자들(15:27; 19:35), 그리스도의 일들(5:35; 10:25)을 내세워 결정적으로 증언한다. 또 요한복음은 그분의 일곱 표적(1:19-12:50)과 십자가의 영광(13:1-20:31)을 보고 그분을 인간이 되신 하나님으로 영접하거나 거절하는 개인과 단체의 역사를 면면히 펼쳐 보이고 있다(참조 1:1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성육신의 신비>
“인성을 입으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명상할 때, 우리는 인간의 지성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끝없는 신비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더 경이롭게 보일 것이다. …신성과 인성이 신비스럽게 결합되고, 사람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셨다. 바로 이 연합 안에서 우리는 타락한 인류의 소망을 발견한다. 인성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곧 그 본체의 형상을 본다.” -싸인즈 오브 더 타임즈, 1896. 7. 30.
 
 
 
 
 
 
 
 

누가복음 15:1-10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이 두 비유는 같지 않는 계급들을 대표한 것이다. 잃어버린 양은 자기가 잃어버림이 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 양은 목자와 양 무리에서 떨어져서 자신의 힘으로는 회복할 수 없다. 이 잃어버린 양은 저희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있음을 알면서 고민과 부끄러움과 심한 시험중에 싸여 있는 자들을 대표한다. 잃어버린 은전은 허물과 죄로 잃어버린 바 되었으나 저희의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줄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을 표상한다. 저들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졌으나 그것을 알지 못한다. 저희의 영혼이 위태한 가운데 있으나 저희는 거기에 대하여 의식이 없고 관심도 없다. 이 비유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하여 무관심한 태도를 가진 자라도 하나님의 동정의 사랑을 받을 대상자가 된다는 사실을 가르치셨다. 저들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찾아야 할 대상들이다."(화잇주석, 눅 15:8-10)

 
두 비유는 짝을 이루는 쌍둥이 비유로서 잃어버린 소유를 되찾기 위해 치른 고초와 그것들을 성공적으로 되찾았을 때 누린 기쁨을 강조한다. 첫 번째 비유는 목자의 관심을 강조하며, 따라서 하나님이 보는 영혼의 본질적인 가치를 강조한다. 두 번째 비유는 영혼의 가치를 다른 방식으로 예증한다.
 
 
본문연구

1. 세리와 죄인들의 반응과 달리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은 왜 예수님께 원망을 했는가?(눅 15:3~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이 두 비유에서, 목자와 여인을 통해 하나님의 품성의 어떠한 면들이 나타났는가? (눅 15:3~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두 비유가 가지고 있는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4. 두 비유와 연관시켜 생각해 볼 때 초기교회의 구성원들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었는가? (고전 1:26~2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토의사항

  1.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떻게 찾아오셨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여러분은 자신의 가치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이 정말 가치 있다고 느낀적은 언제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3. 내가 찾아야 할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서로 이야기 해 봅시다.

 
“은혜는 은혜받기에 합당치 못한 인간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태도이다. 우리가 은혜를 찾는 것이 아니고 은혜가 우리를 찾아 왔다. 우리가 은혜를 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에서가 아니고 전혀 가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유일의 이유는 우리에게 그 자비가 크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화잇주석, 눅 15:8-10)
 


1. 모든 세리와 죄인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은 각각 뚜렷하게 구분되는 두 계층으로 볼 수 있다. 때때로 하나의 집단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아마도 “죄인들”에는 창기, 간부(姦夫), 그 밖에 율법을 공공연하게 위반하며 사는 자들뿐만 아니라 랍비들의 전통에 나와 있는 규정에 따라 의를 추구하려는 시늉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엄격한 바리새인들은 또한 랍비들에게 교육받을 특권을 누리지 못한 평민들, 즉 암메 하아레츠(‘amme ha-ares., 문자적으로 “땅의 백성들”)를 존경받을 가치도 없는 “죄인들”로 여겼다. 바리새인이라는 이름 자체가 일반 민중보다 우월한 집단의 일원임을 나타내며, 보통 백성들보다 더 의롭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모든”이라는 말은 예수가 이 지역에서 봉사하는 동안에 가는 곳마다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지역의 “세리들”과 “죄인들”이 몰려들었다는 사실을 나타낼 수 있다. 이러한 관심의 표현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더욱 화나게 했는데, 그들이 이 계층을 멸시함으로 이들이 자기들에게 등을 돌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사회에서 멸시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한 것과 그들의 반응이 종교지도자들을 초조하게 했다(참조 실물교훈, 186).

가까이 나아오니. 본 장에 나오는 비유들이 누가복음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제외하고는 그것들이 주어진 시간이나 장소를 가리키는 표시가 없다. 9:51~19:28은 아마도 AD 30년 늦가을부터 31년 초봄에 있었던 페래아 봉사와 관계된 사건들을 기록한 것 같다. 최소한 15장의 처음 두 비유와 어쩌면 셋째 비유도 페래아의 목초지(실물교훈, 186)에서 동일한 경우에 주어졌다(실물교훈, 192). 이제 십자가 사건이 있기까지는 2개월쯤 남아 있었다. 이 비유들에서 예수는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설명했다.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1절의 “세리와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별도의 두 계층으로 여겨졌다. 이때 여기에 참석한 비평가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나중에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였다.
 
원망하여. 헬라어 디아공귀조(diagogguzo-). 역시 “원망하다”로 번역된 공귀조(gogguzo-)의 강조형태. 이중 몇 사람은 예수가 가는 곳마다 미행하고 듣고 감시하여 보고하도록 하기 위해 산헤드린이 파견한 염탐꾼들이었다. 자신들을 의의 전형(典型)으로 여긴 자들이 예수의 면전에서 불편함을 느낀 반면, 의에 대해 아무런 주장도 하지 않았던 자들이 구세주를 가깝게 느꼈다는 것은 패러독스(paradox)이다(실물교훈, 186). 틀림없이 이러한 차이를 만든 것은 전자의 위선과 후자의 가식 없음이었다(참조 눅 18:9~14). 전자는 예수가 베푸는 축복의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후자는 그 필요를 깨닫고 그것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전자는 자신의 의에 만족했고, 후자는 자신에게 내세울 만한 의가 없음을 알았다. 우리가 예수 앞에서 어떻게 느끼는지를 자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죄인을 영접하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죄인들이라고 여긴 사람들을 거절했으나 예수는 환영했다. 이전 경우에도 예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회개시키러 왔다’는 선언으로써 이 비난에 응수했다(참조 막 2:17 주석). 여기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그런 사람들과 교제하고자 한 것은 죄인들의 생활 방식이 그에게 맞았기 때문이라고 넌지시 비추었다. 예수가 죄는 미워했으나 죄인을 사랑한 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죄를 품고 있으면서도 죄인을 증오했다. 예수가 죄인들을 “사랑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비판자들은, 예수가 “죄인들”이 범한 죄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자 했다(참조 15:1 주석). 예수는 고위계층에게 버림받은 이 사람들보다 사회적으로 우월하다는 인상을 전혀 풍기지 않았다. 그는 종교지도자들보다는 “죄인들”과 교제하기를 더 좋아한 것처럼 보였다. 예수는 이 “죄인들”에게는 격려하는 말만 했고, 독선적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책망과 정죄하는 말만 했다(참 막 3:4; 눅 14:4 주석; 눅 14:3~6, 11). 예수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에 대한 유대 지도자들이 불평한 다른 언급을 보려면 눅 7:34, 37을 참조하라. 
 
3. 이 비유. 예수는 또 다른 경우와 목적을 위해 또 다른 유사한 비유(참조 마 18:12~14)를 주었다. 페래아 봉사 기간에 예수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과 사회에서 멸시받는 계층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것으로 보이며(참조 14:21 주석), 이 기간에 그의 가르침은 대부분 그들을 염두에 두고 주어졌다. 15장의 비유들은 사람들이 흔히 멸시하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관심,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하나님의 노력, 그리고 그들이 그분의 호소에 응답할 때 느끼는 그분의 기쁨을 강조한다. 주목해야 할 점은, 세 비유가 죄와 구원 문제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보여 주며 어느 것도 그 자체로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각 비유에서 잃어버린 것이 발견되고 회복된다. 각 경우에서 예수는 죄인들을 향한 자신의 태도와 그들을 위해 기울인 노력을 해명하고 있다. 처음 두 비유는 짝을 이루는 쌍둥이 비유로서 잃어버린 소유를 되찾기 위해 치른 고초와 그것들을 성공적으로 되찾았을 때 누린 기쁨을 강조한다. 첫 번째 비유는 목자의 관심을 강조하며, 따라서 하나님이 보는 영혼의 본질적인 가치를 강조한다. 두 번째 비유는 영혼의 가치를 다른 방식으로 예증한다. 세 번째 비유는 탕자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하는 과정을 예증하며 강조한다. 예수는 이 경우처럼 종종 비유를 사용하여 질문이나 비판에 대답했다. 
 
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페래아의 고지에서 양을 치는 것은 흔한 직업이었고, 따라서 여기에 참석한 청중 가운데 많은 사람이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섰던 때를 상기했을 것이다. 예수가 들려준 비유들은 대부분 청중들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지식에 기초하였다(참조 제9권, 113).
 
그중에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잃은 것이 비교적 작은 문제로 보일지 모르나, 양 무리의 주인에게는 하나를 잃은 것도 중대한 관심사였다(참조 요 10:11). 동방의 목자는 일반적으로 모든 양을 개별적으로 알았고, 단순히 무리 중 한 마리 양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양 하나 하나의 유익을 위해서도 보살폈다. 그뿐 아니라, 양 한 마리의 손실로도 수입에 상당한 차질이 생길 수 있었다. 비유에서 양이 잃어버린 바 되었다는 사실은 양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에서 기인하였고, 따라서 일단 길을 잃으면 돌아갈 길을 찾는 데는 완전히 무력한 것으로 보였다. 양은 잃어버린 바 된 것을 깨달았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였다. 여기서 길 잃은 한 마리 양은 한 사람의 죄인과 잃어버린 바 된 세상을 모두 대표한다(실물교훈, 190). 
이 비유는 예수가 범죄한 이 세상을 위하여 죽은 것처럼(참조 눅 15:7 주석), 단 한 명의 죄인만 있었다 해도 그를 위해 목숨을 바쳤을 것임을 가르친다(참조 요 3:16 주석).
 
들. 헬라어 에레모스(ere-mos). “사막”, “광야.” 에레모스가 형용사로 쓰이면 “황폐한”, “고독한” 또는 “외로운”을 뜻한다. 이 단어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지역(참조 1:80 주석)을 가리키며, 따라서 보통 경작되지 않거나 경작할 수도 없는 땅, 곧 “황야”라는 뜻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일반적인 목초지, 구릉지, 고지의 계곡, 페래아의 협곡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들”은 아마도 각별하게 위험한 장소는 아니며, 따라서 아흔아홉 마리 양을 “들”에 두었다는 말이 소홀함이나 무심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태가 기록한 비유에는 목자가 양을, 문자적으로 “산에”(참조 마 18:12 주석) 남겨두었다고 되어 있다. 
 
그 잃은 것을…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비유에 나타난 것과 달리 목자가 양을 찾아다니지 않았다면, 양은 아마 잃어버린 채로 방치되었을 것이다. 잃은 양을 찾아 양떼와 우리 안으로 들이기 위해서는 목자가 솔선해야 한다. 구원의 효력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찾는 데 있다. 우리 스스로 그분을 찾도록 내버려졌다면 그분을 발견하지 못한 채 영원토록 찾아 헤매야 했을지도 모른다. 기독교 신앙을 단지 하나님을 찾기 위한 인간의 시도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생각은 인간을 찾는 하나님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요점을 완전히 놓쳐버리는 것이다(참조 요 3:16 주석; 마 1:21; 대하 16:9).
 
6. 나와 함께 즐기자. 이 가련한 짐승도 감사히 여겼을 것이지만 양의 기쁨보다 목자의 기쁨이 무한히 컸다. 
 
7.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로 하여금 단 한 명의 죄인을 위해서라도 위대한 희생을 치르도록 이끌었을 것이다(실물교훈 187, 196,; 참조 요 3:16 주석). 여기의 “죄인”과 1절의 “죄인들” 사이에 있는 미묘한 연관성을 주목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회개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롬 5:8)도 그 사랑은 우리의 것이었다. 우리를 회개로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길이 참으심에 나타난 “선하심”이다(롬 2:4; 참조 빌 2:13).
 
하늘에서는…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신성한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여러 가지 다른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러한 방식으로 자주 사용되는 단어가 “하늘”이다(참조 12:20 주석). 랍비들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먼저 사랑하고 관심을 기울이기 전에 그들이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십중팔구 사단이 그들에게 불어넣은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순종하는 자들에게만 애정과 축복을 베풀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것들을 거두어 가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는 탕자의 비유(11~32)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설명하고자 한다. 사실, 세상을 위한 예수의 사명의 모든 목적은, 그가 아버지를 나타내 보이기 위해 왔다고 한 진술(참조 마 1:23 주석)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10)라는 표현과 비교해 보라. 
 
의인 (just persons). 이 표현은 여기에 나타나 보이는 대로 옳다. 그렇지만 사실 예수는 여기서 풍자적으로 말한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의로운 상태에 있다고 자랑하였고(18:11, 12), 따라서 예수가 “의인들”을 언급했을 때 당연히 자신들은 그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참조 요 3:4 주석). 말하자면, 여기서 논지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예수는 그들의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의롭다면, 바로 그러한 사실에 의거하여 그들이 경건한 체 하면서 멸시한 “죄인들”은 예수가 베푸는 사랑과 돌보심을 필요로 하는 자들임이 입증되었다. 따라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비판적인 태도는 부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예수가 비슷한 경우에 제시한 또 다른 대답에 대해서는 눅 5:31, 32을 참조하라. 
 
8. 어느 여자가. 이 비유를 하게 된 배경과 잃은 양 및 잃은 아들의 비유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3, 4절 주석을 참조하라. 분명히 잃은 양의 비유가 남자 청중에게 전달된 것이라면, 이 비유는 특별히 여자 청중을 위해 주어졌을 것이다. 예수는 특히 여자들의 흥미를 끄는 예증을 자주 사용하였다. 잃은 양의 비유에서, 주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양에 대한 동정심과 함께 자신의 재정적 이득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동정적인 요인이 없다. 은전을 잃어버린 것은 그녀 자신의 부주의함 때문이었고, 그것을 되찾고자 하는 그녀의 바람은 전적으로 그것에 대한 그녀의 개인적인 관심에 기초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길을 잃어버린 책임이 양에게 있었다. 그러나 은전은 자신이 잃어버린바 된 것에 대한 책임이 없다. 이 비유는 영혼의 본질적인 가치, 그리고 하나님이 볼 때 잃어버린 죄인의 가치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분이 “부지런히 찾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드라크마. 헬라어 드라크마이(drachmai). 그리스도 당시의 헬라식 1드라크메(drachme-)는 은(銀) 3.56그램(0.1145온스)이었으므로, 농사꾼의 하루 품삯인 로마식 1데나리온과 거의 비슷했다. 10이라는 수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10은 어림수로 종종 나타난다(삼상 1:8; 전 7:19; 사 5:10; 암 6:9). 예수도 여러 비유에 이 수를 사용했다(참 마 25:1, 28; 눅 19:13, 16, 17). 열 개의 은전은 여자의 결혼지참금 중 일부였을지도 모르며, 따라서 그 여자의 예금으로 볼 수 있다. 아마도 그 여자가 집을 청소하면서 그것들을 옮기거나 살펴보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를 잃으면. 그녀의 부주의가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은전은 자기가 잃어버린 바 된 것을 몰랐다. 양처럼 산에서나 탕자처럼 “먼 나라”에서가 아니고 집안에서 잃어버린 바 되었다. 
 
등불. 일반적으로 동방의 주택은 방이 하나밖에 없었으며, 출입문이나 작은 격자 창문들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자연 채광(採光)이 될 수 없었다. 낮이라고 해도 그런 물건을 찾기 위해서는 그 여자에게 인공적인 빛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집을 쓸며.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동방 주택들은, 특히 시골 지역과 촌락의 경우 흙바닥으로 되어 있다. 이런 “바닥”으로 된 어두운 방안에서는 동전을 잃어버리기가 십상이지만 다시 찾기는 어려웠다. 아마도 부지런히 찾아야 동전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9. 나와 함께 즐기자. 기쁨을 다른 사람과 나누면 그것을 나눠 준 사람의 마음속에서 증강된다. 되찾을 가망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던 가치 있는 물건을 다시 찾은 경험을 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 여자의 기쁨을 이해할 수 있다(참조 롬 12:15). 그러나 세상이 주는 어떤 기쁨도 잃어버린 죄인을 찾아 예수에게 데려올 때 얻는 기쁨과는 비견될 수 없다.

 
 

맺음말: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

 

 

● 연구 범위

요 21; 요 11:9, 10; 요 8:42-44; 요 4:46-54; 딤후 2. 3:16; 요 15:1-11

♣ 학습목표

  • 깨닫기 : 우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 느끼기 : 하나님의 빛은 무엇보다 성경 말씀을 믿을 때에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 행하기 : 사람의 견해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빛을 따라 자신을 순복하기로 선택한다.

 

  1. 갈릴리에서의 재회
    1. 요한복음 21:1-19을 읽어 보라. 이 구절에는 특히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겸비에 관한 어떤 중요한 진리가 나타나 있는가?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
      요한복음 21:1-19

  2. 오직 예수를 바라보라
    1. 요한복음 21:20-22을 읽어 보라. 어떤 궁금함이 베드로를 잘못된 길로 이끌었는가? 예수님은 그것을 어떻게 바로잡으셨는가?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
      요한복음 21:20-22

    2. 요한복음 21:23-25을 읽어 보라.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오해되었는가? 이에 대해 요한은 그것을 어떻게 바로잡았는가?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이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줄 아노라 '
      요한복음 21:23-25

  3. 빛과 어둠
    1. 요한복음 1:4-10, 요한복음 3:19-21, 요한복음 5:35, 요한복음 8:12, 요한복음 9:5; 요한복음 11:9, 10; 요한복음 12:35을 읽어 보라. 여기에는 어떤 큰 대조가 나타나며, 이 대조가 진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기초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요한복음 1:4-10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
      요한복음 3:19-21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
      요한복음 5:35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요한복음 8:12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
      요한복음 9: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 '
      요한복음 11:9-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
      요한복음 12:35

    2. 요한복음 8:42-44을 읽어 보라.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믿음의 근거로 삼았던 거짓된 기초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묘사하시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
      요한복음 8:42-44

  4. “위로부터”의 신학인가 “아래로부터”의 신학인가
    1. 요한복음 4:46-54을 읽어 보라. 그 관원은 어떤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으며, 그에게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요한복음 4:46-54

  5. 예수 안에 거함
    1. 요한복음 12:32을 읽어 보라. 이 놀라운 진술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어떤 방식으로 묘사하는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
      요한복음 12:32

    2. 요한복음 15:1-11을 읽어 보라. 영적 성장과 건강의 비결은 무엇인가?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
      요한복음 15:1-11
 
 

 

제 1과 길을 보여주는 표적들 https://act.kr/40
제 2과 신성의 증거들 https://act.kr/41
제 3과 배경이야기: 서론 https://act.kr/42
제 4과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말하는 증인들 https://act.kr/43
제 5과 사마리아인의 증언 https://act.kr/44
제 6과 예수에 대한 더 많은 증언들 https://act.kr/45
제 7과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https://act.kr/46
제 8과 구약 예언의 성취 https://act.kr/47
제 9과 생명의 근원 https://act.kr/48
제 10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https://act.kr/49
제 11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https://act.kr/50
제 12과 영광의 때: 십자가와 부활 https://act.kr/51
제 13과 맺음말: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 https://act.kr/52

+ Recent posts